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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진보는 개별 인간의 고유성과 선택 다양성 및 다름을 통하여 제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윤진이카루스 2025. 11. 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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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진보는 개별 인간의 고유성과 선택 다양성 및 다름을 통하여 제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32 진보에 대한 제도적 이론

우리의 고찰을 덜 추상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는 이 절에서 매우 간략히 개괄하여 과학적 및 산업적 진보 이론을 다루려고 시도하겠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지난 4 절들에서 전개된 관념, 특히 상황 논리라는 그리고 심리학을 피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라는 관념을 예시하려고 시도하겠다. 나는 과학적 및 산업적 진보라는 사례를 선택하는데 왜냐하면 의심할 바 없이 현대 19세기 역사주의를 고취한 것은 이 현상이기 때문이고 내가 이전에 이 주제에 관한 밀(Mill)의 견해 중 몇 가지 견해를 토론했기 때문이다.

콩트(Comte)와 밀(Mill)은 진보가 무조건적이거나 절대적 추세인데 인간 본성의 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었음이 기억될 것이다. ‘계기(繼起)의 법칙은, 역사관련 관찰이라는 법칙에 의하여 가능한 모든 권위로써 지적될 때조차도, 합리적으로 인간 본성에 관한 실증적 이론으로 환원되기 이전까지 최종적으로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콩트(Comte)는 서술한다. 진보의 법칙은,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본성을 점점 더 많이 완료하도록 강요하는 그들 내부에 있는 경향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이 모든 것에서 밀(Mill)은 콩트의 진보 법칙을, 그가 인간 정신의 진보성으로 지칭하는 것에* 환원시키려고 시도하면서 그를 완벽하게 추종하는데 그 진보성의 첫 번째 추동력은... 증가된 물질적 안락에 대한 갈망이다’. 콩트(Comte)와 밀(Mill) 두 사람 모두에 따르면 이 추세나 유사-법칙의 무조건적이거나 절대적 특징으로 인하여 우리는, 역사관련 초기조건이나 관찰 혹은 자료 없이, 그 추세나 유사-법칙으로부터 역사의 최초 단계나 양상을 연역할 수 있다. 그리하여 원칙적으로, 역사의 전체 과정은 연역될 수 있다; (Mill)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유일한 난제는 연속적인 각 기간이 훨씬 더 큰 숫자와 다양성의 부분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연속되는 것은 인간의 기능에 의하여 도저히 계산될 수 없을 터이다.’

(Mill)이 말하는 이 환원의 약점은 분명한 듯하다. (Mill)이 말하는 전제와 연역을 우리가 인정할지라도, 사회관련이거나 역사관련 결과가 중요할 것이라고 여전히 귀결되지 않을 터이다. 진보는 아마도 가령 통제될 수 없는 자연환경에서 기인하는 손실에 의하여 무시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전제는 인간 본성의 한 양상에만 근거하는데 망각이나 나태와 같은 다른 한 가지 양상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밀(Mill)에 의하여 서술되는 진보에 정확히 반대되는 것을 우리가 관찰하는 곳에서 우리는 이 관찰을 인간 본성으로 동등하게 잘 환원할수 있다 (게으름과 과식하는 성향과 같은 특징에 의하여 제국의 쇠퇴와 몰락을 설명하면 정말로 소위 역사관련 이론의 가장 인기 있는 계략 중 한 가지 계략이 아닌가?). 사실상 인간 본성의 특정 성향의 도움을 받아서 합당하게 설명될 수 없을 터인 사건은 없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혹시 발생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더 옹호될 수 있는 이론에 의하여 놀라울 정도로 우활한(迂闊: naïve) 이 이론을 우리가 대체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진보의 조건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28절에서 설명된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진보가 막힐 터인 조건을 상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심리학적 성향만이 진보를 설명하는 데 충분할 리가 없다는 깨달음이 즉각적으로 생기는데 왜냐하면 진보가 의존할 조건이 발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다음 심리학적 성향에 대한 이론을 나은 이론으로 대체해야 한다; 나는 진보의 조건에 대한 제도적 (그리고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분석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어떻게 우리는 과학적 및 산업적 진보를 막을 수 있을 터인가? 연구실험실들 폐쇄함에 의하여 혹은 통제함에 의하여, 과학적 정기간행물과 다른 토론 수단을 억압하거나 통제함에 의하여, 과학 대회나 회의를 억압함에 의하여, 대학과 다른 교육기관을 억압함에 의하여, 도서와 인쇄물 및 저술을 그리고 종국적으로 언론을 억압함에 의하여. 아마도 정말로 억압될 (혹은 통제될) 이 모든 것은 사회제도이다. 언어는 없으면 과학적 진보가 생각될 수 없는 사회제도인데 왜냐하면 언어가 없으면 과학이나, 성장하여 진보적인 전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저술은 사회제도이고 인쇄와 출판을 위한 모든 조직과 과학적 방법에 관한 모든 다른 제도적 도구도 그러하다. 과학적 방법 자체에 사회적 양상이 있다. 과학, 그리고 더욱 특히 과학적 진보는 고립된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사상의 자유로운 경쟁의 결과이다. 이유인즉 과학에 항상, 가설 사이의 더 많은 경쟁과 더 많은 엄격한 시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합하는 가설에 말하자면 인간의 재현이 필요하다: 경합하는 가설에 옹호자가 필요하고, 그 가설에 배심원, 심지어 대중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 인간의 재현이 작동하도록 보장하고 싶어 한다면, 그 재현은 제도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제도는 법률에 의하여 대가가 지급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진보는 매우 크게 정치적 요인에 의존한다; 사상의 자유를 보호하는 정치적 제도에 의존한다.

