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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적 근거라는 문제
이제 우리는 이론들에 대한 오류판정 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내가 기초명제들로 지칭했던 저 단칭명제들에 대한 오류판정 가능성이라는 문제로 환원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단칭명제들이 이 기초명제들인가? 그 단칭명제들은 어떻게 오류로 판정될 수 있는가? 실제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문제들이 관심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둘러싼 모호성들과 오해들로 인하여 여기서 그 문제를 다소 상세하게 토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5 경험적 근거로서의 지각경험들: 심리학주의
경험과학들은 감각-지각들로 그리하여 우리의 경험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교설은, 모든 의문을 초월하여 명백한 것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는 교설이다. 그러나 이 교설은 귀납적 논리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여기서 귀납적 논리와 함께 배척된다. 나는, 수학과 논리학은 사고에 근거하고 사실적인 과학들은 감각-지각들에 근거한다는 견해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 견해 안에서 참인 것은 인식론적 문제와 관련이 없다. 그리고 정말로, 경험과 관련된 서술들의 근거라는 이 문제보다 논리학을 이용한 심리학의 혼란으로부터 더 심각하게 고통을 당한 문제는 인식론에서 없다. 경험의 근거라는 문제로 인하여 프리스(Fries)만큼 고통을 당한 사상가는 없다. 그는, 과학적 서술들이 독단적으로 수용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서술들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가 논리적 의미에서 조리 정연한 논증에 의한 정당화를 요구한다면, 서술들은 서술들에 의해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견해에 전념한다. 모든 서술들은 논리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프리스[Fries]에 의하여 ‘증거들에 대한 애호’로서 기술된) 그리하여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를 야기하기 마련이다. 이제 우리가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뿐만 아니라 독단론의 위험을 피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심리학주의, 다시 말해서 서술들은 서술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지각경험들에 의해서도 또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교설에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따름으로 보인다. 이 3중 딜레마(Trilemma)에 – 독단론 대(對)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 대(對) 심리학주의 – 직면하여 프리스(Fries)는 우리의 경험적 지식을 설명하고 싶어 했던 거의 모든 인식론자들과 함께 심리학주의를 선호했다. 감각-경험에서 우리는 ‘즉각적인 지식’을 경험한다고 그는 가르쳤다: 이 즉각적인 지식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가 지닌 ‘간접적인 지식’을 – 어떤 언어의 상징주의로 표현된 지식 – 정당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 간접적인 지식은 물론 과학적 서술들을 포함한다.
통상적으로 문제는 이렇게까지 탐색되지 않는다. 감각주의와 실증주의라는 인식론들에서는 경험적 과학서술들이 ‘우리의 경험들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이 당연시된다. 왜냐하면 감각-지각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가 사실들에 대한 지식에 언젠가 도달할 수 있을 터인지? 때문이다. 다만 생각을 함에 의해서 사람은 사실들의 세상에 대한 자신의 지식에 최소량의 지식도 보탤 수 없다. 그리하여 그러므로 지각 경험은 틀림없이 모든 경험과학들의 유일한 ‘지식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실들의 세상에 관하여 아는 모든 것은, 우리의 경험들에 관한 서술들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이 탁자가 붉은지 아니면 푸른지는 우리가 지닌 감각-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얻음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 우리가 지닌 감각-경험이 전달하는 즉각적 확신감에 의하여, 우리는 그 용어들이 경험과 일치하는 서술인 참인 서술을 그 용어들이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 거짓 서술로부터 구별할 수 있다. 과학은 이 지각적 지식인 그 진리를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즉각적 경험들을 분류하여 기술하려는 시도일 따름이다; 과학은 우리의 즉각적인 신념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내 견해로 이 교설은 귀납 및 보편자들의 문제들에 관하여 난관을 겪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즉각적인 경험을 토대로’ 확실하게 알려질 수 있는 것을 멀리 초월하지 않는 과학적 서술을 발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어떤 기술 안에도 내재하는 초월’로서 언급될 것이다.) 모든 기술은 보편적 명칭들을 (혹은 상징들이나 개념들) 사용한다; 모든 서술에는 이론의, 즉 가설의 특징이 있다. ‘여기에 물 한잔이 있다’라는 서술은 관찰 경험에 의하여 검증될 수 없다. 이유인즉 서술 안에 나타나는 보편자들은 여하한 특수한 감각-경험과 관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각적 경험’은 한번만 ‘즉각적으로 주어진’다; 그 경험은 독특하다.) 예를 들어 ‘잔(glass)’이라는 단어에 의하여 우리는 어떤 법칙-같은 행태를 보이는 물체들을 의미하고, ‘물(water)’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보편자들은 경험들의 집합들로 환원될 수 없다; 보편자들은 ‘물체로서 구성될’ 수가 없다.
26 소위 ‘프로토콜 문장들’에 관하여
앞 절에서 토론된 내가 ‘심리학주의’로 지칭하는 견해는, 그 심리학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경험들이나 지각들에 관하여 말하지 않고 대신에 ‘문장들’에 - 경험들을 표상하는 문장들 – 관하여 말할지라도, 내가 보기에 경험적 근거에 대한 현대 이론들의 기초를 여전히 이룬다. 이 문장들은 노이라트(Neurath)에 의하여1 그리고 카르납(Carnap)에 의하여2 프로토콜 문장들로 지칭된다.
유사한 이론이 라이닝거(Reininger)에 의하여 훨씬 이전에 주장되었다. 그의 출발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 서술과 그 서술이 기술하는 사실이나 사태 사이의 상응이나 일치는 어디에 놓여있는가? 그는, 서술들은 서술들에만 비교될 수 있다는 결론 도달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사실에 대한 서술의 상응은, 다양한 수준들의 보편성에 속하는 서술들 사이의 논리적 상응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상응은3 ‘유사한 내용을 지닌 서술들에 대한, 그리고 궁극적으로 경험들을 기록하는 서술들에 대한 더 높은 수준의 서술들의 상응’이다. (경험을 기록하는 서술들은 라이닝거(Reininger)에 의하여 ‘요소명제들[elementary statements]로 불린다.4)
카르납(Carnap)은 다소 다른 문제로써 시작한다. 그의 주장은, 모든 철학적 탐구들은 ‘어법의 형태들에 관하여’ 말한다는 것이다.5 과학의 논리는 ‘과학적 언어의 형태들’을 탐구해야 한다.6 과학의 논리는 (물리적) ‘대상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에 대해서 말한다; 사실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문장들에 대해서. 이 올바른 ‘어법의 형식적 방식’과 평범한, 혹은 그가 지칭하는 바, ‘어법의 실제적 방식’을 카르납(Carnap)은 대조한다. 혼란을 피하려면, 어법의 실제적 방식이 그 방식을 올바른 어법의 형식적 방식으로 변환하는 것이 가능한 곳에서 사용되어야할 따름이다.
이제 이 견해로 - 내가 동의하는 – 인하여 카르납(Carnap)은 (라이닝거[Reininger]처럼) 과학의 논리에서 문장들은 그 문장들을 사태와 혹은 경험들과 비교함에 의하여 시험된다고 우리가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게 된다: 우리는 단지, 문장들은 다른 문장들과 비교를 함에 의하여 시험될 수 있다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납(Carnap)은 문제에 대하여 심리학주의적 접근방식의 근본적인 개념들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다; 그가 하고 있는 유일한 것은 그 개념들을 ‘어법의 형식적 방식’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그는, 과학의 문장들은 ‘프로토콜 문장들의 도움을 받아서’ 시험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프로토콜 문장들은, ‘확인이 필요하지 않지만 과학의 모든 다른 문장들에 대한 토대로서 역할을 하는’ 서술들이나 문장들로서 설명되기 때문에, 이것은 – 평범한 어법의 ‘실제적 방식’으로 – 프로토콜 문장들은 ‘주어진 것’을 언급한다고 말하는 것에 해당한다: ‘감각-자료들’을 언급한다고. 프로토콜 문장들은 ‘즉각적 경험의 내용들이나 현상들을; 그리하여 가장 단순한 알려질 수 있는 사실들’을 기술한다 (카르납[Carnap] 자신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이것은, 프로토콜 문장들에 대한 이론이 어법의 형식적 방식으로 변형된 심리학주의에 지나지 않음을 충분히 분명하게 보여준다. 노이라트(Neurath)의 견해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언급될 수 있다: 그는, 프로토콜 문장들에서는 ‘감지하다’, ‘보다’, 기타 등등과 같은 단어들은 프로토콜 문장의 작성자의 성명과 함께 등장할 것을 요구한다. 프로토콜 문장들은 틀림없이, 그 용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즉각적인 관찰들이나 감지들에 대한 기록들이나 원안들(protocols)이다.
라이닝거(Reininger)처럼, 노이라트(Neurath)는 경험들을 기록하는 지각적 서술들은 – 다시 말해서 ‘프로토콜 문장들’ - 돌이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각적 서술들은 때때로 배척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프로토콜 문장들은 궁극적이어서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카르납(Carnap)의 견해에 (그 후 카르납[Carnap]에 의하여 수정된) 반대한다. 그러나 라이닝거(Reininger)가 의심스러운 경우에 다른 서술들로써 자신이 주장하는 ‘요소’명제들을 시험하는 방법을 – 그것은 결론들을 연역하여 시험하는 방법이다 - 기술하는 반면, 노이라트(Neurath)는 그런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이론체계를 부정하는 프로토콜 문장을 우리가 ‘삭제할’ 수 있거나, ‘... 아니면 그 프로토콜 문장을 수용하여 추가된 문장으로써 그 프로토콜 문장이 일관적인 상태로 남는 방식으로 이론체계를 수정’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프로토콜 문장들은 불가침이 될 수 없다는 노이라트(Neurath)의 견해는, 내 견해로, 주목할 만한 발전이다. 그러나 지각들을 지각-서술들로 대체하는 것과 – 어법의 형식적 방식으로의 변환일 따름 – 별도로, 프로토콜 문장들이 수정될 것이라는 교설은 지각적 지식의 즉각성(immediacy)이라는 이론에 (프리스[Fries]에게서 기인하는) 관한 그의 유일한 진보이다. 그 교설은 올바른 방향으로의 진일보이다; 그러나 그 교설은, 또 다른 행보에 의하여 추구되지 않는다면, 유용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프로토콜 문장을 ‘삭제하는’ (아니면 ‘수용하는’) 자의성을 제한하는 규칙들의 집합이 필요하다. 노이라트(Neurath)는 그런 규칙들을 제시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경험론을 부지불식간에 제거한다. 왜냐하면 그런 규칙들이 없다면, 경험적 서술들은 다른 종류의 서술들로부터 더 이상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이론체계는, 우리에게 프로토콜 문장이 불편하다는 조건으로 그 문장을 단지 ‘삭제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노이라트[Neurath]의 견해로, 모든 사람에게 허용되는 것처럼), 방어가 가능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규약주의라는 방식으로 어떤 이론체계도 구조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다; 프로토콜 문장들이 충분히 주어지면, 그 증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증명하거나 초안한 증인들의 증언에 의하여 그 이론체계를 심지어 확인할 수도 있을 터이다. 노이라트(Neurath)는 한 가지 형태의 독단론을 피하지만 자의적인 이론체계와 관련된 길을 터서 그 이론체계를 ‘경험과학’으로서 설정한다.
