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림 연세대학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왼쪽)와 한명기 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동아시아 3국에 남긴 임진왜란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연재를 마치며’ 박명림-한명기 교수 대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벌인 전쟁은 동아시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올해가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의 7주갑(420년)이었다. 임진왜란이 갖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한겨레> 토요판은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연재를 마치며 지난 8일 필자와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의 대담을 마련했다. 한국 정치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전공한 박 교수는 임진왜란 대신 ‘1차 동아시아 국제전쟁’, ‘한일전쟁’, ‘동아시아 7년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이 전쟁이 이후 국제질서에 끼친 영향에 주목해왔다. ‘왜란’이 아니라 명백한 ‘동아시아 국제전쟁’ 박명림(이하 박) <한겨레> 토요판 독자로 연재 잘 읽었습니다.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 갈등,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 그리고 한-일 역사갈등과 영토분쟁을 볼 때 동아시아 7년전쟁의 의미는 결코 과거에 한정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교토의 귀무덤, 가고시마의 심수관 도요나 아리타의 이삼평 묘비 등을 보면 7주갑을 맞는 전쟁의 흔적 역시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 전쟁은 결코 ‘왜란’이 아니라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전쟁으로서 명백히 동아시아 국제전쟁이라고 봅니다. 한명기(이하 한) 현상적으로 일본의 침략에 의한 조일전쟁이지만 국제적 시각에서 보면 16세기 중반부터 일본의 힘이 커지고 상대적으로 명이라는 패권국의 힘이 쇠퇴하는 시기에 일본이 명에 도전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이 양자대결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 동아시아의 세계대전입니다. 크게 보면 기존의 패권국이 쇠퇴하고 신흥강국이 등장할 때 한반도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라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의 역사일 수 있습니다. 박 이 세계적 대사건의 가장 큰 의미는 한·중·일 3국이 역사상 최초의 전면적인 무력충돌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해 최초로 직접 조우한 데 있다고 봅니다. 한·중·일의 접촉 밀도가 가장 높았던 첫번째 사건이지요.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대사건임에도 한·중·일 3국은 이 전쟁을 개별적으로 기억하고 있어 객관적인 역사상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맞습니다. 우선 ‘임진왜란’이란 용어에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반영돼 있습니다. 일본 쪽은 이 전쟁이 지닌 침략의 속성을 은폐하려는 의도에서 당시 연호를 따서 ‘분로쿠노에키’(분로쿠의 전쟁)로 부르고, 중국에서는 ‘항왜원조’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400년의 시차가 있지만 현재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각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 네. 모두 현실적인 국제관계나 한국 문제에 대한 객관적 시각이 결여됐다고 봅니다. 한국의 역사인식은 과도한 도덕주의에 빠져있습니다. ‘왜란’, ‘호란’, ‘양요’…, 즉 일본과 북방과 서양의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무례하게 침범했다는 도덕적 인식이 강해서 자기 문제에 대한 사실적 인식이 결여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보다 강력한 상대와의 모든 전쟁을 ‘란’, ‘요’라고 부르죠. 말씀하신 대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침략사관과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했고 중국 역시 한국에 대한 대국주의와 지배욕망이 그대로입니다. 둘 다 한국에 대한 패권주의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요. 한 15세기 대항해시대의 여파가 일본에 상당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543년 조총이 전해졌고 예수회를 통해 가톨릭이 규슈지역에 확산됐고, 제철혁명으로 강철기술이 발전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대표되는 다이묘들의 국제 감각 또한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반대로 조선은 바다 건너 동쪽에서 일어나던 변화가 그들이 중화로 섬기는 명까지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 해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의 폭을 고려할 때 전쟁 발발의 책임을 조선의 정보 실수, 정보 패착으로만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박 이 전쟁은 동아시아에서 대륙과 해양의 최초의 전면대결인데 대항해시대를 대비한 해양국가 일본이 해전에서는 연전연패하고 육전에서는 승승장구했습니다. 반면 고구려시대 이래로 기병전에 능한 조선이 육지의 근접전에서는 일방적으로 패퇴하고 해전에서는 승리하였습니다. 큰 역설이지요. 한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략을 겪으면서 화포를 비롯한 대형 화약 무기의 확보와 투자가 이뤄졌고, 판옥선도 거듭났어요. 또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인물도 빼놓을 수 없죠. 이순신이 1591년 2월에 전라좌수사가 됐는데, 새로 만든 거북선에 대포를 장착하고 사격훈련을 끝낸 날이 바로 왜란 발발 하루 전이에요. 또 히데요시의 수군 대다수가 해적 출신인데, 이들에게는 당시의 해전이 국가와 국가의 싸움이라는 인식이 측면이 덜했던 것도 이유입니다.
