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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체는 문제해결 중이다, II부 7장 자유에 관하여

이윤진이카루스 2021. 3. 26. 16:35

II부 7장, 자유에 관하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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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역사 및 정치 관한

고찰

 

 

 

 

 

 

 

 

 

 

 

 

 

7

 

자유에 관하여*

 

 

 

I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그리고 프랑스 알프스에 인간이 정착한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는 아는 바가 없는데 그 정착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던 사람들이 거칠고 통행이 불가능한 알프스 고지대 계곡들로 이주한 것이 어떠했는지를 우리를 정말로 고려해야 하는데 그 계곡들에서 우선 그들은 기껏해야 힘들고 가난하고 위험으로 가득 찬 삶을 삶았다. 가장 개연적인 설명은, 이 사람들이 더 강력한 이웃들에 의하여 정복당하는 것보다 야생에서 불확실한 삶은 선호했다는 것이다. 불확실성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자유를 선택했다. 나는 자주, 특히 스위스인과 티롤인의(Tyrolean) 자유 전통은 스위스의 선사시대 정착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생각을 한다.

현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정치체제들인 영국과 스위스는 오늘날 자유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그 자유를 옹호하려는 그들의 결의에서 그렇게 비슷하다는 것은 여하한 경우에도 흥미롭고 두드러진 사실이다. 이유인즉 많은 다른 측면들, 특히 그들의 정치적 근원들에서 이 두 민주주의 정치체제들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영국의 민주주의는 자체의 출현이 고위 귀족층의 긍지와 독립심에서 기인하고 그 민주주의의 나중 발전은 개신교 사고방식, 개인적인 양심 및 종교적 관용에a 청교도 혁명과 연계된 커다란 종교적이고

 

* 1958년 알파흐(Alpach)에서 행한 학술회의 논문. 1967년 마이즌하임(Meisenheim), Anton Hain 출판사에 의하여 철학과 과학. 지몬 모제의 65세 생일(Die Philosophie und die Wissenschaften. Simon Moser zum 65. Geburststag)에 최초로 발표됨. (이 부분의 허형은 번역은 ‘1958925일 알프파취 포럼에서 발표한 세미나 논문. 1967에 최초로 실림.’이다: 역주)

a 역주: ‘개인적인 양심 및 종교적 관용의 원어 표현은 personal conscience, and religious toleration인데 허형은 번역은 시민의 자각 그리고 종교의 자유이다.

 

정치적인 투쟁들의 결과들 기인한다. 스위스의 민주주의는, 고위 귀족층의

긍지, 독립심 및 개인주의에서가 아니라 산속 농부들의 긍지와 독립심 및 개인주의의 결과였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시작들과 전통들로 인하여 전혀 다른 전통적인 제도들과 전혀 다른 전통적 가치 체계들이 생겼다. 스위스인들, 즉 티롤인들이 삶에서 기대하거나 희망하는 것은, 영국인이 삶에서 기대하거나 희망하는 것과 일반적으로 매우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치체계에서의 차이점은 아마도 부분적으로 교육체계들에 근거한다; 그러나 교육체계들에서의 차이점 자체가, 내가 언급한 저 역사적 및 사회적 차이점들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영국에서는 현 세기 깊숙이까지 교육은 귀족층과 지주들의 특권이었다 지주정치(地主政治: squirearchy); 도시거주자들이나 시민들의 특권이 아니라 땅으로 생활하는 대지주 가문들의 특권. 이 가족들이 교양을 지녔다. 그 가족들로부터 개인적인 학자들과 과학자들과 (흔히 영향력이 있고 원래 비전문가들) 고위 직업군의 사람들이 정치인들, 성직자들a, 판사들, 군인장교들 또한 나왔다. 대조적으로 유럽대륙에서 교양인들은 주로 읍의 거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도시의 자산가들로부터 나왔다. 교육과 교양은 사람이 승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사람이 남의 도움 없이 습득하는 것들이었다. 교육과 교양은 세습된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 아니라 사회적 출세인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의 수단이고 상징이었다. 이로 인하여 영국에서 가난에 대한 싸움이 승리한 것이, 다른 수준에서 일종의 종교적 갈등의 종교적 양심에 대한 귀족들과 읍 주민들의 호소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갈등 지속이었던 반면,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가난에 대한 싸움은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이라는 개념인 페스탈로치의 위대한 교육관련 이상에b 의하여 고취된 이유가 또한 설명된다.

