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용 교수는 동서양 최고의 정치철학자들이 얼마나 절묘한 용어로 중용을 설명했는지를 명쾌하게 정리했다. 그는 ‘원의 중심’을 한번에 찾아내기 어렵듯, 중용의 실천은 결코 쉽지 않다고 했다. 따라서 ‘차선의 선택’ 이 중요하며, 중용이 ‘실천적 지혜’임을 누차 강조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한겨레가 만난 사람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전환의 시대다. 대중들의 불만과 기대가 교차하는 불안정한 시기다. 대중은 ‘위기의 시대’를 넘어설 새로운 정치의 실현과 ‘전환의 시대’를 이끌어갈 탁월한 정치가의 등장을 고대한다. 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될 것인가? 원로 정치학자인 최상용 교수는 그가 누구이든 지도자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중용’(中庸)을 꼽는다. “정치란 정의의 실현이며, 정의는 곧 중용이다.” “중용은 중간인 동시에 중심이다. 그것은 상황과 조건을 고려한 사려 깊은 선택, 즉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선거의 해인 올해, ‘어중간한 태도’로 모두의 환심을 사려는 지도자를 가려내어 제대로 된 ‘중용의 정치가’를 뽑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중용을 핵심으로 한 자신의 정치사상을 담은 저서 <중용의 정치사상> 출간을 앞두고 있는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그에게 ‘극단과 분노의 시대’에 ‘중용민주주의’(meanocracy)의 의미 등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홍일표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iphong1732@gmail.com
-세계 자본주의는 심각한 위기 속에 크게 동요하고 있다. 올해는 세계 주요국의 선거와 정권교체가 예정되어 있다. 이런 전환의 시대를 설명하는 열쇳말을 고른다면?
“‘민주화’와 ‘상대화’를 들 수 있다. 프리덤하우스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204개국 가운데 157개국이 민주국가 내지 민주화 과정의 국가로 분류된다. 하나의 정치이념과 원리가 전세계를 지배한 것은 인류사상 처음이다. 한국은 민주화는 잘되었으나 상대화에선 부족하다. 자유민주주의 헌법 논쟁이 이를 잘 보여준다. 대한민국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규정할 뿐, ‘공식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은 없다.”
-세계 곳곳에서 ‘탐욕에 대한 분노’와 ‘정의에 대한 갈구’가 확산되고 있다.
“양극화는 시장원리주의가 낳은 결과이고, 세계적 현상이다. 해법은 각국 사정에 따라 다를 것이다. 우리 헌법은 34조와 119조를 통해 양극화 문제 해결을 약속하고 있다. 헌법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존 롤스 <정의론>의 핵심인 ‘격차원리’(difference principle)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정약용 ‘정의=중용’ 설파
신자유주의 향한 분노에 해답 줄수 있어
-왜 그런가?
“격차원리란 사회적으로 가장 덜 혜택 받은 계층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를 뜻한다. 롤스는 격차원리의 정책화를 통해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는 수준까지 줄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무상급식에 대한 학부모들의 요구가 절실하다면 하되, 후유증을 줄이면 된다. 목표로서의 보편복지를 달성할 자원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우선순위가 더욱 중요해진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의 답을 내놓지 않는다. 공공선, 미덕, 실천적 지혜를 거론하는데, 그건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이다. 나는 ‘정의란 중용이다’라고 말한다.”
-흥미롭다. 그렇다면 ‘중용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된다.
“플라톤은 정의는 중용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의는 중용이며, 중용은 법이라 했다. 다산 정약용은 ‘시중의 정의’(時中之義)라는 말로 정의가 중용임을 말했다. 중용은 ‘어중간’이 아니라 ‘중심축’이며, ‘정곡을 찌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중용을 다소 밋밋하게 느낀다. 여전히 어중간한 태도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의’라는 용어는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번역어이다. 이 단어엔 가슴이 뛰지만, ‘중용’에 대해선 무덤덤한 게 사실이다. 롤스는 정의란 ‘독단론과 환원주의의 중용’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성찰적 균형’, ‘겹치는 합의’가 중용이다. 원칙과 상황 사이의 대화를 통해 고난도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명중이고, 적중이다.”
-중용은 지도자의 덕목인가, 시민의 생활덕목인가?
“일차적으로 지도자의 덕목이다. 그리스의 정치가 솔론과 페리클레스가 말한 프로네시스(phronesis, 사려, 실천적 지혜)도 비슷한 개념이다. 공자는 ‘정자정야’(政者正也)라 하여, 정치가 정의의 실현이라 했다. 가장 바탕이 되는 것은 타자,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이다. 이는 최우선 과제에 대한 지도자의 정확한 판단을 요구한다.”
