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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 서문: ‘관찰자’ 없는 양자역학

이윤진이카루스 2014. 8. 19. 15:50

 

서문: ‘관찰자없는 양자역학

 

어떤 사람이 아인슈타인 이후에 누가 가장 위대한 현대

물리학자인가?’라고 물으면 답변은: 다시 아인슈타인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상대성을 발견했다면, 그의 발견으로

인하여 그는 여전히 자신의 시대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물리학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가 될 것이다.

 

코르넬리우스 란초스(CORNELIUS LANCZOS)

 

 

1. 양자론과 관찰자의 역할.

이 서문에서, 나는 의식(consciousness)’이나 관찰자(the observer)’로 지칭되는 유령을 양자역학으로부터 추방하여, 양자역학은 가령 고전적인 통계적 역학만큼 객관적인이론임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이 책의 본문에서 나는 다소 더 상세하게 나의 논증을 입증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과거 50년 동안에 걸쳐서 양자론을 괴롭혔던 이 문제들에 대한 나의 이해와 내 자신의 대안적 접근방식을 서술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 서문에서 나의 주장은, 관찰자 혹은 더 낫게는 실험주의자들은 양자론에서 고전물리학에서와 꼭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의 임무는 이론을 시험하는 것이다.

반대의견은, 통상적으로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지칭되는데, 거의 보편적으로 수용된다. 요컨대, 코펜하겐 해석은 객관적 실체는 증발되었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입자를 대변하지 않고 오히려 입자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 우리의 관잘, 혹은 우리의 의식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나와 같이 철학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이와 같은 지배적인 독단에 반대한다면, 그는 보복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롱과 경멸을 예상해야 한다. 모든 유능한 물리학자들은 코펜하겐 해석이 옳다는 것을 안다는 주장으로써 (코펜하겐 해석이 실험에 의하여 증명되었기 때문에) 협박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닐스 보어[Niels Bohr]에 의하여 내가 얼마나 친절하고 인내심이 있게 대접을 받았는지를 내가 행복하게 기억한다할지라도).

그리하여 아인슈타인, 플랑크(Planck), 폰 라우에(von Laue) 혹은 슈뢰딩거(Schrödinger)처럼 누구만큼 유능하고 (아인슈타인, 플랑크[Planck], 폰 라우에(von Laue) 혹은 슈뢰딩거[Schrödinger]와 달리) 심지어 한 때 완전히 확신하여 코펜하겐 해석을 고수했지만 지금은 하이젠베르크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새로운 해석을 결정적이거나 확신적으로 간주하지않는 물리학자들을 언급함으로써 이 주장이 역사적으로 오류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먼저 한 때 코펜하겐 해석을 고수하던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가 있다; 그리고 그의 이전 제자, 장 피에르 비지에(Jean Pierre Vigier)가 있다.

그 다음에는 1921년에서 1924년까지 나중에는 (1937년과 1951) 완전히 코펜하겐 해석의 정신으로 양자역학에 관한 두 권의 교본을 서술했지만 훨씬 뒤에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주요 반대자들 중 한 명이 되었던 양자론의 위대한 창시자 중 한 명이기도 한 알프레드 란데(Alfred Landé)가 있다.

1951년에 양자론(Quantum Theory)라는 교본을 발간한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있는데 그 교본은 코펜하겐 의미에서 정통적일 뿐만 아니라 코펜하겐 관점에 대하여 발간된 가장 명징하고도 완벽하고, 가장 예리하고 비판적인 제안들 중 한 가지이기도 하다. 그 후 곧, 아인슈타인의 영향을 받아서, 그는 새로운 방식들을 시도했고 1952년에, 양자론이 틀림없이 더 상세한 이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증명된다는 의미에서 양자론이 완벽하다고 부단히 반복되는 독단의 (폰 노이만[von Neumann]에게서 기인하는) 오류를 논리적 일관성이 증명했던 임시적 이론에 (나중에 수정됨) 도달했다.

1955년에 상보성에 관한 갈등(Strife about Complementarity)’이라는 논문을 발간한 마리오 붕게(Mario Bunge)가 있다.

매우 흥미로운 논문의 인식론적 문단에서 코펜하겐 해석을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독일 물리학자 프리츠 보프(Fritz Bopp)가 있다. 그 문단에서 그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고찰들은 상보성에 관한 수학적 개념들의 변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에서 (그리고 다른 발간물들에서) 아인슈타인의 글귀와 다르지 않은 글귀에서 보프가 양자-이론적 형식주의를 고전적 통계 역학의 확대로서 해석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논쟁을 벌이지 않았을 이론을 전개한다; 다시 말해서, 종합체 이론(a theory of ensembles)로서.

나는 단지 오직 철학자들만 (그리고 완전히 무능하거나 노망든 물리학자들) 코펜하겐 해석을 의심할 수 있다는 역사적인 신화와 싸우기 위하여 이 간단하고도 물론 완전히 불완전한 반대자들 명단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해석을 다소 상세하게 비판하는 데로 나아가기 전에 나는 두 가지 요점들을 토론하고 싶다.

(a) 내가 알기로는 보통 간과된 매우 중요한 의미에서, 코펜하겐 해석은 오래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b) 매우 솔직하게 코페하게 해석을 신뢰하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실제로 그 의미에 주목하지 않는다.

요점 (a)에 관하여, 우리는 새로운 양자론이나 양자역학이 처음에 그리고 적어도 1935년까지 단지 물질에 관한 새로운 전자기론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원자론과 그리하여 물질 이론이 어떻게 전자기장 이론과 동일시되었는지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에게로 선회할 것인데 그는 1920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가 지닌 현재 개념들에 따라서 기초입자들은... 전자기장의 압축에 지나지 않는다... 리의... 우주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실체를 제시한다..., , 중력적 에테르(ether)와 전자기장, 혹은 아마도 그들이 지칭될 것과 같이 공간과 물질이다.’

양자역학은 양자역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물질에 관한 이 전자기적 이론의 최종적 형태로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해서, 형식주의는, 무엇보다도, 전자와 양성자에 관한 이론으로서 그리하여 원자의 구조에 관한 이론으로서 간주되었다: 원소들과 원소들의 물리적 속성들의 주기적 체계에 관한 이론: 그리고 화학적 결합에 관한, 그리하여 물질의 물리적 및 화학적 속성들에 관한 이론.

거의 모든 물리학자들이 지닌 견해에 대한 매우 인상적인 서술이 적어도 1932년의 양전자 발견까지 로버트 A. 밀리칸(Robert A. Millikan)에게서 기인한다:

정말로, 물질적 세계가 두 가지 근본적인 실체들 즉, 양전자가 지금 통상적으로 양성자로 지칭되는 음전자보다 1850배 무거워서 지금은 통상적으로 단지 전자로 불리기에 전하(電荷)에서는 똑 같지만 질량에서는 크게 달라지는 양전자와 음전자를 포함한다는 이론을 최종적으로 실제로 보편적으로 수용했던 1914년경에 정점을 이루었던 발견들의 연속적인 전체보다 더 아름답게 단순화하는 것은 과학의 역사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상 적어도 1935년까지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들 중 몇몇은 양자역학의 도래와 함께 전자기장 이론이 자체의 최종적 상태에 들어갔다고, 그리고 양자역학이 낳은 결과들이 모든 물질은 전자와 양성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고하게 확인했다고 믿었다. (중성자와 중성미자 또한 다소 마지못해 인정되었지만, 중성자는 양성자 + 전자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중성미자는 아마도 수학적 허구에 크게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반면에 양전자는 전자의 바다에서 슬릿들로서 간주되었다.)

물질이 양성자와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 이론은 오래전에 죽었다. 그 이론이 지닌 질병은 (처음에는 숨겨져 있었다할지라도) 중성자의 발견과 또한 양전자의 발견과 (코펜하겐 권위자들이 처음에 믿지 않았던)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이론은 뚜렷이 구별되는 상호작용의 수준들이 발견됨으로써 최종적 타격을 입었는데 그 수준들에 대하여 전자기력은 다음 네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구성한다:

 

1. 핵력 (강력한 상호작용).

2. 전자기력.

3. 약붕괴 상호작용.

4. 중력.

 

게다가, 양자역학 안에서 전자 전하(電荷)에 대한 설명과 같은 고전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희망은 실제로 포기되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우리는 아인슈타인과 보어(Bohr) 사이의 거대한 갈등을 지금 되돌아볼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문제는 양자역학이 완벽한지였다. 아인슈타인은 완벽하지 않다고 말했다. 보어(Bohr)는 완벽하다고 말했다.

나는 아인슈타인이 옳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심지어 오늘날에도 저 유명한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은 보어(Bohr)였다는 글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이 견해는, 주로 보어(Bohr)가 주장한 양자역학의 완벽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공격이 코펜하겐 학파에 의하여 양자역학 자체와 양자역학의 건전성(soundness)’이나 일관성에 대한 공격으로서 해석되었기 때문에, 지속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i) 코펜하겐 해석과 양자론이 일치함을 그리고 (ii) 보어(Bohr)가 그 문제를 완벽성에서 건전성(soundness)으로 (= 모순이 없음) 변화시켰음을 우리가 수용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대한 자기 자신의 (통계적) 해석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양자역학의 일관성을 수용했다.

요점 (b)에 관하여, , 코펜하겐 해석을 솔직하게 신뢰하지 않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을 실제로 그 해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나의 주장에 대하여, 탁월한 사례는 프리츠 보프(Fritz Bopp)인데 왜냐하면 코펜하겐 학파는 입자들이 뚜렷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이 거짓이거나 무의미하거나혹은 비물리적이라고 믿는 반면 그는 입자들이 뚜렷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을 (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i], 그리고 로젠[Rosen]이 믿는 것처럼) 믿기 때문이다. 1951년의 란데(Landé)의 설명을 인용하면 (그가 코펜하겐 해석에 반대하여 돌아서기 이전):입자에 대한 고전적 개념은 불확실성 관계의 충격 하에서 붕괴한다. 어떤 주어진 시간에 명백한 위치와 운동량을 지닌 입자들이 존재한다는 개념을 수용하여, 마치 자연의 악의적인 변덕에 의하여 이 자료들이 실험적으로 확인될 수 없다고 시인하는 것은 비물리적이다.’ 그러나 나의 요점 (b)와 관련하여 내가 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이렇다. 물론, 양자역학에 대한 형식주의는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여전히 오래된 문제들에 적용되고, 그 방법들은 많은 수정을 통하여 핵 이론과 기초입자 이론에 관한 많은 새로운 문제들과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이용된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 형식주의가 지닌 힘에 큰 자랑거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대부분의 실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얻는 결과들의 정확성의 한계에 대해서 많이 근심할지라도 자신들이 민감한 고전적 실험들과 관련하여 걱정하는 것보다 관찰자의 역할에 관해서나 자신들이 얻는 결과들에 간섭하는 것에 관해서 더 걱정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새롭고 훨씬 더 일반적인 이론이 필요하다고 완전히 확신한다: 그들 모두는 실제로 혁명적이고 새로운 이론을 찾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코펜하겐 해석을 토론하는 것이 여전히 필요한 듯이 보인다; 다시 말해서, 보다 정확하게, 원자이론은 자체의 독특한 특성을 주로 탐구되는 물리적 물체에 대한 주체(subject)나 관찰자의 (그리고 그들의 측정하는 대행기관’) 간섭으로부터 취하기 때문에 원자이론에서 우리가 관찰자주체(subject)를 우리가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 보어(Bohr)의 전형적인 서술을 인용하면:정말로, 대상과 측정하는 대행기관 사이의 유한한 상호작용은... 고전적 이상(理想)을 최종적으로 포기할 필요성과... 물리적 실체의 문제를 향한 우리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유사하게 하이젠베르크는: ‘... 과학의 전통적인 요건은... 세상을 주체와 대상으로 (관찰자와 피관찰자) 구분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 전제는 원자물리학에서 허용될 수 없다; 관찰자와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은, 원자적 과정들에 특징적인 불연속적 변화들 때문에, 관찰되고 있는 체제에서 통제될 수 없는 커다란 변화들을 야기한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는 인식론에 매우 중요한 세상의 주관적인 면과 객관적인 면을 구분하는 난제에 대한 근본적인 토론을 재검토하는 것이 이제 유익하다고 제안한다.

이 모든 것과 반대로 나는, 실제로 물리학자들은 오늘날 그들이 1925년 이전에 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측정하고 실험한다고 제안한다.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그 차이점은 객관성의 정도뿐만 아니라 측정들에 관한 간접성의 정도도 증가했다는 것이다. 30년이나 40년 전에 물리학자들이, 섬광 계측과 같은, ‘읽기를 하기 위하여 현미경을 통하여 관찰하곤 하던 곳에는 정말로 읽기를 하는 사진 필름이나 자동 계측기가 지금 있다. 그리고 사진 필름들과 계측기 읽기들이 해석되어야 (모든 실험들과 관찰들이 해석되어야 하는 바와 같이, 이론에 비추어) 할지라도 그것들은 우리의 이론적 해석들에 의하여 전혀 물리적으로 방해를 받거영향을 받지않는다. 물론, 많은 실험적 시험들에는 이제 주로 통계적 특성이 있지만, 이로 인하여 그 시험들이 덜 객관적이 결코 되지는 않는다: 그 시험들이 지닌 통계적 특성은 (흔히 계측기들과 컴퓨터들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처리되는) 이른 바 관찰자나 주체나 의식이 물리학에 침범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 대조적으로, 실험 준비와 장치는 항상 우리가 지닌 변하는 지식과 많은 관계가 있었고 지속적으로 많은 관계가 있다: 그것은 이론에 의존한다.

우리의 실험들을 준비하는 데 그리고 그 실험들의 결과들을 해석하는 데 우리를 안내하는 우리의 이론들은 물론 항상 우리가 만든 것들이었다: 그 이론들은 우리의 의식(consciousness)’이 만들어 낸 것들이거나 산출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이론들이 지닌 단순성, 균형, 그리고 설명력과 같은 요인들에, 그리고 우리의 이론들이 비판적 토론과 결정적인 실험적 시험들을 견디어낸 정도에 의존하는 우리의 이론들의 과학적 위상과는 관계가 없다; 그리고 우리의 이론들이 지닌 진실 (실제와의 일치), 혹은 진실과의 근접성에 의존하는 우리의 이론들의 과학적 위상과도 관계가 없다.

 

2. 이론 대() 개념.

아마도 여기는 이론과 개념 사이의 구분에 관하여 몇 가지 논리적 비평을 삽입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다; 이어지는 것은 비평에 의존하지 않을지라도 양자론에서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길을 막는 몇 가지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비평.

과학에서 우리가 탐구하는 것은 참인 이론들 참인 서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특정 구조적 속성들에 대하여 참인 기술(descriptions) - 이다. 이 이론들이나 서술 체계들은 자체의 도구적 쓸모를 지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학에서 탐구하는 것은 쓸모라기보다는 진리이다: 진리와의 근사치; 설명력, 그리고 문제해결력; 그리하여, 이해하기.

그리하여 이론들은 통상적으로, 다른 것들 가운데서, 또한 쓸모 있는 도구들이라 할지라도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예를 들어, 예측의 도구들) 기술(記述)된다면 이론들은 잘못 기술(記述)되는 것이다. 이론에 대한 쓸모의 문제보다 무한히 과학자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이론들이 지닌 객관적 진리의 혹은 진리에 대한 이론들의 근접성의 문제와 세계와 세계의 문제들에 대한 이해하기의 종류인데 그것들을 이론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펼쳐놓을 것이다. 이론들은 도구들이나 계측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는, 우리가 입자 그림이나 파동 그림과 같은 고전적 그림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양자론은 내재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코펜하겐 교설 때문에 양자 이론가들 가운데서 유행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 오류이고 심지어 사악한 교설이라고 생각한다.