그리하여 프로토콜 문장들이 노이라트(Neurath)의 계획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를 알기는 전적으로 쉽지 않다. 카르납(Carnap)의 이전 견해로, 프로토콜 문장들로 된 이론체계는 그 이론체계에 의하여 경험과학의 모든 주장이 판단되어야 했던 시금석이었다. 이것이 프로토콜 문장들이 틀림없이 ‘반박될 수 없었던’ 이유이다. 이유인즉 프로토콜 문장들만이 문장들을 – 물론 프로토콜 문장들을 제외한 문장들을 - 뒤엎을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토콜 문장들이 이 기능을 빼앗기고, 그리고 프로토콜 문장들 자체가 이론들에 의하여 전복될 수 있다면 프로토콜 문장들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노이라트(Neurath)가 구획설정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프로토콜 문장들에 관한 그의 개념은 단지 유물인 – 경험과학이 지각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전통적 견해에 대한 잔존하는 기념물 – 듯이 보인다.
27 경험적 근거에 대한 객관성
나는, 다양한 심리학주의 학파들에 의하여 선호되는 견해와 다소 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볼 것을 제안한다: 나는,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과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지식’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싶다.
나는, 관찰만이 우리에게 ‘사실들과 관련된 지식’을 제공한다는 것과 우리는 ‘관찰에 의해서만 사실들을 인식하게 될’ 수 있다는 (한[Hahn]이 말하는 바와 같이)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지식 중 이 지식인 이 인식은 어떤 명제의 진실성도 정당화하거나 확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인식론이 틀림없이 질문하는 문제인 ‘... 우리의 지식은 어디에 의존하는가?... 혹은 보다 정확하게, 경험 S를 지니기에 어떻게 나는 그 경험에 대한 나의 기술을 정당화하여 의심에 대항하여 그 기술을 옹호할 수 있는가?’를 믿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이라는 용어를 ’프로토콜 문장‘으로 바꾼다할지라도 이것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내 견해로, 인식론이 물어야 할 것은 오히려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떻게 과학적 서술들의 연역적 결론들에 의하여 과학적 서술들을 시험하는가?*1 그리고 과학적 서술들이 반대로 상호-주관적으로 시험될 수 있다면 이 목적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결론들을 선택할 수 있는가?
지금쯤 이런 종류의 객관적이고 비-심리학적인 접근방식은, 논리적이거나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 서술들이 관련된 곳에서는 상당히 일반적으로 수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논리학은 정신적 과정들과 그 과정들의 법칙들을 – 우리의 사고에 관한 법칙들 – 다루는 과학이라고 주장되었다. 이 견해를 토대로,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없을 터일 따름이라고 주장되는 사실 외에 논리학에 대하여 발견될 다른 정당화는 없었다. 논리적 추론은, 그 추론이 사고의 필연성으로서, 특정 방향들을 따라서 생각하기로 강요되는 느낌으로서 경험되었기 때문에 정당화된다고 보였던 듯하다. 논리학의 분야에서, 이런 종류의 심리학주의는 이제 아마도 과거의 일이다. 아무도, 논리적 추론 곁 여백에 다음 프로토콜 문장을 서술함에 의하여 의심사항들에 대항하여 논리적 추론의 유효성을 정당화하거나 옹호하는 것을 꿈꾸지 않을 터이다. ‘프로토콜: 오늘 이 일련의 추론들을 검토하면서, 나는 신념의 예리한 느낌을 경험했다.’
입장은, 우리가 과학적 경험서술들을 다룰 때 매우 달라진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그 서술들이 지각들처럼 경험들에 근거한다고 믿는다; 혹은 어법의 형식적인 방식으로 프로토콜 문장들에 근거한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논리적 서술들을 프로토콜 문장들에 근거시키려는 시도가 심리학주의의 한 가지 경우라고 볼 터이다. 그러나 매우 기묘하게도, 경험서술들에 관한 한 동일한 종류의 일이 오늘날 ‘물리학주의’라는 이름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학의 서술들이 문제이든 아니면 경험과학의 서술들이든, 나는 답변이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지식은, 의향들의 체계로서 모호하게 기술될 것인데 두 가지 경우들 모두에서 믿음의 혹은 신념의 느낌들과 연결될 것이다: 전자(前者)의 경우에는 특정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강요당하는 느낌과; 후자(後者)의 경우에는 ‘지각적 확신’의 느낌과. 그러나 이 모든 것에게 심리학주의자만 흥미를 느낀다. 이 모든 것은 심지어, 과학적 서술들 사이의 논리적 연관성들과 관련된 문제들과 같은 문제들과 관련되지 않는데, 그 문제들에만 인식론자는 관심을 갖는다.
(‘여기 있는 이 탁자가 흰 것을 나는 본다’는 서술에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여기 이 탁자는 희다’라는 서술에 대하여 어떤 매우 큰 이점이 있다는 만연하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자체에 대한 가능한 객관적인 시험들을 평가하는 관점에서, 첫 번째 서술은 나에 관하여 말하면서 여기에 있는 탁자에 관하여 말하는 두 번째 서술보다 더 안전하게 보이지 않는다.)
일련의 추론의 유효성을 확인하는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이것은 그 유효성을, 그 유효성이 매우 쉽게 시험될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형태를 많은 작은 단계들로 분리하여 각 단계가 문장을 변형시키는 수학적 혹은 논리적 기교를 배운 여하한 사람에 의하여 검토되기 쉽게 한다. 이후에 어떤 사람이 여전히 의문을 제기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증거의 단계들에서 오류를 지적하라고 혹은 문제를 다시 생각하라고 요구할 따름이다. 경험과학들의 경우에, 상황은 유사하다. 어떤 경험과학적 서술도, 관련 기교를 습득한 사람 누구나 그 서술을 시험할 수 있을 그런 정도로 제시될 수 (실험 장치들, 기타 등등을 기술함에 의하여) 있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이 그 서술을 배척한다면, 자신이 지각한 사항들에 관하여 그가 우리에게 자신의 의심의 느낌들이나 자신의 신념의 느낌들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하는지는 우리를 만족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주장을 부인하는 주장을 정식화해서 우리에게 그 주장을 시험하는 것과 관련된 그의 지침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가 이런 일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실험에 대한 또 다른 그리고 아마도 보다 신중한 시선을 보내서 다시 생각하라고 그에게 요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자체의 논리적 형태 때문에 시험될 수 없는 주장은 기껏해야, 과학 내부에서, 자극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 주장은 문제를 제시할 수 있다. 논리학과 수학의 분야에서, 이것은 페르마(Fermat)가 지녔던 문제에 의하여 전형적인 사례가 될 것이고 자연사(自然史)의 분야에서는 가령 바다뱀들에 관한 보고서들에 의하여 전형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런 경우들에는 과학이, 보고서들이 근거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페르마(Fermat)가 실수를 했다거나 관찰된 바다뱀들에 관한 모든 기록들이 거짓말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과학은 판단을 유보한다.
과학은 인식론적 관점으로만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들에서 간주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과학을 생물학적 혹은 사회학적 현상으로서 볼 수 있다. 그와 같이 과학은 아마도 우리가 지닌 산업용 기계들 중 몇 가지에 비교될 수 있는 연장으로서 혹은 도구로서 혹시 기술될 것이다. 과학은 생산 수단으로서 - ‘간접생산’의 최종 판결로서 – 간주될 것이다. 심지어 이 관점으로부터도 과학은, 다른 생산 도구들이나 수단들보다 ‘우리의 경험’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과학을 우리의 지성적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으로서 바라본다할지라도, 우리의 경험들에 대한 과학의 연관성은 원칙적으로 다른 객관적인 구조의 관련성과 다르지 않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과학은 그 목표가 ‘... 즉각적이거나 주어진 경험들로부터 나중의 경험들을 예측하여 심지어 가능한 한 그 경험들을 통제하는 것’인 ‘... 도구’라고 말하는 것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경험들에 대한 이 담화는 명징성에 기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담화에는, 가령 그 목표가 우리에게 특정 경험들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의한 유정탑(油井塔: oil derrick)에 대한 틀리지 않은 규정보다 더 많은 요점이 없다: 석유가 아니라 오히려 석유의 광경이나 냄새; 돈이 아니라 오히려 돈을 소유한 느낌.
28 기초명제들
내가 옹호하는 인식론적 이론 안에서 기초명제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이미 간략하게 지적되었다. 이론이 오류로 판정될 수 있다고 지칭될 수, 다시 말해서 경험적으로 지칭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기초명제들이 필요하다. (21절 참조.)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는 기초명제들이 필요한데 오류로 판정하는 가설들의 입증에 관해서이고 그리하여 이론들에 대한 오류판정에 관해서이다. (22절 참조.)
그리하여 기초명제들은 틀림없이 다음 조건들을 충족시킨다. (a) 초기조건들이 없는 전칭명제들로부터, 기초명제들은 연역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b) 전칭명제와 기초명제는 서로 모순이 될 수 있다. 조건 (b)는, 기초명제가 부정하는 이론으로부터 기초명제에 대한 부정을 도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충족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것과 조건 (a)로부터, 기초명제는 자체에 대한 부정이 반대로 기초명제일리가 없다는 논리적 형태를 틀림없이 지닌다고 귀결된다.
우리는 이미, 그 논리적 형태가 그 서술들에 대한 부정들의 형태와 다른 서술들을 조우했다. 이것들은 전칭명제들이고 존재명제들이다: 그것들은 상대방에 대한 부정들이고, 그것들은 자체의 논리적 형태에서 다르다. 단칭명제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구축될 수 있다. ‘시공 영역 k에 까마귀가 있다’는 서술은 ‘시공 영역 k에는 까마귀가 없다’는 서술과 자체의 논리적 형태에서 – 그리고 자체의 언어적 형태에서 뿐만 아니라 – 다르다고 언급될 것이다. ‘영역 k에는 어떠어떠한 것이 있다’나 ‘어떠어떠한 사건이 영역 k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23절 참조) 형태의 서술은 ‘단칭 존재명제’나 ‘단칭 있음명제(singular there-is statement)’로 지칭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명제를 부정함으로부터 발생하는 명제, 즉 ‘영역 k에는 어떠어떠한 것이 없다’나 ‘어떠어떠한 종류의 사건이 영역 k에서 발생하고 있지 않다’는 서술은 ‘단칭 비존재 명제’나 ‘단칭 없음명제(singular there-is-not)’로 지칭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기초명제들에 관한 다음 규칙을 정립할 것이다: 기초명제들은 단칭 존재명제들의 형태를 지닌다. 이 규칙은, 기초명제들이 조건 (a)를 충족시킬 것을 의미한데, 왜냐하면 단칭 존재명제는 엄격한 전칭명제로부터 다시 말해서 엄격한 비-존재명제로부터 결코 연역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초명제들은, 모든 단칭 존재명제로부터 순수 존재명제가 단지 개체적인 시공 영역에 대한 언급을 생략함에 의하여 도출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려질 수 있는 것처럼, 조건 (b) 또한 충족시킨다; 그리고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순수 존재명제는 정말로 이론을 부정할 것이다.
