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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의 세계 논문 1

이윤진이카루스 2024. 8. 8.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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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주해

 

이 논문 1은 저자의 저서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에 이미 실렸던 것을 편집자가 다시 파르메니데스의 세계(The World of Parminides)에 실은 것이다. 따라서 역자가 이미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을 번역하고 그 번역을 수정하였기 때문에 당시 수정된 번역본을 그대로 여기에 옮겼다.

 

202488일 서울에서 역자

 

 

 

 

 

 

 

 

 

 

 

 

 

 

 

 

 

 

 

 

 

 

논문 1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로

돌아가라

 

1

므두셀라로 돌아가라(BACK TO METHUSELAH)’, ‘탈레스(Thales)에게로 돌아가라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에게로 돌아가라와 비교되어, 진보적인 강령이었다: 버나드 쇼(Bernard Shaw)가 우리에게 제시했던 것은 향상된 기대수명이었다 ㅡ 그가 무드셀라로 돌아가라라는 작품을 쓸 때 아무튼 발생하려던 것. 여러분에게 제시할 오늘날 발생하려는 것이 나에게 없어서 나는 걱정이다; 이유인즉 내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간단하고 솔직한 합리성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이 합리성은 많이 토론되었는데 어디에 놓여있었을까? 그들의 문제들로 인하여 밝혀진 간단함과 대담함이 그 합리성의 일부이지만, 내가 밝히려고 노력할 것과 같이 결정적인 요점이 이오니아학파에서 최초로 발전한 비판적 태도라는 것이 나의 논지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답변하려고 노력했던 문제들은 주로 우주론적 문제들이었지만, 지식론의 문제들 또한 있었다. 철학은 우주론으로 그리고 간단한 지식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모든 사색가들이 관심을 갖는 적어도 한 가지의 철학적인 문제가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문제; 그리하여 (그 세상의 일부인) 우리 자신과 그 세상을 이해하는 문제. 모든 과학은 우주론이라고 나는 믿어서, 나에게는 철학에 대한 관심이 과학에 대한 관심보다 전혀 덜하지 않은데, 그 관심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론을 확충하려는 대담한 시도에만 놓여있다. 예를 들어

 

1958 (이한구 옮김은 ‘1954이다: 역주) 1013일 아리스토텔레스 학회(Aristotelian Society)의 모임에 앞서서 행한, 회장 강연; 아리스토텔레스 학회 회보 N.S. 59, 1958-9년에 처음 발표되었다. 각주들은 (그리고 부록) 강연의 현재 재인쇄본에 추가되었다.

 

나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에 관심을 두는데, 그의 언어 철학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저서 논리철학논고(Tractatus)가 우주론적 논문이었고 (비록 조악한 것일지라도), 그의 지식론이 그의 우주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과 과학 모두 저 과제를 포기할 때 ㅡ 그 학문들이 전문화되어 우리의 세상에 있는 수수께끼를 보고 경탄하지 않을 때 ㅡ 나에게서 그 학문들의 매력이 없어진다. 전문화는 과학자들에게 커다란 유혹일 것이다. 철학자에게 전문화는 매우 큰 죄악이다.

 

 

II

이 논문에서 나는 비전문가로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아름다운 이야기에 대한 애호가로서 말한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다: 전문가가 어느 단어나 표현을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가 아마도 사용했을 것이고, 어느 단어나 표현은 도저히 사용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전문가가 우리가 소유한 가장 오래된 문헌에 근거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더 이상 의미가 없는 ㅡ 아무튼 나에게는 ㅡ 이야기로써 대체할 때, 심지어 비전문가도 옛 전통을 옹호하기 위하여 일어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적어도 그 전문가의 주장들을 조사하여 그 주장들의 일관성을 검토할 것이다. 이것은 몰입해도 해롭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전문가나 다른 사람이 수고하여 나의 비판을 논박한다면 나는 기쁘고 영광스럽게 느낄 것이다.

나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우주론에 관여하겠지만, 단지 그 우주론들이 내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변화의 문제(the problem of change)에 대한 전개에 관계된 정도까지이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지식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ㅡ 그 철학자들의 이론적 접근뿐 아니라 실제적 접근 또한 ㅡ 이해하기 위하여 그 우주론이 필요한 정도까지만이다. 이유인즉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이론적 접근뿐 아니라 실제적 접근이 그 철학자들이 자신들에게 제기했던 우주론적 및 신학적인 문제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알면 상당히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 철학자들의 이론은 이것이 오렌지임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내가 지금 감지하고 있는 대상이 오렌지임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지식론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지식론은, ‘세상이 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세상은 제신(諸神)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혹은 우리는 어떻게 제신(諸神)에 대하여 알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지식론의 문제들을 우주에 관한 우리의 지식보다는 오렌지에 관한 우리의 지식과 연관시켜 연구해야 한다는, 내가 생각하기에 다소 멀리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에게서 기인하는, 널리 퍼진 믿음이 있다. 나는 이 믿음과 의견을 달리하여서, 여러분에게 내가 의견을 달리하는 이유 중 몇 가지를 전달하는 것이 나의 논문에 있는 주요 목표 중의 하나이다. 아무튼 우리의 서구 과학은 ㅡ 그리고 다른 과학은 없는 듯하다 ㅡ 오렌지에 대한 관찰을 수집하여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대담한 이론들로써 시작했다는 것을 때때로 기억하는 것이 좋다.

 

III

전통적인 경험주의적 인식론과 전통적인 과학사 서술은 양쪽 모두, 모든 과학은 관찰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그리고 신중하게 이론으로 나아간다는 베이컨식(Baconian) 허구에 의하여 깊은 영향을 받는다. 사실들이 매우 다르다는 것은 초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연구함으로부터 밝혀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담하고 매혹적인 관념들을 발견하는데, 그 관념들 중 몇 가지는 우리가 지닌 현대적 관점에 비추어 많은 다른 관념들이 틀린 반면, 현대의 결과들에 대한 이색적이면서도 심지어 충격적인 선례(先例)들이다; 그러나 그 관념들 대부분과 가장 훌륭한 관념들은 관찰과 관련이 없다. 지구의 형태와 위치에 관한 몇 가지 이론들을 사례로 들어보라. 탈레스(Thales), ‘지구는 물에 의하여 지탱되고 물 위를 배처럼 지구가 타고 있으며, 지진이 일어난다고 우리가 말할 때 지구는 물의 운동에 의하여 흔들리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우리에게 전해진다. 의심할 바 없이 탈레스(Thales)는 자신의 이론에 도달하기 전에 배의 요동뿐 아니라 지진을 관찰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의 요점은 지구의 지탱이나 부유, 그리고 또한 지구가 물 위에 떠있다는 추측에 의하여 지진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추측에서 (현대의 대륙이동설에 그렇게 특이하게 선례가 되는) 탈레스(Thales) 자신의 관찰에 어떤 근거도 있을 리가 없었다.

베이컨식(Baconian) 허구의 기능은, 관찰이 우리가 지닌 과학적 지식의 참된 근원임을 지적함에 의하여, 과학적 서술이 인 이유를 설명하는 것임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과학적 서술들이 가설이나 상상이나 추측이라는 것과, 이 추측들 대부분이 (베이컨[Bacon]의 추측을 포함하여) 거짓으로 판명된 것을 우리가 깨닫자마자, 베이컨식(Baconian) 허구는 적용 불가능하게 된다. 이유인즉 과학의 추측들이 ㅡ 여전히 수용되는 추측들뿐 아니라 거짓으로 판명된 추측들 또한 ㅡ 모두 관찰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탈레스(Thales)가 주장한 지구의 지탱과 부유에 관한 그리고 지진에 관한 아름다운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도 관찰에 근거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경험적이거나 관찰적인 유추(類推)에 의하여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심지어 이것도 탈레스의 훌륭한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에 의하여 제시된 이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참이 아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지구 부유 이론은 여전히 고도로 직관적이지만 관찰성 유추들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 이론은 반()-관찰적으로서 기술(記述)될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아무 것에 의해서도 떠받쳐 있지 않고,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등거리로 떨어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정지된 상태로 있다. 지구의 형체는... (drum)의 형체와 같다... 지구의 다른 평면이 다른 편에 있는 반면, 우리는 지구의 평평한 한 평면에서 걸어 다닌다.’ (drum)은 물론 관찰성 유추(類推)이다. 그러나 지구가 공간에 자유롭게 떠있다는 관념과, 지구의 안정성에 대한 설명에는 관찰 가능한 사실들의 전체 분야에서 여하한 유추(類推)도 없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의 이 관념은 사상사 전체에서 가장 대담하고 가장 혁명적이며 가장 특이한 관념들 중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관념으로 인하여 아리스타코스(Aristarchus)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이론이 가능했다. 그러나 아낙시만드로스가 취한 단계는 아리스타코스와 코페르니쿠스가 취한 단계보다 훨씬 더 어렵고 대담했다. 지구를 공간의 중간에서 자유롭게 균형을 잡은 것으로서 상상하여, ‘지구는 등거리, 즉 균형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낙시만드로스를 부연 설명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 심지어 뉴튼의 비물질적(immaterial)이고 비가시적인 중력이라는 관념의 선례가 된다.

 

 

 

IV

어떻게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탁월한 이론에 도달했을까? 틀림없이 관찰에 의해서는 아니고 추론에 의해서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은 자신의 스승이자 친척인 밀레토스학파, 즉 이오니아학파의 창설자인 탈레스가 아낙시만드로스에 앞서서 해답을 제시했던 문제들 중 한 문제를 풀려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아낙시만드로스가 탈레스의 이론을 비판함에 의하여 자신의 이론에 도달했다고 나는 추측한다. 이 추측은, 아낙시만드로스가 내놓은 이론의 구조를 고찰함에 의하여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다음 노선들에 근거하여 탈레스의 이론에 (지구가 물 위에 떠있다는) 반대하여 논증했던 것 같다. 탈레스의 이론은 일관적으로 전개된다면 무한 소급(infinite regress)을 초래할 이론 유형의 표본이다. 지구가 물에 의하여 지탱된다는 ㅡ 지구가 대양(大洋: ocean: 그리스어로는 Okeαnos) 위에 떠있다는 ㅡ 가정에 의하여 우리가 지구의 안정된 위치를 설명한다면 우리는 유사한 가설에 의하여 바다의 안정된 위치를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은 바다를 지탱하는 것을 찾는 것을 의미할 터이고, 그다음에 그 지탱하는 것을 다시 지탱하는 것을 찾는 것이 될 터이다. 이런 설명 방식은 충족되지 않는다: 우선, 우리가 정확하게 비슷한 문제를 만들어냄에 의하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그런 지탱 체계에서 하층 지지대 하나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면 전체 구조물의 붕괴가 틀림없이 발생한다는 덜 형식적이면서도 더 직관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세상의 안정성이 지탱 체계에 의하여 확보될 수 없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안다. 대신 아낙시만드로스는 세상에 대한 내부적 즉, 구조적 균형의 도움을 받는데, 그 균형으로 인하여 붕괴가 선호되어 발생할 수 있는 방향이 없다는 것이 확실하게 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차이점들이 없는 곳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는 원리를 적용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모든 다른 것들로부터의 지구 등거리에 의하여 지구의 안정성을 설명한다.

이것이 아낙시만드로스의 논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논증에 의하여, 아마도 철저히 의식적으로가 아니고 완전히 일관적으로가 아닐지라도 절대 방향이라는 관념이 ㅡ 위로(upwards)’아래로(downwards)’라는 절대적 의미 ㅡ 폐지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모든 경험들에 반대가 될 뿐 아니라 이해하기가 악명 높게 어렵기도 하다.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그 논증을 무시했던 듯하고, 심지어 아낙시만드로스 자신도 그 논증을 철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 까닭은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의 등거리라는 관념으로 인하여 아낙시만드로스는 지구가 구(: globe)의 형체를 띤다는 이론을 창안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아낙시만드로스는 지구가, 위아래 면이 납작한 북(drum)의 모양을 띠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다른 평면이 반대쪽에 있는 반면, 우리는 지구의 평면 중 한 평면 위에서 걸어 다닌다라는 언급은 절대적인 윗면은 없지만 반대로 우리가 우연히 걸어 다니는 면은 우리가 아마도 윗면으로 지칭할 면이었다는 암시를 담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무엇 때문에 아낙시만드로스는 지구가 북(drum)보다는 구(: globe)라는 이론에 도달하지 못했을까?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구의 표면이 대체로 평평하다고 그를 가르친 것은 관찰 경험이었다. 그리하여 아낙시만드로스가 지구의 형체에 대한 올바른 이론에 거의 도달했던 것은 탈레스의 이론을 추상적이고 비판적으로 토론한 사색적(思索的: speculative)이고 비판적인 논증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오류에 빠지게 된 것은 관찰 경험 때문이었다.

 

V

지구가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등거리에 있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균형 이론에 명백한 반대의견이 있다. 우주의 불균형은 대양과 달의 존재로부터, 다른 면에서는 태양과 달의 균형을 잡을 것이 없는 반면 특히 태양과 달이 때때로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아서 지구의 같은 면에 있게 되는 사실로부터, 쉽게 알려질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반대이론을 또 다른 과감한 이론으로 ㅡ 태양과 달 그리고 다른 천체들의 숨겨진 본성에 관한 그의 이론 ㅡ 대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지구 주위를 선회하는 두 개의 거대한 마차바퀴의 테두리를 상상했는데 한 테두리는 지구 크기의 27배였고 다른 한 테두리는 지구 크기의 18배였다. 이 테두리 즉, 원형 관들(pipes) 각각은 불로 채워져 있는데, 테두리 각각에 불이 보일 수 있는 숨구멍이 있다. 이 숨구멍들을 우리는 각각 태양과 달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마차바퀴들은 보일 수 없는데, 아마도 마차바퀴가 어둡고 (혹은 흐릿하고)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항성들은 (그리고 아마도 행성들) 또한 태양과 달의 마차바퀴들보다 지구에 더 가까운 마차바퀴들 위에 있는 구멍들이다. 항성들의 마차바퀴들은 공동의 축() (우리가 지금 지구의 축[]이라고 부르는) 위에서 회전하여 함께 그 마차바퀴들은 지구 둘레에서 천구(天球: sphere)를 형성하며, 그리하여 지구로부터의 등거리라는 상정이 (대략) 충족된다. 이것으로 인하여 아낙시만드로스는 또한 천구이론(theory of the spheres)의 창시자가 된다. (마차바퀴나 원에 대한 그 이론의 관련성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론[De Caelo], 289b10에서 290b10까지 참조.)

 

VI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들이 경험적이라기보다는 비판적이고 사색적이라는 데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접근방식들로서 고찰되면 그의 비판적이고 추상적인 사색들에 의하여 관찰성 경험이나 유추(類推)보다 더 충분하게 그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정확하게 아낙시만드로스가 과학자가 아닌 이유라고 베이컨(Bacon) 추종자는 답변할 것이다. 이것이 정확하게 우리가 초기 그리스 과학보다는 초기 그리스 철학에 관하여 말하는 이유라고 답변할 것이다. 철학은 사색적이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아는 바와 같이, 사색적 방법이 관찰성 방법에 의하여 대체될 때, 연역이 귀납에 의하여 대체될 때만 과학이 시작된다고 답변할 것이다.

이 답변은 물론, 정의(定義: definition)에 의하여 관찰을 기원으로 하거나 소위 귀납적 과정을 기원으로 하여 이론들이 과학적이 된다는 (또는 되지 않는다는) 논지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런 정의(定義: definition)로 분류될 터인 물리 이론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나는 왜 기원의 문제가 이런 관계에서 중요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론에 관하여 중요한 것은 이론의 설명력이고, 그 이론이 비판과 시험들을 견디어내는지 이다. 이론의 기원 문제인 그 이론이 어떻게 이룩되었는지의 ㅡ 몇몇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귀납적 과정에 의해서인지 또는 직관적 작용에 의해서인지 ㅡ 문제는 특히 이론 창안자의 전기 작가에게는 매우 흥미로울 것이지만, 그 이론의 과학적 위상이나 특징과는 관계가 없다.

 

VII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하여, 물리학에서의 그들의 이론들과 이후 발전 사이에는 가장 완벽한 듯한 사고(思考)의 연속성이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철학자로 지칭되든 과학자 이전 사람들로 지칭되든, 혹은 과학자들로 지칭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으로 인하여 아리스타코스(Aristarchus), 코페르니쿠스, 케플러(Kepler) 그리고 갈릴레오의 이론들의 길이 열렸다고 나는 정말로 주장한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단순히 이 후대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아니다; ‘영향(influence)’은 매우 피상적인 범주이다. 나는 그것을 이와 같이 표현하고 싶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업적은 예술작품처럼, 본질적으로 귀중하다. 게다가 그의 업적으로 인하여 다른 업적들이 가능해졌는데, 그 다른 업적들 중에는 방금 언급된 위대한 과학자들의 업적들이 있다.

그러나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들은 거짓이어서 비()-과학적이지 않은가?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들은 거짓임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 거짓으로 믿어질지라도, 현대 과학이 최근까지 수용했고 그 과학적 특징을 누구도 부정하려고 꿈꾸지 않았던, 무수한 실험에 근거한’, 많은 이론들도 거짓이다. (한 가지 사례는 수소의 전형적인 화학적 속성들이 오직 한 종류의 원자에만 ㅡ 모든 원자 중에서 가장 가벼운 원자 ㅡ 속한다는 이론이다.) 자신들이 기술(記述)할 때 더 이상 수용되지 않는 견해를 비과학적으로서 (심지어 미신적으로서) 간주하는 경향을 지녔던 과학역사가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지지를 받을 수없는 태도이다. 거짓 이론은 참인 이론만큼 위대한 업적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거짓 이론들이, 여전히 수용되는 몇 가지 덜 흥미로운 이론들보다 우리가 진리를 탐구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다. 이유인즉 거짓 이론들이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 이론들에 의하여 예를 들어 다소 근본적인 수정안들이 제시되어, 비판이 자극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지구가 물 위에 떠있다는 탈레스의 이론은 수정된 형태로 아낙시메네스에게서 다시 나타나고, 더 최근에는 베게너(Wegener)의 대륙이동설의 형태로 다시 나타났다. 탈레스의 이론에 의하여 어떻게 아낙시만드로스가 비판을 자극받았는지는 이미 밝혀졌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은 유사하게, 수정된 이론을 ㅡ 우주의 중심에서 자유롭게 균형을 잡고 천체들이 올라탄 천구(天球)에 둘러싸인, ()인 지구라는 이론 ㅡ 제시했다. 그리고 비판을 자극함에 의하여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은 달이 빛을 반사함에 의하여 빛난다는 이론을 또한 낳았다; 피타고라스의 중심 불(central fire) 이론을 낳았고; 궁극적으로 아리스타코스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세계-체계를 낳았다.

 

VIII

밀레토스 학파는, 세상을 천막으로 생각했던 그들의 동방 선배들처럼, 세상을 모든 생명체의 가정인 일종의 집으로서 ㅡ 우리의 가정 ㅡ 상상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세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 세상의 구조를 조사할 실제적인 필요가 있었다. 세상의 구조, 세상의 기초 설계, 세상의 건축 재료에 대한 의문들이 밀레토스 학파의 우주론에 있던 세 가지 주요 문제를 구성한다. 세상의 기원인 우주 기원론의 문제에 대한 사색적 관심이 또한 있다. 밀레토스 학파의 우주론적인 관심은, 강력한 우주 기원론적 전통 및 어떻게 사물이 만들어졌는지를 기술(記述)함에 의하여 우주 기원론적 형태로 우주론적 설명을 제시하는 거의 거역할 수 없는 경향을 우리가 특히 고찰한다면, 내가 보기에 밀레토스 학파가 지녔던 우주 기원론적 관심을 크게 능가한다. 우주론적 관심은, 이 우주 기원론적 치장이 부분적으로라도 없다면 우주론의 제시에서 우주 기원론적 관심과 비교되어, 틀림없이 매우 강력하다.

처음으로 우주의 건축을 ㅡ 우주의 구조, 기초 설계 그리고 건축 재료 ㅡ 토론했던 사람은 탈레스였다고 나는 믿는다.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우리는 세 가지 문제들 모두에 대한 답변을 발견한다. 나는 구조 문제에 대한 그의 답변을 간단하게 언급했다. 세상의 기초 설계라는 문제에 대하여, 그가 세상에 대한 최초의 지도를 그렸다는 전설에 의하여 지적되는 바와 같이, 그는 이것 또한 연구해서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물론 그는 세상의 건축 재료인 비한정자(αperion)에 ㅡ 끝없는(endless)’이나 한계가 없는(boundless)’ 또는 한계가 정해지지 않은(unbounded)’이나 형태가 없는(unformed)’ ㅡ 대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세상에서 모든 종류의 변화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공기와 숨구멍들이 필요한 불(fire)이 있었고, 이 숨구멍들은 간혹 막혀서 (‘obstructed’) 불이 질식했다: 이것이 일식과 월식에 대한 그의 이론이었다. 바람이 있었는데, 바람은 변하는 날씨의 원인이었다. 그리고 수증기들이 있었는데 물과 공기가 말라버리는 것으로부터 생겨나고, 물과 공기는 바람의 원인이자 태양의 회전들(하지와 동지) 달의 회전들의 원인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곧 뒤따라올 예정인 것에 대한 최초의 암시를 경험한다: 변화라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최초의 암시로, 그 일반적인 문제는 그리스 우주론의 핵심적 문제가 되었고, 궁극적으로 레우키포스(Leucippus) 및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와 더불어 거의 20세기 초엽까지 현대과학에 의하여 수용된 변화에 관한 일반론을 낳았다. (그 일반론은 1905년 이전에 주목받지 못했던 역사적 사건으로, 맥스웰[Maxwell]이 에테르[ether] 모형들을 붕괴시킴과 동시에 겨우 포기되었다.)

변화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는 철학적인 문제이다; 정말로 파메니데스(Parmenides)와 제논(Zeno)에 의하여 그 문제는 논리적 문제로 거의 변한다. 어떻게 변화가 가능한가 다시 말해서,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사물은, 자체의 동질성을 잃지 않고,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 그 사물이 동일한 것으로 남는다면, 사물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이 자체의 동질성을 잃어버린다면, 변한 것은 더 이상 그 사물이 아니다.