이론들은 개념적 체계개념적 틀로서 완전히 그릇되게 또한 기술(記述)된다. 우리가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혹은 이 용어가 선호된다면 개념들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는 이론을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술과 단어를, 그리고 이론과 개념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론 T1반드시 특정 개념 체계 C1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임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한 가지 이론 T1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될 것이고 많은 다양한 개념적 체계들을, 가령 C1C2를 사용할 것이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두 가지 이론 T1T2는 두 가지 완전히 다른 개념적 체계들(C1C2) 사용하거나 완전히 다른 개념적 틀들로 생각된다할지라도 논리적으로 대등하다면 한 가지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나는 슈뢰딩거(Schrödinger) 에카르트(Eckart) 파동역학과 행렬역학(matrix mechanics)의 완벽한 논리적 대등성을 유효하게 확립했다고 우연히 믿지 않는다: 이 대등성 증거들에는 몇 가지 허점들이 있는 듯이 보인다. 이 요점에 관하여, 이론들의 대등성이나 일치의 논리에 관한 나의 견해가 노우드 러셀 핸슨(Norwood Russell Hanson) 견해와 다소 다를지라도, 나는 핸슨과 (그리고 E. L. [Hill])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이론들의 개념적 틀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런 증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효한 증거에 대하여 필요할 것은, 두 가지 이론의 공리화[axiomatization]에 근접하는 것이고, T1의 모든 정리[theorem] t1,nT2의 한 가지 정리[theorem] t2,n과 일치하여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그러하여) T1T2의 개념들의 정의들[定義: definitions]로 구성된 어떤 체계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t1,nt2,n이 논리적으로 대등함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이다. T1이나 T2 자체가 이 정의[定義: definitions]들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수단들은 이론들을 몇 가지 확대함으로써 제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의[定義: definitions]들이 그런 대등 증거에 관하여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은 그 정의[定義: definitions]들이 물리학 이론 안에서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 이론들의 기초를 이루는개념적 틀들이 완전히 다르다할지라도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히는 많은 다른 사례들이 있다) 이론들이 대등할 있기 때문에, 이론을 그 이론의 기초를 이루는개념적 틀과 동일시하는 것과 심지어 이 두 가지가 틀림없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 것은 분명히 오류이다. 이론이 지닌 개념적 틀은 이론을 근본적으로 변경하지 않고도 매우 다른 개념적 틀에 의하여 갈음될 것이다; 그리고 반대의 과정도 가능하다: 양립할 수 없는 이론들은 동일한 개념적 틀 안에서 표현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뉴튼의 역제곱 법칙을 힘 2.0001을 지닌 역법칙으로 갈음한다면, 우리는 동일한 틀 내부에서 다른 이론을 지닌다; 그리고 두 가지 한도들 사이의 차이점이 더 커진다면 그 차이점은 증가할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중력적 상호작용에 대한 한정된 속도를 뉴튼의 이론에 도입하여 우리가 동일한 개념적 틀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여전히 말할 것이다. 속도가 매우 크다면, 두 가지 이론들은 실험적으로 실험 불가능할 것이다; 속도가 작다면, 동일한 개념적 틀 안에 여전히 남아있다할지라도 그 이론들은 그 이론들의 경험적 관련성에서 크게 다를 것이다.)

개념들이 커다란 암시적 힘을 지녀서 이론의 추가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할지라도, 순수한 과학자에게 실제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개념적 체계가 아니라 이론이다. 그리고 이론은 순수한 과학자에게 도구만은 아니고, 이론은 그 이상의 것이다: 순수한 과학자는 이론이 지닌 진실이나 진실에 대한 그 이론의 근사치에 관심을 갖는다. 다른 한편으로 개념적 체계는 교환될 수 있고 이론을 설명하는 데 사용될 몇 가지 가능한 도구들 중의 하나이다. 개념적 체계는 이론에 대하여 언어를 제공할 따름이다; 아마도 또 다른 개념적 체계보다 더 낫고 더 단순한 언어를 제공하거나 혹은 그렇지 못할 따름이다. 아무튼 개념적 체계는 어느 정도까지 모호하고 애매한 상태로 (모든 언어처럼) 남는다. 개념적 체계는 정확하게될 수가 없다: 개념들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형식적이든 작동적(operational)이든 명시적이든 정의(定義)에 의하여 규정될 수 없다. 정의(定義)들을 통하여 개념적 체계의 의미를 정확하게만들려는 어떤 시도도 틀림없이 무한소급을 낳고, 겉으로 보이는 정확성만을 낳는데 그런 정밀성은 가장 기만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비정확성의 최악의 형태이다. (이것은 심지어 순수 수학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궁극적으로 개념들과 개념들의 의미라기보다는 이론들과 이론들이 지닌 진실성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요점은 보이지 않는다.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는 과학에서 우리 스스로 사실들에 대한 혹은 실체에 대한 그림들(Builder)을 만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반복해서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그림들을 그 그림들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결과들(‘die denknotwendigen Folgen’) 실제적 대상들이나 사실들의 필연적인 자연적 결과들(‘die naturnotwendigen Folgen’) 일치하는 방식으로 선택한다고 그는 말했다. 여기서 그 그림들이론들인지 아니면 개념들인지는 개방된 채로 남겨진다. 마흐(Mach), 헤르츠(Hertz)와 토론하면서, 헤르츠의 그림들개념들로서 우리가 해석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보어(Bohr)의 견해는 그가 입자 그림파동 그림에 대하여 말할 때 유사한 듯이 보인다; 사실상, 그의 말하는 방식은 헤르츠와 마흐의 (적어도 간접적인) 영향을 강력하게 표시한다.

그러나 그림들은 중요하지 않다. 그림들은 다소 개념들과 동의어라면 특히 중요하지 않고, 이론들을 규정할 의도를 지닐 때 거의 동등하게 중요하지 않다. 이론은 그림이 아니다. 이론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하여 이해될 필요가 없다: 이론이 해결하려고 고안된 문제와 이론이 자체와 경쟁하는 이론들보다 더 잘 문제를 해결하거나 더 나쁘게 문제를 해결하는 정도를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론을 이해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이해를 시각적 이미지들과 연결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생생한 시각화는 이 다른 조건들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이론에 대한 이해에 해당하지 않는다: 문제 상황에 대한, 그리고 경쟁하는 이론들에 찬성하고 반대하는 논증들에 대한 이해.

입자 그림파동 그림및 그 그림들의 소위 이원성(duality)’이나 상보성(complementarity)’에 관한 그리고 보어가 주장하는 원자적 대상들을 시각화하여 이해하는 것(인정되지만 무관한) 난제 혹은 아마도 불가능성으로 인한 고전적 그림들을 사용하는 소위 필연성에 관한 끝없는 대화 때문이 이 고찰들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이해는 가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양자론을 이해할 수 있음을 부인해서 그 이론을 가르치고 실제로 이해하는 두 가지 면 모두에서 가장 가공할 충격이 일어났다.

사실상, 그림들에 관한 이 대화 모두는 물리학이나 물리학적 이론이나 물리학적 이론을 이해하는 데 최소한의 관계도 없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 이론들을 이해하려는시도는 그 이론들이 (비록 계측을 위한 유용한 도구들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이해될 수 없기때문에 무용하다는 유행성 주장은, 그 이론들이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의도를 지니는지 혹은 왜 그 이론들이 경쟁하는 이론들보다 왜 그 문제들을 더 잘 또는 더 나쁘게 해결하는지를 우리가 알 수 없다는 다소 터무니없는 주장에 해당한다.

개념들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면, 정의(定義: definitions)은 틀림없이 또한 중요하지 않다. 그리하여 내가 여기서 물리학에서의 사실주의를 호소하고 있다할지라도, 나에게는 사실주의실체를 정의(定義)하려는 의도가 없다. 여기서 물리학에서의 사실주의를 호소하면서 나는, 주로, 물리학에서의 관찰자나 혹은 우리의 의식이나 혹은 우리의 정보의 위상이 혹은 역할에 관하여 갈릴레오나 뉴튼이나 패러데이(Faraday) 이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는 동시에 심지어 뉴튼의 물리학에서도, ‘공간물질보다 다소 덜 실제적이었다고 (왜냐하면 공간은 물질에 영향을 미칠지라도 영향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지적한 준비가 철저히 되어 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관성계(inertial frame)는 두 가지 사건의 시공적 일치나 혹은 두 가지 사건 사이의 시공적 거리보다 덜 사실적이었다고 지적할 준비가 나는 철저히 되어 있다. 유사한 방식으로, 물리적 체계의 자유의 정도들에 관한 숫자는 더 추상적인 개념이고 아마도 그 체계를 구성하는 원자들이나 분자들보다 덜 사실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한 체계의 자유의 정도들은 사실적이 아니라고, 그 정도들은 개념적 장치들에 지나지 않으체계의 사실적인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고 말하는 데 반대하겠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걷어차일 수 있는(kickable)’ (그리고 걷어차이면 대항하여 걷어찰 수 있는) 것을 우리가 물리학적으로 현실적이라고 부른다는 란데(Landé)의 제안을 내가 탁월한 것으로 간주할지라도, 나에게는 현실적(real)’이라는 단어를 포함하여 단어들에 관하여 논쟁할 의도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어차임을 당할 수 있는 정도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나에게 있다: 우리는 준성(準星: quasars)들을 걷어찰 수는 없다고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우리들에게 상기시킨다.

 

 

3. 13가지 주장.

나는, 내가 처음으로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적인 신념을 분석하여 비판하지 말아야 하면 나중에 양자론에 대하여 완벽하게 사실주의적인 해석이 불가능함을 밝히지 말아야 하는지를 의심했다. 나는 다르게 진행하기로 결심했다. 13 가지 주장과 요약의 형태로 양자론의 가치에 관하여 내 자신의 사실주의적 해석을 나는 설명할 예정이다; 그리고 나는 진행하면서 코펜하겐 해석을 비판할 것이다. 나의 네 번째 주장이나 기껏해야 여섯 번째 주장에 도달한 후에 이 어불성설 읽기를 중단할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나는 충격을 던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가 내 방식대로 진행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 물리학자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1. 나의 첫 번째 주장은 양자론을 이해하는 데 관하여 가장 중요한 일과 관련된다: 그 이론이 해결하기로 예상되는 문제들의 종류. 이 문제들은 본질적으로 통계적 문제들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a) 플랑크(Planck)의 복사공식(radiation formula)을 낳은 1897-1900년에 플랑크가 경험했던 문제들에 관해서도 상황은 그러했다. (b)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과 플랑크의 공식을 그가 도출한 것에 대해서 상황은 그러했다. (c) 보어(Bohr)의 스펙트럼 발광(spectral emissions) 이론을 낳은 1913년에 보어가 경험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상황은 그러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 리드베르크-리쯔 결합 원리(Rydberg-Ritz combination principle)은 분명히 통계적 문제였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이 제시된 후에). 물론, 보어(Bohr)(the)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던 두 번째 문제가 있었다. 원자 안정성(atomic stability) 문제, 혹은 원자에서 비-방사 전자들의 정지된 기저상태(the stationary ground state of non-radiating electrons in the atom)의 문제. 보어는 이 문제를 한 가지 공리를 (‘양자 상태선호된 궤도[preferred orbits]’) 통하여 - ‘해결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설명적 해답이 있는 한, 그 해답은 드 브로이(de Broglie)와 파동역학에 기인한다; 그것은 보어의 해석에 비추어 그 해답이 역학적 문제를 통계적 문제도 대체한 것에 기인함을 의미한다. (아래 참조.) (d) 최초로 보어(Bohr)의 가장 유효한 대응의 원리(principle of correspondence)’에 의하여 해결되었던 한 무리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상황은 그러했다: 이것들은, 주로, 방사된 스펙트럼선들의 강도(intensities)의 문제였다. 그러나 보어의 대응 논증들은 주로 질적이거나, 기껏해야, 근사치들이었다. 새로운 양자역학을 낳은 핵심적 문제들은 정확한 통계적 결과들은 얻어서 이것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보어(Bohr)와 그의 학파가 문제를 바라보았던 방식이 전혀 아니다. 보어(Bohr)1948년에 이르러서야 표현한 바와 같이, 그들은 고전적인 통계적 역학의 일반화를 탐색한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는 행동의 양[quantum]의 존재를 참작하기에 맞추어진 고전적인 [입자] 역학의 일반화를 탐색했다;양자역학의 발전에 최초의 추진력을 제공한 원자적 안정성의 특징적인 특성들을... 설명하기에 충분히 넓은 틀을 제공할 입자역학의 일반화....

내가 발견할 수 있었던 양자역학에 관한 문제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들은, 아마도 실험들로부터 시작하여 마치 언급된 과학적 실험들이 주로 이론적 문제들의 결과들만이 아니고 그 결과들이 어떤 이론과 갈등을 일으키거나 어떤 이론을 지지하기 때문에 중요한 양 이론을 과학적 실험의...결과들을 분류하고 종합하는 시도로서 간주하는 설명들을 제외하고, 유사하다. (디랙[Dirac]양자론에 대한 필요성[The Need for a Quantum Theory]’을 토론할 때 유사한 귀납적 태도가 디랙의 출발점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원자 안정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입자역학을 개혁하는 보어(Bohr)(내가 생각하기에 그릇된) 프로그램은 1924년과 1926년 사이에 성공적으로 수행되는 어떤 전망을 지녔던 듯이 보였다고 나는 인정해야겠다. 물론 나는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가 광양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파동들과 관련되어있다는 아인슈타인의 개념을 광양자들에게 적용하여 보어(Bohr)의 양자화된 선호된 궤도(preferred orbits)’들이 (그리고 그 궤도들과 함께 안정성) 파동 간섭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음 밝힌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1923-24년의 박사논문을 언급한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전체 발전상황에서 가장 대담하고, 가장 깊고 그리고 가장 원대한 개념들 중 한 가지 개념이었다.

드 브로이의 개념은, 완전히 의식적으로, 빛 양자 혹은 광양자들을 빛 파동들과 연결시키는 아인슈타인 개념의 반전(inversion)이었다. 그리하여 드 브로이의 이론의 모형이었던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빛은 입자들이나 빛 양자들이나 광양자들의 형태로 방사되어 흡수된다; 적어도 입자들이나 빛 양자들이나 광양자들이 방사되거나 흡수됨을 통하여 물질과 상호작용하는 반면, 그리하여 상당히 분명한 시공적 위치를 지닌 사물들의 형태로, 그러나 빛은 파동처럼 전파된다. 이 파동들의 진폭의 제곱은,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광양자 밀도를 (, 통계적 확률) 결정한다; 그리고 원자나 (적당한 상태의) 자유 전자가 위치한 장소에서의 파동들의 진폭은 광양자 흡수의 확률을 결정한다.

그러나 막스 보른(Max Born)이 우리가 아인슈타인에게 빚지고 있는 광양자와 빛 파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통계적 해석을 이 새로운 파동역학에 적용하기까지는 2년여가 걸렸고 그 기간 동안에 드 브로이(de Broglie)이의 전자이론은 발전하여 슈뢰딩거(Schrödinger)파동역학이 되었다. 막스 보른 자신은 파동역학에 대한 자신의 통계적 해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해답은... 빛의 파동론과 광양자 가설 사이를 연결하는 것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언급에 의하여 제시되었다. 빛 파동의 강도는 [물론, 의도되는 것은 진폭의 제곱이다] 광양자나, 보다 정확하게, 존재하는 광양자의 확률의 강도에 대한 척도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보른(Born)의 물질 파동에 대한 통계적 해석 덕택에, 심지어 통계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양자론의 한 가지 문제가 원자 안정성의 문제 통계적 문제로 축소되었거나 통계적 문제로 대체되었다: 보어(Bohr)의 양자화된 선호된 궤도들(preferred orbits)’은 전자의 존재에 대한 확률0(zero)로부터 크게 달라진 궤도들로 판명되었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양자론의 문제들은 본질적으로 통계적이거나 확률적인 특징을 지닌다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2. 나의 두 번째 주장은 통계적 질문들은, 본질적으로, 통계적 답변들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은 틀림없이, 본질적으로, 통계적 이론이다.

이 논증은 (비록 그 논증의 유효성이 전혀 일반적으로 수용되지 않는다할지라도) 완벽하게 솔직하고 논리적으로 분명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 논증은 리처드 폰 미제스[Richard von Mises]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 논증은 알프레드 란데[Alfred Landé]에 의하여 아름답게 증명되었다.)

