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서술의 문제
흥미진진하고 유쾌한 많은 연구와 마찬가지로 확률은 우리에게 문제들을 던졌다.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다루어진 근본적 문제는, 물리학에서 확률서술의 시험가능성이었다. 이 문제를, 나의 일반적 인식론에 중요한 도전으로서 나는 간주하였고 이 인식론의 필수적 부분이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임시방편적 전제가 아닌 관념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했다. 이론적 서술에 대한 어떤 시험도 최종적이거나 결정적이 아니라는 것과, 경험적이거나 비판적 태도는 비판을 피하지 말고 반증을 수용하라고 (너무 쉽게는 아닐지라도) 우리에 알려주는 몇 가지 “방법론적 규칙”을 고수하는 관념이 그것이었다. 이 규칙은 본질적으로 다소 융통적이다. 결과적으로 반증 수용은 가설의 잠정적 채택과 거의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그것은 추측의 수용이다.
두 번째 문제는 확률서술에 대한 가능한 해석의 다양성이고 이 문제는, 나의 저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그러나 특징에서 전혀 다른) 두 가지 다른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한 가지 문제는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물리학에서 확률서술의 위상이라는 문제에 해당하는); 나머지 한 문제는 이론의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확률서술의 문제를 그 문제의 가장 일반화된 형태로 공략할 수 있기 위하여, 확률계산을 위한 공리체계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또 다른 목표를 위하여서도 ㅡ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 제시된, 입증은 확률계산의 의미에서 확률이 아니라는 나의 주장을 확립하기 위하여 ㅡ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입증의 특정 직관적 면모로 인하여 입증을 확률계산의 의미에서 확률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나의 주장.a (아래 주석155에서 159 사이의 원문 또한 참조.)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나는, 확률이라는 관념에 많은 가능한 해석이 있다고 지적했고 물리과학에서 리하르트 폰 미제스(Richard von Mises)에 의하여 제시된 것과 같은 빈도 이론만 수용될 수 있다고 나는 주장했다. (나중에 경향 해석을 도입함에 의하여 나는 이 견해를 수정했고 폰 미제스가 그 수정에 동의했을 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경향 서술은 여전히 빈도에 의하여 시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한수열로써 연산하는 알려진 모든 빈도 이론에 대하여, 몇 가지 사소한 반론과 별도로 나에게 한 가지 전문적 주요 반론이 있었다. 그 반론은 이렇다.
아무리 길더라도 0들의 그리고 1들의 (혹은 0들만의 아니면 1들만의) 여하한 유한수열을 생각하라; 그리고 그 수열의 길이를 n으로 하면 그 길이는 수십억이 될 것이다. n + 첫 번째 항에서부터 무한 무작위 수열로써 (“collective”) 계속하라. 그러면 결합 수열에 관하여, 어떤 말단(endpiece)의 (어떤 m ≥ n + 1로부터 계속) 성질이 중요한데 이유인즉 그 수열의 말단이 폰 미제스의 요건을 충족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수열은 그 요건을 충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한수열을 판단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 수열의 절편(the initial segment)인 경험적 수열이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제를, 폰 미제스와 헬리(Helly) 그리고 한스 한(Hans Hahn)과 (다른 많은 사람과) 토론할 기회가 나에게 있었다. 그들은 물론 동의했다; 그러나 폰 미제스는 그 문제에 대하여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견해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수열은 ㅡ 그가 그 수열을 지칭하는 바와 같이 “collective” ㅡ 구(球: sphere)와 같은 이상적인(ideal) 수학적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경험적 “구(球: sphere)”는 개략적 근사치일 따름일 수 있다.
나는 이상적인(ideal) 수학적 구(球: sphere)와 경험적 구(球: sphere)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 무작위 수열과 (“collective”) 무한 경험적 수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모형으로서 기꺼이 수용했다. 그러나 폰 미제스의 의미에서 유한수열이 collective에 대한 개략적 근사치로서 언급될 수 있는 만족스러운 의미는 없다고 나는 강조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상적이지만 덜 추상적인 것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바로 처음부터 무작위 성질을 지닌 이상적 무한 무작위
수열, 그리하여 길이 n을 지닌 모든 유한 절편은 가능한 한 이상적으로 무작위였다.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나는 그런 수열의 구축을 개괄했지만 이 구축으로 인하여 실제로 (a) 유한 경험적 수열과 비교될 수 있는 이상적 무한수열이라는 문제를; (b) 폰 미제스의 (비-구조적[noncontructive]) 무작위에 대한 정의(定義: definition) 대신 이용될 수 있는 수학적 수열을 구축하는 문제를; 그리고 (c) 이제 이것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한계의 존재에 대한 폰 미제스의 공준(公準: postulate)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당시 나는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 혹은 다시 표현하여, 나의 구축으로 인하여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제시된 해결책 몇 가지가 대체되었다는 것을 나는 당시에 깨닫지 못했다.
