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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체는 문제해결 중이다, 1부 4장 진화인식론의 인식론적 위상

이윤진이카루스 2021. 3. 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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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인식론의 인식론적 위상*

 

 

 

 

선험적(A priori) ㅡ 경험적(A posteriori)

 

선험론(apriorism)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말함에 의하여 나는 시작하고 싶다. 먼저 나는, 누군가가 어떤 용어사용법을 내가 이용해야 하는지를 나에게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용어사용법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유전적으로 선험적이라는 용어는, 적어도 나의 견해로, 완전히 분명하다. 그 용어는, 경험적 이전인 지각 이전에 어떤 것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선험적이라는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칸트철학과 아주 확실한 관계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가 항상 선험적으로 타당한(a priori valid)’을 항상 말했을지라도 적어도 매우 자주 그가 유전적으로 선험적을 의미했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한다면 칸트가 훨씬 더 이해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두 번째,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에 대한 나의 견해가 여러 해 전에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에 의하여 전개된 견해와 전혀 다르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자주, 콘라트 로렌츠와 이것을 토론했다; 그러나 그의 현재 견해가 무엇인지 나는 정확하게 확신하지 못한다. 동시에 그가 칸트철학에 관하여 서술하여 그의 해석을 출판했을 때, 우리의 먼 조상들은 지각을 통하여 사물들을 알게 되었고 이것들은 그다음에 어떤 방식으로 지각에서 유전적 구조로 운반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우리에게 선험적이 되었는데 유전적으로 선험적이 되었다. 나의 견해는 전혀 다르다: 다시 말해서, 나의 개념들 사용이 아니라 나의 이론이 다르다. 그리고 이론들은 개념들보다 100배 더 중요하다. (이론들은 참이거나 허위일 것이다. 개념들은 기껏해야 합당하고 최악

 

* 19864월 비엔나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토론을 위한 자발적인 기고문. 1987년 루퍼트 리델(Rupert Riedel), 프란츠 M. 부케티츠(Franz M, Wuketits), P. 파레이(P. Parey)에 의하여 편집된 진화 인식론(Die Evolutionäre Erkenntnistheorie)에서 최초로 발표됨.

 

의 경우에는 왜곡을 초래한다. 개념들은, 이론들과 비교하여, 중요하지 않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유전적으로 선험적이라 주장해야겠다. 경험적인 유일한 것은, 선험적으로 발명한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지각들과 같은 것을 가지고 그 지각들을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다른 생명체와 공통으로, 우리가 저렇게 선택할 (그리하여 유전적으로 선험적으로) 수 있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감각 인상들을 조직하여 해석하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칸트의 시공간 이론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특히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칸트의 선험적 지식과 대등하다.

콘라트 로렌츠가 말하는 바와 같이, 칸트적이고 타고났으며 선험적인 지식이 우리의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지니고 태어나는 원래 지각적 지식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선험적 지식이 없으면 지각적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칸트의 엄청나게 중요한 통찰을 무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지각적 지식을 통하여 칸트의 선험적 지식을 설명하려고 심지어 시도해서는 안 된다. 모든 지각적 지식은 선험적 지식을 전제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칸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칸트는, 선험적 지식의 존재가 경험적 지식의 존재에 대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고 최초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각적 지식에 대한 선험적 지식의 필수성으로부터, 논리적 양태(樣態: modality)의 의미에서 필수성을 우리는 추론할 수 없다. 나 자신을 칸트로부터 내가 거리를 두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우리의 지각적 지식이 가설적인 것처럼, 우리의 선험적 지식도 또한 가설적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선험적 지식은 실제로 정말로 가설적이다. 중요한 사례를 들어 이것을 설명하자.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해석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적어도 근사치로서 유클리드적인 ㅡ 적어도 우리의 가까운 환경에 대한 ㅡ 기하학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구와 달 너머로 펼쳐지는 우주가 유클리드 적인지 아닌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설들인 추측성 지식으로 온다. ‘가설적이 아니라 절대적 진리라는 의미에서 모든 선험적 지식이 필수적이라는 칸트의 견해는 내가 보기에 매우 이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거가 없고 심지어 오류이다.