통계적 결론들은 통계적 전제들이 없으면 획득될 수 없다. 그리하여 통계적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은 통계적 이론이 없으면 획득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이론들에 대한 문제들이 통계적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널리 수용되는 이론의 통계적 특징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른 이유들이 고안되었다.

이 이유들 가운데서 최고의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확률주의적이고 결과적으로 통계적인 이론을 채택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우리의 (필연적인) 지식결여라는 특히 하이젠베르크에 의하여 발견되어 그의 불확정성 원리(principle of indeterminacy불확정성의 원리(principle of uncertainty에서 설명된 우리가 지닌 지식에 대한 한계 논증이다. (이 논증은 아래 나의 다섯 번째 주장에서 비판된다.)

 

3. 나의 세 번째 주장은, 관찰자나 주체가 양자론으로 침투하는 것은 양자론의 확률주의적 특징을 우리가 지닌 문제들의 통계적 특징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우리의 (이른바 필연적인) 지식결여를 통하여 우리가 설명해야 한다는 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확률주의적 이론이 지식결여의 결과라는 견해가 불가피하게 확률이론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을 유발하기 때문에 그 믿음은 이 침투를 야기했다; , 어떤 사건의 확률은 저 사건에 대한 어떤 사람의 (불완전한) 지식의 정도나 그 지식에 대한 그 사람의 신념의 정도를 측정한다는 견해를 야기했다.

그러나, 내가 여러 해 동안 밝히려고 노력한 바와 같이, 무지로부터 우리가 지식을 통계적 지식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마술일 터이다.

 

4. 나의 네 번째 주장은, 결과적으로 우리는 내가 거대한 양자 혼란이라고 부를 것에 직면해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혼란이 없어 보이면서 보어[Bohr]상보성의 원리를 고수하는 유일한 사람은 새로운 옷을 입고 거의 정확하게 아인슈타인이 경멸하는 개념을 추종하는 프리츠 보프[Fritz Bopp]이다.)

이 거대한 혼란을 설명하기 위하여, 나는 통계적 이론들에 대하여 몇 마디 말을 해야겠다.

모든 확률주의적이나 통계적인 이론은 다음을 전제한다:

(a) 특정 실험적 상황에서 특정 요소들에게 (주사위) (비커 안에서 흔들려서, 탁자 위에 던져진) 발생하는 특정 사건들 (5 출현). 이것들은 우리의 통계에 대한 모집단(population)’을 형성한다.

(b) 이 사건들, 요소들, 그리고 실험적 상황들의 특정 물리적 속성들; 예를 들어 주사위들은 동질이라는 것과 여섯 면의 한 면만 ‘5’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실험적 상황이 변화의 특정 너비를 허용한다는 것.

(c) 표본공간이나 확률공간에서 (리처드 폰 미제스[Richard von Mises]로 부터 유래하는 개념) 지점들이라고 지칭되는 가능한 사건들의 (실험적 상황에서 가능한) 집합.

(d) 어떤 수학적 함수에 의하여 결정되어 분포함수로 지칭되는, 표본공간의 각 지점과 (혹은, 연속 표본공간의 경우에는 각 영역과) 결합되는 숫자. (이 숫자들의 합계는 1이다; 이것은 어떤 표준화[normalization]’에 의하여 성립될 수 있다.) 연속적인 경우에서는 분포함수가 밀도함수이다.

사례: 우리는 표본공간은 영국이거나, 더욱 정확하게, 영국의 어느 지점에 살고 있는 남자나 여자에 대한 사건들의 집합일 것이다. 분포함수는 모집단의 (연속) 밀도함수에 (1로 표준화된) 의하여 주어질 수 있다; , 영국 전체 인구에 의하여 나누어짐을 통하여 표준화된어떤 지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실제 숫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정보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종류의 모든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을 받는다: 한 명의 영국 사람이 특정 장소(지점)에서 사는 확률은 무엇인가; 혹은 한 명의 영국 사람이 영국 남부에서 사는 확률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북부와 남부를 합당하게 우리가 분할한다고 전제한다.)

이제 통계적 분포함수는 (표준화되었든 아니든) 표본공간을 규정하는 속성으로서 우리의 경우에는 영국 간주될 것임은 분명한다. 그것은 사건들(5 출현; 혹은 옥스퍼드에 주소를 둔 헨리 스미스 씨에 영국 주민 -) 특징적인 물리적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요소들(주사위; 혹은 스미스 씨) 속성은 더욱 아니다.

이것은 스미스 씨에 대하여 특별히 분명하다: 그는, 통계적 이론에 대하여, 고찰되고 있는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통계적 이론은 가령 스미스 씨의 침대나 그의 손목시계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과 거의 똑같은 것을 스미스 씨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이 물리적으로 매우 다른 요소들의 분포는 거의 동일 할 것이다.) 그 분포는, 아마도, 주사위에 대하서는 덜 분명하다: 이 경우에 분포함수는 자체의 물리적 속성들과 (자체의 재료의 동질성인 자체가 여섯 면들을 가지고 있는 것) 관계된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그러나 이 관계는 첫눈에 나타날 것처럼 그렇게 가깝지는 않다. 왜냐하면 분포함수가 크거나 작은 주사위에 대하여 그리고 어떤 가벼운 플라스틱이나 우라늄으로 만들 주사위에 대해서도 동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5가 나올 확률은 ‘5’가 표시된 한 면만을 지닌 모든 주사위에 대하여 동일할 것이다 다른 면들의 표시들이 무엇이든 (이것들이 다른 확률들에 크게 영향을 미칠지라도); 그리고 그것은 ‘5’로 표시된 한 면보다 더 많거나 더 적은 면을 가진 모든 주사위에 대하여, 혹은 비-동질적인 주사위에 대하여 다른 것일 것이다.

이제 내가 거대한 양자 혼란이라고 칭하는 것은 분포함수, 다시 말해서 어떤 표본공간(혹은 아마도 사건들의 어떤 모집단’) 규정하는 통계적 측도함수(measure function)를 취하여 그 함수를 모집단 요소들의 물리적 속성으로서 취급하는 데 놓여있다. 그것은 혼란이다: 표본공간은 요소들과 관련이 없다. 입자들과 파동들 사이에, 혹은 입자들과 입자들이 관련된 장(: field) 사이에는 대칭적인 관계가 없어서 이원성(duality)’이 없다.

불행하게도 물리학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분포함수가 (혹은 분포함수의 수학적 형태) 고찰되고 있는 모집단의 요소들의 속성인양 말한다. 그들은 사물들의 완전히 다른 범주들이나 형태들을 구분하지 않고, 영국 남부에 살 나의확률이 나의나이처럼 나의속성들 중 한 가지 아마도 나의 물리적 속성들 중 한 가지 속성 라는 매우 불안정한 전제에 의지한다.

이제 나의 주장은, 이 혼란이 입자와 파동의 이원성이나 파동입자(wavicles)’에 관하여 말하는 저 사람들에 의하여 밝혀지는 바와 같이 양자론에서 널리 만연해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위 파동- ψ-함수 함수의 수학적 형태인 f(P, dP/dt)와 일치할 것인데 그 함수의 수학적 형태는 확률주의적 분포함수 P의 함수인데 그 함수에서 f=ψ=ψ(q,t)P=ψ 는 밀도함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H. 멜버그[Mehlberg]가 란데[Landé]의 견해들을 탁월하게 토론하는 곳에서 E. 핀버그[Feenberg]를 언급하는 각주 6 참조.) 다른 한편으로 문제의 요소에는 입자의 속성들이 있다. ψ-함수의 파동형태는 (배위공간[configuration space]에서) 이 관점으로부터 확률이론에 문제를 부과하지만 입자들의 물리적 속성들과 거의 관계가 없는 일종의 우연한 사건일 것이다. 상황은 마치, 내가 영국 남부에 (합당한 표본장소에서) 살고 있는 분포함수가 가우스적(Gaussian)이거나 비-가우스적(non=Gaussian)인 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하여 내가 가우스-사람(Gauss-man)’이나 -가우스-사람(non-Gauss-man)’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

5. 나의 다섯 번째 주장은 하이젠베르크의 유명한 공식들과 관련이 있다:38a

 

 

Et h, (1)

pxqx h. (2)

 

이 공식들은, 의심할 바 없이, 유효하게 도출될 수 있는 양자론의 통계적 공식들이다. 그러나 이 공식들은, 이 공식들이 우리가 행하는 측정들의 정밀성에 대한 몇 가지 상위 한계들을 (혹은 우리들이 행하는 측정들의 부정확성의 몇 가지 하위 한계들을) 결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했던 저 양자 이론가들에 의하여 습관적으로 잘못 해석되었다.

나의 주장은 이 공식들이 실험들의 수열들에 관한 결과들의 통계적 분산이나 산란에 몇 가지 낮은 한계들을 둔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통계적 산란 관계들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특정한 개별적 예언들의 정밀도를 제한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이 산란 관계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산란의 범위나 폭보다 훨씬 더 정밀한 측정들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상황은 다음과 같다: 통계적 이론은 산업도시의 환경에서 인구의 분포나 산란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것을 시험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사는 장소들을 예측된 산란의 범위보다 멀리 초과하는 정밀도로써 맞추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통계적 법칙들은 우리가 특정 한계 아래로 산란을 줄일 수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사람들이 사는 장소들의 위치들을 최소한의 통계적 산란보다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오류이다.

하이젠베르크의 공식들이 자체의 여러 가지 합당한 해석들에서 통계적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자연에 대한 통계적인 법칙들이기 때문에 (나의 다음 주장에서 자세하게 밝혀질 것과 같이) 양자역학이 확률주의적이거나 통계적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함은 전적으로 명백하다. 게다가 통계적 법칙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우리의 지식을 증가시킨다: 그것들이 우리의 지식을 제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그것들이 제한하는 것은 입자들의 산란이다 (또는 더 정확하게, 입자들에 대한 어떤 실험들의 수열에 관한 결과의 산란이다). 이 산란은 억제될 수 없다고 그것들은 말한다. 우리의 지식에 대한 소위 한계가 양자론의 통계적 특징을 설명하는 데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또한 오류이다. (아래 나의 여덟 번째 주장 참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이젠베르크의 공식들이, 모순 없이 입자들과 파동들의 이중적특징을 주장하는 데 소위 필요한 저 모호함을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언급되면 그것은 다시 동일한 오류이다; , ‘파립자(波粒子: wavicles)’로서의 그것들의 특징.

 

6. 나의 여섯 번째 주장은, 하이젠베르크의 공식 (1)(2)를 포함하여 이론의 통계적 법칙들이 아무리 두드러진다할지라도, 그 법칙들은 전적으로 합당하게 위치들과 운동량이 (그리고 질량-에너지와 회전과 같은 다양한 다른 물리적 속성들) 주어진 입자들(혹은 입자들에 대한 실험들의) 모집단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실험을 반복하여 (1) 우리가 좁은 시간 한계를 마련한다면 에너지의 산란과 (2) 우리가 좁게 제한된 위치를 마련한다면 운동량의 산란을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실험들을 준비할 수 없다고 산란관계가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얻는 실험적 결과들의 통계적 동질성에 한계들이 있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와 동시에 시간을, 혹은 운동량과 동시에 위치를 공식 (1)(2)가 허용하는 듯이 보이는 것보다 더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로 이 공식들에 의하여 예측된 산란을 시험하는 데 이 측정들이 필요하다.

이제 나는 내가 나의 마지막 두 가지 주장에서 언급한 것에 대하여 몇 가지 논증들을 내놓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 논증들은, 덧붙여, 하이젠베르크의 공식 (1)(2)가 양자역학의 교환관계보다 훨씬 더 오래된 이론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음을 밝힐 것이다.

우리는 1900년 플랑크(Planck)의 양자조건

E = hv로부터

 

하이젠베르크의 공식

Et h

(1)

도출할 수 있다.

 

이것은 상수 h를 고려하여 즉각

 

E = hv를 낳는데,

 

가 다양한 방식들로 해석될 공식이다. 하이젠베르크의 공식 (1)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마지막 공식을 광학의 원리인 조화 분해능 원리(the principle of harmonic resolving power)와 결합하기만 하면 되는데 조화 분해능은 플랑크의 조건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Bohr] 모두는 자신들의 불확정 관계들의 기원을 직간접적으로 이 원리에 둔다.) 이 원리는, 빈도 v의 단색파동열(monochromatic wave train)타임셔터(time shutter)에 의하여 잘려 기간 t의 한 가지 지속적인 시간이나 몇 가지 지속적인 시간들이 (‘파속들[wave packets]) 되면, 스펙트럼선의 너비 v

 

v 1/ t

 

될 것임을 서술한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괄목할만한 법칙이다. (이것은 중첩의 원리[the principle of superposition]를 포함한다.) 이것은

 

E = hv로부터

 

즉각

 

E h/t

 

낳고 그리하여 공식 (1)을 낳는다.

 

그러나 그렇게 공식 (1)을 도출하면서, 를 다양한 방식들로 (예를 들어, 측정의 부정확한 폭으로서) 우리는 더 이상 자유롭게 해석하지 못한다. 오히려 조화 분해능 원리(the principle of harmonic resolving power)에 의하여 에 주어지는 의미에 의하여 우리가 우리의 해석에서 묶인다. 이 원리는 v를 스펙트럼선의 폭으로서 해석한다. 따라서 플랑크(Planck)의 원리로 인하여 (아인슈타인의 해석에서) 이 폭을 스펙트럼선을 구성하는 입자들의 (광양자들) 에너지 산란으로서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빈도 v의 스펙트럼선은 내부로 들어오는 에너지 E =hv의 광양자의 통계적 결과로서 해석될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스펙트럼선의 폭 v를 함께 스펙트럼선을 형성하는 광양자들의 에너지의 통계적 산란의 범위 E로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공식 (1), 우리가 우리의 셔터 기간 t를 마음대로 변경시킨다면 우리는 안으로 들어오는 광양자들의 에너지의 산란 E에 거꾸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있다는 법칙을 서술한다.

이 결론은 (1)통계적 법칙이고 통계적 이론의 한 부분임을 분명히 밝힌다. (1)은 사진 필름이나 사진판 위에 안으로 들어오는 광양자들의 분포를 발견함으로써만 시험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하기 위하여, 광양자들이 스펙트럼선의 폭 E보다 훨씬 더 적은 부정확도, 가령 δE로 스펙트럼선에 부딪히는 장소들을 우리는 측정해야 한다:

 

δE ≪ ∆E.

 

그리하여 (1)에 의하여 표현되는 법칙과 그 법칙의 통계적 예측들에 대한 시험은

 

δEt h

 

충족시키는 정확도 δE로써 우리가 안으로 들어오는 입자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런 종류의 일은 매일 수행된다; 그리고 그것은 하이젠베르크의 공식들이 많은 입자들에 대하여 혹은 많은 연속적인 실험들에 대하여 개별적인 입자로써 통계적으로 예측하는 일들에 유효함을 보여주지만 그 공식들이 개별적인 입자들에 대한 측정들의 정확도를 제한하는 것으로서 잘못 해석됨을 보여준다.

두 번째 하이젠베르크의 공식의 결론

 

pxqx h(2)

 

있는데 그 결론은 시간 셔터의 도움을 받는 결론과 유사하다. 우리는 (평탄) 단색파열 v로 다시 시작하여 그것을 자른다; 이번에는 가변적인 너비 qx하나의 슬릿을 지닌 (‘한 가지-슬릿 실험’), 스크린(광선의 방향 z에 수직인) 통해. 슬릿이 매우 넓을 때는, 파동열(wave train)에는 미미한 효과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슬릿이 좁을 때, 우리는 회절(回折: diffraction) 효과를 얻는다: 슬릿 qx가 좁을수록 광선들이 자체의 원래 방향으로부터 갈라지는 각도가 넓어질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형태의 조화 분해능 원리(the principle of harmonic resolving power)가 적용된다 (x는 파수[waver number] , 센티미터 당 파동 숫자의 x-축에 대한 투사[projection]이다):

 

x 1/qx.

 

양 변에 h를 곱하여 우리는

hx h/qx

 

얻는다.

