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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
4·11 총선에 이어 제18대 대선에서도 ‘질 수 없는 게임에서 패배한’ 야권은 시쳇말로 멘붕에 빠져 있다. 그리고 패인 찾기에 분주한 가운데 ‘친노의 패권주의’와 ‘50대의 보수화’로 결론이 나는 것 같다. 틀린 얘기는 아닌데, 이 정도 수준에서 패인이 정리된다면, 진보세력은 앞으로도 국민의 선택을 다시는 받지 못할 것이다.
친노 문제부터 따져보자. 친노 그룹이 민주당을 좌지우지하면서 총선과 대선을 기획하고 결국 패배의 길로 이끌어 온 것은 맞다. 그런데 친노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이들은 노무현의 철학과 정책적 비전을 버린 채 양대 선거에 임했다. 그들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하면서도, 노무현의 고뇌에 찬 결단들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참여정부의 고육지책인 비정규직 보호법을 악법이라 비난하면서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만이 해법이라 내세우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뒤엎기 위해 온갖 퍼포먼스를 마다하지 않았다. 제주 해군기지는 어떤가? 또 사회투자국가론에 입각해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을 추구하였던 노무현의 ‘비전 2030’을 폐기처분했다. 그 대신 무상복지 시리즈를 내세우고, 급기야 복지는 내수중심 경제를 위한 새로운 ‘성장동력’이라는 무지한 주장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노무현 시대의 알파요 오메가였던 선거제도 개편 등 정치개혁 논의는 뒷전으로 미뤄놓은 채 말이다. 요컨대 노무현을 부정하면서, 유권자에게는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겠다며 표를 달라고 한 것이다.
50대는 어떤가? 10년 전 40대에 노무현을 당선시킨 이들은 50대 들어 박근혜를 선택했다. 유신의 딸이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 정책을 수용한 사람은 친노가 아니라 박근혜였다. 민주당 대표가 민주노동당, 시민단체와 함께 미국대사관 앞에 가서 에프티에이 반대 구호를 외치고, 당의 거물들이 제주로 내려가 해군기지 백지화와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노무현 정부는 친재벌 삼성공화국이었다고 비판해대는 상황에서 50대가 민주당에 표를 던지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민간 경제의 혁신과 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은 얘기하지 않으면서, 세금을 통해 공공부문에 번듯한 정규직 일자리를 만들어 고용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후보에게 표를 던질 50대 또한 많지 않다. 재야 원탁회의라는 구좌파 그룹의 훈수에 따라 친북좌파와 야권연대를 맺는 친노의 민주당을 지지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50대의 보수성 탓만일까?
진보의 꽃은 자리마다 시대마다 다르게 피어나야 한다. 자유·평등·민주의 가치는 현실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박정희보다 더한 독재에 군사력 시위를 마다하지 않는 통제불능의 북한을 바로 앞에 두고 안보에 둔감한 진보는 이 땅에서 꽃을 피우기 힘들다. 수출로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선 대한민국의 개방을 반대하는 진보는 퇴행의 고사목으로 외로이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양극화의 모든 책임을 재벌한테 돌리고, 자신들의 지나친 고용 보호와 임금 인상이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미칠 영향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조직노동에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진보에게 누가 지지를 보내랴?
노무현의 빈자리에 더 이상 상투적인 진보가 자리잡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있는 새로운 진보가 들어서야 한다. 패배의 잿더미 위에서 이제는 성장도 살피고 중도까지 끌어안으며 50대의 건전한 상식을 저버리지 않는 새로운 진보의 탄생을 기대해 본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