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자유와 지성인의 책임
미래는 크게 열려서 우리에게,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다. 미래는 당신과 나와 많은 다른 사람이 오늘, 내일 그리고 모레 하는 일에 달려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은 반대로 우리의 관념과 소망에,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에 달려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에 그리고 미래의 열린 가능성을 어떻게 우리가 평가하는지에 달려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책임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때 한층 더 커진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혹은 더 정확하게, 우리에게 아는 것이 거의 없어서 저 적은 것을 ‘없다’라고 안전하게 정의(定義)할 수 있는데 이유인즉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할 것과 비교하여 그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관념을 파악한 최초의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정치가가 현명해야 한다고 ㅡ 자기가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정도로 그렇게 현명한 ㅡ 말했다. 플라톤 역시 정치가, 특히 왕은 현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했다. 플라톤은 왕이 철학자여야 하고 왕은 플라톤적 변증법을 (매우 박식하고 복잡한) 배우기 위하여 철학자의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ㅡ 혹은 훨씬 낫게 자기와 같은 가장 현명하고 가장 박식한 철학자가 왕이 되어서 세상을 통치해야 한다는 의미로 ㅡ 말했다. 이 제안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으로 빌려 말하는데, 오해를 낳았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듣고 흥분했으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정치가에게 요구한 것의 거대한 차이점이 철학적 변증법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하여 그 차이점을 다시 한번 설명하고 싶다. 플라톤에게 ‘정치가는 현명해야 한다’라는 표현은 박식한 철학자의 편에서 권력에 대한 권리주장이다; 그리하여 교양인, 지성인 즉 ‘엘리트’의 편에서 권력에 대한 권리주장이다. 정반대로, 동일한 표현이 소크라테스에게 정치가는 자신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없는지 그리하여 자기 주장에서 극도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정치가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서 막중한 책임을 깨달아서 자신이 초래할 수 있는 불행을 잘 인식할 것이다. 정치가는 자신이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알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가 소크라테스의 충고였다; 너 자신을 알아서 당신이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당신 자신에게 인정하라!
저것이 소크라테스의 태도요 소크라테스의 지혜였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라! 통상적으로 플라톤주의자는 왕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는 정당의 우두머리이다. 그리고 그의 정당을 자기 외에 누구도 차지하지 않을지라도, 정당들의 거의 모든 우두머리가 ㅡ 특히 공격적 정당과 성공적인 정당의 우두머리들 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주의자들이다; 결국, 우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플라톤이 말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 중에서 최고의 인간, 최고로 박식한, 최고로 현명한 사람이다.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 이것은 플라톤 정치철학의 근본적 문제이다. 그리고 그의 답변은 가장 현명하고 또한 가장 뛰어난 자! 이다. 첫눈에 보기에 이것은 논쟁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최고로 현명해서 가장 뛰어난 자가 자신은 최고로 현명해서 가장 뛰어난 자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명령권을 거부하면 어쩔 텐가? 그래, 저것이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주의자가 가장 현명해서 가장 뛰어난 자에게 기대하는 것일 터이다. 소크라테스주의자는 또한 자신을 최고로 현명해서 최고로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과대망상에 빠져서 현명하지도 뛰어날 수도 없다고 생각할 터이다.
분명히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잘못 언명된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질문은 저 형태로 흔히 반복되고 근본적 해답은 항상 플라톤의 해답과 동일했다. 고대에 답변은 군대가 선출한 황제였는데 이유인즉 그 사람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합법적 왕자였다. 마르크스 또한 누가 권력, 독재 권력을 가져야 하는가? 라고 ㅡ 노동자인가 아니면 자본가인가 ㅡ 물었다. 그의 답변은 계급을 의식해서 선량한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틀림없이 쓰레기 같은 인간들은 안 돼! 그들은 모욕당하는 것을 참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들은 더 이상 쓰레기 같은 인간이 아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가 대부분은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플라톤적 질문에 또한 답변했다. 그들의 이론에 중세기부터 계속해서 명백하다고 생각되는 답변인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합법적 왕자’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민중’으로 바꾸는 것이 ㅡ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이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생략되거나 아니면 그 공식은 ‘민중의 은총에 의한 민중’이 되는 것을 제외하고 ㅡ 포함되었다. 저것이 이미 고대 로마에서 그들이 언급했던 ‘vox populi, vox D ei(민중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이다)’였다.