플랑크의 공식 E =hv 대신에 PX =hx의 형태로 된 드 브로이(de Broglie)의 공식을 사용하여, 우리는 hx 대신에 px를 쓸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2)에 도달한다.

슬릿 qx가 매우 작을 때, 호이겐스의 원리에 따라서 z 방향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 xx 방향으로 퍼지는 슬릿 qx로부터 출현하는 파동들을 우리는 얻는다 (실린더 파동들[cylinder waves]). 이것은, 슬릿에 도달하기 전에 운동량 px = 0(그 입자들이 z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녔던 입자들이 이제는 + xx 방향에서 운동량 px의 상당한 산란을 지닐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다양한 방향들에서 분광기를 지닌 다양한 운동량들을 측정함으로써 이 산란을 다시 시험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다양한 방향들에서 다양한 운동량들의 측정에 대한 정밀도 δp에는 한계가 없다; 즉 우리는 다시

 

δpx ≪ ∆px

 

얻고 그리하여

 

δpxpx h

 

얻는다.

다시 우리는, 한 가지-슬릿 실험에서 더 정확한 측정들인 δpx ≪ ∆px없이는 통계적 법칙 (2)를 실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오는 입자의 운동량 Px를 분광기 필름 위의 자체의 위치를 통하여 우리가 측정한다. 그리고 이것은 전형적이다. 우리가 거의 항상 운동량을 위치를 통하여 측정한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도플러효과를 측정한다면, 우리는 스펙트럼선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말해서 사진판 위의 선의 위치를 측정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 요점을 강조하는 일이 불행하게도 필요해졌는데, 위치 측정과 운동량 측정이 상보적인 물리적 특징들에 대한 분명한 정의(定義)를 허용하는 두 가지 실험적 과정들을 상호 배제하기때문에 양립할 수 없다는 (그리하여 상보적이라는) 보어(Bohr)의 반복되는 주장 때문이다. 두 가지 실험적 과정들은 서로를 배제하는데 위치 측정에 고정된 스크린이나 고정된 사진판이 필요한 반면 운동량 측정에는 움직일 수 있는 스크린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우리는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고정된 사진판을 통하여, 즉 위치를 통하여 운동량을 흔히 측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스크린을 통하여 운동량을 측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보어[Bohr]의 움직일 수 있는 스크린 사용은 적어도 스크린의 두 가지 위치 측정을 수반할 것이다.)

입자이론에 관하여 유명한 문제가, (주기적) 거리 qx를 그 슬릿들 사이에 지닌 두 개의 (혹은 그 이상의) 슬릿들을 지닌 두 개의 슬릿 실험(혹은 n-슬릿 실험) 의하여 제기된다. 알프레드 란데(Alfred Landé), 두 가지-슬릿 실험에 관련된 상황이 듀언-란데(Duande-Landé) 공간-주기성 공식으로 지칭될 것의 도움을 받아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px = n h/qx (n = 1, 2,...)

 

이 공식은, 양자역학 이전의 한 주기에 기인하는데, 물론 반대로 양자역학에서 도출될 수 있다.

두 개의 슬릿 실험은 주기성 qx를 지닌 공간-주기성 시험으로 판명된다. 입자들은 스크린에 (혹은 격자판) 운동량 묶음 p를 혹은 운동량 다수를 이전하여

 

pxqx = h이다.

 

결과적으로 (전게서에서 란데[Landé]에 의하여 밝혀진 바와 같이) 우리는 파동-같은 무늬들(fringes)을 얻는다.

슬릿 1을 통과하는 입자는 어떻게 슬릿 2가 닫혔다기보다는 열려있다는 것을 아는가?’라는 통상적인 질문은 이제 합당하게 잘 설명될 수 있다. 스크린 안에 구축되거나 구축되지 않은 주기성 qx가 있는지를 아는 것과 그리하여 스크린이 규모 px = h/qx를 지닌 운동량 묶음을 흡수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스크린이다 (혹은 격자판, 혹은 크리스털). 입자는 어떤 것도 필요가 없다: 입자는 단지 운동량 보존의 법칙과 동시에 공간 주기성의 법칙에 따라서 스크린과 (‘알고 있는’) 상호작용을 한다; 혹은 보다 정확하게, 입자는 총체적 실험적 배치와 상호작용을 한다 (아래 나의 8번째 그리고 특히 나의 10번째 주장 참조). [그런데, E. L. <Hill>, 내가 참석하는 행운을 누렸던 1962년 가을 미네소타 과학철학 센터<the Minnesota Center for Philosophy of Science>에서 행한 강연에서 이 수수께끼에 대하여 유사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나는 지금까지 주로 입자들과 입자들에 대한 (간접적) 측정에 대하여 언급했다: 예를 들어, 위치 측정을 통한 운동량 측정. 그러나 물론 다른 방법들도 있다: 가이거 계수기들은 (그다지 정확하게는 아닌) 위치와 동시에 시간을 측정할 것이다; 그리고 윌슨의 안개상자(Wilson Chambers)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윌슨의 안개상자 속에서의 위치 측정은 간접적인 운동량 측정일 것이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오는 입자에 대한 시간 측정은, 방전의 빈도가 (혹은 에너지) 매우 극심한 경우에 특별히 우리에게 흥미로울 것이다 보어(Bohr) 수소원자의 고전적 경우에 그러한 바와 같이.

여기서 우리는 파동 숫자인 뤼드베리(Rydberg)의 상수 R을 얻게 되어 Rc는 상수 빈도 VR인데 보어(Bohr)에 따라서 (1913) 이론의 상수들로부터 매우 정밀하게 (μ는 전자의 질량이고, e는 전자의 전하이다) 계산될 수 있다:

 

vR = Rc = 2 e μ/h .

 

그리하여 뤼드베리-리츠 결합원리(the Rydberg-Ritz combination principle)(리츠[Ritz]가 보어[Bohr]의 수소원자 이론보다 5년 앞서 1908년에 뤼드베리의 상수를 사용하여 설명한) 방전이나 흡수의 빈도 vm,n에 대하여 관계식

 

vm,n = vR/m - vR/n (m,n = 1,2,...)

 

주장한다. h를 곱하면 이것은 보어(Bohr)의 방전과 흡수에 관한 양자화 조건(Bohr’s quantization rule of emission or absorption)이 된다 (1913); [부분적으로 1910년에 아르투르 하스[Arthur Haas]<자신의 계산을 원자 모형에 근거시켰던> 예언했던.] 그리하여 허용 가능한 빈도 vm,n과 다양한 상응하는 입자들에 대한 보어(Bohr)-에너지들이 말하자면 최초의 원리들로부터 계산될 수 있다 그 원리들은 어떤 별개의 가치들만을 띨 수 있는 (‘고유가치들[eigenvalues로 유사-상수들로 아마도 기술될 것] 변수들이다. 따라서 vm,n는 매우 작을 것이고, t는 조화 분해능 원리(the principle of harmonic resolving power)의 도움을 받아서 계산되어 클 것이다.

그러나 이 선명한 스펙트럼선들은 (시간셔터가 간섭한다면 그 선명함을 잃을) 윌슨의 안개상자나 가이거 계수기와 같은 것을 통하여 광양자들의 도착시간을 (또한 방전의 시간을 제공하는) 정함으로써 통계적으로 조사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매우 정확한 빈도나 에너지의 고주파 X-레이 광양자들에 대한 콤프턴-사이먼(Compton-Simon) 사진들이다.) 이 도착시간들에 대하여 우리는 δt ≪ ∆t를 얻고 그리하여

 

E δt h이다.

 

7. 나의 일곱 번째 주장은 이 모든 것이, 혹은 그것의 대부분이 사실상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에 의하여 (그리고, 부수적으로 또한 슈뢰딩거[Schrödinger]에 의하여)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나는 이론의 예측들, 하이젠베르크의 공식들에 의하여 제공되는 산란과 동시에 통계적임을 반복하여 말하고 싶다. 틀림없이 산란보다 더 정확한 측정들(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예측들에 대한 시험들로서 작용할 것이다: 이 측정들은 소급언급들(retrodictions)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고도로 정확한 소급언급적 측정들이 가능함을 보았고 언급했다. 그가 보지 못한 것은 그 측정들이 이론에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측정들이 이론을 시험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측정들은 반대로 시험될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그는, 내키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강력하게 (아래 47번 각주의 원문 참조) 이 소급언급적 측정들이 무의미하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이 제안은, 특히 공식 (1)(2)보다 더 분명한 측정들에 상응하는 힐베르트 공간에 벡터들이 없음이 밝혀졌을 때, 코펜하겐 해석을 고수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수용되어 독단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 사실로 인하여 실제로 난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힐베르트 공간에서의 벡터들은 통계적 이론의 통계적 주장들과 일치한다. 그 벡터들은 측정들에 관하여, 혹은 개별 입자들의 위치와 운동량, 혹은 에너지와 시간의 결정을 통한 통계적 주장들에 대한 시험들에 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내가 기술한 측정들이 실행될 수 있다는 하이젠베르크의 인정과 측정들은 과거를 언급할 따름이기 때문에 완전히 무의미하지 않다면 기껏해야 중요하지 않고 흥미롭지 않다는 그의 제안에 관한 나의 주장에 대하여 몇 가지 증거를 인용할 것이다. ‘전자의 미래 진행을 계산하는 데 초기 조건들로 사용될 수 없고 그리하여 실험적 검증에 부쳐질 수 없는측정들은 물리적 의미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으로 실수하는 것이다. 이유인즉 (a) 초기 조건에 대한 준비는 물론 매우 중요하지만, 항상 과거를 조사하고 그 주요 기능이 반대로 검증될 수 있게’ (, 시험가능하게) 되는 게 아니라 검증하는’ (혹은 더 정확하게 시험하는) 것인 시험 서술들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b) 이 시험 서술들이, 비록 과거를 조사하지만, 반대로 검증될 수 있지’ (혹은 더 정확하게, 시험될 수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모든 측정은 자체의 즉각적인 반복이 동일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검증될수 있거나 시험될 수 있다는 것은 양자론의 원리들 중 한 원리이다. (이 원리는, 그 주창자가 폰 노이만[von Neumann]인 듯한데, 아래에 나의 9번째 주장이라는 제목으로 설명되는 의미에서 사소하게 그렇지 않다면 일반적으로 유효하지 않다.) 그리하여 과거를 조사하는 이 측정들이 실험적 검증에 종속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일 따름이다.

하이젠베르크와 내가 동일한 측정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측정들이 불확정성 관계들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분명하게 밝히기 위하여, 위에 설명된 바와 같이 다양한 위치에서 분광기들의 (혹은 수평 스크린에 나란한 사진판의) 도움을 받는 px의 측정들은 사실상 위치 측정들이서 우리가 두 가지 위치 측정들을 통하여 위치와 운동량에 관한 우리의 총체적 정보를 얻는다는 것을 나는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싶다: 첫 번째 것은 슬릿 qx에 의하여 제공되고 두 번째 것은 사진판에 대한 입자의 충돌에 의하여 제공된다. (우리는 광선의 빈도를 혹은 에너지 - 알려진 것으로서 수용할 수 있다.) 이제 하이젠베르크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정확하게 두 가지 위치 측정들(그로 인하여 우리는 첫 번째 측정 이후의 그리고 두 번째 측정 이전의 위치와 동시에 운동량을 계산할 수 있는) 구성되는 그런 배열에 관한 것이다:... 속도를 [혹은 운동량] 측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두 가지 다른 시간에 위치를 결정하는 것에 의존한다... 두 번째 [측정]이 실행되기 전에 바라는 모든 정확성으로 속도를[혹은 운동량] 결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물리학자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이 측정 이후의 속도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그 운동량이 알려진 (가령, 입자가 단색의 광선에 속하기 때문에) 입자의 위치를 우리가 측정하는 실험들에 관하여 훨씬 더 강조한다: ‘... 불확정성 관계는 과거와 관련되지 않는다고 그는 서술한다;전자의 속도가 처음에 알려지고 그 후에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된다면, 측정 이전의 횟수들에 대한 위치는 계산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거의 횟수에 대하여 pq는 통상적인 한계적 가치보다 더 작다.’ 지금까지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미묘하지만 중요한 우리의 의견불일치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하이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이 지식은 순전히 사변적인 특징을 지니는데 이유인즉 그 지식은 전자의 미래 진보에 대한 계산에서 초기조건으로서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리하여 실험적 검증에 부쳐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밝힐 바와 같이 거짓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이것에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전자의 과거 역사에 관한 그런 계산에 어떤 물리적 실체가 귀속될 수 있는지 아닌지는 개인적인 믿음의 문제이다.’

하이젠베르크의 글을 읽는 거의 모든 물리학자는 아닌지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측정들은 통계적 법칙 (1)(2)를 시험하는 데 필요하다; 즉 산란 관계들.

소급언급적으로 측정 이전의 횟수들에 대한 위치들이 계산될입자의 위치 측정에 관한 문제의 특별한 경우는, 하이젠베르크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분광기의 사진필름 위 입자의 (광양자 혹은 전자) 위치를 측정한다면, 우리는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입자의 빈도나 에너지 그리하여 운동량을 측정하는 데 이 위치 측정을 (알려진 실험 배열과 함께) 사용한다; 물론 항상 소급언급적으로. 그렇게 발견된 전자의 과거 역사에 물리적 실체가 귀속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측정의 필수적인 표준 방식의 중요성을 질문하는 것이다; 특히 양자역학에 필수적인.

그러나 우리가 물리적 실체를, 하이젠베르크가 수용하는 바와 같이 pq h인 측정들에 귀속시키자마자 전체 상황은 완전히 변한다: 지금으로서는, 양자론에 따라서 전자가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가질수 있는지에는 문제가 없다. 전자는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부단히 거부되었던 것은 바로 이 사실이었다: 하이젠베르크가 그 사실을 개인적인 믿음의 문제로 만들었을지라도, 보어(Bohr)와 코펜하겐 해석은 (부분적으로 힐베르트의 공간에 저 벡터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전자가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가질 수 없을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이 독단은, 아마도 입자는 이론이 (주장되는 바) ‘측정되기를 허용하지 않는 속성들을 지닐 없다는 의미에서, 양자론이 완벽하다는 보어(Bohr)의 주장의 핵심이다.

그리하여 소위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그리고 로젠의 역설(아래 n. 14 참조) 역설이 아니라 유효한 논증인데 왜냐하면 그 논증이 다음의 것을 확립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입자에 정확한 위치와 동시에 운동량을 귀속시켜야 하는데 그 위치와 동시에 운동량은 보어(Bohr)와 그의 학파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보프[Bopp]에 의하여 수용되었다할지라도).

그 후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 사고실험은, 입자 쌍-생성과 광양자를 생성하는 입자 쌍-파괴와 관련하여 실제적 실험이 되었다. 쌍들의 시간과 에너지는 원칙적으로 정확도로써 측정될 수 있다. 물론 측정들은 소급언급적이다: 측정들은 이론에 대한 시험들이다.

왜 보어(Bohr)와 그의 추종자들은 δpxδqx h가 가능하다는 것을 부인했을까? 거대한 양자 혼란(the great quantum muddle), 소위 입자와 파동의 이원론 때문이다: 입자그림(the particle picture)파동그림(the wave picture)이라는 두 가지 그림들이 있다고, 그리고 그것들은 대등하거나 상보적(complimentary)’으로 밝혀졌다고 언급된다; 다시 말해서, 두 가지가 유효하다. 그러나 이 상보성이나 이원성, 우리가 입자로 하여금 동시에 분명한 위치와 분명한 운동량을 갖게 한다면 틀림없이 붕괴한다고 언급된다.

양자론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이 나타난 것은 - 거의 필연적으로 이곳으로부터이고, 우리가 다음에 돌아갈 확률에 대한 주관적 해석으로부터이다.

 

8. 나의 여덟 번째 주장은, 내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거대한 양자 혼란을 용서하는 것을 아닐지라도 설명하는 나의 시도로부터 유래한다. 나의 주장은 양자역학의 형식주의에 대한 해석이 확률계산의 해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확률계산으로써 나는

0 p(a,b) 1

 

같은 공식적 법칙들을 포함하는 공식적 계산을 의미하는데 그 법칙에서 p(a,b)b에 상대적인 a의 확률(혹은 b가 주어진 a의 확률’) 읽힐 것이다.