이 모든 깊은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도 방어되어야 하는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영국과 스위스 모두가 알았고 이 가치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개인의 독립인 개인의 자유이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는, 성공 가능성이 적어 보여도 자유는 싸워서 얻는 것임을 그리고 우리가 자유를 옹호해야 함을 배웠다. 1940년 영국이 자유를 위하여 홀로 싸우고 있을 때 처칠은 영국인들에게 승리를 약속하지 않았다. ‘나는 여러분에게 피와 눈물보다

 

a 역주: ‘성직자들의 원어는 clergymen인데 허형은 번역은 서기관이다.

b 역주: ‘페스탈로치의 위대한 교육과련 이상의 원어 표현은 Pestalozzi's great vision of education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나은 것을 약속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저 말로 인하여 영국인들은 계속 싸우려는 용기를 받았다.

스위스에서도 또한, 2차 세계대전 동안에 스위스인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은 싸우려는 전통적인a 심지어 합스부르크가와 나중에는 제3 제국과 같이 분명히 우월한 적에 대항하여 의지였다.

 

II

 

우리가 사랑하는 알파흐의 찬란한 광경인 자연과 인간 손의 찬란한 상호작용이자 자신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힘든 업적의 찬란한 상호작용 때문에 나의 서두가 다소 감상적이고 낭만적이 되었을까봐 나는 염려한다.b 그리하여 이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말들을 낭만주의에 특히 철학에서의 낭만주의 반대하는 두 번째 도입부로 상쇄해야 한다고 나는 즉각 느낀다. 나는 이 두 번째 도입부를 한 가지 고백으로써 시작하고 싶다.

내가 언급하려는 것은 신뢰에 근거해서 믿어진 것이 아님은 특히 나에게 중요하다. 나는 그것이 최대한 회의적으로 다루어지기를 선호한다. 그렇게 많은 나의 철학 동료들과 달리, 나는 철학에서 새로운 방향들을 공표하여 새로운 길로 여행하는 지도자가 아니다. 나는, 완전히 구식인 철학을 신뢰하는 철저히 구식인 철학자이다: 다시 말해서, 오랜 세월이 흐른 시대인 합리주의와 계몽사조 시대의 철학. 합리주의와 계몽사조의 마지막 늦깎이들 중 한 명으로서, 지식을 통한 인간의 자기-해방을 나는 신뢰한다 훌륭한 계몽사조 철학자인 칸트가 옛날에 그랬듯이, 혹은 페스탈로치가 가난과 싸우기 위하여 지식을 사용했듯이. 그리하여 약 150년 전에 이미 낡고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서 알려진 견해들을 내가 대변한다는 것을 나는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이유인즉 낭만주의가 계몽사조{die Aufklärung}를 단지 염탐하기(scouting around)’{Aufklärerei}사이비 계몽(Aufkläricht)으로서 Kebricht , 쓰레기라는 언급 폭로한 것은 1800년 다소 이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그렇게 많이 시대에 뒤쳐져 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이 낡고 구식인 철학을 고수한다. 그렇게 퇴행적이기 때문에 나는 낭만주의 철학을

 

a 역주: ‘전통적인의 원어는 traditional인데 허형은 번역은 굽히지 않고인 듯하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 fear that the magnificent surroundings of our dear Alpbach, this wonderful interplay of nature and human hand, of love of one's native land and hard work, have made my opening words a little sentimental and romantic.인데 허형은 번역은 이곳 알프바취의 웅장한 전경,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움 조화에 도취되어 서두를 다소 감상적이고 낭만적으로 열었는지도 모르겠다.’이다.

 

히 독일 관념론의 주요 지도자들 세 명인 피히테, 쉘링(Schelling) 그리고 헤겔의 철학 독일과 유럽의 지식인들이 지금까지 고통을 받은 가장 큰 지성적 및 도덕적 재앙과 다른 것으로 볼 수 없다. 나의 견해로 이 지성적이고 도덕적인 재앙은, 핵구름처럼 여전히 퍼지고 있는 파멸적이고 질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재앙은, 콘라트 하이든(Konrad Heiden)이 몇 년 전 히틀러에 관한 자신의 저서에서 지성적 및 도덕적 사기극의 시대(the age of intellectual and moral dishonesty)’로 지칭한 것을 불러왔다.