항상 우리는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플라톤적 질문에 직면한다. 이것은 정치이론에서 여전히 커다란 중요성을 띤다: 합법성 이론에서, 특히 민주주의 이론에서 여전히 커다란 중요성을 띤다. 정부는 합법적일 때 ㅡ 즉, 헌법 지배하에서 정부가 민중 다수나 민중대표 다수에 의하여 선출되었을 때 ㅡ 통치할 권리를 지닌다고 언급된다. 그러나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권력을 차지했음을, 그리고 그를 독재자로 만들었던 수권법(授權法: Enabling Law)이 의회의 다수에 의하여 통과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합법성의 원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합법성의 원칙은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플라톤적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우리는 질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민중 주권(popular sovereignty)의 원칙이 또한 플라톤적 질문에 대한 답변임을 우리가 알았다. 사실상 그 원칙은 위험한 원칙이다. 다수 독재는 소수에게 지독할 수 있다.
44년 전 나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나는 그 저서를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고문으로서 집필했다. 그 저서에서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플라톤적 질문을 ‘우리는 어떻게 정부를 피를 흘리지 않고 갈아치우는 방식으로 헌법을 제정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질문으로 바꿀 것을 내가 제안했다. 이 문제는 정부를 선출하는 방식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를 제거하는 가능성을 강조한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ㅡ 어원적으로 ‘민중 통치’를 의미한다 ㅡ 불행하게도 위험하다. 민중 각자는 자신이 통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자신은 민주주의가 사기극이라고 느낀다. 이것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아테네 시대부터 ‘민주주의’가 독재체제인 전제정치(tyranny)를 예방하는 헌법에 대한 전통적 명칭이었음을 학교로부터 사람들이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독재체제 즉 전제정치는 우리가 중국에서 다시 한번 목격한 바와 같이 최악의 것이다.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고 독재체제를 제거할 수 없고, 통상적으로 심지어 피를 흘리고도 제거할 수 없다. 오늘날의 독재자들은 여전히 너무나 강력하다 ㅡ 1944년 7월 20일 반(反)-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을 터와 같이.
그러나 모든 독재체제는 비도덕적이다. 모든 독재체제는 도덕적으로 나쁘다. 이것이, 정부가 피를 흘리지 않고 제거될 수 있는 국가 형태로서 이해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도덕적 원칙이다. 독재체제는 국가의 시민을 비난하여 ㅡ 그 시민의 나은 판단에 반대하고 그 시민의 도덕적 신념에 반대하여 ㅡ 시민의 침묵을 통해서만 일지라도 악과 협력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나쁘다. 독재체제는 사람으로부터 도덕적 책임을 앗아가는데 그 도덕적 책임이 없으면 사람은 반쪽 사람이고 백 분의 1의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독재체제는 사람이 자기의 인간적 책임을 지려는 시도를 자살미수로 바꾸어놓는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적어도 페리클레스와 투키디데스와 함께 이미 민중 주권이라기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제정치를 막으려는 시도였음을 우리가 역사적으로 밝힐 수 있다. 대가가 높고, 아마도 너무 높아서 민주주의는 백 년도 안 되어 폐지된다. 대가는, 어떤 시민도 너무 인기를 얻으면 정확하게 그의 인기 때문에 제거될 수 있고 제거되어야 하는 자주 오해되는 도편추방 제도였다. 이런 방식으로 아리스티데스(Aristides)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와 같은 가장 전문적 정치가들이 추방되었다. 아리스티데스(Aristides)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를 방해했거나 그의 별칭 ‘정의로운 사람(the just)’로 인하여 아테네 시민이 질투심을 일으켰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고 의견을 내면 터무니없을 것이다. 저것은 당시 상황이 아니다. 그의 별칭이 아리스티데스(Aristides)가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것을, 인기가 너무 높았다는 것을 나타냈고, 도편추방의 기능은 정확하게 민중영합주의적(populist) 독재자의 발흥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저것이 그가 추방된 유일한 이유였고 또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가 추방된 이유였다.