확률(함수 혹은 함수기호 p’)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논증 ab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해석에 달려있다.

그러나 존재들의 집합인 가령 S가 있다고 전제되는데 그 집합에 변수 a,b,c,...,가 관련된다; 그리고 aS에 속한다면 a(‘a가 아니다로 읽힌다) 또한 S에 속한다고 전제된다; 그리고 abS에 속한다면 ab(‘a--b로 읽힌다) 또한 그러하다. S에 대하여 더 이상 전제가 필요 없다. (더욱 특히, S가 부분적으로 질서가 잡힌 집합이라고 전제할 필요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상징들에 대하여 허용될 수 있는 의미들은, 많은 다양한 해석에 노출되어있다 할지라도, 이 상징들을 연결하는 몇 가지 공식적 법칙들인 p-함수와 관련되는 규칙들에 의하여 다소 제한된다.

다음 공식들은 그런 공식적 규칙들에 대한 사소한 사례들이다:

 

p(a,a) = 1

p(a,b) +p(-a,b) = 1 (bp(-b,b) 0이 아니라면).

p(a,b) = p(aa,b) = p(a,bb).

p(a,c) p(ab,c) p(b,c).

p(ab,c) = p(ba,c).

p((ab)c,d) = p(a(bc),d).

p(a,a) = p(b,c) = p(c,b)일 때마다 p(a,b) = p(a,c).

 

우리는, ‘상대적 확률p(a,b)에 관하여 절대적 확률p(a)에 대한 정의(定義)를 또한 제공할 것이다:

 

p(a) = p(a, -((-a)a)).

 

(반대 방향으로의 정의[定義]는 더 널리 알려져 있다: p(b) 0라면, p(a,b) = p(ab) /p(b).)

몇 가지 이 공식적 규칙들을 선택하여 모든 다른 규칙들이 그 규칙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도록 하는 과업은 공식적 확률계산에 대한 한 가지 이상의 합당한 공리화들을 발견하는 과업이다. 나는 단지 그것을 한 가지 이상의 합당한 해석들을 발견하는 과업과 대조하기 위하여 그것을 언급한다.

매우 다양한 해석들이 있는데 그 해석들은 두 가지 주요 무리로 구분될 것이다: 주관적 해석들과 객관적 해석들.

주관적 해석들(정보) b가 주어진 (주장) a에서 숫자 (a,b)를 우리가 지닌 지식이나 우리가 지닌 신념과 같은 것을 측정하는 것으로서 해석하는 해석들이다. 그리하여 p-함수의 논증들은, a,b,c,...는 이 경우에 신념이나 의심의 항목으로서 혹은 정보나 제안이나 주장이나 서술이나 가설의 항목들로서 해석될 수 있다.

오랫동안 우리는 확률적 전제들에 관하여 주관적으로 해석되는 체계로부터 시작하여 그리하여 이 주관주의적인 전제들로부터 객관적인 통계적 결론들을 도출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많은 유명한 수학자들과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여전히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논리적 실수이다.

그 실수는 [혹은 더 정확하게는, 실수의 이전 역사, 그리고 B. L. 반 데어 배르덴<van der Waerden>이 나에게 말하는 바와 같이, 실수 자체] 확률이론의 위대한 창시자들 중 몇 명인 자곱 베르누이(Jacob Bernoulli)와 특히 시메옹 데니 프와송(Siméon Denis Poisson)에게로 거슬러 올라갈 것인데 그들은, 큰 수의 법칙(the Law of great numbers)에 관한 다양한 형태를 도출하여, -통계적 전제들로부터 통계적 결론들에 이르는 일종의 논리-수학적 교량을 자신들이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 특정 사건들의 빈도에 관한 결론들에 이르는.

논리적 실수는 리처드 폰 미제스(Richard von Mises)와 또한 내 자신에 의하여 신중하게 분석되었다. 미제스는, 도출의 이런저런 단계에서 상징들의 비-통계적 의미가 감소하고 암묵적으로 통계적 의미에 의하여 대체됨을 밝혔다. 1에 근접하는 확률을, ‘매우 강력하게 신뢰되는혹은 아마도 거의 알려진의 의미에서 거의 확실한대신에, ‘거의 항상 발생하는의 의미에서 거의 확실한으로서 해석함으로써 이것은 통상적으로 수행된다. 때때로 실수는 거의 확실히 알려진거의 확실히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진으로써 대체하는 데 놓여있다. 이것이 어떻다할지라도, 실수는 매우 분명하다: 신뢰도에 관한 전제들로부터 우리는 사건들의 빈도에 관한 결론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불확실성을 표현하는 전제들로부터 통계적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이 생각이 여전히 양자 이론가들 사이에 강력하다는 것은 기묘하다; 왜냐하면 그 이론가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인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이 자신의 유명한 저서인 양자역학의 수학적 토대(Mathematical Foundations of Quantum Mechanics)에서 폰 미제스(von Mises)의 확률론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에 대한 폰 노이만의 칭찬은 양자이론가들로 하여금 비-통계적 전제들로부터 통계적 결론들에 이른 교량의 존재에 대항하여 폰 미제스의 논증들을 신중하게 연구하도록 설득하는 듯이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폰 미제스의 이론을 전체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비-통계적 전제들로부터 통계적 결론들에 이른 소위 교량에 대한 그의 비판이 답변을 받을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나는 심지어 그것을 반증하려는 진지한 시도에 대하여 알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 이론은 베이스 확률(Bayesian probability)’이라는 이름하에 폭넓고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된다.

이제 나는 확률계산에 관한 객관적 해석으로 나아간다. 나는 여기서 세 가지 그런 해설들을 구분할 것이다:

(a) p(a,b), 사건 a에 또한 호의적인 사건 b와 양립할 수 있는 동등하게 가능한 경우들의 비율로 간주하는 고전적 해석 (드 무아브르[de Moivre], 라플라스[Laplace]). 예를 들어 a이 주사위의 다음 번 던지기에서 5가 나올사건으로 하고 b‘6이 나오지 않을’ (혹은 ‘6이 아닌 던지기들만 던지기로 간주될 것이다’) 전제로 간주하라; 그렇다면 p(a,b) = 1/5.

(b) p(a,b)를 사건들 b 사이의 사건들 a의 상대적 빈도로서 간주하는 빈도해석이나 통계적 해석(존 벤[John Venn], 조지 헬름[George Helm], 폰 미제스). 이 해석은, 그 해석의 난제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내가 전개했는데, 내가 항상 다른 해석들의 존재를 강조했을지라도 대략 20년 동안 (대략 1930년부터 1950년까지) 내가 지지했던 해석이다.

(c) 빈도이론에 관한 내 자신의 형태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내가 전개했고 동시에 고전적 해석의 개량으로서 간주될 경향해석.

나는 세 가지 객관적 해석 각각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을 언급해야 하겠다.

고전적 해석인 (a)를 지지하여, 그 해석은 거의 당연한 문제로서 그리고 분명히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우리가 우리 앞에 동등하게 가능한 경우들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추측하는 상황 속에서 사용된다고 언급될 것이다: 다면체가 동질적인 물질이고 n 면들을 지니고 있다면 이 면들 중 어떤 면이 한번 던지는 데 나올 확률은 1/n일 것이라고 추측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규칙적인 다면체로 실험을 할 필요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고전적 해석은 몇 가지 요점들을 근거로 심한 비판을 받았는데 그 요점들에 대하여 나는 두 가지만 언급할 것이다. (1) 현재 상황에서 그 해석은 무게가 실린 주사위로써 놀이를 하는 것과 같은 동등하지 않게 가능한 경우들과 같은 것들에는 적용될 수 없다. (2) 그 해석은, 주관적 해석처럼, 폰 미제스의 비판에 굴복한다: 가능성들에 관한 전제들로부터 상대적 빈도들에 관한 통계적 결론들에 이르는 논리적이거나 수학적인 교량(큰 수의 법칙[the Law of great numbers]이 그렇게 예상되는 바와 같은) 없다. (프와송[poisson]이 자신의 큰 수의 법칙을 도출한 것에 대하여 미제스는 이것을 매우 상세하게 밝혔다.) 또한 많은 가능한 경우들에 호의적인 많은 것의 비율에 대하여, 그 비율이 1에 근접한다할지라도 그 비율이 거의 확실하게발생할 예정인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고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분명히 확률주의적 전제들로부터 통계적 결론으로 나아가는 데는 여기에 의미의 변화가 (폰 미제스가 강조한 바와 같이) 발생한다.

빈도해석인 (b)에 관하여, 나는 내가 그 해석으로부터 윌리엄 닐(William Kneale)과 같은 몇 명의 탁월한 철학자들이 그 해석 안에서 본 저 모든 소위 풀리지 않은 문제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개혁이 필요함을 나는 알았고 그 필요에 부응하려고 나는 노력했다.

그리하여 나는 (c), 확률의 경향해석으로 온다.

확률의 의미에 정의(定義)를 부여하는 사이비-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나의 정신에 가장 가까이 있다. ‘확률이라는 단어가 수십 가지 의미에서 완벽하게 합당하고 정당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 의미들 대부분은, 추가적으로, 확률의 공식적 계산의 법칙들과 일치하는 저 의미들로부터 일탈한다. 나는 심지어 확률에 대한 경향해석이 공식적 확률계산에 대한 최고의 해석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물리학에서. 그리고 더욱 특히 그리고 또한 내가 생각하는 바, 실험적 생물학과 같은 관련 분야들에서 경향해석은 확률계산을 특정 형태의 반복 가능한 실험에 확률계산을 적용하는 데 대하여 나에게 알려진 최고의 해석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경향해석이 내기에 관한 모든 경우들에 적용될 수 있는지는 또한 나의 논증에 실제로 중요하지 않다. 그 해석은 경마에서 말에게 돈을 거는 데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되었다. 이것이 정말로 판명된다면, 나는 한 가지 다른 해석이 이 경우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추천해야 할 따름이다. 나는 경마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에게 돈을 거는 데서 우리가 아마도 알고 싶어 할 것은 말의 지구력, 속력 (말하자면 앞의 경주에서의 최고 속도와 최저 속도), 건강상태, 그리고 합쳐서 그 말이 경주에서 잘할 경향으로서 (물론 그 말과 경쟁하는 말들과 비교해서) 기술될 유사한 것들과 같은 것들이라고 나는 본다. 누군가가 돈을 걸기 전에 - 마구간으로부터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이것은 자신이 아마도 얻고 싶어 할 종류의 정보일 따름이다.

아무튼 공식적 확률계산은 분명히 우연의 게임들의 큰 집합에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개연적(probable)’개연성(probability)’이라는 단어들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만족스러운 의미들을, 혹은 심지어 공식적 계산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해석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다. 나는 특수하, 양자론의 해석에 관한 문제들 중 몇 가지를 해결하는 확률계산의 해석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경향해석을 고전적 해석의 발전으로서 설명할 것이다. 후자(後者)p(a,b), b가 주어진 a의 확률 사건 a에 호의적인 b를 충족시키는 저 동등하게 가능한 경우들의 비율로서 설명한다는 것이 기억될 것이다.

나는, 첫 번째 단계로서, ‘동등하게(equally)’라는 단어를 생략하고 무게들(weights)’을 도입하여 그리하여, ‘경우들의 숫자대신에, ‘경우들의 무게들의 합계(sum of the weights of the cases)’에 관하여 말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나는, 두 번째 단계로서, 가능성들의 (혹은 가능한 경우들의) 무게들반복되어 실현되는 가능성의 경향이나 성향의 척도들로서 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에 도달한다:

공식 p(a,b), 혹은 b가 주어진 a의 확률은 (혹은 경향) ’b를 충족하는 가능한 경우들의 무게들의 합계로써 나누어져, a에 또한 호의적인 조건 b를 충족하는 가능한 경우들의 무게들의 합계로서 해석될 것이다.

이 해석의 주요 개념은 또한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나는 당분간 확률서술들 통계적 서술들로부터 (혹은 상대적 빈도에 대한 서술들) 구분하여 확률서술들을 잘-규정된 실험들의 사실적(virtual) (유한한) 수열들에서의 빈도들에 관한 서술들로서 간주하고 통계적 서술들을 그런 실험의 실제적(actual) (유한한) 수열들에서의 빈도들에 관한 서술들로서 간주할 것을 제안한다. 확률서술들에서 가능성들에 부착되는 무게들실제적인(actual) 통계적 빈도들에 의하여 시험되는 (추측성) 사실적(virtual) 빈도들에 대한 척도들이다.

보기를 들면: 그 위치가 조절될 수 있는 한 조각의 납을 포함하고 있는 커다란 주사위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6개의 가능성들의 무게들이 (, 경향들) 중력의 중심이 여섯 면으로부터 동등한 거리를 유지한다면 동등하다고, 그리고 우리가 중력의 중심을 이 위치로부터 이동시킨다면 그 가능성들은 동등하지 않게 된다고 우리는 추측할 (대칭의 이유들 때문에)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중력의 중심을 숫자 ‘6’을 보여주는 면으로부터 옮김으로써 6이 나올 가능성의 무게를 증가시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무게라는 단어가 실험이 반복될 때 나타나는 경향이나 성향의 척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것이다. 더욱 정확하게, 우리는 면이 실험의 반복 (사실적이고 사실적으로 무한한) 수열에서 면이 나오는 (사실적인[virtual]) 상대적 빈도를 저 경향에 대한 우리의 척도로서 수용하는 것을 동의할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실험의 실제적 반복 수열을 통하여 우리의 추측을 시험할 것이다.

경향해석을 제안하면서 나는 확률서술들전체 반복될 수 있는 실험적 장치의 속성에 (대칭이나 비대칭에 비교될 수 있는 물리적 속성) 대한 어떤 척도에 관한 서술들로서 간주할 것을 제안한다; 더 정확하게, 사실적인 빈도의 척도; 그래서 나는 상응하는 통계적 서술들을 상응하는 실제적 빈도에 관한 서술들로서 간주할 것을 제안한다.

단순한 가능성들, 우리가 유사한 상황들이나 환경들의 반복에서 상대적 빈도들을 생산하는 성향들로서 해석하는 경향들로써 대체함으로서만, 폰 미제스가 고전적 해석에 반대하여 제기한 반대론을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쉽게 극복한다.

두 가지 심층적 요점들은 매우 중요하다:

먼저, 확률분포는 개별적 실험, 상황이나 실험을 또 다른 상황이나 실험의 반복으로서 수용하는 데 대한 조건들을 규정하는 어떤 규칙과 관련된 것으로서 확률주의적 법칙의 (혹은 확률서술) 속성으로서 수용된다. 예를 들어 주사위 던지기에서 비커를 흔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은 이 규칙의 혹은 이 조건들이나 사양(specifications)의 한 부분을 형성하거나 형성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우리는 확률을 어떤 구체적인 독특한 물리적 상황의 그리하여 개별적인 물리적 실험의 혹은, 더 정확하게, 실험의 (사실적) 반복에 대하여 조건을 정의(定義)하는 규칙에 의하여 규정되는 실험적 조건, 실제적인 물리적 속성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

성향은 그리하여 물리적 속성의 다소 추상적인 종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실제적인 물리적 속성이다. 란데(Landé)의 용어사용법을 이용하여, 그것은 발길질을 당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은 발길질을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몇 개의 작은 공을 굴려 내릴 수 있다면 그 공들이 (이상적으로) 정상적인 분포곡선을 형성하도록 구축된 평범한 대칭적 핀판(board)을 생각하라. 이 곡선은 어떤 가능한 휴식처에 도달하는 것의 각 개별적인 공을 사용하는 각 개별적인 실험에 대하여 확률분포를 대표할 것이다.

이제 이 판에 발길질을 하자; 가령, 그 판의 왼편을 조금 들어 올림으로써. 그 다음에 우리는 또한 경향들에 확률분포 발길질을 하는데 이유인즉 개별적인 공이 판 바닥의 오른쪽 끝을 향한 한 지점에 도달할 것임은 다소 더 개연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향이 저항하여 발길질을 할 것이다: 경향은, 우리가 공들을 굴려 내려가게 해서 쌓이게 한다면, 공들에 의하여 형성되는 다른 모양을 지닌 곡선을 만들어 낼 것이다.