 

IX

변화 문제의 발전이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내가 보기에 원문 비판이라는 하찮은 세부사항이 쌓인 더미 아래서 완전히 매몰되는 위험에 처한다. 그 이야기는 물론, 하나의 짧은 논문에서 전부 언급될 수 없으며 그 논문의 많은 부분에서는 더욱 언급될 수 없다. 그러나 매우 간단한 개요로서,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아낙시만드로스에게는 우리 자신들의 세상인 우리 자신의 우주적 건축물이 세상들의 한 가지 무한세계에 ㅡ 시공에서 한계가 없는 무한세계 ㅡ 불과했다. 세상들의 이 체제는 영원했고, 움직임도 그러했다. 그리하여 움직임을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변화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을 (우리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변화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를 발견하여 일반적인 이론을 제시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아래 참조)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잘 알려진 변화들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명백한 변화들은 ㅡ 파종에서 추수까지 낮과 밤의 변화, 바람과 날씨의 변화, 계절의 변화 그리고 식물과 동물 및 사람의 성장 변화 ㅡ 모두 온도의 대립과, 냉온 사이의 대립 및 건습(乾濕)의 대립과 연결되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태양에 의하여 증발되는 습기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라는 말을 우리가 듣는다; 그래서 냉온 또한 우리 자신의 세상 건축물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냉온은 반대로 거의 모든 다른 변화들의 원인들로서 상상되던 수증기와 바람의 원인이기도 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이 관념들을 매우 자세하게 전개했다. 아낙시만드로스처럼 그는 냉온과 건습(乾濕)의 대립에 관심을 두어서, 그는 농축과 희박화(稀薄化: rarefaction)의 이론에 의하여 이 반대되는 것들 사이의 전이(轉移)를 설명했다. 아낙시만드로스처럼 그는 영원한 움직임과 바람의 작용을 신뢰했다; 그리고 그가 아낙시만드로스로부터 벗어났던 두 가지 요점 중 한 요점은, 완전히 한계가 없고 형태가 없던 것(비한정자: 아페리온: the αperion)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임 속에 있을 수 있었다는 관념을 비판함에 의하여 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는 비한정자 아페리온(the αperion)을 공기에 ㅡ 한계가 없고 형태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증기에 대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옛 이론에 따라서,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움직임과 변화의 주요 원인이기도 한 ㅡ 의하여 대체했다. 관념들의 유사한 통합이, ‘태양은 흙으로 구성되어 있고, 태양이 움직이는 속도 때문에 태양이 몹시 뜨거워진다는 아낙시메네스의 이론에 의하여 이룩되었다. 제한되지 않은 아페리온이라는 더 추상적인 이론이 공기라는 덜 추상적이고 더 상식적인 이론에 의하여 대체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론 대체와 일치한다: 지구의 안정성에 대한 아낙시만드로스의 대담한 이론을, 지구의 평평함이 지구 안정성의 원인이다; 이유인즉 평평함이... 아래에 있는 공기를 뚜껑처럼 덮기 때문이다라는 더 상식적인 관념에 의하여 대체하는 것. 그리하여 주전자 뚜껑이 증기 위에서 떠있을 것처럼, 혹은 배가 물 위에서 떠있을 것처럼 지구는 공기 위에 떠있다; 탈레스가 지녔던 문제와 탈레스가 내놓은 답변 모두가 다시 시작되고, 아낙시만드로스의 획기적인 논증은 이해되지 않는다. 아낙시메네스는 절충주의자이며 체계화하는 사람이고 경험주의자이며 상식의 사람이다. 세 명의 훌륭한 밀레토스인들 중에서 그는 혁명적인 새로운 관념들을 제일 적게 생산했다; 그의 철학적인 정신은 최하위였다.

세 명의 밀레토스인들은 모두 우리의 세상을 우리의 집으로 간주했다. 이 집 안에는 운동이 있었고 변화가 있었으며, 냉온 및 불과 습기가 있었다. 난로에는 불이 있었고, 난로 위에는 물이 담긴 주전자가 있었다. 그 집은 바람에 노출되어, 틀림없이 다소 공기가 통했다; 그러나 그 집은 가정이어서, 안전과 안정 같은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에게 그 집은 불타고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세상에는 안정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만물은 무상해서, 아무것도 정지해 있지 않다.’ 만물은 무상하다, 세상이 만들어진 건축 자재들인 심지어 들보와 목재도 무상하다: 흙과 바위, 혹은 청동가마솥 ㅡ 그것들 모두가 무상하다. 들보는 썩고 있고, 흙은 물에 휩쓸려가고 바람에 날려가며, 바로 바위는 쪼개져서 약해지고, 청동가마솥은 푸른 녹으로 변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만물은 항상 움직인다, 이것이 우리의 감각들을 피한다... 할지라도’. 무지하여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연료가 타는 그릇은 (딜스-크란츠[DK], A4와 비교하라) 변하지 않는 반면 오직 연료만 탄다고 믿는다; 그 까닭은 우리가 그릇이 타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은 불탄다; 그릇은 담고 있는 불에 의해서 먹힌다. 우리는 자식들이 자라서 변하고 늙는 것을 보지 못하지만, 자식들은 자라서 변하고 늙는다.

그리하여 분명한 형체를 유지하는 물체는 없다. 사물들은 실제로 사물들이 아니고, 과정이며 무상하다. 사물들에게 확정된 형체가 있을지라도, 과정이고 물질의 흐름이며 강()인 화염과 같이, 불을 닮았다. 만물은 화염이다: 불은 바로 우리의 세상의 건축 재료이다; 그래서 만물의 피상적인 안정성은 우리 세상 속의 과정들이 복속되어 있는 법칙들 즉, 척도들에 기인할 따름이다.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이야기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취지(message)’이자 진실한 말(word: the logos)’로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말이 아니라 참된 설명을 들으면서, 만물이 하나임을 인정하는 것이 현명하다’: 만물은 척도들로 불타오르고 척도들로 사그라지는 영원한 불이다.

여기서 다시 서술된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에 대한 전통적 해석이 현재 일반적으로 수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그 해석을 대신해서 아무것도 ㅡ 다시 말해서 철학적 흥미로운 아무것도 ㅡ 내놓지 못한다. 나는 다음 절에서 그 비판자들의 새로운 해석을 간단하게 토론하겠다. 여기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이, 사고(思考)와 단어와 논증과 이성의 도움을 받음에 의하여, 그리고 사물들이 변함을 우리가 안다 할지라도 사물들의 변화가 우리의 감각을 피해가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함에 의하여, 두 가지 문제들을 ㅡ 변화의 문제지식의 문제 ㅡ 초래했다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이 문제들은 변화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의 설명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만큼 더 절박했다. 그러나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변화라는 바로 그 관념에 포함된 난제들을 자신의 선배들보다 더 분명하게 알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유인즉 모든 변화가 어떤 것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변하는 어떤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변화는, 변하는 동안에 이 어떤 것이 틀림없이 똑같은 것으로 남아있다고 전제한다. 녹색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할 때 우리는 녹색 나뭇잎이 변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녹색 나뭇잎을 갈색 나뭇잎으로 대체할 때 우리는 녹색 나뭇잎이 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이 변하는 동안에 자체의 동질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변화의 관념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물체는 틀림없이 다른 것이 된다: 그 물체는 녹색이었다가 갈색이 된다; 그 물체는 축축했다가 건조해진다; 그 물체는 뜨거웠다가 차갑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변화는 한 물체가, 어느 정도 반대의 특성을 지닌 어떤 것으로 전이(轉移: transition)하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가 안 바와 같이). 그러나 변하는 동안에 변하는 물체는 자체와 동일한 상태로 남아있어야 한다.

이것이 변화의 문제이다. 그 문제로 인하여 헤라클레이토스는 실재와 현상을 (부분적으로 파메니데스의 선례가 되면서) 구분하는 이론에 도달했다. ‘사물의 본성은 자신을 숨기기를 매우 좋아한다. 피상적이지 않은 조화는 피상적인 조화보다 더 강하다.’ 사물들은 피상적으로는 (그리고 우리들에게) 반대되는 것들이지만, 실제로는 (그리고 신[God]에게는) 동일하다.

 

삶과 죽음, 깨어있는 것과 잠든 것, 젊음과 늙음, 이 모든 것들은 동일하다... 이유인즉 한 가지를 돌려놓으면 다른 것이고 다른 것을 돌려놓으면 처음 것이기 때문이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동일한 길이다.... 선과 악은 동일하다.... (God)에게는 만물이 아름답고 선하고 정의롭지만, 사람들이 어떤 것들은 불의하고, 다른 것들은 정의롭다고 상상한다.... 참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신의 본성에는 속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이나 특징에 있지 않다.’

 

그리하여 실제로 (그리고 신[God]에게) 반대되는 것들은 동일한 것들이다; 반대되는 것들이 동일하지 않게 보이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이다. 그래서 만물은 하나다 ㅡ 만물은 모두 세상의 과정인 영원한 불의 일부이다.

변화에 관한 이 이론은 참된 단어, 로고스(logos), 이성의 도움을 받는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변화보다 더 실재적인(real) 것은 없다. 그러나 세상의 하나임(oneness)에 관한, 반대되는 것들의 동일성에 관한, 그리고 현상과 실재에 관한 그의 교설로 인하여 변화의 실재에 관한 그의 교설이 위협을 받는다.

이유인즉 변화는 반대되는 것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의 전이(轉移)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제로 반대되는 것들이 동일하다면, 그것들이 다르게 보일지라도, 변화 자체가 아마도 피상적일 뿐이다. 실제로, 그리고 신(God)에게 만물이 하나라면, 정말로 변화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 결과는, 하나인 신(God)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던 유일신론자인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의 제자인 (버넷[Burnet]과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죄송하지만 내가 동의할 수 없는) 파메니데스(Parmenides)에 의하여 도출되었다: ‘(God)은 움직이지 않고, 동일한 장소에 항상 머문다. (God)이 여러 시간에 여러 곳으로 틀림없이 다닌다는 것은 적합하지(fitting) 않다... (God), 육체나 사고(思考)에서 인간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

크세노파네스의 제자 파메니데스는 실재 세상은 하나이어서 그 세상은 움직이지 않고, 항상 동일한 장소에 있다고 가르쳤다. 실재 세상이 여러 시간에 여러 곳을 틀림없이 간다고 하는 것은 적합하지(fitting) 않았다. 그 세상은 인간에게 보이는 것과 전혀 유사하지 않았다. 그 세상은 하나였고 분리되지 않은 전체였고 부분이 없었으며 동질적이었고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임은 그런 세상에서 불가능했다. 실제로 변화는 없었다. 변화의 세상이란 망상이었다.

파메니데스는 불변하는 실재라는 이 이론을 논리적 증명 같은 것에 근거시켰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단일 전제로부터 진행되는 것으로 제시될 수 있는 증명.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무(: nothing)는 ㅡ 존재하지 않는 것 ㅡ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도출할 수 있다; 파메니데스가 공허(void)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기 위하여 해석한 결과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충만하다: 세상은, 부분들로의 분할이 공허(void)에 의한 부분들의 분리 때문일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에, 분할되지 않은 한 개의 덩어리로 구성된다. (이것이 여신[女神]이 파메니데스에게 계시한 완벽한 진리이다.) 이 충만한 세상에는 움직임을 위한 공간이 없다.

오직 반대되는 것들의 실재에 대한 기만적 믿음으로 ㅡ 있는 것이 존재한다 뿐 아니라 없는 것 또한 존재한다는 믿음 ㅡ 인하여 변화의 세상이라는 망상이 생긴다.

파메니데스의 이론은 세상에 대한 최초의 가설-연역적 이론으로서 기술(記述)될 것이다. 원자론자들은 그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움직임이 정말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이론이 경험에 의하여 논박되었다고 주장했다. 파메니데스가 내놓은 논증의 형식적 유효성을 수용하면서 원자론자들은 파메니데스의 결론에 있는 거짓으로부터 파메니데스의 전제에 있는 거짓을 추론했다. 그러나 이것은 무(: nothing)가 ㅡ 공허 즉, 텅 빈 공간 ㅡ 존재함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존재하는 것에는 ㅡ 충만한 것, 어떤 공간을 채우는 것 ㅡ 부분들이 없다고 전제할 필요가 당시 없었다; 이유인즉 그 부분들이 공허에 의하여 이제 분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많은 부분들이 있고, 각 부분은 충만하다: 세상에는 충만한 입자들이 있는데, 각 입자는 충만하여 분리되지 않으며 분리될 수 없고 불변하기 때문에 빈 공간에 의하여 분리되어 빈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다. 그리하여 존재하는 것은 원자들과 공허이다. 이런 방식으로 원자론자들은 변화 이론에 ㅡ 1900년까지 과학적 사고(思考)를 지배했던 이론 ㅡ 다다랐다. 그것은 모든 변화, 그리고 특히 모든 질적 변화는 물질의 불변하는 조각들의 공간적 움직임에 의하여 ㅡ 공허에서 움직이는 원자들에 의하여 ㅡ 설명되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우리의 우주론과 변화 이론에서 위대한 다음 발걸음은 맥스웰(Maxwell), 패러데이(Faraday)의 어떤 관념들을 발전시켜 이 이론을 변화하는 장()의 강도(a theory of changing intensities of fields)라는 이론에 의하여 대체했을 때 이룩되었다.

 

X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변화 이론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아는 대로 개괄하였다. 나의 이야기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학설지 전통에 근거한) 많은 요점에서 독일뿐 아니라 영국의 몇몇 전문가들의 견해들과, 특히 G. S. 커크(Kirk)J. E. 레이븐(Raven)에 의하여 그들의 저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The Presocractic Philosophers), 1957년에 표현된 견해들과 충돌한다는 사실을 나는 물론 잘 인식하고 있다. 나는 물론 그들의 주장들을 여기서 자세하게 검토할 수 없는데, 특히 다양한 구절들에 대한 그들의 상세한 주해를 여기서 자세하게 검토할 수 없고 그 다양한 구절들 중 몇 구절이 나의 해석과 그들의 해석 사이의 차이점과 유관하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파메니데스의 언급이 있는지의 문제를 커크와 레이븐이 토론하는 것을 참조하라; 그들의 193쪽 이하의 주석1272쪽의 주석1과 비교하라.) 그러나 그들의 주장들을 검토했고 그 주장들이 설득력이 없고 자주 전혀 수용될 수 없음을 내가 발견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여기서 헤라클레이토스에 관한 몇 가지 요점만을 언급하겠다 (파메니데스에 대한 커크와 레이븐의 비평처럼, 동일하게 중요한 다른 요점들이 있을지라도).

전통적인 견해는, 그 견해에 따라서 헤라클레이토스의 핵심적 교설은 만물이 무상하다인데, 버넷(Burnet)에 의하여 40년 전에 공격을 받았다. 버넷의 주요 주장은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Open Society]2, 주석2에서 나에 의하여 자세하게 논의된) 변화의 이론이 새로운 것이 아니며, 새로운 취지만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그 절박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커크와 레이븐이 다음과 같이 서술할 때 (186쪽 이하) 반복된다: ‘그러나 모든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가들은 우리의 경험 세상에서 변화의 우세에 의하여 충격을 받았다.’ 이 태도에 대하여 나는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Open Society)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편적 무상이라는 교설이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고... 제시하는 사람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독창성을 무의식적으로 증언한다고 내가 느끼는데, 이유인즉 그들이 2,400년이 지난 지금 헤라클레이토스의 요점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 사람들은 집 안에 불이 있다는 밀레토스 학파의 취지와, ‘집이 불타고 있다는 다소 더 절박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요점 사이의 차이점을 알지 못한다. 이 비판에 대한 함축적 답변이 커크와 레이븐의 저서 197쪽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거기서 그들은 이렇게 서술한다: ‘예를 들어 바위나 청동가마솥이, 변함없이 물질의 비가시적 변화를 겪고 있다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실제로 생각했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글 조각들에서 그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암시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불에 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현존하는 글 조각들은 (커크 및 레이븐, 글 조각들 220-2) 커크와 레이븐 자신들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200): ‘불은 물질의 원형적(原型的: archetypal)인 형태이다.’ 이제 나는 여기서 원형적(原型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확신하지 못한다 (특히 몇 행 뒤에 우리가 우주기원론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발견될 수 없다는 글을 읽는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그러나 원형적(原型的)’이 무엇을 의미하든, 헤라클레이토스가 현존하는 글 조각들에서 모든 물질은 어떻든 (원형적으로든 다른 것으로든) 불이라고 말하는 것이 인정되자마자, 그가 모든 물질이 불처럼 과정이라고 또한 말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커크와 레이븐에 의하여 헤라클레이토스의 것으로 정확하게 인정되지 않는 이론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지속적인 비가시적인 변화들을 신뢰했다고 현존하는 글 조각들 어느 것도 암시하지 않는다고 말한 직후에 커크과 레이븐은 다음과 같이 방법론적으로 언급한다: ‘[원문에서] 파메니데스 이전에 그리고 감각들은 철저히 그릇된 것이라는 그의 명백한 증거 이전에... 결별들에 대한 증거가 매우 강력할 때 상식으로부터의 완전한 결별이 수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하게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것의 의도는, 물체들이 (실체를 지닌) 부단히 비가시적 변화들을 겪는다는 교설이 상식으로부터의 완전한 결별인 사람들이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를 인용하면: ‘예기치 않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그 예기치 않은 것을 탐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예기치 않은 것이 탐지될 수 없을 것이고 접근될 수 없을 것이다’ (딜스-크란츠[DK] B18). 사실상 커크와 레이븐의 마지막 주장은 많은 근거에 의하여 무효이다. 파메니데스 훨씬 이전에 아낙시만드로스와 피타고라스 및 크세노파네스, 그리고 특히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상식에서 멀리 벗어난 관념들을 우리가 발견한다. 진정으로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귀속된 관념들의 역사성을 상식이라는 표준에 의하여 우리가 시험해야 ㅡ 정말로 아낙시메네스에게 귀속된 관념들의 역사성을 우리가 아마도 시험할 것과 같이 ㅡ 한다는 제안은 다소 놀랍다 (여기서 상식이 무엇을 의미하든). 이유인즉 이 제안이 커크와 레이븐에 의하여 확인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악명 높은 모호성과 난해한 문체에 반대가 뿐 아니라, 이율배반과 역설에 대한 그의 강력한 관심에도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제안은 마지막이지만 중요하게, 커크와 레이븐이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귀속시키는 다음 교설과 (내 생각에 완전히 터무니없는) 반대가 된다 (이탤릭체는 내가 표시함): ‘... 모든 종류의 자연적인 변화는 [그리하여 아마도 지진과 대화재들 또한] 규칙적이어서 균형이 잡혀있다는 것, 그리고 이 균형의 원인이 사물들의 로고스라고 또한 표현된 사물들의 공통적인 구성요소인 불()이라는 것.그러나 왜 불이 ㅡ 이 균형이든 다른 것이든 ㅡ 어떤 균형의 원인이어야 하는지? 나는 묻는다. 그리고 어디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렇게 말하는가? 정말로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이었다면, 나는 그 철학에 흥미를 가져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무튼 그것은 전통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것으로 여겨지는, 그리고 상식의 이름으로 커크와 레이븐에 의하여 배척당하는 영감으로 고취된 철학보다 상식으로부터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것일 터이다 (내가 보는 바와 같이).

그러나 결정적인 요점은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도 불구하고 이 영감으로 고취된 철학이 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신비로운 직감을 사용하여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과정이라는 것, 우리의 몸은 화염이라는 것, ‘바위나 청동가마솥은... 변함없이 보이지 않는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커크와 레이븐은 말한다 (197, 주석1; 그 논증은 멜리소스[melissus]에 대한 답변처럼 읽힌다): ‘손가락이 문지를 때마다, 손가락은 쇠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문질러 떨어뜨린다; 그러나 손가락이 문지르지 않을 때, 쇠가 여전히 변하고 있다고 생각할 어떤 이유가 있는가?’ 그 이유는 바람이 문지른다는 것, 그리고 항상 바람이 분다는 것이다; 혹은 쇠가 보이지 않게 녹으로 변한다는 ㅡ 산화(酸化)에 의하여 ㅡ 것이고, 이것은 서서히 불탄다는 것에 의하여 의미한다는 것; 혹은 노인이 어린이와 다르게 보이는 것과 꼭 같이, 옛 쇠붙이는 새로운 쇠붙이와 다르게 보인다는 것 (딜스-크란츠[DK], B88과 비교하라). 현존하는 글 조각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가르침이었다.

결별들에 대한 증거가 극도로 강력할 때 상식으로부터의 완전한 결별들이 수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라는 커크와 레이븐의 방법론적 원칙이, 결별들에 대한 증거가 극도로 강력할 때 역사적 전통으로부터의 완전한 결별들이 수용되어야만 한다는 더 분명하고 더 중요한 교설에 의하여 아마도 대체될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이것은 (이탤릭체로 표시된 부분) 사실상, 역사서술의 보편적인 원칙이다. 그 원칙이 없다면 역사는 불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그 원칙은 커크와 레이븐에 의하여 부단히 위반되었다: 예를 들어, 그들이 부분적으로는 순환적(circular)이고 부분적으로는 (상식으로부터 나온 논증처럼) 자신들의 이야기와 모순이 되는 논증들로써,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거를 의심스럽게 만들려고 시도할 때 그 원칙은 커크와 레이븐에 의하여 부단히 위반되었다. 그리고 그의 [다시 말해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진정한 의미를 꿰뚫어보기 위하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별로 진지한 노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그들이 말할 때 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개괄된 그 철학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 나에게는 진실한 의미와 진실한 깊이가 있는 철학으로 보인다고 나는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훌륭한 가치가 있는 철학자의 철학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니라면 사람은 화염이라고, 그리고 만물은 과정이라고 최초로 깨달았던 훌륭한 사상가는 누구란 말인가? 이 훌륭한 철학이 헤라클레이토스 이후의 과장이라고 (197), 그리고 그 철학은 특히, 아마도 크라틸로스(Cratylus)에 의하여 플라톤에게 제시되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정말로 믿어야 하는가? 이 미지의 철학자는 ㅡ 아마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대담한 ㅡ 누구였는가? 나는 묻는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니라면 그는 누구였던가?

