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 설명이 없어서 본질주의를 수정하면
궁극적 설명이 있는가? 내가 ‘본질주의’로 지칭한 교설은, 과학이 본질과 관련된 궁극적 설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사물의 행태를 사물의 본질과 관련하여 ㅡ 사물의 본질적 속성과 관련하여 ㅡ 우리가 설명할 수 있다면 추가 질문이 제기될 수 없다 (혹시 본질의 창조자에 관한 신학적 질문을 제외하고).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자신이 물리학을, 그가 가르친 확장인 물리적 몸체의 본질을 통하여 설명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몇몇 뉴튼주의자는, 로저 코츠(Roger Cotes)를 추종하여 물질의 본질이 물질의 관성이고 다른 물질을 끌어들이는 물질의 힘이라고 그리고 뉴튼의 이론은 모든 물질의 이 본질적 속성들로부터 도출되며 그리하여 그 속성들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다. 뉴튼 자신은 다른 견해를 지녔다. 그가 프린키피아(Principia)의 말미에 있는 일반 주석(Scholium Generale)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중력 자체에 대한 궁극적이거나 본질적인 인과적 설명에 관한 가설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중력에 의하여 현상을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중력 자체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자의적으로 [또는 임시방편적으로] 가설을 창안하지 않는다.’
나는 궁극적 설명에 대한 교설을 신뢰하지 않는다. 과거에 이 교설의 비판자들은 통상적으로 도구주의자들이었다: 도구주의자는 과학이론을, 설명력이 없이 예측을 위한 도구로서만 해석했다. 나도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 번째 가능성인, 내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세 번째 견해’가 있다. 그 견해는 ‘수정된 본질주의(modified essentialism)’로서 ㅡ ‘수정된(modified)’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ㅡ 잘 기술되었다.
내가 지지하는 이 ‘세 번째 견해’로 인하여 본질주의가 근본적 방식으로 수정된다. 먼저 나는 궁극적 설명이라는 관념을 거부한다. 모든 설명이 더 높은 보편성이 있는 이론에 의하여 추가적으로 설명될 것이라고 내가 주장한다. 추가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설명은 있을 리가 없는데 이유인즉 어떤 설명도 본질에 대한 자기-설명적 기술일 (데카르트에 의하여 제안된 바와 같이 몸체에 대한 본질주의적 정의[定義]처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무엇인가?(what is?)라는 질문 모두를 배척한다: 물체가 무엇인가, 물체의 본질이 무엇인가 혹은 물체의 참된 본성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 모두를 배척한다. 이유인즉 모든 단일한 물체에, 반드시 그 물체의 현재 상태를 초래하여 그 물체가 행동하는 바와 같이 행동하도록 초래하는 내재적 본성이나 원리인 (포도주 속에 있는 포도주의 기[氣]와 같은) 본질이 있다는 본질주의에 특징적인 견해를 우리가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물활론적(animistic) 견해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견해로 인하여 본질주의자들이 (뉴튼처럼) 중력과 같은 관계적 속성을 피하고 선험적으로 타당하게 느껴지는 근거를 토대로 만족스러운 설명은 틀림없이 내재적 속성과 관련 있다고 (관계적 속성과 반대로) 믿게 되었다. 본질주의에 대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수정은 이렇다. 이 물체의 행태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도움받을 것은 각각의 개별적이거나 단일한 물체에 내재하는 본질적 속성이라는 견해를 ㅡ 물활론과 (그리고 플라톤과 반대가 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특징적인) 밀접한 관계가 있는 ㅡ 우리가 포기해야 한다. 이유인즉 이 견해가, 왜 다양한 개별적 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틀림없이 행동하는지의 질문을 전혀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물체들의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이다’라고 언급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다양한 물체들이 있는 만큼 다양한 많은 본질들이 왜 없어야 하나?
플라톤은, 후손이 개별적 물체들과 같아서 동일한 원초적 ‘형상(Form)’의 복사판이고 그 형상은 그리하여 다양한 개별적 물체들의 ‘외부의’ 그리고 ‘이전의’ 것이고 그 물체들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정확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닮음(likeness)에 대하여 나은 이론을 우리가 정말로 지금까지 가지지 못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두 명의 남자나 새와 물고기 또는 두 개의 침대나 두 대의 자동차 혹은 두 가지 언어나 두 가지 법률적 절차의 닮음(likeness)을 우리가 설명하고 싶으면 우리는 그것들의 공통적 근원의 도움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유사성을 주로 유전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으로부터 형이상학적 체계를 만든다면 그 체계는 역사주의적 철학이 되기 쉽다. 플라톤의 해결책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배척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에 대한 해석이 심지어 해결책의 암시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문제를 결코 파악하지 못했던 듯하다.
보편적 자연법칙에 관한 설명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정확하게 이 마지막 (플라톤적)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유인즉 우리가 모든 개별적 물체와 모든 단일한 사실이 이 법칙에 종속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법칙으로 (반대로 추가 설명이 필요한) 인하여 개별적 물체 혹은 단일한 사실이나 사건의 규칙성이나 유사성이 설명된다. 그리고 이 법칙은 단일한 물체에 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 법칙은 세상 밖의 플라톤적 이데아가 아니다.) 자연법칙은 오히려 자연의 ㅡ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의 ㅡ 숨겨진 구조적 속성에 대한 (추측성) 기술(記述: descriptions)로서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 자신의 견해(‘세 번째 견해’)와 본질주의 사이의 유사성이 있다: 우리의 보편법칙들로써 우리가 세상의 궁극적 본질을 기술할 수 있다고 내가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세상 구조 속으로, 혹은 우리가 아마도 말할 것과 같이, 점점 더 본질적 세상의 속성 속으로나 점점 더 깊은 세상의 속성 속으로 우리가 점점 더 깊이 조사하려고 시도할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더 높은 등급의 보편성이 있는 새로운 추측성 이론에 의하여 어떤 추측성 법칙이나 이론을 설명하는 데로 우리가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세상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비밀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종류의 이론을 오류로 판정하는 데 성공할 때마다 우리는 중요하고 새로운 발견을 이룩한다. 이유인즉 이 오류판정들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오류판정들로 인하여 우리가 예기치 않은 것을 배운다. 그리고 우리의 이론이 우리 자신에 의하여 창안될지라도, 우리의 이론이 우리 자신의 발명품일지라도 그 이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관한 진정한 주장이라고 그 오류판정들에 의하여 우리가 확신한다; 이유인즉 그 오류판정들이 우리가 만든 적이 없는 것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정된 본질주의’는, 자연법칙의 논리적 형태에 관한 질문이 제기될 때 도움이 된다고 내가 믿는다. 그 본질주의는 우리의 법칙이나 이론이 틀림없이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다시 말해서 세상의 모든 시공적(時空的) 영역에 관하여 주장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더구나 그 본질주의는, 우리의 이론이 세상의 구조적이거나 관계적 속성에 관하여 주장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설명적 이론에 의하여 기술된 속성은, 이런저런 의미에서, 설명될 속성보다 더 깊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ㅡ 칼 포퍼, ‘실재론과 과학의 목적’, 2000년, 134-7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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