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시에 있는 웅천 왜성(왼쪽). 1593년 진주성 공격 이후 일본군은 웅천을 비롯한 남해안 각지에 성을 쌓고 장기주둔 태세에 들어갔다.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명군도 싸울 의지 없이 그저 주둔만 하던 이 시기가 조선 백성들에게는 최악의 시간이었다. 한명기 제공 |
[토요판]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명군의 패악질과 민폐
“명군의 기예는 아군에게 미치지 못하는데 군량을 공급하는 어려움은 배나 됩니다. 만약 또다시 명군을 청하고 그에 맞춰 군량을 댄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모조리 아사하여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계사, 갑오년에 큰 흉년이 들지 않았음에도 백성들이 굶어죽어 열 명 가운데 서너 명도 남지 않은 것은 하늘이 이 숫자만 남기고 온 나라의 곡식을 전부 명군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 명군에게 준 곡식을 아군에게 주었더라면 10만의 병력을 기를 수 있었을 것이며 지금과 같이 쇠약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명백한 증험이 되었는데 어찌 다시 똑같은 잘못을 허용할 수 있겠습니까?”
1597년 고상안(高尙顔)이 류성룡에게 올린 편지의 내용이다. 계사년(1593)과 갑오년(1594), 조선 조정이 명군에게 군량을 공급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굶어죽었다는 것, 명군에게 신경 쓰느라 조선군에 대한 급량이 상대적으로 소홀해져서 조선군의 전력은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는 통탄이었다.
“일본군에 항복하겠다”고 흘린 선조의 고육지책
‘진주성의 비극’을 겪은 이후에도 강화협상에 매달리던 명군 지휘부의 집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군이 부산과 웅천, 거제도 일대에 머물며 철수할 생각을 하지 않음에도 그들을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심유경이 주도하던 협상은 시간만 끌 뿐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593년 벽제전투 패전 직후 시작된 협상은 1596년까지 4년이나 이어졌다. ‘7년 전쟁’ 가운데 4년을 ‘협상’ 운운하면서 흘려보낸 셈이다. 명나라 신료 서광계(徐光啓)는 일찍이 이러한 임진왜란을 가리켜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非戰非和) 어정쩡한 전쟁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일본군은 물러가지 않고 명군은 그저 주둔만 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조선 조정의 고민은 깊어졌고,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가중되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은 하늘을 찔렀다. 무엇보다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온 직후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파헤쳤던 것은 선조와 조정 신료들을 경악시켰다. 조상의 무덤까지 건드린 그들은 이제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였다. 그런데 명군 지휘부는 그 ‘만세불공지수’와 협상을 운운하며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협상에 방해가 된다며 조선군을 윽박질러 일본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와 신료들에게는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명군 지휘부를 찾아가 결전을 벌여 달라고 간청하고, 명 황제에게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머물고 있다’는 실상을 알리기 위해 사신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선조는 심지어 신료들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군에게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슬쩍 내비치기도 했다. 항복해서 상황에 변화를 주면 일본군이 공세로 나설 것이고 그러면 명군 지휘부 또한 어쩔 수 없이 일본군과 결전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협상에서 소외된 채, 이렇다 할 ‘카드’도 없었던 약소국 군주가 생각해낸 고육지책인 셈이다.
명 조정에서도 강화협상을 놓고 논의가 분분했다. 협상에 찬성하는 신료나 반대하는 신료를 막론하고 공유하는 전제가 하나 있었다. 갈수록 늘어나는 전비(戰費)와 그 조달 과정에서 커지고 있던 명 백성들의 부담을 고려하여 더 이상 조선에 무조건 원조를 제공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양자 모두 명의 군사,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었다. 자연히 그 과정에서 조선 군신들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커지고 내정 간섭이 심화되었다.
군량수송에 태만하다는 이유로 조선 신료들이 줄줄이 끌려갔다
명군에선 선조 교체론에 이어
조선직할통치론까지 나왔다 1593년 벽제전투 패전 직후
협상은 4년이나 이어졌다
7년 전쟁 가운데 4년을
협상 운운하며 흘려보냈다
명군이 그저 ‘주둔’만 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1593년 1월, 명군의 군량 보급을 담당하고 있던 흠차경리(欽差經理) 애유신(艾維新)은 검찰사 김응남(金應南), 호조참판 민여경(閔汝慶), 의주부윤 황진(黃璡) 등 조선의 고위 신료들을 붙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명군은 조선을 위해 애쓰는데 조선 신료들은 군량 수송을 태만히 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방 백성들, 군량운반 고역에 진저리 국왕 선조가 겪어야 했던 수모 또한 만만치 않았다. 1593년 9월, 명의 병부 주사(主事) 증위방(曾偉邦)은 일본과의 강화에 반대하면서 조선을 다잡아 자강(自强)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황제에게 올렸다. 그는 조선이 본래 당 태종의 침략을 막아낼 정도로 만만찮은 나라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일본군의 침략에 맥없이 무너진 것은 군주가 시원찮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구체적으로는 선조가 ‘황음’(荒淫)하여 전쟁을 불렀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증위방은 일단 선조에게 각성하여 자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되, ‘개과천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경우 그를 왕위에서 쫓아내고 왕세자 광해군을 즉위시키자고 촉구했다. 명 조정에서 불거진 최초의 왕위 교체론이었다. 증위방의 상소가 있었던 직후 신종(神宗)은 조선에 보낸 칙서에서 선조에게 분발하여 나라를 되살리라고 촉구했다. 칙서의 내용은 선조에게 굴욕적인 것이었다. ‘선조가 안일에 빠져 소인배들을 믿어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국방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전쟁이 초래되었다고 했다. 신종이 1595년 3월에 보낸 칙서의 내용 또한 선조를 곤혹스럽게 했다. 황제는 광해군에게 전라도와 경상도로 내려가 명군에 대한 접반에 진력하라고 요구하면서 ‘부왕의 실패를 만회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라’고 훈시했다. 왕세자와 백관들을 거느리고 칙서를 맞이하기 위해 모화관(慕華館)으로 거둥했던 선조는 얼굴이 화끈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식과 신료들 앞에서 자신이 ‘실패한 군주’로 규정되는 장면을 목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선조(재위 1567~1608)의 필적(위).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여러 차례 정치적 수모를 겪어야 했다. 명 조정의 일부 신료들은 선조가 무능하여 전쟁이 초래되었다고 규정하고 그를 퇴위시키고 광해군을 대신 세우거나 조선을 직할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