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이광수의 ‘무정’, 조선의 근대 너머 탈근대적 ‘유정’을 꿈꿨다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5. 21:00

[김성곤·방민호의 현대문학 명장면 20](1)이광수의 ‘무정’, 조선의 근대 너머 탈근대적 ‘유정’을 꿈꿨다

방민호 |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ㆍ춘원 이광수의 ‘무정’ 100년, 해석 달라질 수 있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무정>의 첫회가 실린 1917년 1월1일자 매일신보.

춘원 이광수의 소설 <무정>의 첫회가 실린 1917년 1월1일자 매일신보.

■100년 맞는 ‘무정’, 오래된 해석법

이제 곧 신문 연재 100년을 맞이하는 장편소설 <무정(無情)>. 다가오는 2017년이 바로 그 100년의 해다. 당시 25세 도쿄 유학 청년 이광수, 그가 매일신보에 1917년 1월1일부터 6월14일까지, 모두 126회에 걸쳐 당대 최고의 인기작을 연재했다.

그의 연재는 당세의 조선 문단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금색야차>를 번안한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의 <장한몽>이나 몽테크리스토 백작 이야기 <해왕성> 같은 번안소설만 보아온 독자들이었다. 무엇보다 <무정>은 조선 현실에 밀착된 순도 높은 창작물로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 그가 구한말에 미국 공사를 지낸 김장로의 집에 딸 선형을 가르치러 간다. 고아로 자라다시피 한 그에게 잘사는 집 외동딸을 가르치는 일은 더없이 좋은 삶의 기회. 그런 형식 앞에 어느 날 기생 영채가 문득 나타난다. 그녀는 형식의 어린 시절 은인 박진사의 딸이다. 이로부터 형식과 선형과 영채의 삼각관계 이야기가 펼쳐진다.

선형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영채를 택할 것인가. 선형을 택한다면 형식에게는 화려한 미래가 약속된다. 영채를 택한다면 그는 은혜를 따라 옛 신의를 지킬 수 있게 된다.

이 <무정>을 과연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우리들은 지난 100년 동안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을 준비해 왔다. 단언컨대, <무정>은 조선의 근대화를 주장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젊은 시절과 말년의 춘원 이광수(1892~1950).

젊은 시절과 말년의 춘원 이광수(1892~1950).

■기존 해석의 중심점, 삼랑진 수해 장면

과연 그렇게만 생각해야 할까. 만약 그렇다면 한국의 소설은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누>(1908년)부터 <무정>에 이르는 근 10년 동안 별달리 달라진 것 없는 셈이 된다.

<혈의누>는 어떤 이야기인가. “일청 전쟁”의 평양성 싸움터에서 부모 잃은 옥련이가 일본 오사카에서 미국 유학 가는 청년 구완서를 만나 함께 신학문을 공부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그것과 <무정>은 그야말로 ‘똑같은’, 근대화를 위한 계몽의 이야기라고 설명되곤 한다.

<무정>은 거의 100년 동안 그렇게 해석되었고, 그러한 해석 속에서 소설 뒷부분의 삼랑진 수해 장면은 계속해서 중요시되었다.

삼랑진에서 형식, 선형, 영채, 병욱 등 네 사람은 홍수를 만난 빈민들을 위해 자선음악회 활동을 벌인다. 이어서 형식과 세 여성은 함께 조선의 현재와 장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형식이 묻고 세 여성이 답을 구하며 깨우치는 이 장면은 마치 어미 새와 새끼 새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먹이를 물고 온 어미 새 같은 형식과 그것이 떨어지기를 다투어 기다리는 새끼들 같은 병욱, 선형, 영채.

이는 이광수 특유의 일방통행식 계몽주의를 입증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남성이 여성을, 지식인이 민중을, 선생이 학생을, 힘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계몽, 강자가 약자를 끌어가는 계몽, 서구에 의해 동양에 이식되는 계몽.

이러한 장면에 주목하면서 <무정>은, 조선이라는 전근대적 사회를, 유학을 통한 신지식의 이식으로 근대화한다는 전략을 제시한 소설로 반복적으로 설명되어 왔다.

■탈근대적 전망을 품은 소설

그러나, 해석의 각도를 달리할 수도 있다. 우선, 선형을 선택할 것이냐 영채를 선택할 것이냐, 즉 돈과 출세와 기회냐, 신의와 정이냐에 다시 한번 주목해 보자.

만약 우리 앞에 열 명의 젊은이가 있고, 남자든 여자든 그들에게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 물었다 할 때, 그들은 모두 고민할 것이다. 열 중 다섯이나 여섯은 선형을 택하겠다 할 것이요, 하나나 둘은 영채를 택하겠다 할 것이요, 서넛 정도는 어느 쪽에도 손을 들기 주저할 것이다.