내가 제시한 이상화된 무작위 수열은 폰 미제스의 의미에서 “collectives”가 아니었다: 그 collectives가 무작위에 관한 모든 통계적 시험을 통과했을지라도, 확정된 수학적 구축물이었다: 그 collectives의 지속은, 구축 방법을 아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수학적으로 예언될 수 있었다. 그러나 폰 미제스는, “collective”가 예언 불가능할 것을 요구했다 (“도박 체계의 배제 원리[principle of the excluded gambling system]). 이 포괄적 요구에, collective의 어떤 사례도 구축될 수 없다는 불행한 결과가 있어서 그 요구의 일관성에 대한 구조적 증명이 불가능했다. 이 난제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물론, 그 요구를 완화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흥미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일관성에 (혹은 존재) 대한 증명을 허용하는 최소한의 완화는 무엇이었나?
이것은 흥미롭지만, 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핵심적 문제는 자의적 길이를 지닌 유한 무작위 같은 수열의 구축 그리하여 이상적 무한 무작위 수열로 확장될 수 있는 수열의 구축이었다.
1935년 초 나는 비엔나 학파의 핵심적 모임 중 한 모임에서 이것에 관하여 강연했고 그 후 나는 칼 멩거에 의하여 그의 유명한 “수학 토론회(mathematisches Colloquium)”에서 강연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나는 매우 선택된 약 30명의 사람의 모임을 발견했는데 그 가운데 쿠르트 괴델(Kurt Gödel), 알프레드 타스키 그리고 아브라함 발트(Abraham Wald)가 있었다; 그리고 멩거에 따르면, 나 자신도 모르게 확률과 통계학 분야에서 발트의 관심을 고취한 도구가 내가 되었는데 그 분야에서 발트는 대단히 유명했다. 멩거는 발트에 대한 부고에서 다음과 같이 그 사건을 기술한다:
당시 발트의 향후 삶과 업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판명된 두 번째 사건이 발생했다. 비엔나 시민인 철학자 칼 포퍼는... 무작위 수열이라는 관념을 정확히 하려고 그리하여 collectives에 대한 폰 미제스의 정의가 지닌 명백한 결점을 고치려고 노력했다. 내가 포퍼의 관념에 대한 반(半)-전문적 설명을 들은 (슐릭의 철학 학파에서) 후, 나는 수학 토론회(Mathematical Colloquium)에 그 중요한 주제를 아주 상세하게 제출해달라고 그에게 요청했다. 발트는 크게 흥미를 느꼈고 결과적으로 collectives라는 개념의 일관성에 관한 그의 완벽한 논문이 이루어졌다... 그는 collectives에 대한 자신의 존재 증명을, 저 개념의 이중적 상대화에 근거시켰다.
멩거는 나아가, 발트의 collective 정의(定義: definition)를 자기가 기술하고 규정하여 결론을 내린다:
발트의 상대화가 collectives에 대한 원래 무제한적 (그러나 작동될 수 없는) 관념을 제한할지라도, 그 상대화는 코플런드(Copeland)와 포퍼 및 라이헨바흐가 말하는 불규칙성 요건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 사실상 그 상대화는 이 요건을 특별한 경우로서 수용한다.
이것은 정말 사실이고, 폰 미제스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완화하는 문제를 발트가 탁월하게 해결한 데 나는 큰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발트에게 지적할 기회를 가졌던 바와 같이 그것은 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0과 1로서 동등한 확률을 지닌 “발트-collective”는 수십억의 0들로 구성된 블록으로써 여전히 시작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무작위는 한계 안에서 그것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의 문제일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나의 업적으로 인하여 원하는 길이로 구성되는 몇몇 무작위 수열의 ㅡ 말하자면 몇몇 매우 특별한 모형의 ㅡ 구축이 허용될 뿐인 반면, 발트의 업적은 모든 무한수열의 집합을 collectives와 noncollectives로 나누기 위하여 일반적 방법을 제공했다. 그러나 여하한 길이를 지닌 주어진 여하한 유한수열도 발트의 의미에서 collective나 noncollective가 되도록 그렇게 항상 지속될 수 있었다. (코플런드, 라이헨바흐, 처치[Church]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성립했다.)
나의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이, 철학적으로 완전히 만족스럽게 보일지라도, 일반화됨에 의하여 수학적으로 더 흥미롭게 될 수 있다고 그리고 발트의 방법이 이 목적을 위하여 이용될 수 있다고 나는 오랫동안 느꼈다. 나는 그 문제를 발트와 토론했는데, 그 자신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희망에서 나는 그와 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려운 시기였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다른 지역으로 이민하기 전에, 그 문제로 복귀하지 못했다.
확률과 밀접하게 관련된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서술이나 이론의 내용에 (그 내용의 척도에) 관한 문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나는, 서술의 확률은 서술의 내용과 반비례함을 그리고 그리하여 그 확률은 내용에 대한 척도를 구축하는 데 이용될 수 있음을 밝혔다. (내용에 대한 그런 척도는, 서술이 우연의 게임에 관해서가 아니라면 혹은 어떤 통계에 관해서가 아니라면, 기껏해야 상대적일 터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확률계산에 대한 해석 가운데서 적어도 두 가지가 크게 중요하다고 제시된다: (1) 동전 던지기나 장막에 전자가 도달하기와 같은 (단칭) 사건의 확률을 우리가 말하도록 허용하는 해석; 그리고 (2) 서술이나 명제의, 특히 추측의 (다양한 보편성 등급을 지닌), 확률. 이 두 번째 해석은, 입증 등급이 확률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나와 같이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도 또한 필요하다.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1993년, 99-103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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