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모든 생명체는 문제해결 중이다, 1부 5장 진화 지식론에 관하여

이윤진이카루스 2021. 3. 15. 17:21

모든 생명체는 문제해결 중이다, 1부 5장 진화 지식론에 관하여.hwp
0.09MB

 

 

5

 

진화 지식론에 관하여*

 

 

 

친애하는 총장 및 신사 숙녀 여러분,

1944년 나는 아내와 몹시 추운 버스를 타고 쿠크 산(Mount Cook)에서 스키 휴일 보내고 귀가하고 있었다. 버스는, 눈에 갇힌 뉴질랜드 교외 우체국 부근 한 가운데서 멈췄다. 놀랍게도 나는 나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들었고 누군가가 나에게 전보를  우리의 삶을 바꾼 전보  건넸다. 그 전보는 F. A. 하이에크(Hayek)에 의하여 서명되었고 런던정경대학에서 부교수직을 제시했다. 임명은 1945년에 이루어지고 1949년에 나에게 논리학 및 과학적 방법 담당 교수라는 직함이 주어졌다.

런던정경대학의 동문들을 위한 오늘의 강좌는 페이틀(Patel) 박사 귀하에 의하여 내가 초빙되었는데, 런던정경대학에서 개최하도록 내가 요청을 받은 최초의 공개강좌이다. 페이틀 박사님, 내가 이 강좌를 아주 비공식적으로 나의 다소 늦은 취임 강좌로서 간주하는 것을 귀하가 허용할 것을 나는 희망한다. 그 취임 강좌는 내가 지난 40년 동안 기꺼이 기대했던 기회이다.

친애하는 페이틀 박사 귀하에게 대한 나의 두 번째 요청은, 이 강좌 제목의 단어 선택을 내가 바꾸는 것을 허용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런던정경대학에 의하여 제목을 붙여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나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 나는, ‘진화 인식론이 허세적으로 들린다고 느끼는데 특히 허세가 덜한 표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제목을 다른 대등한 표현으로 바꾸어 내가 이 취임 강좌를 진화 지식론에 관하여로 부르도록 허용해 달라.

지식론을 폭넓고 흥미로운 생물학적 진화라는 맥락에 둠에 의하여 지식론에서 이룩된 업적과 훨씬 더 많이 아직 이룩될 업적에 여러분이 흥미를 갖게 하는 것과, 그런 연습으로부터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음을 여러분에게 밝히는 것이 이 취임 강좌에서 나의 목표이고 나의 문제이다.

 

* 1989 6 9일 런던정경대학에서 동문들에게 전달된 강좌; 대학장인 I. 페이틀(Patel) 박사가 주재했 다. 이전에는 브리스틀의 Thoemmes 출판사에 의하여, 경향의 세계(A World of Propensities)의 일부로서 출간되었고 여기서는 친절한 허락을 받고 다시 발표되었다.

 

지식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함으로써 나는 시작하지 않으며, ‘“지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은 더욱 아니다. 대신 나의 출발점은 매우 간단한 명제인데  정말로, 거의 하찮은 명제  동물들은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 동물들은 지식을 지닐 수 있다는 명제이다. 예를 들어 개는 자신의 주인이 근무일 오후 6시경에 귀가할 것을 알 것이고, 그리하여 개의 행동은 그 시간에 자신이 주인의 귀가를 기대한다는 많은 분명한 신호들을 친구 개들에게

보낼 것이다. 동물들이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는 명제가 하찮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제가 오늘날 여전히 널리 교육되고 있는 바의 지식론을 그 명제가 완전히 바꾼다는 것을 나는 밝히겠다.

물론 나의 하찮은 명제를 부인할 몇몇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마도, 지식을 개에게 귀속시키면서 내가 은유와 노골적인 의인화(擬人化: anthropomorphism)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심지어 진화론에 관심을 갖는 생물학자들도 그렇게 말했다.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 그것은 노골적인 의인화이지만 단순히 은유만은 아니다. 그리고 그 의인화는 매우 유용한 의인화이다: 어떤 진화론에서도 필수불가결한 의인화. 여러분이 개의 코를, 혹은 개의 다리에 관하여 말한다면, 개에게 코가  우리 인간의 코와 다소 다를지라도  있다는 것을 참으로만 여러분이 당연시할지라도, 이것들도 역시 의인화들이다.

이제 여러분이 진화론에 관심을 갖는다면, 진화론의 한 부분이 중요한 동족관계(homology) 이론임을 그리고 개의 코와 나의 코는 동종임을 여러분을 발견할 것인데 이것은 개의 코와 나의 코 모두가 먼 공동 조상으로부터 계승된 것임을 의미한다. 이 가설적인a 동족관계 이론이 없다면 진화론은 존재할 수 없을 터이다. 분명히 동족관계 이론은 고도록 사변적이고 매우 성공적인b 이론인 가설이며 모든 진화론자들이 채택하는 가설이다. 그리하여 내가 개에게도 지식이 있다는 나의 논증은 의인화이지만 은유만은 아니다. 더 정확하게 이 경우에는 아마도 두뇌인 개의 어떤 기관에, 모호한 어떤 의미에서 인간 지식의 생물학적 기능에 대응할 뿐만 아니라 그 기능과 동종이기도 한 기능이 있다는 것을 나의 논증은 암시한다.

동종일 것들은, 원래의 의미에서, 기관들임을 주목하라.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기관들의 작용들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또한 과정들이기도 할 것이다. 심지어 행동도, 진화론적 의미에서, 동종으로 가설화될 것이다; 

 

a 역주: ‘가설적인의 원어는 hypothetical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매우 성공적인의 원어 표현은 very successful인데 허형은 번역은 근거가 탄탄한이다.

 

를 들어 구애 행동으로 특히 의식(儀式: ritual)으로 표현되는 구애 행동. 이것이, 가령 다르지만 밀접하게 관련된 조류들의 종들(species) 가운데서 세습적이거나 유전적 의미로 정말로 동종이라는 것은 매우 확실하다. 이것이 우리 자신과 물고기의 몇몇 종들(species) 사이에 동종이라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지만 진지한 가설로 남는다. 물론 물고기가 입이나 두뇌를 소유한 것은, 우리가 상응하는 기관들을 소유하는 것과 매우 확실하게 동종관계이다: 그것들이 공동 조상들의 기관들로부터 유전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매우 확실하다.

진화론과 관련한 동종관계 이론의 중요성이 나의 목적에 충분히 분명해졌기를 나는 소망한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은유로서가 아니라 진지한 진화론적 가설로서 동물의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옹호하는 것과 관련한.

