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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종류의 음악, 바흐와 베토벤

이윤진이카루스 2025. 12. 15.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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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종류의 음악, 바흐와 베토벤

 

나는 바흐와 베토벤 모두를 사랑했다 ㅡ 그들의 음악뿐 아니라 그들의 개성도 또한 사랑했는데 그들의 개성은 그들의 음악을 통하여 보일 수 있다고 나는 느꼈다. (모차르트에 관해서는 상황이 다르다: 그의 매력 뒤에 측정 불가능한 것이 있다.) 바흐와 베토벤의 작품에 대한 바흐와 베토벤의 관계는 전혀 다르다는 것과 바흐를 우리의 모형으로 수용하는 것이 가능할지라도 베토벤을 향하여 이 태도를 우리가 채택하면 전혀 허용될 수 없다고 나에게 불현듯 떠오른 어느 날 충격이 다가왔다.

베토벤은 음악을 자기-표현의 도구로 만들었다고 나는 느꼈다. 절망에 빠진 그에게 이것은 생활을 이어가는 유일한 길이었을 것이다. (1802106일의 그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Heilingenstädter Testament]에서 이것이 암시된다고 나는 믿는다.) 피델리오(Fidelio)보다 더 감동적인 작품은 없다; 인간의 신념과 인간의 소망 및 인간의 비밀스러운 꿈과 절망에 대항하는 인간의 영웅적 투쟁에 대한 더 감동적인 표현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장의 순수성, 그의 극적인 능력, 그의 독특한 창조적 재능으로 인하여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허용될 수 없는 방식으로 작곡할 수 있었다고 나는 느꼈다. 베토벤의 방식을 이상(理想)이나 표준 또는 모형으로 만들려는 시도보다 음악에 더 큰 위험을 없을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내가 객관적주관적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것은 ㅡ 나 자신만을 위해서 ㅡ 자신들의 작곡을 향한 바흐와 베토벤의 두 가지 구별되는 태도를 구분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용어들은 잘 선택된 것은 아닐 것이고 (이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문맥에서 그 용어들은 철학자에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서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1905, 바흐에 관한 그의 탁월한 저서의 앞부분에서 이 용어들을 사용한 것을 발견하고 나는 기뻤다. 내가 생각하기에 객관적 및 주관적 접근방식이나 태도 사이의 대조는, 특히 우리 자신의 연구와 관련하여 결정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인식론에 관한 나의 견해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인식 주체가 없는 인식론[Epistemology Without a Knowing Subject]”이나 객관적 정신 이론에 관하여[On the Theory of Objective Mind]”관찰자 없는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without The Observer]”과 같은 나의 더 최근 논문 중 몇 가지 논문의 제목을 참조.)

이제 나는, “객관적주관적음악이나 예술에 관하여 말할 때 (오늘날까지 나 자신에게만 그리고 혹시 몇몇 친구에게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겠다. 나의 초기 관념들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하여 나는 간혹, 당시 내가 할 수 없었던 언명을 사용하겠다.

널리 수용되는 예술론에 대한 비판으로써 내가 아마도 시작해야겠다: 예술은 자기-표현이나 예술가의 개성 표현 또는 혹시 예술가의 감정 표현이라는 이론. (크로체[Croce]와 콜링우드[Collingwood]가 이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 중 두 명이다. 나 자신의 반[]-본질주의적 견해는, “예술은 무엇인가?”와 같은 무엇인가? 질문은 결코 진정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론에 대한 나의 주요 비판은 간단하다: 예술에 대한 표현주의적 이론은 공허하다. 이유인즉 사람이나 동물이 수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른 것들 가운데서) 내부적 상태의, 감정의, 그리고 개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인간 언어와 동물 언어에 대하여 사소하면서 참이다. 그것은 사람이나 사자가 걷는 방식, 사람이 기침하거나 코를 푸는 방식, 사람이나 사자가 당신을 바라보거나 무시하는 방식에도 성립한다. 그것은, 새가 둥지를 트는, 거미가 자기의 거미줄을 치는 그리고 사람이 자기 집을 짓는 방식에도 성립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예술의 특징이 아니다. 동일한 이유로 언어에 관한 표현주의적이거나 감정적 이론은 사소하고, 정보가 없어서 소용이 없다.a

나는 물론 무엇인가? 질문인 예술은 무엇인가?”에 답변할 것을 제안하지 않지만, 예술 작품을 흥미롭거나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자기-표현과 전혀 다르다고 나는 정말로 제안한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간주되어 예술가에게 필요한 특정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을 창조적 상상력, 혹시 유희성, 기호(嗜好) 그리고 ㅡ 다소 중요한 ㅡ 자기 작품에 대한 철저한 헌신으로서 우리가 서술할 것이다. 작품은 예술가에게 틀림없이 모든 것이고, 작품은 틀림없이 그의 개성을 초월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에 대한 심리학적 측면일 뿐이고 바로 이 이유로 중요성이 떨어진다. 중요한 것은 예술 작품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먼저 몇 가지 부정적인 것을 말하고 싶다.

