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5년 나가시노 전투 모습을 그린 병풍도. 화면의 중앙 왼편에 조총 부대를 배치한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장애물을 설치한 뒤 적을 응시하고 있다. 가운데 오른쪽의 다케다의 병력은 기마대가 돌격하는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다. 조총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 전투를 계기로 오다는 일본의 패권 장악에 한발 다가섰다. 나아가 종래 기마대 중심의 전투 편제가 조총을 가진 보병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도쿄 도쿠가와여명회 소장, <도설 오다 노부나가> 2002, 도쿄 가와데서방신사, 72쪽) |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⑪전쟁의 불씨(상)
임진왜란은 일본의 조선 침략이자 명 중심의 동아시아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기존 질서란 “천명(天命)을 받은 명 황제가 ‘사방의 오랑캐’(四夷)를 다스리고 오랑캐들은 황제에게 조공(朝貢)을 바쳐 사대(事大)한다”는 이념 아래 유지되는 시스템이었다. 조선은 이 이념과 시스템을 충순하게 존중했고, 일본 또한 15세기 중반까지는 그런대로 순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1404년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사신을 명에 보내 조공하자 명 황제는 요시미쓰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冊封)했다.
요동치는 정치판…다이묘들의 내란 시대
일본이 조공을 통해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자 명은 감합(勘合) 무역을 허락했다. 감합이란 조공하러 온 자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한 신표를 가리킨다. 이렇게 하여 15세기에는 견명선(遣明船)이라 불리는 일본 상선들이 명의 닝보(寧波)로 입항했고 생사와 비단, 도자기 등 중국 물자들이 들어왔다. 문인과 승려들도 왕래했다. 교린(交隣)의 상대국 조선과의 무역도 짭짤했다. 조선은 미곡과 목면 등 생필품뿐 아니라 고급 문화 상품인 불전과 대장경도 일본에 넘겨주었다. 특히 조선에서 들어간 다량의 목면은 일본인들의 의생활에 혁신을 가져왔다. 목면이 없어 주로 마(麻)로 만든 옷을 입어야 했던 기존의 상황을 바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동아시아 해역에는 격변의 파고가 다시 넘실대기 시작했다. 관료제에 바탕을 둔 중앙집권 체제가 안정을 유지했던 조선이나 명과는 달리 15세기 후반 무렵 일본의 정치판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1467년 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각 지역 군웅들의 할거와 쟁투가 뚜렷해지는 격동의 시대가 되었다. 이후 100년 가까이 지속되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막이 열린 것이다. 천황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장군의 권위 또한 땅에 떨어졌다. 가신이 주군에게 대들고 백성은 영주에게 반항하여 자립을 도모하는 하극상의 풍조가 위세를 떨쳤다. “강도질은 무사의 본성”이라는 속담이 유행하는 가운데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라 불리는 유력 세력들 사이의 내란이 지속되었다.
약육강식의 시대를 맞아 군사력과 경제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다이묘들에게 과거 요시미쓰가 받아들인 명 중심의 국제질서에 대한 감각과 존중 인식이 제대로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일본의 내란은 조선이나 명과의 관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장 조선은 1475년(성종 6년) 이후, 그동안 일본 막부에 보내던 사신의 파견을 중단한다. 내란 때문에 훨씬 위험해진 일본에 가는 것을 꺼리게 된 것이다. 이유가 어쨌든 그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일본의 동향이나 변화를 탐지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예(李藝), 송희경(宋希璟), 신숙주(申叔舟)처럼 일본을 잘 알던 외교 전문가들이 나타날 토양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오랜 평화에 젖은 조선이 일본에 무관심해지기 시작했고, 일본은 한창 내란에 빠져 밖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대표되는 서양 세력들이 동아시아 해역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천황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장군의 권위도 땅에 떨어졌다
전국시대의 막이 올랐다
15세기 유럽 대항해시대는
일본에 조총을 선사했고
조선은 은 제조술을 넘겼으며
명은 교역무대를 제공했으니…
“조총 기술을 흘리면 사형에 처하라”
15세기 유럽에서는 봉건제도가 힘을 잃었다.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국왕권이 커지고 상인들의 발언권도 높아지면서 국부를 쌓으려는 기류가 퍼져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당시까지 이슬람과 이탈리아 상인들이 중개했던 동남아와 인도산 향신료를 현지로 가서 직접 획득하려는 열망이 높아갔다. 육식을 즐기는 유럽인들에게 방부제로서 중요한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무역은 그 이익이 막대했다. 향신료를 리스본으로 가져오면 원산지보다 15배 이상의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천문학과 지리학, 조선 기술이 발달하고 항해 관련 지식이 축적된 것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들의 모험을 부추겼다. 대서양을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인도에 도착한다는 믿음 아래 콜럼버스가 항해에 나선 것이 1492년이었다. 1498년에는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1521년 포르투갈 사람 마젤란이 이끄는 스페인 함대는 남아메리카 남단을 통과하여 태평양을 횡단한 뒤 필리핀에 도착했다. 바야흐로 이른바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포르투갈은 이후 인도의 고아(Goa)에 총독부를 두고 아시아 지역에 대한 무역과 가톨릭 포교에 나섰다. 그들은 1511년 말라카(믈라카)를 점령하고 ‘향신료 제도’로 불리던 몰루카(말루쿠) 제도까지 세력을 뻗쳤다. 당시까지 중국 상인과 이슬람 상인들이 장악했던 바다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비집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들은 다시 명과 일본을 향해 동진하게 된다.