이 가설은, 동물들이 자체의 지식을 의식할 것임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가설로 인하여, 의식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지식을 우리가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우리 자신이 지닌 무의식적인 지식은 흔히 무의식적인 기대들의 특징이어서, 때때로 그 기대가 오류였음이 판명될 때 이런 종류의 기대를 우리가 지니고 있었음 우리는 의식하게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한 사례는, 나의 긴 생애에서 내가 몇 번 겪은 경험이다: 몇 계단을 내려가서 마지막 계단에 이르자 나는 넘어질 뻔하여, 실제로 있던 것보다 한 계단이 더 있거나 없다고 내가 무의식적으로 기대했다는 사실을 나는 의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나는 다음 언명에 이르렀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 의하여 놀랄 때, 그 놀람은 통상적으로 다른 것이 발생하리라는 무의식적인 기대 때문이다.

이제 나는, 동물들이 어떤 것을 알 수 있다는 하찮은 명제로부터 우리가 도출할 수 있고 부분적으로 도출한 (비록 지금까지 무의식적일지라도) 흥미로운 19가지 결론 항목을 제시하겠다.

 

1 지식에는 흔히 기대들의 특징이 있다.

2 기대들에는 통상적으로 가설들의, 추측성이나 가설적 지식의 특징이 있다:

기대들은 불확실하다. 기대하는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들은 이 불확실성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개의 사례에서 개는, 자신의 주인이 제시간에

돌아온다는 이 기대가 좌절되지 않아도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시간

귀가가 결코 확실하지 않았어서 개의 기대가 매우 위험한 가설이었던

것을 우리는 안다. (결국, 아마도 철도 파업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3 대부분의 지식은, 사람의 지식이든 동물의 지식이든, 가설적이거나 추측성

이다; 특히 기대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서 방금 기술된, 매우 평범한

종류의 지식; 가령, 오후 5 48분에 런던으로부터 기차가 도착할 것이라 는 공식적으로 인쇄된 시간표에 의하여 뒷받침된 기대. (몇몇 도서관에서

, 화가 났거나 단순히 감지한 독자들이 시간표를 소설이라고 제목이 붙은 선반에 반납했다.)

4 자체의 불확실성, 자체의 가설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식 중 많은 지식은 객관적으로 일 것이다: 그 지식은 객관적인 사실들에 대응할 것 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한 가지 종(: species)으로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터이다.

5 그리하여 기대나 가설의 진리와 기대나 가설의 확실성을 명백하게

구분해야 한다: 진리라는 개념 확실성이라는 개념; 혹은 우리가 또한

말할 것과 같이, 진리 확실한 진리  예를 들어, 수학적으로 증명

될 수 있는 진리  구분해야 한다.

6 우리의 많은 지식에는 많은 진리가 있지만 확실성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가설들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리의 가설들이 결국 허위로 밝혀

질 수 없는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 가설들을 최대한으로 엄격

하게 시험해야 한다.

7 진리는 객관적이다: 진리는 사실들에a 대한 대응이다.

8 확실성은 드물게 객관적이다: 확실성은, 불충분한 지식에 근거할지라도,

통상적으로 강력한 신뢰감이자 강력한 확신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느낌들은 사실들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하다. 확신에 대한 강력한

감정들로 인하여 우리는 독단론자들이 된다. 그러한 감정들로 인하여

심지어 우리는 발작적인 광신자들로 변모할 것인데 그런 광신자들은

자신들이 무의식적으로 알기에, 이용할 수 없는 확실성을 자신들에게

확신시키려고 시도한다.b

 

이 세목을 이용하여 다음 요점으로 (요점 9) 나아가기 이전에, 나는 잠시 동안 주제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유인즉, 특히 과학자들의 방법들을 연구하고 그리하여 자신들이 과학과 과학적 지식을 연구한다고 생각하는 사회학자들에

 

a 역주: ‘사실들의 원어는 facts인데 허형은 번역은 객관적 사실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y may even turn us into hysterical fanatics who try to convince themselves of a certainty which they unconsciously know is not available.인데 허형은 번역은 심하면, 근거가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확실성을 강요하려고 애쓰는, 이성을 잃은 광신자로 만들기도 한다.’이다.

 

의하여 흔히 무의식적으로 신뢰를 받는 사회학적 상대론이라는 만연하는 교설에 반대하여 내가 몇 마디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사회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객관적인 지식을 신뢰하지 않고, 진리를 사회학적 개념으로서 간주한다. 심지어 고인이 된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와 같은 전직 과학자도, 진리는 전문가들이  혹은 적어도 전문가들 대부분이  참이라는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과학들에서, 전문가들이 때때로 틀린다. 실제로 중요한 새로운 발견인 돌파구가 발생할 때마다 이것은, 전문가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됨과 객관적인 사실들인 사실들이 전문가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름을 의미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돌파구의 발생은 흔하지 않다.)

창조적인 과학자이지만 오류들을 저지르지 않는 과학자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매우 위대한 과학자들을  갈릴레오, 케플러, 뉴튼, 아인슈타인, 다윈, 멘델(Mendel), 파스퇴르, 코흐(Koch), 크리크(Crick) 그리고 심지어 힐베르트((Hilbert)와 괴델(Gödel)  생각하고 있다. 모든 동물들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도 또한 저지를 수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있지만 권위자들은 없다  아직 충분히 확립되지 않는 사실. 물론 우리 모두는, 우리가 오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우리 모두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크게 인식한다. (아마도 괴델이 누구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동물들이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들: 오직 신들(Gods)만 알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은 의견을 밝히고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패거리들을 형성하여 유행될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것과 함께하는 우리의 경멸스러운 경향에 책임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오류가능성에 대한 억압된 감정이라고 나는 정말로 추측한다: 우리들 중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유행에 따르도록 만든 것.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약점인데 그것은 그 약점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물론 그 약점은 정말로 존재한다; 그 약점은 심지어 과학자들 가운데서도 발견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약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점과 싸워야 한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서 싸워야 하고, 그다음에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싸워야 한다. 이유인즉 나는, 객관적 진리인 사실들에만 의존하는 진리를 과학이 추구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의 권위를 뛰어넘고 중재를 뛰어넘고 틀림없이 과학적 유행들을 뛰어넘은 진실에 의존하는 진리. 몇몇 사회학자들은, 이 객관성이란 과학이 (그리하여 과학자들이) 겨냥해야 하는 가능성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학은 적어도 2,500년 동안 진리를 겨냥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진화 지식론인, 동물들도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는 우리의 하찮은 출발 명제로 그리고 이 하찮은 명제로부터 혹은 그 명제에 의하여 제시된 우리가 얻은 결과들의 목록으로 돌아가자.

 

9 동물들만 알 수 있는가? 식물들은 왜 알지 못하는가? 분명히 내가 지식을

말하는 생물학적이고 진화론적인 의미에서, 동물과 인간에게 기대들과

그리하여 (무의식적인) 지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식물들에게도 있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들에게 있다.

