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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인식론의 두 갈래

이윤진이카루스 2024. 8. 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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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그리스 인식론의 두 갈래

 

아마도 반박하는 듯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를 유일한 예외로 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모든 진지한 사상가들은 신성하여 신()들만 접근할 수 있는 실재적 지식이자 확실한 진리(saphes, alētheia; 나중에는 epistēmē)지식(knowledge)과 인간이 소유할 수 있고 크세노파네스에 의하여 향상될 수 있는 추측으로 해석되는 견해(opinion: doxa)를 확실하게 구별했다.

이 견해에 대항했던 최초의 사람은 프로타고라스였던 듯하다. 그가 저술한 저서의 첫머리가 존재하는데 그곳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신()들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 ㅡ 그들이 존재하는지도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나는 그의 인간척도론(homo mensura) 제안이 ㅡ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ㅡ 이것으로부터 도출되고, 그의 논증이 다음과 같다고 제안한다: ‘()들에 대하여 우리는 아는 바가 없어서 그들이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은 우리의 기준으로, 우리의 척도로 수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론 제안은 그의 선배들이 단순히 인간의 견해인 것과 신()의 지식을 구분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지식을 우리의 표준이나 척도로 수용해야 한다.’

다른 사상가들도 유사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역사적으로 프로타고라스 후배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로타고라스처럼 고향이 압데라(Abdera)였던 데모크리토스(Democritus)가 있다; 데모크리토스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에 의하면, 프로타고라스의 스승이었지만, 더 믿을만한 역사적 근거들에 의하면 프로타고라스가 데모크리토스의 스승이었다. 프로타고라스가 파르메니데스의 합리주의에 저항한 경험주의자였을 개연성이 아주 크다. 이 요지는 현재 저서에서 여러 번 강조된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 이후 ㅡ 그러나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ㅡ 주요 사상가 대부분은 오직 신()들만 지식을 지닌다는 파르메니데스와 그의 선배들의 관점을 계속 유지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에게서 절대적으로 분명하다. 이것은 훨씬 더 독단적인 플라톤에게서 훨씬 더 분명한데 왜냐하면 플라톤의 독단주의가 주로 국가의 법률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 법률이 성문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 법률이 엄격하고 철저히 변할 수 없어야 했다. 이제 우리가 자연과학으로 기술(記述)하는 분야에 관하여 플라톤은 자신이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기껏해야 진리와 유사할(truthlike)’뿐이고 진리가 아니라고 명시적으로 말한다 (예를 들어 티마이오스[Timaeus]와 다른 장소들에서): 그것은 기껏해야 진리와 유사하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개연적(probable)’로 해석되지만 우리는 수학적 의미에서 확률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진리유사성(truthlikeness)을 구분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두 가지 개념을 혼용하는 전통과 결별한다; 그리고 우리가 수학자들이 확률에 의하여 의미하는 것을 바꾸기를 소망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특히 이론들에 대하여 진리유사성(truthlikeness)’ , 박진(迫眞: verisimilitud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플라톤이 사용하는 단어는 실제로 유사한(similar)이고 때때로 그는 진리와 유사한(similar to truth)’이라고 말한다; 그 단어는 회화적(繪畵的) 유사성이나 닮음(pictorial similarity or likeness)과 또한 연결되어 이것이 정말로 그 의미의 뿌리가 되는 듯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이런 종류의 지식을 가질 수 있을 따름이다; 플라톤은 그런 지식을 견해(opinion)라고 부르지 않는데 견해라는 용어는 플라톤과 동시대인인 이소크라테스(Isocrates)가 자주 사용하여, 그는 우리가 견해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결정적인 단절이 일어난다. 기묘하게도 아리토텔레스는 유신론자였지만 ㅡ 심지어 그는 일종의 신학을 지닌다 ㅡ 신적(神的) 지식과 인간적 추측을 구분하는 전통과 확실하게 결별한다. 그는 자신이 안다고 믿는다. 자기 자신이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인 지식(epistēmē)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좋아하지 않는 주요 이유이다: 플라톤에게 과학적 가설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인 지식(epistēmē)이 된다. 그리고 서양의 인식론자 대부분에게 이것은 그 후 그렇게 남았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합당한 전통과 결별한다. 그는 자신이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인 지식(epistēmē)에 관한 이론을 내놓으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영리한 사람이자 훌륭한 논리학자이기 때문에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이 있다는 자신의 상정(想定)으로 인하여 자신이 무한회귀(an infinite regress)에 연루되는 것을 자신이 발견하는데 왜냐하면 증명된다면 이 지식은 다른 것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되어야 하는데 다른 것이 차례에 의하여 또한 증명된 지식이어야 해서 다른 것으로부터 차례에 의하여 연역되는 등 연역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 문제에 다다른다: 어떻게 이 무한회귀가 멈춰질 수 있을까? : 실재적인 원초적 전제들이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는 그 전제들의 진리를 확신할 수 있는가? 그는 이 지식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실재적인 원초적 전제들이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의 진술들이라는 교설에 의하여 해결한다. 여기서 그는, 적어도 때때로, 일종의 기묘한 이중사고(double thinking)’이중 대화(double talk)’를 이용한다. 정의(定義)란 한편으로 규약에 의하여 단어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확실하다 (분석적[analytic],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 그러나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이 규약적이고 그리하여 확실하기만 하다면 모든 지식(epistēmē)은 규약에 따라 진리이고 그리하여 확실하다. 다시 말해서 모든 지식(epistēmē)은 우리의 정의들(定義: definitions)에서 연역되어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이다. 이 결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원하지 않아서 다른 한편으로 규약적이지 않아서 확실하지 않은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이 또한 존재한다고 그는 제안한다. 그러나 그는 그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본결과여서 종합적(synthetic)이라고 강조한다; 그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은 귀납의 결과이다.

