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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케니 지의 '미러클'을 색소폰으로 연주하는 꿈

이윤진이카루스 2012. 8. 4.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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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니 지의 ‘미러클’을 색소폰으로 연주하는 꿈

등록 : 2012.08.03 19:48 수정 : 2012.08.03 19:48

 

7월19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강기훈씨. “지나온 세월이 억울하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에 유리창 밖에서 비친 나뭇잎이 드리워져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간암 투병중인 강기훈씨

1991년 정국을 뒤흔들었던 유서대필(자살방조) 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을 읽다 보면 세 가지 사실에 놀랍니다. 첫째, 판결문이 너무 길다는 것, 둘째, 범행의 일시, 장소, 행위방법이 특정되지 않은 공소사실에 유죄판결이 내려졌다는 것, 셋째, 그 긴 판결문에 막상 공소사실 자체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고 사후 정황에 대한 끝없는 설명만 넘쳐난다는 것. 똑똑한 판검사들이 결론을 정해놓고 벌인 기괴한 비논리의 향연에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법의 기본원칙은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지루한 공방이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의 관심은 점차 사건의 본질에서 멀어졌고, 잊힌 인간 강기훈의 삶은 뿌리까지 무너져 내렸습니다. 벌써 21년 전의 일입니다. 서울 광화문의 조그만 카페에서 만난 강기훈 선생은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많이 여윈 상태였습니다. 그는 언론에 대한 아쉬움으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옛날에는 사건 얘기를 잘 안했어요. 하루라도 빨리 잊고 싶었던데다, 초반에는 직장생활에 지장이 많았거든요. 회사에서 영업을 하는데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오면 어떻게 됩니까? 민감해지죠. ‘찾아오는 건 괜찮지만 카메라 들이대며 요란스럽게 오면 안 된다’고 조건을 걸어도 그걸 지키는 기자는 아무도 없더라고요. 자기들이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그대로 사실처럼 쓰는 언론도 있고.”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하고 또 토하고…

-간암 수술을 하셨죠? 부모님도 간암으로 돌아가셨던데 가족력이 있는 건가요?

“부모님은 다른 데서 시작된 것이 간으로 옮겨온 경우라 저하고는 좀 다릅니다. 저는 원래 B형 간염이지만 비활성이라 괜찮은 상태였는데 작년 6월 말이던가 사무실에서 근무하다가 이상하게 체한 것 같아서 화장실에서 토했더니 음식물이 아니라 피가 나왔어요. 간경변에 의한 위정맥류였죠. 약 먹고 굉장히 조심하며 시티(CT)도 3개월마다 찍었고 올해 1월까지만 해도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4월에 검사하니 의사의 표정이 안 좋더라고요. 결국 5월15일에 암 진단을 받았고 23일에 바로 수술을 했어요.”

-수술 경과는 어떻습니까?

“복강경 수술은 일단 무사히 끝났는데 며칠 뒤에 또 위출혈로 피를 엄청 쏟았어요. 하필이면 휴일 새벽에. 레지던트들만 있는 시간인데, 걔들은 참 호기심도 많아서 프로토콜대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저는 그동안 초주검이 됐는데 걔들은 환자를 보지 않고 데이터만 봐요. 이것저것 막 하죠.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저는 항의하고 욕하고 레지던트들에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 나랑 원터치 한번 까자’고 하다가 피를 막 토하고.(웃음) 내시경 넣어서 지지는데, 제가 피를 워낙 많이 흘린 상태라서 의사들은 정신 놓으면 처치를 못한다고 저를 깨웠죠. 제가 깜빡하는 순간 다른 차원으로 가는 거였어요. 그다음에는 폐에 물이 차서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서 관으로 물을 빼내는데, 어휴, 숨 쉴 때마다 정말 아프더라고요.(웃음) 3주가 지나서 퇴원을 했어요. 그리고 1주일 뒤에 정맥류가 또 터져서, 이번에는 토한 게 아니라 밑으로 혈변이 나와서, 8일을 더 입원했죠. 지금까지 내내 병원에 있었던 셈이에요.”

-오늘은 출근하신 건가요?

