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의 촉석루 모습.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는 두 차례의 격전이 벌어진다. 진주대첩이라 불리는 1592년의 1차 전투에서는 김시민 등의 분전으로 승리를 거두고 일본군의 진격을 막아내어 전라도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1593년 일본군은 조·명 양국이 강화협상 때문에 논란에 휩싸인 틈을 타서 진주성에 대한 보복전에 다시 나선다. 김천일을 비롯한 관민들은 중과부적의 조건에서도 처절한 항전을 벌여 끝내는 일본군의 서진을 차단하는 위업을 남겼다. 진주시청 누리집(홈페이지)에서 전재 |
[토요판]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21) 진주성의 비극
조선시대 진주는 경상도 서부의 중심 도시이자 육로와 수로를 통해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거진(巨鎭)이었다. 1592년 10월, 일본군은 호남으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해 진주성을 공격했다.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등이 이끄는 약 2만의 일본군은 전후 6일 동안 줄기차게 공세를 펼쳤지만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이끄는 약 4천의 조선군을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일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고 만다. 진주대첩으로 불리는 이 승전의 의미는 컸다.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반격의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니시의 발뺌, 유정의 허풍
반면 육전의 연승에 제동이 걸린 일본군 지휘부는 앙앙불락했다. 그들은 1차 전투 패전 이후 김시민을 ‘모쿠소’(もくそ)로, 진주성을 ‘모쿠소조’(もくそ城)로 부르기도 했다. 모쿠소는 ‘목사’(牧使)에서 나온 말이다. 그만큼 자신들에게 패배를 안긴 김시민에 대해 강한 인상을 갖게 되었다. 1593년 초부터 진주를 다시 공격할 기회를 엿보던 그들은 명군 지휘부가 결전 대신 강화협상에 매달리고 있던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공략하여 전라도와 경상도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잇따라 내렸다. 그는 전투를 태만히 하는 장수들의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했는가 하면, 진주성을 함락한 뒤 모든 관민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1차 전투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기적적으로 막아냈던 진주성은 다시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된다.
명군 지휘부는 일찍이 일본군이 대군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경략 송응창은 심유경에게 고니시 유키나가를 만나 공격을 중지하도록 설득하라고 지시했다. 고니시는 심유경에게 ‘나는 진주성 공략에 관여하지 않으며 가토 기요마사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있다’고 발뺌했다. 그러면서 조선 측이 성을 비우고 철수하는 것만이 비극을 막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심유경은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에게 서한을 보내 고니시와의 면담 내용을 설명했다. ‘일본군이 진주를 다시 공격하는 것은 1차 전투에서 일본군이 많이 죽고, 선박이 다 타거나 파손되었던 것에 복수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또 ‘조선 군사들이 꼴을 베는 일본군을 죽였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심유경의 말대로라면 일본군은 김시민과 이순신 등에게 당한 패배를 진주성에 대한 재침을 통해 되갚으려는 셈이었다. 또 조선군이 명군 지휘부의 강화 방침에 따르지 않고 일본군을 함부로 공격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라는 것이다. 심유경은 “공격을 피하려면 군민들을 모두 내보내고 진주성을 비우는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마치 고니시의 대변인 같은 발언이었다.
당시 남부 지방에는 약 3만여명의 명군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유정(劉綎)과 오유충(吳惟忠) 휘하의 병력이 대구에, 낙상지(駱尙志)와 송대빈(宋大斌) 휘하의 병력이 남원에, 왕필적(王必迪)의 병력이 상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군 지휘관 그 누구도 진주성을 돕거나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이려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진주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유정은 가토 기요마사에게 서한을 보낸다. 내용의 핵심은 “작년의 패배를 설욕한다는 명분으로 진주를 다시 공격할 경우 명군은 수백척의 전함에 백만 대군을 실어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섬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허풍만으로 일본군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진주성 공략을 위해 9만2천여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동원했다. 일본군의 어마어마한 군세에 질린 조선 장수들 또한 진주성에 들어가 일본군과 결전을 벌이는 것에 반대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의령에 있던 성주목사 곽재우와 경상좌병사 고언백은 ‘중과부적 상태에서 입성하는 것은 불리하다’며 성으로 들어가려던 전라도순찰사 권율을 말렸다. 순변사 이빈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도 진주성 바깥으로 물러났다. 일본군의 재침을 코앞에 둔 진주성은 조선군과 명군 모두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촉석루 아래 남강변의 의암(義巖). 진주성이 함락된 직후 논개(論介)가 일본군 장수를 껴안고 투신하여 순절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논개의 사적은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기록한 이후 널리 알려졌고,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義巖’(의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진주시청 누리집에서 전재 |
일본은 진주성을 재침공했다
가토 기요마사에 김천일이 맞섰다
