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재화의 생산양식이 사회의 형식을 지배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담은 책? / 경향신문에서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1. 14:27

[책과 삶]에너지 얻는 방식이 시대의 가치관을 결정했다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ㆍ가치관의 탄생
ㆍ이언 모리스 지음·이재경 옮김 |반니 | 280쪽| 2만2000원

증기기관 발명으로 인류는 화석연료라는 거대한 에너지원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화석연료는 사회체제는 물론 사람들의 가치관까지 바꿔놓았다.

증기기관 발명으로 인류는 화석연료라는 거대한 에너지원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화석연료는 사회체제는 물론 사람들의 가치관까지 바꿔놓았다.

같은 사람이라도 신분이 달라 평등하지 않고, 때로 살인조차 죄악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만고불변의 가치는 없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가치관도 진화한다.

<문명의 척도>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등으로 잘 알려진 문명사학자 이언 모리스가 인류 가치관의 변화를 설명하는 대담한 가설을 내놓았다. 그가 보기에 인류의 가치관은 에너지 획득 방식에 따라 변화했다. 지난 2만년 인류 역사는 에너지 획득 방식을 기준으로 수렵채집과 농경, 화석연료 이용이라는 3단계로 구분 가능하다. 이들 각 단계는 특정한 사회체제를 구축했고, 각 사회체제는 다시 체제에 걸맞은 지배적인 가치관을 만들어 냈다. 에너지라는 ‘물질’의 힘이 시대별로 득세하는 가치관을 결정 혹은 한정한다. 그 결정 과정은 자연 선택과 유사해 특정 가치관이 다른 가치관을 몰아내고 독점적인 위치를 가지게 된다. 저자의 논지는 곧 진화론과 유물론의 ‘콜라보’인 셈이다.

[책과 삶]에너지 얻는 방식이 시대의 가치관을 결정했다

수렵채집사회는 자산 공유를 사회규범으로 삼았고,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았던 ‘황금시대’였지만 매우 폭력적인 사회이기도 했다. 농경사회는 역사상 부의 불균형이 가장 심각했고 신분과 성별에 따른 위계도 엄격했지만, 폭력만큼은 앞선 시대보다 억제하는 경향을 띠었다. 산업혁명 이후 오늘날까지를 아우르는 화석연료사회는 정치적·성별 위계에는 부정적이지만 부의 불평등에는 상당히 관대하며, 폭력에는 앞서 그 어떤 사회보다도 단호하게 반대하는 특징을 보인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명쾌하다. 수렵채집사회에서 사람들은 짐승의 동선과 계절별 열매 산지를 따라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다. 떠돌이 생활은 부의 축적을 어렵게 했고, 경제적 불평이 나타날 여지도 적었다. 식량 비축이 어려워 그때그때 다른 이와 나누는 게 보편적이었다. 대세에 따르지 않는 이는 조롱과 따돌림을 당했고, 때로는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농경의 발명 이후 상황은 크게 변했다. 부의 비축이 쉬워지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됐다. 정착생활로 사회 구조가 커지면서 신분과 위계 질서는 당연한 것이 되었고 대신 폭력은 억제됐다. 수렵채집사회에서 사람들은 폭력을 피해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었지만 농경민들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화석연료사회에 이르러 인류가 획득할 수 있는 에너지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거대한 시장이 형성됐고, 상품이 쏟아져 나왔다. 농경사회에서는 체제 지탱을 위해 농장에서 부릴 노예가 필요했지만, 이젠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고 임금을 받아 상품을 소비하는 자유로운 노동자가 더 중요해졌다. 신분제가 무너진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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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 가치관은 곧잘 새로운 가치관과 충돌한다.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주장한 말랄라 유사프자이에 대한 탈레반의 암살 미수 사건이 그 사례다. 유사프자이가 오늘날의 화석연료사회 가치관을 추구한다면 탈레반, 이슬람 무장단체 보코하람은 농경사회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저자는 “농경사회였다면 탈레반과 보코하람은 돌출행동이나 판단미숙을 지적당할 수는 있어도 사악한 무리로 취급받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탈레반식 가치관을 필요로 했던 시대는 물러가고 있다. “시대의 필요가 생각을 정한다”는 저자의 논지를 따르면 탈레반과 같이 과거의 가치관을 고수하는 소수도 결국은 소멸하고 말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강력한 환원주의다. 2만년 역사를 3개의 사회체제와 3개의 가치관으로 도식화하는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숱한 예외 사례들이 떠오른다. 저자의 논지가 사실은 각 사회의 지배세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이런 의문들은 뒤이어 나오는 각각의 논평들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비평이야말로 가장 진정성 있는 칭찬”이라고 믿는 저자는 비판자들을 위해 책 후반부의 4개장을 준비해 두었다. 이름 있는 세 명의 학자와 한 명의 소설가가 각자의 관점에 따라 저자의 논지를 비판한다. 마지막 10장은 다시 저자의 몫이다. 저자는 논평자들의 지적을 반박하며 자신의 주장을 강화한다. ‘나의 견해는 언제나 옳다(My Correct Views on Everything)’. 마지막 10장에 붙은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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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609301912035#csidx9fa9899d63c2ab68746bea2f9f97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