한명기 |
임진왜란 때 일본을 저지했는데
2차 중일전쟁인 청일전쟁 때는
그러지 못했다고 자괴하고 있어
중국인들의 이 고민은 지금까지도… 이순신은 왜 무능한 왕조를 전복하지 않았나 박 왕의 도피, 중앙조정과 관군의 붕괴, 민심이반으로 중앙정부는 사실상 도괴 상태였는데도 군사력, 민심, 식량, 영토를 거의 장악한 이순신은 무능한 왕조를 전복시키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조선 500년의 최대 비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 이순신의 국량과 조선의 비극 사이에 참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한 곽재우의 전성기 때 휘하 병력이 3천명이 넘는데 선조가 피신할 때 호위 병력이 100명도 안 됐습니다. 하지만 곽재우는 역할을 다하고 스스로 의병을 해산합니다. 이순신 관련 기록을 보면 피신한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 명으로 귀순해야 할 상황이 닥칠 경우 자신이 배를 끌고 가서 선조를 태우고 최후를 마치겠다고 나옵니다. 충의 논리를 바탕으로 신료들, 특히 무관들을 통제하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 덧붙여 국가와 정부, 군주와 왕조를 동일시해온 사유 전통도 컸던 것 같습니다. 즉 왕조 붕괴를 국가 붕괴로 인식하는 사유 구조가 한국 엘리트들의 중심을 흐르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이제 국제적 차원의 명군 참전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지요. 순망치한의 논리가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 명 내부에서도 조선은 가장 충순한 번국(藩國)이라고 인식했고, 참전론자들에게도 조공 책봉 체제에 가장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던 조선을 방어하자는 논리가 작동했다고 봅니다. 또 1572~82년까지 장거정(張居正)의 개혁으로 명이 참전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마련된 것, 만력제(신종)라는 친한적인 황제의 존재가 명의 참전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보입니다. 박 저는 유교적 중화질서 의식보다는 중국 안보라는 현실주의적 국익 논리가 강했다고 봅니다. ‘유교적인’ ‘한족’ 제국 명, ‘반유교적인’ ‘북방’ 제국 청, ‘사회주의’ ‘복합’ 제국 중화인민공화국 시대에 각각 벌어진 한반도내 전쟁(동아시아 7년전쟁, 청일전쟁, 한국전쟁)에 대해 반드시 참전하는 일관성을 보면 유교관념보다는 변방을 방어하여 국익을 수호하려는 논리가 더욱 중요했다고 생각됩니다. 중국에 어떤 체제가 들어선다 해도 한국 문제에 대한 중국의 개입은 결정적 변수인 것이지요. 미래의 북한·통일문제에 대한 대비에서 중요한 고려요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네, 보충하자면 강화협상이 시작될 무렵부터 명에서는 조선을 ‘적쇠지방’(積衰之邦: 쇠망의 기미가 누적된 나라)으로 간주하면서 조선을 아예 명의 성으로 편입시켜 직접 관리하는 것이 본토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들이 등장합니다. 조선을 명의 안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전략적 요충국으로 보는 인식이 일관되게 존재했던 것이지요. 박 침략국 일본에 대한 평가는 간단합니다만, 어려운 점은 지원국 중국에 대한 인식입니다. 중국 참전으로 인한 조선의 민폐와 민중의 불만 역시 엄청났거든요. 사실 이순신을 보더라도 군권을 명군이 장악한 상태인데도, 전법과 함선 배치, 중국 지휘부와의 긴장, 공훈 보고 등을 보면 대일 방어의식 못지않게 대중 견제의식이 뚜렷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순신의 빛나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한 조선 백성들이 명인들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10만명의 명군이 상주하는 상황이 된 거죠. 명군은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자신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패전의 분풀이를 조선 사람들에게 전가했어요.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이 ‘도와주러 온 은인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백성들의 불만을 눌러버린 거죠. 그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민폐를 끼쳤던’ 명군의 객관적인 실체 대신 ‘조선을 구원해준’ 존재로 명군의 이미지를 창출하게 됩니다. 전쟁의 기억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 속에서 명군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박 이 전쟁의 영향은 지독하게 역설적입니다. 전후 일본은 도요토미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에도막부, 즉 도쿠카와 시대가 열립니다. 중국 역시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서는 격변을 겪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부패무능한 선조가 왕권을 지속합니다.