페리클레스(Pericles) 자신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민중 통치가 아니라는 것과 이런 통치는 존재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우리가 투키디데스의 저서에서 읽을 수 있는 그의 유명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수의 사람이 정책을 고안할 수 있을지라도, 모든 사람이 그 정책을 틀림없이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모두 통치하고 담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모두 정부를 판단하는 데 참여할 수 있고 우리는 모두 배심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나의 견해로는 저것이 정확하게 선거일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새로운 정부를 합법화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가 지난 정부에 대하여 재판하는 자리에 앉은 날이다 ㅡ 지난 정부가 자신이 한 일에 책임져야 하는 날.
민중 통치로서의 민주주의와 민중 재판으로서의 민주주의 사이의 차이점이 전혀 순전히 언어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제적 효과도 있음을 나는 이제 간단하게 밝히고 싶다. 이것은, 민중 통치라는 관념이 비례대표에 대한 뒷받침을 초래한다는 사실에서 알려질 수 있다. 여기서 논증은, 모든 여론의 물결인 모든 군소정당이 대표를 내야 해서 민중의 대표가 민중의 거울이고 민중 통치는 가능한 한 폭넓은 실재가 된다는 것이다. 모든 시민이 전자 단추를 누르도록만 해서 텔레비전 화면에서 시민의 대표들이 논쟁하는 모든 중요 사안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투표하도록 하는 가공할 제안을 나는 심지어 읽었다. 그 제안은, 민중 통치로서 민주주의라는 관점으로부터 시민의 주도권이 매우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보여야 한다고 또한 언급된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를 민중 재판으로서 생각한다면 상황은 다소 다르게 보인다. 나의 견해로 정당들의 확산은 매우 나쁜 것이고 선거에서 비례 대표제도 또한 그렇다. 정당들이 쪼개지면 민중의 재판정 앞에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은 연립정부가 생기는데 왜냐하면 절충 이상의 것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가 재거될 수 있는지도 불확실해지는데 왜냐하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부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 또 다른 작은 연립 정당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정당이 적다면 정부는 통상적으로 다수의 정부이어서 그 정부의 책임을 모든 사람이 분명하게 판단한다. 인구의 견해들이 대의정치에 비례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견해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고 정부에서는 훨씬 더 가치가 없다. 저것은, 반영되어도 원래 반영대로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에, 정부 책임이 실종될 터이다.
그러나 아마도 민중 주권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론은 민중 주권론이 불합리한 이념인 미신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민중이 (혹은 민중의 다수) 잘못할 리도 없고 부당하게 행동할 리도 없다는 것은 권위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 미신이기 때문이다. 이 이념은 비도덕적이어서 거부되어야 한다. 우리는 투키디데스로부터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내가 여러 면에서 찬양하는) 또한 몇 가지 범죄적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섬이자 도시국가인 멜로스(Melos)를 공격하여 (사전 경고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모든 성인 남성을 죽이고 모든 여성과 어린이들을 거대한 노예시장에 판매하려고 내놓았다. 저것이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의 자유롭게 선출된 독일 의회는 수권법(授權法: Enabling Act)이라는 합헌적 수단을 통하여 히틀러를 독재자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독일에서 자유롭게 선출되지 않았을지라도 강제 합병 후 오스트리아에서 거대한 선거 승리를 따냈다.
우리는 모두 실수에 노출되어 있고 민중이나 인간의 어떤 다른 무리도 또한 그러하다. 민중이 정부를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념을 내가 지지한다면, 그것은 내가 독재체제를 피할 나은 길을 알지 못한다는 유일한 이유 때문이다. 심지어 민중 재판소로서의 민주주의 변형도 ㅡ 내가 옹호하는 민주주의 ㅡ 결점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역설적 익살은 여기서 매우 합당하다: ‘민주주의는, 물론 정부의 모든 다른 형태를 제외하고, 최악의 정부 형태이다.’
