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21세기 ‘애절양(哀絶陽)’
법인 스님 대흥사 일지암 주지
간혹 세속이 한가하면 산중이 번잡하다. 이번 추석 연휴가 그랬다. 긴 연휴를 맞아 이런저런 사정을 가진 이들, 그러니까 나와 비슷한 처지의 독신 남녀들과 취업 준비생들이 산사를 찾아왔다.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에 들어야 할 걱정 어린 덕담이 얼마나 부담스러울지 짐작이 갔다. 그러니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버려 두었다. 저마다 홀로 방에서 숲에서 조용히 마음을 고르는 동안, 나는 책 한 권을 꺼내 읽었다. 다산의 시 ‘애절양(哀絶陽)’이 새삼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 우는 소리/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출정 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 해도/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네.”
다산이 이 시를 지은 사연은 이렇다. 1803년 갈밭마을 어느 집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런데 태어난 지 사흘 된 아이가 군첩에 오르고 마을 이정은 못 바친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 갔다. 그러자 아이의 아비는 “내가 이 물건 때문에 곤액을 받는구나”라고 울부짖으며 자신의 남근을 잘랐다. 아내가 피가 뚝뚝 흐르는 남편의 남근을 가지고 관청에 가 울며 호소하였으나 문지기가 매정하게 막았다. 죽은 사람과 갓난아이에게도 세금을 물릴 만큼 부패하고 부조리한 조선후기의 참담한 모습이다.
애절양! 사내는 자신의 남근과 함께 무엇을 자른 것인가. 먹고살기 힘든 세상,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이 더 이상 내려앉을 곳 없이 추락한 세상에 희망의 끈을 잘라 버린 것이다. 희망이 사라지는 세상은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고용불안과 청년실업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루에 38명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다. 청춘들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를 넘어 구포세대를 자조하며 절망한다. 결혼하지 않는, 결혼하지 못하는, 그리하여 출산하지 못하는 시대가 바로 21세기의 애절양이다. 오늘의 애절양은 바로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민생에 있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가 기획한 인터뷰집 <입에 풀칠도 못하는 이들에게 고함>에 내가 쓴 서문의 일부이다.
“‘가난이 극한에 이르면 사람들은 스스로 비굴해지고 다른 이에게 멸시를 받게 된다.’ 석가모니 붓다의 발언입니다. 붓다의 관심과 고뇌가 생로병사라는 존재론적 범주에만 갇혀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붓다의 시대는 카스트라는 이름의 불평등한 신분 차별이 공고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특히 불가촉천민인 하리잔과는 밥을 함께 먹지도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서로 마주 보거나 밥을 나누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내면화되고 사회화되었음을 뜻합니다. 인간 군상의 서글픈 무지이며 폭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습에 붓다는 작은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붓다와 제자들은 부자와 빈민, 계급,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먹고 이야기했습니다. 밥을 나누면서 연민과 자애의 마음을 공감하고 교감했습니다.
밥은 평등이고 존엄입니다. 민생의 지중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몸과 정신은 높고 낮음이나 우열로 차별되지 않습니다. 밥은 몸과 정신이 깃든 생명의 바탕입니다. 국민의 생활과 생계, 민생을 보호해야 할 소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단지 통계와 수치로 민생을 논하는 것은 근원적 해결이 아닐뿐더러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민생 회복은 곧 평등과 존엄, 상생이라는 생명의 근원적 질서를 복구하는 출발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길을 잃고 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차별과 소외, 격차와 절망의 실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새삼 맹자의 진단을 떠올립니다. ‘생업이 없으면서 착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오직 선비라야 가능하다. 백성이 생업이 없으면 그로 인해 착한 마음이 없어진다.’ 항산(恒産)이 되어야 항심(恒心)을 이룰 수 있다는 그의 선언은 오늘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책의 인터뷰에 참여한 <소수의견>의 젊은 작가 손아람의 물음 또한 21세기의 애절양이다. 엄중하게 귀를 기울여 보자. “잠시 청년들에게 물어주십시오. 줄줄이 늘어선 초록색의 빈 병으로 어지럽혀진 대학가의 술집 취객들에게, 외로움을 둘 공간조차 없이 비좁은 고시원의 세입자에게, 자정의 어둠을 몇 달째 지켜온 무표정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이 나라에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주십시오. 그들은 서슴없이 멸망을 입에 담을 것입니다. 감히 멸망을 말하지만 악의조차 감지되지 않는 평온한 목소리에 당신들은 경악해야 합니다.” 한가위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정부와 국회는 민생 문제를 승부를 가리는 정쟁으로 삼지 말고 함께 풀어야 할 화두로 삼아 달라는 기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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