두 가지 기초명제들인 p와 r의 결합은 서로 부정하지 않는데 반대로 기초명제라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때때로 한 가지 기초명제를 기초가 아닌 또 다른 명제에 결합함에 의하여 우리는 심지어 기초명제를 얻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장소 k에 지시기(指示機: pointer)가 있다’라는 기초명제 r과 ‘장소 k에는 움직이는 지시기(指示機: pointer)가 없다’라는 단칭 비존재명제
부정과 대등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기초명제들에 대한 형식적인 요건들이다; 그것들은 모든 단칭 존재명제들에 의하여 충족된다. 이것들에 덧붙여, 기초명제는 또한 실질적 요건을 – 기초명제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와 같이 장소 k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에 관한 요건 – 또한 충족시켜야 한다. 이 사건은 ‘관찰 가능한’ 사건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기초명제들은 ‘관찰’에 의하여 상호-주관적으로 시험될 수 있어야 한다. 기초명제들은 단칭명제들이기 때문에 이 요건은 물론, 시공에서 합당하게 위치한 관찰자들을 언급할 수만 있다 (내가 상론하지 않을 요점).
물론 관찰가능성을 요구하면서 나는 결국 심리학주의가 나의 이론에 슬며시 미끄러져 돌아오는 것을 허용한 것으로 이제 보일 것이다 (이 문장의 원문은 No doubt it will now seem as though in demanding observability, I have, after all, allowed psychologism to slip back quietly into my theory인데 as though나 as if 다음에 동사를 과거로 표시하려면 had + 과거분사의 형태로 써야하기 때문에 I have, after all, allowed를 I had, after all, allowed로 표현했어야 한다. 문법적 오류이다: 역자).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관찰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개념을 심리학주의적 의미에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그 개념을, 그 개념이 ‘육안으로 보이는 물체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포함하는 사건’에 의하여 대체될 개연성이 높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아니면 우리는 보다 정확하게, 모든 기초명제는 틀림없이 자체가 물체들의 상대적 위치들에 관한 서술이거나 혹은 그 기초명제가 이 ‘기계론적’이거나 ‘물질주의적인’ 종류의 어떤 기초명제와 틀림없이 대등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서술할지도 모른다. (이 약정이 실제적이라는 것은, 상호-주관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이론은 또한 상호-감각적으로 시험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과 연관된다. 이것은, 우리가 지닌 감각들 중 한 가지 감각에 의한 지각을 포함하는 시험들은 원칙적으로 다른 감각들을 포함하는 시험들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관찰가능성의 도움을 받으면서 내가 심리학주의를 비밀리에 다시 수용했다는 비난은, 내가 기계론이나 물질주의를 수용했다는 비난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결코 지니지 못할 터이다. 이것은, 나의 이론이 실제로 온전히 중립적이라는 것과 이 꼬리표들 중 어느 것도 나의 이론에 부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리학주의라는 낙인으로부터 내가 사용하는 바와 같이 ‘관찰될 수 있는’이라는 용어를 구조하기 위해서만 나는 이 모든 것을 말한다. (관찰들과 지각들은 심리학적일 것이지만 관찰가능성은 그렇지 않다.) 심리학주의적이거나 기계론적
사례들을 통하여 나는 그 용어를 설명한 준비가 완전히 되어있을지라도, 나에게는 ‘관찰될 수 있는’이나 ‘관찰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용어를 정의할(defining) 의도가 없다. 그 용어가 사용될 때 충분히 정확하게 되는 정의(定義)되지 않은 용어로서 도입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식론자가 ‘기호’라는 용어의 사용을 배워야, 혹은 물리학자가 ‘질량-점’이라는 용어를 배워야할지라도, 그 사용을 인식론자가 배워야 하는 원초적 개념으로서.
그리하여 기초명제들은 – 실제적 어법으로 – 관찰 가능한 사건이 시공의 특정 개체적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서술들이다. 이 정의(定義)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용어들은, ‘관찰 가능한’이라는 원초적 용어를 제외하고 – 23절에서 보다 정확하게 설명되었다; ‘관찰 가능한’은 정의(定義)되지 않지만 또한 우리가 여기서 본 바와 같이 상당히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
29 기초명제들의 상대성. 프리스(Fries)의 3중 딜레마(Trilemma) 해결
이론에 대한 모든 시험은, 그 이론의 입증을 낳건 오류판정을 낳건, 우리가 수용하기로 결정하는 이런저런 기초명제에서 멈추어야 한다. 우리가 결정에 이르지 못하여 이런저런 기초명제를 수용하지 못하면 시험은 성과를 낳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그 상황으로 인하여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저 특정 기초명제라기보다는 이 특정 기초명제에 멈추게 되거나 아니면 시험을 모두 포기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여하한 기초명제도 반대로, 시험 중인 이론이나 또 다른 어떤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그 기초명제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기초명제들 중 여하한 기초명제를 시금석으로서 사용하여, 다시 시험들에 부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절차는 자연스럽게 끝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험을 통하여 우리가 성과를 얻으려면, 이런저런 지점에서 멈추어 우리는 당분간 만족한다고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남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그 절차에 따라서 우리가 특별히 시험하기 쉬운 일종의 서술에만 멈추는 절차에 다다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상당히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그 서술들의 수용이나 배제에 관하여 다양한 연구가들이 합의에 이를 것 같은 서술들에 멈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구가들이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면, 그 연구가들은 시험들을 지속할 따름이거나 아니면 그 시험들은 완전히 다시 시작할 것이다. 이것 또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면, 문제의 서술들은 상호-주관적으로 시험될 수 없었다거나 우리는 결국 관찰될 수 있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지 않았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어느 날 과학적 관찰자들이 기초명제들에 관하여 합의에 이른다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이것은 보편적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언어의 실패에 해당할 터이다. 그것은 새로운 ‘언어들의 바벨탑’에 해당할 터이다: 과학적 발견은 불합리성으로 환원될 터이다. 이 새로운 바벨탑인 솟구치는 과학의 건축물은 곧 폐허에 놓일 터이다.
어려운 작업이 끝나고 모든 것이 쉽게 검사될 수 있을 때 논리적 증거가 만족스러운 형태에 도달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과학이 자체의 연역이나 설명의 작업을 마친 다음에 우리는 쉽게 시험될 수 있는 기초명제들에서 멈춘다. 개인적인 경험들에 관한 서술들은 – 다시 말해서 프로토콜 명제들 – 분명히 이런 종류가 아니다; 그리하여 그 서술들은, 우리가 멈추는 서술들로서 작동하기에는 그다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물론, 과학과 산업연구 부서에 의하여 발행되는 시험들에 대한 증명서들과 같은 기록들이나 원안들을 정말로 이용한다. 이것들은, 필요하다면, 재검토될 수 있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시험들을 수행하는 전문가들의 반응-시간들을 시험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 전문가들의 개인적인 균차[均次: equations]들을 결정하기 위하여) 필수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 결정적인 경우들에서’ 우리는 정말로 쉽게 시험될 수 있는 명제들에서 멈추지, 카르납(Carnap)이 추천하는 바와 같이 지각이나 프로토콜 명제들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 지각들에 관한 서술들에 대하여 상호-주관적으로 시험하기가... 상대적으로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이것들에만... 멈추지’ 않는다.
독단론,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 그리고 심리학주의 사이의 선택인 프리스(Fries)의 3중 딜레마와 관련하여 이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25절 참조.) 우리가 멈추는 기초명제들에는, 우리가 만족스러운 것으로서 그리고 충분히 시험된 것으로서 수용하겠다고 결정하는데, 인정되는 바와 같이 독단들의 특징이 있지만 단지 우리가 그 기초명제들을 추가 논증들에 의하여 (혹은 추가 시험들에 의하여) 정당화하는 것을 그만둘 것인 한에서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독단론은 무해한데 왜냐하면 필요성이 나타나면 이 명제들은 쉽게 추가적으로 시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또한 연역의 연쇄가 원칙적으로 무한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는, 우리의 이론 안에는 어떤 명제들도 그런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로써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또한 무해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리학주의에 관하여: 기초명제를 수용하는 그리고 그 기초명제에 만족하는 결정은 우리의 경험들과 – 특히 우리의 지각적 경험들과 - 인과적으로 연관된다는 것을 나는 다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경험들에 의하여 기초명제들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경험들은 결정에 그리하여 명제에 대한 수용이나 배척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지만, 기초명제들은 경험들에 의하여 – 책상을 치는 것에 의하여 결코 정당화되지 않듯이 - 정당화될 수 없다.
30 이론과 실험
기초명제들은 결정이나 합의 결과로서 수용된다: 그래서 그 정도까지 기초명제들은 규약들이다. 결정들은 규칙들에 의하여 통제를 받는 절차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이 규칙들 가운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탈한 기초명제들을 – 다시 말해서 논리적으로 단절된 기초명제들 –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나 이론들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기초명제들을 우리가 수용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규칙이다; 이 이론들에 관하여 탐색적 질문들을 제기하여 기초명제들의 수용에 의하여 답변되는 과정에서.
그리하여 실제 상황은 소박한 경험주의자, 즉 귀납적 논리를 신뢰하는 자가 떠올리는 상황과 완전히 다르다. 소박한 경험주의자, 즉 귀납적 논리를 신뢰하는 자는, 우리가 우리의 경험들을 수집하여 배열함에 의하여 시작하여 그리하여 과학의 사다리를 오른다고 생각한다. 또는 보다 형식적인 어법을 사용하여, 우리가 과학을 구축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먼저 프로토콜 명제들을 수집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네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을 기록하라’고 명령을 받는다면 나는 이 모호한 명령에 어떻게 복종할지 거의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고; 내가 벨소리를 듣는다고; 신문배달 소년이 소리를 지른다고; 스피커가 윙윙거린다고 내가 서술하고 있다고 보고해야 하는가; 혹은 혹시 이 소음들이 나를 성가시게 한다고 내가 보고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명령이 복종될 수 있을 터라할지라도: 아무리 서술들을 수집해놓은 것의 풍요로움이 이런 정도로 쌓일지라도, 그것은 결코 과학이 될 수는 없을 터이다. 과학에는 관점들과 이론적 문제들이 필요하다.
