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의 인물탐구]<오하기문> 번역 김종익… 120년 전 민비의 악행에서 현재를 보다
그의 이름과 얼굴은 ‘민간인 불법사찰’의 피해 당사자로 잘 알려져 있다. 2008년 KB한마음 대표로 재직하던 그를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불법사찰해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 주인공 김종익이다. 그는 이 사건으로 2010년 <주간경향>에 의해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오랜 법정 투쟁 끝인 2016년 3월 정부의 불법사찰 사실을 인정받았다.
그렇게 기억되다 ‘잊혀진’ 그가 매천 황헌의 <오하기문·梧下記聞>을 번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은행원 출신의 평범한 시민이 어려운 한문서적, 그것도 일제 침략에 항거해 자결한 매천의 <오하기문>을 번역했다는 소식은 ‘의외’였다. 이 책은 670쪽이 넘는 분량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500개가 넘는 각주를 달았다. 책에서 각주는 필자가 연구한 ‘각고의 노력’의 증거다. 그는 “훨씬 많은 각주가 있었는데, 출판사에서 너무 책이 두꺼워진다는 이유로 뺐다”고 말했다.
박맹수 원광대 교수도 “고증을 위해 탐색한 문헌에는 <동경대전>을 필두로 <조선왕조실록> 전반, 사서삼경을 포함한 중국의 13경, <한서>와 <후한서> 등 중국의 모든 역사서는 물론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근대중국사료 총간> 등 한국·일본·중국 자료를 모두 참조했다”고 그의 학문적 성실성을 놀라워했다. 그는 <오하기문>을 번역하게 된 계기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오하기문>은 ‘오동나무 아래서 들은 것을 기록한다’는 뜻으로, 매천이 동학농민전쟁 현장에서 들은 것을 정리한 것이다. 1990년 초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이이화 선생과 <한국민중사 자료집-1894년 농민전쟁편> 강독 때 처음 이 책을 읽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1994년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맞아 처음 번역했다.(그 책은 <번역 오하기문>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그러나 당시 직장에 다니며 시간에 쫓겨 번역하다 보니 오류도 많고, 빠진 것도 있어 이번에 제대로 번역한 것이다.”
서당 하시던 외할아버지에게 한문 배워
김종익은 서당을 하시던 외할아버지 무릎에서 한문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한글보다 한문을 먼저 배웠고, 중학교 시절 이미 자치통감을 읽었다”면서 ”은행원이 된 뒤에도 한학자 이광호 선생님에게 공부를 계속했고, 태동고전연구소(당시 지곡서당)에 10년간 왕래하며 책을 읽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의 한문 내공은 근 30년이나 됐던 것이다. 특히 태동고전연구소는 한문학이나 역사학 석사과정을 마쳐야 입학이 허락되는 수준으로 웬만한 한문실력이 아니면 입학하기조차 어렵다.
매천이 이 책에서 말하려 했던 동학농민전쟁의 진실과 교훈은 뭔가.
“매천은 맨처음 ‘나는 국가와 백성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재난이나 변란이 우연히 발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나는 이 대목을 번역하는 데만 100번도 넘게 쓰고 지웠다. 매천은 동학도를 ‘도적’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는 왜 백성이 도적이 됐나를 기록하고 있다. 결국 매천은 동학농민전쟁의 원인과 실상, 즉 조선이 어떻게 망국으로 이르게 됐는가를 기록하려 했던 것이다.”
매천의 기록은 1862년(철종 13년)부터 시작된다. 매천은 ‘관군이 지나가면 지역이 약탈로 초토화되는데, 농민군이 지나가면 쓰러진 벼도 일으켜 세우고 간다’고 직접 듣고 본 것을 기록했다. 여타 동학농민전쟁 기록이 있지만 <오하기문>은 현장을 매우 구체적이고 정밀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매천은 잠깐 성균관 관원을 했지만, 부패한 현실에 환멸을 느껴 고향으로 돌아가 평생 은둔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왜 자결로 망국의 책임을 져야 했을까.
