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 아래, 초록을 아니 보내려 ‘제주의 숲’
글·사진 정유미 기자 youme@kyunghyang.com제주는 섬의 생김새부터 돌 하나까지 각진 것이 없다. 대지는 둥글고 하늘은 맑고 바다는 투명하다. 무엇보다 부산스럽지 않아 좋다. 여기에다 가을 제주는 또 하나의 선물을 내어 준다. 숲이다. 여름 숲도 좋지만 아무래도 습기와 더위 때문에 가을 숲만은 못하다. 제주의 원시림은 가을이 와도 초록이다. 삽상한 바람을 맞으며 녹음 속을 거니는 맛은 지금이 제격이다.
제주의 숲은 신비를 머금고 있다. 사람들이 들어가는 숲이 아니라 숲이 사람들을 훅~ 하고 빨아들인다. 곶자왈 숲이 그런 숲이다. 곰삭은 시간을 품은 무성한 숲이 뿜어내는 영기와 비릿한 향기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가을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끼면 더욱 환상적이다. 제주에는 올레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옆에 제주의 또 다른 매혹, 가을 숲이 있다.
■마법의 숲
“곶자왈요? 숲을 뜻하는 ‘곶’과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덤불같이 어수선한 곳을 의미하는 ‘자왈’을 합친 제주도 말입니다.”
한국관광공사 박영규 제주지사장은 “사시사철 푸르른 가을의 곶자왈은 온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게 한다”며 “제주에 왔다면 꼭 한번은 곶자왈을 찾으라”고 말했다. 수도 없이 제주를 찾았으면서도 원시림의 속살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는 기자한테 들으라는 소리 같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제주 곶자왈 도립공원’으로 향했다. 곶자왈은 나무와 덤불이 무성했던 쓸모없는 불모지로 여겨졌다. 그러다 제주 국제 자유도시(JDC)가 지난해 7월 도립공원으로 개장했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겨우 1년 된 ‘젊은’ 공원인 셈이다.
입구로 들어서자 상록 활엽수림이 빼곡했다. 뿌리는 하나인데 기둥은 열개, 스무개까지 덤불을 이루는 ‘종가시’ 나무가 끝없이 펼쳐졌다. 종가시나무는 어릴 때 자르면 새순이 여러 기둥으로 자란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들이 젖을 달라고 울부짖듯 초록 옷을 입은 종가시나무가 두 팔을 쭉쭉 하늘로 뻗고 있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 같다.
나무들이 다 신기해서 발걸음을 쉽게 옮길 수가 없었다. 왕초피나무는 도깨비방망이처럼 울퉁불퉁 나뭇가지에 혹이 붙어 있고, 쥐똥나무는 말 그대로 검고 작았다. 콩짜개덩굴은 정말 콩을 반으로 짜갠(반으로 잘랐다는 사투리) 것 같다. 이끼들이 푸른 물방울을 토해내고, 습기가 없으면 말라 죽었을 착생식물들이 원시림을 감싸고 있다.
그늘을 헤치고 떨어지는 햇빛의 감도만큼 숲 속의 정체가 희미하게 또는 선명하게 드러났다. 가을 고사리와 몸에 좋은 꾸지뽕, 블루베리 같은 으름덩굴을 지나자 넓고 푸른 하늘이 환하게 열렸다.
예덕나무 앞에서는 한참을 머물렀다. 오래된 숲에서만 볼 수 있는 서어나무와 비슷한 예덕나무는 원래 곧고 길게 뻗는 나무라고 한다. 하지만 상록 활엽수의 위세에 눌려 나뭇가지가 휘어졌다. 힘든 세상에서 살아남겠다고 발버둥 치는 인간군상처럼 한 줄기 빛을 마시기 위해 하늘로 목을 쳐들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곶자왈 도립공원은 ‘마법의 성’이다. 용암으로 덮인 대지가 부서지고 잘게 으스러지고 그곳에 나무가 자라고 숲이 생겼다. 숲 사이로 아버지처럼 든든한 햇살이 부서지는가 싶으면 어머니처럼 포근한 그늘이 내린다.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힐 무렵 높이 15m의 전망대에 닿는다. 숲을 내려다보니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원시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희귀 동식물이 둥지를 튼 생태계의 보물창고가 된 것도 다 사람이 멀리했기 때문이다. 곶자왈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북방한계 식물과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고 있다. 녹나무, 아왜나무, 센달나무 등 상록 활엽수림과 때죽나무, 곰의말채, 이나무 등 낙엽 활엽수림들의 이름이 귀에는 낯설었지만 애정을 갖고 바라보니 조금씩 눈에 익숙해졌다.
■신(神)들의 숲
제주에는 신화가 많다. 무속신앙이 광범위하게 퍼져 무속신은 셀 수조차 없다.
눈보라가 치고 폭풍이 불면 옴짝달싹 못하고 갇혀 살아야 하는 섬이기에 믿고 의지할 곳이 신밖에 없을 터다.
제주시 구좌읍에 있는 송당마을은 ‘소원 비는 마을’로도 통한다. 900년 역사를 가진 마을인데 입구에 들어서면 진짜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진다. 무형문화재 제5호인 금백조신당 당굿이 계승되고 있고 당오름, 안돌오름, 아부오름, 거슨세미오름 등 18개 오름이 몰려있어 ‘오름의 본고장’으로도 불린다. 당오름은 당악(堂岳)이라고도 하는데 신당(神堂)이 위치한 오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바다가 풍요를 주기도 했지만 거친 폭풍이 몰아칠 때면 마을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두 손을 모아야 했다. 이날도 신당의 본향당 앞에는 기도를 올리는 어머니들이 보였다. 송당마을의 숲도 꽤 넓고 크다. 숲으로 들어서니 참나무와 소나무 등 쭉쭉 뻗은 나무들이 시야를 가렸다가 열기를 반복한다.
물안개가 피어나듯 흐릿한 숲 사이로 연인들이 걸어가는 게 보였다. 이곳에서 남녀가 손을 잡고 걸으면 백년가약의 연을 맺는다고 하니 두 사람도 부디 그리되기를….
하늘 한번 올려다보고 숲 한번 둘러보며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다 보니 오솔길이 이어진다. 습기를 머금은 나뭇잎들이 햇살을 받아 토해내는 빛이 장관이다. 너른 건천과 삼나무 숲, 푸른 나무가 우거진 원시림을 지나고 나니 등에 땀이 흥건히 배었다.
송당마을은 당오름, 괭이모루, 마을길을 거치는 2시간 내외의 짧은 탐방과 안돌오름과 밧돌오름까지 돌고 오는 3시간 내외의 긴 탐방(9.8㎞)이 있다. 제주의 숲은 부산스럽지 않으면서 오래된 벗처럼 그리워지는 은근함을 가졌다.
180만년 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제주의 숲속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제주 중문 예래마을에 있는 히든 클리프 호텔 & 네이쳐(www.hiddencliff.kr)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길들여지지 않은 제주를 선물한다. 끓어오르던 불덩이가 차가운 계곡을 만나 움츠러든 화산 숲이 신비하고 매력적이다.
히든 클리프는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한국 반딧불이연구회 1호 반딧불이 보호지역, 엉또폭포, 논짓물, 깻깍 주상절리, 예래천 등 제주의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있어서 그 앞에 서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사계절 맑은 온수풀은 국내에서 가장 긴데 47m나 된다. 계곡 바닥에서 35m 위에 있어 마치 천상의 숲에서 수영을 하는 듯하다.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여유롭게 머무를 수 있도록 키즈풀도 있다. 패밀리 스위트도 16개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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