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크세노파네스 도덕론
6 크세노파네스의 도덕론에 관하여: 신(神)들에 대항한 문명 옹호
{이제 나는 크세노파네스의 자기-비판적 철학 즉, 그의 윤리적 태도의 중요성을 토론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하여,} 나는 먼저 다음과 같은 중요한 반론을 고찰하겠다. 크세노파네스와 데모크리토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아는 게 없었다는 게 옳다고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지식 결핍을 인정했다는 것은 정말로 지혜였고, 아마도 그들이 진리 연구의 태도를 채택했다는 것은 훨씬 더 현명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ㅡ 더 정확하게 동시대의 과학자들 ㅡ 여전히 진리 연구자이지만,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연구자일 뿐 아니라 발견자이기도 하다. 이유인즉 그들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닌 바로 그 과학적 지식의 양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정도로 그들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식 부족이라는 소크라테스식 논지를 근거로 우리의 지식 철학을 아직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은 옳을 수 없다.
그 반론은 옳지만 다만 네 가지 매우 중요한 제한사항과 관련해서만 옳다.
첫째: 현대과학이 많이 알고 있다는 의견은 물론 옳지만 여기서 사용된 ‘지식’이라는 개념은, 표면상 무의식적으로 크세노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관념과 완전히 다르고, 일상적인 사용에서 강조하여 사용될 때 부여되는 의미와도 다르다. 이유인즉 우리가 비의도적인 방식으로 지식에 관해서 말할 때, ‘지식’에 의하여 우리는 항상 ‘확실한 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누가 ‘나는 오늘이 화요일임을 알지만 나는 오늘이 화요일임을 확신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진술 전반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후반에서 철회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은 확실한 지식이 아닐 따름이다. 그 지식은 항상 수정에 노출되어 있다. 그 지식은 시험될 수 있는 추측들로 구성된다 ㅡ 기껏해야 가장 엄격한 시험에 부쳐졌던 추측들; 그러나 역시 추측들만으로 구성된다. 그 지식은 가설적 지식이요 추측성 지식이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비평이고 그 자체로 현대과학에 대한 크세노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통찰 적용을 완전히 옹호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많이 알고 있다는 언급에 대한 나의 두 번째 비평은 이렇다: 거의 모든 새로운 과학적 업적에 따라서 ㅡ 과학적 문제에 대한 모든 가설적 해결책에 따라서 ㅡ 미해결된 문제의 숫자와 그 문제들의 난해성 등급 모두가 증가한다; 그것들은 해결책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증가한다. 그래서 우리의 추측성 지식이 유한한 반면 우리의 무지는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터이다. 그러나 저것뿐이 아니다. 미해결된 문제들의 느낌을 지니고 있는 진정한 과학자에게, 세상은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렵게 되고 있다.
나의 세 번째 비평은 이렇다: 우리가 크세노파네스나 소크라테스보다 오늘날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가 ‘안다’를 주관적 의미에서 해석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옳지 않다. 상상컨대 우리 중 누구도 더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는 더 많은 것이 알려진다는 말을 들었으며 또한 우리는 더 다양한 것들을 안다. 우리는 특정 이론들을, 특정 가설들을, 특정 추측들을 다른 것들로 대체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나은 것들에 의하여 대체했다고 인정된다: 진리에 더 근접했다는 의미에서 나은 것들에 의하여 대체했다고 인정된다.
이 이론들과 가설들 그리고 추측들의 내용은,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인 지식과 반대로, 객관적 의미에서 지식으로 지칭될 것이다. 예를 들어 물리학 백과사전의 내용들은 비개인적 즉, 객관적인 지식이다 ㅡ 여전히, 물론 추측성 지식일지라도. 그러나 그 지식은 가장 박식한 물리학자가 혹시 ‘알’ (그 단어의 여하한 의미에서) 수 있는 지식을 훨씬 능가한다. 물리학자가 아는 것은 ㅡ 즉, 더 정확하게, 추측들 ㅡ 그가 지닌 개인적 즉, 주관적 지식으로 지칭될 것이다. 비개인적 즉, 객관적 그리고 개인적 즉, 주관적 지식 모두는 대체로 가설적이어서 개선이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날 비개인적 지식은 인간이 스스로 알 수 있는 지식을 훨씬 능가할 뿐 아니라, 비개인적인 객관적 지식에서의 진보가 매우 빨라 개인적 지식은 작은 분야들에서만 그리고 짧은 기간 동안에만 유지될 수 있다; 그 지식은 항상 대체된다.
여기서 우리는 크세노파네스와 소크라테스가 심지어 오늘날에도 옳다고 말하는 네 번째 이유를 경험한다. 이유인즉 이 낡은 개인적 지식이 거짓으로 밝혀진 이론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낡은 지식은 그러므로 확정적으로 지식이 아니며, 적어도 그 단어의 통상적 의미로 지식이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심지어 오늘날에도 소크라테스식 통찰인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며, 알지 못한다(I know that I do not know, and hardly that)’가 매우 즉각적으로 유관함을 ㅡ 내가 생각하기에 소크라테스의 시대보다 훨씬 더 그러한 ㅡ 증명하는 네 가지 고찰 사항이 있다. 그래서 관용을 옹호하여 이 소크라테스식 통찰로부터 에라스무스(Erasmus)와 몽테뉴(Montaigne), 볼테르(Voltaire)와 레싱(Lessing)이 도출해냈던 저 윤리적 결론들을 도출할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심지어 추가적 결론들을 도출할 것이다.