그리하여 요컨대 민중 주권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관념과 민중 재판소로서의, 즉 제거될 수 없는 정부를 (다시 말해서, 독재체제) 방지하는 도구로서의 민주주의라는 관념 사이의 언어적 차이점이 없어질 따름이다. 그 차이점에 또한 실제적인 함축적 주요 의미가 있다: 그 차이점은 심지어 스위스에도 중요하다. 내가 이해하는바, 교육제도에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는, 독재정치를 방지할 필요에 대한 더 겸손하고 현실적 이론 대신 민중 주권이라는 해롭고 이념적 이론을 ㅡ 그리고 저것은 참을 수 없고 도덕적으로 방어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ㅡ 옹호한다.
나는 이제 출발점으로 돌아가고 싶다. 미래는 완전히 열려있다; 우리는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동시에 우리에게 아는 게 거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긍정적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극동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같은 가공할 사건을 예방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 정권의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및 희생자들을, 이란에서 아야톨라(Ayatollah) 정권의 희생자들을,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인들에 의한 희생된 사람들을, 그리고 중국에서 최근에 희생된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 언급될 수 없는 그런 사건들을 예방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떤 일도 할 수 있는가? 예방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할 수 있다 이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우리(we)’라고 말할 때 나는 지식인을 – 관념에 관심을 기울여 독서하고 아마도 또한 글을 쓰는 사람 ㅡ 의미한다. 우리 지식인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우리 지식인이 가장 무시무시한 해코지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념, 원칙, 이론이라는 ㅡ 즉 우리의 작품, 우리의 발명품, 지식인의 발명품 ㅡ 이름으로 저질러진 대량 박멸.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감정 부추기기를 ㅡ 흔히 최선의 의도를 지닌 ㅡ 중단한다면 저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터이다. 저게 우리에게 불가능하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
10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은 이렇게 말한다: ‘살인하지 말라!’ 그 계명에는 거의 도덕성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윤리학을 설명한 방식은 이 핵심 계명의 확대에 지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은 간단하고 직접적이며 분명하다. 그 윤리학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도 해치거나 상처를 입히지 말고 모든 힘을 다하여 모든 사람을 도우라.
그러나 모세가 석판(the tablets of stone)을 가지고 먼저 시나이산에서 내려와 심지어 10계명을 말하기 전에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그는 사형당할만한 이단인 황금송아지라는 이단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잊고 이렇게 소리쳤다:
‘누가 주님의 편인가? 나에게로 오라!’ [...] ‘이스라엘의 하느님인 주님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 각자는 칼을 옆에 두고 [...] 너의 형제, 너의 친구,
그리고 너희 이웃을 죽여라!’ [...] 그리하여 그날 약 3,000명이 쓰러졌다.
(출애굽기, 32: 26-28)
저것이 아마도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다. 확실한 것은 상황이 ㅡ 성지(the Holy Land)에서도 그다음 여기 서구에서도 특히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에 ㅡ 저런 방식으로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통성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종교적 박해의 가공할 역사이다. 나중에 ㅡ 무엇보다도 17 및 18세기에 ㅡ 다른 이념적 주제와 신념이 연달아 인용되어 박해, 잔인성 및 공포를 정당화했다: 국적, 인종 혹은 계급이라는 주제; 정치적이거나 종교적 이단.
정통성과 이단이라는 관념은 악덕 중에서도 가장 사소한 악덕을 ㅡ 우리 지식인이 특별히 민감한 악덕인 우리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학식이자 지적 허영심인 거만함 ㅡ 숨기고 있다. 이것들은 사소한 악덕으로 잔인성만큼 심각하지 않다. 그러나 심지어 잔인성도 우리 지식인들 사이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잔인성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몫을 다했다. 아우슈비츠 사건 몇 년 전에 이미 늙은 사람과 병든 사람을 죽여 버리던 나치 의사들을 ㅡ 혹은 소위 유태인 문제에 대한 ‘최종적 해결책’을 ㅡ 생각할 필요만 우리에게 있다.