 

XI

그리스 철학의 초기 역사는, 특히 탈레스에서부터 플라톤까지의 역사는 찬란한 이야기이다. 그 역사는 너무나 훌륭하여 사실이 아닐 정도다. 모든 세대에서 우리는 엄청난 독창성과 깊이가 있는 한 가지 새로운 우주론인 적어도 한 가지 새로운 철학을 발견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물론 사람들은 독창성과 천재성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들을 조금 밝히려고 노력할 수 있다. 고대인들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비결이 전통이었다고 ㅡ 비판적 토론의 전통 제안한다.

나는 그 문제를 더 명확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하겠다. 모든 혹은 거의 모든 문명에서 우리는 종교적 및 우주론적 가르침과 같은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많은 사회에서 우리는 학파들을 발견한다. 이제 학파들, 특히 원시 학파들 모두에는 특징적인 구조와 기능이 있는 듯이 보인다. 비판적 토론의 장소들이기는 커녕 그 학파들은 확정된 교설을 전하여, 그 교설을 순전하고 변함없이 보전하는 것을 자신들의 과업으로 만든다. 전통이자 학파 설립자인 최초 스승의 교설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것이 학파의 과업이고, 이 목적을 향하여 가장 중요한 일은 그 교설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학파는 새로운 관념을 수용하지 않는다. 새로운 관념은 이단이어서 분열을 초래한다; 그 학파의 구성원이 그 교설을 바꾸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이단자로서 추방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이단자는 자신의 교설이 학파 설립자의 진정한 교설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심지어 교설 창안자도 자신이 새로운 교설을 도입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왜곡되었던 참된 정설로 자신이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방식으로 교설의 모든 변경은 ㅡ 발생한다면 ㅡ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변경이다. 그러한 교설 변경은 모두 스승의 참된 교훈들의, 스승 자신의 단어들의, 스승 자신의 의미의, 스승 자신의 의도의 재서술(再敍述)로서 제시된다.

이런 종류의 학파에서 우리가 관념들의 내력이나 심지어 그런 내력에 대한 자료를 발견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유인즉 새로운 관념들이 새로운 것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스승에게 귀속된다. 우리가 아마도 재구성하는 유일한 것은 분열의 내력과, 아마도 이단자들에 대항하여 특정 교설들을 방어하는 내력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학파에는 합리적 토론이 있을 수 없다. 반대자와 이단자들에 대항하는, 혹은 경쟁 학파들에 대항하는 주장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설이 옹호되는 것은 논증이라기보다는 주로 주장과 독단 그리고 비난을 통해서이다.

그리스 철학학파들 가운데서 이런 종류의 학파의 훌륭한 사례는 피타고라스에 의하여 창립된 이탈리아 학파이다. 이오니아학파나 엘레아학파와 비교되어, 이탈리아 학파에는 삶에 대한 특징적인 방식 및 비밀스런 교설과 함께, 종교적 교단의 특징이 있었다. 그 학파원인 메타폰티노스의 히파소스(Hippasus of Metapontum)가 특정 제곱근의 무리수 성질에 관한 비밀을 폭로했기 때문에 바다에서 익사했다는 이야기는, 이 이야기에 진실성이 있건 없건, 피타고라스 학파를 둘러싼 분위기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학파들 가운데서, 초기 피타고라스 학파원들은 예외였다. 그들을 예외로 하면, 그리스 철학의 그리고 철학 학파들의 특징은 여기서 기술(記述)된 독단적 유형의 학파와 뚜렷이 다르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 터이다. 나는 이것을 사례에 의하여 밝혔다: 내가 말한 변화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합리적인 토론인 비판적 논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새로운 관념들은 그런 상태로 제시되어, 공개적인 비판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비밀스런 관념 변경들은, 있을지라도, 거의 없다. 익명성 대신 우리는 관념들과 그 관념들 창안자들의 내력을 발견한다.

여기에 독특한 현상이 있고, 그 현상은 그리스 철학의 놀라운 자유 및 창조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현상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설명해야 하는 것은 전통의 발흥이다. 그것은 다양한 학파들 사이에서, 그리고 훨씬 더 놀랍게 동일한 학파 안에서 비판적 토론을 허용하거나 고취하는 전통이다. 이유인즉 피타고라스학파 밖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교설 보전에 헌신하는 학파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설 보존 대신 우리는 교설의 변경, 새로운 관념들, 교설의 수정 그리고 스승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발견한다.

(파메니데스에게서 우리는 초기에, 심지어 매우 두드러진 현상을 ㅡ 두 가지 교설을 제시하여, 하나는 참이라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거짓으로서 자신이 기술[記述]하는 철학자의 현상 ㅡ 발견한다. 그러나 파메니데스는 거짓 교설을 비난이나 비판의 대상으로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거짓 교설을 인간이 지닌 망상적 견해에 대한, 그리고 현상에 지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아마도 최선의 설명으로서 ㅡ 인간이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설명 ㅡ 제시한다.)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이 비판적 전통이 세워졌을까? 이것은 진지하게 생각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만큼은 확실하다: 이오니아의 전통을 엘레아에 가져왔던 크세노파네스는 자신의 가르침이 순전히 추측성이라는, 그리고 더 잘 알 터인 다른 사람들이 아마도 올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었다. 다음 마지막 절에서 나는 이 요점으로 다시 돌아오겠다.

이 새로운 사상의 자유인 이 새로운 비판적 태도에 관한 최초의 징표를 우리가 찾는다면, 우리는 탈레스에 대한 아낙시만드로스의 비판으로 이끌려 간다. 여기에 매우 두드러진 사실이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자신의 스승이자 친척이고 7인의 현자의 한 사람인 이오니아학파의 창립자를 비판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보다 약14살 아래여서, 틀림없이 자신의 스승이 생존해 있을 동안에 자신의 비판과 새로운 관념들을 전개했다. (그들은 서로 수년 차이로 사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이야기의 기원들에는 불화나 언쟁 혹은 결별의 흔적이 없다.

이것은 자유에 관한 새로운 전통을 세운 사람은 ㅡ 스승과 제자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근거로 ㅡ 그리하여 피타고라스학파와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학파를 창설한 사람은 탈레스였음을 암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탈레스는 비판을 용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 탈레스가 사람은 비판을 용인해야 한다는 전통을 창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탈레스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스승이 비판을 능동적으로 고취하지 않고 비판을 용인만 하는 사제 관계를 상상할 수 없다. 독단적 자세로 훈련을 받고 있는 제자가 독단을 감히 비판하여 자신의 비판을 소리 낸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가능하지 않다 (유명한 현자의 독단은 특히 그렇다). 그래서 스승인 탈레스가 비판적 태도를 고취했다고 ㅡ 아마도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아마도 비판적 의도 없이 제자들이 묻는 몇 가지 질문의 유관성에 의하여 충격을 받은 후에서야 ㅡ 가정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 더 쉽고 더 간단한 설명이다.

아무튼 탈레스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제자들에게서 비판을 능동적으로 고취했다는 추측으로 인하여, 스승의 교설을 향한 비판적 태도가 이오니아학파 전통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사실이 설명될 터이다. 탈레스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최초의 스승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사물들을 보는 방법이다 ㅡ 사물이 존재한다고 내가 믿는 방법이다. 나의 가르침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라.’ (이 비독단적인 태도를 탈레스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비역사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겨우 두 세대 후에 크세노파네스의 글 조각들에서 의식적이고 명백하게 언명된 유사한 태도를 우리가 발견한다는 사실이 다시 상기될 것이다.) 아무튼 이오니아학파가 여러 세대를 이어가면서 제자들이 스승들을 비판했던 최초의 학파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철학적 비판이라는 그리스 전통이 그 주요 근원을 이오니아에 두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중차대한 혁신이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학파 교설만을 허용하는 독단적 전통과의 결별을, 그리고 그 독단적 전통의 자리에 모든 사람들이 비판적 토론을 통해서 진리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교설들의 복수성을 인정하는 전통의 도입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그 혁신으로 인하여 진리를 알고 발견하려는 우리의 시도들이 최종적이 아니라 개선에 열려있다는 깨달음이 거의 필연적으로 발생했다; 우리의 지식인 우리의 교설은 추측성이라는 깨달음; 우리의 지식인 우리의 교설은, 최종적이어서 확실한 진리들이라기보다는 추측들과 가설들로 구성된다는 깨달음; 그래서 비판과 비판적 토론이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하려는 우리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깨달음. 그리하여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합리적이거나 과학적 태도를 창조한 전통인 대담한 추측과 자유로운 비판의 전통이 출현했고 그 전통과 함께 과학에 (물론 과학만이 아닐지라도) 근거한 유일한 문명인 우리의 서구 문명을 창조한 전통이 출현했다.

이 합리주의적 전통에서 교설의 대담한 변경이 금지되지 않는다. 반대로 혁신은, 이전 혁신을 비판적으로 토론한 결과에 근거한다면, 고취되고 성공으로서 간주되고 개선으로서 간주된다. 바로 혁신의 대담성이 찬양을 받는다; 그 까닭은 그 대담성이 비판적으로 검토되는 엄격함에 의하여 통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설의 변경이 결코 은밀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옛 이론들 및 혁신한 사람들의 이름과 함께 전통적으로 계승되는 이유이다. 그래서 관념들의 내력에 대한 자료가 학파 전통의 일부가 된다.

내가 알기로 비판적, 즉 합리적 전통은 단지 한 번 창안되었다. 그 전통은, 아마도 확실하고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인 참된 지식(epistēmē)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설의 발흥으로 (확실한 진리와 단순한 억측을 엘레아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가 구분한 것이 변질된 상황) 인하여, 2-3세기 후에 실종되었다. 그 전통은 르네상스 시대에, 특히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하여 재발견되어 의식적으로 부활되었다.

 

XII

나는 이제 나의 마지막이자 가장 핵심적인 주장으로 왔다. 그 주장은 이러하다. 합리주의적 전통인 비판적 토론의 전통은 우리의 지식을 ㅡ 물론 추측성이거나 가설적 지식 ㅡ 확대하는 유일하게 실용적인 방법을 의미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더욱 특히, 관찰이나 실험으로부터 시작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과학의 발전에서 관찰과 실험은 비판적 논증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그리고 관찰과 실험은 다른, 비관찰적 논증과 나란히 이 역할을 수행한다. 그 역할은 중요한 역할이다; 그러나 관찰과 실험의 중요성은 이론들을 비판하는 데 사용될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에 완전히 달려있다.

여기에서 개괄된 지식론에 따라서 이론들이 다른 이론들보다 우수할 주로 두 가지 방법만 있다: 우수한 이론들은 더 많은 것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우수한 이론들은 더 잘 시험될 것이다 ㅡ 다시 말해서 우수한 이론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반대의견에 비추어, 그리고 특히 또한 이론을 비판할 목적으로 고안된 관찰적이거나 실험적인 시험들에 비추어, 더 완전하게 그리고 더 비판적으로 토론될 것이다.

세상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들에는 합리성이라는 오직 한 가지 요소만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 이론들 자체가 억측이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상상할 따름이다. 여러분이 나에게, “어떻게 당신은 아는가?”라고 묻는다면, 나의 답변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억측을 제시할 따름이다. 여러분이 나의 문제에 관심이 있고 여러분이 나의 억측을 비판한다면 나는 매우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반대 제안들을 내놓는다면, 나는 반대로 그 제안들을 비판하려고 시도할 것이다가 될 터이다.

이것이 참된 지식론이라고 (여러분의 비판을 위하여 내가 제출하고 싶은) 나는 믿는다: 이오니아에서 출현했던 관행, 그리고 현대 과학에 (여전히 베이컨식의 귀납법이라는 허구를 신뢰하는 많은 과학자들이 있을지라도) 포함된 관행에 대한 참된 기술(記述)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식은 추측과 논박을 통하여 진행한다는 이론.

귀납적 과정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 그래서 내가 참된 지식론으로서 간주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한 위대한 사람 중 두 분은 갈릴레오와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러나 고대인들도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비판적 토론의 관행이 시작된 후 거의 즉시 이 합리적 지식론이 분명히 인정되고 언명되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이 분야에서 우리에게 있는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글 조각들은 크세노파네스의 것들이다. 우리가 지닌 모든 지식은 억측이지만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은저 지식을 탐색함에 의하여 시간이 흐른 후에 억측임을 발견하리라는 사실을 크세노파네스가 인식하게 된 것은 그의 공격의 대담함과 그가 지녔던 문제들의 중대함 덕분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순서로 나는 여기서 그 글 조각들 중 다섯 가지를 제시하겠다. 여기에 크세노파네스의 글에서 나온 다섯 가지 글 조각들이 (딜스-크란츠[DK], B16 15; 18; 35; 그리고 34) 있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의 제신(諸神)이 납작코이고 검다고 말하지만

트라키아인들은 자신들의 제신(諸神)이 푸른 눈과 붉은 머리털을

지녔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나 말이나 사자에게 손이 있어서 사람처럼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할 수 있다면 말은 자신들의 신들을 말처럼, 소는 소처럼 그려서

각각은 그래서 신들의 몸을, 각종, 자신과 비슷하게 형성하리라.

 

제신(諸神)은 처음부터, 밝히지 않는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배우고, 사물을 더 잘 알게 되리...

이것들은 진리와 같다고 우리가 추측한다.

 

그러나 확실한 진리에 대해서 아무도 그 진리를 알지 못했고,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고; 제신(諸神)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리.

그리고 우연히 그가 궁극적 진리를 발설할지라도,

그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리:

이유인즉 모든 것이 억측으로 짜인 그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크세노파네스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또한 여기서 내가 이전에 다른 문맥에서 인용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말 두 가지를 (딜스-크란츠 [DK], B7818) 되풀이할 것이다. 두 가지 말 모두 인간 지식의 추측성 특징을 표현하고, 두 번째 말은 그 특징의 대담성인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대담하게 예상할 필요를 언급한다.

 

참된 지식을 소유한다는 것은, 비록 신적(神的) 본성에 속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이나 특징에는 속하지 않는다... 기대되지 않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기대되지 않은 것을 탐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는 기대되지 않은 것이 탐지될 수 없어서, 접근될 수 없는 상태로 남을 것이다.

 

나의 마지막 인용구는 데모크리토스로부터 (딜스-크란츠[DK], B117) 나온 유명한 인용구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을 본 것으로부터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이유인즉 진리가 깊은 곳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비판적 태도로 인하여 소크라테스의 윤리적 합리주의가 예시(豫示)되고, 준비된 방식이다: 비판적 토론을 통한 진리 탐구가 삶의 한 방식이라는 ㅡ 그가 알고 있던 최고의 것 ㅡ 소크라테스의 믿음.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R. 포퍼 ㅡ

 

 

 

부록: 역사관련 추측들과 변화에

관한 헤라클레이토스

 

과학과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관한 포퍼(Popper on Science and the Presocratics)’라고 제목이 붙은 기고문에서 (Mind, NS. 69, 19607, 318에서 339), G. S. 커크(Kirk) 씨는 한가지 도전과 한가지 비판에 대응했는데 그 도전과 비판은 아리스토텔레스 학회(Aristotelian Society)에 대한 나의 의장 강연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로 돌아가서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커크 씨의 기고문은 나의 비판에 답변하는 과제에 주로 주력하지 않는다. 그 기고문은 주로 또 다른 과제에 주력한다: 그 기고문은, 내가 어떻게 그리고 왜 근본적으로 잘못된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태도의 희생자인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데 그 근본적으로 잘못된 태도로 인하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관하여 잘못된 주장들로써 그리고 잘못된 역사기술의 원칙들로써 내가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반격에는 확실히 나름대로 내재적 장점들과 흥미가 있다. 그리고 커크 씨가 이 절차를 채택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아무튼 그와 내가 적어도 두 가지 요점들에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우리 사이의 근본적 쟁점이 철학적 쟁점이라는 것과 우리가 채택하는 철학적 태도가 역사관련 증거에 ㅡ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관한 증거 ㅡ 대한 우리의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이제 내가 커크 씨의 일반적인 철학적 태도를 수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

 

이 부록은 Mind에 게재된 커크(Kirk) 씨의 기고문에 대한 답변 기고문인데 Mind, N.S. 72, 1963, 7, 386-92쪽에 헤라클레이토스에 관한 그리고 균형의 원인으로서의 불에 관한 커크(Kirk on Heraclitus, and on Fire as the Cause of Balance)’라는 제목으로 부분적으로 발표되었다. 전체 기고문을 원래 그에게 제출된 대로 발표하도록 Mind의 편집자가 허락한 것에 대하여 나는 여기서 감사하고 싶다. (이 저서의 2판 및 후속 판본들에서 나는 이 부록에 몇 가지 사항들을 추가했다. [이 문장은 이한구 옮김에 누락되었다: 역주])

지로 그도 나의 일반적으로 철학적인 태도를 수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나의 일반적인 철학적 태도를 배척하는 것에 대하여 이유들을 제시해야 한다고 느끼는데 옳다.

그러나 나의 견해들을 배척한 것에 대하여 그가 이유를 제시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한 이유는 그가 나의 견해들이라고 믿는 것에 관한 그의 견해들과 그가 이 견해들로부터 도출하는 파멸적인 결론들이 내가 밝힐 바와 같이 나의 실제 견해들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난제가 있다. 그가 채택한 반격의 방법에는 자체의 고유한 결점이 있다: 그 방법은 나의 강연에서 수행된 비판의 확정된 요점들에 대한 토론을 촉진하는 데 쉽게 도움이 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예를 들어 커크는 나의 요점들 중 어느 것을 그가 수용하는지 (이유인즉 그가 정말로 몇 가지 요점들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요점들을 그가 배격하는지 매우 명백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대신 수용과 배격은 그가 나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나의 태도라고 믿는 것을 배격하면서 그리고 자기가 상상한 이 태도의 결과들 중 몇 가지를 배격하면서 숨겨져 있다.

 

1

나의 첫 번째 과제는, 나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태도를 다루는 커크의 방식이 주로 내가 서술한 것에 대한 오해들과 오독들에 근거하고 자연과학에 대한 대중적인 귀납주의적 오해들에 근거한다는 나의 주장에 대하여 어떤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될 것인데 그 대중적인 귀납주의적 오해들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L. Sc. D.)에서 완전히 토론되어 배제되었다.

커크는 나를 널리 수용된 귀납주의의 독단에 ㅡ 과학이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귀납에 의하여 일반화와 궁극적으로 이론들에 이른다는 견해 ㅡ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제시하는데 옳다. 그러나 내가 귀납을 반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틀림없이 직관(intuition) 신봉자라고 믿는 데서 그리고 나의 접근방식이 현대 경험론에 반대하여 그가 전통적 철학으로 지칭하는 직관주의적 철학을 옹호하려는 시도에서 틀림없이 기인하다고 믿는 데서 그는 틀렸다. 이유인즉 내가 귀납을 신뢰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직관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귀납주의자들에게는 직관이 귀납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을 틀렸을 뿐이다: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가능한 접근방식들이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견해는 비판적 경험주의로서 공정하게 기술될 것이다.

그러나 커크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면서 (319) 나에게 거의 데카르트적인 직관주의를 귀속시킨다: ‘전통적인 유형의 철학은, 철학적 진리들이 내용에서 형이상학적이어서 직관에 의하여 이해될 수 있다고 전제했다. 비엔나학파의 실증주의자들은 이것을 부인했다. 그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서 포퍼는 자신의 믿음을 철학 역할의 고전적 개념과 그다지 멀지 않은 것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것에 대하여 누가 뭐라고 말하든, 틀림없이 전통적 철학이 ㅡ 예를 들어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철학 ㅡ 존재하는데 그 철학은 직관을 지식의 근원으로서 취급한다; 그러나 나는 이 철학을 항상 반대했다. 이 구절부터 계속해서 커크는 그가 직관을 여기서 허용하는 의미로 인용구들로 몇 번 (320, 321, 322, 327) 그리고 인용구들 밖에서 몇 번 (318, 319, 320, 324, 327, 332, 337) ‘직관을 사용하지만 직관주의적 견해들을 나에게 귀속시킬 때 항상 분명하게 나를 인용하고 있는 인상을 보인다 ㅡ 그리고 틀림없이 그 인상을 만들어낸다; 그 직관주의적 견해들을 나는 내 생애에 지닌 적이 없다. 사실상 나의 강연에서 직관이라는 단어가 발생하는 유일한 때 그 단어는 동시에 반()-귀납주의적이고 동시에 ()-직관주의적인 맥락에서 사용된다. 이유인즉 그곳에서 (7; 본 저서 140) 이론의 과학적 특징 문제에 관하여 내가 다음과 같이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탤릭체는 원문에 없음): ‘이론에 관하여 중요한 것은 이론의 설명력이고 이론이 비판과 시험들을 견디어내는지 이다. 이론의 기원 문제인 어떻게 이론이 달성되었는지는 ㅡ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귀납적 과정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직관 작용에 의해서인지 ... 이론의 과학적 [위상이나] 특징과 관계없다.’

이제 커크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구절을 토론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 의하여 내가 귀납도 직관도 믿는 사람이 아니라 것이 적시된다는 부인될 수 없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계속 직관주의적 견해들을 귀속시킨다. 그는 예를 들어 위에 인용된 319쪽에서 나에게 직관주의적 견해들을 귀속시킨다; 혹은 324쪽에서도 그렇게 귀속시키는데 그때 그는 과학이 직관들로부터 시작된다는 전제로서 나의 것으로 주장되는 전제를 (반면 나는 과학이 문제들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아래 참조) 수용할 것인지의 문제를 토론한다; 혹은 326쪽 이하에서 그렇게 귀속시키는데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포퍼와 함께 탈레스의 이론이 틀림없이 비-경험적 직관에 근거했다고 추론해야 하는가?’