큰 독창성 없이도 위대한 예술 작품이 있을 수 있다. 예술가가 독창적이거나 다르게되기를 (아마도 장난스러운 방식에서를 제외하고) 주로 의도한 위대한 예술 작품을 있을 수가 없다. 참된 예술가의 주요 목표는 자기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독창성은 신(gods)의 선물이다 ㅡ 순진성처럼 독창성은 요구한다고 주어지지도 않고 추구한다고 획득되지도 않는다. 진지하게 독창적이나 달라지려고 노력하면 그리고 또한 자기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면 예술 작품의 완전성(integrity)”으로 지칭된 것이 틀림없이 방해받는다. 위대한 예술 작품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하찮은 개인적 야망을 작품에 쏟아부으려고 시도하지 않고 그 야망을 자기 작품을 돕는 데 이용한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가는 자신이 수행하는 것과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으로서 성장할 것이다. 일종의 정보교류(feedback)에 의하여 예술가는, 예술가를 만들어내는 장인정신과 다른 능력을 얻을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은, 나에게 그렇게 인상을 남겼던 바흐와 베토벤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할 것이다: 바흐는 자기 작품에서 자기 자신을 잊는데 그는 자기 작품의 하인이다. 물론 그는 자기 개성을 자기 작품에 각인시키지 못할 리가 없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는, 베토벤이 의식하는 것처럼, 간혹 자신과 심지어 자기 기분 상태를 표현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내가 그들 두 분을 음악을 향한 두 가지 반대 태도를 대변하는 분들로서 보았던 것은 이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바흐는 연주되는 통주저음(通奏低音: continuo)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지시사항을 불러줄 때 이렇게 말했다: “통주저음은, 하느님의 영광과 정신에 허용된 기쁨을 위한 듣기 좋은 화음을 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음악처럼 그것의 과 목적인(final cause)은 결코 하느님의 영광과 정신의 위안 외에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주지되지 않을 때, 실제로 음악은 없고 지옥 같은 포효와 달각거리는 소리가 있다.”

음악가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바흐는 음악의 목적인(final cause)으로부터 소음 내는 것을 제외하고 싶어 했다고 나는 제안한다.

바흐로부터의 나의 인용문을 고려하여,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차이점은 종교 예술과 세속 예술 사이의 차이점이 아님을 나는 철저하게 분명히 해야겠다. 베토벤의 장엄미사곡(Mass in D)이 이것을 보여준다. “심장으로부터 ㅡ 그것은 다시 심장으로 가기를(From the heart may it again go to the heart) (“Vom Herzen möge es wider zu Herzen gehen”)”이 그 곡에 헌정된다. 이 차이점을 내가 강조할지라도, 나의 강조가 음악의 정서적 내용이나 정서적 충격을 부인하는 것과 관련 없다고 또한 언급되어야 한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과 같은 오라토리오는 강력한 정서를 묘사하고 그리하여 공감에 의하여 강력한 정서를 ㅡ 아마도 베토벤의 장엄미사곡(Mass in D)보다 훨씬 더 강력한 ㅡ 불러일으킨다. 작곡자 또한 이 정서를 느꼈는지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가 먼저 자기 음악에서 당시 표현한 정서적 상태에 놓여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창안한 음악이 틀림없이 자신에게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그 작품을 버렸을 터이다) 작곡가가 그 정서를 느꼈다고 나는 제안한다.