이 이유들과 다른 이유들 때문에, 칸트와 예리하게 대조적으로, 우리의 선험적 지식에는 가설적 (혹은 추측성) 특징이 ㅡ 예를 들어 기하학에서 ㅡ 있다고 나는 전제한다. 우리의 가설적 지식은 유전적으로 선험적이면서 선험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나는 전제한다; 선험적으로 필수적이 아니고 절대적이 아니다.

그러나 심지어 이렇게 수정되어도 칸트의 선험론은 여전히 가장 큰 중요성을 띤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선험론이 가설적이거나 추측성 선험론일지라도 내가 근본적인 선험론자로 (유전적으로 선험적이라는 의미에서) 칸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라고 나는 분명하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싶다.

존 로크 이래 모든 인식론자들과 첨예하게 대비되고 심지어 칸트와도 대비되어, 모든 지식은 자체의 내용에서 선험적이고 유전적으로 선험적이라는 논지를 나는 지지한다. 이유인즉 모든 지식은 가설적이거나 추측성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은 우리의 가설이다. 가설들의 제거만이 경험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가설들과 실재의 충돌이다. 우리 지식의 경험적 요소는 이것만 본질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배우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경험론자들이 되기에 충분하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우리는 시행착오를 통해서배운다. 그러나 우리의 시행들은 항상 우리의 가설들이다. 우리의 시행들은, 외부 세계로부터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비롯된다. 우리가 외부 세계로부터 배우는 유일한 것, 우리의 노력들 중 몇 가지가 오류라는 것이다.

원시적 형태의 생명체로부터 계속해서, 최초의 세포들로부터, 적응은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편에서 발명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적응하고 스스로 자기들의 적응을 개선한다. 나의 이론들 중 이 이론은 틀림없이 커다란 난제들을 초래한다. 이 난제들은 현존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나의 이론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무식하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기원들과 최초의 적응 형태들에 관하여, 우리에게는 거의 아는 게 없다. 다소 나중에 나는 이것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말하겠다.

 

다윈론

 

나는 다윈론을, 선택을 통한 적응이라는 다윈의 이론을 매우 겸손하게 재언명했다. 그의 이론은, 더 잘 적응된 개체들에게 자손을 낳을 더 큰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

그 이론의 내력에 관하여 나는 상당히 많을 것을 말할 수 있을 터인데 그 이론은 다윈 자신에게서 이런 형태로 발견될 것이고 나의 견해로, 사람들이 자연선택이나 생존경쟁및 그런 것들을 말할 때보다 그 이론은 훨씬 더 명백하고 나은 언명이다.

생존경쟁자연선택은 은유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론이 아니다. 이유인즉 저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자신들의 뒤에 자손을 남기는 개인들인데 여기서 더 잘 적응된 개체들에게 자손을 남길 다 큰 기회가 있다는 것이 정확하게 다윈의 이론이다. 그러나 이 언명에서 다윈론의 한계들이 또한 명백하게 보일 수 있다. 이유인즉 적응된, ‘어느 정도까지적응된 개체들이 있다고 다윈론이 틀림없이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생명의 기원이라는 문제에 즉각 도달하는데 그 문제에 관하여 우리에게는 불행하게도 여전히 정말로 아는 게 없다.

 

적응과 다윈론: 사고실험

 

사고실험: 시험관에서 (그리고 나는 큰 기계가 아닌 시험관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나는 전제한다. 상황이 구성되는 방식을 우리가 개략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은 그다지 예외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알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백 년이나 천년이 지나면 아마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시험관에서 한 가지나 몇 가지 유전자들의 형태로 생명체를 만들어냈다. 우리에게는 상당히 단순한 유전자가 있다고 나는 전제하는데 그 유전자는 그곳에서 스스로 복제한다. 이것은, 생명체가 아닌 재료들로부터 생명체의 인공적 출현을 포함하는 사고실험이다. 그 사고실험이 매우 비개연적이고 매우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모노(Monod)는 이 비개연성을 개략적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전제하자. 그렇다면 우리가 만들어낸 이 생명체가 살아남을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개연적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만들어낸 생명체가 시험관에 적응한다고 전제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시험관은 생명체에게 매우 보잘것없는 환경이어서 생명체를 생존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특별한 기계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환경을 생명체에게 적응시켜야 할 것이다. (적응은 정말로 호혜성에 근거한다.) 환경을 생명체에게 적응시키기 위하여, 그 생명체를 먹여 살리는 적어도 하나의 슈퍼마켓을 우리는 만들어야 한다. 생명체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배설물을 없애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하수시설이 또한 필요하다. 그다음에 우리는 아이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학교를 설립해야 하는데 아이들 처리하기가 학교의 유일한 목표이다. 그리고 우리는 산아제한을 조직해야 한다 ㅡ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시험관에서 만든 생명체가 자체의 자손들에 의하여 질식사할 것이다.