누가 중단시키기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 시대정신(Zeitgeist)이고 시대정신에 고취된 운동이다 나 자신과 같은 만년의 계몽사조 늦깎이에게는 특히 쉽지 않은데 그 늦깎이는 유행인 시대정신의 힘을 충분히 인식하지만 그 힘을 기꺼이 인정하지 않는다. 낭만주의적이고 동시대적인 커다란 권위자들과 대조적으로a, 자신의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철학자의 과제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철학자가 결국 자신의 지성적 독립성을 위험에 빠뜨리는 시대정신에 양보하기 시작하지 않았는지 철학자는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있어야 (니체가 또한 그랬듯이) 한다고 나는 믿는다. 휴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이 자신의 저서 친구의 책(Buch der Freund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나는 그와 완전히 의견을 같이한다: ‘철학은 당대에 대한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 철학이 당대의 정신을 표현하게 될 때 사태는 나쁜 상태에 빠진다.’

 

III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질책과, 내가 합리주의자이고 계몽사조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나의 고백은, 내가 이해하는 것을 합리주의와 계몽사조에 의하여 내가 간략하게 설명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할 터이다.

내가 합리주의를 말할 때, 나는 철학적 이론을 (데카르트의 이론과 같은) 생각하고 있지 않고 인간은 순전히 이성적 존재라는 고도로 비합리적인 믿음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내가 이성이나 합리주의를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유일한 것은, 우리의 실수들이나 오류들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특히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통하여 그리고 궁극적으로 또한 자기-비판을 통하여 우리가

 

a 역주: ‘낭만주의적이고 동시대적인 커다란 권위자들과 대조적으로의 원어 표현은 In contrast to the great Romantic and contemporary authorities인데 허형은 번역은 위대한 낭만주의의 대가들이나 오늘날 주류 철학자들의 생각과 반대로이다.

 

배울 수 있다는 신념이다. 합리주의자는, 옳다고 증명되기 보다는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꺼이 배우려는 또 다른 사람의 견해를 단순히 이어받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개념들 비판하도록 기꺼이 허용함에 의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개념들을 기꺼이 비판함에 의하여 사람이다. 여기서 비판이라는 개념이, 더 정확하게 비판적 토론이라는 개념이 강조된다. 진정한 합리주의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비판만이 우리가 새로운 관념들을 이룩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관념들의 영역에서, 비판적 토론만이 우리가 껍데기로부터 알맹이를 고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정말로 생각한다. 관념의 수용이나 배척이 순전히 이성적인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비판적 토론만이, 관념을 점점 더 많은 측면들에서 보고 그 관념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필수적인 성숙성을 우리에게 부여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비판적 토론에 대한 이 평가에는 또한 자체의 인간적인 측면이 있다. 이유인즉 합리주의자는, 비판적 토론이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완벽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의 생활에서 비판적 토론이 드문 현상이라고 것을 완벽하게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비판적 토론에 근본적인 주고받기(give and take)’ 태도가 가장 큰 순전히 인간적 중요성을 띤다고 생각한다. 이유인즉 합리주의자는, 자신의 이성이 다른 사람의 덕택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a 합리적인 비판적 태도가 오직 다른 사람들이 비판한 결과일 수 있음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통해서만 우리가 자기-비판에 도달할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다.

합리주의적 접근방식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묘사될 것이다. 아마도 내가 틀렸고 당신이 옳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가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 누가 옳은가라는 문제보다 더 중요함을 우리가 기억하기만 하면 우리의 토론이 끝난 후에 우리 양자는 사태를 보다 명료하게 볼 것이라고 우리 양자는 희망할 수 있다. 이 목표를 염두에 두고서만 우리는 토론에서 가능한 한 잘 우리 자신들 방어한다.

이것이 요컨대 내가 합리주의를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계몽사조에 대하여 말할 때, 나는 또한 다른 것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나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For the rationalist knows that he owes his reason to other people.인데 허형은 번역은 비판적 논의에 임하려면 이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이다.

 

는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이라는 개념을 생각하는데 칸트와 페스탈로치가 고취한 개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정신을 해방하여 비판적 접근방식을 이해하도록 돕는 모든 지식인의 의무를 피히테, 쉘링 그리고 헤겔 시대이래 대부분의 지식인이 잊어버린 의무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불행하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겨 쇼펜하우어가 표현한 바와 같이 가르치는 게 아니라 홀리기를 원하는 것이 지식인들 가운데서 너무 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도자들이나 예언자들로 나타난다 부분적으로 예언자들로서, 삶과 세상과 인간과 역사 및 존재의 어두운 비밀들의 선포자들로서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 기대되기 때문에. 그렇게 흔히 그러한 바와 같이 여기서 끊임없는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 지도자들과 예언자들이 수색되어서 그들이 발견되는 것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H. G. 웰즈(Wells)가 예전에 말한 바와 같이, ‘어른에게는 지도자들이 필요하지 않다.’ 어른들은, 자신들에게 지도자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언자들에 관하여, 그들을 멀리하는 모든 지식인의 의무를 나는 신뢰한다.