병력 9만여명 대 4천명 김천일·최경회 등의 처절하고 의로운 죽음 다른 장수들이 들어가기를 꺼렸던 진주성을 사수해야 한다고 자발적으로 입성한 인물이 있었다.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이었다. 그는 ‘진주는 호남으로 연결되는 전략 요충이므로 호남에 일본군을 들이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성으로 들어갔다.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던 김천일이 들어오자 진주성 군민들의 사기는 고양되었다. 하지만 당시 진주성의 조선군 병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김천일 이외에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진주판관 성수경(成守慶),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거제현령 김준민(金浚民),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 등이 거느리던 군병이 대략 4천명 정도였다. 그밖에 부녀자를 포함한 민간인들을 합하여 대략 6만명가량의 관민들이 성안에 있었다.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 성안의 분위기는 스산했다. 6월18일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와 홍계남(洪季男) 등이 ‘너무 많은 적을 상대할 수는 없다’며 성을 빠져나가 전라도 운봉으로 물러났다. 19일에는 명나라 장수 유정이 휘하 장수를 보내 성 주변의 지형과 방어 상황을 살피도록 했다. 이 명나라 장수는 성 안팎을 정찰한 뒤 ‘남으로는 큰 강이 있고 북으로는 깊은 연못이 있으니 진주성은 천하의 요새’라고 찬양했다. 그는 20일 ‘명군이 밖에서 원조할 것이고 나는 유정에게 달려가 상황을 보고하겠다’며 가버렸다. 20일 아침에는 심유경이 보낸 첩문(帖文)이 도착했다. 첩문은 “지난번에 유시했던 바와 같이 성을 비우고 일본군을 피하라”는 내용이었다. 22일부터 일본군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7만의 병력으로 직접 공격에 나서고 나머지 2만가량을 진주 주변의 요충지에 매복시켜 외부의 지원군이 오는 것을 차단했다. 그야말로 진주를 말려죽일 심산이었다. 낮부터 밤까지 조총 탄환이 비 오듯 날아들고 조선군 또한 화살을 난사하며 맞섰다. 사흘에 걸친 맹렬한 공격에도 조선군이 잘 버텨내자 일본군은 갖가지 공격 도구를 모두 동원하여 덤볐다. 25일에는 성 밖에 흙산을 쌓아 성을 내려다보면서 조총을 쏘아댔다. 또 큰 나무로 망루를 만든 뒤, 병사들을 태워 총격을 가했다. 조선군 또한 높이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성안에 구릉을 쌓고, 화포를 쏘면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6월27일 일본군 지휘부는 성안에 서신을 보내 항복하라고 권고했다. “장수 한 사람을 내보내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구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선군 지휘부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일본군은 귀갑차(龜甲車)라는 전차까지 동원하여 공격을 재개했다. 처절하게 저항하던 조선군의 예기가 꺾인 것은 충청병사 황진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 전투를 진두지휘하던 그가 6월28일 조총에 맞아 절명했다. 그는 김천일과 더불어 관민들이 의지하던 기둥이었다. 그가 죽자 조선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6월29일 비에 젖은 동문의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 틈을 타고 일본군이 개미떼처럼 몰려오자 조선군은 궁시를 버리고 백병전을 벌였다. 사력을 다해 공격을 물리쳐도 잠시뿐, 수가 월등히 많은 일본군은 끝없이 밀려들었다. 결국 서문과 북문의 방어도 무너졌고 조선군의 잔여 병력들은 모두 남쪽의 촉석루 쪽으로 내몰렸다. 일본군이 다가오자 김천일 부자를 비롯하여 최경회, 고종후(高從厚) 등 장수들은 대부분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처절하면서도 의로운 죽음이었다.
진주의 창열사(彰烈祠). 1592년과 1593년 진주성을 지켜내기 위해 싸우다가 순절한 김시민(1554~1592), 김천일(1537~1593), 황진(1542~1606), 최경회(1532~1593) 등 장수들을 모신 사당. 1607년(선조 40년) 사액(賜額)되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5호. 진주시청 누리집에서 전재 |
비처럼 날아든 탄환에 무너졌다
백성 6만명이 학살되고
일본군은 약탈을 일삼았으나
명은 여전히 싸울 의지가 없었다 마지막 보루인 호남을 지켜내다 진주성을 함락시킨 뒤 일본군은 대도살을 자행했다. <징비록>은 일본군이 진주에서 학살한 조선 관민의 수를 6만여명이라고 기록했다. 또 ‘일본군은 성을 무너뜨리고 우물을 메우고 집에 불을 지르고 소와 말, 닭과 개까지도 남김없이 죽여 없앴다’고 적었다. 구 일본군 참모본부가 발간한 <조선역>(朝鮮役)에서는 당시 일본군이 획득한 조선인의 수급을 2만여개라고 하면서 조선 쪽의 기록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설사 일본 쪽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일본군이 조선의 민간인들에게 무지막지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적이 조선 백성들을 죽이다가 지쳐 나중에는 창고 등지로 한꺼번에 몰아넣고 불을 질렀다’는 참혹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진주성 점령 후 일본군은 전라도 공략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진주성 싸움 때문에 진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 중에는 ‘진주성 관민들의 처절한 저항 때문에 일본군의 예기가 꺾였다’며 병사들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건의한 자가 있었다. 가토는 건의를 받아들이고 전라도 진공을 포기한다. 이후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장기 주둔 태세로 들어간다. 김천일 등 진주성의 관민들은 비록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의 마지막 보루인 호남을 지켜내는 위업을 남겼다. 진주성의 참상이 알려진 직후, 명군 지휘부가 매달리고 있던 강화협상에 대한 조선 조정의 반감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신료들에게 강화협상을 주도한 심유경에 대한 원한을 토로하고 그 때문에 조선이 망하고야 말 것이라고 통탄했다. 하지만 석성, 송응창으로 이어지는 명군 최고 지휘부의 강화에 대한 집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송응창은 일본군이 남해안에 여전히 머물고 있음에도 1593년 8월, 명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일본군이 모두 철수하는 것처럼 분식했다. 일본군이 남해안에 쌓은 성에 처박혀 철수하지 않자 명군 또한 영남 등 각 지역에 머물면서 일본군을 견제했다. 싸우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은 여전했다. 이국땅에 들어와 싸울 의지는 없이 그저 주둔만 하는 군대의 군기는 풀어지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 백성들은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린다. 일본군은 남해안을 거점으로 조선인들을 사로잡고 각지에서 약탈한 물자를 일본으로 운반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명군이 조선 관민들에게 자행하는 민폐 또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일본군과 명군 사이에 놓인 조선 백성들의 고난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