이제 나의 사고실험의 요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생명체가 존재하게 되는 것만으로는 어떤 문제도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밝히고 싶다. 새로 출현한 이 생명체는 왜 자체의 환경에 적응되는가? 생명체는 자체가 적응된 환경을 발견하기 이전에 틀림없이 수백만 번 출현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생명체가 어떤 미지의 화학적 상태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생명체가 생존할 수 있었던 환경에서 생명체가 출현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잠재적인 (그리하여 적응된) 환경에 생명체가 우연히 일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개연성은, 틀림없이 생명체 자체가 출현하지 않았을 개연성만큼 크다. 내가 인식하는 한, 이 요점은 이전에 토론된 적이 없다. 나는 여기서 그 요점을, 지식의 문제와 연계하여 제기한다.

이유인즉 생명체가 자체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일종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 최소한의 지식이 없다면 생명체는 생존할 수 없다. 그것은, 생명체에 대하여 매우 일반적인 조건에 대한 지식이다. 우리가 말한 조건이 (다시 말해서, 환경) 틀림없이 생명체에게 적응되거나 혹은 생명체가 틀림없이 환경에 적응된다. 그것은 물론 호혜성에 근거한다.

환경이 합당하게 안정적이 아니라면 ㅡ 다시 말해서, 적응을 위한 조건이 기간들에 걸쳐서 불변적이 아니라면 ㅡ 생명체가 생태적 재앙에서 사멸할 것임을 우리는 상당히 확신할 수 있다. 생태적 재앙에 의하여 나는, 생명체에게 적응된 환경의 저 국면들에서 변화가 일어남을 의미한다. 환경이 생명체에 대한 자체의 적합성에서 변한다면, 생명체는 사멸한다: 재앙이 발생할 것이고 전체가 틀림없이 다시 시작한다. 그리하여 생태적 조건이 합당하게 안정적이 아니라면, 그 조건이 생명체의 삶을 유지하기에 충분히 훌륭하지 않다고 우리는 전제할 것이다. 역사는 틀림없이 다시 시작된다.

그렇다면 적응이 있으려면 ㅡ 혹은 지식이 있으려면 ㅡ 틀림없이 어떤 환경적 안정성이 있다. 바로 처음부터 선험적으로, 우리가 만들어낸 생명체에 관하여 그리고 그 생명체가 생존하려면 필요했던 것에 관하여 우리의 사고실험에서 우리가 알아야 했던 것만큼 생명체는 틀림없이 환경에 관하여 개략적으로 안다. 적응은 한 가지 형태의 선험적 지식이다.

사고실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나의 진화인식론으로 지칭한 것에서 선험적 지식이 수행하는 역할을 위해서 나는 이 모든 것을 언급했다. 내가 이 용어를 나의 지식론에 적용하지 않았다고 나는 이전에 지적했다; 나의 지식론을 진화론적으로서 기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나의

지식론은 다른 진화지식론들과 전혀 다르다.

생명체에게는 바로 자체의 시작부터, 생명체를 위하여 일관된 환경적 조건에 대한 타고난 기대가 틀림없이 있다는 전제로부터 나는 시작한다. 생명체는 이 환경적 조건에 단지 순간적으로 적응될 리가 없다; 생명체는 이 환경적 조건에 틀림없이 시간적 기간들에 걸쳐서 적응된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은, 환경적 조건이 틀림없이 상당히 안정적임을 의미한다. 생명체가 처음부터 가능한 모든 변화들을 예상하는 데 관련되었을 수 있다는 것은 참이지만 그것은 실제로 너무 확실하지 않다.