매번 비겁, 추정 혹은 자만심 때문에 가장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른 사람이 우리이자 지식인들이었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책임을 지는 우리는, 위대한 프랑스 사상가 쥘리앙 방다(Julien Benda)가 표현한 바와 같이, 정신적 배신자들이다. 방다가 밝힌 바와 같이 우리는 민족주의를 발명해서 퍼뜨렸다; 우리는 가장 어리석은 유행을 뒤쫓았다. 우리는, 두드러진 인상을 남긴다면, 스스로 전시하여 이해될 수 없는 언어를 ㅡ 우리가 헤겔식 교사들로부터 물려받았고 모든 헤겔주의자를 함께 묶는 박식하고 인공적 언어 ㅡ 말하기 좋아한다. 그런 것이 언어의, 독일어의 타락인데 그 언어로 우리는 서로 다툰다. 지식인과 합리적인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우리가 흔히 어리석은 것을 말하여 어부지리를 얻는 것을 알지 못하게 막는 것은 이 타락이다.
과거에 우리가 저지른 해악은 참으로 끔찍하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자유롭게 말하고 서술하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는 아마도 더 책임을 져야 했겠지?
나는 예전에 플라톤의 이상향과 관련하여 지구상에서 천국을 만들려고 시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지옥만을 가져왔다고 글을 썼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이 히틀러가 만든 지옥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유명한 스위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히틀러가 만든 지옥을 독일 영혼의 분출로서 해석했다. 당시 그는 스위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죽은 후, 그는 자기가 서술한 것을 잊고 독일 영혼에 깊이 뿌리박은 사악함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딜라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자신들이 체결한 대서양 조약(Atlantic Pact)을 통하여, 면전에 닥친 죽음을 보고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들을 희생했던 젊은 공군 조종사들이 1940-1941년 동안 영국 전투에서 놓은 토대로 새로운 세계를 세웠다. 히틀러에게 승리한 이래, 지옥에서 뒹굴지 않고 서유럽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최고로 훌륭하고 최고로 정의로운 세상인 유럽의 평화라는 천국에서 살았다. 그리고 스탈린이 우리와 힘을 합쳤다면, 우리는 오늘날 ㅡ 국제연합 덕분으로 ㅡ 유럽과 북미에서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평화를 누릴 터이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은 전-세계적 플랜이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새로운 복지가 방금 겨우 확보되고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었을 때, 거대한 소음이 시작되고 지식인들은 우리가 사는 사악한 시대, 우리 사회, 우리 문명, 우리 아름다운 세계에 저주를 퍼부었다. 가공할 과장이, 우리가 아마도 이익을 추구하면서 초래했던 파괴와 악행에 관하여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때 그렇게 아름다웠던 세상에서 남은 것을 가능한 한 급속하게 파괴하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생명체가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은 참이다. 내가 전제하건대 우리는 조만간 모두 죽을 것이다. 생명이 시작된 이래 항상 위험이 환경에 대해서도 존재했다.
우리의 태양계가 형성된 후 처음으로 자연과학, 기술과 산업으로 인하여 우리가 환경에 대하여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모든 과학자와 기술자는 이 목표를 염두에 두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자연을 파괴한다고 비난받는다. 그러는 동안 장려한 취리히 호수(Lake Zurich)와, 제방 사이에 시카고시가 위치한 거대한 미시간호(Lake Michigan)는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큰 소동 없이 안전해졌다. 이 호수들에 사는 생명체는, 생명체가 태양계에 나타난 이래 생명체가 처음 시도한 모험에서, 과학과 기술과 산업의 도움을 받아서 구조되었다.
세계는 통제하기 쉽지 않다. 모든 동물의 종, 모든 식물의 종, 모든 종류의 박테리아가 종(種: species)의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아마도 우리가 끼치는 영향은 과거보다 더 크지만 새로운 바이러스, 새로운 바이러스성 전염병이나 박테리아성 전염병은 여전히 몇 년 사이에 우리를 멸종시킬 수 있을 터이다.
