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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배임죄의 기준…대수술이 필요하다 / 변호사 홍원의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9. 20. 22:04

[경향마당]아무도 모르는 배임죄의 기준…대수술이 필요하다

홍원의 | 변호사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한 대기업 임원은 “경영상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손실을 보면 배임죄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난다”고 말했다. 법해석에 따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업기회를 잃어버리는 일도 생긴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배임죄와 유사한 법 조항을 가진 곳은 일본과 독일밖에 없다. 그나마 두 국가에선 우리나라와 달리 손해 그 자체보다 고의성과 목적성을 배임죄 성립 기준으로 엄격히 다루며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에 대한 확실한 물적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기소도 하지 못한다. 대검찰청 범죄분석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4년까지 검찰이 배임죄로 기소한 건수가 연간 1500건에 이른다. 최근 5년간 일본의 배임죄 기소건수가 46건에 불과한 것과 비교해 봤을 때 엄청난 차이다. 단순히 국가 간 기업의 도덕성 차이로 설명될 수 없는 수치이며, 우리나라 배임죄의 부당함이 단적으로 드러난 수치다. 사법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한 기업인을 배임죄로 기소하고 재판까지 끌고 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배임죄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배임죄는 기업을 자신의 사유물로 착각하는 일부 기업인의 방만한 경영을 제어할 수단만으로 반드시 존재의 가치가 있다. 다만 모호한 기준과 과도한 처벌로 기업들의 과감한 투자와 경영 판단을 가능케 하는 기업 정신까지 저해해선 안된다.

세계 최고 수준의 혁신기업들이 즐비한 미국은 명목상 배임죄는 없지만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경영자를 처벌하는 조항이 있다. 하지만 ‘경영판단의 원칙’에 의거, 이해관계 없이 충분한 정보에 근거해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면 회사에 금전적인 손해를 입혀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신용을 엄격히 따지면서도 실패에 너그러운 미국이 배임죄 때문에 움츠러드는 한국보다 공격적인 투자와 혁신을 통해 성공행진을 이어가는 건 당연지사다.

우리나라 현행법상 배임죄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경영의 신’이 되어 모든 결정을 완벽하게 내리거나 리스크가 있는 사업이나 경영상 결정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배임죄는 대수술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손해를 봤지만 최선의 선택을 했던 기업인들이 배임죄에 얽매여 새로운 도전을 포기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배임죄에 대한 명확한 기준 확립을 미룬다면 이는 국가와 사법당국이 저지르는 배임죄에 대한 배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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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402&artid=201609192056005#csidx44924af744d573f9407c2bbddf03b9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