그리하여 생명체가 처음부터 환경의 미래를 틀림없이 어느 정도 예상한다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한다: 다시 말해서, 환경의 모든 미래 상태들. 아마도 그것은 몇 시간의 혹은 아마도 수백만 년의a 문제일 뿐이다. 생명체는 틀림없이 환경의 미래 상태에 적응된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일반적인 지식이 순간적인 지식보다, 특별한 지식보다 앞선다. 바로 시작부터, 생명체는 이런 방식으로 일반적인 지식인, 우리가 통상적으로 자연법칙들에 대한 지식으로 지칭하는 지식을 틀림없이 갖춘다. 물론 이것은, 의식적인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지식은 아니다. 의식은 전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지식을 원초적 생명체에게 귀속시키게 되었다 ㅡ 이것은 분명히 의인화적(擬人化的: anthropomorphic) 개념이다.

이제 이 의인화를 살펴보자.

 

동종관계(Homology), 지식 그리고 적응

 

생물학에서 모든 의인화를 제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분야들에서와같이 이 분야에서 우리는 진화론적 접근방식을 채택해야 하고 그것은, 우리가 동종관계들을 통하여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b

나 자신의 코와 개의 코를 동종으로서 취급할 때, 이것은 진화론을 향한 첫걸음이다. 개에게 코가 있다는 것은 전혀 자명하지 않다; 이것은 우리의 이론들 중 한 가지 이론이고 틀림없이 태고의 인간이 제시한 이론이다. 태고의 인간은 자기 자신의 코와 개의 코를 동종으로서 취급했다; 그리고 그는 또한, 개와 몇몇 원숭이들에게 꼬리가 있는 반면 그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주시했을 터이다. 동종관계들에서 그런 생각은 진화론적 사고의 전제이다. 그리고 우리가 진화론적 관계로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그런 동종관계들을 ㅡ 우리의 팔

 

a 역주: ‘수백만 년의 원어 표현은 millions of years인데 허형은 번역은 몇 백년 후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n this as in other areas we should adopt an evolutionary approach, and that means we should be thinking in terms of homologies.인데 허형은 번역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진화론적 접근법을 적용하면 큰 도움이 된다. ‘상동相同관계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들여다보면 이해가 쉽다.”이다.

 

과 조류의 날개, 우리의 다리와 새의 다리, 우리의 코와 개의 코 사이의 ㅡ

수용해야 한다. 이것들이 진화론의 가설들이다: 우리의 코와 개의 코는 진화적

으로 동종이다.

동종관계들 통하여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까지 그리고 지식의 습득까지 그리고 일반적인 지식까지 틀림없이 확대된다. 이런저런 정도로, 개들과 유인원들은, 우리의 인간적 지식에 대응하는 것을 지닌다. 사실상 이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독단적인 행동주의에게 지성이 다소 부족한 한 가지 이유이다. 그 행동주의는, 스스로 행동을 말할 뿐일지라도, 우리의 행동과 동물의 행동 사이에 동종관계를 도입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이미 동종관계에 관한 그런 가설들을 다소 더 멀리 확대할 자격이 생긴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

이제 나의 근본적인 인식론적 논지는, 지식은 높은 정도의 일반성을 지녀서 예측성(anticipatory)이라는 것이다; 지식은, 긴 기간에 걸쳐서 환경이 어떨지를 예측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꽃들에게서 동종으로 발견하는 낮과 밤의 순환에 관한 지식. (꽃들은 꽃잎을 닫는다, 기타 등등.) 그리하여 꽃들은, 일반적인 규칙성들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안다’. 이것은 꽃들에게 이해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꽃들이 합당하게 적응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분명히 이것은, 조직들의 확대와 축소를 통하여 발생한다. 그러나 조직들을 그렇게 구성되어서 확대와 축소에 적응되었다; 조직들은 규칙성을 전제한다.