 

IV

 

무엇이 외부적으로 계몽사조의 접근방식과 자칭 예언자들의 접근방식을 구분하는가? 그것은 언어이다. 계몽사조 사상가들은 가능한 한 단순하게 말한다. 그는 이해되기를 원한다. 이 측면에서 버트런드 러셀은 철학자들 가운데서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우리의 거장이다. 심지어 여러분이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을 때도, 여러분을 틀림없이 그를 칭찬한다. 그는 항상 그렇게 명확하게, 간단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왜 언어의 단순성이 계몽사조 사상가들에게 그렇게 크게 중요한가? 왜냐하면 진정한 계몽사조 사상가인 참된 합리주의자는 누구를 설득하기를 결코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지, 그는 심지어 확신을 주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항상 그는, 자신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식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다른 사람들의 지성적 독립을 너무 높이 귀중하게 여겨서 중요한 문제들에서 그들을 확신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가능하면 합리적이고 절제된 비판의 형태로 오히려 반론을 요구할 터이다. 그는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촉발시키려고 자유로운 의견들을 형성하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하려고 시도한다. 자유로운 의견 형성은 그에게 귀중하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진리에 근접시키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자유로운 의견을 엄밀하게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지어 자신이 그 의견은 근본적으로 틀린 것으로 형성되었다고 그가 생각할 때도 그는 그 의견을 존중한다.

계몽사조 사상가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심지어 확신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들 중 한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논리와 아마도 수학이라는 좁은 분야 외에서 어떤 것도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안다. 우리는 틀림없이 논증들을 제시할 수 있고 우리는 관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기초수학 외에서 우리의 논증들은 결코 확정적도 아니고 격차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항상 근거들을 저울질해야 하고 항상 어떤 근거들에 더 많은 무게가 실리는지 결정해야 한다: 특정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 혹은 그 견해에 반대하는 근거들. 그렇다면 결국 의견 형성에는 자유 결정이라는 요소가 포함된다. 그리고 의견을 인간적으로 귀중하게 만드는 것은 자유 결정이다.

계몽사조가 개인의 자유로운 의견에 대하여 이렇게 높은 존중을 보여서 발전시킨 것은 존 로크에게서a 유래한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영국과 유럽대륙의 종교전쟁들의 직접적인 결과인데 그 종교전쟁들을 결국 종교적 관용이라는 이념을 낳았다. 그리고 이 종교적 관용이라는 개념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를 들어, 아놀드 토인비) 주장한 바와 같이, 단순히 부정적인 개념이 전혀 아니다. 그 개념은, 전쟁에 대한 피로의 표현이고 공포를 이용해서 종교적 신념이 통합된다는 전망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깨달음만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 관용은 정확히 반대 깨달음으로부터 생긴다: 강요에 의한 종교적 통합은 전혀 가치가 없다는 깨달음으로부터; 오직 자유롭게 습득된 종교적 신념만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부터. 그리고 이 깨달음은 더 멀리 이어진다.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진실한 믿음에 대한 존중이 그리하여 개인과 개인이 지닌 의견에 대한 존중이 생긴다. 계몽사조의 가장 위대한 마지막 철학자인 이마누엘 칸트의 말로,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인간의 가치를 말하면서 칸트는 모든 인간과 인간의 신념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칸트는 이 지침을 유태 율법학자 힐렐(Hillel)의 원칙과 결합시켰는데 그 지침은 영어로 황금률로 지칭되었지만 독일어로는 다소 구태의연하다는 느낌으로 말한다: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할, 당신이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을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b 칸트는 이 원칙을 자유라는 쉴러의 필립 II세에서 드 포사 후작(Marquis de Posa)에 의하여 요구되는 사상의 자유 개념과 결합시킨다; 폭군들이 아무리 많이 노력할지라도 실제

 

a 역주: ‘발전시키다존 로크에게서의 원어 표현은 developedfrom John Locke인데 허형은 번역은 발전시키다가 누락되었고 '존 로크 시대부터'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Do not do unto others what you would not have them do unto you!인데 허형은 번역은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은 누구에게도 시키지 마라!’이다.

