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삼성 애국주의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18. 22:54

[박용채 칼럼]삼성 애국주의

박용채 논설위원

최소한 그때 더 큰 경고음을 울려야 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결의가 나온 게 2015년 5월26일이었다. 삼성은 글로벌 네트워크 공유 등 추상적 어휘를 써가며 합병의 당위성을 설명했지만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 작업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그룹 핵심인 삼성전자에 대한 그의 지분은 0.57%. 모직 지분을 23.2% 갖고 있지만 그룹 전체를 지배하기에는 부족했다. 당시 물산이 갖고 있던 전자 지분은 4.1%. 더구나 물산은 전자 지분 7.2%를 갖고 있는 삼성생명 지분 19.3%를 보유하고 있었다. 합병만 이뤄지면 전자 주식 11.3%의 지배가 가능해진다.

[박용채 칼럼]삼성 애국주의

합병 비율은 모직 대 물산이 1 대 0.35. 매출과 순익, 자산이 모직보다 훨씬 큰 물산 주주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합병 비율이었다. 물산 주식을 갖고 있던 헤지펀드 엘리엇이 문제를 제기한 것도 당연했다. 삼성은 우호지분 확보를 위해 KCC에 자사주 5.76%를 매각하고, 이어 10% 이상의 물산 주식을 갖고 있던 국민연금에 SOS를 보냈다. 소액주주연대를 비롯해 국내외 주요 의결권 자문기구들이 국민연금 측에 국민이익에 반한다며 반대를 권고했지만 국민연금은 삼성 편에 섰다. 그럼에도 정부나 정치권, 언론 어디서도 문제 삼기는커녕 삼성 보호막을 자처했다. 단기차익을 노리는 헤지펀드 때문에 삼성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애국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외국 자본에 대한 경계심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지만 냉정히 보면 외국 자본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것은 한국 자본이지 특정 기업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헤지펀드의 공격을 자초한 건 삼성이었다. 당시 합병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 아닌 특정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갤럭시노트7의 단종은 삼성의 제품 설계 및 개발 전반에 대한 통제관리 미비에서 비롯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마디로 삼성의 위기관리 실패이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그 누구도 삼성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못하는 사회·경제적 구조가 삼성으로 하여금 위기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려버린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비약이 아니다. 한국 국토교통부가 갤노트7 폭발에 처음 반응한 것은 9월10일이다. “기내 반입과 위탁수하물로 부치는 것도 금한다.” 하루 전인 9일만 해도 “삼성전자의 설명을 들었지만 기내 반입 금지나 항공기에서 전원을 끄도록 하는 등의 조처를 할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입장 번복은 미국 연방항공청 등의 갤노트7 사용·충전 중단 권고에 따른 것이다. 아마도 미국에서 문제제기가 없었다면 삼성 편을 들어 아무런 안전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민의 안전보다는 삼성의 안전이 우선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언론은 어땠나. 잇따른 폭발 사고와 리콜 결정, 그리고 교환 제품 추가 폭발에 따른 단종 결정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삼성의 보호막이었다. 첫 리콜은 ‘통 큰’ 결단이었고 외국 언론의 폭발 위험성 제기와 사용 중단 촉구는 ‘삼성 때리기’였다. 제품 교환 이후에도 다시 폭발 문제가 제기되자 블랙컨슈머 운운하며 정당한 피해자들 입까지 막았다. 결과적으로 갤노트7 사태 내내 정부나 언론은 삼성이 행여 잘못될까 싶어 설설 기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삼성이 흔들리면 한국 경제가 무너진다거나 혹은 삼성의 눈 밖에 나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일종의 자기 검열 기제가 작동했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갤노트7 사태는 재벌 위주 한국 경제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삼성 내부적으로는 오너 리더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상명하달식 지휘체계의 문제점을 노출했다. 승계 작업이 진행 중인 삼성의 새 헌법은 선택과 집중을 얘기하며 실적을 평가의 맨 앞에 놓는다. 전문경영인들로서는 단기실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경제구조는 또 어떤가. 재벌에 올인하고 재벌을 통한 성장에 매달리며 재벌 위주로 돌아가는 기형적 경제구조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 징후를 눈치채더라도 이를 드러내놓고 지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들이 가는 길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걸림돌을 치워주는 게 전부일 수밖에 없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벵트 홀름스트룀 미 매사추세츠공대 교수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글로벌 기업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지원과 보호가 기업을 망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재벌이익을 국익으로 착각하는 정서가 없어지지 않는 한 위기는 되풀이될 것이다. 삼성을 더욱 불편하게 하고, 더욱 긴장하게끔 하는 것이 삼성과 한국 경제를 위한 길임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번 사태의 교훈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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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610172101015#csidxb2f41215f7aa26cbd2ef83c7ccbabf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