통상적으로 과학적 객관성으로 지칭되는 것이 어느 정도 사회제도에 근거한다는 것은 다소 흥미롭다. 과학적 객관성이 개별 과학자의 정신적이거나 심리학적 태도에, 그가 받은 교육과 관심 및 과학적 초연함에 달렸다는 우활한(迂闊: naïve) 견해로 인하여, 과학자는 결코 객관적이 될 수 없다는 회의적인 견해가 반응으로서 발생한다. 이 견해를 토대로 과학자의 열정이 자극되지 않은 자연과학에서 과학자의 객관성 결여가 무시될 수 있을 것이지만 사회적 편견과 계급적 편향 및 개인적 이해관계가 포함되는 사회과학에 대해서 과학자의 객관성 결여가 치명적일 것이다. 이 교설은 소위 지식 사회학에 의하여 상세하게 전개되었는데 (6절 및 26절 참조) 객관성이 개별 과학자의 심리학에 의존한다는 우활한(迂闊: naïve) 견해에 근거하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의 사회적 혹은 제도적 특징을 철저히 간과한다. 이 교설은, 자연과학 주제의 무미건조함과 격리감(隔離感: remoteness)도 편파성과 자기-이해관계가 개별 과학자의 신념에 개입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개별 과학자의 초연함에 의존한다면 과학, 심지어 자연과학도 전혀 불가능할 터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지식 사회학이 간과하는 것이 바로 지식 사회학이다 ㅡ 지식의 사회적 혹은 공공적 특징이다. 지식 사회학은, 개별 과학자에게 정신적 규율을 부과하는 것이 그리고 과학의 객관성과 새로운 관념을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과학의 전통을 보전하는 것이 과학과 과학적 제도의 공공적 특징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6절에서 (객관성과 평가) 제시된 교설 중 또 다른 교설을 간략하게 언급할 것이다. 사회적 문제에 관한 과학적 연구 자체가 틀림없이 사회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 영향을 의식하는 사회과학자가 이해관계가 없는 객관성을 지닌 합당한 과학적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그곳에서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사회과학에 고유한 것이 없다. 물리학자나 물리공학자는 동일한 위치에 있다. 사회과학자가 되지 않고도 그는, 새로운 항공기나 로켓의 발명이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나는, 그 제도적 조건을 실현하는 데 과학적 및 산업적 진보가 의존하는 제도적 조건 중 몇 가지 조건을 방금 개괄했다. 이제 이 조건 대부분이 필수적으로 지칭될 수 없다는 것과 그 조건 모두가 전체로 고려되어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음이 중요하다.

조건은 중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 제도가 (아마도 언어를 제외하고) 없어도 과학적 진보가 엄격하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결국 진보는 구어(口語)에서 문어(文語)로부터 그래서 훨씬 더 크게 이룩되었다 (비록 이 초기 발전이 아마도, 합당하게 말해서, 과학적 진보가 아니었을지라도).