10 나무들은, 자신들을 뿌리를 더 깊은 토양층들에 내림에 의하여 필요한

많은 수분을 발견할 것임을 안다; 그리고 나무들은 (혹은 키 큰 나무들이

그런다) 수직으로 자라는 방법을 안다. 개화하는 식물들은, 더 따뜻한

날들이 막 도달할 것을 알고 그 식물들은 자신들의 꽃들을 어떻게 그리고

언제 열고 닫을지  빛의 강도나 기온에서 감지된 변화들에 따라서 

안다. 그리하여 그 식물들에게는, 자신들이 반응하는 감각들이나 지각들과

같은 것과 감각기관들과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예를 들어 그 식물들은

벌들이나 다른 곤충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안다.

11 낙과나 낙엽을 떨어뜨리는 사과나무는, 우리가 수행하는 연구들의 핵심적

요점들 중 한 가지 요점에 대한 사례를 제공한다. 사과나무는 1년의 계절

변화에 적응된다. 그 나무에 내장된 생화학적 과정들의 구조로 인하여 그

과정들은 법칙-같고 장기적인 환경적 변화들에 보조를 맞춘다. 그 구조는

이 변화들을 기대한다: 그 구조는 그 변화들에 반응하게 되어있고, 

변화들에 대하여 사전 지식을 지니고 있다. (나무들, 특히 키가 큰

나무들은 또한 중력과 같은 불변요소들에 탁월하게 적응된다.) 그러나

합당하고 잘 적응된 방식으로 나무는 단기적인 변화들과 힘들(forces)에게, 그리고 심지어 환경에서의 순간적인 사건들에게 반응한다. 사과들의 줄기와

이파리들의 줄기에서의 화학적 변화는 그것들이 떨어지는 것을 대비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통상적으로 바람의 순간적인 작용에 반응하여 떨어진다:

환경에서의 단기적인 혹은 심지어 순간적인 사건들이나 변화들에 합당하게

대응하는 능력은, 동물이 단기적인 지각들인 감각 경험에 반응하는 능력과

매우 유사하다.

12 한편으로는 중력이나 계절 변화의 주기와 같이 법칙 같고 장기적인 환경적

조건들에 대한 적응과 (무의식적) 지식,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단기적인

환경적 변화들과 사건들에 대한 적응이나 지식의 구분은 가장 흥미롭다.

단기적 사건들이 개별적인 생명체들의 생활에서 발생하는 반면, 장기적이고 법칙 같은a 환경적 조건들에 대한 적응은 틀림없이 무수한 세대들의

진화를 거쳐서 작용했다. 그리고 단기적인 적응인 단기적인 환경적

사건들에 대한 지식과 반응을 우리가 더 세밀하게 바라본다면, 단기적인

사건들에 (바람의 특정 작용이나 동물의 왕국에서는, 적의 출현과 같은)

합당하게 반응하는 개별적인 생명체의 능력이 또한 장기적인 적응이고

또한 무수한 세대들을 거쳐서 계속되는 적응 작업임을 우리는 안다.

13 먹이를 찾고 있는 기러기 떼에게 여우가 접근한다. 기러기 한 마리가

여우를 보고 경고음을 낸다. 동물의 눈이 동물을 살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단기적 사건  상황이다. 합당하게 반응하는 동물의 능력은,

태양광선이 주기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환경에 (계절 변화와 유사하거나,

성장 방향을 발견하는 나무에 의하여 이용되는 중력의 방향적 작용의

부단한 이용 가능성과 유사한) 적응된 자체의 눈의  감각기관들의 

소유에 의존한다; 그런 환경에서는 치명적인 적이 위협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런 환경에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상들이 시각적 확인과

관련하여 존재하고 그런 환경에서는 이 적들이 충분한 거리에서

확인된다면 도피가 가능하다.

14 이 모든 적응은, 환경에 관한 장기적 지식의 특성을 띤다. 조금 생각하면,

이런 종류의 적응인 법칙-같은 규칙성들에 대한 이런 종류의 지식이

없으면 눈 같은 감각기관들이 쓸모없을 터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기적인 환경 조건들에 관하여 무의식적이고 매우 풍부한 지식이

없었다면 눈이 결코 진화하지 못했을 터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지식은, 의심의 여지없이, 눈과 함께 그리고 눈의 사용과 함께 진화했다.

그러나 모든 단계에서 이 지식은 어떤 정도로든 감각기관의 진화와 그

기관의 이용 진화에 틀림없이 앞섰다. 이유인즉 감각기관을 이용하는 것의

사전 조건에 대한 지식은 기관 내부에 구축되기 때문이다.

15 철학자들과 심지어 과학자들도 흔히, 우리의 모든 지식이 우리의

감각들이자 우리의 감각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감각 자료들에서

유래한다고 전제한다. 그들은,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이

당신의 주장에 자격을 부여하는 관찰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모든

경우에 대등하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유명한 지식이론가인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이 믿었던 바와 같이). 그러나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종류의 접근방식은 엄청난 오류다. 이유인즉 우리의 감각들이

 

a 역주: ‘법칙 같은의 원어 표현은 law-like인데 허형은 번역은 자연 법치의 성격을 띠는이다.

 

무엇인가를 알려주려면, 우리에게 선험적 지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알기 위하여, ‘사물들이 어떤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물들이 어떤 공간 안에 놓일 수 있다는 것a; 그 사물들 중 다른 것들은

움직일 수 없는 반면, 몇몇은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사물들 중 덜 중요한

다른 것들은 우리의 의식 속으로 침투하는 적이 없을 것인 반면, 몇몇은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중요하여 인식될 수 있고 인식될 것이라는 점: 

사물들은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인식되지 않을 것이고 그 사물들은 우리의

생물학적 장치에 여하한 흔적도 남기지 않을 따름일 것이다. 이유인즉

이 장치가 고도록 능동적이고 선택적이고 그 순간에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것만 능동적으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하여, 

장치는 적응인 기대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상황과 관련된

중요한 요소들을 포함하여 상황에 대한 사전 지식이 이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이 사전 지식은 반대로 관찰의 결과일 리가 없다; 이 사전 지식은

더 정확하게 틀림없이 시행착오에 의한 진화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눈 자체는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시행착오에 의한 진화의 결과이자

적응의 결과이고 관찰이 아닌 장기적 지식의 결과이다. 그리고 눈

자체는, 단기적 관찰로부터가 아니라 환경에 대한 그리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과제에서 해결될 문제들인 것과 같은 상황들에 대한 적응으로부터

유래하는 그런 지식의 결과이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순간-()-순간에서

우리가 지닌 기관들 가운데서 감각기관들을 중요한 도구들로 만드는

상황들.