혹은, 그 대신에, 한 개의 핀을 제거하자. 공이 우리가 핀을 제거한 장소 가까이로 실제적으로 오던 오지 않던, 이것은 모든 개별적인 공을 사용하는 모든 개별적인 실험에 대하여 확률을 변경시킬 것이다. (이것은, 비록 우리에게 여기서 진폭들의 중첩이 없다고 할지라도, 이중슬릿 실험과 유사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이기 때문이다: ‘핀이 장소 가까이에 오지 않는다면 핀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공[ball]은 어떻게 수 있는가?’ 답변은 다음과 같다: [ball]알지못한다; 그러나 전체로서 판[board]안다’, 그리고 모든 공에 대한 확률분포나 경향을 변경시킨다; 통계적 시험들을 통하여 시험될 수 있는 사실.)

그리하여 우리는 실험의 조건에서 어떤 변화들을 (점진적인 변화들이건 갑작스런 변화들이건) 야기함으로써 확률 장(: field)발길질을 할 수 있고 장((: field)은 경향들을 변화시킴으로써 발길질로 저항하는데 우리가 변화된 조건하에서 실험을 반복함으로써 통계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효과이다.

그러나 경향 해석에 관하여 한층 더 중요한 면들이 있는데 그 면들을 우리는 핀판(pin board)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실증할 수 있다.

핀판(pin board)을 자체의 평범한 (대칭적) 상태에 두자; 그 다음에 분명한 핀을 맞히는 (또는, 대안적으로, 확실히 핀을 맞히고 그 다음에 자체의 왼편을 지나가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저 공들에 대하여 다양한 최종적 위치들에 도달하는 확률분포를 우리는 요구할 수 있다.

이 새로운 분포는, 물론, 원래 분포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이 새로운 분포는 최초의 원칙들로부터 (대칭적 판[board]이 주어진) 계산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양한 방식들로 우리의 계산 값들을 시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공들을 보통 때처럼 굴러 내려가게 할 수 있지만 선택된 핀을 맞히는 (혹은 선택된 핀을 맞히고 그 핀의 왼편을 지나는) 저 공들의 최종적 위치들을 분리하여 목록을 작성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새로운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 모든 저 공들을 즉각 제거할 수 있다. 첫 번째 경우에, 우리는 공의 새로운 위치 측정주목할 뿐이다; 두 번째 경우에, 어떤 미리 결정된 위치를 통과하는 공들을 선택한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계산된 새로운 분포에 대한 시험을 하게 될 것이다: ‘위치 측정을 겪은 저 공들의 분포 (‘상태표본[state preparation]’과 유사한 경우).

핀판(pin board)의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물론 첫 번째 원리들로부터 우리가 선정하는 여하한 핀에 대해서도 새로운 분포들을 계산할 수 있다; 사실상, 이 새로운 분포들 모두는 원래의 정상적 분포를 계산하는 데 함축되어 있다. 왜냐하면 공이, 그렇고 그런 확률로써, 그렇고 그런 핀을 맞힐 것이기 때문이다.

 

9. 아홉 번째 주장. 핀판(pin board)의 경우에 원래 분포에서 위치 측정을 전제하는 분포로의 전환은 (여기에 기술된 바와 같이) - 실제적인 것이든 혹은 전제되거나 꾸민 것이든 양자역학에서 유사할 뿐만 아니라 유명한 파속(wave packet) 감소와 (혹은 상태벡터의 붕괴) 동일하다. 따라서 파속(wave packet)의 감소는 양자론의 특징적인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확률 이론의 효과이다.

핀판(our pin board) 사례를 다시 고찰하라: (board)의 지형뿐만 아니라 판의 기울기와 몇 가지 더 많은 사실이 주어져서, 우리는 확률분포를, 입자가 판(board)의 슬릿 q를 통하여 판(board)으로 들어올 때 내려가기 시작하는 일종의 내려가는 파두(波頭: wave front)로서 바라볼 것이다. 진폭의 간섭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두 개의 슬릿 q1q2이 있다면, 두 가지 확률 자체는 (그 확률의 진폭이라기보다는) 합산되어서 정상화될 수 있다: 우리는 이중슬릿 실험을 모방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이 단계에서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이렇다: 우리는, (board)의 바닥으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파속(wave packet)과 매우 닮은 정상적인 분포곡선을 형성하는 확률파동(probability wave)을 계산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한 개의 실제적인 공을 굴려 내린다면, 우리는 그 공을 다양한 관점들로부터 바라볼 수 있다.

(a) 우리는 전체적인 실험이 특정 확률분포를 결정하여 볼에 맞는 특정 핀들(pins)에 관계없이 그 분포를 유지한다고 (반복될 때) 말할 것이다.

(b) 공이 실제로 특정 핀을 맞힐 (혹은, 가령, 핀의 왼편을 지날) 때마다, 객관적인 확률분포는 (경향분포) 누군가가 공이 지나가는 길을 주목하든 아니든 갑자기바뀐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을 부정확하게 말하는 방식일 따름이다: 우리가 우리의 실험 사양(specification)공이 저 특정 핀을 맞히도록 (혹은 그 핀의 왼편을 통과하도록) 규정하는 또 다른 사양으로 교체한다면, 우리는 다른 실험을 경험하고 따라서 다른 확률분포를 얻는다.

(c) 위치측정이 발생했다는 지식이나 정보인식이나 깨달음원래 파속(wave packet)붕괴감소를 야기하여 그 파속이 새로운 파속에 의하여 대체된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는 (b) 아래서 전에 말한 것과 동일하게 말할 따름이다; 우리가 이제 주관주의적인 언어를 (혹은 주관주의적인 철학을) 사용한다는 것을 제외하고.

분명히, 우리가 공이 어느 핀을 맞혔는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특정한 경우에 어떤 새로운 실험 조건으로써 (경향들) 옛 실험 조건을 대체할 수 있을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는 처음부터 그렇고 그런 핀을 맞혀서 그리하여 그 핀이 다른 핀들을 맞히는 그 핀의 확률을 바꾸어서 궁극적으로 판(board)의 바닥에서 특정 지점 (혹은 기둥) a에 도달하는 그렇고 그런 확률이 있다는 것을 정말로 알았다. 우리가 우리의 원래 확률분포의 계산을 (파속[wave packet]) 근거시킨 것은 이 지식의 토대였다.

핀판(pin board) 실험에 대한 우리의 원래 사양(specification)e1이라고 부르고 새로운 사양(specification)(그 새로운 사양[specification)에 따라서 우리는 특정 핀 x를 맞힌 저 공들[balls]만을, 가령 새로운 실험의 반복들로서 고려하거나 선택한다) ‘e2라고 부르자. 그렇다면 a에 도달할 두 가지 확률 p(a,e1)p(a,e2)는 일반적으로 동일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이유인즉 e1e2에 의하여 기술(記述)되는 두 가지 실험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건 e2가 어떤 방식으로든 실현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새로운 정보가 p(a,e1)을 변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맨 처음부터 우리는 다양한 a들에 대하여 p(a,e1)을 계산할 수 있었고 p(a,e2)도 계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p(a,e1) p(a,e2)임을

 

알았다.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는 이제 p(a,e2)를 자유롭게 이 경우에 적용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ball)이 실제로 핀 x를 맞혔다는 정보를 받으면 변한 것은 없다: 혹은 달리 표현해서, 우리는 자유롭게 그 경우를, 실험 e1대신에 실험 e2의 경우로서 간주한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그것을 실험e1의 사례로서 지속적으로 간주할 수 있어서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p(a,e1)을 사용하여 작업을 한다: 확률들은 (그리고 또한 확률패킷[probability packets], 즉 다양한 a들에 대한 분포) 상대적 확률들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 실험의 반복으로서 간주할 예정인 것과 관련된다: 혹은 달리 표현하여, 그것들은 우리의 통계적 시험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되어, 실험들인 것이나 실험들이 아닌 것과 상대적이다.

아인슈타인에게서 기인하고 하이젠베르크와 내 자신에 의하여 토론된 매우 유명한 사례인 또 다른 사례를 고찰하라. 반투명한 거울을 고려하여 빛이 그 거울에 의하여 반사될 확률이 1/2이라고 전제하라. 그리하여 빛이 통과할 확률은 또한 1/2일 것이고, ‘통과하거전송되는사건이 a이고 실험적 장치가 b라면 우리는

 

p(a,b) = 1/2 = p(-a,b)

 

얻게 되는데 거기서 ‘-a(, ‘a가 아님’) ‘반사사건을 의미한다. 이제 실험이 단 하나의 광양자를 사용하여 실행되도록 하라. 그렇다면 이 광양자와 결합된 확률 파속(wave packet)은 나뉘어져서 우리는 p(a,b)p(-a,b)라는 두 가지 파속(wave packets)을 얻게 되는데 그것들에 대하여 우리의 방정식

 

p(a,b) = 1/2 = p(-a,b)

 

유효할 것이다.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두 개의 부분은 바라던 거리에 의하여 분리될 것이다...’라고 하이젠베르크는 서술한다. 이제, 사진판의 도움을 받아서 광양자가 (보이지 않는) 반사되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고 전제하자. (하이젠베르크는 그것이 패킷의 반사된 부분 안에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판단을 그르치는 은유이다.) ‘그 다음에 패킷의 다른 부분에 있는 광양자를 발견하는 확률은 즉각 0이 된다. 반사된 패킷의 위치에서의 실험은 그리하여 전송된 패킷에 의하여 점유된 먼 지점에서 일종의 행동을 (파속[wave packet]의 감소) 수행하여, 우리는 이 행동이 빛의 속도보다 더 큰 속도로 전파됨을 본다.’고 그는 서술한다.

이제 이것은 보복을 당하는 거대한 양자 혼란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는 상대적 확률들

 

p(a,b) = 1/2 = p(-a,b)

 

얻었고 아직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정보 a(입자가 반사되었다고 말하는) 얻는다면 이 정보와 관련하여 우리는

 

p(a,-a) = 0, p(-a,-a) = 1

 

얻는다.

이 확률들이나 파속들(wave packets)의 첫 번째는 정말로 0이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0이 되는것은 원래 패킷 p(a,b)의 일종의 변형된 형태라고 제안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원래 패킷 p(a,b)1/2과 동일한 상태로 남는데 1/2, 우리가 우리의 원래 실험을 반복한다면 전송되고 있는 광양자들의 사실적 빈도가 1/2/일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0p(a,-a)는 완전히 또 다른 하나의 상대적 확률이다: 그것은, 첫 번째 것처럼 시작될지라도, 광양자가 반사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할 때만 (사진판의 도움을 받아서) 자체의 사양(specification)에 따라서 끝나는 완전히 다른 실험과 관련된다.

파속(wave packet) p(a,b)에 대하여 어떤 행동도 가해지지 않는데 원격 행동도 그렇고 다른 행동도 그렇다. 왜냐하면 p(a,b)는 원래 실험적인 조건들에 관련된 광양자 상태의 경향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아서 원래 실험을 반복함으로써 실험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반복하는 일이 불필요하다고 아마도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최근에, 하이젠베르크는 파속(wave packet)의 감소가 다소 양자도약(quantum jump)과 유사하다고 제안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는 파속(wave packets)의 감소파동 함수가... 단절적으로 변한다는 사실로서 언급하여 천이(transition)가 가능성에서 실제적인 것으로 완성되었을 때 파속(wave packets)의 감소가 코펜하겐 이론에 항상 나타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고 첨언하는데 그 때는 즉, ‘실제적인 것이 가능한 것으로부터 선택되고 가능한 것인 관찰자에 의하여 수행될...’때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다음 쪽에서, ‘원자물리학의 도처에서 발견되...[] 양자론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에서]... 가능한 것으로부터 실제적으로 것으로의 천이(transition)에 포함된 세상 [속에서의] 단절의 요소에 관하여 언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속(wave packet)의 감소는 분명히 양자론과 관련이 없다: a가 무엇이든 간에, p(a,a) = 1이고 (일반적으로) p(-a,a) = 0이라는 것은 확률이론의 사소한 특징이다.

우리가 동전을 던졌다고 상정하라. 동전의 가능한 상태들 각각에 대한 확률은 1/2이다. 우리가 동전던지기의 결과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확률이 1/2일 것이라고 여전히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허리를 숙여 쳐다본다면, 그 확률은 별안간 변한다’: 한 가지 확률은 1이 되고 다른 확률은 0이 된다. 우리가 쳐다보기 때문에 양자도약이 일어났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동전은 고전적인입자이다.) 심지어 확률도 (혹은 경향)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사소한 원리 외에 여기에 혹은 파속(wave packet)여하한 감소에 더 많은 것이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정보가 실험 결과를 포함한다면, 이 결과의 확률은 이 정보와 관련하여 (실험 사양[specification]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는) 항상 사소하게 p(a,a) = 1일 것이다.

이것은 또한, 위 나의 일곱 번째 주장에서 언급된, 우리가 측정을 즉각 반복한다면 결과는 틀림없이 동일할 것이라는 폰 노이만(von Neumann)의 원리에서도 유효한 것을 설명한다. 정말로, 우리가 동전을 두 번째 바라보면 그 동전이 전처럼 놓여있을 것임은 전적으로 진부한 일이다.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우리가 도달한 광양자에 대한 측정과 같은 측정실험조건들을 정의(定義)하는 것으로서 수용한다면, 이 실험의 반복 결과는 p(a,a) = 1이라는 진부한 사실과 함께 실험의 사양(specification)을 통하여 확실하다.

나의 다음 주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나는 잠시 동안 핀판(pin board)으로 돌아가겠다.

 

p(x,e1) = r

 

원래 실험에서 공(ball)이 핀 x를 맞히는 확률로 생각하고, (ball)이 핀 x를 맞히지 않고 지나가는 것을 우리가 본다고 상정하라. 그렇다면 이것은, 하이젠베르크가 반()투명 거울을 사용한 실험을 해석하는 것과 꼭 같이 해석될 수 있다: 파속(wave packet) p(x,e1)이 붕괴한다고, 파속(wave packet) p(x,e1)이 초-광속의(-光速: super-luminal) 속도로써 0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일 터이다). 요점은 더 이상 설명될 필요가 없기를 나는 소망한다.

 

10. 나의 열 번째 주장은 경향해석이 입자들과 그 입자들에 대한 통계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그리하여 입자들과 파동들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디랙(Dirac)은 이렇게 서술한다:양자역학을 발견하기 얼마 전에 사람들은 [아인슈타인, 폰 라우에<von Laue>] 광파(light waves)와 광양자 사이의 연결이 틀림없이 통계적 특성을 지님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들이 분명하게 깨닫지 못한 것은, 파동함수(wave function)가 특정 장소에 있는 한 개의 광양자의 확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지 그 장소에 있는 광양자들의 개연적인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개의 광양자와 상호작용하는 반()-투명한 거울에 관하여 위에서 토론된 사례와 매우 유사한 사례를 사용하여 계속 서술한다.