자연은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 또한 민주주의도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처칠은 예전에 민주주의는 모든 다른 형태를 제외하고 최악의 정부 형태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처칠이 명시하지 않는 것을 추가하고 싶다. 정부는 항상 쫓겨날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에, 정부 자체에도 민주주의는 더할 나위 없이 최고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형태이다. 정부는 당신과 나에게 스스로에 대하여 설명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긍정적이지만 그로 인하여 정부가 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우리는 배심원단이고 배심원이지만, 지금 때때로 보편적으로 고백되는 무신념에 의하여 우리가 미혹에 빠질 위험이 있다. 헤겔의 언제나 위험한 시대정신(Zeitgeist)은 심지어 진실이 우리 눈앞에 있을 때도 참을 거짓을 바꾸는 유행성 (그리고 거의 항상 어리석은) 이념이다 ㅡ 이 모든 것은 배심원으로서, 배심원단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를 미혹에 빠뜨린다.
내가 그랬던 바와 같이 히틀러도 비현실적 교수들로부터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그들이 믿었던 모든 것을 배울 기회를 가졌다: 세계는 독일 정신에 의하여 세계의 해악으로부터 구원될 터여서 독일, 독일, 모든 것 위에서, 세계의 모든 것 위에서(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 über alles in der Welt)였다. 그래서 히틀러는, 많은 다른 가난한 젊은이와 함께,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두 번의 독일 전쟁에서 죽은 수백만의 용감한 젊은이들을 믿어서 그들과 함께 훨씬 더 많고 용감한 적(敵)들을 무덤 속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독일 젊은이들이 독일의 위대함과 우세함을 위하여 최고 전쟁지도자인 카이저(Kaiser)를 위하여 그리고 총통(Führer)을 위하여 싸웠던 것과 같이, 그 적(敵)들은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유례없이 용감하게 싸웠다.
오늘날 우리는 진실을 신중하게 살펴볼 수 있고 살펴보아야 한다. 독일의 이념은, 위대하고 용감한 독일 철학자 프리츠 피셔(Fritz Fischer)가 밝힌 바와 같이, 망상이었다. 훨씬 더 간략하게 말해서, 독일의 이념은 거짓말이었다. 서구의 이념은 ㅡ 그 이념이 받는 모든 명예훼손과 흔히 벌어지는 기만적 남용에도 불구하고 ㅡ 진리였다. 서양은 평화를 위하여 싸워서 유럽에서 ㅡ 인류의 역사 시작에서부터 전쟁에 의하여 허송세월한 ㅡ 뿐 아니라 서양 유럽인들이 영향을 미쳤던 거의 다른 모든 곳에서도 평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무책임한 지식인들은 우리 서양 세계에서 사악함만을 보았다. 그들은, 우리의 세계가 불의하여 불가피하게 쇠퇴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새로운 종교를 창설했다. 그들은 독창적이 되어서 증거를 거슬러 말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오즈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저서 서구의 쇠퇴(The Decline of the West)를 통하여 그 종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증거뿐 아니라 객관적 사실을 뒤엎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나는 지식인들을 계속해서 비난하고 싶지 않다. 인류를 위하여 그리고 진실을 위하여 그들에게 책임을 수용하라고 나는 요구하고 싶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 인하여 그들은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심지어 자유세계를 모욕하여 자유세계를 사악한 세계로 색칠할 수 있다. 저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지만 진실은 아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거짓말할 권리가 있을지라도 거짓말을 퍼뜨리면 비도덕적이다. 게다가 그것은 비도덕적일 뿐 아니라 무책임하여 처칠과 루스벨트, 전쟁영웅들과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 성취한 위대한 목표를 위험에 ㅡ 그들을 불신하게 만들어 훌륭한 것을 사악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어 ㅡ 빠뜨린다.