16 장기적 및 단기적 적응인 장기적 지식과 단기적 지식을 구분하는 중요성과

장기적 지식의 근본적인 특징의 중요성에 대한 어떤 개념을 여러분에게

내가 제공할 수 있었기를 나는 소망한다: 장기적인 지식이 틀림없이

단기적이거나 관찰성 지식에 앞선다는 사실의 중요성과 장기적 지식이

단기적 지식으로부터만 습득될 수 있음은 불가능하다는 중요성. 또한

두 가지 종류의 지식 모두가 가설적임을 여러분에게 내가 밝힐 수

있었기를 나는 소망한다: 두 가지 종류의 지식 모두는, 다른 정도에서

일지라도 추측성 지식이다. (중력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나 나무의 지식은,

우리나 나무가 더 이상 가속도가 붙지 않는 로켓이나 탄도미사일에

 

a 역주: 이 절의 원문 표현은 that they can be located within some space인데 허형은 번역은

그것이 일정 거리 내에서 위치파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놓인다면, 중대하게 잘못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장기적인 조건들은

(그리고 그 조건들에 대한 지식)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기적

지식에 대한 사례는 곡해로 판명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명제가 혹시 모든 형태의 인간 지식을 포함하지는

않을지라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에게 타당한 결정적이고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명제에 도달한다.

17 환경적 및 내부적 규칙성들에 대한 모든 적응들인 장기적 상황들과 단기적

상황들에 대한 모든 적응들은, 지식의  그 큰 중요성을 우리가

진화생물학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식의  종류들이다. 적응들의 혹은

시도된 적응들의 형태들이 아니거나 분명히 아닌 인간 지식의 몇 가지

형태들이 있다. 그러나 개략적으로 말해서,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에서

아인슈타인까지 생명체가 지닌 거의 모든 지식의 형태들은, 생명체가

자체의 실제적 과제들에 혹은 미래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과제들에

적응하는 것을 돕는다.

18 생명체는, 어느 정도 자체의 환경에 적응되면, 존재할 수 있을 따름이고

생존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식은  물론 원시적 지식  생명체만큼a 오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은, 38억여 년 전에 세포

이전 생명체의 기원과 함께 시작되었다. (단세포 생명체는 크게 뒤늦지

않고 생겨났다.) 이것은, 지구가 충분히 식어서 대기권에 있던 수분의

일부가 액체로 변하자 곧 발생했다. 그때까지 물은 증기나 구름의 형태로만

존재했지만 당시 뜨거운 액체상태의 물이 작거나 큰 암석분지에 모여서

최초의 강과 호수와 바다를 형성했다.

19 그리하여 지식의 기원과 진화는, 생명체의 기원 및 진화와 동시에

발생했다고 언급될 것이고 우리의 행성인 지구의 기원 및 진화와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언급될 것이다. 진화론은 지식을, 그리고 지식과 우리

자신들을, 우주와 연결한다; 그래서 지식의 문제는 우주론의 문제가 된다.

 

여기서 나는, 동물들이 지식을 지닐 수 있다는 명제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결론들 중 몇 가지 결론들에 대한 나의 목록을 끝낸다.

나는 아마도 1934년 독일에서 최초로 그리고 25년 후인 1959년 영어로 처음 발간된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를 매우 간략하게 언급할 것이다. 영어 초판본의 서문에서 나는 

 

a 역주: ‘생명체만큼의 원어 표현은 as old as life인데 허형은 번역은 지구의 나이만큼이다.

 

주론에 관한 문제의 매력을 서술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매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세계를  우리 자신들과 우리의 지식을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포함하는  이해하는 것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이, 지식에 관한 진화론의 배경을 내가 여전히 보는 방식이다.

우리의 태양계가 진화했고 지구가 충분히 식었을 때, 지구상 어느 곳에서 틀림없이 생명체의 시작과 진화에 우호적인 조건들이 전개되었다. 단세포적인 박테리아 생명체가 지구상 모두 곳에 걸쳐서 빠르게 퍼졌다. 그러나 원래 그렇게 매우 우호적이던 지역적 조건들은, 많은 다양한 지리적 지역들에 걸쳐서 우세했을 수 없었을 터이다; 그래서 생명체는 틀림없이 싸움을 겪었던 듯이 보인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시간에, 많은 다양한 박테리아 형태들이 진화하여 매우 다양한 환경적 조건들에 적응되었다.

사실들이 그러한 듯이 보인다. 물론 그 사실들은 확실한 것과 거리가 멀다: 그 사실들은, 몇 가지 지질학적a 발견물들에 대한 가설적 해석들이다. 그러나 그 해석들이 심지어 근사치로 옳다 해도, 현재 가장 널리 수용되는 생명의 기원론을 그 해석들은 두 가지 이유들 때문에 반증한다: 소위 수프 이론(soup theory)’, ‘죽 이론(broth theory)’을 반증한다.

첫 번째 이유: 수프 이론의 지도적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고분자들이 발전하여 나중에 결합하여 최초의 생명체를 형성하는 수프나 죽(broth)에 대하여 이 이론은 낮은 온도를 요구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이유는 온도가 매우 낮지 않다면 ([broth]은 섭씨 0도 이하로 상당히 과냉각되어야 한다), 고분자들은 결합하는 대신 빠르게b 분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지구에 대하여 우리는 아는 바에 따르면, 그렇게 찬 장소들이 존재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지구의 표면과 심지어 더욱이 바다는 훨씬 더, 오늘날보다 뜨거웠다;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섭씨 0도 이하로 과냉각된 물이 있는 장소는, 북극 근처나 냉동 공장 내부를 제외하고,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두 번째 이유: 수프 안의 고분자들이 결합하고 그리하여 자체들을 조직하여 살아있는 생명체가 된다는 것은 극도로 비개연적이다. 그 비개연성은 매우 커서, 그 사건의 비개연성을 다소 덜어주기 위하여 우리는 극도로 긴 기간을 전제해야 할 터이다; 정말로 우주가 존재했다고 계산된 시간보다 훨씬 더 긴 기간. 수프 이론에 대한 가장 유명한 옹호자들 중 몇몇도 그렇게 말한다.