 

로 우리로부터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양도될 수 없는 자유로서 주장함에

의하여 스피노자가 정당화하려고 시도한 사상의 자유.

우리는 이것에 관하여 스피노자와 더 이상 의견을 같이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사상의 자유가 결코 완벽하게 억압될 수 없다는 것은 참이지만 그 자유는 아주 상당한 정도까지 억압될 수 있다. 이유인즉 사상의 자유로운 교환이 없다면 진정한 사상의 자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들이 건전한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 생각들을 계속해서 시험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비판적 토론은 개인 각각과 관련하여 자유로운 사상의 토대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 자유가 없으면 사상의 자유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정치적 자유가 개인 각각에 의한 이성의 자유로운 사용에 대한 전제조건임을 의미한다.

합리주의와 계몽사조에 의하여 내가 의미하는 바를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나는 노력했다. 동시에 계몽사조뿐만 아니라 내가 이해하는 바의 합리주의에, 사상의 자유와 종교적 자유와 다른 사람들의 솔직한 의견들에 대한 존중 및 마지막으로 정치적 자유가 왜 필요한지를 지적하려고 나는 간략하게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합리주의만 자유를 사랑한다거나 합리주의만 자유를 요구하는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다고 전혀 주장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양심의 자유를 요구하는 그리고 이 요구를 더 멀리 확대하여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에 대한 존중과 정치적 자유에 대한 정당성에 또한 도달하는 완전히 다른 태도들인 특히 종교적 태도들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a 그리고 내가 앞서서 혹시 다소 역설적으로, 나의 낡은 합리주의를 경고했을지라도 이제 나는 이 경고를 매우 진지하게 반복하고 싶다. 내가 합리주의자이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바꾸고 싶지 않다. 또한 나는, 다른 사람들을 합리주의자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자유라는 명칭을 남용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반박하라고 도전하고 싶다; 가능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아서 각자가 의견을 가장 자유롭게 형성함에서 자기 자신의 결정을 내도록 촉구하고 싶다. 모든 합리주의자는 틀림없이 칸트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철학을 가르칠 수 없다 기껏해야 겨우 철학화인데 (philosophizing)b, 그것은 비판적 태도를 의미할 뿐이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On the contrary, I am convinced there are quite different attitudes, especially religious attitudes, that demand freedom of conscience and that, taking this demand further, also arrive at respect for the opinions of others and a justification of the demand for political freedom.인데 허형은 번역은 오히려 다른 사상, 특히 종교적 입장 중에서도 양심의 자유, 타인의 의견에 대한 존중과 정치적 자유를 정당하게 요구하는 사상이 여럿 있다.’이다.

b 역주: ‘철학화의 원어는 philosophizing인데 허형은 번역은 철학적 사색이다.

 

 

 

V

 

물론 우리는, 이 철학화이자 이 비판적인 태도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드물고 그래서 그것은 희소가치를 (다른 가치들과 별도로) 주장할 수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아는 한, 그것은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이오니아의 자연철학 창시자인 밀레투스의 탈레스(Thales of Miletus)에 의하여 창안되었다.

심지어 아주 원시적인 민족들 가운데도 학파들이 있다. 학파의 과제는 항상 시조의 가르침들을 보전하여 전해주는 것이다. 학파의 회원이 교설을 변경하려고 시도한다면, 그는 이단자로서 추방당하고 학파는 쪼개진다. 그리하여 학파들의 숫자는 일반적으로 그 쪼개짐에 의하여 증가한다. 그러나 물론 때때로 학파의 전통적인 교설은 새로운 외부적 조건에 예를 들어, 공동의 재산이 된a 새롭게 습득된 지식 적응해야 한다. 그 경우들에서 학파의 공식적인 교설의 변경은 거의 항상, 옛 교설의 재해석을 통하여 비밀리에b 도입되고 그리하여 교설에서 변경된 것은 실제로 없다고 나중에 언급될 수 있다. 새로이 변경된 교설은 (변경되었다고 언급되지 않는데) 원래 학파를 창시한 스승의 공적으로 여겨진다. ‘스승 자신이 말했다는 우리가 피타고라스학파에서 부단히 듣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런 학파가 내놓은 이념들의 내력을 재구성하는 것을 통상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특히 어렵다. 이유인즉 모든 이념들이 창시자에게 귀속되는 것은 방법의 본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바, 이 엄격한 도식으로부터 이탈하는 유일한 학파 전통은 탈레스의 이오니아학파인데 그 학파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 철학의 전통이 되었고 문예부흥에서 이 철학이 부활한 이후 궁극적으로 유럽 과학의 전통이 되었다.