이제 개별적 경우들에게 이렇게 확률을 적용하는 것은 정확하게 경향해석이 이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적용은 입자들이나 광양자들에 관하여 언급함으로써 그것을 이룩하지 않는다. 경향들은 입자들이나 광양자들의 전자들이나 동전들의 속성이 아니다. 물리학에서 경향서술들은 상황의 속성들을 기술하여, 상황이 전형적이라면 즉, 상황이 반복된다면 (빛의 방출의 경우에서와 같이) 실험될 수 있다. 그 서술들은, 그리하여, 또한 반복될 수 있는 실험적 장치들의 속성들이다: 그 서술들이 통계적으로 시험될 (그래서, 핀판[pin board]의 경우에, 공들[balls]의 실제적인 특징적인 장치를 낳을) 수 있는 한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그리고 여하한 특정 실험적 장치가 자체의 반복에 대한 한 가지 이상의 사양(specification)의 사례로서 간주되는 한 추상적인. (동전던지기를 생각하라: 동전은 9피트 높이로 던져졌을 것이다. 동전이 10피트 높이로 던져진다면 우리는 그 실험이 반복된다고 말할 것인가 말하지 않을 것인가?) 경향들이 때때로 비현실적으로(unreal)’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경향들의 이 상대성이다: 그것은 경향들이 개별적인 경우들 동시에 개별적인 경우들의 반복들과 관련된다는 것과, 어떤 개별적인 경우에도 매우 많은 속성들이 있어서 우리는, 검토를 통해서만, 그 속성들 중 어느 속성들이 우리의실험으로서 그리고 그 실험의반복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을 정의(定義)하는 사양들(specifications) 가운데 포함되어야 하는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경향들이나 확률들에 (고전적이거나 양자-역학적) 관해서만 사실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모든 물리적이거나 생물학적 실험들에 관해서도 또한 사실이고, 그것은 이론 없이 시험이 불가능한 이유들 중 한 가지 이유이다: 한 가지 실험 e1의 전적으로 관계없는 모습으로 혹은 그 실험의 반복에서 자의적으로 변경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또 다른실험 e2에서 (그렇지 않으면 구분이 불가능한) 그 실험의 가장 중요한 사양들(specifications)의 한 부분으로 밝혀질 것이다. 모든 실험주의자들은 무한한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 몇 가지 소위 우연한 발견들, 실험이 반복되면서 그리고 그 다음에 이전에 무관하다고 예측되어 실험의 사양(specification)에 포함되지 않은 (그리고 실험의 사양[specification]에 의하여 배제되지도 않은) 어떤 요인에 의존한 결과 속의 변화를 주목하면서, 원하지 않거나 기대되지 않은 결과들에 의하여 발생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언급한 사양에 대한 상대성(the relativity to specification)은 양자 실험들의 특징도 아니고 심지어 통계적 실험들의 특징도 아니다: 그 상대성은 모든 실험행위의 영원한 특성이다. (그리고 경향관계는 아마도, 어떻게 우리가 인과성을 해석하든, ‘인과적관계의 일반화로서 간주되고 직감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내가 보기에 통계적 법칙들, 통계적 분포들과 다른 통계적 존재들을 비-물리적이거나 비현실적으로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확률 장(: fields)들은 심지어 규정된 실험적 조건들에 의존하거나 관련된다할지라도 물리적이다.

 

11. 나의 열한 번째 주장은 이렇다: 입자들과 확률 장(: fields)들이 사실적이라 할지라도, 그들 사이의 이원성(duality)’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오해를 낳는다 (란데[Landé]가 올바르게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입자들은 실험행위의 중요한 대상들이다; 확률 장(: fields)들은 경향 장(: fields)들이고, 그런 상태로 우선적으로 규정된 조건들의 실험적 장치의 중요한 속성들이다. 물론 확률 장(: fields)들은 반대로, 입자의 운동량과 같은 다른 물리적 속성들과 꼭 마찬가지로, 연구 대상들이 될 것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확률 장(: fields)들은 심지어 우리가 발길질을 할 수 있고 또 우리에게 발길질을 할 수 있는 대상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입자나 파동에 대하여 말할 것이지만 동시에 두 가지 모두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어떤 의미에서도의 이원성은 없다 - 우리가 동시에 두 가지 모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막는 입자와 입자의 운동량 사이에 이원성이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간단한 보기가, 경향을 입자의 단순한 속성만이 아니라 입자와 전체적인 상황의 특히 이 문제들을 연구할 때 그 상황이 또한 인간에 의한 특별한 연구에 대하여 마련된 상황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행동 없이 물론 발생할 상황 단순한 속성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예시할 것이다. 우리는 확률 1/2을 한 종류의 입자, 한 가지 일의 속성으로서 간주하려는 유혹을 쉽게 받는다. 그러나 이 유혹은 저지되어야 한다. 이유인즉 동전을 돌리지 않고 동전이 던져져 동전이 세워진 채로 잡힐 수 있는 몇 개의 슬릿들이 있는 탁자 위에 동전이 떨어지는 실험적 장치를 상정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구분할 것이다: 앞면들이 보이는 경우; 뒷면들이 보이는 경위 그리고 앞면도 뒷면도 보이지 않는 경우. 혹은 심지어 네 가지 가능성을 우리는 구분할 것이다: 슬릿들이 모두 북-남쪽인 경우, 우리는 잡힌 동전들이 그 동전들의 앞면이 바라보는 방향들로 구분할 것이다 (동쪽 또는 서쪽). 이것은 동전의 (혹은 입자) 구조가 아닌 다른 조건들이 확률이나 경향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임을 보여준다: 전체 실험적 장치는 표준 공간과 확률분포를 결정한다. (우리는 또한 그 사양[specifications]에 따라 실험적 조건들이 심지어 어떤 무작위방식으로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에 변하는 사양들[specifications]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경향이나 확률은 집단의 구성원의 (인간, 입자) 속성이 아니라 (대머리나 전하[電荷: charge]처럼) 모든 종류의 조건들에 (광고, 판매조직, 다양한 초콜릿에 대한 우선적 취향을 지닌 집단에서의 통계적 분포)에 의존하는 특정 상표의 초콜릿의 인기도와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판매전략) 다소 더 비슷하다. 그리하여 확률의 (혹은 확률 진폭) 파동-같은 분포는, 정말로, 집단 구성원에 대한 (인간, 초콜릿 바; 입자) 대안적 그림(picture)’이라고 언급될 수 있는 것이다. 초콜릿 바와 초콜릿 바가 내일 팔린 경향에 대한 분포곡선의 형태 사이의 이원성(duality)’ (대칭적 관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어색할 것이다.

[원자물리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잘 알려진 경향에 대한 사례는 물론, 각각의 방사성 핵이 분열하는 경향으로서 해석되는 방사능이다. 이 경향은 발길질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오랫동안 원칙적으로 발길질이 가해질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 모든 실험적 조건으로부터 독립적이라고, 그 견해가 바뀐 것은 핵 공명(nuclear resonance)이론을 통해서였을 따름이어서, 분열하는 핵 경향이, 개별적인 원자와 다수의 원자 모두에서, 실험적 조건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것임을 우리는 안다. (이 문단의 삽입은 내가 크게 도움을 받은 허먼 본디 경[Sir Hermann Bondi]의 메모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12. 나의 열두 번째 주장은, 입자와 파동이라는 이원성이라는 잘못된 개념은, 부분적으로, 드 브로이(de Broglie)와 슈뢰딩거(Schrödinger)입자구조에 대한 파동이론을 제시함으로써 고무된 희망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파동역학과, 1926년에 ψ-함수에 관하여 최초로 제시된 보른(Born)의 통계적 해석에 관한 시험들로서의 실험들에 대한 성공적인 분석과 해석 사이에는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 기간에, 통계적 문제들은 고전적 방식으로 원자의 안정성 (그리고 양자도약)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희망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방식이었고 동시에 고무적인 희망이었다: 그 희망은 장(: field) 개념들을 통하여 물질과 물질의 구조를 설명하려는 희망과 다르지 않았다. 슈뢰딩거(Schrödinger)와 에카르트(Eckart)가 나중에 파동이론과 하이젠베르크의 입자이론이 대등함을 밝혔을 때, 두 가지-그림 해석이 입자와 파동 사이의 대칭이나 이원성이라는 자체의 개념과 함께 태어났다. 그러나 대등함이 존재하는 한, 그 대등성은 두 가지 통계적 이론들 입자들의 통계적 행태로부터 시작된 통계적 이론(‘행렬역학[matrix mechanics]’)과 특정 확률 진폭들의 파동-같은 형태로부터 시작된 통계적 이론 사이의 대등성이었다. 자신이 발견한 것은 물질의 구조에 대한 파동이론이었다는 슈뢰딩거(Schrödinger)의 희망이, 파동이론에 대한 보른(Born)의 통계적 해석의 성공적인 실험들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많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13. 나의 열세 번째 주장이자 마지막 주장은 이렇다. 고전물리학과 양자물리학 모두 비결정론적이다. 양자역학의 고유성은 파동 진폭들의 중첩(重疊: superposition) 이론이다 분명히 고전 확률이론에서 유례가 없는 일종의 확률적 의존 (란데[Landé]의 의하여 상호의존[interdependence]’이라고 지칭된). 내가 생각하는 방식에 따르면, 이것은 경향들이란 물리적이고 현실적이라고 (비록 파인만[Feynman]에 의하여 강조된 바와 같이 사실적[virtual]이라 할지라도) 말하는 것을 선호하는 데서 한 가지 요점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중첩(重疊: superposition)이란 발길질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관성(coherence)(단계[phase]) 실험적 장치에 의하여 파괴될 수 있다.

알프레드 란데(Alfred Landé)는 매우 흥미롭고, 적어도 이 고유성을 수학적으로 밝힘으로써 이 고유성을 설명하는 부분적으로 성공한 시도로 보이는 노력을 했다:확률들이 간섭하는 이유에 관한 문제는... 답변될 수 있다: 확률들이 조금이라도 일반적인 상호의존 법칙에 순응하고 싶어 한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란데(Landé)가 대칭에 관한 비-양자적(non-quantal) 원리들로부터 양자론을 탁월하게 도출한 것들이 비판적 분석을 견딘다고 전제하자: 심지어 그 경우에도 내가 보기의 그 자신의 논증들은, 그 진폭들이 간섭할 수 있는 이 확률들이 (경향들) 물리적이고 현실적이고, 그리고 수학적 장치만은 아니라고 (그가 때때로 암시하듯이 보이는 바와 같이) 추측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것들의 수학적인 그림들배열 공간(configuration space)’에서만 파동들의 형태를 지닐지라도, 그것들이 파동 그림이나 파동 형태를 지닌 함수로써 혹은 정말로 조금이라도 그림이나 형태로써 재현될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와 완전히 별개로 경향들로서 그것들은 물리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리하여 파동 그림은 수학적 중요성만을 지닌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인 확률적 의존을 표현하는 중첩의 법칙(the laws of superposition)에 관해서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이 고전물리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이 , 경향 파동들의 간섭에서 경향 파동들이 상호작용을 할 수 있어서 현실적임을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경향 장(: fields)의 존재에 대한 강력한 논증이다; 그리고 그것이 수용된다면 우리는 양자론의 가장 특징적인 고유한 성질들을 설명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내가 보기에 콤프턴-사이먼(Compton-Simon) 사진들로부터 광양자들이 발길질을 당할 수 있고 발길질을 할 수도 있음이 분명하고 그리하여 (광양자의 존재에 대한 란데[Landé]의 회의적 견해들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란데[Landé] 자신이 그 용어에 제공한 의미에서 현실적(real)임은 분명하다. [전자 숫자들이 적어도 평범한과정들로 (물론 쌍소멸<pair annihilation>에서가 아닌) 지칭될 것에서 보존되는 반면 광양자 숫자들은 보존되지 않기 때문에 물론 광양자들은, 가령, 전자들보다 덜 현실적<real>이다. 그러나 결국 탁자들과 의자들과 인간의 몸들도 또한 보존되지 않는다 (특히 그것들의 숫자가 보존되지 않는다): 또한 원자들도 보존되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단어들에 의존하는 것은 없지만 란데(Landé)가 올바르게 강조하는 바와 같이 입자와 파동의 이원론에 대하여 말하여 많은 혼란이 초래되었다: 매우 그러하여 나는 이원론(dualism)’이라는 용어를 포기하자는 그의 제안을 지지하고 싶다. 나는 우리가 대신에 입자 및 입자와 연관된경향 장(: fields)들에 (복수 표현은 장[: fields]들이 입자에 뿐만 아니라 다른 조건들에도 의존함을 가리킨다) 대하여 언급하여 대칭적 관계에 대한 제안을 회피할 것을 제안한다.

이것과 (‘이원론대신에 연관’)같은 어떤 용어사용법을 확립하지 않으면 이원론이라는 용어는 그 용어와 관련된 모든 오해들과 함께 살아남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입자들과 경향들의 장(: fields)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 (‘힘들[forces]’, 붕괴경향들, 쌍생성[pair production]에 대한 경향들, 그리고 다른 것들).

그런데, 오해를 야기하는 이론의 유행성 용어들 한 가지가 관찰될 수 있는(observable)’이라는 용어이다. 그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암시한다: 모든 관찰될 수 있는 것들은 관찰되거나 직접적으로 측정되기보다는 이론적 토대 위에서 계산되어 추론된다. 그리하여 관찰될 수 있는것은 항상 우리가 이용하는 이론에 의존한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우리는 단어들에 대하여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현실적(real)’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그렇고 관찰될 수 있는(observable)’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정의(定義: definitions)들은, 통상적으로, 어떤 결실도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나 매혹시키거나 이해하거나 비판하는 경향과 같은 코끼리들이나 전자들이나 자기장들이나 (관찰하기가 더 어려운) 경향들과 같은 것들이 (관찰될 수 있는 것들) 있다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을 우리들 대부분을 알고 있다; 혹은 어떤 규정된 결과를 낳은 실험의 경향.

 

요약한다. 소위 입자와 파동과 확률에 관한 주관적 해석이라는 이원론은 그 주관적 해석과 그 이원론이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양자론의 주관주의적이고 반()-사실주의적인 해석에 대해서 그리고, ‘의식에 관한 개념의 도움 없이는... 양자역학 자체의 법칙들이 설명될 수 없다고말하는 위그너(Wigner)의 서술과 같은 특징적인 서술들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가 폰 노이만(von Neumann)에게 귀속시키는 견해; 혹은 다음과 같은 하이젠베르크의 서술: ‘객관적 현실에 대한 개념은 그리하여, 더 이상 입자들의 행태가 아니라 오히려 이 행태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대표하는 수학의 투명한 명징성 속으로 사라졌다...’. 혹은 관찰자가 추방당하여 물리학이 객관적이 된다면 ψ-함수는 어떤 물리학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

나는 의식의 진화적 중요성과 개념들을 이해하고 비판하는 데 의식의 지대한 생물학적 역할을 지지하여 흔히 논증했다. 그러나 의식의 양자역학의 확률이론에 대한 침투는 내가 보기에 나쁜 철학과 몇 가지 매우 단순한 오류들에 근거한다. 이것들은, 내가 희망하는 바, 이것들을 사용하겠다고 우연히 결심하는 위대한 물리학자들이 물리학에 대한 자신들의 탁월한 기여활동들에 의하여 영원히 기억될 것인 반면, 곧 잊힐 것이다: 어떤 철학자도 열망하지 않는 중요한 기여활동들과 깊이.

 

4. 관찰 없는 파속(wave packet)의 붕괴.

(1980년에 추가) 주장 9의 논증은, 본질적으로, 1934년의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의 논증이다. 그 논증은 소위 파속(wave packet)의 감소혹은, 동일한 것인, ‘상태 벡터(state vector)의 붕괴를 특별히 다루고 그 논증은 많이 강화될 수 있다.

현재 상태 그대로, 그 논증은 여하한 새로운 정보가 확률에 미치는 충격을 언급한다: 그 논증은 확률 p(a,b)가 새로운 정보 c를 토대로 p(a,bc)에 의하여 갈음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논증은, a가 핀판(pin board) 위에 있는 공의 최종적 위치라면 공이 실제로 특정 핀을 맞혔다는 정보 c가 물론 상당히 a의 확률을 변경할 것임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정보 ca의 확률을 0으로 감소시킬 것이다.

이 논증에서, ‘정보라는 용어는 상당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그 정보라는 용어에 주관주의적인 풍취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관찰자는 완전히 추방된 것은 아닌 듯이 보일 것이다. 현재 절의 주요 목표는, 확률에 관한 경향 해석의 (1953년 바로 전까지는 내가 전개하지 않았던) 도움을 받아서, 추방이 총체적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밝히는 데로 나아가기 전에, 나는 주장 9에서 논증의 객관성을 옹호하여 중요한 것을 말하고 싶다. 그 절에서 한 가지 역할을 하고 파속(wave packet)’의 감소를 야기하는 정보는 여하한 관찰자와도 완전히 별개인 사실들인 객관적인 사실들에 대한 정보이다: 예를 들어 공이 핀판(pin board)의 특정 핀을 맞혔는지 아닌지의 사실. 그리하여 정보에 관하여 말을 하면서 내가 부당하게 관찰자를 도입했다는 반대의견은 옹호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직접적이건 숨겨져 있건 정보에 대한, 혹은 지식에 대한, 혹은 주관주의적인 풍취를 지닌 어떤 것에 대한 언급을 제거할 수 있다.

