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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의’에 갇히지 않고 일본 바라보기

이윤진이카루스 2011. 9. 24. 06:52

‘국민주의’에 갇히지 않고 일본 바라보기

등록 : 20110923 20:48

 

서경식의 일본 통신

어느 사회의 사람을 ‘국민’이라는 지표로 일괄해버리고 스스로도 거기에 포함돼 유형화함으로써 안심하려고 하는 게 ‘국민주의’ 심성이다. 국민주의에 뿌리박은 단순한 일본이해는 일본의 중간파나 리버럴파가 지닌 한계성이나 문제점엔 둔감해 위험하다.

이번 글부터 ‘일본 통신’이라는 타이틀로 연재를 하게 됐다. 이 타이틀은 내가 제안한 것이다. 제안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제까지도 강조해온 바이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일본’이 중요한 문제로 우리 앞에 떠오를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건 ‘한국인’이라는 한정된 의미는 아니다. 동아시아와 세계평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이미 쇠락 경향을 보여온 ‘일본’은 올해 3월 대지진과 원전 사고로 인한 타격을 받았고 이후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경제력 측면만이 아니다. 대지진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결정적으로 드러났듯이 일본형 정치 시스템이 기능부전에 빠지고, 계층간 격차 확대와 사회보장제도 파탄 등의 문제에 대처할 수 없어 사회적 혼란과 불안이 오래 이어질 것이다. 그 부정적 영향은 일본 국내에 거주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주변 각국 주민들에게도 미치게 될 것이다.

새로 취임한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A급 전범은 전쟁범죄인이 아니다’라고 공언하는 우파이며, 차세대 지도자 유력후보인 마에하라 세이지 민주당 정조회장은 헌법 9조 개정론자다. 여야당을 불문하고 기성정치계에 대한 실망감이 퍼져가면서 ‘강력한 지도자’를 대망하는 대중의 기대감이 높아졌고, 도쿄도 이시하라 신타로 지사와 같은 골수 극우정치가뿐만 아니라 오사카부의 하시모토 도루 지사처럼 시류에 편승한 우파 포퓰리스트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 모두 전후 일본에서 널리 공유된 평화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을 지금 혼란의 원인으로 치부하면서 그것을 부정하는 쪽으로 현상을 타개해 가려는 경향을 키워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국내 비판세력이 아주 취약한 일본에서는 “일본은 외압에 의해서만 바뀔 수 있다”는 시니컬한 얘기가 정착돼 있을 정도로 변혁을 요구하는 비판은 늘 ‘외부’에서 오는 걸로 돼 있다. 비판세력 쪽도 많은 경우 “미국이, 또는 중국이, 또는 국제사회가 요구하니까”라는 식의 ‘외압’에 편승하는 레토릭에 의존해 왔다. 예컨대 학교의 국기 국가 강요에 반대하는 세력조차 “학교에는 재일조선인 학생도 있으니까”라는 식의 얘기를 아무 의심도 없이 되풀이해 왔다.

그렇다면 일본에 재일조선인이 없다면 문제도 없는 것인가? 천황제를 찬미하는 ‘기미가요’, 근대 일본의 대외침략 깃발이었던 ‘히노마루’를 일본 국민인 자기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런 몰주체적인 레토릭을 나는 “다른 사람 훈도시(샅바)를 입고 스모(씨름)를 한다”는 일본 특유의 말투로 평을 한 적이 있다. 일본 국민에게 널리 퍼져 있는 그런 심리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오늘날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위기적 상황에서는 ‘내부’의 결속과 ‘외부’에 대항하는 실력(군사력) 강화라는 위험한 주장이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된다. 포퓰리스트는 대중의 지지를 묶어 두고 그걸 더욱 확대하기 위해 점점 더 주장을 단순화하고 극단화해 간다.

나는 12~13년 전 국기·국가법이 제정됐을 때 저항의 기미조차 없기에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가 안락사할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그 나쁜 예감이 착착 실현됐음을 실감할 뿐 아니라 일본 홀로 ‘안락사’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의 교훈은 그 위험성을 예고하고 있다.

내가 “일본 통신”이라는 타이틀을 제안한 또 하나의 이유는 지식층을 포함한 한국 국내인들의 일본 이해에 대해 의문, 더 분명히 얘기하자면, 의구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이 지리적으로 근접하고 역사적으로도 밀접하게 서로 얽힌데다 유학생 등 인적 교류가 이토록 활발한데도 한국인들 다수는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일본인은 악랄한 우익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만나 보니 예의 바르고 친절해 일본을 좋아하게 됐다”는 식의 반응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듯 한국에서 교육이나 언론을 통해 익힌 일본 이해가 너무 일면적이어서 그 일면적인 선입관이 무너지면 쉽사리 일본 긍정론에 빠져버린다. 그것은 “한국인은 무례하고 난폭하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만나 보니 그렇지 않더라”는 일본인 다수의 반응과 닮은꼴이다.





» 도쿄경제대 교수
어느 민족국가든 한 사람 한 사람은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어느 민족 전체를 모두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라 생각해버리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위험한 것이다. 3월 지진 직후에 일본에서 일어난 “일본은 강한 나라” “간바레 닛폰(힘내라 일본)” 따위의 캠페인도, 거기에 호응해 한국에서 고조된 지극히 정서적인 일본 동정론도 마찬가지로 단순한 발상의 산물이다. 그런 단순한 유형화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어느 사회의 사람을 ‘국민’이라는 지표로 일괄해버리고 스스로도 거기에 포함돼 유형화함으로써 안심하려고 하는 ‘국민주의’ 심성이다. 이 심성은 ‘국민’ 내부의 차이나 대립을 은폐하고 동시에 내부의 타자를 항상 외부화하고 배제하려는 기능을 지닌다.

국민주의에 뿌리박은 단순한 일본 이해는 일본의 중간파나 리버럴파가 지닌 한계성이나 문제점에 대해서는 둔감한데, 그거야말로 위험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올바로 아는 것은 ‘한국’이라는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들 모두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써 나갈 ‘일본 통신’은 타자를 위협하면서 몰락해가는 일본이라는 사회에 사는 한 사람의 ‘내부의 타자’가 쓰는 보고서가 될 것이다. 일본에 사는 나라는 개인이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갖가지 문제를 구체적인 에피소드와 함께 전하게 될 것이다.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논설위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