-‘정의로서의 중용’, ‘중용으로서의 정의’를 논한 우리 사상가가 있는가?
“원효와 다산을 들 수 있다.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은 그 기준이 ‘중용의 정의’(中道義)이다. 이 역시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최대한의 합의점을 찾는 것, ‘적절한 균형’을 뜻한다.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삼국통일의 사상적 기반으로 제시되었다. ‘구동존이’(求同存異)라는 외교 전략도 같은 맥락이다. 다음으로 다산이다. 그는 조선의 현실을 ‘시중지의’의 관점으로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국가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는 경륜(經綸), 즉 날줄과 씨줄을 엮어 내는 능력인데, 플라톤은 이를 ‘실을 꿰는 기술’이라 했다. 다산은 진정 탁월한 ‘공공 철학자’이다.”
-현실의 정치가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나?
“우선 삼봉 정도전이다. 베버 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최고의 ‘직업정치가’였다. 당대 최고의 주자학자였고, 뛰어난 전략적 사고를 갖춘 정치가였다. 사대와 자주의 긴장과 균형을 일관되게 유지했고, 이념의 정책화를 훌륭하게 구현했다. 왕으로서는 세종대왕을 꼽는다. 문화의 힘을 간파한 철인왕이었다. 세종은 권도(權道)정치의 대가였다. 이때 ‘권’은 단순한 힘이 아니라 균형을 잡는다는 의미이다. 다산은 이를 ‘권형’(權衡)이라 했다.”
-현재 정치인들 가운데서 중용의 정치를 잘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 있는가?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여러 정치가들이 삼봉이나 세종 수준의 중용적 구상력과 정책 역량을 갖춘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여당과 주요 야당의 대표가 전원 여성이라는 점이 놀랍고, 그들 모두 출중한 정치가라고 본다. 안철수 교수의 경우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 즉 문맥적 지성(contextual intelligence)이 뛰어난 인물로 보인다.”
-올해 총선과 대선을 치르게 된다. 가장 최우선의 과제는 무엇인가?
“복지 한국의 기본틀을 갖춰야 한다는 것은 거의 합의된 듯하다. 결국 제한된 자원으로 우선순위에 맞는 적절한 정책을 만들어내는 정치판단이 중요하다. 지금 대통령은 이를 잘 못했다. 또한 2013년을 통일외교전략 수립의 원년으로 삼아야 한다. 1222년 동안 통일국가를 유지해 왔던 한반도 통일의 당위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최후의 냉전 분단국으로서 상호인정과 평화공존을 통한 통일을 이뤄내도록 해야 한다. 통일 한국은 영국에 필적한, 민주주의의 최적 규모가 될 것이다. 한-미 동맹을 주축으로, 중국과 깊은 대화를 해야 하는 고난도의 정치판단과 균형외교가 절실하다.”
-최고 지도자의 역량이 더욱 중요해질 것 같다.
“정치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최고 책임자로서 거시적 안목을 갖춰야 하고, 세부사항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역량이 중요하다.”
-좋은 사람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정치는 사람이고, 곧 언어이다. 지금까지의 언행을 살펴본다면 충분히 좋은 사람을 구별해낼 수 있다. 그런 능력을 갖춘 이를 이끌어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
-정책전문가 풀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많다.
“지난 십년을 ‘좌왕우왕(左往右往) 10년’이라 말하곤 한다. 제대로 중심을 잡은 중용의 정권이 아니었다. 인사 실패도 공통의 약점이었다. 플라톤은 ‘적재적소’가 정의라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 정의를 실현하지 못했다. ‘상대화’의 시대에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크지 않다. 개인의 사적 이해를 넘어선다면 충분히 좋은 팀을 구성할 수 있다.”
-대통령에게 ‘영혼이 있는 리더십’(soulcraft)이 중요하다고 했다. 국민과 소통하는 능력을 말하는가?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고,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 최고지도자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소통은 다양한 층위에서 잘 이루어져야 한다. 솔크래프트란 국민의 마음을 끌어안는 리더십이지, 포퓰리즘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은 포퓰리즘의 위험성 때문에 ‘철인정치’에 기대를 걸었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것도 페리클레스라는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국민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우선순위를 제대로 정할 수 있다. ‘국가를 경영하는 능력’(statecraft)에 더해 갖춰야 할 지도자의 덕목이다.”