 

a 역주: ‘지질학적의 원어는 geological인데 허형은 번역은 지리적이다.

b 역주: ‘빠르게의 원어는 quickly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이로 인하여 문제의 이론에 대하여 건전한 반증이 성립하는데 이유인즉 지질학자들이 발견한 바와 같이, (끓어오르는 뜨거운) 액체 상태의 물 형성과 생명의 기원 사이의 기간이 놀라울 정도로 짧고  고온이 수프 이론가들에게 수용될 수 있을지라도  그렇게 극도로 비개연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허용하기에는 너무 짧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생명체의 기원에 대하여 현재 지배적인 수프 이론이 두 번 반증된다. (다른 반증들이 많이 있다.) 그리하여 1988년에 대안 이론이 발표된 것은 행운인데 그 대안 이론에는 이런 난제들이나 유사한 난제들이 없다. 그 대안 이론은, 물과 철(iron)과 이산화탄소 및 수황화물(hydrosulphide)이라는 단순한 무기물 미세분자들과 같은 무기물 미세분자의 존재만을 전제한다. 최초의 대사 주기들(metabolic cycles)이 그리고 그 주기들과 동시에 생명체의 화학적 자기-조직 이전에 어떤 유기적 고분자들이 존재했다고 전제되지 않는다.a 새로운 이론은, 유기적 분자들이 (설탕과 같은) 아마도 바다 아래 깊은 곳에서 마침내 어떻게 진화하여 용해되기보다는 황철석 결정들(pyrite crystals)의 표면에 달라붙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밝힌다. 황철석 결정의 혐기성(嫌氣性: anaerobic) 형성은, 세포 이전 생명체의 초기 형태를 이루는 화학적 과정들에  특히 탄소 고정(carbon fixation)b  필요한 화학적 자유에너지(free chemical energy)c 만들어낸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이 새로운 이론은, 그 이론의 저자에 의하여 상당히 상세하게 전개되었고 매우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 이론은 많은 생화학적 경로들을 설명한다. 그 이론은 실험들에 의하여 즉각적으로 시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이 지닌 가장 큰 힘은, 그 이론이 이전에 설명되지 않은 많은 생화학적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생화학적 이론의 저자인 귄터 베흐터스호이저(Günter Wächtershäuser)는 또 다른 생화학적 이론도  진화론적 지식론에게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토론하고 있는 문제들에게 훨씬 더 큰 중요성을 띠는  제시했다. 그는, 최초의 감광(感光: light-sensitive) 기관의 기원에 관한 생화학적 이론을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눈의 태초 획기적인 시조에 관한 생화학적 이론. 우리의 눈은 우리가 지닌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이기 때문에 이 결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No organic macromolecules are assumed to be present before the first metabolic cycles start, and with them, the chemical self-organizing of life.인데 허형은 번역은 최초의 화학적 자기결합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유기적 고분자가 존재했다는 말은 어디에서 포함되어 있지 않다.’이다.

b 역주: ‘탄소 고정의 허형은 번역은 탄소화합이다.

c 역주: ‘화학적 자유에너지의 허형은 번역은 화학 에너지이다.

 

과는 우리의 토론에 매우 흥미롭다.

주요 결과는 이렇다. 추측건대 박테리아인 어떤 초기 단세포 미생물이, 태양광선을 화학 에너지로 바꾸는 획기적인 전기-화학적 방법을 발명했다; 태양광선을 먹이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태양광선을 먹고 사는 방법이다. 그것은 대담하고 정말로 위험한 발명이었는데,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태양광선이 너무 많으면  그리고 특히 태양광선의 자외선 부분  치명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발명과 동시에, 세포에게 (이전에는 암흑의 바다 아래 깊은 곳에 살고 있었을) 몇 가지 문제들이 발생했다. 그 문제들은 베흐터스호이저에 의하여 지적되었다.

첫 번째 문제는, 어디에 태양광선이 있는지를 알아내어 그 정보를 이용함에 의하여 태양광선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이었다. 우리 눈의 기능을 지닌 감각기관인, 세포의 움직임을 위하여 기존 존재하는 어떤 행동 기제(機制: mechanism)에 화학적으로 연결된 감각기관을 처음 형성함에 의하여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출현한 두 번째 문제는, 자외선을 너무 많이 맞는 위험을 피하는 문제였다: 피해를 입기 전에 아마도 바닷물의 더 깊은 수심인 어떤 그늘을 향하여 제시간에 움직이는 문제.

그리하여 눈의 진화에서 심지어 눈의 진화와 관련된 최초의 감각기관은 틀림없이 세포의 움직임을 통제하게 되었다. 그 감각기관은 틀림없이 세포의 먹이 기제(機制: mechanism)의 일부가 되었고 세포의 안전 이동의 일부가 되었다: 위험을 피하기 위한 세포의 기제(機制: mechanism). 눈은, 세포가 방사선 피해를 막는 데  위험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 눈의 바로 첫 번째 기능이, 환경적 상태들과 환경적 가능성들에 대한 사전 지식을 띠었다.

다르고 태양광선 밖으로 나가는 (그리고 아마도 태양광선 속으로 들어오는) 본질적으로 보호적인 저 발명품이, 초기 눈 발명의 일부가 되어 행동 장치에 연결되지 않았더라면, 태양광선을 먹이로 삼는 혁명적인 발명은 자멸적이었을 터이라고 베흐터스호이저는 지적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그의 이론에서 출현한다: 이 두 가지 위대한 발명은 어떻게 합쳐질 수 있었을까?

생물학적 진화, 특히 초기 진화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다면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화학적 과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단히 인식해야 한다. (fire)처럼 생명체가 과정이라고 말한 사람은 예수가 태어나기 500년 전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였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의 생명은 화학적 산화(酸化: oxidation)

의 복잡한 과정과 같다. 유리산소(遊離酸素: free oxygen)가 이용될 수 없을 때인 우리의 생명의 진화 최초 단계들에서 유황이 그 산소의 역할을 대신했다. 여러분이 알 것처럼, 우리 환경의 역사에서 생명체를 유발하는 모든 혁명들 중 가장 큰 혁명은 태양광선을 먹이로 사용하는 박테리아의 출현이다  부언하여, 그 출현으로 나중에 식물 왕국이 스스로 출현했다a: 식물들의 왕국이 스스로 생기자 대기권에 산소가 생겼다. 그래서 그로 인하여 우리가 아는 공기가 생겼고, 그로 인하여 우리가 아는 바의 생명인 우리의 생명이 가능해진다: 우리의 호흡, 우리의 , 우리의 (fire) (내부와 외부의b) 가능해진다. 헤라클리투스는 옳았다: 우리는 물체들이 아니라c 화염들이다. 혹은 다소 더 사실적으로d, 모든 세포들처럼 우리는 신진대사의 과정들이다; 화학적 과정들로 구성된, 고도로 활성화된 (에너지와 짝을 이루는e) 화학적 통로들로 구성된 그물망들이다.

벨기에의 탁월한 생화학자 마르셀 플로르킨(Marcel Florkin) (1900-1979), 생명의 진화나 생명체들의 진화는 화학적 통로들로 구성된 그물망들의 진화라는 것을 최초로 명백하게 안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주어진 어떤 기간에 세포가 되는 통로들의 그물망으로 인하여, 흔히 다소 변종일 뿐인 어떤 새로운 통로가 기존의 체계에 자체를 접목시키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새로운 통로는, 통로들의 옛 체계에 의하여 생성된 화학적 화합물들 몇 가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었을 터이다. 플로르킨이 지적한 바와 같이, 기존 세포의 화학적 통로로 구성된 그물망은, 나중 접목들을 가능하게 만든 몇 십억 년 전 태고의 통로들을 이 그물망의 일부로서 여전히 유지한다. 플로르킨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것은, 발육 태아의 해부학적 구조로 구성된 해부학적 통로들이, 가령 몇 억 년 전 그 옛 선조들의 해부학적 통로들을 여전히 유지할 방식과 유사하다. 그리하여 현존하는 신진대사의 통로들로 인하여 그 그물망의 혁명적인 내력 중 일부가 밝혀질 것이다; 프리츠 뮐러(Fritz Müller)와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의 소위 생물 발생 법칙(biogentic law)’과 유사한 상황.