“그는 도학가이다. 중국 북송시대 철학자 장재는 도학가란 ‘하늘과 땅을 위해 마음을 세우고, 생민을 위해 도를 세우고, 과거 성인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연다’고 규정했다. 매천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삶을 지배하는 철학(도)이 없어진 세상에서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매천은 유서(절명시)에서 ‘세상에 글을 아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고 했다. 글을 아는 지식인(지성인)의 의무를 강조한 것일 게다. 하지만 요즘 지식인은 의무는커녕 부조리의 주범이 되고 있다. 이는 120년 전 3정을 문란케 한 탐관오리와 다를 바 없다. 김종익 역시 탐욕스런 공무원이 판치는 최근 법조비리와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지도자의 모습이 당시와 너무 흡사하다고 말했다.
“민비가 임오군란을 피해 충주로 피난을 갔을 때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서울로 돌아온 민비는 이 신통한 무당을 진령군에 봉하고 신임하자, 조선의 고위 관료들이 그에게 아첨했다. 민비의 진령군을 보면 박근혜 대통령 주변 최모씨와 똑같다. 조선을 놓고 열강이 벌이는 싸움도 지금과 너무 흡사하다. 지금 독자들이 이 책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그런 ‘기시감’(데자뷰) 때문이 아닐까.”
지식인의 의무 강조한 매천의 유서
최근 논란의 중심인 최태민 목사의 딸과 이로 인한 국정농단 얘기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죄를 짓고도 끝까지 속죄할 줄 모르는 탐욕스런 공무원들을 보면서 인간의 염치, 자기 모멸감, 자괴감 등이 사라졌다고 한탄했다.
김종익은 1954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강릉상고를 나와 은행원이 됐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교사이고, 처가도 교사집안이다. 그는 은행원이 인간의 존엄성을 세우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은행원 생활을 하며 야간대학을 나왔다. 전공도 한문이나 역사와 무관했다.(그는 대학과 전공을 한사코 밝히길 거부했다)
사실 <오하기문>은 사건의 현장을 찾아 보고·듣고·확인해 기록하는 요즘 기자들이 취재해 보도하는 르포르타주(르포)와 비슷하다. 그런 면에서 매천은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광범위한 르포 기사를 쓴 기자라 할 수 있다. 김종익은 “소설가 김훈이 ‘나는 매천의 <오하기문>을 옆에 끼고 살았다, 요즘 기자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쓴 글이 생각난다”면서 “이 글의 의미를 몰랐지만 이제 이해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는 소설가 김훈이 원래 기자 출신이라고 말해줬다.
하지만 매천은 현장 이야기만 쓰지 않았다. 매천은 갑오년(1894년·고종 31년) 5월 3일 청나라가 일본에 통지한 외교문서도 기록했다. 그 시대 먼 전남 구례에서 한양(서울)에서 벌어진 외교문서까지 ‘취재’해 보도하는 놀라운 취재 능력을 보인 것이다.(매천이 기록한 글에는 오자와 생략이 많아, 역자 김종익이 원사료를 찾아 전문을 그대로 실었다) 무엇보다 매천은 용기 있는 비평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했다. 매천은 병인년(1866·고종 3년)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가을에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했다. 포성이 날마다 서울까지 들렸다. …하지만 하응(대원군)은 태연한 모습으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잠시도 공사를 멈추지 않고 진행시켰다. …당시 사람들은 하응의 이런 행위를 영웅다운 수완이라고 했다. 아아! 나는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입장을 거의 일방적으로 적은 기존 기록과는 전혀 다르다. 이는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불편부당이라는 이유로 기계적 중립성에 안주하는 요즘 언론에 경종을 울린다. 군주제 시대 군주의 아버지(대원군)인 절대권력에 ‘아아!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외칠 수 있는 기개가 놀랍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오동나무 아래서 역사를 기록하다>는 제목은 지금 기자들에게 ‘신권위주의 권력 아래서 진실을 말하다’라고 경종을 울리는 느낌이다. 오싹 소름이 돋는 대목이다.