기초명제들의 수용이나 배척에 관한 합의는, 통상적으로, 이론을 적용하는 때에 이루어진다; 합의는, 사실상, 이론을 시험하는 적용의 한 부분이다. 기초명제들에 관하여 합의를 이루는 것은, 다른 종류들의 적용들과 같이 다양한 이론적 고찰들에 의하여 통제되는 목적을 지닌 행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예를 들어, 촉각적 아침식사가 시각적 아침식사와 함께 그리고 촉각적 타임지가 가시적이고 청각적으로 바스락거리는 타임지와 함께 항상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방식의 화이트헤드(Whitehead)가 지녔던 문제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입장에 놓여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과학은 떠돌이 기초적 지각들로부터 시작한다고 믿는 귀납논리학자는 틀림없이 그런 규칙적인 우연의 일치들에 의하여 당혹할 것이다; 그 우연의 일치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우연적으로’ 틀림없이 보일 것이다. 귀납논리학자는 이론들에 의하여 규칙성들을 설명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이론들이란 규칙적인 우연의 일치들에 대한 서술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도달된 입장에 따르면, 우리의 다양한 경험들 사이의 연관성들은 우리가 시험에 몰두에 있는 이론들과 관련하여 설명될 수 있고 연역될 수 있다. (우리의 이론들로 인하여 우리는, 볼 수 있는 달과 함께 우리에게는 촉각적인 달이 제공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청각적 악몽에 의하여 시달리는 것을 예상하지도 않는다.) 한 가지 질문이 – 분명히 어떤 오류로 판정될 수 있는 이론에 의하여 답변될 수 없고 그리하여 ‘형이상학적’인 질문 – 틀림없이 남는다: 우리가 구축하는 이론들에서 우리가 그렇게 자주 행운을 누리는 것은 어떠한가 - ‘자연법칙들’이 있다는 것은 어떠한가?*
이 모든 고찰들은 인식론적 실험 이론에게 중요하다. 이론가는 특정 확정적인 질문들을 실험가에게 제시하고 후자(後者)는 자신의 실험들에 의하여 이 질문들에 대한 결정적인 답변을 끌어내려고 노력하지 다른 질문들에 대한 결정적인 답변은 아니다. 모든 다른 질문들을 그는 배제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여기서 이론의 하위-체계들이 지닌 상대적 독립성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실험가는 이 한 가지 질문에 관하여 “... 가능한 한 민감하지만 모든 다른 관련된 질문들에 관해서는 가능한 한 둔감하게” 하여 자신의 시험을 수행하는데 “이 작업의 한 부분은 모든 가능한 실수의 근원들을 차단하는 데 놓여있다.” 그러나 실험가가 ‘이론가의 임무를 경감시키기 위해서’나 혹시 이론가에게 귀납적 일반화들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기 위하여 이런 방식으로 진행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오류이다. 반대로 이론가는 틀림없이 오래전에 이 작업이나 적어도 자신의 작업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수행했다: 그는 틀림없이 가능한 한 선명하게 자신의 문제를 정식화했다. 그리하여 실험가에게 방식을 보여주는 것은 이론가이다. 그러나 심지어 실험가도 주로 정확한 관찰들을 하는 데 몰두하지 않는다; 그의 작업도 주로 이론적인 종류의 것이다. 이론은, 자체의 초기 계획에서부터 실험실에서 끝마무리 작업들까지 실험적 작업을 지배한다.*
이것은, 이론가가 나중에 실험적으로 야기된 관찰 가능한 효과들을 예측하는 데 성공했던 경우들에 의하여 잘 예시된다;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사례는, 데이비슨(Davisson)과 거머(Germer)에 의하여 실험적으로 최초로 확인된 물질의 파동성에 대한 드 브로이(de Broglie)의 예측이다.* 그 예측은 아마도, 실험가들이 이론의 진보에 현저한 영향을 끼쳤던 경우들에 의하여 훨씬 더 잘 예시된다. 이론가가 어쩔 수 없이 이 경우들에서 더 나은 이론을 찾아야 하는 것은 거의 항상, 지금까지 수용되고 입증된 이론에 대한 실험적 오류판정이다: 오류판정은 다시 이론에 의하여 통제를 받는 시험들의 결과이다. 유명한 사례들은, 상대성 이론을 낳았던 마이켈슨-몰리(Michelson-Morley) 실험이며, 루머(Lummer)와 프링스하임(Pringsheim)이 레일리(Rayleigh)와 진스(Jeans)의 방사공식 및 빈(Wien)의 방사공식을 오류로 판정한 것인데 그로 인하여 양자론이 탄생했다. 우발적인 발견들도 물론 발생하지만 그 발견들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마흐(Mach)는3 ‘우발적 상황들에 의한 과학적 견해들의 수정’에 대하여 그런 경우들에서 올바르게 언급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의도와 반대로 이론들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우리가 다음 질문에 답변하는 것은 이제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왜 다른 이론들보다 선호하여 한 이론을 수용하는가?
선호는 틀림없이, 이론을 구성하는 서술들에 대한 경험적 정당화 같은 것 때문이 아니다; 선호는 이론을 논리적으로 경험에게로 환원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이론들과 경쟁하여 자체를 가장 잘 지탱하는 이론을 선택한다; 자연선택에 의하여 자체가 생존하기에 최적임을 증명하는 이론. 이것은, 지금까지 가장 혹독한 시험들을 견뎌낸 이론일 뿐만 아니라 가장 엄격한 정도로도 또한 시험될 수 있는 이론일 것이다. 이론은 자체를 적용함에 의하여 우리가 시험하는, 그리고 적용사례들의 결과들에 의하여 자체의 적합성에 관하여 우리가 판단하는 도구이다.*
논리적인 관점에서, 이론 시험하기는 그 수용이나 배척이 반대로 우리의 결정들에 달린 기초명제들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이론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결정들이다. 이런 정도까지 ‘우리는 어떻게 이론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규약주의자에 의하여 주어지지는 답변을 닮는다; 그리고 그와 같이 나는, 이 선택이 부분적으로 유용성에 대한 고찰들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견해들과 규약주의자의 견해들 사이에는 거대한 차이점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경험적 방법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규약이나 결정은 전칭명제들에 대한 우리의 수용을 즉각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반대로, 규약이나 결정은 단칭명제들에 – 다시 말해서, 기초명제들 – 대한 우리의 수용에 개입한다는 것.
규약주의자에게는, 전칭명제들의 수용이 그의 단순성(simplicity)이라는 원칙에 의하여 규제된다: 규약주의자는 가장 단순한 이론체계를 선택한다. 대조적으로 나는, 첫 번째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시험들의 엄격성이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내가 ‘단순성’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시험들의 엄격성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성에 대한 나의 개념은 규약주의자의 그 개념과 크게 다르다; 46절 참조.) 그래서 나는, 이론의 운명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시험의 결과, 다시 말해서 기초명제들에 관한 합의라고 믿는다. 규약주의자와 함께 나는, 특정 이론의 선택은 행위인 실제적 문제라고 믿는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선택이 이론의 적용과 이 적용과 연결된 기초서술들의 수용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반면 규약주의자에게는, 심미적 동기들이 결정이다.
그리하여 합의에 의하여 결정되는 명제들이 전칭이 아니라 단칭이라고 믿는 데서 나는 규약주의자와 다르다. 그리고 기초명제들은 우리의 즉각적인 경험들에 의하여 정당화될 수 있지 않고, 논리적 관점에서 행위에 의하여, 자유로운 결정에 의하여 수용된다고 주장하는 데서 나는 규약주의자와 다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이것은 혹시 의도적이고 잘-적응된 반응일 것이다.)
정당화와 결정의 – 규칙들에 의하여 통제되는 절차에 따라서 이룩된 결정 - 중요한 구분은 아마도 유사점의 도움을 받아서 설명될지도 모른다: 오래된 배심원들에 의한 재판절차.
배심원단의 평결(verdict)은 (vere dictum = 진실로 언급된), 실험가의 답변처럼, 가장 혹독하고 가장 확실한 형태로 배심원단에게 제시되어야하는 사실의 문제에 (quid facti?)에 대한 답변이다. 그러나 무슨 질문이 제기되는지 그리고 그 질문이 어떻게 제기되는지는 대부분 법률적 상황에, 다시 말해서 형법의 특정 체계에 (이론들의 체계에 일치하는) 의존할 것이다. 자체의 결정에 의하여, 배심원단은 합의에 의하여 사실적 발생에 – 말하자면 기초명제 – 관한 서술을 수용한다. 이 결정의 중요성은, 이 결정으로부터 이론체계의 (형법의) 전칭명제들과 함께 특정 결과들이 연역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서, 결정은 이론체계의 적용에 관한 토대를 형성한다; 평결은 ‘사실에 대하여 참인 서술’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서술은 단지 배심원단이 그 서술을 수용했다는 이유로만 참일 필요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사실은, 폐기되거나 수정되는 평결을 허용하는 규칙에서 인정된다.
평결은, 규칙들에 의하여 통제되는 절차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이 규칙들은 주로, 오로지는 아닐지라도, 객관적인 진실을 발견으로 귀결되도록 고안된 특정 근본적인 원칙들에 근거한다. 이 규칙들은 주관적인 확신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관적인 편견에 대해서도 때때로 여지를 남겨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 오래된 절차의 이 특별한 면들을 무시하고 객관적인 진실의 발견을 촉진할 목표에만 근거한 절차를 상상할지라도, 배심원단의 평결은 그 평결 자체가 주장하는 것의 진실성을 결코 정당화하거나 그 진실성에 대한 근거들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일 터이다.
배심원들의 주관적인 확신들도 또한 이룩된 결정을 정당화한다고 결코 믿어질 수 없다; 물론 그 확신들과 이룩된 결정 사이에는 밀접한 인과적
관련성이 – 심리학적 법칙들에 의하여 아마도 서술될 관련성 – 있다; 그리하여 이 확신들은 결정의 ‘동기들’로 지칭될 것이다. 확신들은 정당화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양한 규칙들이 배심원단의 절차를 (예를 들어, 단순하거나 제한된 다수) 통제한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이것은, 배심원들의 확신들과 그들의 평결 사이의 관계가 크게 다를 것임을 보여준다.
