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연 칼럼]인간에 대한 예의
조호연 논설위원
입력 : 2016.10.03 21:02:02 수정 : 2016.10.03 21:07:21
박근혜 대통령은 더글러스 맥아더를 연구한 것 같다. 맥아더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항상 국가위기사태를 외치며 국민이 애국심을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맹목적으로 정부를 지지하지 않으면 국내의 사악하고 불순한 세력들이 우리 모두를 잡아먹을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한다.” 정책 반대 시민을 불순세력, 종북으로 몰아가는 한국 현실을 이렇게 정확하게 예견한 맥아더의 통찰력이 놀랍다. 그러나 맥아더도 한국 경찰이 시위 농민을 물대포로 쏴 목숨을 빼앗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남기씨의 죽음은 한국인들이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백씨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정권의 폭력과 불법으로 점철돼 있다.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폭력이 행사될 것이라며 불법 집회로 못박고, 대법원이 불법으로 판결한 차벽을 쌓고, 규정에 어긋나게 ‘살인 물대포’를 쐈다. 예지력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
전직 경찰 총수는 엉뚱한 변명으로 일관한다. “제도적 의사표현 장치와 법률적 구제절차가 완비되어 있는데, 거기에 의하지 않고 폭력이나 다수의 위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행이 있다.”(국회 백남기청문회 발언)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백씨는 대통령에게 쌀값 인상 공약을 이행하라고 요구했으나 묵살당했다. 한 가마니에 17만원 하던 쌀값을 21만원으로 올리겠다던 대통령은 15만원으로 폭락하는데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제도적 의사표현 장치는 완비된 게 아니라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백씨가 숨진 뒤 경찰과 새누리당은 “불법 시위 도중의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국가 폭력에 의한 시민 사망이란 사건의 성격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다. 외국 언론까지 “한국의 사회운동가가 경찰이 쏜 물대포로 인한 부상으로 숨졌다”(뉴욕타임스)고 보도하는 판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를 시도한 것이다. LA타임스는 “박정희 시대에 핍박받은 사람이 그 딸이 대통령인 시기에 숨졌다”고 보도했다. 두 부녀 대통령 정권에 공존하는 비민주성과 독재성을 근본 원인으로 본 것이다. 공권력에 의해 시민이 숨진 사건을 대통령이 거론조차 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사다. 시위 참여자를 국민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나아가 국민 생명 보호 의무가 있는 대통령으로서는 물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도 최소한의 예의마저 포기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백씨는 철저히 외면하면서 단식하는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를 위로한 대통령에 대해 대중의 분노가 쏟아진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대통령과 시민의 인식 사이에 간극이 큰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컨대 영화 <국제시장>의 국기하강식 장면에서 애국심을 떠올리는 대통령과, 경직된 국가주의 문화를 풍자하기 위한 설정으로 이해한 일반 관객 사이의 거리는 멀다. 대통령이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잘못된 풍조”라며 ‘헬조선’이 유행하는 세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감하지 못하면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없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일반 시민이 대통령의 눈높이에 맞추든지 그 반대로 해야 한다. 어느 쪽이 변해야 할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터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시민이 바뀌기를 원하는 듯하다.
백남기씨 유족과 시민사회는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이 사과 요구는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개인의 억울한 죽음을 소명하는 것은 물론 헌법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간의 태도라면 대통령은 절대 응하지 않을 것 같다. 대통령이 아니라도 사고체계와 국정철학을 일거에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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