이제 나 자신의 견해는 이 모든 것과 매우 다르다. 과학의 출발점에 대하여, 과학이 직관들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말하지 않았고 과학은 문제들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했다; 우리가 주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함에 의하여 새로운 이론에 도달한다고 나는 말했다; 우리가 아는 바로서의 세상을 ㅡ 우리의 경험의 세상 ㅡ 이해하려는 우리의 시도들에서 이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나는 말했다 (그 세상에서 경험은 주로 기대들이나 이론들로 구성되고 부분적으로 또한 관찰적 지식으로 구성된다 ㅡ 기대들이나 이론들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관찰적 지식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가 믿을지라도). 이 문제들 중 몇 가지는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문제들 중 몇 가지) 지금까지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이론들에 대한 의식적 비판으로부터 혹은 선배의 이론에 대한 의식적 비판으로부터 발생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관한 나의 논문에서 내가 수행하기 시작한 주요점들 중 하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이 탈레스를 비판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합리주의적 전통의 기원이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제안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합리주의적 전통을 비판적 토론의 전통과 동일시한다.

이런 종류의 견해에 전통적인 직관주의적 철학과 많은 유사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잘못된 접근방식이, 과학적 관행을 충분히 숙지하지 않은 사변철학자(speculative philosopher)의 접근방식으로서 아마도 설명될 것이라고 커크가 제안한 것을 발견하고 나는 놀랐다; 예를 들어 그는 320쪽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그의 [포퍼의] 과학관은 과학자들이 진행하는 방법에 대한 객관적인 초기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과학관 자체가 자신의 발전된 이론의 초기 적용에서 현재 철학적 난제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결과적으로 실제적 과학 과정과 비교되는 직관이었을 가능성이 보인다.’ (과학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독자도 아마도 적어도 나의 문제들 중 몇 가지 문제들이 물리과학들 자체 내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과학적 관행 및 연구에 대한 나 자신의 숙지가 전적으로 간접적이 아니라는 것을 주지했을 것이라고 나는 틀림없이 생각했다.)

내가 염두에 두는 비판적 토론의 종류는 물론, 경험이 주요 역할을 수행하는 토론이다: 관찰과 실험에 의하여 우리의 이론들에 대한 시험들이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커크는 놀랍게도 모든 과학이론들은 전적으로 직관에 근거한다는 포퍼의 논지를 말할 정도까지 멀리 나아간다 (332: 이탤릭체는 내가 표시함).

대부분의 철학자들처럼 나의 견해들이 왜곡되고 희화(戲畫)되는 일을 나는 많이 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희화(戲畫)(원본과 비교되어 인식될 수 있는 유사성에 항상 의존해야 하는) 아니다. 경험주의적 그리고 실증주의적 나의 친구들과 반대자들 및 비판자들 중 누구도 직관주의적 인식론을 부활시킨 것에 대하여 또는 그 인식론을 지닌 것에 대하여 나를 비판한 적이 없다고 그리고 반대로 통상적으로 나의 인식론이 그들의 인식론으로부터 크게 이탈하지 않음을 그들이 말한다고 나는 언급할 것이다.

커크가 나의 철학 내용에 관해서뿐 아니라 그 철학의 근원에 관해서도 몇 가지 추측들을 제시한다는 것이 앞의 내용으로 알려질 것이다. 그러나 이 구성들의 추측성 특징을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반대로 자신이 그 구성들에 대한 어떤 원문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믿는다. 이유인즉 포퍼 자신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태도는... [포퍼]1958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서문에서 서술하는 것과 같이. 모든 철학적 [의도적으로 그렇게 서술된] 그리고 과학적 진리를 경험에 의한 검증에 근거시키려는 비엔나학파의 시도들에 대한 반발로 형성되었다고 그가 나에 대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커크, 319). 비엔나학파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이 잘못된 기술에 관하여 비평할 필요가 나에게 없다. 그러나 내가 서술한 것에 대하여 여기서 서술하는 사람이 철학역사가이기 때문에 내가 서술한 역사관련 허구의 싹을 잘라야한다고 나는 느낀다. 이유인즉 커크가 언급하는 서문에서 나의 견해들이나 나의 태도를 내가 형성한 방법에 관하여 나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비엔나학파에 관해서도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정말로 커크의 설명을 닮은 것을 나는 서술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사실들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의 한 부분은 1957년에 처음 발표되었는데 아마도 커크 씨가 나의 케임브리지 강좌에서 발견했을 터이고 과학: 추측과 논박[Science: Conjectures and Refutations]’이라는 제목으로 지금 본 저서에 등재되었으며 그 제목에서 나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아들러[Adler]‘의 시도들에 반발하는나의 태도를 내가 어떻게 전개했는지 내가 말하는데 그들 중 누구도 실증주의자이거나 비엔나학파의 일원이 아니다.) 설명이 아주 불가능한 이 오독을 커크 씨에 의하여 야기한 것이 헤라클레이토스 문체의 모호성을 닮은 나의 문체였음은 비개연적으로 보이는데 이유인즉 그 오독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로 돌아가서와 비교하면서 위에 인용된 그의 구절이 언급하는 동일한 1958년 서문을 보다 명쾌한 서술로서 그가 기술하기 (318) 때문이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오독에 대한 또 다른 사례가 동등하게 설명될 수 없다 ㅡ 적어도 진리 문제와 알프레드 타스키의 진리 이론을 내가 언급하는 61쪽까지 (274쪽이나 276쪽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저서를 읽은 독자 누구에게나 설명될 수 없다. ‘포퍼는 절대적인 과학적 진리라는 개념을 포기한다고 커크는 말한다 (320). 심지어 충분히 입증된 과학적 이론에 대해서도 그 이론이 참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알 수 없다고 내가 말할 때, 내가 실제로 절대적인 과학적 진리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하는 듯하다; ‘나는 승리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절대적인 승리 지점이라는 개념으로써 활동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ㅡ 다시 말해서, 자신의 존재가 그 승리 지점에 도달하는 것과 독립적으로 전제되는 사람.

이 명백한 오해들과 가끔 발생하는 인용 오류들을 탁월한 학자이자 철학역사가가 작성한 논문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놀랍다. 그것들 때문에 과학에 대한 나의 실제적 견해들을 철학적으로 옹호할 필요가 없어진다.

 

II

그리하여 나는 이제 더 주제와 유관한 것으로 ㅡ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역사로 ㅡ 선회할 것이다. 이 절에서 나의 역사관련 방법에 대한 그리고 역사관련 방법에 관한 나의 견해들에 대한 커크의 오류들 중 두 가지 오류를 바로잡는 데 나 자신을 나는 국한하겠다. III절에서 나는 우리의 실제적인 의견불일치들을 다루겠다.

(1) 커크는 325쪽에서 내가 원문 수정과 같은 문제들에 관한 어떤 능력도 부인하기 위하여 내가 말한 나의 한 가지 언급을 토론한다. 그가 인용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어떤 단어들이나 표현들을 사용했을지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가 어떤 단어들이나 표현들을 아마도 사용할 수 없었을지를 주장하기 시작할 때 나는 완전히 능력 부족에 빠진다.’

이 능력 부인에 관하여 비평하면서 커크는 예를 들어 헤라클레이토스가 어떤 단어들이나 표현들을 사용했을지가 마치 그가 생각한 것에 대한 평가와 무관한 것인 양!‘이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이 문제들이 무관하다고 나는 말하거나 제안한 적이 없다. 나는 단지, 헤라클레이토스의 (그리고 다른 사람들) 언어적 용법들을 충분히 깊이 공부하지 않아서 가령 버넷(Burnet)이나 딜스(Diels) 혹은 라인하르트(Reinhardt) 그리고 특히 최근에는 블라스토스(Vlastos)나 커크 자신과 같은 학자들에 의하여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업적을 토론하기에 나 자신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커크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우리가 지닌 제일 오래된 원문들은 이 단어들과 표현들및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자신들의 원문 그대로의 글 조각들이지 포퍼가 생각하는 듯이 보이는 바와 같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및 학설지가(學說誌家: doxographers)들의 보고서들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사상 재건이 후대 전통과 생존하는 글 조각들 양쪽 모두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사실상 심지어 비전문가에게도 명백하다.‘

 

언어적 비판의 분야에서 나의 능력 부인으로 인하여 그런 것들이 심지어 문제의 특정 비전문가에게 명백하지않다고 커크가 어떻게 제안하게 되었는지 나는 상상할 수 없다. 게다가 상당히 최근에 예를 들어 헤라클레이토스의 살아남은 글 조각들을 상당히 많이 내가 토론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로 돌아가서에서 그리고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Open Society) 양쪽 모두에서 글 조각들 자체를 내가 인용하고 번역하여 토론했다는 (이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보고서들이 또한 매우 유관하다는 것에 우리가 동의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 보고서들보다 훨씬 더 많이) 것을 그는 아마도 주시했을 터이다. 커크는 이 저서를 324쪽에서 언급한다. 그렇다면 왜 그는 325쪽에서 나의 능력 부인을, 내가 생존하는 글 조각들에 대한 흥미를 부인한다는 의미로 혹은 그 글 조각들의 역사적 위상의 문제에 대한 흥미를 내가 부인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가?

(2) 내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로 돌아가서에서 실행한 비판에 커크가 답변하는, 나의 견해로 만족스럽지 못한, 방식의 사례로서 이제 나는 그의 답변의 말미를 (339) 인용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훨씬 더 놀랍게도, [포퍼]는 가능한 진리의 기준을 이론의 역사성에 대한 시험으로서 적용한다. 16쪽에서 그[포퍼]헤라클레이토스 관념들의 역사성을... ‘상식이라는 표준들에 의하여 우리가 시험해야 한다는 제안이 다소 놀랍다고 서술한다. 우리[커크]가 그[포퍼] 자신이 말하는 시험이 훨씬 더 놀랍다고 알지 않는가 ㅡ 그러나 결정적인 요점은 물론 이 고무된 철학이 [, 사람은 화염이다, 기타 등등] 우리가 아는 것에도 불구하고 이라는 것이다” (17[본 저서에서, 148)?‘

 

이것에 대한 간단한 답변은, 이론의 진리나 가능한 진리가 그 이론의 역사성에 대한 시험이라고 내가 말했거나 암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강좌의 16쪽과 17쪽에서 ㅡ 본 저서에서, 147쪽 이하 ㅡ 그리고 vii절의 두 번째 문단에서 알려질 것이다; 부언하여 내가 진리의 관념을 배척했다는 자신의 논지를 커크는 잊었던가?) 그리고 커크가 시험을 인용구들 안에서 표현할 ㅡ 그리하여 내가 시험이라는 용어를 이 문맥에서나 이 의미로 사용했다고 지적할 ㅡ 때 그는 분명히 나를 잘못 인용한다. 이유인즉 내가 말했거나 암시한 유일한 것은, 전통적으로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올바르게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귀속된 저 변화 이론의 진리로 인하여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이 이 귀속에 의하여 적어도 이해된다는 것이다 ㅡ 반면 아무튼 나는 커크에 의하여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귀속된 철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언하여 어떤 사상가에게, 흥미롭지 않고 허위인 이론보다는 흥미롭고 참인 이론을 귀속시키려고 우리가 항상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전승된 역사적 증거로 인하여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역사의 기술 및 관념의 해석에 대한 중요하고 심지어 명백한 원칙이라고 나는 정말로 생각한다. 이것은 확실히 기준도 아니고 시험도 아니다; 그러나 역사기술의 이 원칙을 적용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사람은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를 이해할 개연성이 없다.

 

III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관한 한 커크와 나 사이의 가장 중요한 의견불일치는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해석에 관해서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아래 (1)(2)에서 토론할 예정인 나의 두 가지 요점들을 커크가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거의 양도했다고 주장한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나의 일반적인 접근방식은 칼 라인하르트(Karl Reinhardt)의 말로 표현될 것이다: ‘철학의 역사는 철학 문제들의 역사이다. 당신이 헤라클레이토스를 설명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의 문제가 무엇이었던지를 우리에게 말하라.’

이 도전에 대한 나의 답변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문제가 변화의 문제라는 ㅡ 일반적인 문제 ㅡ 것이었다.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자체의 동일성을 잃지 않고 물체가 어떻게 변할 수 ㅡ 그 경우에 그 물체는 변한 저 물체가 더 이상 아닐 터이다 ㅡ 있는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로 돌아가서’, viii ix절 참조.)

헤라클레이토스의 훌륭한 취지는 이 흥미로운 문제의 발견과 관련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의 발견으로 인하여 변화가 정말로 어떤 것에 대해서 ㅡ 어떤 존재에 대해서 ㅡ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파메니데스의 해답이 발생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사물들이 공허(the void)에서 자체들의 위치를 바꿀지라도 사물들은 정말로 내재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레우키포스(Leucippus)와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의 밀접하게 연관된 이론이 나중에 발생했다고 나는 믿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동시에 글 조각들에 따라서 내가 헤라클레이토스에 귀속시키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변하지 않는) 사물들은 없다; 우리에게 사물로 보이는 것은 과정이다. 실제로 물질적인 사물은 화염과 같다; 이유인즉 화염이 물질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지만 물질적인 사물이 아니다: 화염은 과정이다; 화염은 무상하다; 물질이 화염을 통과한다; 화염은 강()과 같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 다소 안정적인 만물은 실제로 무상하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ㅡ 정말로 안정적으로 보이는 것들 ㅡ 비가시적으로 무상하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으로 인하여 현상과 실재 사이의 파메니데스적 구분을 위한 길이 마련된다.)

안정된 사물로 나타나기 위하여, 과정은 (사물의 배후에 있는 실재인) 규칙적이고 법칙-같고 계산적이어야 한다: 안정된 화염을 유지하는 등잔은 확정된 척도의 기름을 화염에 넣어야 한다. 계산되었거나 법칙-같은 과정이라는 관념이 우주적인 주기적 변화들의 (밤과 낮, 아마도 또한 조류들, 달의 차고 이지러짐 그리고 특히 년 중 계절들과 같은) 중요성에 관한 밀레토스인들의, 특히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안들로부터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여 전개되었음은 개연성이 없지 않다. 이 규칙성들이, 만물의 그리고 심지어 우주의 표면적인 안정성이 계산된과정으로서 ㅡ 법칙에 의하여 지배되는 과정 ㅡ 설명될 수 있다는 관념에 기여했을 개연성이 높다.

 

(1) 내가 근거로 삼아 헤라클레이토스에 관한 커크의 견해들을 비판한 두 가지 요점들 중 첫 번째 요점은 이것이다. ‘바위나 청동가마솥이... 변함없이 비가시적인 변화들을 겪고 있었다고 헤라클레이토스가 믿지도 않았고 그렇게 믿는 것은 상식에 반한다고 커크는 제안했다. 나의 비판에 대한 커크의 길다란 토론은 (334쪽 이하)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요점에 궁극적으로 도달한다:

 

이 요점에서 논증은 다소 정제된다. 그러나 우리 경험의 특정 비가시적 변화들, 예를 들어 포퍼에 의하여 인용된 쇠가 점진적으로 녹슨다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그렇게 강력하게 충격을 주어서 그 변화들로 인하여 가시적으로 변하지 않는 만물이 비가시적으로 변한다고 그가 주장하도록 설득되었음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데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글 조각들이 이것이 사실이었음이 암시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336).

 

그 논증이 어떤 의미에서도 정제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귀속시키는 이론을 암시하는 현존하는 글 조각들이 많다. 그러나 이 글 조각들을 언급하기 전에 나의 강연에서 내가 제기한 한 가지 문제를 나는 반복해야겠다: 커크와 레이븐(Raven)이 동의하는 바와 같이 불(fire)이 말하자면 물질의 구조적 모형이거나 원형(原型: prototype)이라면 (혹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전형적 형태[archetypical form]’), 물질적인 것들이 화염들과 같아서 그리하여 과정들이라고 것을 제외하고 이것이 다른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헤라클레이토스가 과정과 같은 추상적인 용어를 사용했다고 나는 물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이론을 추상적인 물질이나 전체로서의 세상 질서(335쪽에서 커크가 말하는 바와 같이) 뿐 아니라 구체적인, 단일한 사물들에도 또한 적용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리고 이 사물들은 그다음에 틀림없이 구체적인, 단일한 화염들에 비교된다.

이 견해를 그리고 일반적인 나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현존하는 글 조각들에 대하여, 먼저 태양에 관한 글 조각들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태양을 물체로서 혹은 아마도 심지어 매일 새로운 물체로서 간주했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상당히 분명하다; ‘태양은 매일 새롭다고 말하는 DK, B6를 참조하는데 이것이 아마도 태양은 등잔불처럼 매일 다시 불이 붙는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일 터이다: ‘태양이 없다면 다른 별들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일 터이다라고 B99가 말한다. (B26과 등잔불 및 척도들에 관한 위에 있는 나의 언급을 참조하고 B94와 비교하라.)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B125를 참조하라: ‘휘저어지지 않으면 맥주는 상한다.’ 그리하여 움직임인 과정은, 움직임인 과정이 없으면 존재하기를 멈출 것의 지속적인 존재에 필수적이다. 혹은 B51을 참조하라: ‘자체와 투쟁하는 것은 자체에 몰두하게 된다: 활과 수금(竪琴: lyre)에서처럼 반동(recoil)(혹은: [: strings]의 제 위치로 돌아감) 장력(張力: tension)에서 기인하는 결합이나 화음이 있다.’ 활과 수금을 그것들답게 만드는 것은 장력(張力: tension)이자 활동력인 내재적 갈등(과정)이고 장력(張力: tension)이 유지된다는 조건으로만, 그것들의 부분들이 갈등을 지속한다는 조건으로만 활과 수금은 그것들다움을 지속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일반화와 추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는. B8에서처럼 우주적 규모로서 의도되었을 개연성이 높은 일반화로 즉각 나아간다: ‘반대인 것들은 동일하고, 불화로부터 최고의 조화가 발생한다.’ (B10 또한 참조.) 그러나 이것은, 그가 단일한 것들, , 수금, 등잔불, 화염, 강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B12, 49α). ‘동일한 강에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다르고 다시 다른 강물이 흐른다... 우리는 동일한 강에 발을 들여놓고 우리는 [동일한 강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우리는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주적 과정들의 상징들이 되기 전에, 강들은 구체적인 강들이고 저것을 넘어서면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구체적인 사물들의 상징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한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부언하여 커크 및 레이븐[Raven]이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귀속시키기를 선호하지 않는) 어떤 의미에서 포괄적이고 아마도 우주적인 일반화 및 추상화일지라도, 의심할 바 없이 모든 사람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도움으로서 의도된다: 그것은 삶은 죽음이 되고 죽음은 삶이 된다고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그렇게 많은 다른 글 조각들처럼 헤라클레이토스의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이다. (예를 들어 B88, 20, 21, 26, 27, 62, 77과 비교하라.)

B49α가 일반화와 같은 것을 향하여 움직인다면, B90은 소모하는 (그리고 죽는) (fire)이라는 일반적이고 우주적인 관념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구체적 사항으로 움직인다: ‘상품들이 금(gold)에 대한 교환이고 금이 상품들에 대한 교환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만물은 불에 대한 교환이고 불은 만물에 대한 교환이다.’

그리하여 커크는 이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336): ‘그렇다면 만물이 분리되어 영원히 무상하다는 결론은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여 추종되는 추론 과정에 의하여 반드시 수반되는가?’, 그렇다면 만물이 어느 정도까지 틀림없이 추측과 해석으로 남는 분야에서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추론 과정에 의하여 반드시 수반되는것으로서 조금이라도 말할 수 있는 한, 답변은 강하게 그렇다(yes)’이다.

그리하여 찬 것은 뜨겁게 되고 뜨거운 것은 차게 된다; 축축한 것은 마르고 마른 것은 축축하게 된다B126을 예를 들어 고려하라. 이것에는 우주적 중요성이 있을 개연성이 높다: 이것은 계절들을 언급하고 우주적 변화를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들과 그 사물들의 변화들에 ㅡ 그리고 부언하여 우리 자신들과 우리 영혼들에 ㅡ 적용된다는 것이 어떻게 의심될 수 있는가 (특히 상식이 무엇을 의미하든 우리가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상식을 귀속시킨다면)? (B36, 77, 117, 118과 비교하라.)

그러나 사물들을 무상할 뿐이 아니다 ㅡ 사물들은 비가시적으로 무상하다. 그래서 우리는 B88에서 다음 글을 읽는다: ‘그것은 항상 동일하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깨어있는 것과 잠든 것; 젊은 것과 늙은 것, 이유인즉 한 가지 것이 다른 것으로 변하고 다른 것이 다시 한 가지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어린이들은 나이를 먹는다 ㅡ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변함없이; 그러나 부모들 또한 그들의 자녀들로 변한다 ㅡ 어떤 방식으로든. (B20, 21, 26, 62 90 또한 참조.) 혹은 B130을 고려하라: ‘원에서 시작과 끝은 같다.’ (반대인 것들의 동일성; 반대인 것들은 비가시적으로 서로 합친다; B54, 65, 67, 126 또한 참조.)

이 과정들을 헤라클레이토스가 주목한다는 것 그리고 그리하여 시각과 관찰이 기만적임을 그가 느꼈다는 것이 다음 B46 및 그 외 글 조각들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 시각은 기만적이다. B54: ’비가시적인 조화는 가시적인 것보다 더 강하다.‘ (B851 또한 참조.) B123: ’자연은 숨기기를 매우 좋아한다.‘ (B56113 또한 참조.)

이 글 조각들 중 어떤 하나 혹은 모두가 설명되어 치워질 것임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보기에 그 글 조각들로 인하여 어떤 경우에도 합리적으로 전제할 것이 그리고 추가하여 플라톤과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지지되는 것이 뒷받침된다. (그리고 후자[後者]의 증거가 특히 해롤드 처니스[Harold Cherniss]의 탁월한 작품을 고려하면 의심스러울지라도, 플라톤에 의하여 혹은 글 조각들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을 포함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증거가 전혀 신빙성이 없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ㅡ 그리고 해롤드 처니스는 누구보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2) 나의 답변의 마지막 요점과 헤라클레이토스에 관한 나의 두 번째이자 주요 요점은, 커크 및 레이븐 214쪽에서 결론(Conclusion)이라는 제목으로 발견될 수 있는 그의 철학에 대한 총정리와 관련된다.