배심원단의 평결과 대조적으로, 판사의 판결은 ‘합리적’이다; 그 판결은 정당화를 필요로 하고 정당화를 포함한다. 판사는 다른 서술들에 의하여 판결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거나 혹은 다른 서술들로부터 판결을 논리적으로 연역하려고 노력한다: 초기조건들의 역할을 하는 평결과 연결된 법체계의 서술들. 이것이, 판결은 논리적 토대들을 근거로 도전을 받을 이유이다. 다른 한편으로 배심원단의 결정은, 그 결정이 수용된 절차의 규칙들에 따라서 이루어졌는지를 질문함에 의하여 도전을 받을 수 있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형식적으로이지만 자체의 내용에 관해서는 아니다. (결정의 내용에 대한 정당화는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보고서’라기보다는 ‘동기가 부여된 보고서’로 중요하게 지칭된다.)
이 절차와 우리가 기초명제들을 결정하는 절차 사이의 유사점은 분명하다. 그 유사점은, 예를 들어, 기초명제들의 상대성과 그 기초명제들이 이론에 의하여 제기된 문제들에 의존하는 방식을 조명한다. 배심원들에 의한 재판의 경우에, 먼저 결정에 의하여 이룩된 평결이 없다면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 분명히 불가능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결은, 일반적인 법전의 한 부분과 일치하고 그리하여 그 부분을 적용하는 절차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 경우는 기초명제들의 경우와 유사하다. 기초명제들의 수용은 이론체계 적용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론체계의 추가적인 적용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이 적용뿐이다.
객관적 과학의 경험적 토대에는 그리하여 자체에 관하여 ‘절대적인’ 것이 없다. 과학은 견고한 기반에 근거하지 않는다. 과학적 이론들의 대담한 구조는, 말하자면, 습지 위에서 올라간다. 그 구조는 말뚝들 위에 세워진 빌딩과 같다. 말뚝들은 위에서부터 아래 습지 속으로 박히지 자연적이거나 ‘주어진’ 기초 아래로 박히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말뚝을 더 깊이 박는 것을 중단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확고한 지반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최소한 당분간 말뚝들이 구조를 지탱하기에 충분히 확고하다는 것에 우리가 만족할 때 우리는 중단할 따름이다.
부록, 1972년
(1) 내가 사용하는 용어 ‘토대(basis)’에는 기묘한 함축이 있다: 확고하지 않는 것이 토대이다.
(2) 나는 사실주의적이고 객관주의적인 관점을 상정한다: 나는 비판적인 시험하기에 의하여 ‘토대’로서의 지각(知覺: perception)을 대체하려고 한다. (3) 우리의 관찰 경험들은 시험되고 있음을 결코 초월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이론들로써 잉태된다. (4) ‘기초명제들’은 ‘시험 서술들’이다: 기초명제들은, 모든 언어처럼, 이론들로써 잉태된다. (심지어 ‘지금 여기 붉은’과 같은 서술들을 허용하는 ‘현상적’ 언어도 시공 및 색깔에 관한 이론들로써 잉태될 터이다.)
5
THE PROBLEM OF THE EMPIRICAL BASIS
We have now reduced the question of the falsifiability of theories to that of the falsifiability of those singular statements which I have called basic statements. But what kind of singular statements are these basic statements? How can they be falsified? To the practical research worker, these questions may be of little concern. But the obscurities and misunderstandings which surround the problem make it advisable to discuss it here in some detail.
25 PERCEPTUAL EXPERIENCES AS EMPIRICAL BASIS: PSYCHOLOGISM
The doctrine that the empirical sciences are reducible to sense- perceptions, and thus to our experiences, is one which many accept as obvious beyond all question. However, this doctrine stands or falls with inductive logic, and is here rejected along with it. I do not wish to deny that there is a grain of truth in the view that mathematics and logic are based on thinking, and the factual sciences on sense-perceptions. But what is true in this view has little bearing on the epistemological problem. And indeed, there is hardly a problem in epistemology which
THE PROBLEM OF THE EMPIRICAL BASIS
has suffered more severely from the confusion of psychology with logic than this problem of the basis of statements of experience.
The problem of the basis of experience has troubled few thinkers so deeply as Fries. 1 He taught that, if the statements of science are not to be accepted dogmatically, we must be able to justify them. If we demand justification by reasoned argument, in the logical sense, then we are committed to the view that statements can be justified only by statements. The demand that all statements are to be logically justified (described by Fries as a 'predilection for proofs') is therefore bound to lead to an infinite regress. Now, if we wish to avoid the danger of dogmatism as well as an infinite regress, then it seems as if we could only have recourse to psychologism, i.e. the doctrine that statements can be justified not only by statements but also by perceptual experience. Faced with this trilemma —
dogmatism vs. infinite regress vs. psychologism — Fries, and with him almost all epistemologists who wished to account for our empirical knowledge, opted for psychologism. In sense-experience, he taught, we have 'immediate knowledge': 2 by this immediate knowledge, we may justify our 'mediate knowledge' — knowledge expressed in the symbolism of some language. And this mediate knowledge includes, of course, the statements of science.
Usually the problem is not explored as far as this. In the epistemologies of sensationalism and positivism it is taken for granted that empirical scientific statements 'speak of our experiences'. 3 For how could we ever reach any knowledge of facts if not through sense- perception? Merely by taking thought a man cannot add an iota to his knowledge of the world of facts. Thus perceptual experience must be the sole 'source of knowledge' of all the empirical sciences. All we know about the world of facts must therefore be expressible in the form of statements about our experiences. Whether this table is red or blue can be found out only by consulting our sense-experience. By the immediate feeling of conviction which it conveys, we can distinguish the true statement, the one whose terms agree with experience, from
1 J. F. Fries, Neue oder anthropologisclie Kritik der Vernunft (1828 to 1831).
2 Cf. for example, J. Kraft, Von Husseri zu Heidegger, 1932, pp. 102 f. (*Second edition, 1957, pp. 1 08 f.)
3 1 am following here almost word for word the expositions of P Frank (cf. section 27, note 4) and H. Hahn (cf. section 27, note 1).
SOME STRUCTURALCOMPONENTS OF A THEORY OF EXPERIENCE
the false statement, whose terms do not agree with it. Science is merely an attempt to classify and describe this perceptual knowledge, these immediate experiences whose truth we cannot doubt; it is the systematic presentation of our immediate convictions.
This doctrine founders in my opinion on the problems of induction and of universals. For we can utter no scientific statement that does not go far beyond what can be known with certainty 'on the basis of immediate experience'. (This fact may be referred to as the 'transcendence inherent in any description'.) Every description uses universal names (or symbols, or ideas) ; every statement has the character of a theory, of a hypothesis. The statement, 'Here is a glass of water' cannot be verified by any observational experience. The reason is that the universals which appear in it cannot be correlated with any specific sense-experience. (An 'immediate experience' is only once 'immediately given'; it is unique.) By the word 'glass', for example, we denote physical bodies which exhibit a certain law-like behaviour, and the same holds for the word 'water'. Universals cannot be reduced to classes of experiences; they cannot be 'constituted'.4
26 CONCERNING THE SO-CALLED 'PROTOCOL SENTENCES'
The view which I call 'psychologism' , discussed in the previous section, still underlies, it seems to me, a modern theory of the empirical basis, even though its advocates do not speak of experiences or perceptions but, instead, of 'sentences' — sentences which represent experiences. These are called protocol sentences by Neurath 1 and by Carnap.2
A similar theory had been held even earlier by Reininger. His starting-point was the question: Wherein lies the correspondence or agreement between a statement and the fact or state of affairs which it describes? He came to the conclusion that statements can be compared only with statements. According to his view, the correspondence of a
4 Cf. note 2 to section 20, and text. *'Constituted' is Carnap's term.
1 The term is due to Neurath; cf., for example, Soziologie, in Erkermtnis 2, 1932, p. 393.
2 Carnap, Erkenntnis 2, 1932, pp. 432 ft; 3, 1932, pp. 107 ft.
THE PROBLEM OF THE EMPIRICAL BASIS
statement with a fact is nothing else than a logical correspondence between statements belonging to different levels of universality: it is 3 '. . . the correspondence of higher level statements with statements which are of similar content, and ultimately with statements recording experiences'. (These are sometimes called 'elementary statements' by Reininger.4)
Carnap starts with a somewhat different question. His thesis is that all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speak 'of the forms of speech'.5 The logic of science has to investigate 'the forms of scientific language'. 6 It does not speak of (physical) 'objects' but of words; not of facts, but of sentences. With this, the correct, the 'formal mode of speech', Carnap contrasts the ordinary or, as he calls it, the 'material mode of speech'. If confusion is to be avoided, then the material mode of speech should only be used where it is possible to translate it into the correct formal mode of speech.
Now this view — with which I can agree — leads Carnap (like Reininger) to assert that we must not say, in the logic of science, that sentences are tested by comparing them with states of affairs or with experiences: we may only say that they can be tested by comparing them with other sentences. Yet Carnap is nevertheless really retaining the fundamental ideas of the psychologistic approach to the problem; all that he is doing is to translate them into the 'formal mode of speech'. He says that the sentences of science are tested 'with the help of proto-
col sentences'; 7 but since these are explained as statements or sentences 'which are not in need of confirmation but serve as a basis for all the other sentences of science', this amounts to saying — in the ordinary 'material' mode of speech — that the protocol sentences refer to the 'given': to the 'sense-data'. They describe (as Carnap himself puts it) 'the contents of immediate experience, or the phenomena; and thus the simplest knowable facts'. 8 Which shows clearly enough that the theory of protocol sentences is nothing but psychologism translated
3 R. Reininger, Metaphysik tier Wirklichkeit, 1 93 1 , p. 134.
4 Reininger, op. cit., p. 132.
5 Carnap, Erkenntnis 2, 1932, p. 435, 'These der Metalogik'.
6 Carnap, Erkenntnis. 3, 1933, p. 228.
7 Carnap, Erkenntnis 2, 1932, p. 43 7.
8 Carnap, Erkenntnis, p. 438.
SOME STRUCTURAL COMPONENTS OF A THEORY OF EXPERIENCE
into the formal mode of speech. Much the same can be said of Neurath's view: 9 he demands that in protocol sentences such words as 'perceive', 'see', etc., should occur together with the full name of the author of the protocol sentence. Protocol sentences, as the term indicates, should be records or protocols of immediate observations, or perceptions.
Like Reininger, 10 Neurath holds that perceptual statements recording experiences — i.e. 'protocol sentences' — are not irrevocable, but that they can sometimes be rejected. He opposes 11 Carnap's view (since revised by the latter 12 ) that protocol sentences are ultimate, and not in need of confirmation. But whilst Reininger describes a method of testing his 'elementary' statements, in cases of doubt, by means of other statements — it is the method of deducing and testing conclusions — Neurath gives no such method. He only remarks that we can either
'delete' a protocol sentence which contradicts a system, '. . . or else accept it, and modify the system in such a way that, with the sentence added, it remains consistent'.