바흐와 베토벤 사이의 차이점에 자체의 특징적인 전문적 양상이 있다. 예를 들어 셈여림 요소의 (강하게[forte] [] 여리게[piano]) 구조적 역할이 다르다. 물론 바흐에게 셈여림 요소들이 있다. 협주곡에 총주(總奏: tutti)에서 독주(獨奏: solo)로의 변환이 있다. 마태 수난곡바라밤(Barrabam)!”이라는 외침이 있다. 바흐는 흔히 고도로 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셈여림의 놀라운 일과 대조가 발생할지라도, 그것들로 인하여 작곡의 구조가 중요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상당히 긴 악절들이, 셈여림의 주요 대조 없이, 나타난다. 모차르트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가령 베토벤의 열정(Appassionata)에 대해서 그렇게 언급될 수 없는데 거기서 셈여림의 대조는 화성적 대조와 거의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쇼펜하우어는, 베토벤의 교향곡에서 모든 인간적 감정과 열정이 말을 한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공포와 희망,... 무한히 많은 미묘한 어조로”; 그리고 그는 감정 표현 및 공명(共鳴: resonance) 이론을 다음과 같은 형태로 서술했다: “모든 음악이 우리의 심장을 건드리는 방식은... 음악이 우리의 가장 심오한 본질에서 나오는 모든 충동을 반영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쇼펜하우어의 일반적 음악 및 예술 이론이, 그에 따르면 우리의 가장 심오한 본질이 ㅡ 우리의 의지 ㅡ 객관적 세계의 본질이기 때문에, 또한 객관적이라는 이유로만 주관론을 피한다고 (조금이라도) 우리가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 음악으로 복귀한다.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지 않고, 바흐의 인벤션(Inventions)과 그 자신이 지은 다소 긴 제목 쪽(page)을 바라보자. 그 제목 쪽(page)에서 그는 피아노 연주를 원하는 사람을 위하여 썼음을 분명히 한다. 그 사람들은 두세 성부(parts)로써 분명하게... 그리고 선율적 방법으로 연주하는 방법을 그들이 배울 것이라고 그는 장담하고, 그 사람들은 자극받아 창조적이 되어 그리하여 추가적으로 작곡의 최초 기호(嗜好)를 얻을것이다. 여기서 음악은 사례로부터 습득될 수 있다. 음악가는, 말하자면, 바흐를 만나면서 성장할 수 있다. 음악가는 규율을 배우지만 음악가는 또한 자신의 음악적 악상을 사용하도록 격려받고 그 악상이 어떻게 분명하고 능숙하게 향상될 수 있는지가 음악가에게 밝혀진다. 음악가의 악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발전할 것이다. 작품을 통하여 음악가는, 과학자처럼, 시행착오에 의하여 배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성장함에 따라서 그의 음악적 판단과 기호(嗜好) ㅡ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그의 창조적 상상력조차도 ㅡ 또한 자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장은 노력, 근면 그리고 자기 작품에 대한 헌신에 의존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작품에 대한 민감성에 그리고 자기-비판에 의존할 것이다. 예술가와 그의 작품 사이에 일방적 주기보다 ㅡ 자기 작품에서 자신의 개성 표출에 지나지 않는 ㅡ 끊임없는 주고-받기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한 것으로부터 위대한 음악과 위대한 일반적 예술에 심오한 정서적 충동이 없을 것이라고 틀림없이 분명히 나는 결코 제안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음악가는 자신이 작성하고 있거나 연주하는 것에 의하여 깊이 감동받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지닌 정서적 충동을 수용한다는 것은 물론, 음악적 표현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아닌데 음악적 표현주의는 음악에 관한 한 가지 이론이다 (특정 음악적 관행들을 초래한 이론). 그 이론은, 내가 생각하기에, 한편으로는 인간이 지닌 정서들과 다른 한편 음악 ㅡ 그리고 일반적 예술 ㅡ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이론이다.

음악과 인간이 지닌 정서 사이의 관계는 몇 가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최초이고 가장 창조적 이론 중 한 가지 이론은, 시인이나 음악가의 신적(神的: divine) 광기나 신적(神的: divine) 광분에서 드러나는 신적(神的: divine) 영감에 관한 이론이다: 예술가는 사악한 정령(精靈: spirit)이라기보다 유순한 정령(精靈: spirit)일지라도, 정령(精靈: spirit)에게 사로잡힌다. 이 견해에 대한 고전적 언명은 플라톤의 이온(Ion) 편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이 언명하는 견해는 다면적(多面的)이고 형체가 없는 몇 가지 두드러진 이론이다. 정말로 플라톤의 논법은 체계적 탐구를 위한 토대로서 사용될 것이다:

(1) 시인이나 음악가가 만들어내는 것은 자기 작품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신(gods), 특히 뮤즈(Muses)로부터 전갈이나 시혜(施惠)이다. 시인이나 음악가는 뮤즈(Muses)가 수단으로 삼아서 말하는 도구일 따름이다; 시인이나 음악가는 신()의 대변자일 뿐이고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은 고의로 시인 중 가장 훌륭한 자들을 통하여 노래 중 가장 훌륭한 노래를 불렀다”.

(2) 신적(神的: divine) 정령에 사로잡힌 예술가는 (창조하거나 공연하거나) 열광적으로, 다시 말해서, 감정적으로 과도하게 흥분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상태가 공감적 공명(共鳴: resonance)의 과정에 의하여 청중에게 전달된다. (플라톤은 그것을 자석과 비교한다.)