나의 강좌에서 나는 이 결론의 한 부분을 인용했고 커크와 레이븐에 의하여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귀속된 교설이 터무니없음을 내가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터무니없는 것으로서 간주하는 을 아주 명백하게 만들기 위하여, 나는 이탤릭체를 사용했다. 이전에 나에 의하여 사용된 이탤릭체와 함께 커크와 레이븐에게서 기인하는 나의 인용문을 나는 여기서 반복한다. 내가 터무니없는 것으로서 발견한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교설로 주장되는 모든 종류의 자연적인 변화들이 [그리고 아마도 지진들이나 대화재들 또한] 규칙적이고 균형이 잡혔다는 것과 이 균형의 원인이 사물들의 로고스(logos)로 또한 지칭된 사물들의 공통적인 구성요소인 불(fire)이다라는 것이다. (147쪽 참조.)

변화가 법칙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는 교설이나 아마도 규칙이나 규칙성은 사물들의 로고스(Logos)’였다는 더 의심스러운 교설을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누가 귀속시키는 것에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혹은 사물들의 공통적인 구성요소는 불(fire)이었다는 교설. 내가 터무니없다고 느꼈던 교설들은 (α) 모든 변화들은 (혹은 모든 종류의 변화들’) 등잔불이나 우주적 계절들과 같은 많은 중요한 변화들과 과정들이 균형이 잡힌으로 지칭될 개연성이 높다는 의미에서 균형이 잡혔다는 것; (b) (fire)이 균형의 원인이라는 것; 그리고 (c) 사물들의 공통적인 구성요소는 ㅡ 다시 말해서, (fire) 사물들의 로고스(Logos)로 또한 지칭되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글 조각들에서도 그리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증언자들 누구에게서도 이 교설들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총정리나 결론의 출처는 ㅡ 다시 말해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 대한 커크의 일반적인 견해를 표현하는 그리고 글 조각들에 대한 그의 해설에 그렇게 많이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 요점 (α), (b) 그리고 (c)의 출처 ㅡ 어디에 있는가?

커크와 레이븐에게서 헤라클레이토스에 관한 장()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한 가지 암시만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반대하는 교설들이, 그들이 223으로 숫자를 매긴 글 조각을 언급하면서 200쪽에 처음 언명된다. (434쪽 또한 참조.) 이제 커크와 레이븐의 223DK, B64와 동일한 글 조각이다: ‘만물을 조종하는 것은 벼락이다.’

이 글 조각에 의하여 커크가 교설 (α), (b) 그리고 (c)를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귀속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벼락이 제우스의 도구임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이 글 조각은 아주 만족스럽게 설명되지 않는가? 이유인즉 헤라클레이토스, DK, B32 = KR231에 따르면, ‘한 가지 것이 ㅡ 유일하게 현명한 것 ㅡ 제우스의 이름에 의하여 지칭되기를 원하고 원하지 않기때문이다. (이것은 DK, B64를 설명하기에 아주 충분한 듯이 보인다. 이것으로 인하여 나의 해석이 추가적으로 강화될 수 있을 터일 뿐일지라도 그것을 DK, B41 = KR, 230과 연관시킬 필연성은 없다.)

그러나 커크와 레이븐은 200쪽 및 434쪽에서 만물을 조종하는 것은 벼락이다라는 글 조각을 더 상세하게 해석한다: 먼저 벼락을 불(fire)과 동일시함에 의하여; 두 번째 불(fire)에게 지시적 능력[directive capacity]’을 귀속시킴에 의하여; 세 번째 불(fire)신성(神性: divinity)을 반영한다고 제안함에 의하여; 그리고 네 번째 불(fire)과 로고스(Logos)의 일치를 제안함에 의하여 그 글 조각을 더 상세하게 해석한다

짧고 간단한 한 가지 글 조각에 대한 다소 지나치게 상세한 이 해석의 근원은 무엇인가? 고대의 자료들 중 어떤 자료에서도 ㅡ 글 조각들 자체들이나 플라톤 혹은 아리스토텔레스 ㅡ 나는 그 근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발견할 수 있었던 유일한 흔적은 히폴리토스(Hippolytus)의 해석이었는데 그를 커크와 레이븐은 자신들의 저서 2쪽에서 기원후 3세기의 로마 신학자로서 (플라톤보다 거의 6세기 아래) ‘기독교 이단들을 이교도 철학의 부활이라고 주장함에 의하여 공격했다고 기술한다. 히폴리토스 자신이 분파주의자 주교였는데 노에토스의(Noetian) 이단이 헤라클레이토스 이론의 부활이었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그는 또한 자신의 공격에 의하여 이단 박멸에 기여했던 듯이 보인다.

히폴리토스는 벼락에 관한 아름다운 글 조각인 B64의 출처이기도 하다. 그는 벼락을 명백하게 인용하는데 왜냐하면 그가 벼락을 노에토스의 이단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해석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시도에서 그는 벼락을 먼저 불(fire)과 동일시한다; 그다음에 신의 지시적 능력(directive capacity)’이 부여된 (커크와 레이븐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영원한 불이나 신의 불(fire)과 동일시하고, 세 번째 분별(prudence)이나 이성과 (커크와 레이븐은 로고스[Logos]’를 주장한다) 동일시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불(fire),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우주적 집을 유지하는 원인이나 독재체제혹은 경제적 행정의 원인으로서 해석한다. (커크와 레이븐은 불[fire]이 균형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히폴리토스의 이 동일시들 중 세 번째 동일시는 아마도 정말로 원문에 근거를 두었을 것이다: 칼 라인하르트(Karl Reinhardt)1942, 헤르메스[Hermes], 77의 기고문에서 현명한 불(pur phronimon)이나 현명한 불(pur Phronoun)로 읽히는 히폴리토스에게서 언급된 실종된 글 조각이 있었다고 추측한다. 내가 보기에 라인하르트의 주장들이 매우 설득력 있지 않을지라도 그 주장들의 힘을 나는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실종되었다고 주장되는 글 조각 자체가 나의 해석과 완벽하게 들어맞을 터이다: 우리가 ㅡ 우리의 영혼들 ㅡ 화염들이라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의미라고 내가 해석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불이나 사고과정으로서의 불이 물론 매우 잘 들어맞을 터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ㅡ 혹은 이단적인 기독교의 ㅡ 해석만 그것을 불은 하느님이다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히폴리토스가 말하는 원인에 관하여,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것이 아니라고 라인하르트가 명시적으로 말한다. 세계-균형의 원인으로서의 불[fire]은 심판의 날에 대화재를 통해서만 정의[正義: justice]의 저울로서 작용할 ㅡ 조금일지라도 ㅡ 터이다; 그러나 커크는 이 대화재가 헤라클레이토스 가르침의 한 부분임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귀속되는 교설은 그렇게 수용될 수 없는 것으로 내가 발견했는데, 한 가지 해석에 대한 커크의 해석으로 보이고 그 한 가지 해석을 통하여 히폴리토스가 헤라클레이토스 가르침의 유사-기독교적 특징을 확립하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ㅡ 아마도 칼 라인하르트가 제안하는 바와 같이, (fire)에게 섭리적이거나 신적 능력들이 부여된다는 교설과 같은, 이교도 기원인 노에토스파의(Noetians) 이단적 교설들을 주시하려는 시도에서.

히폴리토스가 헤라클레이토스를 인용할 때 히폴리토스는 아마도 훌륭한 출처가 될지라도, 그가 헤라클레이토스를 해석할 때 그는 분명히 아주 진지하게 수용될 수 없다.

그것이 의심스러운 출처임을 고려하면 인용된 커크와 레이븐의 총정리나 결론을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결코 놀랍지 않다. 그곳에서 커크와 레이븐에 의하여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귀속된 교설은 ㅡ 특히 나에 의하여 이탤릭체로 표시된 단어들 ㅡ 터무니없다고 나는 여전히 느낀다; 그리고 이 느낌은 나만의 느낌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커크는, 내가 그의 결론을 토론하여 그 결론이 터무니없다고 말하는 나의 강좌에 있는 구절을 언급하여 이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338쪽에서): ‘포퍼는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그런 해석이 터무니없다고 주장할 때 정말로 소외된다.’ 그러나 우리가 커크의 현재 발표를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때, 그가 나의 요점을 거의 인정했음을 우리가 발견한다: 그 단어들이 내가 보기에 터무니없었기 (그리고 추가적으로 모든 종류의 변화들이라는 단어들) 때문에 내가 이탤릭체로 표현한 거의 모든 단어들을 그가 이제 삭제한다; 그리고 더욱 특히 균형의 원인은 불(fire)이다라는 (그리고 저것은 사물들의 로고스[Logos]로 또한 지칭되었다) 서술을 그는 삭제한다.

이유인즉 커크가 이제 338쪽에서, 이것이 내가 터무니없는 것으로서 기술한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해석임을 암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를 자체의 모든 명백한 존재와 불가피성에서 수용했지만 세계-질서의 통일성은 그리하여 편향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 세계-질서의 통일성은 모든 자연적 변화들에서 작동하고 그 변화들의 궁극적 평형을 보장하는 로고스(logos)을 통하여 보존되었다.’

심지어 이 해석도 아마도 보다 다행스럽게 언명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더 이상 터무니없지 않다. 반대로 이 해석은 예를 들어 나 자신이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Open Society)에 제시한 해석과 일치하는 듯이 보이는데 나는 그 저서에서 로고스(logos)’가 변화의 법칙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게다가, (fire)을 균형의 원인으로서 기술하는 것에 내가 강력하게 반대할지라도 (커크 및 레이븐과 동시에, 혹은 히폴리토스와 동시에), 균형이나 균형 잡힌 변화를 다소 강조하는 해석에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참으로, 표면적으로 안정된 물질적인 사물들이 실제로 화염들과 같은 과정들이라면, 그 물질적인 사물들은 틀림없이 계산된 방식으로 서서히 타오른다. 그 물질적인 사물들은, 등잔불처럼 혹은 태양불처럼, ‘자기들의 척도를 넘지 않을것이다; 그 물질적인 사물들은, 아마도 대화재가 아마도 통제 불능이 될 것처럼 통제 불능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맥주가 상하고 분리되고 해체되는 것을 막는 것은 움직임이자 과정임을 여기서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 효과를 지닌 것은 모든 종류의 움직임이 아니라 예를 들어 순환적이어서 계산된 움직임이라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하여 불(fire), 화염의 그리고 사물들의 ㅡ 안정된 것으로서 보이고 정지된 사물들로서 보이는 그리고 사물들의 보존 원인인 저 과정들과 변화들의 ㅡ 균형 원인으로 지칭될 것은 척도(measure)이다. 척도이자 규칙이며 법칙적인 변화인 로고스(logos)(그러나 불[fire]은 아니다) 균형의 ㅡ 특히 균형 잡힌 화염이나 태양 혹은 달처럼 (혹은 영혼) 통제 상태에 있을 때 불(fire)의 균형을 포함하여 ㅡ 원인이다.

이 견해에 따라서 균형 잡힌 변화 대부분이 틀림없이 반드시 비가시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종류의 균형 잡히거나 법칙적인 변화는 틀림없이 추론에 의하여, 사물들이 발생하는 이야기의 재구성에 의하여 추론된다. (아마도 그 변화가 로고스로 지칭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가 자신의 새로운 인식론에 다다른 방식이었을 개연성이 높은데 그 인식론은 실재와 현상을 함축적으로 구분하고 감각 경험을 불신한다. 이 불신으로 인하여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의 의심과 함께 나중에 파메니데스가 한편으로는 완벽한 진리(불변하는 로고스[logos]) 다른 한편으로는 망상적 견해인 인간들의 오류를 저지르는 사고를 대조하는 데 도움을 받아서 도달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파메니데스가 지지한 지성주의나 합리주의 그리고 그가 공격했을 뿐 아니라 그가 최초로 언명한 경험주의나 감각주의 사이의 최초로 명백한 대조가 발생했다. 이유인즉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들이라는 혼란에 빠진 무리가 항상 사물들에 대하여 두 가지 생각에 빠져 자기들 가슴에는 오류를 저지는 사고들을 지니고 (B6:6) 감각을 지식으로 오해한다고 그가 가르치기 (B6:5)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존재와 비-존재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지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가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들에 반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B7):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탐구로부터 당신의 사고를 멀리하라; 많이 시도된 습관인

경험이 당신을 옥죄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당신의 가려진 눈이나

당신의 막힌 귀 혹은 심지어 당신의 혀가 이 길을 따라 방황하지

않게 하라! 그러나 오직 이성에 의하여 내가 여기서 반증으로서

당신에게 설명한 빈번히 논쟁되는 논증을 결정하라.

 

이것이 파메니데스의 지성주의나 합리주의이다. 그는 그 지성주의나 합리주의를, 빛과 밤 그리고 소리와 침묵 및 냉온이 있다는 관습적이고 오류인 견해를 지닌 저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들의 감각주의와 대조한다; 자신들의 눈이 빛 및 밤과 섞인다는 그리고 자신들의 사지가 냉온과 섞여서 자신들이 냉온이 된다는 관습적이고 오류인 견해; 이 혼합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감각기관들이나 자신들의 사지들의 육체적 상태나 본성이 결정된다는 관습적이고 오류인 견해; 그리고 이 혼합이나 본성이 사고로 바뀐다는 관습적이고 오류인 견해. 이 교설은, 그 교설에 따르면 오류를 저지르는 감각-기관들에 이전에 있던 것은 오류를 저지르는 지성에 (B6:6오류를 저지르는 사고오류를 저지르는 지식’) 모두 있는데, 파메니데스의 의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B16):

 

이유인즉 어느 한 때 많이 오류를 저지르는 감각-기관들의 혼합이 그러한 것처럼

그렇게 지식이 인간에게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이 두 가지 것들이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것 그리고 감각-기관들의 본성을 구성하는 것.

이 혼합에서 우세한 것이 인간 각자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사고가 된다.

 

이 반()-감각주의적 지식론은 그 후 곧 실제로 변하지 않고 감각-기관들을 (파메니데스에 의하여 폄하된) 다소 권위적인 지식의 근원들로서 극찬한

()-감각주의적 이론으로 변질된다.

이 이야기 전체는 다소 이상화되고 물론 추측성이다. 인식론적이고 논리적인 문제들과 이론들이 우주론적 문제들과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 과정에서 혹시 어떻게 출현하는지를 밝히려고 내가 노력할 뿐이다.

이와 같은 것이 정말로 발생했는다는 것은 거의 추측을 넘어서는 듯하다.

 

 

 

 

 

 

 

 

 

 

 

 

 

 

 

 

 

5

BACK TO THE PRESOCRATICS

 

1

 

'BACK TO METHUSELAH' was a progressive programme, compared with 'Back to Thales' or 'Back to Anaximander': what Shaw offered us was an improved expectation of life - something that was in the air, at any rate when he wrote it. I have nothing to offer you, I am afraid, that is in the air today; for what I want to return to is the simple straightforward rationality of the Presocratics. Wherein does this much discussed 'rationality' of the Presocratics lie? The simplicity and boldness of their questions is part of it, but my thesis is that the decisive point is the critical attitude which, as I shall try to show, was first developed in the Ionian School.

The questions which the Presocratics tried to answer were primarily cosmological questions, but there were also questions of the theory of knowledge. It is my belief that philosophy must return to cosmology and to a simple theory of knowledge. There is at least one philosophical problem in which all thinking men are interested: the problem of understanding the world in which we live; and thus ourselves (who are part of that world) and our knowledge of it. All science is cosmology, I believe, and for me the interest of philosophy, no less than of science, lies solely in its bold attempt to add to our knowledge of the world, and to the theory of our knowledge of the world. I am interested in Wittgenstein, for example, not because of his linguistic philosophy, but because his Tractatus was a cosmological treatise (although a crude one), and because his theory of knowledge was closely linked with his cosmology.

For me, both philosophy and science lose all their attraction when they give up that pursuit - when they become specialisms and cease to see, and to wonder at, the riddles of our world. Specialization may be a great temptation for the scientist. For the philosopher it is the mortal sin.

 

 

The Presidential Address, delivered before the meeting of the Aristotelian Society on 13th October 1958; first published in the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N.S. 59, 1958-9. The footnotes (and the Appendix) have been added in the present reprint of the address.

 

II

 

In this paper I speak as an amateur, as a lover of the beautiful story of the Presocratics. I am not a specialist or an expert: I am completely out of my depth when an expert begins to argue which words or phrases Heraclitus might, and which he could not possibly, have used. Yet when some expert replaces a beautiful story, based on the oldest texts we possess, by one which - to me at any rate - no longer makes any sense, then I feel that even an amateur may stand up and defend an old tradition. Thus I will at least look into the expert's arguments, and examine their consistency. This seems a harmless occupation to indulge in; and if an expert or anybody else should take the trouble to refute my criticism I shall be pleased and honoured.󰊓

I shall be concerned with the cosmological theories of the Presocratics, but only to the extent to which they bear upon the development of the problem of change, as I call it, and only to the extent to which they are needed for understanding the approach of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to the problem of knowledge - their practical as well as their theoretical approach. For it is of considerable interest to see how their practice as well as their theory of knowledge is connected with the cosmological and theological questions which they posed to themselves. Theirs was not a theory of knowledge that began with the question, 'How do I know that this is an orange?' or, 'How do I know that the object that I am now perceiving is an orange?' Their theory of knowledge started from problems such as, 'How do we know that the world is made of water?' or, 'How do we know that the world is full of gods?' or, 'How can we know anything about the gods?'

There is a widespread belief, somewhat remotely due, I think, to the influence of Francis Bacon, that one should study the problems of the theory of knowledge in connection with our knowledge of an orange rather than our knowledge of the cosmos. I dissent from this belief, and it is one of the main purposes of my paper to convey to you some of my reasons for dissenting. At any rate it is good to remember from time to time that our Western science - and there seems to be no other - did not start with collecting observations of oranges, but with bold theories about the world.

 

III

 

Traditional empiricist epistemology and the traditional historiography of science are both deeply influenced by the Baconian myth that all science starts from observation and then slowly and cautiously proceeds to theories. That the facts are very different can be learned from studying the early Presocratics. Here we find bold and fascinating ideas, some of which are strange and even staggering anticipations of modern results, while many others are wide of the mark, from our modern point of view; but most of them, and the best of them, have nothing to do with observation. Take for example some of the theories about the shape and position of the earth. Thales said,

 

󰊓 I am glad to be able to report that Mr G. S. Kirk had indeed replied to my address; see below, notes 4 and 5, and the Appendix to this paper.

 

we are told, 'that the earth is supported by water on which it rides like a ship, and when we say that there is an earthquake, then the earth is being shaken by the movement of water'. No doubt Thales had observed earthquakes as well as the rolling of a ship before he arrived at his theory. But the point of his theory was to explain the support or suspension of the earth, and also earthquakes, by the conjecture that the earth floats on water; and for this conjecture (which so strangely anticipates the modern theory of continental drift) he could have had no basis in his observations.

We must not forget that the function of the Baconian myth is to explain why scientific statement are true, by pointing out that observation is the 'true source' of our scientific knowledge. Once we realize that all scientific statements are hypotheses, or guesses, or conjectures, and that the vast majority of these conjectures (including Bacon's own) have turned out to be false, the Baconian myth becomes irrelevant. For it is pointless to argue that the conjectures of science - those which have proved to be false as well as those which are still accepted - all start from observation.

However this may be, Thales' beautiful theory of the support or suspension of the earth and of earthquakes, though in no sense based upon observation, is at least inspired by an empirical or observational analogy. In fact it may be described as counter-observational. According to Anaximander's theory, 'The earth... is held up by nothing, but remains stationary owing to the fact that it is equally distant from all other things. Its shape is... like that of drum... We walk on one of its flat surfaces, while the other is on the opposite side.' The drum, of course, is an observational analogy. But the idea of the earth's free suspension in space, and the explanation of its stability, have no analogy whatever in the whole field of observable facts.

In my opinion this idea of Anaximander's is one of the boldest, most revolutionary, and portentous ideas in the whole history of human thought. It made possible the theories of Aristarchus and Copernicus. But the step taken by Anaximander was even more difficult and audacious than the one taken by Aristarchus and Copernicus. To envisage the earth as freely poised in mid-space, and to say 'that it remains motionless because of its equidistance or equilibrium' (as Aristotle paraphrases Anaximander), is to anticipate to some extent even Newton's idea of immaterial and invisible gravitational forces.󰊔

 

󰊔 Aristotle himself understood Anaximander in this way; for he caricatures Anaximander's 'ingenious but untrue' theory by comparing the situation of its earth to that of a man who, being equally hungry and thirsty yet equidistant from food and drink, is unable to move. (De Caelo, 295b32. The idea has become known by the name 'Buridan's ass'.) Clearly Aristotle conceives this man as being held in equilibrium by immaterial and invisible attractive forces similar to Newtonian forces; and it is interesting that this 'animistic' or 'occult' character of his forces was deeply (though mistakenly) felt by Newton himself, and by his opponents, such as Berkeley, to be a blot on his theory.

 

IV

 

How did Anaximander arrive at this remarkable theory? Certainly not by observation but by reasoning. His theory is an attempt to solve one of the problems to which his teacher and kinsman Thales, the founder of the Milesian or Ionian School, had offered a solution before him. I therefore conjecture that Anaximander arrived at his theory by criticizing Thales' theory. This conjecture can be supported, I believe, by a consideration of the structure of Anaximander's theory.

Anaximander is likely to have argued against Thales' theory (according to which the earth was floating on water) on the following lines. Thales' theory is a specimen of a type of theory which if consistently developed would lead to an infinite regress. If we explain the stable position of the earth by the assumption that it is supported by water - that it is floating on the ocean (Okeanos) - should we not have to explain the stable position of the ocean by an analogous hypothesis? But this would mean looking for a support for the ocean, and then for a support for this support. This method of explanation is unsatisfactory: first, because we solve our problem by creating an exactly analogous one; and also for the less formal and more intuitive reason that in any such system of supports or drops failure to secure any one of the lower props must lead to the collapse of the whole edifice.

From this we see intuitively that the stability of the world cannot be secured by a system of supports or props. Instead Anaximander appeals to the internal or structural symmetry of the world, which ensures that there is no preferred direction in which a collapse can take place. He applies the principle that where there are no differences there can not be change. In this way he explains the stability of the earth by the equality of its distances from all other things.