하나의 순수한 학파 교설이라는 독단적인 전통과 결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상상하여 그 전통을, 비판적 논쟁의 전통인 경쟁하는 많은 교설들 모두가 단일한 진리에 근접하려는 다원론적 전통으로 대체하려고 잠시 노력하자.

진정으로 획기적인 이 조치를 취한 사람이 탈레스였다는 것은, 이오니아학파에서 그것도 유일하게 이오니아 학파에서 구성원들이 스승의 교설을 개선하려고 완전히 공개적으로 시도했다는 사실로부터 드러날 것이다. 탈레스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우리가 상상만 하면 우리는 이것을 이

 

a 역주: ‘공동의 재산이 된의 원어 표현은 that has become common property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비밀리에의 원어는 surreptitiously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해할 수 있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내가 사물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것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라.’

이런 방식으로 탈레스는 새로운 전통을 말하자면, 2층 구조의 전통 창조했다. 먼저 자기 자신의 교설은, 제자들의 새로운 세대 각각의 분기하는 교설들처럼, 학파의 전통에 의하여 전해졌다.a 두 번째, 자신의 스승을 비판하여 능가하려는 전통이 보전되었다. 그리하여 이 학파에서 교설을 바꾸거나 극복하는 것이 성공으로 꼽혔다; 그리고 그런 바꾸기는 그 바꾸기를 도입한 사람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이로 인하여 최초로 이념의 실질적인 역사가 가능해졌다.b

내가 기술한 2층 구조의 전통은 현대 과학의 전통이다. 그 전통은 우리 서구 세계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한 가지 요소이다. 내가 알기로, 그 전통은 단 한 번 창조되었다. 그 전통은 200~300년 뒤에 실종되었지만 그 후 1500년이 지나고서 문예부흥에 의하여 본질적으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하여 다시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그 전통이 파괴되어 잊히는 일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그 전통이 완벽하게 발전할 수 있다.

합리주의가 내가 여기서 개괄한 것처럼, 심지어 유럽에서도 여전히 매우 드문 것이어서 유럽의 특징적인 종교들 중 한 가지 종교로서 간주될 수 없을지라도 그리고 합리주의에 관한 이념들이 오늘날 대부분의 지식인들에 의하여 최고로 경멸스럽게 다루어질지라도, 탈레스의 합리주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합리주의가 없으면 유럽 문명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터인 이념이자 전통이다. 이유인즉 유럽 문명에서 과학에 대한 열정만큼 특징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유럽 문명은 자연과학을 창조한 유일한 문명이고 자연과학이 결정적일 역할을 수행하는 유일한 문명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은 합리주의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자연과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합리주의가 배출한 산물이다.

 

VI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것은, 나 자신을 합리주의자와 계몽사조의 추종자로서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First, his own doctrine was passed on by the school tradition, as were the differing doctrines of each new generation of followers.인데 허형은 번역은 첫째는, 탈레스 자신의 교리가 각 세대의 제자들이 수정하여 제시한 수많은 교리들과 합쳐져 그 학파의 전통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made a real history of ideas possible for the first time.인데 허형은 번역은이는 수많은 관념들의 역사를 창조했다.’이다.

 

제시하여 내가 합리주의와 계몽사조를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려

고 시도하는 것이다. 합리주의와 계몽사조가 정치적 자유를 상정한다는 것을

나는 또한 간략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사랑을 합리주의나 계몽사조와 동일시하는 것이나 심지어 그들 사이의 매우 긴밀한 관계를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터이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틀림없이 원초적인 것으로 동물들과 심지어 가축들 어린이들 가운데서 폭넓게 다양한 정도들로 이미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정치의 영역에서 문제가 된다. 이유인즉 인간의 공존은 자연히, 개별적인 인간 각자에 대한 무제한적인 자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아무것이라도 한다면, 나는 또한 자유롭게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는다.