“이틀 전부터 회사를 나가는데 일을 하겠다기보다는 우선 일을 할 수 있는지 몸을 움직여보는 거죠. 병명 자체가 워낙 살벌한 거라서. 1년 내 재발률이 70퍼센트가 넘는다고 얘기해주는 의사도 있더군요. 5년까지 살 확률은 5~7퍼센트? 제 나이 때는 더 낮대요. 그 얘기 듣고 ‘네, 감사합니다’ 그럴 수도 없고.(웃음) 그냥 ‘알았다’고 했어요.”

심각한 상태를 털어놓으면서도 그는 잘 웃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기가 막힌 듯한, 조금은 냉소적인, 헛헛한 웃음이었습니다. 긴 고통을 겪으며 자기 상황을 객관화하는 훈련이 된 사람 같았습니다. 2009년 서울고등법원의 재심 결정이 내려진 이후 3년 가까이 결론을 미루고 있는 대법원의 답답한 태도에 대해서도 그는 담담했습니다.

“고등법원 결정이 나고도 저는 쉽게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즉시항고를 한 검찰은 제대로 된 수사는 하지 않으면서 조직방어에만 늘 적극적이죠. ‘수사는 적법했고, 판결은 법원이 한 것’이라면서 구체적인 상황을 딱딱 짚어가며 문제가 없었다는 말만 해요.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예요. 아니, 거꾸로 뒤집힌 거죠. 조직방어 논리로만 움직이는 건데, 당사자들이 현직에 있건 없건 걔네들이 그런 조직이에요.”

-대법원이 왜 빨리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그들 입장에서는 그게 유일한 방법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당사자도 나이를 먹지 않겠어? 아프거나 포기하지 않겠어? 그러다가 성질나면 이민을 가겠지?’ 하고 바라는 거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또 잊어버릴 거고.”

전교 1등을 도맡아 했지만 가난과 전쟁 때문에 초등학교밖에 못 마친 어머니와 평생을 초등학교 평교사로 일한 아버지 사이에 2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강기훈은 어린 시절 “분유 뚜껑을 두드릴 때부터” 탁월한 리듬감을 인정받았던 아이였습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한때는 작곡가를 꿈꾸며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등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교회 선배들의 영향으로 리영희 선생 등의 책을 읽으며 일찍이 사회과학에 눈을 뜬 그는 1982년 단국대 화학과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집에서 대자보를 쓰는 아들을 보고 “너 혼자 볼 거냐?”고 묻던 아버지는 “학교에 붙일 것”이라는 아들의 대답에 아무 말 없이 한숨만 푹 쉬셨다고 합니다.

“아들이 옳다고 생각하신 거겠죠. 3학년 2학기 때 제가 단국대 민주화추진위원장을 맡아 단식을 하는데, 학교 등쌀에 못 이겨 찾아오신 아버지께서 ‘밥은 먹으면서 해라’ 딱 한마디만 하고 가셨어요. 기관원들이 벙 쪘죠. 집회 도중에 찾아와 ‘이년아’ 하면사 머리채 붙잡고 잡아가다가 ‘너 죽고 나 죽자’며 딸을 계단에 굴려버리는 아버지도 있던 시절이었거든요.”

“쟤네들 원하는 대로 다 이뤄지더라고요”

단국대에서 민추위, 삼민투 등 “이제는 정확한 명칭조차 기억나지 않는” 위원회들의 장을 맡으며 반독재 투쟁에 나섰던 강기훈은 제적과 수배를 거쳐 85년 11월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구속됩니다. “규격에 따른” 반성문을 쓰면 예외 없이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쓰지 않았습니다.

“후배에게는 반성문 쓰고 나가라고 했어요. 진심이 아닌 걸 다 아니까 괜찮다고. 하지만 저는 안 썼죠. 군사독재 타도, 민주헌법 쟁취 같은 걸 좀 세게 요구하다가 들어온 건데, 학교 대표가 어떻게 반성문을 써요?(웃음) 20개월 살았던 첫번째 감옥생활은 고생도 많았지만, 참 재밌고 즐겁고 유익했어요. 두번째와 비교할 때 그렇다는 거예요.”

