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박정희 시대, 문학과 정치권력의 충돌
박정희 정권 18년은 그 출발이 5·16 군사쿠데타였으므로 태생적으로 국민적 동의보다 폭력의 지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감시와 통제는 항시적인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시대의 ‘노골적인 불법’에 비하면 합리적으로 개선된 측면도 있었으니, 언론과 야당이 힘을 쓰던 1960년대 전반기에는 특히 그러했다. 4·19 민중항쟁에서 얻은 학습효과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따라서 “5·16은 4·19의 계승이다”라는 초창기 군사정부의 주장은 아주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학원과 종교계 및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1950년대의 억압적 분위기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자율과 자유가 얼마간 살아나고 있었다.
상황은 1960년대 중반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계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1964년 봄에는 대학생들의 격렬한 데모가 벌어졌고, 이듬해 여름에는 한일협정의 국회 비준을 반대하는 운동이 온 나라를 달구었다. 이런 가운데 1965년 7월9일 박종화·양주동·이헌구·박영준·황순원·박두진·조지훈 등 주요 문인 82명이 “한일조약의 즉각 파기와 국회 비준 거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이어서 사흘 뒤에는 이들 문인을 포함한 재경(在京) 교수 354명이 비슷한 요지의 선언문을 내놓았다. 아마 이것은 휴전 이후 최초로 이루어진 문인과 지식인들의 집단적 정치의사 표시일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투쟁의 고조에 때맞춰 1965년 2월4일 영화감독 이만희가 영화 <7인의 여(女)포로> 때문에, 그리고 7월7일에는 작가 남정현이 단편소설 <분지>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곧이어 7월14일에는 유현목 감독이 세미나에서 ‘은막의 자유’에 관해 발표한 내용 때문에 입건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일련의 사태가 문학예술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계획적인 탄압이라는 것은 너무도 상식적인 추론일 것이다.
■소설 <분지>,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다
소설 <분지>가 1965년 ‘현대문학’ 3월호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이 작품은 문단 바깥의 주목을 끌지 않았다. 그런데 잡지 발행 다섯 달쯤 지난 뒤 중앙정보부는 돌연 <분지>가 “북괴의 반미선전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작가 남정현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조국통일’(1965년 5월8일)에 작품이 전재됐다는 사실도 밝혔는데, 다행히 작가는 법원의 구속적부 심사로 풀려났다. 하지만 검찰의 조사과정은 질기고 악랄했다. “2~3일에 한 번씩, 혹은 일주일 간격으로, 혹은 10여일 단위로 나를 불러내서는 심문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하루 종일 앉혀만 놓았다가 해가 떨어지면 그냥 돌려보내는 적도 많았다.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후일 작가가 회고했듯이 검찰은 이런 식으로 1년여를 끌다가 1966년 7월에야 기소했다.
열 달 가까이 진행된 <분지> 1심 공판은 검찰과 변호인 간의 불꽃 튀는 논전과 양측 증인들의 상반된 증언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법률 조문 속에서가 아닌 실제 현실에서 어떤 모양으로 얼마나 허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 나라를 지배하는 힘의 최종적 근원이 어디인지 보여주었다. 그런 점에서 <분지> 재판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하나의 시금석이었다.
결심공판에서 검사는 그동안의 모든 합리적인 반론에도 불구하고 “반미사상 고취와 계급의식 강조”의 증거가 뚜렷하다며 법정 최고형인 7년을 구형했고, 판사는 ‘선고유예’라는 애매한 판결로 쟁점을 피해나갔다.
사법적 논란을 떠나 <분지>가 문학적으로 얼마나 높은 수준의 성취에 이르렀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물론 제대로 된 문학적 형상화를 위해서는 ‘올바른’ 현실인식의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때 ‘올바르다’는 것은 교과서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분지>라는 작품을 앞에 놓고 구체적으로 따져볼 때 거기 내재된 현실인식이 한국 사회의 어떤 ‘근본적 금기’에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과장과 왜곡, 비유와 풍자 같은 ‘간접화’의 기법을 동원해 일종의 ‘정치적 우화’를 창작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5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남한사회의 상투적 통념에 대한 도전의 의미를 잃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는 문학
한일협정 비준, 월남 파병, 대외차관 등으로 마련한 자금을 기반으로 ‘압축적’ 경제성장을 밀고나간 박정희는 차츰 딴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1969년의 3선개헌과 1972년의 유신 선포 및 1974년부터의 잇단 긴급조치 발동은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단계적 폐기이고 파쇼적 독재체제의 수립이었다. 압제의 강화에 따른 각계각층의 저항운동이 점점 더 거세진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국문인협회 같은 관변단체들의 엇박자에도 불구하고 이제 문인은 민주화세력의 주요한 일부가 되었다.