인식론에서 나 자신의 입장은, 진화론적이든 칸트적이든 혹은 비진화론적이든, 모든 다른 인식론자들의 입장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일반적인 적응들은 순간적인 적응들에 앞선다. 일반적인 적응들이 먼저 존재한다. 그 적응들은 선험적이다.

 

기대

 

내가 예를 들기 전에, 나는 한 가지 용어를 더 소개하고 싶다. 이런 형태들의 지식이나 이 적응들을, 특히 동물들 가운데서, 기대들(expectations)로서 기술될 것이다.

개는 주인이 5시 반에 올 것을 기대한다. 개는 불안해지고 우리는 개가 자체의 주인이 5시 반에 귀가할 것을 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은 지식의 형태들이고 이 지식의 형태들은 모든 면에서 기대들이다. 유사하게 꽃들은 저녁이면 날씨가 차가워진다는 것을 기대한다; 꽃들은 그것에 대비한다.

우리가 우리의 눈을 사용하는 지각들을 가지기 이전에 우리에게는 (혹은 시각장애가 아닌 우리들에게) 눈이 있다고 나는 말할 터이다. 눈이 기대들이라는 ㅡ 내장된 지식의 한 가지 형태이고 그래서 눈에서의 적응들 ㅡ 사실은 멕시코의 도롱뇽의 경우에서 명백하게 밝혀질 수 있다. 이유인즉 멕시코의 도롱뇽은 동굴에서 성장하는데 눈이 완전히 퇴화된다. 멕시코의 도롱뇽은 유전적으로 눈이 먼다. 우리 눈의 진화를 낳은 모든 기대는, 그 도롱뇽의 경우에 없다; 그 도롱뇽의 눈은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눈은, 적어도 때때로 빛이 있는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그리고 그리하여 눈이 이 빛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니고 태어나는 눈과 동시에 오는 기대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눈은 얼굴의 지각 이전에 존재한다. 그리고 눈은, 얼굴의 지각처럼 다른 방식들에서, 일종의 생물학적 지식인데 이유인즉 눈이 예측이거나 기대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식하는 한, 거의 모든 인식론자들은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도 포함되는데 나는 그를 크게 존경한다), 지식이 지각의 결과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이 견해를 수정하고, 나는 사물을 완전히 다르게 본다. 지각들은, 지식으로 향해서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각들을 갖도록 하는 순간적인 저 환경의 통제가 아니다. 지식, 근본적인 지식은 우리가 모든 방향으로 펼치는 더듬이와 다소 닮았다. 내가 여기에 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오스트리아에 있다는 것으로 내가 비엔나에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는 것이다. 저런 종류의 지식이, 순간적인 지각들보다 나에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런 지식이 그런 지각들을 해석하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진화인식론이라는 나의 견해를 전제하여 완전히 일반적인 지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다음에, 저기에 있는 내가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내가 본다는 사실과 같은 어떤 특별한 것들로 오자. 이 강연장에서 나는, 모르는 청중들의 얼굴들 가운데서 나의 친구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것은, 이 특정 순간 나에 관한 순간적인 지각의 기능이다. 그러나 그 기능은 또한, 이 순간 나와 관련하여, 나의 일반적인 관심사보다a 덜 중요한데 그 관심사로 인하여 나는 방금 어떤 것을 수행하고 있었고 방금 어떤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각적 지식인 이 지식에서, 우리는 엇나갈 수 있고 정말로 자꾸 엇나간다.

우리의 지각적 지식은, 우리의 두뇌가 여과하고 그래서 말하자면 모든 것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해부학적 및 생리학적으로b 우리에게 내재적인 것에 의해

 

a 역주: ‘관심사의 원어는 orientation인데 허형은 번역은 상황 판단이다.

b 역주: ‘해부학적 및 생리학적으로의 원어 표현은 anatomically and physiologically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서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의 지각적 지식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목표들과 의도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여기서 나는 짧은 이야기를 말하겠다.