감옥에서 나온 뒤 노동운동에 투신한 강기훈은 89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소속으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 파견되어 민생대책협의회, 사회부 등에서 간사로 활동합니다. 파업 현장에 구사대가 투입되거나 노점상이 강제 철거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짧으면 2~3일, 길면 10일씩 농성에 참여하는 고된 하루하루였습니다. 그러다가 컴퓨터를 잘한다는 이유로 떠맡은 보직이 전민련 총무부장이었습니다. 91년 4월26일 강경대군 치사 사건이 터지면서는 전국의 상황을 집계해 전파하는 일종의 상황실장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당시 전민련은 정치권 진출 문제로 의견이 갈려 어수선한 분위기였습니다. 무슨 일을 조직적으로 꾸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졸지에 운명의 그날, 91년 5월8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함께 일하던 김기설씨가 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겁니다.

“저는 (김기설씨가 자살하겠다는 것을 주변에서 만류하던) 전날의 상황을 몰랐어요. 어버이날 전날이라 부모님 댁에 일찍 가자는 얘기를 동생과 주고받고 좀 일찍 퇴근했고요. 막내하고 집에서 수다를 떠는 동안 연세대에서는 그 난리가 났던 거죠. 5월8일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9시45분인가 뉴스를 보는데 분신 소식이 나오는 거예요. 숟가락 놓고 뛰어나갔죠. 사무실에 나가서 이야기를 듣는데 처참했어요. ‘어떻게 된 거야? 왜 못 붙잡았지? 누가 끝까지 같이 있었어? 도대체 어떤 새끼가 놓친 거야?’ 나중에 보니까 (김씨를) 놓친 애는 연세대에서 퍼져 자고 있었어요. 너무 화가 나서 밟아주고 싶더라고요. 내부의 분위기는 그랬어요. 분신이 계속되고 정신은 하나도 없는데 우리가 뭘 준비해요? 저희도 멘탈이 간(정신적으로 무너진) 상태였는데.”

-분신이 많았던 상황이기는 했죠?

“그 방법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분신하는 거예요. 제일 좋지 않은 방법이죠. 자살이라는 방법의 극단성이 제 신념하고는 맞지 않았어요. 당시에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지만 제게는 어머니에게 받은 기독교적 영향이 강했으니까요.”

-분신의 배후로 찍혔을 때 심정은 어땠나요?

“웃긴다고 생각했어요. ‘쟤네들 대체 뭐하는 거야? 맥락도 없이?’ 이게 첫 반응이었어요. ‘쟤들의 수가 이거였나? 차라리 잘됐다, 싸워보자.’ 그때는 제가 이길 줄 알았죠. 그런데 쟤네들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더라고요. 제가 세상을 너무 순진하게 본 거죠.”

-강경대군 치사 사건으로 구석에 몰린 상황에서 공안당국은 반전의 계기가 필요했겠죠?

“김기설씨보다 며칠 앞섰던 안동대 김영균씨 분신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조직사건으로 엮으려다가 당사자가 자살을 하니까 선배 중의 한 명을 찍어서 ‘네가 태워 죽였다’고 밀어붙였죠. 제가 겪은 일과 완전히 똑같았어요.”

-결백을 주장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할 때도 많이 힘들었죠?

“주변에서 ‘혹시, 했니?’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궁금해서 물은 것일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엄청난 상처였어요. 신문 보도보다 그게 훨씬 더 힘들었어요. 한 방에 멘탈이 가더라고요.”

-동료들로서는 일단 사실부터 확인하고 싸움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아니었을까요?

“싸움이요? 대부분은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핑계대고 도망갔는데요? 농성장에서 차 트렁크에 숨어서 나가고, 뒷담치기 해서 나가다 잡히기도 하고. 그래 놓고 전민련 열심히 했다는 소리들을 하죠. 지금 여당 국회의원이 된 친구는 ‘일단 도망가라. 두세달 지나면 조용해진다. 지금 잡히면 10년 형을 받지만 조용해지면 집행유예로 끝난다’고 하더군요. 그거 듣고 웃었어요. ‘너는 그렇게 살아라. 나는 그렇게 못 살겠다. 싸워야겠다’고 했죠. 다들 그렇게 도망간 상황에서 끝까지 책임진 게 당시 전민련에 들어온 지 몇 달 되지도 않던 서준식 선생이었어요. 자기들은 정치 입신하면서 귀찮은 일을 모두 서 선생에게 맡겨버린 거죠.”

-대법원 판결문은 읽어보셨죠?