베흐터스호이저가 두 가지 위대한 발명들의 동시성이라는f 수수께끼를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플로르킨의 이 개념들을 배경으로 한다: 태양광을 먹이로 삼는 발명과 눈의 감광성(感光性: light-sensitivity) 발명인 태고의 눈 발명.

 

a 역주: ‘부언하여, 그 출현으로 나중에 식물 왕국이 스스로 출현했다의 원어 표현은 which, incidentally, led later to the self-invention of the kingdom of plants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내부와 외부의의 원어 표현은 within and without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c 역주: ‘물체들이 아니라의 원어 표현은 not things (but)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d 역주: ‘사실적으로의 원어는 prosaically인데 허형은 번역은 김빠진 표현을 쓰면이다.

e 역주: ‘에너지와 짝을 이루는의 원어 표현은 energy-coupled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f 역주: ‘동시성의 원어는 coincidence인데 허형은 번역은 ‘(발명에서 발견되는) 우연성이다.

 

설명하면, 두 가지 발명들 모두가 화학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 햇빛을 먹이로 삼는 장치를 만들어내는 통로들 중 한 통로와 시각 장치를 만들어내는 통로는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생명체들이 자체의 환경을 탐사하는 일반적인 경향으로부터 그 발명이 발생했다고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이 경우에, 해수면을 향하여 떠오름에 의하여. 아마도 이 박테리아들 중 하나 또는 다른 하나가, 이 새롭고 화학적으로 연결된 접목들 두 가지 모두를 발명을 가능하게 만든 단계까지 우연히 진화했다. 다른 생명체들도 해수면 가까이로 대담하게 모험을 감행할 것인데 태양광선에 의하여 파괴될 뿐이다.a 그러나 한 생명체가 (혹은 아마도 몇 생명체들) 합당한 화학적 차림새를 갖추고 살아남았다. 그 생명체는, 해수면을 자체의 자손을 위하여 가장 풍요로운 먹이창고로 변환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은, 대기권을 변모시킨 엄청난 양의 산소를 뿜어냈다.

다윈적인 시행착오의 방법이, 화학적 통로들의 변종과 증대의 (부분적으로 우연적인) 방법으로 판명됨을 우리는 안다. 생존하는 세포들에서 고도로 특수한 화학적 촉매제들인, 다시 말해서 특수한 화학적 단계들을 가속시키는 화학적 수단들인 효소들에 의하여 그 통로들은 화학적으로 단계마다 통제된다; 그리고 그 효소들은 유전자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통제된다. 그러나 유전적 돌연변이와 새로운 효소 합성은, 새로운 효소가 우연히 기존 그물망에 맞지 않으면, 통로들로 구성된 그물망에서 새로운 단계를 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변종들과 증대들이 가능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항상 통로들로 구성된 그물망의 기존 구조이다. 새로운 발명들을 위한 잠재성을 담고 있는 것은 기존 그물망이다; 그리고 합당한 효소는, 아직 이용될 수 없을지라도, 곧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b 몇몇 경우들에서 그 효소는, 잠재적인 단계들 중 어느 단계가 실현될 지를 결정함에 의하여 종(: species)의 미래 진화를 결정할 것이다.c (또 다른 단계가 많고 빠른 추가적인 단계들을 불러올 것인 반면, 한 단계는 느린 진화를 낳을 것이다. 두 가지 단계들 모두가 동등하게 다윈적일 것인데 왜냐하면 두 가지 단계들 모두가 선택을 받기 때문이다; 분명히 다른 그 단계들의 속도 들은 화학적 관계들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Other organisms will also have boldly ventured near the surface, only to be destroyed by sunlight.인데 문장의 시제가 미래완료이어서 문장의 오류로 보인다.

b 역주: 이 두 가지 문장의 원문은 It is the existing net that contains the potentiality for new inventions; a fitting enzyme, if not yet available, may become available soon.인데 허형은 번역은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낼지 말지 그 열쇠를 안고 있는 것은 현존하는 경로 체계이며, 만들기로 결정되면 알맞은 효소가, 아직 준비돼있지 않다면 곧 준비된다.’이다.

c 역주: 이 문장의 주어는 대명사 it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고 미래의 원어는 future인데 역시 누락되었다.

 

이제 나는, 지식론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언급된 모든 것으로부터 학습될 교훈들 중 몇 가지를 열거하겠다.

도출될 주요 교훈은, 아마도 조금 과장되어, 다음과 같이 언명될 것이다. 심지어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들에게서도 그리고 심지어 감응성의 가장 원시적인 경우들에서도, 모든 것은 생명체 자체의 달렸다: 생명체의 구조, 생명체의 상태, 생명체의 활동에 달렸다. 더욱 특히 우리가 토론을 잠시 동안, 생명체가 놓인 환경의 순간적인 상태에 대하여 생명체가 지닌 감응성의 도움을 받아서, 환경으로부터 어떤 지식을 습득하는 문제에 국한시킬 심지어 그때도 생명체 자체의 상태인 생명체의 장기적 구조이며 생명체가 자체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생명체의 준비 상태이기도 한 생명체의 활동 상태에 모든 것이 달렸다.

내가 방금 말한 것을 매우 개략적으로만 더 완벽하게 전개하기 위하여, 선험적(a priori)  경험적(a posteriori)이라는 칸트적 용어사용법의 변종을 여기서 소개하는 것이 유용하다. 칸트에게서 선험적 지식은, 감각-관찰 이전에 우리가 지닌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험적 지식은, 감각-관찰 이후 , 관찰 이후에 우리가 지니는 지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선험적(a priori)  경험적(a posteriori)이라는 용어들을 이 시간적이거나 역사적인 의미에서만 사용하겠다. (칸트 자신은 그의 용어 선험적[a priori]을 추가적으로 관찰에 앞설 뿐만 아니라 선험적으로 타당한[a priori valid]’ 지식을 의미하도록 사용한다; 그것에 의하여 그는 반드시 혹은 틀림없이 참임을 의미한다. 물론 나는 이것에서 그를 따르지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지식에 있는 불확실하고 추정적 특성을 내가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선험적이라는 용어를, 생명체가 감각 경험 이전에 지니는 저런 종류의 지식을  오류를 저지를 수 있고 추정적인 지식  규정하기 위하여 사용하겠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타고난 지식이다. 그리고 나는 경험적이라는 용어를, 생명체가 놓인 환경 상태에서의 순간적인 변화들에 대하여 생명체가 지닌 감응성의 도움을 받아서 습득되는 지식에 대하여 사용하겠다.