대통령에겐 ‘영혼이 있는 리더십’이 중요
국민 마음 꿰뚫는 중용의 ‘중심축’ 정치를
-‘중용민주주의’(meanocracy)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완전한 정치체제가 아니라 불완전성을 최소화하는 정체이다. 내가 말하는 중용민주주의는 포퓰리즘과 같은 ‘흥분의 정치’나, 십자군 민주주의 같은 ‘교만의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능력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자각을 토대로 한다. 절대주의, 극단주의, 원리주의, 패권주의를 거부하고, 다수와 법의 지배를 원칙으로 하는 정치체제이다. 3월에 이런 내용을 담은 <중용의 정치사상>이 출판될 예정이다.”
-일본 상황을 짚어 보자. 민주당 정권 출범에 많은 이들이 변화를 기대했다. 하지만 심각한 리더십의 한계를 보였고, 영토와 역사문제에서도 전향적이지 않다.
“일본 민주당의 집권은 그 자체로 대단한 변화이다. 자민당 가토 고이치 의원도 민주당 집권은 메이지 개혁,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점령개혁에 이어 ‘제3의 혁명’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이 실망하고 있다. 일본에 대한 구조적 이해가 필요하다. 일본은 천수백년 동안 왕조교체가 없는 나라이고, 현대 정치에서조차 반세기 이상 한 정당이 집권을 유지한 나라이다. 아베 전 총리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본은 연속성의 국가’라고 했다. 그만큼 일본은 ‘보수적인, 너무나 보수적인 나라’이다.”
-일본 정치인들의 우경화된 발언과 행동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가?
“역사 망언은 앞으로도 나올 것이다. 그에 상응하는 정도의 대응을 한다는 원칙이 중요하다. 6자회담의 ‘행동 대 행동’ 원칙과 같다. 강경대응이 더 큰 실익을 거둘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아시아 주요국 간에 경제협력은 계속 강화되고 있지만, 영토분쟁과 역사논쟁은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의 전망은 어떠한가?
우리 헌법, 34조·119조 양극화 해결 약속
공식이념으로 자유민주주의 표현은 없어
“한·중·일이 높은 수준의 공동체가 아닌, ‘공동체에 가까운 협력체’를 달성하는 건 가능할 것이다. 세 나라는 세계를 향해 각자의 독특한 메시지를 던진다.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성공 모델, 일본은 비서구 나라의 독자적 근대화 모델, 한국은 산업화·민주화·정보화를 단기간에 이룬 성공 모델이다. 셋이 함께 만드는 시너지는 더 엄청나다. 그래서 나는 한·중·일 상설 공동 오케스트라를 결성하여 문화협력부터 실현해 보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김정일 사망과 김정은 등장은 북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혁개방을 선택할 때 그것을 반대했던 지도자의 죽음은 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곤 했다. 김정일 사망 또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은 ‘유훈정치’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딜레마가 존재한다.”
-북한 핵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보는가?
“북한 문제는 결국 핵문제이다. 북한은 핵을 끝까지 가지려 할 것이다. 핵은 외교와 내정을 위한 가장 중요한 협상력이기 때문이다. 핵을 갖는 것이 망하는 길임을 자각할 때까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중국과 선택적인 개혁·개방을 진행하면서 올 4월까지 체제를 안정화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최상용 교수 |
올해로 칠순을 맞는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는 1982년 고려대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부임해 2007년 8월 정년퇴임한 한국의 대표적 정치학자 중 한 사람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주일대사를 지내면서(2000~2001), 일본 학계와 정·관계 주요 인물들과 긴밀하게 교류했다.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뒤 희망제작소 상임고문으로 있으면서, 당시 희망제작소를 이끌던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교수 등과 인연을 맺었다. 이들과는 지금도 자문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학문적으로는 <미군정과 한국 민족주의>(1988), <평화의 정치사상>(1997), <중용의 정치사상>(근간)을 자신의 3부작이라 말한다. 최 교수는 정치학자로서 ‘정치(인)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본인 자신도 현실과 의미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개념어를 만드는 데 뛰어나다. 1980년대에 이미 인터넷 시대의 사상과 행동을 총괄하는 ‘인터네티즘’(internetism)이란 용어를 만들었고, 중용이 구현되는 정치체제를 ‘중용민주주의’(meanocracy)라고 명명했다. 2010년부터 일본 호세이대학에서 ‘정의론’, ‘중용사상’, ‘평화사상’, ‘동아시아 공동체론’ 등을 가르쳤고, 오는 4월부터는 세이케이대학에서 강의한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일본 도쿄대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