1543년 시암(타이)을 떠나 명으로 향하던 중국선 1척이 규슈 바로 밑의 다네가시마(種子島·종자도)에 표착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당시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사람이 일본에 최초로 조총(鳥銃)을 전해주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사실 조총은 중국에서 주로 부르던 이름이고 일본에서는 뎃포(鐵砲)라고 불렀다.
이 새로운 무기는 한창 전국시대를 맞이하고 있던 일본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미친다. 뎃포를 최초로 접했던 다네가시마의 영주가 가신을 시켜 모조품을 만들었던 것을 시작으로 각지의 다이묘들이 앞다투어 뎃포의 도입과 제작에 나섰다. 일각에서는 뎃포나 그 제작 기술을 다른 ‘국가’에 전달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을 정하여 독점을 꾀하기도 했다.
575년 나가시노 전투 승리를 계기로 전국시대의 최강자로 발돋움했던 오다 노부나가. 1582년 혼노사(本能寺)에서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배신을 당해 49살에 최후를 맞는다. (<도설 오다 노부나가> 2002, 도쿄 가와데서방신사, 5쪽) |
스페인을 뛰어넘은 새로운 ‘은의 나라’
1503년(연산군 9년) 5월의 <연산군일기>에는 은의 제련과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이 보인다. 양인 김감불(金甘佛)과 장예원의 노비 김검동(金儉同)이 납[鉛鐵]으로 은을 불려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습니다 …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냄비 안에 매운 재를 둘러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탄(炭)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시험해 보라”고 했다.
당시 첨단의 은 제련술이었던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 조선에서 개발돼 활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데 회취법(灰吹法)이라고도 불린 이 기술은 정작 조선보다는 일본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조선을 드나들던 일본 상인에 의해 곧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이다.
회취법이 도입되기 이전 일본의 은 제련 기술은 원시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채굴한 은광석을 쌓아놓고 닷새 이상 나무를 때서 가열한 뒤, 산화되고 남은 재에서 은을 추출하는 수준이었다. 제련에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경제성이 영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회취법 도입을 계기로 1530년대 이후 일본의 은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곳곳에서 은광 개발 붐이 일어났다. 부국강병을 위한 재원 마련에 고심하던 다이묘들은 은광산 개발에 열중했다. 일본은 16세기 중반 스페인이 개발한 남미 지역의 은 생산량에 버금가는 ‘은의 나라’로 등장한다. 그리고 17세기 초가 되면 일본의 은은 전세계 생산량의 4분의 1 이상을 점하게 된다.
은은 당시 국제교역의 결제대금이자 ‘세계의 화폐’였다. 넘쳐나던 일본의 은은 교역의 이익이 있는 곳을 향해 몰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중국의 강남 지방이었다. 비단과 생사, 도자기 등 세계인 모두가 좋아하는 상품의 주산지였다. 하지만 교역은 여의치 않았다. 명이 만들어 놓은 해금(海禁)이라는 장벽 때문이었다. 일찍이 명의 주원장은 조공을 바치는 국가에만 감합무역을 허용했을 뿐, 민간인들끼리의 사사로운 교역은 엄격히 금지했다. “판자 하나도 바다에 띄울 수 없다”는 말이 상징하듯이 민간인들은 해외 도항과 무역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교역의 이익을 권력으로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 은이라는 화폐를 손에 넣은 일본 상인들은 강남 상인들과 밀무역을 벌이거나 무장선단을 이끌고 명의 동남 연해 지역을 약탈했다. 이들을 보통 ‘16세기 왜구’, ‘후기 왜구’라고 부른다. 이들 중에는 중국인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절강(저장)과 복건(푸젠) 연해의 호족들은 공공연히 왜구와 거래를 벌였고, 왜구의 두목으로 이름을 날린 중국인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명 조정은 왜구를 근절할 수 없었다. 실제 1547년 왜구 금압을 명 받고 절강 순무(巡撫)로 부임했던 주환(朱紈)은 왜구와 연결된 지방 호족들의 참소에 휘말려 자살하고 만다.
요컨대 16세기 초반 대항해시대가 동아시아, 특히 일본으로 몰고 온 파장은 컸다. 신무기 조총은, 이미 오랜 내전을 통해 단련된 일본의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켰다. 나아가 이 무렵 은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은 일본의 경제력이 크게 향상되었음을 상징하는 지표였다. 이런 상황 속에 오다 노부나가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러 전국이 통일되자 응축된 일본의 힘은 명과 조선을 겨누게 된다. 임진왜란은 바로 그 귀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