이것이 귀납이 과학적 방법에 관한 이론인 인식론에 침투하는 방식이었던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귀납이 학생을 (또는 배우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학자를) 어느 장소로, 어떤 관점으로 이끄는 과정인데 그 장소나 관점으로부터 학생이나 학자 자신이 관심 대상의 본질을 볼 수 있다. 그다음 이 본질에 대한 기술(記述)을 그는 자신의 근본적 원리(archai)의 하나로서 정의(定義)에 의하여 규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 원리들이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이며, 동시에 이 원리들은 오직 규약적(規約的: conventional)이고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 정의들(定義: definitions)만 지닐 수 있는 확실한 진리가 된다 (내가 제안하는 바, 어떤 종류의 이중 대화에 의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 방법은 젊은이를 사회와 처음 대면시키는 일과 유사하다: 그 귀납 방법은, 젊은이가 어른의 삶이 지닌 본질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관점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귀납 실행은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을 풍요로운 지식의 근원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나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은 실제로 이런 것이 아니다: 지식성(informative) 정의들(定義: definitions)과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론은 ㅡ 우리가 사물의 본질적 속성인 본질, 본성을 보고 직관으로 이해하도록 유도되는 방식 ㅡ 또한 또 다른 의미에서 이중 대화이다: 그 귀납론은, 몇 가지 면에서 그 귀납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부분적으로 이룩되고 (소크라테스식 토론에서처럼), 그 귀납론의 많은 경우를, 많은 사례를 고찰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이룩된다. 후자 의미의 귀납으로 인하여 일종의 귀납적 3단논법이 발생한다. 전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플라톤은 죽는다; 심미아스(Simmias)는 죽는다; 기타 등등. 이 모든 이는 사람들이다. 결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는 바와 같이, 무효로 도달된): 모든 사람은 죽는다. 혹은 심지어 더 나아간 결론은 문제의 본질로 간다: 틀림없이 부패하여 죽는 것은 생성된 모든 것의 본성에 속한다.

방금 언급된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귀납적 3단논법이 무효임을 완전히 확신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방식을 통하여, 언급된 사물의 본질을 직관하거나 그 직관의 도움을 받아서, 이 본질이나 몇 가지 본질적 속성을 기술(記述)하는 명제들에 도달하고, 이 명제들은 정의들(定義: definitions)로서 참되고 확실하여 지식(epistēmē), 증명된 과학적 지식의 궁극적 전제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그는 정말로 믿는다.

논리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이론을 도입했을 때 악한 지적(知的) 양심을 지니고 있었다고 나는 추측한다. 이 추측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논증이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그가 취했던 매우 객관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상한 방식으로 지식론에서 주관적이 된다: 사물을 아는 데서, 사물을 직관하는 데서 아는 사람과 그의 지식이 알려진 대상과 하나가 된다고 그가 가르친다; 그 가르침은 신비주의로서 공정하게 기술될 이론이다. 아는 것과 알려지는 것이 동일하다는 이론은 명백히, 하나의 주관론적 형태이어서 증명될 수 있거나 3단 논법적 지식이라는 객관론과 매우 다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아무튼, 귀납이 매우 불안한 교량을 제공하는 단절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귀납을 창안했을 때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다른 징표는 그가 자신의 창안품인 귀납을 모든 사람 중에서 소크라테스에게 투사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혹은 여하한 사람이) 그런 과정에 근거할 수 있는 지식(epistēmē)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할 사람이 전혀 아니었을 텐데 단지 왜냐하면 그는 항상 지식(epistēmē)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ㅡ 더 직역하여 그가 말하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혹은 주장한다) 일지라도.