그는 다산 정약용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지만 “다산 연구는 힘들 것 같다”고 고백했다. 앞으로 계획된 일이 줄지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12년 <적도에 묻히다>(우쓰미 아이코·무라이 요시노리 저, 역사비평사)라는 책을 번역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인도네시아로 끌려가 연합군 포로 감시원을 하면서 한편으로 항일투쟁을 했던 비운의 조선인 양칠성의 이야기다.
그는 앞서 <적도에 묻히다>와 같은 맥락인 조선인 전범 이야기를 번역 중인데, 민족문제연구소를 통해 곧 출판될 예정이다. 이밖에 1930년대 동북에서 활동하던 항일투쟁가 양정우 이야기, 한국이나 북한 국적이 아닌 조선적(籍)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의 이야기 등 일본어로 된 책 몇 권을 번역하고 있다.
기자가 “앞으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려는가”라고 질문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지금 계획된 번역이 마무리되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5~10년 계획으로 한국과 일본 관련 기록물, 특히 일제강점기 시대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일제 강점기 시대 자료 번역 계획
어둠이 깔리자 인터뷰는 인근 막걸리 집으로 옮겨 계속됐다. 노란 양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와 숙주나물 무침이 나왔다. 술기운에 기자의 질문은 더 노골적이고 직선적이 됐다. 가족 얘기가 나왔다. 부모와 처가 모두 교사집안에 선생이 된 여동생은 전교조 활동을 하다 해직됐고, 남동생 역시 역사교육학과(성균관대)에 다니다 학생운동으로 여러 번 감옥에 갔다고 했다. 특히 남동생은 전노협·공공연맹 등 노동운동을 하다 1999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
집안이 그렇게 반골기질인가.
“반골기질이라기보다 현실 부조리에 항의하는 용기를 가진 집안이다.”(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는 ‘반골기질’과 ‘선비기질’이 혼합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왜 노무현을 좋아했나.
“나는 노사모 회원이 100명이 채 안 됐을 때 가입한 초창기 멤버다. 노사모는 2000년 4월 그가 지역감정에 정면으로 대항하며 부산에 출마해 떨어졌을 때 만들어졌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가가 드러난다. ‘추운 겨울이 된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름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노무현이라는 한 인간의 진정성이 마음에 닿았다. 그에게서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나 유배를 당한 다산(정약용)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그는 의외의 말을 했다. 그는 정약용이 그랬던 것처럼 ‘분노하지 않는다’고 했다. 민간인 사찰 재판이 끝났을 때 장진수 주무관에게 점심을 사주며 ‘우리는 분노하지 맙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민주화·노동운동으로 남동생을 잃고 몇날 며칠을 울고 지낸 그가, 권력에 직장을 빼앗긴 여동생을 둔 그가, 본인 스스로 권력 사찰의 피해자로 직장과 노후를 잃은 그가 ‘분노하지 말자’고 외치는 것은 의외다.