다른 한편 그리고 더 중요하게, 세계에 최고의 제도적 조직이 있어도 어느 날 과학적 진보가 멈출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예를 들어 신비주의라는 전염병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틀림없이 가능한데 이유인즉 몇몇 지식인이 신비주의로 후퇴함에 의하여 과학적 진보에 (혹은 열린사회의 요구에) 정말로 반발하기에 모든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혹시 반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가능성은 아마도, 전망의 균일성을 파멸시키고 다양성을 고취하기 위하여 교육제도와 같은 추가적 사회제도의 무리를 고안함에 의하여 상쇄될 것이다. 또한 진보라는 관념과 그 관념의 열정적 전파가 어떤 효과를 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진보가 확실해질 리가 없다. 이유인즉 가령 천국에 대한 염원을 퍼뜨리는 박테리아나 세균에 대한 논리적 가능성을 우리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최고의 제도도 결코 완벽할 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내가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제도는 성채와 같다. 제도는 잘 고안되고 동시에 합당한 사람들로 채워져야 한다’. 그러나 합당한 사람이 과학적 연구에 의하여 이끌릴 것이라고 우리가 결코 확신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새로운 가설을 창안하는 재능과 관련된 상상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 문제에서 많은 것이 순전히 운에 달렸다. 이유인즉 진리는 명백하지 않아서 장애물(이 언급은 교회에 대해서이다) 제거되자마자 진리를 알고자 진정으로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진리가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 (콩트[Comte]와 밀[Mill]이 믿었던 것과 같이) 잘못이기 때문이다.

이 분석의 결과는 일반화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적 혹은 개인적 요인은, 대부분 혹은 모든 제도적 사회이론에서 비합리적 요소로 남을 것이다. 우리가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시키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적 이론을 심리학으로 환원하는 것을 가르치는 반대 교설은 오해에 근거한다고 내가 믿는다. 그 교설은, 방법론적 심리학주의가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ㅡ 모든 집단적 현상을 개별적 인간의 행위, 상호작용, 목표, 소망 그리고 사유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개별적 인간에 의하여 창안되어 보존되는 전통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이해하려고 우리가 시도해야 한다는 전혀 공격 불가능한 교설의 ㅡ 필연적 추론이라는 허위 신념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심리학주의를 수용하지 않고도 개인주의자가 될 수 있다. 합리적 모형을 구축하는 (: zero) 방법은 심리학적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논리적 방법이다.

사실상, 심리학은 사회과학의 토대가 될 수 없다. 먼저, 심리학 자체가 사회과학 중 한 가지 사회과학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은 사회제도에 따라서 상당히 다르고 그리하여 그 본성에 대한 연구는 이 제도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둘째, 사회과학은 주로 인간 행위가 야기하는 의도되지 않은 결과나 반향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맥에서 의도되지 않은은 아마도 의식적으로 의도되지 않은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의도되지 않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적 행위자의 모든 이해관계에 침범할 반향을 규정한다: 어떤 사람은 산(mountains)과 고독을 좋아하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것이라고 주장할지라도, 너무 많은 사람이 산(mountains)을 좋아하면 산에서 그들이 고독을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은 심리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문제는 사회적 이론의 바로 근저에 존재한다.

이로써 우리는, 여전히 유행하는 콩트(Comte)와 밀(Mill)의 방법과 놀라울 정도로 대비되는 결과에 도달한다. 사회학적 고찰을 인간 본성에 대한 심리학이라는 겉보기에 견고한 토대로 환원하는 대신, 인간적 요소는 사회생활에서 그리고 모든 사회제도에서 궁극적으로 불확실하고 고집스러운 요소라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정말로 이것은, 제도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완벽하게 통제될 수 없는 요소이다 (스피노자가 처음이 안 것과 같이); 이유인즉 그것을 통제하려는 모든 시도는 틀림없이 독재체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적 요인의 전능을 ㅡ 소수 인간의, 혹은 심지어 한 사람의 변덕 ㅡ 초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과학에 ㅡ 변덕의 반대가 되는 것 ㅡ 의하여 인간적 요인을 통제할 수 있지 않는가? 의심의 여지 없이, 생물학과 심리학은 인간 개조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거나 곧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과학의 객관성과 그리하여 과학 자체를 파괴하기 마련인데 왜냐하면 과학의 객관성과 과학 자체 모두가 사상의 자유로운 경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성의 성장이 지속되고 인간의 합리성이 생존하려면, 개인들과 그들의 견해 및 목적과 목표의 다양성이 결코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정치적 자유가 위험에 처하는 극단적 경우에서는 제외하고). 심지어 공동 목적을 위한 정서적으로 만족스러운 요구도 아무리 탁월할지라도, 반대하는 모든 도덕적 견해와 그 견해가 야기하는 반대-비판 및 논증을 포기하라는 요구이다. 그 요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하라는 요구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통제를 요구하는 진화론자는, 이 요구가 얼마나 자멸적인지 깨닫지 못한다. 진화와 진보의 최고 원인은, 선택되어야 할 재료의 다양성이다. 인간의 진보에 관한 한 그 최고 원인은 고유해지고 자신의 이웃과 달라지는 자유이다 ㅡ 다수와 의견을 달리하여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전체론적 통제는 틀림없이 인간 권리의 평등화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평등화를 유발하는데 진보의 종말을 의미할 터이다.

ㅡ 칼 포퍼,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1976, 152-9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