이 칸트의 용어사용법을 내가 방금 지적한대로 수정하여 사용하면서, 칸트 자신의 입장은  당시 매우 획기적인  이와 같다고 우리는 이제 말할 수 있다.

(A) 우리 환경의 상세하고 순간적인 상태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은 경험적이다.

(B) 그러나 우리가 관찰적이거나 경험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기 이전에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틀림없이 지니는 선험적 지식이 없다면, 그런 경험적 지식은 불가능하다: 선험적 지식이 없다면, 우리의 감각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이해될 수 없다. 우리는 먼저 전체적인 참고의 체계를 확립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느낌들을 이해하는 데 이용될 맥락이 없을 것이다.

(C)  선험적 지식은, 특히, 시공간의 구조에 대한 (시공간 관계들에 대한) 그리고 인과성에 대한 (인과적 관계들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a

이 모든 요점들에서 칸트가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언하여, 이것에서 아마도 쇼펜하우어를 제외하고 칸트에게는 실제적인 후계자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견해로, 칸트는 획기적인 지식론의 가장 중요한 결과들에 대하여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나는 칸트보다 훨씬 더 멀리 가고 있다. 모든 생명체들이 지닌 지식의 가령 99 퍼센트가 타고난 것이어서 우리의 생화학적 구조에 포함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칸트에 의하여 경험적으로 생각되어 우리의 감각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료들로 생각된 지식의 99 퍼센트는 사실상 경험적이 아니라 선험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우리의 감각들은, 우리의 질문들에 대하여 -그리고-아니요로만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 (칸트 자신이 안 바와 같이) 때문이다; 우리가 선험적으로 생각하여 물어보는 질문들; 그리고 때때로 매우 정교한 질문들. 게다가 심지어 감각들의 예-그리고-아니요 답변들도 우리에 의하여 해석되어  우리가 선험적으로 미리 생각한 개념들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물론 그 개념들은 흔히 곡해된다.b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지식은 가설적이다. 그 지식은 부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환경에 대한 적응이다.c 그 지식은 흔히 성공하고 흔히 성공하지 못하며, 추정적인 시행들의 결과이고 불가피한 오류들의 결과인 동시에 오류 제거의 결과이다. 생명체가 지닌 계승될 수 있는 구조에 들어온 오류들 중 몇몇 오류들은, 그 오류들을 지닌 생명체들을 제거함에 의하여 제거된다; 다시 말해서, 생명체 개체가 제거된다. 그러나 어떤 오류들은 빠져나가는데, 이것이 우리 모두가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이다: 환경에 대한 우리의 적응은 최적인 때가 없어서 그 적응이 항상 불완전하다. 개구리는 선험적으로 구조를 갖추어, 파리가 움직일 때만 먹이를  파리  볼 수 있다. 파리가 조용히 앉아있으면, 파리가 가까이 있어도 개구리는 파리를 보지 못한다: 개구리의 적응은

 

a 역주: 이 문장에서 인과성 인과적의 원어들은 causality causal인데 허형은 번역은 임의성 임의적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of course, they are often misinterpreted.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is an adaptation to a partly unknown environment.인데 허형은 번역은 또한 일부는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는 환경에 대한 적응이다.’이다.

 

불완전하다.

생명체들과 그들의 기관들은, 그들의 환경에 관한 기대들을 통합한다; 그리고 기대들은  우리가 안 바와 같이  우리가 지닌 이론들과 동종(同種: homologous)이다: 나의 개의 코가 나의 코와 동종인 만큼 동종이다. 그리하여 적응들과 기대들이 심지어 과학 이론들과도 (그리고 역순으로 이론들이 적응들 및 기대들과) 동종이라는 가설을 나는 제시한다. 이론들에는 흔히 가치평가들이 포함될 것이다.a 빛에 대한, (: heat)에 대한 그리고 산성(酸性: acidity)에 대한 단세포 생명체의 감응성은, 너무 적거나 너무 많은 양의 이것으로부터 그 생명체가 도피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생명체의 구조는 다음과 같은 이론을 통합할 것이다: ‘둘러싼 물이 위험할 수 있다: 그 물은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울지도 모르고 산성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그런 가치평가들은, 생명체가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진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환경적 상태들로부터 그 생명체가 위험을 추정한다면 멀리 이동함에 의하여. 문제들, 가치들 그리고 활동 모두는 함께 진화한다.

나는 태고적 눈의 기원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말했다; 그래서 눈의 발명으로 인하여, 환경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이자 새로운 이론들이며 새로운 지식이 그리고 또한 새로운 가치들의 가능성이 통합된다고 우리는 이제 말할 수 있다. 이유인즉 새로운 화학적 합성을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그 합성과 동시에 해수면 가까이 올라간 최초의 박테리아는, 자체의 형제들 수백만이 굴복한 이후에 자체의 생존에 의하여 자체가 적응이라는 문제를 해결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함에서, 그 박테리아는 새로운 가치들에 대하여 새로운 이론을 도입했다. 그 발명은 생명체의 구조에 통합되었다; 새롭고 계승될 수 있는 지식이고 그리하여 새로운 선험적 지식에 통합되었다.

이 위대한 혁명의 내부에서 눈(eye)에 의하여 생명체에게 전달될 순간적인 신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비교적 중요하지 않다. 그 신호들은 오직 생명체의 상태와 함께 중요해진다; 가령 먹이에 대한 생명체의 욕구. (eye)은 틀림없이 생명체가 파괴되지 않고 태양광선을 먹이로 삼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동종관계에 의하여 우리가 혹시 자료들로 지칭할 것과 같은 신호들에게는 주목될 필요조차 없다. 행동을 초래하는 것은 해석된 신호들이다 (그리고 해석은 행동의 일부이다): 신호들 보태기 이익 및 위험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평가; 객관적인 자료들이 아니라, 생명체의 선험적 구조의 도움을 받아서 습득되어

 

a 주석: 이 문장 다음에 이론을 세우면 그것을 적용하여 얼마나 정확한지 가늠해보기 마련이라는 뜻이다라는 원문에 없는 문장이 허형은 번역에 삽입되었다.

 

해석된 유혹과 경고.

심지어 박테리아에게서도 이론들과 가설들이 신호들인 감각들에 선행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특히 과학에서 가설들이, 몇몇 과학자들이 여전히 자료들로 지칭하는 것 앞에 온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나에게 없다; 가설들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그리고 때때로 매우 위험하게) 추구되어 습득되기 때문에, 왜곡을 초래할 정도로 강조할 필요가 나에게 없다.