한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작가는 <분노하라>는 책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분노를 일깨웠다. 요즘 젊은이는 물론 야당마저 ‘분노’할 줄 모르는 세태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딱 요구되는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200만부 넘게 팔렸다. 기자는 “그렇게 당하고도 분노하지 않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그건 매천이 권력을 질타했던 <오하기문>의 정신과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거듭 “분노를 넘어 가야 할 길이 있고, 분노의 대상에게도 삶의 존엄성이 있다”면서 “그것을 잃으면 인류의 희망은 없다”고 말했다. 그가 너무 순진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달관했기 때문일까. 기자와 김종익은 이수역 근처 허름한 막걸리집에서 밤 늦게까지 이 논쟁을 계속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mg.com>
그렇게 기억되다 ‘잊혀진’ 그가 매천 황헌의 <오하기문·梧下記聞>을 번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은행원 출신의 평범한 시민이 어려운 한문서적, 그것도 일제 침략에 항거해 자결한 매천의 <오하기문>을 번역했다는 소식은 ‘의외’였다. 이 책은 670쪽이 넘는 분량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500개가 넘는 각주를 달았다. 책에서 각주는 필자가 연구한 ‘각고의 노력’의 증거다. 그는 “훨씬 많은 각주가 있었는데, 출판사에서 너무 책이 두꺼워진다는 이유로 뺐다”고 말했다.
박맹수 원광대 교수도 “고증을 위해 탐색한 문헌에는 <동경대전>을 필두로 <조선왕조실록> 전반, 사서삼경을 포함한 중국의 13경, <한서>와 <후한서> 등 중국의 모든 역사서는 물론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근대중국사료 총간> 등 한국·일본·중국 자료를 모두 참조했다”고 그의 학문적 성실성을 놀라워했다. 그는 <오하기문>을 번역하게 된 계기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오하기문>은 ‘오동나무 아래서 들은 것을 기록한다’는 뜻으로, 매천이 동학농민전쟁 현장에서 들은 것을 정리한 것이다. 1990년 초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이이화 선생과 <한국민중사 자료집-1894년 농민전쟁편> 강독 때 처음 이 책을 읽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1994년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맞아 처음 번역했다.(그 책은 <번역 오하기문>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그러나 당시 직장에 다니며 시간에 쫓겨 번역하다 보니 오류도 많고, 빠진 것도 있어 이번에 제대로 번역한 것이다.”
서당 하시던 외할아버지에게 한문 배워
김종익은 서당을 하시던 외할아버지 무릎에서 한문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한글보다 한문을 먼저 배웠고, 중학교 시절 이미 자치통감을 읽었다”면서 ”은행원이 된 뒤에도 한학자 이광호 선생님에게 공부를 계속했고, 태동고전연구소(당시 지곡서당)에 10년간 왕래하며 책을 읽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의 한문 내공은 근 30년이나 됐던 것이다. 특히 태동고전연구소는 한문학이나 역사학 석사과정을 마쳐야 입학이 허락되는 수준으로 웬만한 한문실력이 아니면 입학하기조차 어렵다.
매천이 이 책에서 말하려 했던 동학농민전쟁의 진실과 교훈은 뭔가.
“매천은 맨처음 ‘나는 국가와 백성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재난이나 변란이 우연히 발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나는 이 대목을 번역하는 데만 100번도 넘게 쓰고 지웠다. 매천은 동학도를 ‘도적’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는 왜 백성이 도적이 됐나를 기록하고 있다. 결국 매천은 동학농민전쟁의 원인과 실상, 즉 조선이 어떻게 망국으로 이르게 됐는가를 기록하려 했던 것이다.”
매천의 기록은 1862년(철종 13년)부터 시작된다. 매천은 ‘관군이 지나가면 지역이 약탈로 초토화되는데, 농민군이 지나가면 쓰러진 벼도 일으켜 세우고 간다’고 직접 듣고 본 것을 기록했다. 여타 동학농민전쟁 기록이 있지만 <오하기문>은 현장을 매우 구체적이고 정밀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매천은 잠깐 성균관 관원을 했지만, 부패한 현실에 환멸을 느껴 고향으로 돌아가 평생 은둔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왜 자결로 망국의 책임을 져야 했을까.