(3) 시인이나 공연자가 시를 짓거나 암송할 때 그는 깊이 감동하고 정말로 ([]에게뿐 아니라 또한) 전언에 사로잡힌다; 예를 들어, 그가 서술하는 장면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의 감정적 상태만이라기보다 작품이 그의 청중에게 유사한 감정을 유도한다.

(4) 우리는, 훈련이나 학습에 의하여 습득되는 단순한 기교나 기량 혹은 기예와 신적(神的: divine) 영감을 구분해야 한다; 후자(後者)을 통해서만 시인이나 음악가가 만들어진다.

이 견해들을 전개하면서 플라톤은 전혀 진지하지 않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그는 겉으로 진지하면서 농담조로 말한다. 특히 한 가지 농담은 중요하고 아주 재미있다. 음유시인은 신이 들 때, (예를 들어,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았을지라도 겁에 질려 떨 때) 분명히 완전히 발광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대하여 음유시인 이온(Ion)은 이렇게 답변한다: “바로 그렇다: 나의 무대에서 그들을 내가 지켜볼 때 그들이 어떻게 우는지와 어떻게 그들이 경외에 사로잡힌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지 나는 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보아야 한다; 이유인즉 그들이 울면 내가 받는 돈 때문에 내가 웃을 것이고 그들이 웃으면 내가 잃을 돈 때문에 나는 울 것이다.” 분명히 청중의 반응에 의하여 음유시인의 행동을 조절하기 위하여 자기 청중을 살펴보는 동안 이 세속적이고 발광과는 동떨어진 고민에 의하여 음유시인이 사로잡힌다면 청중에게 남기는 음유시인의 커다란 영향력이 전적으로 그의 성실성에 ㅡ 다시 말해서, 그가 완전히 그리고 진정으로 신()이 들려 미쳤음에 ㅡ 달렸다고 그가 제안할 (이온[Ion]이 바로 그 장소에서 제안하는 바와 같이) 때 그가 진지할 리가 없다고 우리가 이해하기를 플라톤은 원한다. (여기서 플라톤의 농담은 전형적인 자기-언급 ㅡ 거의 역설적인 자기-언급 ㅡ 이다.) 사실상 플라톤은, 어떤 지식이나 기량도 (가령, 자기 청중을 매혹하는) 정직하지 못한 속임수나 기만일 터라고 강력하게 암시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지식이나 기량이 틀림없이 신적(神的: divine) 전언을 방해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음유시인은 (혹은 시인이나 음악가) 적어도 간혹, 신에게서 (gods) 진정으로 영감을 받는다기보다 능숙한 사기꾼이라고 암시한다.

현대 예술론을 표현으로서 (내가 거부하는 이론) 도출하기 위하여 플라톤의 이론에 대한 나의 목록 (1)에서 (4)까지를 나는 이제 이용하겠다. 나의 주요 주장은, 우리가 영감과 광분의 이론을 수용하지만 그 이론에 있는 신적(神的: divine) 근원을 버린다면 예술은 자기-표현이나 더 정확하게 자기-영감과 감정 표현 및 소통이라는 현대적 이론에 우리가 즉각 도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적 이론은 일종의 하느님이 없는 신학이다 ㅡ 신(gods)의 자리를 차지하는 예술가의 숨겨진 본성이나 본질을 지닌 신학이다: 예술가는 자신에게 영감을 부여한다.

분명히 이 주관론적 이론은, 요점 (3)을 틀림없이 버리거나 적어도 최소화한다: 예술가와 그의 청중은 예술 작품에 의하여 감정적으로 감동한다는 견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3), 예술과 감정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명하는 정확한 이론으로 나에게 보인다. (3), 시나 음악이 정서적 중요성을 지닌 장면을 서술하거나 묘사하거나 극화할 것이라고 그리고 시나 음악이 심지어 감정과 같은 것을 서술하거나 묘사할 것이라고 믿는 객관적 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여 이것이 예술이 중요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함의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라.)

예술과 감정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 객관론적 이론은 앞 절에서 인용된 케플러의 글귀에서 감지될 것이다.

그 이론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발흥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 이론은 틀림없이 바흐와 모차르트에게 수용될 수 있었다. 음악에 감정을 고취하는 그리고 감정을 위무하는 (자장가처럼) 그리고 심지어 인간의 인격을 형성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부언하면, 예를 들어 국가(Republic)에서 그리고 또한 법률(Laws)에서 설명되어 플라톤의 이론과 완벽하게 양립 가능하다: 몇몇 종류의 음악은 인간을 용감하게 만들지도 모르고 다른 음악은 인간을 겁쟁이로 변모시킬지도 모른다; 조금도 과장 없이, 음악의 힘을 과장하는 이론.

