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물질론과 로고스(logos), 그리고
반(反)-경험주의와 지성주의
참으로, 표면적으로 안정된 물질적인 사물들이 실제로 화염들과 같은 과정들이라면, 그 물질적인 사물들은 틀림없이 계산된 방식으로 서서히 타오른다. 그 물질적인 사물들은, 등잔불처럼 혹은 태양불처럼, ‘자기들의 척도를 넘지 않을’ 것이다; 그 물질적인 사물들은, 아마도 대화재가 아마도 통제 불능이 될 것처럼 통제 불능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맥주가 상하고 분리되고 해체되는 것을 막는 것은 움직임이자 과정임을 여기서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 효과를 지닌 것은 모든 종류의 움직임이 아니라 예를 들어 순환적이어서 계산된 움직임이라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하여 불(fire)의, 화염의 그리고 사물들의 ㅡ 안정된 것으로서 보이고 정지된 사물들로서 보이는 그리고 사물들의 보존 원인인 저 과정들과 변화들의 ㅡ 균형 원인으로 지칭될 것은 척도(measure)이다. 척도이자 규칙이며 법칙적인 변화인 로고스(logos)는 (그러나 불[fire]은 아니다) 균형의 ㅡ 특히 균형 잡힌 화염이나 태양 혹은 달처럼 (혹은 영혼) 통제 상태에 있을 때 불(fire)의 균형을 포함하여 ㅡ 원인이다.
이 견해에 따라서 균형 잡힌 변화 대부분이 틀림없이 반드시 비가시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종류의 균형 잡히거나 법칙적인 변화는 틀림없이 추론에 의하여, 사물들이 발생하는 이야기의 재구성에 의하여 추론된다. (아마도 그 변화가 로고스로 지칭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가 자신의 새로운 인식론에 다다른 방식이었을 개연성이 높은데 그 인식론은 실재와 현상을 함축적으로 구분하고 감각 경험을 불신한다. 이 불신으로 인하여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의 의심과 함께 나중에 파메니데스가 한편으로는 ‘완벽한 진리’와 (불변하는 로고스[logos]) 다른 한편으로는 망상적 견해인 인간들의 오류를 저지르는 사고를 대조하는 데 도움을 받아서 도달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파메니데스가 지지한 지성주의나 합리주의 그리고 그가 공격했을 뿐 아니라 그가 최초로 언명한 경험주의나 감각주의 사이의 최초로 명백한 대조가 발생했다. 이유인즉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들이라는 혼란에 빠진 무리가 항상 사물들에 대하여 두 가지 생각에 빠져 자기들 가슴에는 오류를 저지는 사고들을 지니고 (B6:6) 감각을 지식으로 오해한다고 그가 가르치기 (B6:5)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존재와 비-존재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지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가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들에 반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B7):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탐구로부터 당신의 사고를 멀리하라; 많이 시도된 습관인
경험이 당신을 옥죄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당신의 가려진 눈이나
당신의 막힌 귀 혹은 심지어 당신의 혀가 이 길을 따라 방황하지
않게 하라! 그러나 오직 이성에 의하여 내가 여기서 반증으로서
당신에게 설명한 빈번히 논쟁되는 논증을 결정하라.
이것이 파메니데스의 지성주의나 합리주의이다. 그는 그 지성주의나 합리주의를, 빛과 밤 그리고 소리와 침묵 및 냉온이 있다는 관습적이고 오류인 견해를 지닌 저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들의 감각주의와 대조한다; 자신들의 눈이 빛 및 밤과 섞인다는 그리고 자신들의 사지가 냉온과 섞여서 자신들이 냉온이 된다는 관습적이고 오류인 견해; 이 혼합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감각기관들이나 자신들의 사지들의 육체적 상태나 ‘본성’이 결정된다는 관습적이고 오류인 견해; 그리고 이 혼합이나 본성이 사고로 바뀐다는 관습적이고 오류인 견해. 이 교설은, 그 교설에 따르면 오류를 저지르는 감각-기관들에 이전에 있던 것은 오류를 저지르는 지성에 (B6:6의 ‘오류를 저지르는 사고’나 ‘오류를 저지르는 지식’) 모두 있는데, 파메니데스의 의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B16):
이유인즉 어느 한 때 많이 오류를 저지르는 감각-기관들의 혼합이 그러한 것처럼
그렇게 지식이 인간에게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이 두 가지 것들이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것 그리고 감각-기관들의 본성을 구성하는 것.