“그는 도학가이다. 중국 북송시대 철학자 장재는 도학가란 ‘하늘과 땅을 위해 마음을 세우고, 생민을 위해 도를 세우고, 과거 성인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연다’고 규정했다. 매천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삶을 지배하는 철학(도)이 없어진 세상에서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매천은 유서(절명시)에서 ‘세상에 글을 아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고 했다. 글을 아는 지식인(지성인)의 의무를 강조한 것일 게다. 하지만 요즘 지식인은 의무는커녕 부조리의 주범이 되고 있다. 이는 120년 전 3정을 문란케 한 탐관오리와 다를 바 없다. 김종익 역시 탐욕스런 공무원이 판치는 최근 법조비리와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지도자의 모습이 당시와 너무 흡사하다고 말했다.
“민비가 임오군란을 피해 충주로 피난을 갔을 때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서울로 돌아온 민비는 이 신통한 무당을 진령군에 봉하고 신임하자, 조선의 고위 관료들이 그에게 아첨했다. 민비의 진령군을 보면 박근혜 대통령 주변 최모씨와 똑같다. 조선을 놓고 열강이 벌이는 싸움도 지금과 너무 흡사하다. 지금 독자들이 이 책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그런 ‘기시감’(데자뷰) 때문이 아닐까.”
김종익 번역 <오하기문> / 역사비평사 제공
최근 논란의 중심인 최태민 목사의 딸과 이로 인한 국정농단 얘기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죄를 짓고도 끝까지 속죄할 줄 모르는 탐욕스런 공무원들을 보면서 인간의 염치, 자기 모멸감, 자괴감 등이 사라졌다고 한탄했다.
김종익은 1954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강릉상고를 나와 은행원이 됐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교사이고, 처가도 교사집안이다. 그는 은행원이 인간의 존엄성을 세우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은행원 생활을 하며 야간대학을 나왔다. 전공도 한문이나 역사와 무관했다.(그는 대학과 전공을 한사코 밝히길 거부했다)
사실 <오하기문>은 사건의 현장을 찾아 보고·듣고·확인해 기록하는 요즘 기자들이 취재해 보도하는 르포르타주(르포)와 비슷하다. 그런 면에서 매천은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광범위한 르포 기사를 쓴 기자라 할 수 있다. 김종익은 “소설가 김훈이 ‘나는 매천의 <오하기문>을 옆에 끼고 살았다, 요즘 기자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쓴 글이 생각난다”면서 “이 글의 의미를 몰랐지만 이제 이해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는 소설가 김훈이 원래 기자 출신이라고 말해줬다.
하지만 매천은 현장 이야기만 쓰지 않았다. 매천은 갑오년(1894년·고종 31년) 5월 3일 청나라가 일본에 통지한 외교문서도 기록했다. 그 시대 먼 전남 구례에서 한양(서울)에서 벌어진 외교문서까지 ‘취재’해 보도하는 놀라운 취재 능력을 보인 것이다.(매천이 기록한 글에는 오자와 생략이 많아, 역자 김종익이 원사료를 찾아 전문을 그대로 실었다) 무엇보다 매천은 용기 있는 비평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했다. 매천은 병인년(1866·고종 3년)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가을에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했다. 포성이 날마다 서울까지 들렸다. …하지만 하응(대원군)은 태연한 모습으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잠시도 공사를 멈추지 않고 진행시켰다. …당시 사람들은 하응의 이런 행위를 영웅다운 수완이라고 했다. 아아! 나는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입장을 거의 일방적으로 적은 기존 기록과는 전혀 다르다. 이는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불편부당이라는 이유로 기계적 중립성에 안주하는 요즘 언론에 경종을 울린다. 군주제 시대 군주의 아버지(대원군)인 절대권력에 ‘아아!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외칠 수 있는 기개가 놀랍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오동나무 아래서 역사를 기록하다>는 제목은 지금 기자들에게 ‘신권위주의 권력 아래서 진실을 말하다’라고 경종을 울리는 느낌이다. 오싹 소름이 돋는 대목이다.