오늘날 러시아인들도 우리가 만든 세상과 우리가 만든 평화를 인정하기 시작했음을 나는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 싶고, 훨씬 폭넓은 평화가 유토피아적도 아니고 가능성의 한계를 넘는 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싶다.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 이 가능성이 천국과 지옥이라는 거짓말에 의하여 삭감되지 않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서양에서 우리가 천국에서 ㅡ 물론 첫 번째 천국이지만 아직 최고의 천국은 아니다 ㅡ 산다. 우리가 사는 천국은 크게 향상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세상을 모욕하거나 폄훼해서는 안 되는데 그 세상은 특히 유럽에 관한 한, 존재했던 단연코 최고의 세상이다. 진실은 우리가 이미 성취된 개혁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ㅡ 이것은 미국에서 최고로 그렇다 ㅡ 것이다.
우리는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고 관용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 이것은 전선의 양편에 있는 군인들에 의하여 밝혀졌다. 그리하여 지구상의 평화를 위하여 기본적 조건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이 우리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 요건이다.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처칠과 루스벨트의 꿈을 이룩하는 것이 ㅡ 유럽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ㅡ 가능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래 최초로 러시아인들은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위대하고 용감하지만 외로운 인물이었던 사하로프는, 여전히 너무 많은 권력을 쥔 독재자 고르바초프(Gorbachev)를 우리가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사하로프는 또한 소련에 붕괴가 임박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붕괴를 원할 수 없는데 그런 붕괴는 소련 내부에 거대한 어려움을 가져올 것이고 평화에 커다란 위협이 될 터이다. 그런 붕괴는 아마도 군사 독재체제를 ㅡ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아마도 최고는 아닐지라도) 육군, 해군 그리고 공군을 지닌 독재체제 ㅡ 낳을지도 모른다.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는 ㅡ 사하로프만큼은 아닐지라도 러시아를 잘 아는 ㅡ 뉴욕 서평(the New York Review of Books)에 기고한 주요 기고문에서 이 모든 위험 요소를 분석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가 실제로 서구와 협력을 추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인들은 어디에 천국이 있고 어디에 지옥이 있는지 우리보다 더 잘 안다.
그런 협력이 가능하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우리의 생각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이룩한 것과 자유에 대한 조건에서 획득될 수 있다고 우리가 밝힌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후에만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이룩했는지 우리가 자문하여, 러시아인들이 그들의 군사력을 감축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러시아인들에게 우리의 도움을 제시할 수 ㅡ 이 모든 것을 가능한 모든 예방책으로써 ㅡ 있다.
이 가능성은 우리 손이 미치는 거리 안에 있다; 그 가능성으로 인하여 우리 지식인은 궁극적으로 객관적인 진실을 보아야 하고 이전처럼 지속적으로 천국과 지옥을 뒤바꾸어 놓아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아는 것이 없다는 것과 ㅡ 혹은 거의 없다는 것 ㅡ 고르바초프(Gorbachev)가 우리와 동일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평화에 심지어 한 걸음이라도 다가가기 위하여, 우리는 이념을, 게다가 특히 평화에 그렇게 위협이 되는 일방적 무기 감축이라는 이념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바퀴발레처럼 우리 앞에 놓인 터전을 신중하게 더듬어야 하고 매우 겸손하게 진실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든 것을 아는 예언자의 역할을 되뇌려고 시도하는 일을 우리가 중단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자신이 변해야 함을 의미한다.
ㅡ 칼 포퍼, ‘금세기의 교훈(The Lesson of This Century)’, 1977년, 81-91쪽 ㅡ
주석
'칼포퍼 원전+번역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젊은이의 희망 (0) | 2025.11.26 |
|---|---|
| 낙관론과 매체의 위험 (0) | 2025.11.26 |
| 금세기의 교훈 대담 II 및 두 가지 담화 (번역 수정본) (0) | 2025.11.26 |
| 텔레비전의 폭력 프로그램은 인류를 타락시킨다 (0) | 2025.11.19 |
| 역사주의는 완전히 틀렸고 예술을 쇠퇴시켰다 (1) | 2025.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