칸트의 해결책은, 인간의 공존에 의하여 필요해지는 정도까지만 국가가 개인적인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그리고 이 필수적인 제한은 가능한 한 동등하게 모든 시민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진정으로 칸트적인 원칙으로 인하여 정치적 자유라는 문제가 적어도 구상적으로 해결될 수 있음이 밝혀진다. 그러나 그 원칙은 우리에게 정치적 자유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흔히 개인적인 경우들에서, 자유에 대한 특정 제한이 실제로 필요한지를 우리가 증명할 수도 없고 또한 그 제한이 모든 시민들에게 동등하게 부과되는 부담인지를 우리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a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더 쉽게 적용될 수 있는 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한 가지 그런 기준에 대한 나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자체의 정치적 제도들을 이용하여 시민들 다수가 실제로 정권교체를 원할 때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면, 정치적으로 자유롭다. 혹은 더 간결하게: 우리가 피를 흘리지 않고 우리의 통치자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롭다.

여기에 우리에게는, 정치적 자유의 결핍으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혹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독재체제로부터 민주주의를 우리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물론 민주주의독재체제라는 단어들에게 근거하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유가 없는 특정 국가들을 민주주의들이라고 지칭하고 미국과 스위스의 헌법을 독재체제라고 지칭한다면, 이 용어들이 옳은지 그른지에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For often in individual cases, we cannot establish whether a certain limitation of freedom is really necessary, nor whether it is a burden imposed equally on all citizens.인데 허형은 번역은 대개의 경우 우리는 자유에 대한 특정한 정도의 제한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곡되어 모든 시민에게 공평하게 부과되는 이 되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한다.”이다.

 

관한 논쟁에 나는 관여하지 않을 터이다. 나는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할 터이다: ‘내가 당신의 용어사용법을 사용해야 할 터이라면, 나는 나 자신을 민주주의의 적으로서 그리고 독재체제의 친구로서 기술해야 할 터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언어사용법적 논쟁들에서 길을 잃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단어들이 아니라 실제적인 가치들이다.

내가 방금 제시한 정치적 자유에 대한 기준은 간단하지만 물론 다소 조악한 도구이다. 특히 그 기준은 우리에게, 소수인들의 예들 들어, 종교적이거나 언어적이거나 인종적 소수들 보호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VII

 

내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통하여, 자유의 현재 상황과 서구 자유세계에 관한 몇 가지 보다 화제성인 질문들을 다룰 체계와 같은 것을 만들어내려고 나는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핵심적인 그런 문제를 다음과 같이 언명하겠다:

자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좋은 것인가 사악한 것인가? 어느 쪽이 더 많은가? 좋은 것과 사악한 것의 잣대들로 인하여 무엇이 드러나는가?

이것이 매우 자극적인 문제임을 나는 알고 그래서 나는 논지들을 모아서 그 문제를 가능한 한 명료하고 축약해서 답변하도록 노력하겠다.

나의 첫 번째 논지, 서구 민주주의 체제들의 세계인 우리의 세계가 상상 가능하거나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세계들 가운데서 최고의 세계는 아닐 것이지만 그 세계가 그 존재를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정치적 세계들 중에서 최고의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세련되지 못한a 낙관론자이다.

나의 이 첫 번째 낙관론적 논지를 설명하여 정당화하기 위하여, 우리의 사회에서 과거보다 굶주리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 틀림없이 작은 세부사항일지라도 내가 우리 시대를 칭송할 때 경제적 기적이라는 호황을 내가 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나는 먼저 말하고 싶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대비를 이용하여 나는 아마도 이것을 최고로 설명할 수 있다. 1942년 전임 브래드포드 주교(Bishop of Bradford)는 우리 서구 세계를 악마

의 세계로 비난하고 이 세계로부터 악마를 소멸하는 데 그리고 스탈린의 공산

 

a 역주: ‘세련되지 못한의 원어는 wild인데 허형은 번역은 최대의이다.

 

주의가 승리하는 것을 돕는 데 기독교의 모든 충실한 목회자들이 참여하라고 요구했다. 그 후 스탈린의 악마적 인격은 공산주의자들 자신들에 의하여 인정되었고, 짧지만 매우 생기를 불어넣는 기간에 스탈린의 악마적 인격은 전적으로 공산당 프로그램은 아닐지라도 공산당의 일반적 노선의 주요 요소였다. 그러나 전임 브래드포드 주교가 생각했던 것처럼 여전히 생각하는 신자들이 그리고 영국에서 심지어 진정으로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도들 여전히 있다.