이 혼합에서 우세한 것이 인간 각자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사고가 된다.
이 반(反)-감각주의적 지식론은 그 후 곧 실제로 변하지 않고 감각-기관들을 (파메니데스에 의하여 폄하된) 다소 권위적인 지식의 근원들로서 극찬한
친(親)-감각주의적 이론으로 변질된다.
이 이야기 전체는 다소 이상화되고 물론 추측성이다. 인식론적이고 논리적인 문제들과 이론들이 우주론적 문제들과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 과정에서 혹시 어떻게 출현하는지를 밝히려고 내가 노력할 뿐이다.
이와 같은 것이 정말로 발생했는다는 것은 거의 추측을 넘어서는 듯하다. ㅡ 칼 포퍼,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1989년, 164-165쪽 ㅡ
Indeed, if the apparently stable material things are in reality processes like flames, then they must burn slowly, in a measured way. They will, like the flame of a lamp, or like that of the sun, 'not overstep their measure'; they will not get out of control, as a conflagration might. We may remember here that it is movement, a process, that keeps the barley brew from decomposing, separating, disintegrating; and that it is not every kind of movement that has this effect but, for example, a circular, and thus a measured movement. It is therefore the measure which may be called the cause of the balance of fire, of flames, and of things - of those processes and changes which appear as stable and as things at rest, and which are responsible for the preservation of things. The measure, the rule, the lawful change, the logos (but not the fire) is the cause of balance - including especially the balance of a fire when it is under control, such as a balanced flame or the sun or the moon (or the soul).
It is clear that according to this view most of the balanced change must necessarily be invisible: this kind of balanced or lawful change must be inferred by reasoning, by the reconstruction of the tale, the story, of how things do happen. (Perhaps this is why it is called the logos.)
This may well have been the way that led Heraclitus to his new epistemology, with its implicit distinction between reality and appearance, and its distrust of sense experience. This distrust, together with the doubts of Xenophanes, may later have helped Parmenides to arrive at his contrast between the 'well-rounded truth' (the invariant logos) on the one hand, and the delusive opinion, the erring thought of the mortals, on the other. Thus came about the first clear contrast between an intellectualism or rationalism, which Parmenides upheld; and an empiricism or sensualism, which he not only attacked, but which he was the first to formulate. For he taught (B 6: 5) that the muddled horde of erring mortals, always in two minds about things, with erring thoughts (B 6: 6) in their hearts, mistake sensation for knowledge; and that they take being and not-being for the same and yet for not the same. And against them he contended (B 7):
Never shall it prevail that things that are not are existing.
Keep back your thought from this way of enquiry; don't let experience,
Much-tried habit, constrain you; and do not let wander your blinded
Eye, or your deafenèd ear, or even your tongue, along this way!
But by reason alone decide on the often contested
Argument which I have here expounded to you as a disproof.
This is Parmenides' intellectualism or rationalism. He contrasts it with the sensualism of those erring mortals who hold the conventional and erroneous opinion that there is light and night, sound and silence, hot and cold; that their eyes mingle with light and night, and that their limbs mingle with hot and cold and so become themselves hot and cold; that this mixture determines the physical state or 'nature' of their sense organs or their limbs; and that this mixture or nature turns into thought. This doctrine according to which there is nothing in the erring intellect (the 'erring thought' or 'erring knowledge' of B 6: 6) which was not previously in the erring sense-organs is stated by Parmenides as follows (B 16):
For as, at any one time, is the much-erring sense-organs' mixture,
So does knowledge appear in men. For these two are the same thing:
That which thinks, and the mixture which makes up the sense-organs' nature.
What in this mixture prevails becomes thought, in each man and all.
This anti-sensualist theory of knowledge soon afterwards turned, practically unchanged, into a pro-sensualist theory which extolled the sense-organs (disparaged by Parmenides) as more or less authoritative sources of knowledge.
The whole of this story is somewhat idealized and, of course, conjectural. I merely try to show how epistemological and logical problems and theories might have arisen in the course of a critical debate of cosmological problems and theories.
It almost seems more than a conjecture that something like this did happen.
The significance of this passage, and my translation of it (which should also be compared with Empedocles B 108), are more fully discussed in Addendum 8 at the end of this book; see especially sections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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