This, it seems, was Anaximander's argument. It is important to realize that it abolishes, even though not quite consciously perhaps, and not quite consistently, the idea of an absolute direction - the absolute sense of 'upwards' and 'downwards'. This is not only contrary to all experiences but notoriously difficult to grasp. Anaximenes ignored it, it seems, and even Anaximander himself did not grasp it completely. For the idea of an equal distance from all other things should have led him to the theory that the earth has the shape of a globe. Instead he believed that it had the shape of a drum, with an upper and a lower flat surface. Yet it looks as if the remark, 'We walk on one of its flat surfaces, while the other is on the opposite side', contained a hint that there was no absolute upper surface, but that on the contrary the surface on which we happened to walk was the one we might call the upper.

What prevented Anaximander from arriving at the theory that the earth was a globe rather than a drum? There can be little doubt: it was observational experience which taught him that the surface of the earth was, by and large, flat. Thus it was a speculative and critical argument, the abstract critical discussion of Thales' theory, which almost led him to the true theory of the shape of the earth; and it was observational experience which led him astray.

 

V

 

There is an obvious objection to Anaximander's theory of symmetry, according to which the earth is equally distant from all other things, The asymmetry of the universe can be easily seen from the existence of sun and moon, and especially from the fact that sun and moon are sometimes not far distant from each other, so that they are on the same side of the earth, while there is nothing on the other side to balance them. It appears that Anaximander met this objection by another bold theory - his theory of the hidden nature of the sun, the moon, and the other heavenly bodies.

He envisages the rims of two huge chariot wheels rotating round the earth, one 27 times the size of the earth, the other 18 times its size. Each of these rims or circular pipes is filled with fire, and each has a breathing-hole through which the fire is visible. These holes we call the sun and the moon respectively. The rest of the wheel is invisible, presumably because it is dark (or misty) and far away. The fixed stars (and presumably the planets) are also holes on wheels which are nearer to the earth than the wheels of the sun and the moon. The wheels of the fixed stars rotate on a common axis (which we now call the axis of the earth) and together they form a sphere round the earth, so the postulate of equal distance from the earth is (roughly) satisfied. This makes Anaximander also a founder of the theory of the spheres. (For its relation to the wheels or circles see Aristotle, De Caelo, 289b10 to 290b10.)

 

VI

 

There can be no doubt whatever that Anaximander's theories are critical and speculative rather than empirical: and considered as approaches to truth his critical and abstract speculations served him better than observational experience or analogy.

But, a follower of Bacon may reply, this is precisely why Anaximander was not a scientist. This is precisely why we speak of early Greek philosophy rather than of early Greek science. Philosophy is speculative: everybody knows this. And as everybody knows, science begins only when the speculative method is replaced by the observational method, and when deduction is replaced by induction.

This reply, of course, amounts to the thesis that, by definition, theories are (or are not) scientific according to their origin in observation, or in so-called 'inductive procedures'. Yet I believe that few, if any, physical theories would fall under this definition. And I do not see why the question of origin should be important in this connection. What is important about a theory is its explanatory power, and whether it stands up to criticism and to tests. The question of its origin, of how it is arrived at - whether by an 'inductive procedure', as some say, or by an act of intuition - may be extremely interesting, especially for the biographer of the man who invented the theory, but it has little to do with its scientific status or character.

 

VII

 

As to the Presocratics, I assert that there is the most perfect possible continuity of thought between their theories and the later developments in physics. Whether they are called philosophers, or pre-scientists, or scientists, matters very little, I think. But I do assert that Anaximander's theory cleared the way for the theories of Aristarchus, Copernicus, Kepler, and Galileo. It is not that he merely 'influenced' these later thinkers; 'influence' is a very superficial category. I would rather put it like this: Anaximander's achievement is valuable in itself, like a work of art. Besides, his achievement made other achievements possible, among them those of the great scientists mentioned.

But are not Anaximander's theories false, and therefore non-scientific? They are false, I admit; but so are many theories, 'based' upon countless experiments, which modern science accepted until recently, and whose scientific character nobody would dream of denying, even though they are now believed to be false. (An example is the theory that the typical chemical properties of hydrogen belong only to one kind of atom - the lightest of all atoms.) There were historians of science who tended to regard as unscientific (or even as superstitious) any view no longer accepted at the time they were writing, but this is an untenable attitude. A false theory may be as great an achievement as a true one. And many false theories have been more helpful in our search for truth than some less interesting theories which are still accepted. For false theories can be helpful in many ways; they may for example suggest some more or less radical modifications, and they may stimulate criticism. Thus Thales' theory that the earth floats on water reappeared in a modified form in Anaximenes, and in more recent times in the form of Wegener's theory of continental drift. How Thales' theory stimulated Anaximander's criticism has been shown already.
Anaximander's theory, similarly, suggested a modified theory - the theory of an earth globe, freely poised in the centre of the universe, and surrounded by spheres on which heavenly bodies were mounted. And by stimulating criticism it also led to the theory that the moon shines by reflecting light; to the Pythagorean theory of a central fire; and ultimately to the heliocentric world-system of Aristarchus and Copernicus.

 

VIII

 

I believe that the Milesians, like their oriental predecessors who took the world for a tent, envisaged the world as a kind of house, the home of all creatures - our home. Thus there was no need to ask what it was for. But there was a real need to inquire into its architecture. The questions of its structure, its ground-plan, and its building material, constitute the three main problems of Milesian cosmology. There is also a speculative interest in its origin, the question of cosmogony. It seems to me that the cosmological interest of the Milesians far exceeded their cosmogonical interest, especially if we consider the strong cosmogonical tradition, and the almost irresistible tendency to describe a thing by describing how it has been made, and thus to present a cosmological account in a cosmogonical form. The cosmological interest must be very strong, as compared with the cosmogonical one, if the presentation of a cosmological theory is even partially free from these cosmogonical trappings.

I believe that it was Thales who first discussed the architecture of the cosmos - its structure, ground-plan, and building material. In Anaximander we find answers to all three questions. I have briefly mentioned his answer to the question of structure. As to the question of the ground-plan of the world, he studied and expounded this too, as indicated by the tradition that he drew the first map of the world. And of course he had a theory about its building material - the 'endless' or 'boundless' or 'unbounded' or 'unformed' - the 'αperion'.

In Anaximander's world all kinds of changes were going on. There was a fire which needed air and breathing-holes, and these were at times blocked up ('obstructed'), so that the fire was smothered:󰊕 this was his theory of eclipses, and of the phases of the moon. There were winds, which were responsible for the changing weather.󰊖 And there were the vapours, resulting from the drying up of water and air, which were the cause of the winds and of the 'turnings' of the sun (the solstices) and of the moon.

We have here the first hint of what was soon to come: of the general problem of change, which became the central problem of Greek cosmology, and which ultimately led, with Leucippus and Democritus, to a general theory of change that was accepted by modern science almost up to the beginning of the twentieth century. (It was given up only with the breakdown of Maxwell's models of the ether, an historic event that was little noticed before 1905.)

This general problem of change is a philosophical problem; indeed in the hands of Parmenides and Zeno it almost turns into a logical one. How is change possible - logically possible, that is? How can a thing change, without losing its identity? If it remains the same, it does not change; yet if it loses its identity, then it is no longer that thing which has changed.

 

󰊕 I do not suggest that the smothering is due to blocking breathing-in holes: according to the phlogiston theory, for example, fire is smothered by obstructing breathing-out holes. But I do not wish to ascribe to Anaximander either a phlogiston theory of combustion, or an anticipation of Lavoisier.

󰊖 In my address, as it was originally published, I continued here 'and indeed for all other changes within the cosmic edifice', relying on Zeller who wrote (appealing to the testimony of Aristotle’ Meteor. 353b6): 'Anaximander, it seems, explained the motion of the heavenly bodies by the currents of the air which are responsible for the turning of the stellar spheres.' (Phil. d. Griechen, 5th edn., vol. I, 1892, p. 223; see also p. 220, n. 2; Heath, Aristarchus, 1913, p. 33; and Lee's edition of the Meteorologica, 1952, p. 125.) But I should perhaps not have interpreted Zeller's 'currents of air' as 'winds', especially as Zeller should have said 'vapours' (they are evaporations resulting from a process of drying up). I have twice inserted 'vapours and' before 'winds', and 'almost' before 'all' in the second paragraph of section ix; and I have replaced, in the third paragraph of section ix, 'winds' by 'vapours'. I have made these changes in the hope of meeting Mr G. S. Kirk's criticism on p. 332 of his article (discussed in the appendix to the present chapter).

 

IX

 

The exciting story of the development of the problem of change appears to me in danger of being completely buried under the mounting heap of minutiae of textual criticism. The story cannot, of course, be fully told in one short paper, and still less in one of its many sections. But in briefest outline, it is this.

For Anaximander, our own world, our own cosmic edifice, was only one of an infinity of worlds - an infinity without bounds in space and time. This system of worlds was eternal, and so was motion. There was thus no need to explain motion, no need to offer a general theory of change (in the sense in which we shall find a general problem and a general theory of change in Heraclitus; see below). But there was a need to explain the well-known changes occurring in our world. The most obvious changes - the change of day and night, of winds and of weather, of the seasons, from sowing to harvesting, and of the growth of plants and animals and men - all were connected with the contrast of temperatures, with the opposition between the hot and cold, and with that between the dry and the wet. 'Living creatures came into being from moisture evaporated by the sun', we are told; and the hot and the cold also administer to the genesis of our own world edifice. The hot and cold were also responsible for the vapours and winds which in their turn were conceived as the agents of almost all other changes.

Anaximenes, a pupil of Anaximander and his successor, developed these ideas in much detail. Like Anaximander he was interested in the oppositions of the hot and the cold and of the moist and the dry, and he explained the transitions between these opposites by a theory of condensation and rarefaction. Like Anaximander he believed in eternal motion and in the action of the winds; and it seems not unlikely that one of the two main points in which he deviated from Anaximander was reached by a criticism of the idea that what was completely boundless and formless (the αperion) could yet be in motion. At any rate, he replaced the αperion by air - something that was almost boundless and formless, and yet, according to Anaximander's old theory of vapours, not only capable of motion, but the main agent of motion and change. A similar unification of ideas was achieved by Anaximenes' theory that 'the sun consists of earth, and that it gets very hot owing to the rapidity of its motion'. The replacement of the more abstract theory of the unbounded αperion by the less abstract and more commonsense theory of air is matched by the replacement of Anaximander's bold theory of the stability of the earth by the more commonsense idea that the earth's 'flatness is responsible for its stability; for it... covers like a lid the air beneath it'. Thus the earth rides in air as the lid of a pot may ride on steam, or as a ship may ride on water; Thales' question and Thales' answer are both re-instituted, and Anaximander's epoch-making argument is not understood. Anaximenes is an eclectic, a systematizer, an empiricist, a man of common sense. Of the three great Milesians he is least productive of revolutionary new ideas; he is the least philosophically minded.

The three Milesians all looked on our world as our home. There was movement, there was change in this home, there were hot and cold, fire and moisture. There was a fire in the hearth, and on it a kettle with water. The house was exposed to the winds, and a bit draughty, to be sure; but it was home, and it meant security and stability of a sort. But for Heraclitus the house was on fire.

There was no stability left in the world of Heraclitus. 'Everything is in flux, and nothing is at rest.' Everything is in flux, even the beams, the timber, the building material of which the world is made: earth and rocks, or the bronze of a cauldron - they are all in flux. The beams are rotting, the earth is washed away and blown away, the very rocks split and wither, the bronze cauldron turns into green patina, or into verdigris: 'All things are in motion all the time, even though... this escapes our senses', as Aristotle expressed it. Those who do not know and do not think believe that only the fuel is burned, while the bowl in which it burns (cp. DK, A 4) remains unchanged; for we do not see the bowl burning. And yet it burns; it is eaten up by the fire it holds. We do not see our children growing up, and change, and grow old, but they do.

Thus there are no solid bodies. Things are not really things, they are processes, they are in flux. They are like fire, like a flame which, though it may have a definite shape, is a process, a stream of matter, a river. All things are flames: fire is the very building material of our world; and the apparent stability of things is merely due to the laws, the measures, which the processes in our world are subject to.

This, I believe, is Heraclitus' story; it is his 'message', the 'true word' (the logos), to which we ought to listen: 'Listening not to me but to the true account, it is wise to admit that all things are one': they are 'an everlasting fire, flaring up in measures, and dying down in measures'.

I know very well that the traditional interpretation of Heraclitus' philosophy here restated is not generally accepted at present. But the critics have put nothing in its place - nothing, that is, of philosophical interest. I shall briefly discuss their new interpretation in the next section. Here I wish only to stress that Heraclitus' philosophy, by appealing to thought, to the word, to argument, to reason, and by pointing out that we are living in a world of things whose changes escape our senses, though we know that they do change, created two new problems - the problem of change and the problem of knowledge. These problems were the more urgent as his own account of change was difficult to understand. But this, I believe, is due to the fact that he saw more clearly than his predecessors the difficulties that were involved in the very idea of change.

For all change is the change of something: change presupposes something that changes. And it presupposes that, while changing, this something must remain the same. We may say that a green leaf changes when it turns brown; but we do not say that the green leaf changes when we substitute for it a brown leaf. It is essential to the idea of change that the thing which changes retains its identity while changing. And yet it must become something else: it was green, and it becomes brown; it was moist, and it becomes dry; it was hot, and it becomes cold.

Thus every change is the transition of a thing into something with, in a way, opposite qualities (as Anaximander and Anaximenes had seen). And yet, while changing, the changing thing must remain identical with itself.

This is the problem of change. It led Heraclitus to a theory which (partly anticipating Parmenides) distinguishes between reality and appearance. 'The real nature of things loves to hide itself. And unapparent harmony is stronger than the apparent one.' Things are in appearance (and for us) opposites, but in truth (and for God) they are the same.

 

'Life and death, being awake and being asleep, youth and old age, all these are the same... for the one turned round is the other and the other turned round is the first.... The path that leads up and the path that leads down are the same path.... Good and bad are identical... for God all things are beautiful and good and just, but men assume some things to be unjust, and others to be just.... It is not in the nature or character of man to possess true knowledge, though it is in the divine nature.'

 

Thus in truth (and for God) the opposites are identical; it is only to man that they appear as non-identical. And all things are one - they are all part of the process of the world, the everlasting fire.

This theory of change appeals to the 'true world', to the logos, to reason; nothing is more real for Heraclitus than change. Yet his doctrine of the oneness of the world, of the identity of opposites, and of appearances and reality threatens his doctrine of the reality of change.

For change is the transition from one opposite to the other. Thus if in truth the opposites are identical, though they appear different, then change itself might be only apparent. If in truth, and for God, all things are one, there might, in truth, be no change.

This consequence was drawn by Parmenides, the pupil (pace Burnet and others) of the monotheist Xenophanes who said of the one God: 'He always remains in the same place, never moving. It is not fitting that He should go to different places at different times... He is in no way similar to mortal men, neither in body nor in thought.'

Xenophanes' pupil Parmenides taught that the real world was one, and that it always remained in the same place, never moving. It was not fitting that it should go to different places at different times. It was in no way similar to what it appeared to be to mortal men. The world was one, and undivided whole, without parts, homogeneous and motionless: motion was impossible in such a world. In truth there was no change. The world of change was an illusion.

Parmenides based this theory of an unchanging reality on something like a logical proof; a proof which can be presented as proceeding from the single premiss, 'What is not is not'. From this we can derive that the nothing - that which is not - does not exist; a result which Parmenides interprets to mean that void does not exist. Thus the world is full: it consists of one undivided block, since any division into parts could only be due to separation of the parts by the void. (This is 'the well-rounded truth' which the goddess revealed to Parmenides.) In this full world there is no room for motion.

Only the delusive belief in the reality of opposites - the belief that not only what is exists but also what is not - leads to the illusion of a world of change.

Parmenides' theory may be described as the first hypothetico-deductive theory of the world. The atomists took it as such; and they asserted that it was refuted by experience, since motion does exist. Accepting the formal validity of Parmenides' argument, they inferred from the falsity of his conclusion the falsity of his premiss. But this meant that the nothing - the void, or empty space - existed. Consequently there was now no need to assume that 'what is' - the full, that which fills some space - had no parts; for its parts could now be separated by the void. Thus there are many parts, each of which is 'full': there are full particles in the world, separated by empty space, and able to move in empty space, each of them being 'full', undivided, indivisible, and unchanging. Thus what exists is atoms and the void. In this way the atomists arrived at a theory of change - a theory that dominated scientific thought until 1900. It is the theory that all change, and especially all qualitative change, has to be explained by the spatial movement of unchanging bits of matter - by atoms moving in the void.

The next great step in our cosmology and the theory of change was made when Maxwell, developing certain ideas of Faraday's, replaced this theory by a theory of changing intensities of fields.

 

X

 

I have sketched the story, as I see it, of the Presocratic theory of change. I am of course well aware of the fact that my story (which is based on Plato, Aristotle, and the doxographic tradition) clashes at many points with the views of some experts, English as well as German, and especially with the views expressed by G. S. Kirk and J. E. Raven in their book,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1957. I cannot of course examine their arguments in detail here, and especially not their minute exegeses of various passages some of which are relevant to the differences between their interpretation and mine. (See, for example, Kirk and Raven's discussion of the question whether there is a reference to Heraclitus in Parmenides; cf. their note 1 on pp. 193 f., and note 1 on p. 272.) But I wish to say that I have examined their arguments and that I have found them unconvincing and often quite unacceptable.

I will mention here only some points regarding Heraclitus (although there are other points of equal importance, such as their comments on Parmenides).

The traditional view, according to which Heraclitus' central doctrine was that all things are in flux, was attacked forty years ago by Burnet. His main argument (discussed by me at length in note 2 to ch. 2 of my Open Society) was that the theory of change was not new, and that only a new message could explain the urgency with which Heraclitus speaks. This argument is repeated by Kirk and Raven when they write (pp. 186 f.): 'But all Presocratic thinkers were struck by the predominance of change in the world of our experience.' About this attitude I said in my Open Society: 'Those who suggest... that the doctrine of universal flux was not new... are, I feel, unconscious witnesses to Heraclitus' originality, for they fail now, after 2,400 years, to grasp his main point.' In brief, they do not see the difference between the Milesian message, 'There is a fire in the house', and Heraclitus' somewhat more urgent message, 'The house is on fire'. An implicit reply to this criticism can be found on p. 197 of the book by Kirk and Raven, where they write: 'Can Heraclitus really have thought that a rock or a bronze cauldron, for example, was invariably undergoing invisible changes of material? Perhaps so; but nothing in the extant fragments suggests that he did.' But is this so? Heraclitus' extant fragments about the fire (Kirk and Raven, fragm. 220-2) are interpreted by Kirk and Raven themselves as follows (p. 200): 'Fire is the archetypal form of matter.' Now I am not at all sure what 'archetypal' means here (especially in view of the fact that we read a few lines later, 'Cosmogony... is not to be found in Heraclitus'). But whatever 'archetypal' may mean, it is clear that once it is admitted that Heraclitus says in the extant fragments that all matter is somehow (whether archetypally or otherwise) fire, he also says that all matter, like fire, is a process; which is precisely the theory denied to Heraclitus by Kirk and Raven.

Immediately after saying that 'nothing in the extant fragments suggests' that Heraclitus believed in continuous invisible changes, Kirk and Raven make the following methodological remark: 'It cannot be too strongly emphasized that [in texts] before Parmenides and his apparent proof that the senses were completely fallacious... gross departures from common sense must only be accepted when the evidence for them is extremely strong.' This is intended to mean that the doctrine that bodies (of any substance) constantly undergo invisible changes represents a gross departure from common sense, a departure which one ought not to expect in Heraclitus.

But to quote Heraclitus: 'He who does not expect the unexpected will not detect it: for him it will remain undetectable, and unapproachable' (DK, B 18). In fact Kirk and Raven's last argument is invalid on many grounds. Long before Parmenides we find ideas far removed from common sense in Anaximander, Pythagoras, Xenophanes, and especially in Heraclitus. Indeed the suggestion that we should test the historicity of those ascribed to Heraclitus - as we might indeed test the historicity of those ascribed to Anaximenes - by standards of 'common sense' is a little surprising (whatever 'common sense' may mean here). For this suggestion runs counter not only to Heraclitus' notorious obscurity and oracular style, confirmed by Kirk and Raven, but also to his burning interest in antinomy and paradox (이 문장에서 분사구문 confirmed by Kirk and Raven은 앞에 쉼표 없이 앞의 Heraclitus' notorious obscurity and oracular style을 수식해야 한다. 쉼표를 그냥두면 this suggestion을 수식하게 되어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 분사구문의 문법적 오류이다. - 역자 주). And it runs counter, last but not least, to the (in my view quite absurd) doctrine which Kirk and Raven finally attribute to Heraclitus (the italics are mine): '... that natural changes of all kinds [and thus presumably also earthquakes and great fires] are regular and balanced, and that the cause of this balance is fire, the common constituent of things that was also termed their logos.' But why, I ask, should fire be 'the cause' of any balance - either 'this balance' or any other? And where does Heraclitus say such things? Indeed, had this been Heraclitus' philosophy, then I could see no reason to take any interest in it; at any rate, it would be much further removed from common sense (as I see it) than the inspired philosophy which tradition ascribes to Heraclitus and which, in the name of common sense, is rejected by Kirk and Raven.

But the decisive point is, of course, that this inspired philosophy is true, for all we know.󰊗 With his uncanny intuition Heraclitus saw that things are processes, that our bodies are flames, that 'a rock or a bronze cauldron... was invariably undergoing invisible changes'. Kirk and Raven say (p. 197, note 1; the argument reads like an answer to Melissus): 'Every time the finger rubs, it rubs off an invisible portion of iron; yet when it does not rub, what reason is there to think that the iron is still changing?' The reason is that the wind rubs, and that there is always wind; or that iron turns invisibly into rust - by oxidation, and this means by slow burning; or that old iron looks different from new iron, just as an old man looks different from a child (cp. DK, B 88). This was Heraclitus' teaching, as the extant fragments show.