모든 합리적 토론은, 다시 말해서 진실 탐구에 바쳐진 모든 토론은 원칙들에 근거하는데 그 원칙은 실제로 윤리적 원칙들이다. 나는 그 원칙 중 세 가지를 서술하고 싶다.
1. 오류가능성의 원칙. 혹시 내가 틀리고 혹시 당신이 옳다; 그러나 물론 우리 모두 틀릴지도 모른다.
2. 합리적 토론의 원칙. 물론 가능한 한 비개인적으로, 논쟁의 대상인 다양한 (비판가능한)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시험할 필요가 우리에게 있다.
3. 진리에 대한 근사치의 원칙. 그런 비판적 토론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거의 항상 진실에 더 근접할 수 있다; 그래서 심지어 우리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의 이해를 거의 항상 우리가 향상시킬 수 있다.
이 세 가지 원칙이 인식론적인 동시에 또한 윤리적인 원칙임은 괄목할만하다. 이유인즉 그 원칙들이, 다른 것들 가운데서, 관용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면, 게다가 내가 배우기를 원한다면 진리를 위하여 나는 당신을 관용할 뿐 아니라 당신을 잠재적 동료로서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잠재적 통합과 모든 인간의 잠재적 평등은 우리가 문제를 합리적으로 토론하려는 우리의 의지에 전제조건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심지어 합의에 이르지 못할 때도, 토론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원칙이다. 이유인즉 합리적 토론이 우리의 오류 중 몇 가지를 밝히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의하여 윤리적 원칙들이 과학의 기초를 구성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모든 그런 윤리적 원칙 중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객관적 진리가 모든 합리적 토론에 대한 근본적으로 규제적 관념이라는 원칙이다. 나아가 윤리적 원칙들에 의하여 진리 탐구에 대한 우리의 약속과 진리 근사치라는 관념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 구체화된다; 그래서 지적(知的) 솔직성과 오류가능성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 구체화되는데, 그 중요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기-비판적 태도와 관용에 다다른다. 우리가 윤리학 분야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 논문의 부록 2에서 내가 새로운 직업적 윤리학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구성하는 12가지 원칙을 제시함에 의하여 나는 이것을 밝혔는데 그 원칙들은 크세노파네스가 2,500년 전에 언명하여 실행에 옮겼던 관용과 지적[知的] 솔직성에 대한 요구와 밀접하게 연관된 원칙들이다.}
위에 밝혀진 바와 같이 크세노파네스가 말하는 진리에 대한 ‘연구 자유’는 인식론적이고 윤리적인 요구나 원칙 양쪽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요구나 원칙은 비판과 자기-비판을 주요 동력으로 한다. 진리 연구와 비판적 방법론 사이의 이 동력은 어떻게 발생했을까? 음유시인으로서 크세노파네스가 경험한 결과로서 발생했음이 매우 개연적인데, 크세노파네스는 헤시오도스(Hesiod)와 호메로스(Homer)의 고전 작품을 암송했지만 또한 틀림없이 자작시를 포함하여 동시대 시인들의 작품을 암송했고 그 장소는 그런 시 암송에서 다양한 기대와 개념을 모두 지닌 매우 많은 문화가 마주치는 지중해 지역들이었다.
크세노파네스의 시대에 문화-충돌이 예술세계에서도 감지될 수 있었고, 그래서 그의 직업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령 동양적 연극과 그리스적 연극 사이에서 발견하는 일은 오랫동안 연구할 필요도 없었다. 예를 들어 동양 극작가들은 필연적으로 신성한 제사의 일환으로서 자신들의 신(神)들 앞에 절을 하는 경배 몸짓을 포함시켰을 터인 반면 이런 종류의 복종은 그리스 연극의 전통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리스 극작가들은 신(神)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심지어 신(神)들이 무의미하게 잔인하다고 비난했다. 신(神)들은 더 합리적이고 책임지라는 말을 들었다: ‘당신들은 폭군들이어서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당신들은 우리와 장난을 치지만, 우리 인간들은 당신의 장난을 폭로할 것이다!’
신(神)들의 가족과 그들의 변덕에 대항하는 이 문명 방어로 인하여 크세노파네스는 세상의 존재와 인류애로 이루어진 세상의 존재가 공평이나 정의로움에 달려있다는, 그리고 최고 권력의 윤리는 전능한 신(神)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견해에 도달했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리고 이 견해는 우리 인간의 평화 추구와 전쟁에 반대하는 우리의 투쟁에 대한 지침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크세노파네스는 이 견해를 인식론과 과학의 영역에까지, 우리의 진리 탐구까지 가져갔다고 나는 나아가 제안한다.
내가 보기에 크세노파네스의 일신론은 여기서 기독교적 일신론이나 유대교 적 일신론과 동일하거나 더 훌륭하다 (구약의 하느님은 질투하여 복수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크세노파네스의 도덕론은 과학과 정치에서의 현재 상황을 훨씬 낫게 규정하고, 영향력이 있지만 무책임한 몇몇 지식인들의 암호인 ‘무슨 일이든 통한다(anything goes)!’와 같은 현대적 구호들에 의하여 표출된 얼빠진 짓보다 틀림없이 선호될 수 있다.
ㅡ 칼 포퍼 저, 아르네 피터슨 편집,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2007년,
51-54쪽 ㅡ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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