관찰로 (혹은 자료들’) 인하여 과학에서 과학적 이론의 포기되고 그리하여 우리들 중 몇몇이 새로운 잠정적 이론을  새로운 시행  고안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이론은 우리의 산물이자 우리의 사고이며 우리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새로운 이론은, 심지어 옛 이론에 대한 반증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도, 몇몇 이상의 사람들에 의해서 드물게만 창안된다. 새로운 문제를 보는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문제를 보는 것은, 새로운 이론의 창안에서 매우 어려운 단계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하여 눈(eye)의 발명은 이론적인 새로운 선험적 지식의 발명이자 환경에 대한 적응의 발명이다. 그 발명은 장기적인 환경적 구조에 대한 최초의 적응에서 유래한다: 잠재적으로 먹이가 될 수 있는 태양광의 존재에 대한 적응; 그리하여 그 발명으로 인하여 이 환경적 구조에 대한 지식이 통합된다. 그 발명은 높은 정도의 보편성을 지닌 이론적 지식인데 시간과 공간에 대한 칸트의 지식과 거의 같다. 그 발명으로 인하여, 순간적인 관찰의 가능성이자 더 정확하게 순간적인 환경적 상황에 대한 적응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그 발명으로 인하여 생명체에게 유혹의 상태나 배척의 상태가 도입될 것이고, 준비된 행동들을 환경에 풀어놓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고도로 일반적인 이론의 발명이 (이 경우에는 감각기관의 발명) 관찰에 (감각기관의 사용) 앞설 것이다: 그 발명으로 인하여 관찰이 가능해지고, 그 발명은 생명체가 이용 가능한 행동들의 집합에 도입된다. 그리하여 그 발명 자체가, 시행착오에 의하여 발견된 적응이다. 이론들은 (과학적이든 아니든) 시행들이고 발명품들이다; 이론들은 많이 관찰한 결과들이 아니; 이론들은 많은 자료들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분명히 눈(eye)의 최초 발명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 발명의 많은 것이 보존되었고 추가적으로 많이 진보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동물들과 공통으로  태양광이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지식을 잊었고 태양광을 먹는 방법을 잊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는 이 지식을 완전히 되찾지 못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나는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고 과학은 계몽된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나는 심지어, 과학이 계몽된 박테리아의 상식보다 훨씬 더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인정되는 바와 같이 상식과 충돌하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 강좌에서 이 견해가 계몽된 상식과 충돌할 필요가 없음을 내가 밝혔기는 나는 소망한다. 고전적 경험론을  우리의 눈을 뜨고 감각이 부여하거나 하느님이 주는 자료들을 그 자료를 소화할 두뇌에 흘려 넣기만 해서 우리가 지식을 얻는다고 말하는 정신에 관한 양동이 이론  내가 반증했다고 나는 믿는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 자신의 저서 제목인 나는 카메라이다(I am a Camera)에 의하여 이 견해를 표현했다. 그러나 그가 이 제목을 선택했을 때, 심지어 카메라에도 선험적으로 내장된 구조가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그는 망각했다; 원시적 카메라들이고 놀라울 정도로 진화된 카메라들이 있다는 것을 그는 망각했다; 그리고 나쁜 카메라가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하는 약해지는 빛 속에서는 좋은 카메라는 완벽한 사진을 만들어내어 우리가 그 카메라에게서 원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을 그는 망각했다. 그 좋은 카메라는 환경에, 그리고 또한 우리의 요구들에, 다시 말해서, 우리의 문제들에 더 잘 적응한다: 그 좋은 카메라는, 우리가 카메라의 진화를 다루고 있는 동안 우리가 진화시킨 특정 가치들을 통합한다. 그러나 많은 것들을 그 카메라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그 좋은 카메라는 스스로 향상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좋은 카메라는 새로운 중요한 문제 즉, 새로운 잠정적인 해결책을 창안할 수 없다.

모든 생명체들은 문제 발견자들이고 문제 해결자들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 해결에는 평가들이 포함되는데 그 평가들과 동시에 가치들이 포함된다. 생명체와 동시에만 문제들과 가치들이 출현한다. 그래서 나는, 컴퓨터들이 중요한 새로운 문제들이나 새로운 가치들을 발견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발명한 이 새로운 가치들 중에서, 두 가지 가치들이 내가 보기에 지식의 진화를 위하여 가장 중요하다: 자기-비판적 태도  우리가 항상 우리 자신에게 부응하라고 가르쳐야 하는 가치; 그리고 진리  우리의 이론들이 부응하도록 우리가 항상 추구해야 하는 가치.

이 가치들 중에서 첫 번째 가치인 자기-비판적 태도가, 거미줄이나 새둥지나 비버의 댐과 같은 생활의 특정 객관적인 산물들과 동시에 처음 생긴다: 수리될 수 있거나 개선될 수 있는 산물들. 자기-비판적 태도의 출현으로 인하여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시작된다: 객관적인 진리를 위하여 비판적인 접근방식인 비판적 접근방식이 시작된다. (런던정경대학의 설립자들이 댐을 수리하는 비버를 대학의 문장[紋章: coat of arms]으로 선택하도록 고무시킨 것은 비판적 접근방식이기를 나는 소망한다.)

비판적 접근방식과 객관적 진리라는 이 두 가지 가치들 모두는, 인간 정신의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a 산물인 인간의 언어만으로써 생긴다. 언어로 인하여 우리의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우리의 이론들이 마치 외부의 대상들인 양,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우리 자신들의 바깥 세상에 그 이론들이 속하는 양 그 이론들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비버가 만드는 댐처럼, 이론들은 비판의 대상들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저 가장 중요한 가치에 비추어 그 이론들을 수선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사실들에 대한 대응이라는  진리 가치.

아메바에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단 한 가지 단계만 있다고 나는 자주 말했다. 아메바도 아인슈타인도 시행착오의 방법으로 일한다. 아메바는 틀림없이 착오를 싫어하는데 이유인즉 아메바는 실수를 저지르면 사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우리의 착오들로부터만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착오들을 탐지하여 그 착오들을 우리의 이론들로부터 제거하기 위하여 새로운 시행을 시도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아메바는 할 수 없지만 아인슈타인은 할 수 있는 조치는 비판적이고 자기-비판적인 태도이고 비판적 접근방식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언어의 발명으로 인하여 우리의 손아귀에 들어온 장점들 중에서 최고의 장점이다. 그 장점으로 인하여 평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예술가이자 과학자인 알브레흐트 뒤러(Albrecht Dürer)의 말을 인용하면서 나는 나의 강좌를 마치고 싶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진리를 추측하여 그의 업적에서 나의 착오를

증명하여 나의 착오를 힐책하기 위하여 내가 배운 아주 작은 지식을

발표한다. 이렇게 해서, 이 진리가 밝혀진 수단이 나였음을 나는

기뻐하겠다.

 

 

 

 

 

 

 

a 역주: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의 원어 표현은 the first and most important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