여러 해 전인데 틀림없이 약 65년 전 나는 다흐슈타인(Dachstein) 산맥에 있었고 어느 풍극(風隙: wind-gap)을 통하여 칼스아이스펠트(Karls-Eisfeld)에서 가로질러 가기를 원했다. 안개가 피어올랐고 농무 속에서 나는 풍극을 찾았는데 마침내 안개와 얼음 속에서 나는 풍극 비슷한 것을 보았다. 자연스럽게 나는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던 풍극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다가갔을 때 그것은 얼음 들판 위의 거대한 암석이었고 그 암석으로 인하여 얼음이 가라앉아서 개울이 형성된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찾던 풍극으로서 잘못 해석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지각들은a 우리의 순간적인 기대들 및 관심사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이 경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부단히 활동한다. 형태들 및 기타 등등에 대한 지각을a, 나의 지각이 사진과 다소 같은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 나는 정말 알지 못한다. 나는 활동하고 있고 사물들을 탐색하며, 그렇게 하면서 때때로 내가 당시에 추구하고 있는 목표들이나 욕망들에 철저히 따라서 특정 방식들로 나는 그 사물들을 해석한다. 그러나 이 욕망들을 통상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다. 나는 저 풍극을 찾으면서 한 시간 이상을 보냈는데 그 풍극을 나는 결국 정말로 발견했고 그 풍극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목표들과 욕망들 및 선호들은, 삶에서 그리고 지각에서a 커다란 역할을 한다. 그것들로 인하여 우리의 해석들이 결정되고, 그다음에 우리는 그 해석들을 검증하거나 반증하기 위하여 시험하려고 시도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다른 것이 있다. 실재의 문제는 여기서 토론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나는, 다른 방식으로 또한 본다. 실재는 우리 모두에게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고 우리가 꿈을 꾸지 않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실재적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신호들을 우리 모두는 지속적으로 내보낸다. 우리는 박쥐와 같다: 우리에게 박쥐의 기술이 전혀 없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유사한 것이 정말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나의 위치를 부단히 바꾼다: 내가 능동적으로 통합한다는 것과 내가 꿈을 꾸고 있지 않음 및 실재로 인하여 정말로 이런 기묘한 인상이 만들어짐을 내가 안다는 것은, 신호 전송에 대한 나의 다양한

 

a 역주: ‘지각들지각의 원어는 perceptionsperception인데 허형은 번역은 인식이다.

 

기교들 중 한 가지 기교이고 순간적인 답신 신호들로부터 유래한다.a

그리하여 나는, 살아있는 것들은 능동적이라고 주장할 터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딱정벌레들처럼, 모든 방향으로 항상 돌아다니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써 사물들을 향하여 우리의 길을 더듬는다. 우리가 눈이 멀지 않다면, 우리의 눈은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눈이 멀었지만 청력을 잃지 않았다면 우리의 귀가 이어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더듬어 가려고 시도하기 위하여 우리의 손가락들을 항상 사용할 수 있다.

나의 청중들이 그것을 일종의 농담으로 보는 것을 나는 주목하고 (이유인즉 그것은 내가 때때로 이용하는 우화이기 때문에) 나는 공포를 느끼지만, 나의 의도는 철저하게 진지하다. 우리의 상황은 항상, 캄캄한 지하실에서 거기에 있거나 없을 캄캄한 모자를 찾는 캄캄한 사람의 상황이다. 저것이 ㅡ 아주 진지하게 ㅡ 우리의 상황이다. 우리는 항상 알지 못하고 항상, 우리의 손이나 우리의 발 혹은 귀나 우리가 지닌 감각기관을 사용하여 우리의 길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데 우리 주변의 실재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 기관들을 능동적으로 이용한다.

나의 지식론은 그리하여 아주 혁명적이다: 나의 지식론은, 나의 선배들이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뒤엎는다. 우리는 능동적이다, 우리는 사물들을 부단히 검사하고 있고 시행착오의 방법을 사용하여 부단히 일한다.