박명림 |
한국문제에 대한 중국의 개입은
결정적 변수라고 봐야 할 것
미래 북한·통일문제 대비에
중요한 고려요인 아닐 수 없어 한국은 ‘평화중강국가’ 역할 맡아야한 조선은 내부적으로 전쟁의 책임을 거론하고 또 그 책임을 추궁할 만한 대안세력이 미약했습니다. 기존 세력이 장기간 집권을 계속하는데, 다만 전쟁 이후의 변화된 국제환경 속에서 부분적이나마 새로운 외교를 시도하려 했던 것이 광해군 정권이었는데 결국 붕괴하고 이어 만주의 침략을 받는 엄혹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왜란 이후 청이 굴기하는 상황에서 명 중심의 기존 체제에 안주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과연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조선이 왜란 당시 초전에 너무 어이없이 무너져 위기의식이 몹시 커진 상황에서 명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는 부채의식(재조지은)이 이후 조선 외교가 운신할 수 있는 여지를 극히 제약하게 되지요. 또 위기가 어느 정도 해소된 뒤에는 내부의 군사혁명, 사회경제적 개혁 등도 일어나기 어려웠습니다. 박 명청교체는 이 전쟁이 중화제국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이라고 봅니다. 대규모 참전 결과 재정 고갈과 국방력 약화로 여진족을 제어하지 못하면서 청이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이후 중화제국에서 한족 패권은 영원히 종식되었지요. 이 전쟁을 전후로 중국과 동아시아 역사는 완전히 갈리는 것이지요. 결국 동아시아 7년전쟁은 중화의식과 체제를 이중으로 붕괴시킨 것입니다. ‘중국 내부’에서는 북방 오랑캐가 한족 지배를 붕괴시켰고, ‘중국 외부’에서는 변방 중의 변방 일본이 중화의식과 체제에 정면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한 네, 동아시아 대립구조의 원형 같은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죠. 명이 조선에 참전하여 엄청난 전비를 소모한 것이 내정의 붕괴를 촉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습니다. 요컨대 히데요시가 누르하치의 은인이었다면 관동군은 푸이의 은인이었다는 만선사관(滿鮮史觀: 조선 역사를 만주의 부속물로 보는 인식)이 임진왜란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박 이제 오늘날 문제로 넘어와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평화중강국가 이론을 오래 주장했습니다. 미국이라는 세계제국이 있고 중국이라는 준세계제국, 일본과 러시아라는 지역강국이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바뀌지 않습니다. 따라서 북한이나 몽골, 대만, 필리핀 등 많은 약소국가를 이끌고 갈 수 있는 평화중강국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임진왜란, 청일전쟁,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보면 한국의 균형자 역할, 주권의 자주성과 독립성이 국내 문제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에 중요해 보입니다. 한 한반도의 힘 자체가 중국과 일본에 비해 너무 약할 경우 어느 한쪽의 병탄이나 공격의 대상이 되면서 기지 노릇을 해왔다는 점을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중국인들은‘1차 중일전쟁’인 임진왜란 때는 일본의 도발을 저지했는데 2차 중일전쟁인 청일전쟁 때는 그러지 못했다고 자괴하고 있지요. 어쩌면 중국인들의 이 고민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박 이제 거시적인 문제를 하나 짚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전쟁 이후, 단재 신채호가 말한 대로, 동아시아에서는 300년 평화가 유지됩니다. 그 이유는 한국이 주권과 교량, 독립과 균형의 역할을 잘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의 대일 방어로 인해, 청일전쟁 때까지는, 일본이 다시는 대륙을 넘보지 않도록, 즉 해양국가로 나아가도록 만든 것 역시 결정적입니다. 일본의 국가전략에 끼친 이 전쟁의 영향은 너무도 컸습니다. 그러나 300년 평화 이후 동아시아는 한국의 주권과 교량 역할의 상실과 함께 100년 동안 극심한 전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듭니다. 한국의 위상과 역할은 동아시아 평화 유지에 결정적인 것이지요. 한 거듭 강조하지만 과거 500년 동안 주변에서 패권이 교체될 때마다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곤 했습니다. ‘양대 강국(G2) 시대’ 운운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가 들어서려 하고 있는 이즈음은 또다른 전환기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쟁이 남긴 역사적 의미를 치밀하게 성찰하면서 장차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혜와 방략을 모색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