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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전후 유럽에서 유대인 문제

이윤진이카루스 2025. 12. 18.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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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전후 유럽에서 유대인 문제

 

21. 다가오는 전쟁; 유대인 문제

내가 최악을 예상하기 시작한 것은 아래에 기술된 비엔나에서 벌어진 큰 저격 사건 이후인 19277월이었다: 중부 유럽의 민주주의적 보루들이 무너질 것 그리고 전체주의적 독일이 또 다른 세계대전을 시작할 것. 1929년쯤 서구의 정치가 가운데서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당시, 국외자였던 영국의 처칠만이 독일의 위협을 이해했다고 나는 깨달았다. 당시 나는, 전쟁이 몇 년 안에 벌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틀렸었다: 상황 논리를 고려하면 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모든 것이 훨씬 더 느리게 전개되었다.

분명히 나는 소란만 떨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나는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강력한 민주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남아있던 유일한 정당)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전체주의적 정당에 대항하기에 무력함을 나는 깨달았다. 1929년부터 계속 나는 히틀러의 발흥을 예상했다; 히틀러에 의한 이런저런 형태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나는 예상했다; 그리고 나는 서구에 대한 전쟁을 예상했다. (서구에 대한 전쟁[The War against the West]은 아우렐 콜나이[Aurel Kolnai]에 의한 탁월한 저서의 제목이다.) 이 예상에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나의 평가가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

나의 양친은 모두 유대 종교 속에서 태어났지만, 자녀가 태어나기 전에 개신교로 (루터) 세례를 받았다. 많이 생각한 다음 나의 부친은, 압도적으로 기독교적인 사회에 살면 가능한 한 적게 죄를 짓는 ㅡ 동화되는 ㅡ 의무가 부여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조직된 유대교에 죄짓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유대론을 두려워하는 비겁자로서 비난받는 것을 의미했다. 이 모든 것은 이해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답은, ()-유대론은 사악한 것이고 유대인과 비-유대인 모두에 의하여 우려의 대상이 될 것과 반()-유대론을 촉발하지 않도록 모든 유대인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유대인의 과제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많은 유대인이 다른 사람들과 정말로 섞였다: 동화가 일어난 것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자신들의 인종적 출신 때문에 경멸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그 출신을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함으로써 대응해야 함은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인종적 자존심은, 인종적 증오에 의하여 촉발되었을지라도, 어리석을 뿐 아니라 틀렸다. 모든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주의는 사악하고 유대인의 민족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1차 세계대전 이전 오스트리아와 심지어 독일도 유대인을 아주 잘 대우했다고 나는 믿는다. 유대인에게, 전통적으로 확립된 몇 가지 장애물이 있었을지라도, 거의 모든 권리가 주었는데 특히 군대에서 그랬다. 완벽한 사회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유대인이 모든 면에서 동등하게 대접을 받았을 터이다. 그러나 모든 사회처럼 이 사회도 완벽함과 거리가 멀었다: 유대인과 유대인 피를 가진 사람들이 법 앞에서 평등했을지라도, 그들은 모든 면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은 우리가 합당하게 예상할 수 있었던 만큼 잘 대우를 받았다고 내가 믿는다. 천주교로 개종한 유대인 가족 일원이 심지어 대주교가 (알뮈츠의 콘[Kohn of Almütz] 대주교) 되었다: 인기 높은 반()-유대론을 이용하는 모함 때문이었지만, 그는 자기 위치에서 1903년 사퇴해야 했다. 대학교수, 의료인, 법률가 가운데서 유대인이나 유대인의 피를 지닌 사람들의 비율이 매우 높았고, 공공연한 원한은 1차 세계대전 이후에만 이것으로 인하여 높아졌다. 세례받은 유대인은 공무원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언론은 많은 유대인을 매료시킨 한 가지 직업이었고, 상당히 많은 유대인이 직업적 수준을 높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 사람 중 몇몇이 담당한 선정적 언론의 종류는 여러 해 동안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ㅡ 문명화된 수준을 옹호하려고 조바심하는 칼 크라우스(Karl Kraus) 같은 다른 유대인에 의하여 여러 해 동안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이 논쟁에 의하여 발생한 혼란 때문에 논쟁자들이 유명해지지는 않았다.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가운데 뛰어난 유대인들이 또한 있었고, 그들이 지도자로서 사악한 공격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긴장상태의 고조에 기여했다.