“92년 여름 교도소에서 대법원 확정판결문을 받았을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때입니다. 읽다가 찢을 뻔했어요. 문장은 비문이고 주술관계도 엉망이고, 무슨 대법관들이 이런 문장을 쓰나, 판결문이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사건을 처리한 판검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요. 제가 원래 혈압이 좀 낮습니다. 특히 밤이면 혈압이 많이 떨어져요. 며칠 전 밤에 병원에 실려 갔는데 레지던트는 제 혈압을 보고 비상상황이라고 생각했어요. 주치의가 퇴근하면 레지던트가 ‘밤의 권력’인데, 하필 공명심에 불타는, 뭔가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애가 온 거예요. 제가 ‘평소에도 그러니까 혈압에 대해서는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절대 듣지 않아요. 얘가 중심정맥을 잡겠다고 어깨에 구멍을 뚫는데 수십번을 해도 못 잡는 거예요. 저는 굉장히 아픈데 얘들은 절대 환자를 보지 않죠. 얘들의 시선은 구멍을 뚫는 데만 가 있어요. 겨우 성공해서 한 방울씩 처방을 늘려가다가 아침에 심장쇼크가 왔어요. 주치의가 나중에 보고 황당해하면서도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해서 사고가 나는 것보다는 그래도 쇼크가 오든 말든 뭘 하다가 실수하는 게 레지던트 입장에서는 덜 혼날 일’이라고 설명하더군요. 그게 프로토콜이에요. 검사도 똑같아요. 대한민국에서 ‘사’자 붙은 직업 중 가장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애들, 공명심에 불타는 애들이 검사예요. 여자 검사들도 있지만, 여전히 거기는 수컷세상인데, 대한민국 수컷들은 권력을 쥐면 휘두르고 싶어 안달이거든요. 그게 메커니즘이죠. 검사들이 정치권력의 눈치를 본다고요? 아니에요. 걔들은 자기 논리대로 움직여요. 자기 조직의 논리가 자기 논리이기도 하죠. 그 논리를 가지고 일을 저지르면 조직 안에서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아요. 뭐라도 일을 벌여야 올라가는 거예요. 실존적으로 고민해봐야 소용없고요, 걔들을 움직이는 건 딱 한 가지예요. 뭐라도 하겠다는 공명심.”

레지던트의 무리한 프로토콜, 검사들도 똑같아

-판결문에도 나오는 여자친구와 출소 직후 결혼하셨죠. 아이들은 아빠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내는 전민련 시절 학교 과모임에서 만난 후배였어요. 학생 때는 몰랐고요. 큰애가 고2, 작은애가 중3인데, 둘째는 책 읽기를 좋아해서 할머니가 쓴 책(94년 출간된 <너를 위한 촛불이 되어>)도 읽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저도 ‘대한민국 아빠’라 애들 생각은 잘 모르겠어요. 애들도 제가 병원에 있을 때는 불쌍해 보이는지 잘해주다가, 퇴원해서 잔소리하면 싫어하죠.(웃음)”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암 선고를 받고 버킷 리스트를 쓰다가 눈물이 나서 두세개 적고 그만뒀어요.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음악이었어요. 케니 지의 ‘미러클’이라는 색소폰 곡. 중학교 때 잠깐 클라리넷을 했는데 색소폰과 클라리넷의 운지법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집 앞의 색소폰학원에서 배워 그걸 연주해야겠다, 그리고 예고 입시를 준비중인 딸의 반주를 해주고 싶다고 썼죠.”

인터뷰를 준비하는 동안 유서대필 사건의 당사자에 대해 알려진 것이 너무 적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언론도 사건의 복잡한 전개 과정을 설명하다 보면 시간과 지면이 금방 바닥나서 정작 그 중심에 선 인간에게 공간을 할애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온몸으로 경험한 강기훈의 통찰처럼, 어쩌면 판검사, 의사, 언론인처럼 힘깨나 쓰는 전문가들의 공통된 문제가 인간 개개인에 대한 깊은 관심의 결여인지도 모릅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강기훈은 작은 목소리로 “왜 나한테 자꾸 이런 일이 오는지, 억울하고 기분이 더럽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고통에는 뜻이 있다”고 병실에서 전도하는 사람을 보면 “내 성격이 못돼서, 인간이 덜돼서 그런지, 한대 때려주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예의 그 헛헛한 웃음을 날리는 그의 눈가로 언뜻 눈물이 비쳤습니다. 타협을 거절한 인간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을 못 본 척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언제든지 강기훈처럼 억울한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