모든 사람 중에서 소크라테스에게 귀납법을 창안했다는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동기는 아마도, 모든 사람 중에서 소크라테스가 귀납의 필요성을 보았다면 나쁜 논증의 결과로서일 수 없을 터라는 생각 , 무비판적 논증의 결과로서일 수 없을 터라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가지 난제를 극복해야 한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알지 못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했다는 것을 부인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그는 소크라테스의 무지 고백이 반어적 표현일 따름이라고 제안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식 역설이다.) 다른 난제는 소크라테스식 방식을 ㅡ 반증을 통한 비판적 논박인 elenchus ㅡ 확실한 증명 방식으로 변환해야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논박으로써 시도하는 것은 자신들이 안다고 믿는 사람들의 무지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자신들이 한 주제에 (예를 들어, 미덕) 대하여 완전히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다음에 소크라테스는 경험적이어서 구체적인 사례의 ㅡ 반증의 ㅡ 도움을 받아서 그들이 완전히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에게 증명한다. 이 방식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구체적 증거를 통한 본질 탐색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에 특정 합당성이 있을지라도 논박(elenchus)귀납적 증거(epagōgē)로 전환함으로써 소크라테스식 반어법을 이용할 필요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생긴다.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이 만들고, 말하자면 자신이 감히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발명품에 대하여 책임을 질 사람으로서 소크라테스를 선택하는지 이제 이해될 수 있다. 저것이 당시 상황이었던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에게 지식이 있음을 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지식이 있음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 인하여 역시 경험주의자였던 프로타고라스와 조금 유사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로타고라스가 아마도 인정했던 것을 ㅡ 즉, 인간의 지식은 확실치 않다는 것 ㅡ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물의 척도이고 우리가 실제로 실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실행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지닌 지식을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 개선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인간의 지식을 모든 지식의 척도로서 수용해야 한다고 프로타고라스는 정말로 인정했을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신뢰했던 방식으로 프로타고라스가 지식(epistēmē)을 신뢰했다는 말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테(Dante)에 의하여 지식인의 거장(The master of all who know)’으로서 찬사를 받아 묘사된다. 나의 견해로 이것은 올바른 묘사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지식은 실제로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지식으로 인하여 찬사를 받아서는 안 된다. 크세노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그리고 자연과학의 문제를 그가 다루었다는 정도까지 플라톤 또한)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추측할 따름이다는 옳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심할 바 없이 위대한 과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평가했지만 플라톤은 언급한 적이 없고 ㅡ 어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ㅡ 증오했다고 여겨지는 데모크리토스만큼 위대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러나 그는 두드러지게 학자이자 위대한 논리학자였는데 우리는 논리학의 발명에 대하여 그에게 감사할 수 있으며, 그는 또한 위대한 생물학자였다. 그의 이론이 모두 독단론으로 된 연구일지라도 그의 공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정말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실재적인 독단주의자였다 ㅡ 심지어 플라톤도 정치적인 독단주의자였지만 인식론에서는 독단주의자가 아니었다.

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이상(理想)은 본질들의 명칭들인 개념들로 가득 찬 다소 백과사전이라고 우리가 말할 것이다. 이 본질에 관하여 알려지는 것이 개념들을 정의(定義)하여, 개념들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과 개념들의 상호관계들로부터 우리가 개념들에 관한 모든 것을 연역할 수 있다. 이것이 귀납적 과정에 의하여 습득되는 자체의 모든 개념을 지닌 연역적 백과사전의 구조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논리적 연역인 3단 논법을 통하여 다른 모든 것을 도출할 수 있는 원리들(the archai).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논리적 추론 이론에 의하여 그리고 자신의 4원인 이론에 의하여, 즉 더 정확하게 그의 제3 원인에 (동적이거나 근접이거나 효율적 원인) 의하여 플라톤의 본질주의를 (예를 들어 미[]를 아름다운 대상의 원인으로 만든) 상당히 설명했다고 인정된다.

그렇지만, 과학인 지식(epistēmē)(증명될 수 있고 그러므로) 확실한 지식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으로 인하여 그리스의 비판적 합리주의라는 위대한 업적이 종말을 맞이했다고 언급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자신이 중요한 공헌을 했던 비판적 과학을 죽였다. 우주론에서 위대한 독창적 시도이자 자연에 관한 이론인 자연철학은, 증거(귀납적 증거를 포함하여) 요구하던 주로 그의 인식론의 영향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붕괴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것이, 인식론이 파르메니데스가 지칭했을 잘못된 방식인 귀납의 방식에 의하여 지배를 당하게 되는 방식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또한 역시, 귀납에 대한 반증을 포함하고 있는 이 논문들이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계몽에 관한 논문이라는 제목으로 수집되었는지의 주요 이유가 된다. 이 논문들은 주로 세 명의 위대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ㅡ 크세노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 ㅡ 다루지만 또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토론하기도 하며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창조적이던 기간으로부터 나중에 가르침을 받은 것과 아직도 가르침을 받을 것을 토론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독단적인 인식론에 의하여 종말을 맞았던 기간이며, 그 인식론으로부터 심지어 가장 현대적인 철학도 회복되지 못했다고 언급될 수 있는 기간.

 

ㅡ 칼 포퍼,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2007, 1-5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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