나의 객관론적 이론에 (자기-표현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 표현이 철저하게 사소함을 강조하는) 따라서 작곡자가 지닌 감정의 실제로 흥미로운 기능은, 그 감정이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객관적인) 작품의 성공이나 적합성이나 충동을 시험하는 데 이용되리라는 것이다: 작곡가는 자신을 일종의 시험 몸체로서 이용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는 자기 작품에 대하여 반응해보고 만족스럽지 못하면 그 작품을 수정하거나 다시 쓸 (베토벤이 자주 그랬듯이) 것이다; 아니면 그는 그 작품을 심지어 완전히 버릴 것이다. (작품이 주로 감정적이든 아니든 작곡가는 이런 방식으로 자기 창조물을 ㅡ 자신의 훌륭한 기호(嗜好)” ㅡ 이용할 것이다: 그것은 시행착오 방식의 또 다른 적용이다.)

플라톤의 이론 (4)는 자체의 비-신학적 형태에서, 예술가의 영감의 진실성보다 예술가의 자기-비판을 작품의 성실성으로 더 평가하는 객관론적 이론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이론 (4)와 같은 표현주의적 견해는 수사학(rhetoric)과 시학 이론의 고전적 전통이 되었다고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가 나에 알려준다. 그 견해는 심지어 감정에 대한 성공적 서술이나 묘사가, 예술가에게 가능한 감정의 깊이에 달렸다고 제안하는 지경까지 갔다. 그리고 음악과 예술에 대한 현대 표현주의적 이론을 낳은 것은, 순수한 자기-표현이 아닌 것을 허위로 연기하는불성실로서 간주하는 플라톤의 (4)의 세속화된 형태인 이 의심스러운 마지막 견해였을 가능성이 컸다.

요약하면; (1), (2) 그리고 (4)는 신(gods) 없이, 예술과 감정의 관계에 대한 주관론적이거나 표현주의적 이론의 언명으로서 간주될 것이고 (3)은 이 관계에 대한 객관론적 이론의 부분적 언명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이 객관론적 이론에 따라서, 작품에 주로 책임을 지는 것이 음악가의 감정이라기보다 음악가의 감정에 주로 책임을 지는 것이 작품이다.

음악에 대한 객관론적 견해로 이제 선회하면, (3)은 감정에 대한 음악의 관계에만 관련되기 때문에 이것에 대하여 분명히 충분할 리가 없고 그 감정은 예술을 중요하게 만드는 유일하거나 심지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음악가는, 마태 수난곡에서처럼, 감정을 묘사하여 우리의 공감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문제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많은 다른 문제가 있다. (이것은 건축과 같은 예술에서 명백한데 해결될 실용적이고 전문적 문제가 건축에 항상 있다.) 푸가를 작곡하면서 작곡가의 문제는, 흥미로운 주제와 대비되는 대위법을 발견하여 그다음 이 재료를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다. 그를 이끌어가는 것은 일반적 적합성이나 균형에 대한 훈련된 감각일 것이다. 결과는 여전히 감동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상은, 묘사된 감정에라기보다 적합성의 ㅡ 혼란 가까이에서 출현하는 우주의 ㅡ 감각에 근거할 것이다. 바흐의 인벤션(Inventions) 중 몇 가지에도 동일하게 언급될 것인데 그것들이 지닌 문제는 작곡에 대한, 음악적 문제해결에 대한 첫 번째 취향을 학생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유사하게 미뉴에트나 3중주를 작곡하는 과제는 음악가에게 확실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그 문제는, 자체가 반쯤 완성된 특정 모음곡(suite)에 맞아야 한다는 요건에 의하여 더 특수하게 될 것이다. 음악가를 음악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사람으로서 보는 것은 물론, 그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하찮게도,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몰두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과 매우 다르다.

 

나는, 객관론적 및 주관론적 음악이라는 두 가지 이론 사이의 차이점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분명한 관념을 제시하여 그 이론들을, 내가 두 가지 음악

모두를 사랑할지라도 당시 내가 보기에 매우 달랐던 두 가지 종류의 음악과

ㅡ 바흐의 음악과 베토벤의 음악 ㅡ 관련시키려고 시도했다.

사람의 작품에 대한 객관적이고 주관적 견해의 구분은 나에게 매우 중요해졌다; 그리고 그 구분으로 인하여, 내가 약 17세 혹은 18세였던 때부터 세

상에 대한 나의 견해의 색깔이 변했다고 내가 말할 것이다.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1993, 60-8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