그는 다산 정약용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지만 “다산 연구는 힘들 것 같다”고 고백했다. 앞으로 계획된 일이 줄지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12년 <적도에 묻히다>(우쓰미 아이코·무라이 요시노리 저, 역사비평사)라는 책을 번역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인도네시아로 끌려가 연합군 포로 감시원을 하면서 한편으로 항일투쟁을 했던 비운의 조선인 양칠성의 이야기다.
그는 앞서 <적도에 묻히다>와 같은 맥락인 조선인 전범 이야기를 번역 중인데, 민족문제연구소를 통해 곧 출판될 예정이다. 이밖에 1930년대 동북에서 활동하던 항일투쟁가 양정우 이야기, 한국이나 북한 국적이 아닌 조선적(籍)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의 이야기 등 일본어로 된 책 몇 권을 번역하고 있다.
기자가 “앞으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려는가”라고 질문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지금 계획된 번역이 마무리되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5~10년 계획으로 한국과 일본 관련 기록물, 특히 일제강점기 시대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12년 김종익씨를 비롯한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앞줄 두 번째부터) 등이 서울 세종대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민간인 불법사찰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앞으로 일제 강점기 시대 자료 번역 계획
어둠이 깔리자 인터뷰는 인근 막걸리 집으로 옮겨 계속됐다. 노란 양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와 숙주나물 무침이 나왔다. 술기운에 기자의 질문은 더 노골적이고 직선적이 됐다. 가족 얘기가 나왔다. 부모와 처가 모두 교사집안에 선생이 된 여동생은 전교조 활동을 하다 해직됐고, 남동생 역시 역사교육학과(성균관대)에 다니다 학생운동으로 여러 번 감옥에 갔다고 했다. 특히 남동생은 전노협·공공연맹 등 노동운동을 하다 1999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
집안이 그렇게 반골기질인가.
“반골기질이라기보다 현실 부조리에 항의하는 용기를 가진 집안이다.”(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는 ‘반골기질’과 ‘선비기질’이 혼합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왜 노무현을 좋아했나.
“나는 노사모 회원이 100명이 채 안 됐을 때 가입한 초창기 멤버다. 노사모는 2000년 4월 그가 지역감정에 정면으로 대항하며 부산에 출마해 떨어졌을 때 만들어졌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가가 드러난다. ‘추운 겨울이 된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름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노무현이라는 한 인간의 진정성이 마음에 닿았다. 그에게서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나 유배를 당한 다산(정약용)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그는 의외의 말을 했다. 그는 정약용이 그랬던 것처럼 ‘분노하지 않는다’고 했다. 민간인 사찰 재판이 끝났을 때 장진수 주무관에게 점심을 사주며 ‘우리는 분노하지 맙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민주화·노동운동으로 남동생을 잃고 몇날 며칠을 울고 지낸 그가, 권력에 직장을 빼앗긴 여동생을 둔 그가, 본인 스스로 권력 사찰의 피해자로 직장과 노후를 잃은 그가 ‘분노하지 말자’고 외치는 것은 의외다.
한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작가는 <분노하라>는 책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분노를 일깨웠다. 요즘 젊은이는 물론 야당마저 ‘분노’할 줄 모르는 세태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딱 요구되는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200만부 넘게 팔렸다. 기자는 “그렇게 당하고도 분노하지 않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그건 매천이 권력을 질타했던 <오하기문>의 정신과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거듭 “분노를 넘어 가야 할 길이 있고, 분노의 대상에게도 삶의 존엄성이 있다”면서 “그것을 잃으면 인류의 희망은 없다”고 말했다. 그가 너무 순진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달관했기 때문일까. 기자와 김종익은 이수역 근처 허름한 막걸리집에서 밤 늦게까지 이 논쟁을 계속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m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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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철수’로 고향 떠난 아픔…남녘 문학의 새 씨앗 되다 / 경향신문 (0) | 2016.10.19 |
구의동에 왜 고구려 최전방 초소가 있었나 / 경향신문 (0) | 2016.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