1971년 4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결성된 재야지식인 운동단체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였다. 선언문에 서명한 60명 가운데 문인은 박두진 시인을 비롯한 12명으로 상당한 비중이었고, 소설가 이호철은 협의회의 운영위원 역할도 맡았다. 이른바 ‘10월 유신’이라는 것이 선포되자 운동은 더욱 본격화되었으니, 1974년은 절정의 해였다. 1월7일에는 ‘문인 61인 개헌 지지 선언’이 발표되었고, 이튿날엔 기다렸다는 듯 긴급조치가 발동되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호철·임헌영·김우종 등은 ‘문인간첩단’의 누명을 쓰고 구속되었고, 얼마 후 시인 김지하는 인혁당 사건의 고문조작을 폭로한 혐의로 재구속되었다. 문익환·고은·양성우·조태일·송기숙·김남주 등으로 구속문인이 점점 늘어나자 1970년대 내내 석방운동 자체가 운동의 새로운 형태로 자리 잡았다. ‘스님 출신의 허무주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던 고은은 석방운동에 뛰어든 이후 누구보다 치열하게 민주화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시와 정치’가 높은 차원에서 하나의 통일을 이룰 수 있음을 온몸으로 실증했다.
한국 근대문학사 100년 동안 명멸한 많은 문인단체들 가운데 가장 우뚝한 것은 1974년 11월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 선언’ 발표와 함께 출범한 ‘자실’(자유실천문인협의회)일 것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를 거쳐 오늘의 ‘한국작가회의’에 이르기까지 변신을 거듭해온 자실 40년의 역사는 사회의 민주화와 표현의 자유를 위해 초지일관 싸워온 한국문학의 자부심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자실(즉 작가회의)의 드러나지 않은 미덕 중 하나는 내부 민주주의의 실천을 통해 늘 자기쇄신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김지하, 저항적 서정, 풍자적 서사
한국의 1970년대에 관하여 김지하의 이름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 자타가 공인하듯 그는 당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자 그로 인한 수난의 상징이었다. 그는 한국 저항시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연극·미술·연희 등 여러 민중예술 장르에서의 전통계승 문제에 있어서도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들 하나하나가 모두 나름으로 중요하고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편의상 시를 중심으로 간단히 짚어보자.
김지하 시의 출발은 두 갈래였다. 그는 1969년 월간 ‘시인’을 통해 공식적인 등단을 했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국 핏자국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데뷔작 ‘황톳길’의 앞부분인데, 작품은 이렇게 초장부터 남도의 헐벗은 땅을 배경으로 원한의 귀곡성 같은 처절한 성조(聲調)를 발함으로써 거칠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조성했다. 상여소리와도 같이 구슬픈 리듬에 실려 전달되는 ‘황토’와 ‘핏자국’의 이미지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는 구절로 이어짐으로써 비수 같은 저항의 함축으로 승화되었다. 처녀시집 <황토>(한얼문고, 1970)에 모인 김지하의 초기 시들은 요컨대 “내 시의 어머니”라고 불렀던 ‘저주의 땅’ 고향에 바치는 헌사이고 비가였다.
김지하 시의 다른 한 연원은 판소리였다. 그는 민요와 판소리, 탈춤과 민중연희 등 지난 시대의 예술장르들을 연구해 그 형식원리를 익혔고, 특히 판소리의 가락과 수사법을 시적 풍자의 방법론으로 새롭게 활용하고자 했다.
담시 ‘오적’은 김지하의 그러한 미학적 의도와 시적 역량이 부패 기득권세력을 향한 통렬한 공격의 무기임이 입증된 회심의 역작이었다. 이 작품으로 인해 결국 그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고,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에는 ‘민청학련사건’의 배후인물로 다시 구속된 끝에 결국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나올 때까지 엄혹한 옥중생활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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