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북부 조선의 하늘을 깨끗한가? / '비극 시인' 임화 / 경향신문에서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20. 22:21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3) 미군정 땐 필화, 북한선 처형 ‘비극 시인’ 임화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ㆍ“남부 조선 더러운 하늘…동포여 깃발을 내리자” 비판 시 ‘불온’ 낙인

시인 임화가 8·15 광복 직후 문화예술단체가 주최한 행사에서 연설하는 장면.          소명출판 제공

시인 임화가 8·15 광복 직후 문화예술단체가 주최한 행사에서 연설하는 장면. 소명출판 제공

반미와 신탁통치 지지는 분단 독재 시기의 성역이었다. 8·15 직후 민족 내분을 격화시킨 분수령은 신탁통치였는데, 그 단서는 오보에서 비롯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분할,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동아일보 1945년 12월27일자)이란 기사는 제목만으로도 반소(반공) 감정의 강력한 불쏘시개였다. 다른 신문들도 내용이 비슷했기에 이 매체만을 오보의 주범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 워싱턴발 AP통신 기사를 국내 합동통신이 받아 배포하면서 비롯된 이 엄청난 오보는 비스마르크가 고의로 사실을 비틀고 과장한 보도자료 때문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일으킨 것에 비교할 만하다.

■신탁통치, 민족사의 굴레

조선은 20~30년간 신탁통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최초로 구상한 것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그가 세상을 뜬 이후 열린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이 제안하자 소련은 즉각 독립을 주장하며 반대하다가 받아들이면서 기간이 5년으로 단축됐다. “조선을 민주주의적 원칙 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해 주고자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며, 이를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구성, 조선의 임시정부와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4개국 탁치 협약을 한다는 게 요지다.

소련은 왜곡보도를 미국 측에 정정요청했으나 묵살당했고, 국내 언론들은 진상 여부에 아랑곳없이 반탁=민족진영, 친탁=소련에 나라 팔아먹으려는 반민족 공산세력으로 몰아갔다. 반탁의 선봉은 상해 임정 세력이었다. 그들은 분단 고착화 조짐이 보이자 통일노선을 선택해버렸기 때문에 결국 분단 이후 집권 지배층은 친일의 죄악을 친미로 세탁한 인사들이 다수였다. 한반도 문제는 오늘까지도 4개국의 원심력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는 걸 당시 반탁 세력들은 상상이라도 했을까. 어쨌든 탁치문제로 엇갈린 좌우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돼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고만 것이다. 이렇게 답답할 때 앞장서는 건 그래도 문학인이 아니던가.

■해방 공간의 외로운 늑대, 임화

미군정기 3년 동안 발간된 시집은 90여종이나 문학사적으로 남을 만한 것은 20여종쯤 된다. 임화가 시집 <찬가(讚歌)>를 낸 것은 1947년 2월10일이었다. 여기에는 8·15 이후의 작품 15편(제1부)과 첫 시집 <현해탄>(1938) 이후의 7편(제2부)이 실려 있다. 관례대로 시집은 공보부에 납본했는데 그해 3월 말쯤 <깃발을 내리자>(51쪽)가 불온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노름꾼과 강도를/ 잡던 손이/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일제히/깃발을 내리자//가난한 동포의/주머니를 노리는/외국 상관(商館)의/늙은 종들이/광목과 통조림의/밀매를 의논하는/ 폐 왕궁(廢 王宮)의/상표를 위하여/우리의 머리 위에/국기를 날릴/필요는 없다// 동포여/일제히/깃발을 내리자//살인의 자유와/약탈의 신성이/주야로 방송되는/남부 조선/더러운 하늘에/무슨 깃발이/날리고 있느냐//동포여/일제히/깃발을 내리자.”

1953년 8월 빨치산의 투항을 유도하기 위해 남측 보수세력이 살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삐라. 1947년 월북한 뒤 문화협회 부위원장을 지낸 임화가 박헌영, 이승엽, 조일명 등과 함께 숙청된 것으로 명기돼 있다. 소명출판 제공

1953년 8월 빨치산의 투항을 유도하기 위해 남측 보수세력이 살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삐라. 1947년 월북한 뒤 문화협회 부위원장을 지낸 임화가 박헌영, 이승엽, 조일명 등과 함께 숙청된 것으로 명기돼 있다. 소명출판 제공

이 시가 처음 실린 것은 ‘현대일보’(1946년 5월20일자)였다. 1946년 5월19일에 발표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건 시를 쓴 날이다. 임화는 시를 쓰자마자 박치우가 발행인이고 작가 이태준이 주간으로 있던 ‘현대일보’에 투고, 이튿날 게재된 것이다. 신문에서는 제목이 <旗 ㅅ발을 내리자!>였고, “외국 상관(商館)의/늙은 종(奴隸)들이”로 되어 있다.

마침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1947년 5월21일~10월18일)가 열리던 때였기에 검열은 뜻밖이었다. 수도관구 경찰청 사찰과가 발행인(백양당 배정국 사장)을 호출, 이 시의 삭제를 지시했다. “공보부에 납본된 출판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군정 반대나 불온한 선동이나 풍기를 교란하는 내용일 때는 경찰은 적발하여 검찰청으로 고발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것이 장택상 경찰청장의 해명이었다.

경찰청은 발행인과 시인을 검찰로 불구속 송치했고, 재판부는 이 시만 삭제하고 출판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렸다. 미군정을 업고 직권을 남용한 필화의 본보기이자 탁치 지지 문인에 대한 보복이었다. 필화사건 석 달 후인 1947년 11월 별들이 차가운 초겨울 밤, 서른아홉 살의 혁명문학 기수는 한 청년 안내자를 따라 38선을 넘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란 불안감과 혁명에의 기대가 엇갈리면서 임화는 비장해졌다.