Neurath's view that protocol sentences are not inviolable represents, in my opinion, a notable advance. But apart from the replacement of perceptions by perception-statements — merely a translation into the formal mode of speech — the doctrine that protocol sentences may be revised is his only advance upon the theory (due to Fries) of the immediacy of perceptual knowledge. It is a step in the right direction; but it leads nowhere if it is not followed up by another step: we need a set of rules to limit the arbitrariness of 'deleting' (or else 'accepting') a
protocol sentence. Neurath fails to give any such rules and thus unwittingly throws empiricism overboard. For without such rules, empirical statements are no longer distinguished from any other sort of statements. Every system becomes defensible if one is allowed (as everybody is, in Neurath's view) simply to 'delete' a protocol sentence if it is inconvenient. In this way one could not only rescue any system, in the
9 Otto Neurath, Erkermtnis 3, 1933, pp. 205 ff Neurath gives the following example, 'A complete protocol statement might run: {Otto's protocol at 3 hrs. 17mins. [Otto's speech-thought was at 3 hrs. 1 6 mins. : (in the room, at 3 hrs. 1 5 mins. , there was a table which was observed by Otto)]}.'
10 Reininger, op. cit., p. 133.
11 Neurath, op. cit., pp. 209 f.
12 Carnap, Erkermtnis 3, 1933, pp. 215 ff.; cf. note 1 to section 29.
THE PROBLEM OF THE EMPIRICAL BASIS
manner of conventionalism; but given a good supply of protocol sentences, one could even confirm it, by the testimony of witnesses who have testified, or protocolled, what they have seen and heard. Neurath avoids one form of dogmatism, yet he paves the way for any arbitrary system to set itself up as 'empirical science'.
Thus it is not quite easy to see what part the protocol sentences are supposed to play in Neurath's scheme. In Carnap's earlier view, the system of protocol sentences was the touchstone by which every assertion of an empirical science had to be judged. This is why they had to be 'irrefutable'. For they alone could overthrow sentences — sentences other than protocol sentences, of course. But if they are deprived of this function, and if they themselves can be overthrown by theories, what are they for? Since Neurath does not try to solve the problem of demarcation, it seems that his idea of protocol sentences is merely a relic — a
surviving memorial of the traditional view that empirical science starts from perception.
27 THE OBJECTIVITY OF THE EMPIRICAL BASIS
1 propose to look at science in a way which is slightly different from that favoured by the various psychologistic schools: I wish to distinguish sharply between objective science on the one hand, and 'our knowledge' on the other.
I readily admit that only observation can give us 'knowledge concerning facts', and that we can (as Hahn says) 'become aware of facts only by observation'.1 But this awareness, this knowledge of ours, does not justify or establish the truth of any statement. I do not believe, therefore, that the question which epistemology must ask is, '. . . on what does our knowledge rest? ... or more exactly, how can I, having had the experience S. justify my description of it, and defend it against
doubt?'2 This will not do, even if we change the term 'experience' into 'protocol sentence'. In my view, what epistemology has to ask is, rather: how do we test scientific statements by their deductive
1 H. Hahn, Logik, Mathematik und Naturerkennen, in Einheitswissenschaft 2, 1933, pp. 19 and 24.
2 Cf. Carnap, for instance, Scheinprobleme in der Philosophic, 1928, p. 15 (no italics in the original) .
SOME STRUCTURAL COMPONENTS OF A THEORY OF EXPERIENCE
consequences?* 1 And what kind of consequences can we select for this purpose if they in their turn are to be inter-subjectively testable?
By now, this kind of objective and non-psychological approach is pretty generally accepted where logical or tautological statements are concerned. Yet not so long ago it was held that logic was a science dealing with mental processes and their laws — the laws of our thought. on this view there was no other justification to be found for logic than the alleged fact that we just could not think in any other way. A logical inference seemed to be justified because it was experienced as a necessity of thought, as a feeling of being compelled to think along certain
lines. In the field of logic, this kind of psychologism is now perhaps a thing of the past. Nobody would dream of justifying the validity of a logical inference, or of defending it against doubts, by writing beside it in the margin the following protocol sentence. 'Protocol: In checking this chain of inferences today, I experienced an acute feeling of conviction.'
The position is very different when we come to empirical statements of science. Here everybody believes that these are grounded on experiences such as perceptions; or in the formal mode of speech, on protocol sentences. Most people would see that any attempt to base logical statements on protocol sentences is a case of psychologism. But curiously enough, when it comes to empirical statements, the same kind of thing goes today by the name of 'physicalism'. Yet whether statements of logic are in question or statements of empirical science, I think the answer is the same: our knowledge, which may be described vaguely as a system of dispositions, and which may be of concern to psychology, may be in both cases linked with feelings of belief or of conviction: in the one case, perhaps, with the feeling of being compelled to think in a certain way; in the other with that of 'perceptual assurance'. But all this interests only the psychologist. It does not even touch upon problems like those of the logical connections between scientific statements, which alone interest the epistemologist.
*1 At present, I should formulate this question thus. How can we best criticize our theories (our hypotheses, our guesses), rather than defend them against doubt? Of course, testing was always, in my view, part of criticizing. (Cf. my Postscript, sections *7, text between notes 5 and 6, and end of *52.)
THE PROBLEM OF THE EMPIRICAL BASIS
(There is a widespread belief that the statement T see that this table here is white', possesses some profound advantage over the statement 'This table here is white', from the point of view of epistemology. But from the point of view of evaluating its possible objective tests, the first statement, in speaking about me, does not appear more secure than the second statement, which speaks about the table here.)
There is only one way to make sure of the validity of a chain of logical reasoning. This is to put it in the form in which it is most easily testable: we break it up into many small steps, each easy to check by anybody who has learnt the mathematical or logical technique of transforming sentences. If after this anybody still raises doubts then we can only beg him to point out an error in the steps of the proof, or to think the matter over again. In the case of the empirical sciences, the situation is much the same. Any empirical scientific statement can be presented (by describing experimental arrangements, etc.) in such a way that anyone who has learned the relevant technique can test it. If, as a result, he rejects the statement, then it will not satisfy us if he tells us all about his feelings of doubt or about his feelings of conviction as to his perceptions. What he must do is to formulate an assertion which contradicts our own, and give us his instructions for testing it. If he fails to do this we can only ask him to take another and perhaps a more careful look at our experiment, and think again.
An assertion which owing to its logical form is not testable can at best operate, within science, as stimulus: it can suggest a problem. In the field of logic and mathematics, this may be exemplified by Fermat's problem, and in the field of natural history, say, by reports about sea-serpents. In such cases science does not say that the reports are unfounded; that Fermat was in error or that all the records of observed sea-serpents are lies. Instead, it suspends judgment.3
Science can be viewed from various standpoints, not only from that of epistemology; for example, we can look at it as a biological or as a sociological phenomenon. As such it might be described as a tool, or an instrument, comparable perhaps to some of our industrial machinery. Science may be regarded as a means of production — as the
3 Cf. the remark on 'occult effects' in section 8.
SOME STRUCTURAL COMPONENTS OF A THEORY OF EXPERIENCE
last word in 'roundabout production'. 4 Even from this point of view science is no more closely connected with 'our experience' than other instruments or means of production. And even if we look at it as gratifying our intellectual needs, its connection with our experiences does not differ in principle from that of any other objective structure. Admittedly it is not incorrect to say that science is '. . . an instrument' whose purpose is ' ... to predict from immediate or given experiences
later experiences, and even as far as possible to control them'. 5 But I do not think that this talk about experiences contributes to clarity. It has hardly more point than, say, the not incorrect characterization of an oil derrick by the assertion that its purpose is to give us certain experiences: not oil, but rather the sight and smell of oil; not money, but rather the feeling of having money.
28 BASIC STATEMENTS
It has already been briefly indicated what role the basic statements play within the epistemological theory I advocate. We need them in order to decide whether a theory is to be called falsifiable, i.e. empirical. (Cf. section 21.) And we also need them for the corroboration of falsifying hypotheses, and thus for the falsification of theories. (Cf. section 22.)
Basic statements must therefore satisfy the following conditions. (a) From a universal statement without initial conditions, no basic statement can be deduced.* 1 on the other hand, (b) a universal statement
4 The expression is Bohm-Bawerk's ('Produktionsumweg').
5 Frank, Das Kausakjesetz und seine Grenzen, 1932, p. 1. ^Concerning instrumentalism, see note *1 before section 12, and my Postscript, especially sections *12 to *15.
*1 When writing this, I believed that it was plain enough that from Newton's theory alone, without initial conditions, nothing of the nature of an observation statement can be deducible (and therefore certainly no basic statements) . Unfortunately, it turned out that this fact, and its consequences for the problem of observation statements or 'basic statements', was not appreciated by some of the critics of my book. I may therefore add here a few remarks.
First, nothing observable follows from any pure all-statement — 'All swans are white', say. This is easily seen if we contemplate the fact that 'All swans are white' and 'All swans are black' do not, of course, contradict each other, but together merely imply that there are no swans — clearly not an observation statement, and not even one that can be 'verified'. (A unilaterally falsifiable statement like 'All swans are white', by the way, has
THE PROBLEM OF THE EMPIRICAL BASIS
and a basic statement can contradict each other. Condition (b) can only be satisfied if it is possible to derive the negation of a basic statement from the theory which it contradicts. From this and condition (a) it follows that a basic statement must have a logical form such that its negation cannot be a basic statement in its turn.
We have already encountered statements whose logical form is different from that of their negations. These were universal statements and existential statements: they are negations of one another, and they differ in their logical form. Singular statements can be constructed in an analogous way. The statement: 'There is a raven in the space-time region k' may be said to be different in its logical form —
and not only in its linguistic form — from the statement 'There is no raven in the space-time region k'. A statement of the form 'There is a so-and-so in the region k' or 'Such-and-such an event is occurring in the region k' (cf. section 23) may be called a 'singular existential statement' or a 'singular there-is statement'. And the statement which results from negating it, i.e. 'There is no so-and-so in the region k' or 'No event of such-and-such a kind is occurring in the region k', may the same logical form as 'There are no swans', for it is equivalent to 'There are no non- white swans'.)
Now if this is admitted, it will be seen at once that the singular statements which can be deduced from purely universal statements cannot be basic statements. I have in mind statements of the form: 'If there is a swan at the place k, then there is a white swan at the place k.' (Or, 'At k, there is either no swan or a white swan.') We see now at once why these 'instantial statements' (as they may be called) are not basic statements. The reason is that these instantial statements cannot play the role of test statements (or of potential falsifiers) which is precisely the role which basic statements are supposed to play. If we were to accept instantial statements as test statements, we should obtain for any theory (and thus both for 'All swans are white' and for 'All swans are black') an overwhelming number of verifications — indeed, an infinite number, once we accept as a fact that the overwhelming part of the world is empty of swans.