분명히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많은 유대인이 토착주민과 두드러지게 달리 보였다. 부유한 유대인보다 가난한 유대인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부유한 유대인 중에서 얼마간은 전형적 벼락부자이었다.

부언하면 영국에서 반()-유대론이, 유대인은 대금업자라는 (또는 한때 그랬다는) 베니스의 상인에서나 디킨스(Dickens) 혹은 트롤로프(Trollope)의 작품에서와 같이 ㅡ 관념과 연결되는 반면, 적어도 나치의 발흥 이전 이런 주장이 제기되는 것을 나는 듣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인 로트쉴트(Rothschilds)와 같은 유대인 은행가가 몇몇 있었지만, 그들이 우리가 영국 소설에서 읽는 바와 같이 개인에게 사사로이 돈을 빌려주는 종류의 대금업에 종사한 적이 있다고 암시되는 것을 나는 들은 적이 없다.

오스트리아에서 반()-유대론은 기본적으로, 외국인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을 향한 적대감의 표현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 민족주의당에 의해서 뿐 아니라 로마가톨릭당에 의해서도 이용당한 감정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특징적으로 외국인에 대한 비난받아 마땅한 이 혐오감은 (거의 보편적으로 느껴지는 태도) 유대인 피를 가진 많은 가족에 의해서도 공유되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구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유대인 피난민들이 비엔나로 들어왔는데 오스트리아 제국은 러시아의 침공을 받았었다. 동방 유대인들, 당시 그렇게 지칭된 바와 같이, 거의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인 게토로부터 곧장 왔고, 그들은 비엔나에 정착한 저 유대인들에 의하여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동화됨에 의한, 많은 정통 유대인에 의한, 그리고 심지어 시온주의자에 의한 혐오의 대상이었는데 시온주의자들은 자기들과 관계가 별로 없다고 간주하는 사람들을 부끄러워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면서 상황은 법적으로 개선되었다; 그러나 조금 감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던 바와 같이, 상황은 사회적으로 악화되었다: 많은 유대인이 자유와 평등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해될 수 있지만, 현명하지 못하게 정치와 언론에 뛰어들었다. 그들의 의도 대부분은 좋았다; 그러나 좌파 정당으로 유대인들이 합류함으로써 그 정당의 몰락에 불이 붙었다. 인기 있는 반()-유대론이 이곳저곳에서 많이 잠복한 상태에서 우연히 유대인 피를 지닌 훌륭한 사회주의자가 자기 정당에 제공할 수 있었던 최고의 역할은, 그 정당 안에서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임 아주 명백해 보였다. 기묘하게도 이 명백한 규칙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이 보였다.

결과적으로 우파와 좌파 사이의 싸움은 거의 처음부터 일종의 차디찬 내전이었는데 반()-유대론의 기치 아래 점점 더 우파에 의하여 치러졌다. 비엔나 대학에서 반()-유대론적 폭동이 빈번했고 교수 사이에 유대인이 너무 많다고 항의가 항상 일어났다. 유대 혈통을 지닌 사람은 대학교수가 되기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우파 중 경쟁하는 정당들이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에 서로 더 열중했다.

적어도 1929년 이후 내가 사회민주당의 패배를 예상한 다른 이유는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의 각주 몇 가지에서 발견될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 이유는 마르크시즘과 ㅡ 더욱 특히, 폭력을 적어도 위협으로 사용하는 정책과 (엥겔스에 의하여 언명된) ㅡ 관련되어 있었다. 폭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은 19277월 비엔나에서 몇십 명의 평화롭고 무장하지 않은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와 구경꾼에게 발포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나의 아내와 나는 (우리는 아직 결혼 전이었다) 그 장면을 믿지 못하고 목격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의 ㅡ 비록 그들이 좋은 의도로 행동했을지라도 ㅡ 정책이 무책임함과 동시에 자살적이었다는 것이 나에게 분명히 보였다. (부언하면 프리츠 아들러[Fritz Adler]가 ㅡ 아인슈타인의 친구이자 뒤엠[Duhem]을 번역한 사람이며 비엔나 최고의 사회민주주의 지도자 아들 ㅡ 학살극이 끝나고 며칠 후인 19277월에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같은 의견을 지니고 있음을 나는 발견했다.) 6년 이상이 지나서야 사회민주당의 최종적 자살행위로 인하여 오스트리아에서 민주주의가 끝났다.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1993, 104-7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