그리고 저것이 우리가 지닌 유일한 방식이다 ㅡ 최초의 동식물들이 지녔다고 우리가 전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도 하다. 최초의 동식물들은,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tz)가 자신의 한 가지 이상의 연구물들에서 그렇게 웅변적으로 기술한 것처럼, 이곳저곳으로 움직인다. 원시 동물들은 시행 움직임을 수행하고 어떤 방법으로 어떤 것을 최적화하려고 시도한다. 아마도 이 시행 움직임들은, 본능적인 유불리 판단의 문제이다. 그러나 아마도 시행 움직임들은 정신적인 것의 문제가 아니고 그 움직임들이 표현하는 기제(機制: mechanism)와 관련하여 매우 좋은 것의 문제일 뿐이다. 그 움직임들은 추구하고 그 움직임들은 발견한다; 원시 동물들은 이 나은 환경을, 나은 세상을 이미 찾고 있다. 그리고 그 동물들은, 나은 세상을 추구하면서 능동적이다. 이 추구에서 그 동물들은 틀림없이,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이미 어떤 정도로 적응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is one of my various techniques of signal transmission, and from the momentary return signals that I actively integrate, I learn that I am not dreaming and that reality does indeed make this strange impression.인데 허형은 번역은 그건 내가 가진 다양한 신호전송 기술 중 하나다. 그러면 순간적으로 반송된 신호를 능동적으로통합한 결과를 해석하여, 나는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니며 실재가 진짜로 이런 괴상한 인상을 만들어내고 있을 알게 된다.”이다.

 

되었다: 그 동물들은 이미 얼마간의 일반적인 지식을 틀림없이 지닌다. 그다음에 변종들과 추가적인 적응들이 온다. 저것이 경험적인 방법이다: 시행착오.

경험적인 방법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공하지 못하는 시행들이나 오류들을 제거된다. 그리고 이 제거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새로운 시행들로 이어진다. 변종들과 DNA를 변화시키는 (유전형질을 변화시키는) 다른 수단들은 이것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한다.

유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들과 동일한 결과들이, 전승되는 방식들에 의하여 또한 만들어질 수 있다. 로렌츠는, 회색 거위에게서 유전적인 것이 (, [enemy]에 대한 인식) 갈까마귀에서도 전승된다고 주장했다. 두 가지 동물에 사이에서의 그의 대비는 특히 아름답게 도출된다.

요약하여: 생물학적 관점에서, 동물과 인간의 지식은 흔히 무의식적인 기대들을 (혹은 잠재적인 기대들) 본질로 한다.

 

귀납에 대한 반증

 

그리하여 생명체는, 매우 다양한 수단들에 의하여, 기능적으로는 유사하지만 유전적으로는 동종이 아닌a 행동들을 취할 것이다. 이 관점에서, 귀납과 같은 것은 없다고 나는 논증하겠다. 이것에 관하여 나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나는 염려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매우 하찮은 주장이다! 귀납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어떤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우리의 지식에 우리는 어떻게 도달하는가?’

전통적인 답변은 다음과 같다: ‘그래, 나는 눈을 뜨고 주위를 살핀다; 그다음에 나는 안다.’

우리의 지식을 정당화시키는 이 방식은, 거의 모든 인식론자들 가운데서 발견될 것이다. 예를 들어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당신의 견해를 초래한 지각들은 어느 것들인가?’

카르납에게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나에게 지각들이 있다는 것과 이 지각들이 나의 지식의 근원이라는 것은 당연시된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 99 퍼센트가, 혹은 99.9 퍼센트라고 말하자,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었다고 나는 논증할 터이다. 나머지는 수정인데, 지식 자체가 예전

 

a 역주: ‘동종이 아닌의 원어 표현은 not (genetically) homologous인데 허형은 번역은 상동관계인이다.

 

에 과거의 지식을 혁명적으로 뒤엎은 것이었던 바와 꼭 마찬가지로, 과거의 어떤 지식을 혁명적으로 뒤엎은 것이다. 그러나 결국 모든 지식은 내재적 지식으로 그리고 그 지식의 수정으로 돌아간다.

내재적 지식이지만 확실한 지식은 아니다. 확실한 지식은 없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닌지를 부단히 시험하지 않고, 나는 알 수 없다. 가능한 모든 검토들을 실행함에 의하여 우리는 부단히 실재를 확인해야 한다.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추측성 지식이다.