I suggest that Kirk and Raven's methodological principle 'that gross departures from common sense must only be accepted when the evidence for them is extremely strong' might well be replaced by the clearer and more important principle that gross departures from the historical tradition must only be accepted when the evidence for them is extremely strong. This, in fact, is a universal principle of historiography. Without it history would be impossible. Yet it is constantly violated by Kirk and Raven: when, for example, they try to make Plato's and Aristotle's evidence suspect, with arguments which are partly circular and partly (like the one from common sense) in contradistinction to their own story. And when they say that 'little serious attempt seems to have been made by Plato and Aristotle to penetrate his [i. e. Heraclitus'] real meaning' then I can only say that the philosophy outlined by Plato and Aristotle seems to me a philosophy that has real meaning and real depth. It is a philosophy worthy of a great philosopher. Who, if not Heraclitus, was the great thinker who first realized that men are flames and that things are processes? Are we really to believe that this great philosophy was a 'post-Heraclitean exaggeration' (p. 197), and that it may have been suggested to Plato, 'in particular, perhaps, by Cratylus'? Who, I ask, was this unknown philosopher - perhaps the greatest and the boldest thinker among the Presocratics? Who was he, if not Heraclitus?

 

XI

 

The early history of Greek philosophy, especially the history from

 

󰊗 This should establish that it makes sense, at any rate. I hope it is clear from the text that I appeal to truth here in order (α) to make clear that my interpretation at least makes sense, and (b) to refute the arguments of Kirk and Raven (discussed later in this paragraph) that the theory is absurd. An answer to G. S. Kirk which was too long to be appended here (although it refers to the present passage and to the present paragraph) will be found in the Appendix at the end of this paper.

 

Thales to Plato, is a splendid story. It is almost too good to be true. In every generation we find at least one new philosophy, one new cosmology of staggering originality and depth. How was this possible? Of course one cannot explain originality and genius. But one can try to throw some light on them. What was the secret of the ancients? I suggest that it was a tradition - the tradition of critical discussion.

I will try to put the problem more sharply. In all or almost all civilizations we find something like religious and cosmological teaching, and in many societies we find schools. Now schools, especially primitive schools, all have, it appears, a characteristic structure and function. Far from being places of critical discussion they make it their task to impart a definite doctrine, and to preserve it, pure and unchanged. It is the task of a school to hand on the tradition, the doctrine of its founder, its first master, to the next generation, and to this end the most important thing is to keep the doctrine inviolate. A school of this kind never admits a new idea. New ideas are heresies, and lead to schism; should a member of the school try to change the doctrine, then he is expelled as a heretic. But the heretic claims, as a rule, that his is the true doctrine of the founder. Thus not even the inventor admits that he has introduced an invention; he believes, rather, that he is returning to the true orthodoxy which has somehow been perverted.

In this way all changes of doctrine - if any - are surreptitious changes. They are all presented as re-statements of the true sayings of the master, of his own words, his own meaning, his own intentions.

It is clear that in a school of this kind we cannot expect to find a history of ideas, or even the material for such a history. For new ideas are not admitted to be new. Everything is ascribed to the master. All we might reconstruct is a history of schisms, and perhaps a history of the defence of certain doctrines against the heretics.

There cannot, of course, be any rational discussion in a school of this kind. There may be arguments against dissenters and heretics, or against some competing schools. But in the main it is with assertion and dogma and condemnation rather than argument that the doctrine is defended.

The great example of a school of this kind among the Greek philosophical schools is the Italian School founded by Pythagoras. Compared with the Ionian school, or with that of Elea, it had the character of a religious order, with a characteristic way of life and a secret doctrine. The story that a member, Hippasus of Metapontum, was drowned at sea because he revealed the secret of the irrationality of certain square roots, is characteristic of the atmosphere surrounding the Pythagorean school, whether or not there is any truth in this story.

But among Greek philosophic schools, the early Pythagoreans were an exception. Leaving them aside, we could say that the character of Greek philosophy, and of the philosophical schools, is strikingly different from the dogmatic type of school here described. I have shown this by an example: the story of the problem of change which I have told is the story of a critical debate, of a rational discussion. New ideas are propounded as such, and arise as the result of open criticism. There are few, if any, surreptitious changes. Instead of anonymity we find a history of ideas and of their originators.

Here is a unique phenomenon, and it is closely connected with the astonishing freedom and creativeness of Greek philosophy. How can we explain this phenomenon? What we have to explain is the rise of a tradition. It is a tradition that allows or encourages critical discussions between various schools and, and more surprisingly still, within one and the same school. For nowhere outside the Pythagorean school do we find a school devoted to the preservation of a doctrine. Instead we find changes, new ideas, modifications, and outright criticism of the master.

(In Parmenides we even find, at an early date, a most remarkable phenomenon - that of a philosopher who propounds two doctrines, one which he says is true, and one which he himself describes as false. Yet he makes the false doctrine not simply an object of condemnation or of criticism; rather he presents it as the best possible account of the delusive opinion of mortal men, and of the world of mere appearance - the best account which a mortal man can give.)

How and where was this critical tradition founded? This is a problem deserving serious thought. This much is certain: Xenophanes who brought the Ionian tradition to Elea was fully conscious of the fact that his own teaching was purely conjectural, and that others might come who would know better. I shall come back to this point again in my next and last section.

If we look for the first signs of this new critical attitude, this new freedom of thought, we are led back to Anaximander's criticism of Thales. Here is a most striking fact: Anaximander criticizes his master and kinsman, one of the Seven Sages, the founder of the Ionian school. He was, according to tradition, only about fourteen years younger than Thales, and he must have developed his criticism and his new ideas while his master was alive. (They seem to have died within a few years of each other.) But there is no trace in the sources of a story of dissent, of any quarrel, or of any schism.

This suggest, I think, that it was Thales who founded the new tradition of freedom - based upon a new relation between master and pupil - and who thus created a new type of school, utterly different from the Pythagorean school. He seems to have been able to tolerate criticism. And what is more, he seems to have created the tradition that one ought to tolerate criticism.

Yet I like to think that he did even more than this. I can hardly imagine a relationship between master and pupil in which the master merely tolerates criticism without actively encouraging it. It does not seem to me possible that a pupil who is being trained in the dogmatic attitude would ever dare to criticize the dogma (least of all that of a famous sage) and to voice his criticism. And it seems to me an easier and simpler explanation to assume that the master encouraged a critical attitude - possibly not from the outset, but only after he was struck by the pertinence of some questions asked, by the pupils perhaps, without any critical intention.

However this may be, the conjecture that Thales actively encouraged criticism in his pupils would explain the fact that the critical attitude towards the master's doctrine became part of the Ionian school tradition. I like to think that Thales was the first teacher who said to his pupils: 'This is how I see things - how I believe that things are. Try to improve upon my teaching.' (Those who believe that it is 'unhistorical' to attribute this undogmatic attitude to Thales may again be reminded of the fact that only two generations later we find a similar attitude consciously and clearly formulated in the fragments of Xenophanes.) At any rate, there is the historical fact that the Ionian school was the first in which pupils criticized their masters, in one generation after the other. There can be little doubt that the Greek tradition of philosophical criticism had its main source in Ionia.

It was a momentous innovation. It meant a break with the dogmatic tradition which permits only one school doctrine, and the introduction in its place of a tradition that admits a plurality of doctrines which all try to approach the truth by means of critical discussion.

It thus leads, almost by necessity, to the realization that our attempts to see and to find the truth are not final, but open to improvement; that our knowledge, our doctrine, is conjectural; that it consists of guesses, of hypotheses, rather than of final and certain truths; and that criticism and critical discussion are our only means of getting nearer to the truth. It thus leads to the tradition of bold conjectures and of free criticism, the tradition which created the rational or scientific attitude, and with it our Western civilization, the only civilization which is based upon science (though of course not upon science alone).

In this rationalist tradition bold changes of doctrine are not forbidden. On the contrary, innovation is encouraged, and is regarded as success, as improvement, if it is based on the result of a critical discussion of its predecessors. The very boldness of an innovation is admired; for it can be controlled by the severity of its critical examination. This is why changes of doctrine, far from being made surreptitiously, are traditionally handed down together with the older doctrines and the names of the innovators. And the material for a history of ideas becomes part of the school tradition.

To my knowledge the critical or rationalist tradition was invented only once. It was lost after two or three centuries, perhaps owing to the rise of the Aristotelian doctrine of epistēmē, of certain and demonstrable knowledge (a development of the Eleatic and Heraclitean distinction between certain truth and mere guesswork). It was rediscovered and consciously revived in the Renaissance, especially by Galileo Galilei.

 

XII

 

I now come to my last and most central contention. It is this. The rationalist tradition, the tradition of critical discussion, represents the only practicable way of expanding our knowledge - conjectural or hypothetical knowledge, of course. There is no other way. More especially, there is no way that starts from observation or experiment. In the development of science observations and experiments play only the role of critical arguments. And they play this role alongside other, non-observational arguments. It is an important role; but the significance of observations and experiments depends entirely upon the question whether or not they may be used to criticize theories.

According to the theory of knowledge here outlined there are in the main only two ways in which theories may be superior to others: they may explain more; and they may be better tested - that is, they may be more fully and more critically discussed, in the light of all we know, of all the objections we can think of, and especially also in the light of observational or experimental tests which were designed with the aim of criticizing the theory.

There is only one element of rationality in our attempts to know the world: it is the critical examination of our theories. These theories themselves are guesswork. We do not know, we only guess. If you ask me, 'How do you know?' my reply would be, 'I don't; I only propose a guess. If you are interested in my problem, I shall be most happy if you criticize my guess, and if you offer counter-proposals, I in turn will try to criticize them.'

This, I believe, is the true theory of knowledge (which I wish to submit for your criticism): the true description of a practice which arose in Ionia and which is incorporated in modern science (though there are many scientists who still believe in the Baconian myth of induction): the theory that knowledge proceeds by way of conjectures and refutations.

Two of the greatest men who clearly saw that there was no such thing as an inductive procedure, and who clearly understood what I regard as the true theory of knowledge, were Galileo and Einstein. Yet the ancients also knew it. Incredible as it sounds, we find a clear recognition and formulation of this theory of rational knowledge almost immediately after the practice of critical discussion had begun. Our oldest extant fragments in this field are those of Xenophanes. I will present here five of them in an order that suggests that it was the boldness of his attack and the gravity of his problems which made him conscious of the fact that all our knowledge was guesswork, yet that we may nevertheless, by searching for that knowledge 'which is the better', find it in the course of time. Here are the five fragments (DK, B 16 and 15; 18; 35; and 34) from Xenophanes' writings.

 

The Ethiops say that their gods are flat-nosed and black

While the Thracians say that theirs have blue eyes and red hair.

 

Yet if cattle or horses or lions had hands and could draw

And could sculpture like men, then the horses would draw their

gods

Like horses, and cattle like cattle, and each would then shape

Bodies of gods in the likeness, each kind, of its own.

 

The gods did not reveal, from the beginning,

All things to us; but in the course of time,

Through seeking we may learn, and know things better...

These things are, we conjecture, like the truth.

 

But as for certain truth, no man has known it,

Nor will he know it; neither of the gods,

Nor yet of all the things of which I speak.

And even if perchance he were to utter

The final truth, he would himself not know it:

For all is but a woven web of guesses.

 

To show that Xenophanes was not alone I may also repeat here two of Heraclitus' saying (DK, B 78 and 18) which I have quoted before in a different context. Both express the conjectural character of human knowledge, and the second refers to its daring, to the need to anticipate boldly what we do not know.

 

It is not in the nature or character of man to possess true knowledge, though it is in the divine nature... He who does not expect the unexpected will not detect it: for him it will remain undetectable, and unapproachable.

 

My last quotation is a very famous one from Democritus (DK, B 117):

 

But in fact, nothing do we know from having seen it; for the truth is hidden in the deep.

 

This is how the critical attitude of the Presocratics foreshadowed, and prepared for, the ethical rationalism of Socrates: his belief that the search for truth through critical discussion was a way of life - the best he knew.

 

 

 

 

 

 

APPENDIX: HISTORICAL CONJECTURE

AND HERACLITUS ON CHANGE

 

In an article entitled 'Popper on Science and the Presocratics' (Mind, NS. 69, July 1960, pp. 318 to 339), Mr G. S. Kirk has responded to a challenge, and to a criticism, which formed part of my presidential address to the Aristotelian Society 'Back to the Presocratics'. Mr Kirk's article is not, however, mainly devoted to the task of replying to my criticism. It is, largely, devoted to another task: it tries to explain how and why I am the victim of a fundamentally mistaken 'attitude to scientific methodology' which has made me come forward with mistaken assertions about the Presocratics and with mistaken principles of historiography.

A counter-attack of this kind might, to be sure, have its intrinsic merits and interest. And the fact that Mr Kirk has adopted this procedure shows at any rate that he and I agree at least on two

 

This appendix, a reply to Mr Kirk's article in Mind, was published in part under the title 'Kirk on Heraclitus, and on Fire as the Cause of Balance', in Mind, N.S. 72, July 1963, pp. 386-92. I wish to thank the editor of Mind for his permission to publish here the whole article as originally submitted to him. (In the second and some later editions of this book I have made some additions to this Appendix.)

 

points: that the fundamental issue between us is a philosophical one; and that the philosophical attitude we adopt can have a decisive influence on our interpretation of the historical evidence - such as, for example, the evidence concerning the Presocratics.

Now Mr Kirk does not accept my general philosophical attitude any more than I do his. Thus he rightly feels that he should give reasons for rejecting mine.

I do not think that he has offered any reason for rejecting my views; simply because Mr Kirk's views on what he believes to be my views, and the devastating conclusions he draws from these views, are unrelated to my actual views, as I shall show.

There is another difficulty. The method of counter-attack which he has adopted has its own peculiar drawback: it does not seem to lend itself easily to furthering the discussion of the definite points of criticism made in my address. Kirk does not, for instance, state very clearly which of my points he accepts (for he does accept some) and which he rejects; instead, acceptance and rejection are submerged in a general rejection of what he believes to be my 'attitude to scientific methodology', and of some of the consequences of this imaginary attitude.

 

1

 

My first task will be to give some evidence for my allegation that Kirk's treatment of my 'attitude to scientific methodology' is largely based upon misunderstandings and misreadings of what I have written, and upon popular inductivist misconceptions about natural science, which were fully discussed and dismissed in my book,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L. Sc. D.).

Kirk rightly presents me as an opponent of the widely accepted dogma of inductivism - of the view that science starts from observation and proceeds, by induction to generalizations, and ultimately to theories. But he is mistaken in believing that, since I am an opponent of induction, I must be an adherent of intuition, and that my approach must be due to an attempt to defend an intuitionist philosophy, which he calls 'traditional philosophy', against modern empiricism. For although I do not believe in induction, I do not believe in intuition either. Inductivists are inclined to think that intuition is the only alternative to induction. But they are simply mistaken: there are other possible approaches besides these two. And my own view may be fairly described as critical empiricism.

But Kirk ascribes to me an almost Cartesian intuitionism when he presents the situation as follows (p. 319): 'Philosophy of the traditional type had assumed that philosophical truths were metaphysical in content and could be apprehended by intuition. The positivist of the Vienna Circle denied this. In disagreeing with them Popper was asserting his belief in something not far distant from the classical conception of the role of philosophy.' Whatever one may say about this, there certainly exists a 'traditional philosophy' - that of Descartes or Spinoza, for example - which treats 'intuition' as a source of knowledge; but I have always opposed this philosophy.󰊓 From this passage on, Kirk writes 'intuition', in the sense in which he uses it here, several times in quotes (pp. 320, 321, 322, 327) and several times out of quotes (pp. 318, 319, 320, 324, 327, 332, 337), yet always apparently under the impression - and certainly creating the impression - that he is citing me when ascribing to me intuitionist views; views which I have never held in my life. In fact, the only time the word 'intuition' occurs in my address,󰊔 it is used in a context which is anti-inductivist and anti-intuitionist at the same time. For I write there (p. 7; this volume p. 140) about the problem of the scientific character of a theory (italics not in the original): 'What is important about a theory is its explanatory power, and whether it stands up to criticism and to tests. The question of its origin, of how it is arrived at - whether by an 'inductive procedure', as some say, or by an act of intuition - ... has little to do with its scientific [status or] character.'󰊕

Now Kirk quotes this passage and discusses it. But the undeniable fact that this passage indicates that I am a believer in neither induction nor intuition does not prevent him from constantly ascribing to me intuitionist views. He does so, for example, in the passage on p. 319 quoted above; or on p. 324, when he discusses the question whether to accept my alleged 'premise that science starts from intuitions' (while I say it starts from problems; see below); or on pp. 326 f. when he writes: 'Are we therefore to infer with Popper that Thales's theory must have been based on a non-empirical intuition?‘

Now my own view is very different from all this. As to the starting point of science, I do not say that science starts from intuitions but that it starts from problems; that we arrive at a new theory, in the main, by trying to solve problems; that these problems arise in our attempts to understand the world as we know it - the world of our 'experience' (where 'experience' consists largely of expectations or theories and partly also of observational knowledge - although I happen to believe that there does not exist anything like pure observational knowledge, untainted by expectations or theories). A few of these problems - and some of the most interesting ones - arise from the conscious criticism of theories uncritically accepted hitherto, or from the conscious criticism of the theory of a predecessor. One of the main things I set out to do in my paper on the Presocratics was to suggest that Anaximander's theory may well have originated in an attempt to criticize Thales; and that this may well have been the origin of the rationalist tradition, which I identify with the tradition of critical discussion.

 

󰊓 Kirk quotes on p. 322 my L. Sc. D., p 32, but a reading of what precedes my reference there to Bergson will show that my admission that every discovery contains (among other elements) 'an irrational element' or a 'creative intuition' is neither irrationalist nor intuitionist in the sense of any 'traditional philosophy'. See also my Introduction to the present volume, 'On the Sources of Knowledge of Ignorance', especially pp. 28 ff.

󰊔 There are also casual occurrences such as 'uncanny intuition', 'less formal and more intuitive reasons' and 'From this we see intuitively', on pp. 17 and 5 (this volume, pp. 148 and 139). In all cases the word is used in a non-technical and almost deprecatory sense.

󰊕 The two words in square brackets have now been added by me in order to make my meaning still more obvious.

 

I do not think that a view of this kind has much similarity to traditional intuitionistic philosophy. And I was surprised to find that Kirk suggested that my mistaken approach might be explained as that of a speculative philosopher not sufficiently intimately acquainted with scientific practice; he suggests for example on p. 320: 'It seems possible that his [Popper's] view of science was not the result of an initial objective observation of how scientists proceed, but was itself, in an early application of Popper's developed theory, an "intuition" closely related to current philosophical difficulties and subsequently compared with actual scientific procedure.'󰊖 (I should have thought that even a reader who knows very little about science might have noticed that some at least of my problems originated within the physical sciences themselves, and that my own acquaintance with scientific practice and research was not wholly second-hand.)

The kind of critical discussion I have in mind is, of course, a discussion in which experience plays a major role: observation and experiment are constantly appealed to as tests of our theories. Yet Kirk surprisingly goes so far (p. 332; italics mine) as to speak of 'Popper's thesis that all scientific theories are entirely based on intuitions'.

Like most philosophers I am quite used to seeing my views distorted and caricatured. But this is hardly a caricature (which must always rely on a recognizable similarity to the original). I may remark that none of my empiricist and positivist friends, opponents, and critics, has ever criticized me for holding or for reviving an intuitionist epistemology, and that, on the contrary, they usually say that my epistemology does not significantly deviate from theirs.

It will be seen from the foregoing that Kirk offers several conjectures, not only about the content of my philosophy, but also about its origin. But he does not seem to be aware of the conjectural character of these constructions. On the contrary, he believes that he has some textual evidence for them. For he says of me that my 'own attitude of scientific methodology... was formed as he[Popper] writes in the 1958 preface to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in reaction against the attempts of the Vienna Circle to base all philosophical [sic] and scientific truth upon verification by experience' (Kirk, p. 319). I need not comment here on this mistaken description of the Wittgensteinian philosophy of the Vienna Circle. But since it is a historian of philosophy who writes here about what I have written, I feel I must nip in the bud a historical myth about what I have written. For in the preface to which Kirk refers, I do not say a word about how I formed my views or my attitude; nor do I say a word about the Vienna Circle. Indeed, I could not have written anything resembling Kirk's account, because the facts are otherwise. (Part of the story, first published in 1957, Mr Kirk might have found in a Cambridge lecture of mine, now in this volume under the title 'Science: Conjectures and Refutations', in which I tell how I developed my 'attitude... in reacting against the attempts of' Marx, Freud, and

 

󰊖 It is Kirk who puts the word 'intuition' in quotes, thereby suggesting that it is I who use 'intuition' in this sense.

 

Adler, none of whom was either a positivist or member of the Vienna Circle.) It seems unlikely that it was the Heraclitean obscurity of my style which caused this quite inexplicable misreading by Mr Kirk, for in comparing it with 'Back to the Presocratics' he describes (p. 318) the same 1958 preface to which his above quoted passage refers as 'a more lucid statement'.

Another example of misreading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is equally inexplicable - at least for anybody who had read the book as far as p. 61 (not to mention pp. 274 or 276) where I refer to the problem of truth, and to Alfred Taski's theory of truth. Kirk says that 'Popper abandons the concept of absolute scientific truth' (p. 320). He does not seem to see that, when I say that we cannot know, even of a well-corroborated scientific theory, whether or not it is true, I am actually assuming a 'concept of absolute scientific truth'; just as somebody who says 'I did not succeed in reaching the winning post' operates with an 'absolute concept of a winning post' - that is, one whose existence is assumed independently of its being reached.

It is surprising to find these obvious misunderstandings, and these occasional misquotations, in a paper by an outstanding scholar and historian of philosophy. They make a philosophical defence of my real views about science unnecessary.

 

II

 

Thus I may now turn to something more to the point - to the history of the Presocratics. In this section I shall confine myself to straightening out two of Kirk's mistakes concerning my historical method, and my views on historical method. In section III I will deal with our real disagreements.