이러한 엇갈림은 <무정>의 이야기가 여전히 현재적인 이야기임을, 이미 ‘현대화’된 세계 속의 이야기임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무정>은 전근대 사회를 살며 근대 사회를 꿈꾸는 인물들의 소설일 뿐 아니라 오히려 근대 사회를 살며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소설이다.

소설 속 형식은 이 선택의 가능성을 앞에 두고 끝내 선형 쪽을 향하여 영채를 등진다.

형식이 좌고우면하는 사이, 영채는 배학감과 교주의 아들 김현수에게 겁탈을 당할 위기를 겪고는 차라리 죽어버리고자 한다. 물론 영채는 평양행 기차에서 여학생 병욱을 만나 도중에 내린다. 영채의 행방을 쫓아 뒤늦게 평양으로 올라간 형식. 그러나 그는 한나절 대동강가를 뒤지는 시늉만 할 뿐이고, 영채의 행방을 찾을 수 없음에서 오히려 홀가분함을 느낀다.

이러한 형식의 내면풍경을 그려나가는 작가의 필치는 실로 냉철하다. 그리고 이것이 이 소설의 제목이 ‘무정’인 이치다.

이후 형식은 서울로 와 선형과 약혼하는 등 일사천리로 유학을 준비한다. 돈과 출세와 기회를 좇아 정과 신의를 버린 형식의 모습은 실로 무정한 사람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화자는 무정한 세상이 언제까지나 무정할 것이 아니요, 곧 유정한 세상이 올 것이라 한다. 이 유정한 세상이란 돈과 지위와 지식이 지배하는 근대세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원리에 의해 운영되는 탈근대적 세계다. 즉 <무정>의 작가 이광수는 그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무정한, 근대적 사회로 인식하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탈근대적 전망을 ‘유정’이라는 말로 포착했다. 이 유정 사회의 꿈은 그가 존경해마지 않은 도산 안창호의 이상이기도 했다.

■스스로 깨치는 계몽의 소설

한편, <무정>은 스스로에 의한 깨우침이라는 자기 계몽의 측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이제 막 선형과 함께 유학길에 나선 형식이다. 오늘날의 서울역이 세워지기 전 남대문정거장, 화려한 환송을 받으며 기대에 부풀어 떠난 형식. 하지만 그는 곧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영채가 같은 기차에 탔음을 알게 된다. 그로부터 형식은 괴로운 생각을 곱씹게 된다. 선형이만 어린애인 줄 알았더니 자기 자신 또한 한갓 어린애에 지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유의할 것이 있다. 이는 이 ‘어린애’라는 말이 칸트의 유명한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답변’을 활용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무정>을 연재할 무렵 이광수는 와세다대학의 철학과 우등생이었고, 당시 일본에서는 칸트의 사상을 진정한 인간학으로 떠받드는 경향이 대두해 있었다.

일찍이 칸트는 말했다. 계몽이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미성년이라면 책임 능력도 없어야 하는 것을, 칸트는 어찌하여 책임져야 한다고 했을까.

그것은 그 미성년 상태가 이미 그에게 갖추어져 있는 오성을 사용할 용기와 결단력을 발휘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중의 형식은 이렇게 곱씹는다. “나는 조선이 나갈 길을 분명히 알았거니 하였다. (…) 그러나 이것도 필경은 어린애의 생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조선의 과거를 모르고 현재를 모른다. 조선의 과거를 알려면 우선 역사 보는 안식을 길러 가지고 조선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현재를 알려면 우선 현대의 문명을 이해하고 세계의 대세를 살펴서 사회와 문명을 이해할 만한 안식을 기른 뒤에 조선의 모든 현재 상태를 주밀히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 옳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배우러 간다. 네나 내나 다 어린애이므로 멀리멀리 문명한 나라로 배우러 간다.”

즉 형식에 있어 유학은 단순히 서양에 나가 그들이 주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조선의 현재와 과거를 깨우쳐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매개의 의미를 가진다.

■수동적 이식이냐, 창조적 접합이냐

사실, 최근 들어서 <무정>을 둘러싼 해석의 상위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항간에 <무정>은 한갓 서구 근대의 수동적 이식이요, 서구문학의 노블 개념을 받아들인 소설일 뿐이라는 해석들이 많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무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신구 문화, 전통과 외래적인 것 사이의 창조적 접합이요, 비약을 통한 진화의 중요한 사례다. 앞에서 든 칸트의 예만 하더라도 이광수는 그를 끌어들여 자기 의식의 중요성을 오히려 강조했다.

과연, 한국 현대문학사의 ‘시발점’ 속에서 <무정>은 무엇이었던가. 이 질문은 우리를 한국 현대문학사의 창조의 동력학에 관한 논점으로 이끈다. 이광수의 <무정>은 그를 둘러싼 오욕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선을 요청하고 있다. 바야흐로 이 요청에 답해야 할 때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100&artid=201610042137015#csidx8b7a8c2493c6d759cad535f6ff20b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