내가 크게 좋아하고 존경하는 칸트가, 모든 다른 혹은 거의 모든 다른 철학자들이 그랬던 바와 같이,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나는 유감스럽다. 우리는 동물이다. 우리 인간은 동물이다, 그리고 동물은 확실한 지식을 지닐 수 없다. 그리스인들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신들(gods)은 확실한 지식을 ㅡ epistēme ㅡ 지닌다; 인간은 오직 견해를 ㅡ doxα ㅡ 지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올바르고 건전한 통찰을 망친 최초의 사람이었다. 우리도 epistēme, 즉 확실하고 검증될 수 있는 지식을 지닌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그는, 검증될 수 있는 지식으로 향하는 방법으로서 귀납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가 이것에 관하여 큰 불안을 느껴서, 그는 소크라테스가 비난을 받도록 만들었다!

현재의 문맥에서 이것은 더 길게 토론될 수 없다.

귀납은 자체에 앞서서 중요한 것인 보편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하여 칸트는 옳았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것은, 경험적인 것에 선행하면서 선험적일지라도 (여기서 칸트는 옳았다a), 확실하지 않. 확실한 지식은 없다. ‘지식이라는 {Wissen} 단어는 적어도 영어와 독일어로 망상이라는 표현이다. ‘지식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지식은 확실한 지식이라는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내가 비엔나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비엔나에 있다고 추측한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지식에서 추측으로 하강하는 것일 터이다. ‘내가 비엔나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고 내가 말한다면 내가 비엔나에 있다는 것을 나는 틀림없이 확신한다. 그러나 나는 비엔나에 있음을 나는 결코 완벽하게 확신하지 못한다; 나는 혹시 아마도 매우 생생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나의 생활에서 여기에서 지금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가능성인 어떤 것이다: , 나는 혹시 꿈을 꾸고 있다. 그것은 매우 생생한 꿈일 터이지만 내가 극도로 피곤하기 때문에 그것은 저렇게

완벽하게 놀랍지는 않을 터이다.

 

a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here Kant was right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영어와 독일어로 지식확실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다. 기껏해서 우리에게 있는 것은 추측성 지식이다: 저것이 우리가 지닐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우리의 최고 지식은 단연코 우리가 지닌 최고의 것인데 과학적 지식이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도 역시 추측성 지식을 뿐이다.

 

목표, 문제, 가치

 

나의 친구 리들(Riedl)이 자신의 서문에서 언급한 것에 대하여 나는 다소 비판적이다. 그는, 우리의 이성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어떤 정도로든 협력했다 ㅡ 적어도 다소 협력했다. 그리고 그는 문화 상대론을 지지하여 말했다.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를 것이다.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의 과제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진리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이지만 우리는 진리를 확보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부단히 진리를 찾고 있으며 흔히 어렵게만 진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우리의 근사치를 개선하려고 우리는 계속해서 노력한다. 진리가 절대적이면서 객관적이 아니라면, 우리는 엇나갈 수 없을 터이다. 아니면 우리의 오류들은 진리와 마찬가지일 터이다.

우리의 진리 추구는 항상 다음과 같이 나아간다. 우리의 형상 지각들을 포함하여 우리의 이론들인 우리의 일반화들을 우리는 창안한다 ㅡ 선험적으로. 형상 지각은 가설이다: 형상 지각은 우리가 보는 것을 우리가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형상 지각인 해석은 가설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추측들을 혹은 (동일한 것이지만) 가설들을 다룰 따름이다. 항상 우리는 우리 자신에 의하여 추측들을 만든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이 추측들을 실재와 비교하려고 노력하며 이런 방식으로 그 추측들을 계속 개선하여 실재에 더 근접시키려고 노력한다.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무식한지를 ㅡ 예를 들어 생명의 근원들에 관하여 ㅡ 깨닫는다면 나는 행복할 터이다. 우리는 생명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내가 언급한 미해결 문제들이다. 생명체가 출현할지라도, 왜 생명체는 자체가 태어난 환경에 우연히 적응되는 바로 그 방식으로 태어나야 하는가? 이것은 극도로 난해한 문제이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ㅡ 이것이 첫 번째 요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우 겸손해야 한다 ㅡ 이것이 두 번째 요점이다.

우리가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 ㅡ 이것이 세 번째 요점이다.

이것은 내가 다소 대중화하고 싶은 접근방식이다. 그 접근방식에는 잘되리라는 전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