나의 첫 번째이자 낙관론적인 논지를 명백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그 주교가 우리의 서구 세계를 악마의 작품으로서 비난한 관점과 정확하게 동일한 관점에서, 나는 우리의 서구 세계를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세계들 중에서 최고의 세계로서 기술한다.

그 주교에게 그것은 주로 순전히 인간적 가치들의 칸트가 인간의 존엄성과 남을 도우려는 인간의 결의로 지칭한 것 문제였다. 이것들이 서양에서 위험에 처했다고 그는 생각하여 러시아에서는 확신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의 이상주의에서 그는 사실들을 합당하게 보지 못했다. 과거에는 우리 사회와 비교하여, 그렇게 굴욕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사람이 없고 그렇게 압제가 없던 사회가 없었다. 과거에는 다른 사람들의 굶주림과 비참함을 완화하기 위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할 각오를 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서양에 있는 우리에게는 동양과 관련하여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a 그러나 나는, 서양에 있는 우리가 우리의 제도들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반대다. 우리의 세계가 최고일지라도 지금까지 그 사회 안에 있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 나쁜 방향에 놓여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룩한 것은 언제라도 없어질 수 있다b: 이것은 항상 큰 위험이고 그런 위험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두 번째 논지에 온다.

우리의 정치적 세계가 우리가 역사적으로c 알고 있는 최고의 세계로 내가 간주할지라도, 이 사실을 민주주의나 자유의 덕분으로 치부하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자유는 생활용품을 문 앞까지 배달하는 공급자가 아니다. 무엇이든 이룩된다는 것을 민주주의는 보장하지 않는다d 틀림없이 경제적 기적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유롭게 되자마자 그들은 틀림없이 무사할 것

 

a 역주: 이 문장에서 서양동양의 원어는 각각 the West the East인데 허형은 번역은 서구동구세계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what we have achieved can be lost at any time인데 허형은 번역은 게다가 한번 성취한 것은 언제든 다시 잃어버릴 수 있다이다.

c 역주: ‘역사적으로의 원어는 historical (knowledge)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d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Democracy does not ensure that anything is accomplished인데 허형은 번역은 민주주의는 우리 일을 대신 해주지 않는다이다.

 

이라고 말함에 의하여 자유를 찬양하는 것을 틀렸고 극도로 위험하다. 어떤 사람이 삶을 어떻게 사는가는 주로 운이나 은총의 문제이고 비교적 작은 정도까

지는 아마도 또한 유능함과 근면 및 다른 미덕들의 문제이다. 민주주의나 자유

에 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그것들이a 우리의 복지에 관하여 다소 더 많은 영향을 우리의 개인적인 능력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나는 나의 세 번째 논지에 다다른다. 우리가 더 쉬운 삶을 소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 자체가 물질적 가치들로 환원될 수 없는 궁극적 가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적 자유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적 자유를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방식으로 선택해야 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주의에서의 빈곤은 귀족정치나 전제정치 하에서의 모든 부유함보다 나은데 이유인즉 자유가 노예상태보다 낫기 때문이다.’

나의 네 번째 논지에서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믿음은 우리에게 재앙이 될 수 있다. 자유에 대한 믿음이 항상 승리를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 우리는 자유가 패배를 초래하는 것에 항상 대비해야 한다. 우리가 자유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자유와 함께 멸망할 대비를 해야 한다. 폴란드는 다른 나라가 하지 못할 정도로 자유를 위하여 싸웠다. 체코 민족은 1938년에 자신들의 자유를 위하여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용기의 부족이 아니었다. 1956년의 헝가리 혁명은 자신들의 족쇄 외에는 잃은 게 없었던 젊은이들의 업적 승리했지만 그 다음에 실패로 끝났다.

자유를 위한 투쟁은 또한 다른 방식들로 실패할지도 모른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서처럼, 그 투쟁은 테러리즘으로 퇴보할지도 모른다. 그 투쟁은 극도의 예속상태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와 자유는 천년왕국을 보장하지 않는다. 물론 보장하지 못하지, 정치적 자유가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약속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자유를 선택하지 않는다. 정치적 자유로 인하여 인간 공존의 유일한 위엄스런 형태가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유를 선택하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완전히 책임을 질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이다. 우리가 그런 형태의 가능성들을 실현할지는 모든 종류의 것들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들에게 달렸다.

 

 

 

a 역주: ‘그것들의 원어는 대명사 they인데 허형은 번역은 인간의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