“임화는 지금 이곳을 자유스러운 입장에서 걸어보고 싶었다. 대낮이라면, 이 주변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는 전원을 좋아했다. 가난한 농가가 여기저기 점점이 흩어져있는 풍경을 인간적인 시로 노래하고 싶다. 그야말로 학대받으며 살아온 민족의 시를 황혼의 빛깔 속에서 노래하고 싶은 것이다. 혁명이라든가, 저항이라든가 하는 문구를 일체 쓰지 않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시를 쓰고 싶다.”(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병걸 옮김 <북의 시인>, 미래사, 1987, 262쪽).

이 순간 그의 뇌리에는 지난 생애가 주마등처럼 스쳤을 것이다. 서울 낙산 밑 생가,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파산, 보성고보 동기생 이강국, 이상, 이헌구, 유진산 등과 1년 후배 김기림, 김환태, 조중곤 등의 얼굴들. 숙명여고 학생들에게 연애박사란 평을 들었던 좋았던 시절. 그 시절 이후 임화의 삶은 배신의 연속이었다.

■민족의 시를 노래하고 싶었던 시인

그는 가출해 룸펜처럼 다다이스트로 떠돌다가 박영희의 총애로 그 집에 기숙하면서 윤기정과 카프 일을 하는 동안 일약 ‘혁명문인’이 되었다. 박영희의 여비로 일본 도쿄에 유학해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약칭으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문화예술가 조직)의 볼셰비키화’라는 새로운 이론으로 중무장하자 그는 은인 박영희를 구세대로 몰아대며 카프 맹장이 되었는데, 이게 그의 인생에서 첫 배신이었다.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3) 미군정 땐 필화, 북한선 처형 ‘비극 시인’ 임화

임화는 도쿄에서 동지 이북만의 집에 기거하며 그의 여동생 이귀례(당시 18세)와 혼례식 없는 부부관계를 유지했고, 1931년 귀국한 이후 3개월간 수감생활을 하다 석방됐다. 1934년 제2차 검거 때는 결핵으로 불구속 상태에서 갇혀 있던 동료 문인들과 상의하지 않고 김기진, 김남천과 함께 경기도 경찰부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한 게 두 번째 배신이었다. 이 처사는 훗날 문학사에서 두고두고 문제가 돼 이기영, 한설야 등의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소속 문인들과 불화하는 빌미가 됐다.

비록 헤어진 상태이긴 하나 딸까지 가진 이귀례를 두고서 임화가 마산 결핵요양소에서 요양하던 중 거창 출신 여류작가 이현욱(필명 지화련)과 1935년 8월 결혼한 것이 그의 세 번째 배신이었다.

임화는 중일전쟁 이후 그리 떳떳하지 못한 돈으로 1938년 출판사 학예사를 설립하고는 친일이냐 위장이냐는 경계선을 넘나들며 곡예사처럼 태평양전쟁 말기를 보냈다.

그는 박헌영처럼 벽돌공으로 위장하지 않았기에 떳떳하진 못했지만 폭넓게 문인들과 교유하다가 8·15를 맞자 가장 먼저 서울 종각 옆 한청빌딩에 있던 조선문인보국회 사무실을 장악, 거기에다 조선문학건설본부 간판을 달았다. 임화는 남한에서 조선공산당·남로당의 박헌영 노선과 밀착해 혁명운동에 나섰다가 월북, 1953년 8월6일 처형당했다. 남북한 양쪽에서 금기의 영역에 갇혀버린 셈이다. 문학적인 남북통일은 아마 임화의 복권(復權)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남과 북 양쪽서 ‘금기의 영역’에 갇혀버린 ‘혁명문인’
>>남로당계 문화운동의 기수

 

임화가 1947년에 펴낸 시집 <찬가>. 이 시집에 수록됐던 시 ‘깃발을 내리자’로 임화는 필화사건을 겪게 된다.

임화가 1947년에 펴낸 시집 <찬가>. 이 시집에 수록됐던 시 ‘깃발을 내리자’로 임화는 필화사건을 겪게 된다.

임화(林和·1908~1953)의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었고, 필명으로는 성아(星兒), 김철우(金鐵友), 쌍수대인(雙樹臺人), 청로(靑爐), 임화(林華) 등을 썼다. 시인, 평론가, 영화인에 문화운동가로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2세대의 주역이기도 했다.

8·15 이후 조선문학건설본부 창립을 주도해 좌익문학단체 단일화 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했다.

저서로는 시집 <현해탄>(1938), <찬가>(1947), 평론집 <문학의 논리>(1940)가 있으며, 월북 후의 전 작품을 망라한 <임화전집>(전 5권, 소명)이 있다.

남로당계 문화운동의 기수로 활약했던 그는 월북하기 전 2년여 동안 노래 작사자로도 유명했다. ‘해방 조선의 노래’(훗날 ‘해방 전사의 노래’로 제목을 바꿈), ‘민전(民戰) 행진곡’, ‘민청가’, ‘민애청가’, ‘인민 항쟁가’, ‘추도가’ 등을 짓고, 월북했다.

6·25 전쟁 때는 서울을 거쳐 낙동강 전선까지 종군, 그 체험을 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에 담아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100&artid=201610192107005#csidxec9fd3dfdf7262f870d3e7639c8d5e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