Since 'instantial statements' are derivable from universal ones, their negations must be potential falsifiers, and may therefore be basic statements (if the conditions stated below in the text are satisfied). Instantial statements, vice versa, will then be of the form of negated basic statements (see also note *4 to section 80).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basic statements (which are too strong to be derivable from universal laws alone) will have a greater informative content than their instantial negations; which means that the content of basic statements exceeds their logical probability (since it must exceed 1/2).
These were some of the considerations underlying my theory of the logical form of
basic statements. (See my Conjectures and Refutations, 1963, pp. 386 f )
SOME STRUCTURAL COMPONENTS OF A THEORY OF EXPERIENCE
be called a 'singular non-existence statement', or a 'singular there-is-not
statement'.
We may now lay down the following rule concerning basic statements: basic statements have the form of singular existential statements. This rule means that basic statements will satisfy condition (a) , since a singular existential statement can never be deduced from a strictly universal statement, i.e. from a strict non-existence statement. They will also satisfy condition (b), as can be seen from the fact that from every singular existential statement a purely existential statement can be derived simply by omitting any reference to any individual space-time region; and as we have seen, a purely existential statement may indeed
contradict a theory.
It should be noticed that the conjunction of two basic statements, p and r, which do not contradict each other, is in turn a basic statement. Sometimes we may even obtain a basic statement by joining one basic statement to another statement which is not basic. For example, we may form the conjunction of the basic statement, r 'There is a pointer at the place k' with the singular non-existence statement p, 'There is no pointer in motion at the place k'. For clearly, the conjunction r-p ('r-and- non-p') of the two statements is equivalent to the singular existential statement 'There is a pointer at rest at the place k'. This has the consequence that, if we are given a theory t and the initial conditions r,
from which we deduce the prediction p, then the statement r-p will be a falsifier of the theory, and so a basic statement. (On the other hand, the conditional statement 'r — > p' i.e. 'If r then p', is no more basic than the negation p, since it is equivalent to the negation of a basic statement, viz. to the negation of r-p.)
These are the formal requirements for basic statements; they are satisfied by all singular existential statements. In addition to these, a basic statement must also satisfy a material requirement — a requirement concerning the event which, as the basic statement tells us, is occurring at the place k. This event must be an 'observable' event; that is to say, basic statements must be testable, inter-subjectively, by 'observation'. Since they are singular statements, this requirement can of course only refer to observers who are suitably placed in space and time (a point which I shall not elaborate) .
No doubt it will now seem as though in demanding observability, I
THE PROBLEM OF THE EMPIRICAL BASIS
have, after all, allowed psychologism to slip back quietly into my theory. But this is not so. Admittedly, it is possible to interpret the concept of an observable event in a psychologistic sense. But I am using it in such a sense that it might just as well be replaced by 'an event involving position and movement of macroscopic physical bodies'. Or we might lay it down, more precisely, that every basic statement must either be itself a statement about relative positions of physical bodies, or that it must be equivalent to some basic statement of this 'mechanistic' or 'materialistic' kind. (That this stipulation is practicable is connected with the fact that a theory which is inter-subjectively testable will also be inter-sensually 1 testable. This is to say that tests involving the perception of one of our senses can, in principle, be replaced by tests involving other senses.) Thus the charge that, in appealing to observability, I have stealthily readmitted psychologism would have no more force than the charge that I have admitted mechanism or materialism. This shows that my theory is really quite neutral and that neither of these labels should be pinned to it. I say all this only so as to save the term 'observable', as I use it, from the stigma of psychologism. (Observations and perceptions may be psychological, but observability is not.) I have no intention of defining the term 'observable' or 'observable event', though I am quite ready to elucidate it by means of either psychologistic or mechanistic examples. I think that it should be introduced as an undefined term which becomes sufficiently precise in use: as a primitive concept whose use the epistemologist has to learn, much as he has to learn the use of the term 'symbol', or as the physicist has to learn the use of the term 'mass-point'.
Basic statements are therefore — in the material mode of speech — statements asserting that an observable event is occurring in a certain individual region of space and time. The various terms used in this definition, with the exception of the primitive term 'observable', have been explained more precisely in section 23; 'observable' is undefined, but can also be explained fairly precisely, as we have seen here.
1 Carnap, Erkemitais 2, 1932, p.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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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THE RELATIVITY OF BASIC STATEMENTS. RESOLUTION OF FRIES'S TRILEMMA
Every test of a theory, whether resulting in its corroboration or falsification, must stop at some basic statement or other which we decide to accept. If we do not come to any decision, and do not accept some basic statement or other, then the test will have led nowhere. But considered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the situation is never such that it compels us to stop at this particular basic statement rather than at that, or else give up the test altogether. For any basic statement can again in its turn be subjected to tests, using as a touchstone any of the basic statements which can be deduced from it with the help of some theory, either the
one under test, or another. This procedure has no natural end. 1 Thus if the test is to lead us anywhere, nothing remains but to stop at some point or other and say that we are satisfied, for the time being.
It is fairly easy to see that we arrive in this way at a procedure according to which we stop only at a kind of statement that is especially easy to test. For it means that we are stopping at statements about whose acceptance or rejection the various investigators are likely to reach agreement. And if they do not agree, they will simply continue with the tests, or else start them all over again. If this too leads to no result, then we might say that the statements in question were not
inter-subjectively testable, or that we were not, after all, dealing with observable events. If some day it should no longer be possible for scientific observers to reach agreement about basic statements this would amount to a failure of language as a means of universal communication. It would amount to a new 'Babel of Tongues': scientific discovery would be reduced to absurdity. In this new Babel, the soaring edifice of science would soon lie in ruins.
1 Cf. Carnap, Erkermtnis 3, 1932, p. 224. I can accept this report by Carnap of my theory, save for a few not too important details. These are, first, the suggestion that basic statements (called by Carnap 'protocol statements') are the starting points from which science is built up; secondly, the remark (p. 225) that a protocol statement can be confirmed 'with such and such degree of certainty'; thirdly that 'statements about perceptions' constitute 'equally valid links in the chain' and that it is these statements about perception to which we 'appeal in critical cases'. Cf. the quotation in the text to the next note. I wish to take this opportunity of thanking Professor Carnap for his friendly words about my unpublished work, at the place mentioned.
THE PROBLEM OF THE EMPIRICAL BASIS
Just as a logical proof has reached a satisfactory shape when the difficult work is over, and everything can be easily checked, so, after science has done its work of deduction or explanation, we stop at basic statements which are easily testable. Statements about personal experiences — i.e. protocol sentences — are clearly not of this kind; thus they will not be very suitable to serve as statements at which we stop. We do of course make use of records or protocols, such as certificates of tests issued by a department of scientific and industrial research. These, if the need arises, can be re-examined. Thus it may become necessary, for example, to test the reaction-times of the experts who carry out the tests (i.e. to determine their personal equations). But in general, and especially '. . .in critical cases' we do stop at easily testable statements, and not, as Carnap recommends, at perception or protocol sentences; i.e. we do not '. . . stop just at these . . . because the inter-subjective testing of statements about perceptions ... is relatively
complicated and difficult'.2
What is our position now in regard to Fries's trilemma, the choice between dogmatism, infinite regress, and psychologism? (Cf. section 25.) The basic statements at which we stop, which we decide to accept as satisfactory, and as sufficiently tested, have admittedly the character of dogmas, but only in so far as we may desist from justifying them by further arguments (or by further tests). But this kind of dogmatism is innocuous since, should the need arise, these state-
ments can easily be tested further. I admit that this too makes the chain of deduction in principle infinite. But this kind of 'infinite regress' is also innocuous since in our theory there is no question of trying to prove any statements by means of it. And finally, as to psychologism: I admit, again, that the decision to accept a basic statement, and to be satisfied with it, is causally connected with our experiences — especially with our perceptual experiences. But we do not attempt to justify basic statements by these experiences. Experiences can motivate a decision, and hence an acceptance or a rejection of a statement, but a basic
2 Cf. the previous note. *This paper of Carnap's contained the first published report of my theory of testing hypotheses; and the view here quoted from it was there erroneously attributed to me.
SOME STRUCTURAL COMPONENTS OF A THEORY OF EXPERIENCE
statement cannot be justified by them — no more than by thumping the table.3
30 THEORY AND EXPERIMENT
Basic statements are accepted as the result of a decision or agreement; and to that extent they are conventions. The decisions are reached in accordance with a procedure governed by rules. Of special importance among these is a rule which tells us that we should not accept stray basic statements — i.e. logically disconnected ones — but that we should accept basic statements in the course of testing theories; of raising searching questions about these theories, to be answered by the acceptance of basic statements.
Thus the real situation is quite different from the one visualized by the naive empiricist, or the believer in inductive logic. He thinks that we begin by collecting and arranging our experiences, and so ascend the ladder of science. Or, to use the more formal mode of speech, that if we wish to build up a science, we have first to collect protocol sentences. But if I am ordered: 'Record what you are now experiencing' I shall hardly know how to obey this ambiguous order. Am I to report that I am writing; that I hear a bell ringing; a newsboy shouting; a loudspeaker droning; or am I to report, perhaps, that these noises irritate me? And even if the order could be obeyed: however rich a collection of statements might be assembled in this way, it could never add up to a science. A science needs points of view, and theoretical problems;
Agreement upon the acceptance or rejection of basic statements is reached, as a rule, on the occasion of applying a theory; the agreement, in fact, is part of an application which puts the theory to the test. Coming
3 It seems to me that the view here upheld is closer to that of the 'critical' (Kantian) school of philosophy (perhaps in the form represented by Fries) than to positivism. Fries in his theory of our 'predilection for proofs' emphasizes that the (logical) relations holding between statements are quite different from the relation between statements and sense experiences; positivism on the other hand always tries to abolish the distinction: either all science is made part of my knowing, 'my' sense experience (monism of sense data); or sense experiences are made part of the objective scientific network of arguments in the form of protocol statements (monism of statements) .
THE PROBLEM OF THE EMPIRICAL BASIS
to an agreement upon basic statements is, like other kinds of applications, to perform a purposeful action, guided by various theoretical considerations.
We are now, I think, in a position to solve such problems as, for instance, Whitehead's problem of how it is that the tactile breakfast should always be served along with the visual breakfast, and the tactile Times with the visible and the audibly rustling Times.* 1 The inductive logician who believes that all science starts from stray elementary perceptions must be puzzled by such regular coincidences; they must seem to him entirely 'accidental'. He is prevented from explaining regularity by theories, because he is committed to the view that theories are nothing but statements of regular coincidences.