(1) Kirk discusses on p. 325 a remark of mine which I made in order to disclaim any competence regarding such matters as text emendation. The passage he quotes reads: 'I am completely out of my depth when an expert begins to argue what words or phrases Heraclitus might have used, and what words or phrases he could not possibly have used.‘

Commenting on this disclaimer of competence, Kirk exclaims: 'As though "what words or phrases Heraclitus might have used", for example, is irrelevant to the assessment of what he thought!'

But I never said or suggested that these matters are 'irrelevant'. I merely confessed that I had not studied the linguistic usages of Heraclitus (and others) sufficiently deeply to feel myself equipped to discuss the work done in this field by such scholars as, say, Burnet or Diels or Reinhardt, and, more recently, Vlastos or Kirk himself.

Yet Kirk goes on to say that

 

'It is these ”words and phrases“, and other verbatim fragments of the Presocratics themselves, and not the reports of Plato, Aristotle, and the doxographers, as Popper appears to think, that are "the oldest texts we possess"... It should in fact be obvious even to an "amateur" that the reconstruction of Presocratic thought must be based both upon the later tradition and upon the surviving fragments.'

 

I cannot imagine how my disclaimer of competence in the field of linguistic criticism can have induced Kirk to suggest that such things are not 'obvious' even to the particular amateur in question.

Moreover, he might have noticed that fairly recently I quote, translate, and discuss, the fragments themselves (much more than the reports of Plato and Aristotle, though we now seem to agree that these are quite relevant also), both in 'Back to the Presocratics' and in my Open Society, where I discussed, for example, a considerable number of the surviving fragments of Heraclitus. Kirk refers to this book on p. 324. Why then does he, on p. 235, interpret my disclaimer in the sense that I disclaim interest in the surviving fragments, or in the problem of their historical status?

(2) As an example of the way, unsatisfactory in my opinion, in which Kirk answers the criticism I made in 'Back to the Presocratics', I now quote the end of his reply (p. 339). He says:

 

'More startling still, he[Popper] applies the criterion of possible truth as the test of the historicity of a theory. On page 16 he [Popper] finds that "the suggestion that we should test the historicity of Heraclitus' ideas... by standards of 'common sense' is a little surprising." Shall we[Kirk] not find his [Popper's] own "test" much more surprising - "But the decisive point is, of course, that this inspired philosophy [i. e. man is a flame, etc.] is true, for all we know" (p. 17 [in this volume, p. 148])?'

 

The simple answer to this is that I neither said nor implied that the truth, or the possible truth, of a theory is a 'test' of its historicity. This may be seen from pages 16 and 17 of my address - in this volume, pp. 147 f. - and the second paragraph of section vii; incidentally, did Kirk forget his thesis that I have abandoned the idea of truth?) And when Kirk here puts 'test' in quotes - thereby indicating that I have used the term 'test' in this context, or in this sense - then he clearly misquotes me. For all I have said or implied is that the truth of that theory of change which has been traditionally, and I think correctly, attributed to Heraclitus, shows that this attribution at least makes sense of Heraclitus' philosophy - while I at any rate could not make sense of the philosophy attributed to Heraclitus by Kirk. Incidentally, I do think that it is an important and even an obvious principle of the historiography and interpretation of ideas that we should always try to attribute to a thinker an interesting and a true theory rather than an uninteresting or a false one, provided of course the transmitted historical evidence allows us to do so. This is neither a criterion nor a 'test', to be sure; but he who does not try to apply this principle of historiography is unlikely to understand a great thinker such as Heraclitus.

 

III

 

The most important disagreement between and Kirk and me as far as the Presocratics are concerned was over the interpretation of Heraclitus. And here I claim that Kirk, perhaps unconsciously, has almost ceded my two main points which I am going to discuss below under (1) and (2).

My general approach to Heraclitus may be put in the words of Karl Reinhardt: 'The history of philosophy is the history of its problems. If you want to explain Heraclitus, tell us first what his problem was.'󰊗

My answer to this challenge was that Heraclitus' problem is the problem of change - the general problem, How is change possible? How can a thing change without losing its identity - in which case it would be no longer that thing which has changed? (See 'Back to the Presocratics', section viii and ix.)

I believe that Heraclitus' great message was linked with his discovery of this exciting problem; and I believe that his discovery led to Parmenides' solution that change, indeed, is logically impossible for any thing - for any being; and later to the closely related theory of Leucippus and Democritus that things do not, indeed, change intrinsically, although they change their positions in the void.

The solution of this problem which, following Plato, Aristotle, and the fragments, I attribute to Heraclitus, is as follows: there are no (unchanging) things; what appears to us as a thing is a process. In reality a material thing is like a flame; for a flame seems to be a material thing, but it is not: it is a process; it is in flux; matter passes through it; it is like a river.

Thus all the apparently more or less stable things are really in flux; and some of them- those which indeed appear stable - are in invisible flux. (Thus Heraclitus' philosophy prepares the way for the Parmenidean distinction between appearance and reality.)

In order to appear as a stable thing, the process (which is the reality behind the thing) has to be regular, law-like, 'measured': the lamp which holds a stable flame has to supply it a definite measure of oil. It seem not unlikely that the idea of a measured or law-like process was developed by Heraclitus from suggestions of the Milesians, especially of Anaximander, about the significance of the cosmic periodic changes (such as day and night, perhaps also the tides, the waxing and waning of the moon, and especially the seasons of the year). These regularities might well have contributed to the idea that the apparent stability of things, and even of the cosmos, can be explained as a 'measured' process - a process ruled by law.

 

(1) The first of the two main points on which I criticized Kirk's views on Heraclitus is this. Kirk suggested that Heraclitus did not believe, and that it was against common sense to believe, 'that a rock or a bronze cauldron... was invariably undergoing invisible changes'.

 

󰊗 K. Reinhardt, Parmenides, 2nd ed., 1959, p. 220. I cannot mention this book without expressing my boundless admiration for it, even though I feel that I must reluctantly disagree with its fundamental doctrine: that Parmenides does not only originated his problem independently of Heraclitus, but preceded Heraclitus, to whom he handed on his problem. I believe, however, that Reinhardt has given overwhelming reasons for the view that one of these two philosophers depends upon the other. I may perhaps say that my attempt to 'locate', as it were, Heraclitus' problem, may be regarded as an attempt to answer Reinhardt's challenge quoted in the text. (See also section vi of ch. 2, above.)

 

Kirk's lengthy discussion (pp. 334 ff.) of my criticism ultimately arrives at a point about which he says:

 

'At this point the argument becomes somewhat rarefied. I agree, though, that it remains theoretically possible that certain invisible changes of our experience, for example the gradual rusting of iron, cited by Popper, struck Heraclitus so forcefully that they persuaded him to assert that all things which were not in visible change were in invisible change. I do not think however, that the extant fragments suggest that this was the case' (p. 336).

 

I do not think that the argument need in any sense become rarefied; and there are many extant fragments which suggest the theory which I attribute to Heraclitus. Yet before referring to these I must repeat a question which I raised in my address: if, as Kirk and Raven agree, fire is, as it were, the structural model or the prototype (or the 'archetypal form' as the have it) of matter, what else can this mean but that material things are like flames, and therefore processes?

I do not, of course, assert that Heraclitus used an abstract term like 'process'. But I conjecture that he did apply his theory not only to matter in the abstract, or to 'the world order as a whole' (as Kirk says on p. 335), but also to concrete, single things; and these things, then, must be compared to concrete, single flames.

As to the extant fragments in support of this view and of my interpretation in general, there are first the fragments about the sun. It seems to me pretty clear that Heraclitus regarded the sun as a thing, or perhaps even as a new thing every day; see DK, B 6 which says󰊘 'The sun is new every day', though this may perhaps only mean that it is, like a lamp, re-kindled every day: 'Were there no sun, it would be night in spite of the other stars' says B 99. (See also B 26 and my remark above concerning lamps and measures and compare B 94.) Or take B 125: 'If not stirred, the barley-brew decomposes.' Thus movement, process, is essential to the continued existence of the thing which otherwise ceases to exist. Or take B 51: 'What struggles with itself becomes committed to itself: there is a link or harmony due to recoil [or: to the turning back of the strings] and tension, as in the bow and the lyre.' It is the tension, the active force, the inherent strife (a process), which makes bow and lyre what they are, and only as long as the tension is kept up, only as long as the strife of their parts goes on, do they continue to be what they are.

Admittedly, Heraclitus likes generalizations and abstractions; and so he proceeds at once to a generalization which may well be intended as one on a cosmic scale, as in B 8: 'The opposites agree, and from discord results the best harmony.' (See also B 10.) But this does not mean that he loses sight of the single things, the bow, the lyre, the lamp, the flame, the river (B 12, 49α). 'Upon those who step into the same rivers, different and again different waters flow... We step into the same rivers, and we do not step [into the same rivers]. We are, and we are not.'

Yet before becoming symbols of the cosmic processes, the rivers

 

󰊘 Cp. Diels-Kranz. For B 51 See G. Vlastos, AJP 76, 1955, pp. 348 ff.

 

are concrete rivers, and beyond that, symbols of other concrete things, including ourselves. And although 'we are, and we are not' (which incidentally, Kirk and Raven prefer not to attribute to Heraclitus) is, in a sense, a sweeping and perhaps cosmic generalization and abstraction, it is no doubt also meant as a very concrete appeal to every man: it is a Heraclitean memento mori, like so many other fragments which remind us that life becomes death, and death becomes life. (Compare for example B 88, 20, 21, 26, 27, 62, 77.)

If B 49α moves towards something like a generalization, B 90 moves from the general and cosmic idea of a consuming (and dying) fire to the particular: 'Everything is an exchange for fire and fire for everything just as wares for gold and gold for wares.'

Thus when Kirk now asks (p. 336): 'Can we then say that the conclusion that all things separately are in permanent flux is necessarily entailed by any course of reasoning followed by Heraclitus?', then the answer is an emphatic 'yes', as far as we can speak at all of anything as being 'necessarily entailed' by a 'course of reasoning' in a field where everything must remain to some extent conjecture and interpretation.

Thus take for example B 126, 'What is cold becomes hot and what is hot becomes cold; what is moist becomes dry and what is dry becomes moist.' This may well have a cosmic significance: it may refer to the seasons, and to cosmic change. But how can it be doubted (especially if we attribute to Heraclitus 'common sense', whatever this may mean󰊙) that it applies to concrete, individual things and their changes - and incidentally, to ourselves and our souls? (Cp. B 36, 77. 117. 118.)

But things are not only in flux - they are invisibly in flux. So we read in B 88: 'It is always one and the same: what is alive and what is dead; what is awake and what is asleep; what is young and what is old. For the one turns into the other and the other turns back into the one.' Thus our children age - as we know, invisibly; yet the parents also turn - somehow - into their children. (See also B 20, 21, 26, 62 and 90.) Or take B 103: 'In a circle, the beginning and the end are the same.' (The identity of opposites; opposites invisibly merging into each other; see also B 54, 65, 67, 126.)

That Heraclitus notices that these processes may indeed be invisible, and that he therefore felt that sight, and observation, were deceptive, may be seen from B 46: '... sight is deceptive.' B 54: 'Invisible harmony is stronger than visible.' (See also B 8 and 51.) B 123: 'Nature loves to hide.' (See also B 56 and 113.)

I have not the slightest doubt that any one or all of these

 

󰊙 Kirk, it seems, has misunderstood my criticism of his appeal to 'common sense'. I criticized the view that there was in these matters a straightforward standard of common sense to which the historiographer could appeal, and I suggested (but only suggested) that my interpretation of Heraclitus may attribute to him perhaps as much, or more, common sense, than Kirk's interpretation. (Besides, I also suggested that Heraclitus was the last man on earth whose sayings were to be measured by somebody else's standard of common sense.) And is not the invisible change in Ovid's 'gutta cavat' common sense? (Alan Musgrave has called my attention to an elaborate argument for invisible change in Lucretius, De rer. nat., i, 265-321, which may have been Ovid's source.)

 

fragments may be explained away. But they do not seem to me to support what it is reasonable to assume in any case, and what is, in addition, supported by Plato and Aristotle. (And though the evidence of the latter has become suspect, especially in view of the great work of Harold Cherniss, nobody thinks - and least of all Harold Cherniss - that Aristotle's evidence has been completely discredited, including that which is supported by Plato or by the 'fragments'.)

(2) The last point of my reply, and my second and main point about Heraclitus, concerns the general summary of his philosophy which can be found in Kirk and Raven on p. 214 under the heading 'Conclusion'

I quoted part of this conclusion in my address, and said that I found the doctrine attributed by Kirk and Raven to Heraclitus 'absurd'; and in order to make quite clear what I regarded as 'absurd', I used italics. I repeat here my quotation from Kirk and Raven, with the italics as previously used by me. What I found 'absurd' is the allegedly Heraclitean doctrine 'that natural changes of all kinds [and thus presumably also earthquakes and great fires] are regular and balanced and that the cause of this balance is fire, the common constituent of things that was also termed their logos'. (See p. 147, above.)

I did not object to anybody's attributing to Heraclitus the doctrine that change is ruled by law, or perhaps the more doubtful doctrine that the rule, or regularity, was their 'Logos'; or the doctrine that 'the common constituent of things was fire.' What I felt to be absurd were the doctrine (α) that all changes (or 'changes of all kinds') are 'balanced' in the sense in which many important changes and processes such as the fire in a lamp, or the cosmic seasons, may well be called 'balanced'; (b) that fire is 'the cause of this balance'; and (c) that the common constituent of things - that is, fire - 'was also termed their Logos'.

Moreover, I could find no traces of these doctrines in Heraclitus' fragments, nor in any of the ancient sources, such as Plato or Aristotle.

Where then is the source of this summary or 'conclusion' - that is to say, the source of the three points (α), (b), and (c) which express Kirk's general view of Heraclitus' philosophy, and which colour so much of his interpretation of the fragments?

Reading the chapter on Heraclitus in Kirk and Raven again, I could find only one hint: the doctrines to which I object are first formulated on p. 200, with reference to the fragment which they number 223. (See also p. 434.) Now Kirk and Raven's 223 is the same fragment as DK, B 64: 'It is the thunderbolt which steers all things.'

Why should this fragment make Kirk ascribe to Heraclitus the doctrines (α), (b), and (c)? Is it not quite satisfactorily explained if we remember that the thunderbolt is the instrument of Zeus? (This seems quite sufficient to explain DK, B 64. There is no necessity to connect it with DK, B 41 = KR, 230, though this could only further strengthen my interpretation.)

But Kirk and Raven interpret on pages 200 and 434, the fragment 'It is the thunderbolt which steers all things' more elaborately: first by identifying the thunderbolt with fire; secondly by attributing to fire a 'directive capacity'; thirdly by suggesting that fire 'reflects divinity'; and fourthly by suggesting its identification with the Logos.

What is the source of this somewhat over-elaborate interpretation of a short and simple fragment? I could find no trace of it in any of the ancient sources - the fragments themselves, or Plato, or Aristotle. The only trace I could find was an interpretation of Hippolytus, whom Kirk and Raven describe on p. 2 of their book as 'a theologian in Rome in the third century A. D.' (almost six centuries junior to Plato) who 'attacked Christian heresies by claiming them to be revivals of pagan philosophy'. It seems that Hippolytus, himself a schismatic Bishop, not only claimed that the Noetian heresy 'was a revival of Heraclitus' theory', but that he also contributed by his attacks to the extermination of the heresy.

Hippolytus is also the source of B 64, the beautiful fragment about the thunderbolt. He quotes it, apparently, because he wants to interpret it as closely related to the Noetian heresy. In this attempt he identifies the thunderbolt first with fire; next with eternal or divine fire, endowed with a providential 'directive capacity' (as Kirk and Raven have it), and thirdly with prudence or reason (Kirk and Raven have 'Logos'); and ultimately he interprets the Heraclitean fire as 'the cause of the cosmic housekeeping', or of the 'directorship' or the 'economic government' that keeps the balance of the world. (Kirk and Raven have it that fire is 'the cause of this balance'.)

(The third of these identifications of Hippolytus might indeed have had a basis in the text: Karl Reinhardt, in an article in Hermes, 77, 1942, conjectures that there was a lost fragment, alluded to in Hippolytus, which read 'pur phronimon' or 'pur Phronoun'. I am unable to evaluate the force of Reinhardt's arguments though to me they do not appear very compelling. But the alleged lost fragment itself would fit perfectly well into my interpretation: since I interpret Heraclitus to mean that we - our souls - are flames, 'thinking fire' or 'fire as a thought process' would of course fit very well. But only a Christian - or heretical Christian - interpretation could render it 'fire is providence'; and as to the 'cause' of Hippolytus, Reinhardt says explicitly that this is not Heraclitean. Fire as the cause of world-balance would come in - if at all - only through a Conflagration on the Day of Judgment, as the balance of justice; yet Kirk does not accept that this Conflagration is part of the teaching of Heraclitus.)

Thus the doctrine whose attribution to Heraclitus I found so unacceptable appears to be Kirk's interpretation of an interpretation through which Hippolytus may have tried to establish the semi-Christian character of Heraclitus' teaching - perhaps, as Karl Reinhardt suggests, in an attempt to fasten upon the Noetians heretic doctrines of pagan origin, such as the doctrine that fire is endowed with providential or divine powers.

Though Hippolytus may perhaps be a good source when he cites Heraclitus, he clearly cannot be taken very seriously when he interprets Heraclitus.

Considering its doubtful source, it is far from surprising that I could not make any sense of the quoted final summary or 'conclusion' of Kirk and Raven. I still feel that the doctrine there ascribed by Kirk and Raven to Heraclitus is absurd - especially the words which were italicized by me; and I am sure that I am not alone in this feeling. Yet Kirk now writes (on p. 338), referring to the passage in my address where I discuss his 'conclusion' and say that it is 'absurd': 'Popper is indeed isolated when he asserts that such an interpretation of Heraclitus is "absurd".' But when we look more closely at Kirk's present presentation, we find that he has almost conceded my point: he now omits almost all the words which I put in italics because they seemed absurd to me (and in addition the words 'changes of all kinds'); and he omits, more especially, the statement that the cause of the balance is fire (and 'that was also termed their Logos').

For Kirk now writes on p. 338, suggesting that this is the 'interpretation of Heraclitus' which I described as absurd: 'Heraclitus accepted change in all its manifest presence and inevitability, but claimed that the unity of the world-order was not thereby prejudiced: it was preserved through the logos which operates in all natural changes and ensures their ultimate equilibrium.'

I think that even this interpretation might perhaps be formulated more happily; but it is no longer absurd. On the contrary, it seems to agree, for example, with the interpretation which I myself gave in my Open Society, where I suggested that the 'logos' may be the law of change. Moreover, though I strongly object to describing fire (with Kirk and Raven, or with Hippolytus) as the cause of balance, I do not object to an interpretation which lays some stress on balance or on balanced change. Indeed, if the apparently stable material things are in reality processes like flames, then they must burn slowly, in a measured way. They will, like the flame of a lamp, or like that of the sun, 'not overstep their measure'; they will not get out of control, as a conflagration might. We may remember here that it is movement, a process, that keeps the barley brew from decomposing, separating, disintegrating; and that it is not every kind of movement that has this effect but, for example, a circular, and thus a measured movement. It is therefore the measure which may be called the cause of the balance of fire, of flames, and of things - of those processes and changes which appear as stable and as things at rest, and which are responsible for the preservation of things. The measure, the rule, the lawful change, the logos (but not the fire) is the cause of balance - including especially the balance of a fire when it is under control, such as a balanced flame or the sun or the moon (or the soul).

It is clear that according to this view most of the balanced change must necessarily be invisible: this kind of balanced or lawful change must be inferred by reasoning, by the reconstruction of the tale, the story, of how things do happen. (Perhaps this is why it is called the logos.)

This may well have been the way that led Heraclitus to his new epistemology, with its implicit distinction between reality and appearance, and its distrust of sense experience. This distrust, together with the doubts of Xenophanes, may later have helped Parmenides to arrive at his contrast between the 'well-rounded truth' (the invariant logos) on the one hand, and the delusive opinion, the erring thought of the mortals, on the other. Thus came about the first clear contrast between an intellectualism or rationalism, which Parmenides upheld; and an empiricism or sensualism, which he not only attacked, but which he was the first to formulate. For he taught (B 6: 5) that the muddled horde of erring mortals, always in two minds about things, with erring thoughts (B 6: 6) in their hearts, mistake sensation for knowledge; and that they take being and not-being for the same and yet for not the same. And against them he contended (B 7):

 

Never shall it prevail that things that are not are existing.

Keep back your thought from this way of enquiry; don't let experience,

Much-tried habit, constrain you; and do not let wander your blinded

Eye, or your deafenèd ear, or even your tongue, along this way!

But by reason alone decide on the often contested

Argument which I have here expounded to you as a disproof.

 

This is Parmenides' intellectualism or rationalism. He contrasts it with the sensualism of those erring mortals who hold the conventional and erroneous opinion that there is light and night, sound and silence, hot and cold; that their eyes mingle with light and night, and that their limbs mingle with hot and cold and so become themselves hot and cold; that this mixture determines the physical state or 'nature' of their sense organs or their limbs; and that this mixture or nature turns into thought. This doctrine according to which there is nothing in the erring intellect (the 'erring thought' or 'erring knowledge' of B 6: 6) which was not previously in the erring sense-organs is stated by Parmenides as follows (B 16):󰊚

 

For as, at any one time, is the much-erring sense-organs' mixture,

So does knowledge appear in men. For these two are the same thing:

That which thinks, and the mixture which makes up the sense-organs' nature.

What in this mixture prevails becomes thought, in each man and all.

 

This anti-sensualist theory of knowledge soon afterwards turned, practically unchanged, into a pro-sensualist theory which extolled the sense-organs (disparaged by Parmenides) as more or less authoritative sources of knowledge.

The whole of this story is somewhat idealized and, of course, conjectural. I merely try to show how epistemological and logical problems and theories might have arisen in the course of a critical debate of cosmological problems and theories.

It almost seems more than a conjecture that something like this did happen.

 

󰊚 The significance of this passage, and my translation of it (which should also be compared with Empedocles B 108), are more fully discussed in Addendum 8 at the end of this book; see especially sections 6-10.

- "Conjectures and Refutations,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Karl R. Popp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