But according to the position reached here, the connections between our various experiences are explicable, and deducible, in terms of theories which we are engaged in testing. (Our theories do not lead us to expect that along with the visible moon we shall be served a tactile moon; nor do we expect to be bothered by an auditory nightmare.) one question, certainly, does remain — a question which obviously cannot be answered by any falsifiable theory and which is therefore 'metaphysical': how is it that we are so often lucky in the theories we
construct — how is it that there are 'natural laws'?*2
All these considerations are important for the epistemological theory of experiment. The theoretician puts certain definite questions to the experimenter, and the latter, by his experiments, tries to elicit a decisive answer to these questions, and to no others. All other questions he tries hard to exclude. (Here the relative independence of sub-systems of a theory may be important.) Thus he makes his test with respect to this one question "... as sensitive as possible, but as insensitive as possible with respect to all other associated questions. . . . Part of this work consists in screening off all possible sources of error." But it is a
mistake to suppose that the experimenter proceeds in this way 'in
*1 A. N. Whitehead, An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Natural Knowledge (1919), 1925, p. 194.
*2 This question will be discussed in section 79 and in appendix *x; see also my Postscript, especially sections *15 and *16.
1 H. Weyl, Philosophic der Mathematik und Naturwissenschaft, 1927, p. 113; English Edition: Philosophy of Mathematics and Natural Science, Princeton, 1 949, p. 116.
SOME STRUCTURAL COMPONENTS OF A THEORY OF EXPERIENCE
order to lighten the task of the theoretician', 2 or perhaps in order to furnish the theoretician with a basis for inductive generalizations. On the contrary, the theoretician must long before have done his work, or at least what is the most important part of his work: he must have formulated his question as sharply as possible. Thus it is he who shows the experimenter the way. But even the experimenter is not in the main engaged in making exact observations; his work, too, is
largely of a theoretical kind. Theory dominates the experimental work from its initial planning up to the finishing touches in the laboratory.*3
This is well illustrated by cases in which the theoretician succeeded in predicting an observable effect which was later experimentally produced; perhaps the most beautiful instance is de Broglie's prediction of the wave-character of matter, first confirmed experimentally by Davisson and Germer.* 4 It is illustrated perhaps even better by cases in which experiments had a conspicuous influence upon the progress of theory. What compels the theorist to search for a better theory, in these cases, is almost always the experimental falsification of a theory, so far accepted and corroborated: it is, again, the outcome of tests guided by theory. Famous examples are the Michelson-Morley experiment which led to the theory of relativity, and the falsification, by Lummer and Pringsheim, of the radiation formula of Rayleigh and Jeans, and of that of Wien, which led to the quantum theory. Accidental discoveries occur too, of course, but they are comparatively rare. Mach3 rightly speaks in such cases of a 'correction of scientific opinions by accidental
2 Weyl, ibid.
*3 1 now feel that I should have emphasized in this place a view which can be found elsewhere in the book (for example in the fourth and the last paragraphs of section 1 9). I mean the view that observations, and even more so observation statements and statements of experimental results, are always interpretations of the facts observed; that they are interpretations in the light of theories. This is one of the main reasons why it is always deceptively easy to find verifications of a theory, and why we have to adopt a highly critical attitude towards our theories if we do not wish to argue in circles: the attitude of trying to refute them.
*4 The story is briefly and excellendy told by Max Born in Albert Einstein, Philosopher- Scientist, edited by E A. Schilpp, 1949, p. 174. There are better illustrations, such as Adams's and Leverrier's discovery of Neptune, or that of Hertzean waves.
3 Mach, Die Prinzipien der Wdrmelehre 1896, p. 438.
THE PROBLEM OF THE EMPIRICAL BASIS
circumstances' (thus acknowledging the significance of theories in spite of himself).
It may now be possible for us to answer the question: How and why do we accept one theory in preference to others?
The preference is certainly not due to anything like a experiential justification of the statements composing the theory; it is not due to a logical reduction of the theory to experience. We choose the theory which best holds its own in competition with other theories; the one which, by natural selection, proves itself the fittest to survive. This will be the one which not only has hitherto stood up to the severest tests, but the one which is also testable in the most rigorous way. A theory is a tool which we test by applying it, and which we judge as to its fitness
by the results of its applications.*5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the testing of a theory depends upon basic statements whose acceptance or rejection, in its turn, depends upon our decisions. Thus it is decisions which settle the fate of theories. To this extent my answer to the question, 'how do we select a theory?' resembles that given by the conventionalist; and like him I say that this choice is in part determined by considerations of utility. But in spite of this, there is a vast difference between my views and his. For I hold that what characterizes the empirical method is just this:
that the convention or decision does not immediately determine our acceptance of universal statements but that, on the contrary, it enters into our acceptance of the singular statements — that is, the basic statements.
For the conventionalist, the acceptance of universal statements is governed by his principle of simplicity: he selects that system which is the simplest. I, by contrast, propose that the first thing to be taken into account should be the severity of tests. (There is a close connection between what I call 'simplicity' and the severity of tests; yet my idea of simplicity differs widely from that of the conventionalist; see section 46.) And I hold that what ultimately decides the fate of a theory is the result of a test, i.e. an agreement about basic statements. With the
* s For a criticism of the 'instrumentalist' view see however the references in note *1 before section 1 2 (p. 3 7) , and in the starred addition to note 1 , section 12.
SOME STRUCTURAL COMPONENTS OF A THEORY OF EXPERIENCE
conventionalist I hold that the choice of any particular theory is an act, a practical matter. But for me the choice is decisively influenced by the application of the theory and the acceptance of the basic statements in connection with this application; whereas for the conventionalist, aesthetic motives are decisive.
Thus I differ from the conventionalist in holding that the statements decided by agreement are not universal but singular. And I differ from the positivist in holding that basic statements are not justifiable by our immediate experiences, but are, from the logical point of view, accepted by an act, by a free decision. (From the psychological point of view this may perhaps be a purposeful and well-adapted
reaction.)
This important distinction, between a justification and a decision — a decision reached in accordance with a procedure governed by rules — might be clarified, perhaps, with the help of an analogy: the old procedure of trial by jury.
The verdict of the jury (vere dictum = spoken truly) , like that of the experimenter, is an answer to a question of fact (quid facti?) which must be put to the jury in the sharpest, the most definite form. But what question is asked, and how it is put, will depend very largely on the legal situation, i.e. on the prevailing system of criminal law (corresponding to a system of theories). By its decision, the jury accepts, by agreement, a statement about a factual occurrence — a basic statement, as it were. The significance of this decision lies in the fact that from it, together with the universal statements of the system (of criminal law) certain consequences can be deduced. In other words, the decision forms the basis for the application of the system; the verdict plays the part of a 'true statement of fact'. But it is clear that the statement need not be true merely because the jury has accepted it. This fact is acknowledged in the rule allowing a verdict to be quashed or revised.
The verdict is reached in accordance with a procedure which is governed by rules. These rules are based on certain fundamental principles which are chiefly, if not solely, designed to result in the discovery of objective truth. They sometimes leave room not only for subjective convictions but even for subjective bias. Yet even if we
THE PROBLEM OF THE EMPIRICAL BASIS
disregard these special aspects of the older procedure and imagine a procedure based solely on the aim of promoting the discovery of objective truth, it would still be the case that the verdict of the jury never justifies, or gives grounds for, the truth of what it asserts.
Neither can the subjective convictions of the jurors be held to justify the decision reached; although there is, of course, a close causal connection between them and the decision reached — a connection which might be stated by psychological laws; thus these convictions may be called the 'motives' of the decision. The fact that the convictions are not justifications is connected with the fact that different rules may regulate the jury's procedure (for example, simple or qualified majority). This shows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onvictions of the
jurors and their verdict may vary greatly.
In contrast to the verdict of the jury, the judgment of the judge is 'reasoned'; it needs, and contains, a justification. The judge tries to justify it by, or deduce it logically from, other statements: the statements of the legal system, combined with the verdict that plays the role of initial conditions. This is why the judgment may be challenged on logical grounds. The jury's decision, on the other hand, can only be challenged by questioning whether it has been reached in accordance with the accepted rules of procedure; i.e. formally, but not as to its content. (A justification of the content of a decision is significantly called a 'motivated report', rather than a 'logically justified report'.)
The analogy between this procedure and that by which we decide basic statements is clear. It throws light, for example, upon their relativity, and the way in which they depend upon questions raised by the theory. In the case of the trial by jury, it would be clearly impossible to apply the 'theory' unless there is first a verdict arrived at by decision; yet the verdict has to be found in a procedure that conforms to, and thus applies, part of the general legal code. The case is analogous to that of basic statements. Their acceptance is part of the application of a theoretical system; and it is only this application which makes any further
applications of the theoretical system possible.
The empirical basis of objective science has thus nothing 'absolute'
SOME STRUCTURALCOMPONENTS OF A THEORY OF EXPERIENCE
about it. 4 Science does not rest upon solid bedrock. The bold structure of its theories rises, as it were, above a swamp. It is like a building erected on piles. The piles are driven down from above into the swamp, but not down to any natural or 'given' base; and if we stop driving the piles deeper, it is not because we have reached firm ground. We simply stop when we are satisfied that the piles are firm enough to carry the structure, at least for the time being.
Addendum, 1972
(1) My term 'basis' has ironical overtones: it is a basis that is not firm.
(2) I assume a realist and objectivist point of view: I try to replace
perception as 'basis' by critical testing. (3) Our observational experiences are
never beyond being tested; and they are impregnated with theories. (4) 'Basic statements' are 'test statements': they are, like all language,
impregnated with theories. (Even a 'phenomenal' language permitting statements like 'now here red' would be impregnated with theories about time, space, and colour.)
4 Weyl (op. cit., p. 83, English edition p. 116) writes: '. . . this pair of opposites, subjective- absolute and objective-relative seems to me to contain one of the most profound epistemological truths which can be gathered from the study of nature. Whoever wants the absolute must get subjectivity — ego-centricity — into the bargain, and whoever longs for objectivity cannot avoid the problem of relativism.' And before this we find, 'What is immediately experienced is subjective and absolute . . . ; the objective world, on the other hand, which natural science seeks to precipitate in pure crystalline form ... is relative'. Born expresses himself in similar terms (Die Relativitdtstheorie Einsteins und ilire physikalischen Grundlagen, 3rd edition, 1 922, Introduction). Fundamentally, this view is Kant's theory of objectivity consistently developed (cf. section 8 and note 5 to that section). Reininger also refers to this situation. He writes in Das Psycho-Physische Problem, 1 91 6, p. 29, 'Metaphysics as science is impossible . . . because although the absolute is indeed experienced, and for that reason can be intuitively felt, it yet refuses to be expressed in words. For "Sphcht die Seele, so spricht, ach! schon die Seele nicht mehr". (If the soul speaks then alas it is no longer the soul that speaks.)'
과학적 발견의 논리, 5장 경험적 근거라는 문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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