핀판(pin board)의 보기를 다시 들라. 내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규격화된 핀판(pin board)’은 일련의 핀들로 이루어진 선들이다; 그리고 각각의 선 안에 있는 각각의 핀에는 저 선 안에 있는 모든 다른 핀으로부터 동일한 거리가 있다. 각각의 연속적인 선에 핀들을 놓은 것은 엇갈리기 때문에 선 안에 있는 핀들은 앞선 선 위에 있는 핀들과 관련하여 중간에 위치한다. 각각의 공은 그런 규모를 지니고 있어서 그 공은 핀들 사이의 동일한 거리를 통과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림 3

 

규격화된 핀판(pin board)은 확률주의적 세계에 대하여 대단히 간단한 모형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하다: 모든 발생이 - , 핀을 맞히는 볼 확률1/2를 지닌 발생들의 확률주의적 선택을 낳는 세계: 두 가지 가능하고 균등하게 개연적인 상태들을 대표하고 우리가 특정 핀을 선택하는 최종적선까지 우리가 좋아한다면 그 상태 각각은 다시 동일한 특성, 기타 등등을 지니는 파속(wave packet)이나 상태 벡터(state vector). 이 핀을 맞히는 것은 우리의 발생 a이다; p(a,x)는 상황이 x일 때 이 선택된 핀을 맞히는 확률이다.

이제 확률해석은 경향들을 고찰 중인 물리적 상황의, 그리고 궁극적으로 전체 물리적 세계의 객관적인 물리적 속성들로서 간주한다. 따라서 발생 a의 객관적 경향은 p(a,x)에 의하여 기술(記述)되어, 파속(wave packet) 혹은 상태 벡터(state vector) - 공이 어떤 핀의 왼쪽으로 움직이기를 결정할때마다 변한다. 그 객관적 경향은 x가 모든 발생과 동시에 객관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변한다.

우리가 발생에 대하여 (x의 가치에 대하여) ‘정보를 받는지혹은 아닌지는 관련이 없다: 우리의 지식을 통해서든 아니든, 0이 될 것은 a의 객관적 경향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변하고, 그 변화가 상태 벡터의 붕괴에 의하여 기술(記述)되는 것은 물리적 세계 자체 경향- 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정론적인 세계로부터 대안들이 없는 세계; 혹은 다르게 표현하여 모든 객관적 확률들이나 경향들이 1이거나 0인 세계 확률주의적 세계를 구분하는 특징일 따름이다.

이 사소한 모형 세계인 핀판(pin board)은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세계와 많은 면에서 유사하다고 나는 믿는다. 주로 한 가지 차이점만 있다: 모형 우주에서, 우리에게는 단계도 없고 단계의 일관성도 없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확률들의 간섭이 없다: 우리의 확률들은 위에 기술된 나의 옛 주장 89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 증가할 수 있지만 그 확률들의 진폭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우리는, 가령 두 개의 슬릿 AB를 통하여 공들이 핀판(pin board)을 굴러내려 오도록 만들어서 이중 슬릿 실험을 모의 실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확률 파동들의 진폭들의 중첩들이라기보다는 두 가지 가우스 분포들(Gaussian distributions)의 추가적 중첩을 낳을 따름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모형 안에서 단계와 일관성과 같은 것을 모의 실험할 수 없다.

우리의 모형이 매우 분명하게 밝히는 한 가지 것은 시간 대칭, 즉 시간의 방향이 우리의 모형 세계에서는 뒤바뀔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특정 발생을 어떤 공에 의하여 어떤 핀을 특별히 맞히는 것 고려한다면 우리는 공의 진행에 대한 확률들의 분포뿐만 아니라 공이 과거에 지나온 길에 대한 확률들의 분포 또한 요구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문제들이 정확하게 대칭적임을 우리는 즉각 안다: 핀들(pins)의 다음 선에 있는 두 개의 가장 가까운 핀들을 하나를 맞히기 위하여 핀 c를 맞힌 공 B에 대하여 1/2의 확률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c를 맞히기 전에 핀들(pins)의 이전 선에서 두 개의 가장 가까운 핀들 중 하나를 맞힌 공 B에 대하여1/2의 확률이 있다. 그리하여 이런 방식으로 뒤로 작업을 하면서, 앞으로 작업을 하면서 우리가 얻는 (가우스) 분포들과 정확하게 대칭적인 분포들을 우리는 얻는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슈뢰딩거(Schrödinger) 방정식의 유명한 시간-반전성(time-reversibility)을 아름답게 예시한다.

 

5. 에버렛(Everett)다중-세계(Many-Worlds)’ 해석.

(1981년에 추가) 이 결과들은, 본질적으로 휴 에버렛(Hugh Everett) III세에게서 기인하고 존 아취볼드 휠러(John Archbald Wheeler)와 닐 그래엄(Neil Graham)과 브라이스(Bryce) S. 드윗(DeWitt)에 의하여 흥미진진하게 토론된, 양자역학에 대한 유명한 다중-세계(Many-Worlds)’ 해석에 관한 토론에 적용될 것이다.

비록 나는 에버렛(Everett)의 기고문들이 실행하기로 한 것을 성취한다고 특히 드윗(Dewitt)과 그래엄(Graham)이 편집한 책에서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내 견해로 에버렛(Everrett)의 기고문들은 훌륭하다.

내가 보기에 에버렛(Everett)의 세 가지 주요 기고문들은 다음과 같다:

(1) 에버렛의 기고문은 양자역학에 관한 완전히 객관적인 토론이다 (이 문장의 원문은 Everett’s is a completely objective discussion of quantum mechanics인데 에버렛이 소유격으로 쓰인 이유를 알 수 없다. 소유격으로 쓰인 에버렛의 의미가 Everett’s three main contributions를 의미한다면 동사 isare로 써야 한다. 역자).

(2) 에버렛(Everett)의 접근방식에는 (코펜하겐 해석과 반대로), 측정도구와 같은 고전적물리체계들과 기초적 입자들과 기초적 입자들의 (자그마한) 체계들을 (가령, 분자들이나 분자들의 무리들) 구분할 필요와 계기가 없다. 대신에 모든 물리체계들은 양자역학적 체계들로서, 특히 측정에서 사용되는 도구로서 간주된다; 그리고 정말로 우주.

(3) 에버렛(Everett)은 상태 벡터(state vector)의 붕괴가 그에 앞서서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이론 밖에 있는 것으로서 간주되었던 것 그가 보편적 [슈뢰딩거] 파동 함수이론(the theory of the Universal [Schrödinger] Wave Function)’으로 지칭하는 것 내부에서 출현하는 것으로 밝혀질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 요점들의 세 번째 요점은 에버렛(Everett)의 이론에 대한 내 자신의 해석으로부터 나타난다. (그 요점은, 예를 들어, 드윗[DeWitt]에 의하여 부인되는데 그는 상태 벡터의 붕괴슈뢰딩거[Schrödinger] 방정식들로부터 귀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마도 드윗[DeWitt], 우리가 에버렛[Everett]의 논증과 같은 것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귀결되지 않는다고 말만하고 싶어 한다.)

나의 세 가지 요점들 중에서 처음 두 가지 요점들에 관하여 그 요점들이 에버렛(Everett)의 처리에서 중요한 면들이라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을 기대해야겠다.

에버렛(Everett)의 처리에 관한, 혹은 그의 처리를 드윗(DeWitt)이 해석한 것에 관한 몇 가지 다른 면들은 내가 보기에 오해에 기인한다. 나는 그 오해의 몇 가지를 언급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위 양자역학에 대한 다중 해석’, 혹은 세상은 양자-역학적 상호작용에서 많은 세계로 쪼개진다는 다소 선정적인(sensational) 주장이 있다. 나는 아래에서 이것은 지지를 받을 수 없음을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두 번째, 에버렛(Everett)의 해석이, 추가적 전제가 없는 (드윗[DeWitt]이 그 전제를 지칭하는 바와 같이 복잡성의 공리[postulate of complexity]’를 제외하고: ‘세상은 체계들과 도구들로 분해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복잡하다) 수학적 형식주의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주장이 있다. 에버렛(Everett)의 해석에는 형이상학적전제들이 없다는 것은 이 주장의 한 부분이다. 이 주장 또한 지지를 받을 수 없음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나의 비판은 에버렛(Everett)의 업적이나 그의 독창성을 폄훼하는 것으로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

에버렛(Everett)의 논증은 간단하고도 기발하다. 그는, 우리 세상의 나머지로부터 (충분히) 소외된 것으로서 간주되는 다소 복잡한 체계들의 지닌 양자 역학을 고찰한다. 그리하여 이 체계들에 대하여 유효한 것은 전체 우주로 확대될 것이다.

특별히 에버렛(Everett)에 의하여 연구되는 물리체계들 X, X의 하부조직 B의 소위 관찰 가능한 것들의 몇 가지를 측정하여 은유적으로 A기억으로 지칭되는 A의 물리적 하부조직에서 측정을 기록할 수 있는 도구로 (컴퓨터) 구성되는 하부조직 A를 포함하는 물리체계들이다.

그 진화가 A에 의하여 기록되는 하부조직 B는 우리의 규격화된 핀판(pin board)으로 (단순성을 목표로) 간주될 것이다; 그리고 A는 판(board) 아래로 자체의 가능한 통로들 위에서 진행하는 공의 확률을 측정하여 기록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 확률들은 파속(wave packet)’이나 상태 벡터(state vector)’에 의하여 대표될 것이다; 그리고 (공의 위치에 대한) ‘측정은 특정 핀을 맞히는 공의 발생(occurrence)거나 아닐 것이다. 측정이 공의 발생(occurrence)이라면 측정, 위 주장 9에서와 4절에서 기술(記述)된 의미에서, 이전 상태 벡터(state vector)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다.

물리체계 A가 상태 벡터(state vector)의 붕괴를 기록하는 한 그 물리체계는 이 붕괴의 물리적 객관성을 증명한다: 붕괴는 에버렛(Everett)에 의하여 객관적인 양자-역학적 이론의 한 부분으로 증명된다.

지금까지는 훌륭하다.

그러나 에버렛(Everett), 내가 무한히 형이상학적이라고 간주하는 자신이 얻은 결과들에게 해석을 붙였다. 이 해석의 동기는 매우 간단하다. 양자역학적 이론은, 가령 슈뢰딩거(Schrödinger) 방정식의 형태로, 체계가 그 체계에 열린 가능한 통로들 중 어느 통로를 선택할 것인지를 예언하지 않는다 (모든 확률주의적 이론과 같이). 그는 아마도 이런 방법으로만 이론의 객관성이 보존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 ‘각각의 이어지는 관찰과 함께체계의 상태는 몇 가지 다양한 상태들로 가지치기를 한다고 말한다. ‘각각의 가지는가능한 측정의 다양한 결과[]과 대상-체계 [B] 상태에 대한 상응하는 공유상태중의 하나를 대표한다.’ ‘모든 가지는 주어진 관찰 순서 이후에...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에버렛(Everett)의 이 견해는, 관찰하여 기록하는 컴퓨터 A에 의하여 강화되어 우리의 핀판(pin board) 모형에 의하여 예증될 수 있다. 그 견해는, (여하한 측정된상태가 두 가지 상태를 객관적으로 결정한 후에 다음 두 가지 가능한 상태들을 결정하는 상태 벡터처럼) 우리의 체계 X(핀판[pin board] B + 컴퓨터 A, 혹은 A + B) 두 가지 체계 = + X˝ = A˝ + B˝로 분리되어 그 두 가지 체계 각각은 예측된 객관적인 가능성들 중 하나를 실현할 것이다. 물론 X˝ 에서 A˝ B˝ 의 상태를 (미래 가능성들) 대표하는 상태 벡터를 기록할 것인 반면 에서 의 상태를 (미래 가능성들) 대표하는 상태 벡터들을 기록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발생에서 (핀을 맞히는 공), 우리의 체계 X(, [board] + 컴퓨터) 복제된다. (상호작용에 의하여 열리는 두 가지 가능성 이상을 지닌 보다 복잡한 체계 B에서, 체계 Xn 체계들로 분리되고 그 체계들에서 nB 안의 발생에 의하여 열리는 가능성들의 숫자이다.)

분리(발생)에 후속되는 다중세계들(체계들) 각각은 가능한 세계들 중 한 세계를 분리를 야기한 발생(가령, 측정) 이후에 가능한 상태로 남는 세계들 중 한 세계 대표한다.

분명히 이 세계들의 각각이, 실제로 상식에 따라 발생할 수 있었던 세계들 중 한 세계와 동일하기 때문에, 그 세계들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없을 것이다: 그 세계들 중 한 세계에 사는 주민은 다른 세계들에 관하여 어떤 것도 주목하지 못할 것이고, 상식세계에서 발생하지 않는 어떤 것도 주목하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에버렛(Everett)의 해석은, 우리 세계가 지속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속적으로 분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우리가 경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하여 불가능해지지 않는다. 그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의 해석은 분리됨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함으로써 부정되는 것도 아니고 지구가 회전한다는 이론이 지구의 움직임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함으로써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에버렛(Everett)의 다중-세계 해석이 도저히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의 원문은 Nevertheless, I think that Everett’s many-worlds interpretation cannot possibly be upheld인데 어법상 Nevertheless, I don’t think that Everett’s many-worlds interpretation can possibly be upheld로 써야 한다. 역자); 그 해석이 직접적인 경험과 혹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충실하게 준수한다고 생각하는 물리 이론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런 충돌들이 많이 있다. 몇 가지 충돌들은 특별한 변론(pleading)과 매우 닮은 것에 의하여 아마도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충돌들은, 내 견해로, 그의 이론에 절대적으로 치명적이다.

물론 특별한 변론(pleading)에 의하여 해결될 수 있는 저 충돌들 중에는 보전법칙들과 운동량에 관한, 각운동량(angular momentum), 기타 등등에 관한 에너지 (에너지-질량) 보존 관련된 충돌들이 있다. 이 법칙들은, 대단히 분명하게, 모든 분리에 의하여 크게 어긋날 것이다.

탈출구는, 이 법칙들이 가지를 치는 체계들 중 모든 체계 안에서 유효하지만 가지를 치는 체계들의 체계들에 관해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 터이다.

이것은 확실히 언급될 수 있지만, 이 탈출구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대의견이 있다: 분리와 다중세계들을 도입하는 유일한 이유는, 물리이론의 한 부분이 한 체계가 채택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언급하는 부분 그 사이에서 체계가 선택할 수 있는 (핀판[pin board]의 경우에서처럼) 대안적 가능성들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실제적인 전체 물리적 실체에 대한 기술(記述)로서 문자 그대로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 언급된 탈출구는, 보존법칙들이 문자 그대로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심지어 에버렛(Everett)의 이론의 토대인 동일한 슈뢰딩거(Schrödinger)에 의하여 암시되는 보존법칙들 중의 저 보존법칙들도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 말한다.

나는 이 탈출구가 조금이라도 수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심지어 이 단계에서도 다중세계 해석이 주장되는 바와 같이 물리적 형식주의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되지 않음을 우리는 매우 명백하게 안다.)

그러나 훨씬 더 강력한 비판이 있다.

슈뢰딩거(Schrödinger) 방정식은 4절의 말미에 설명되었던 바와 같이, 우리의 규격화된 핀판(pin board)과 꼭 마찬가지로 시간 방향의 반전과 관련하여 대칭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에버렛(Everett)의 분리 이론을, 즉 미래에 관한 모든 가능성의 실체를 수용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 반대되는 것을 모든 발생의 시간에 부단히 발생하는 현실적 세계들의 무한성 융합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에버렛(Everett)의 이론에 관해서는 불가피한데 이유인즉 에버렛(Everett)의 이론은 그 이론이 해석하기로 예정된 형식적 이론의 가장 중요한 대칭들 중 한 가지 대칭을 틀림없이 보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태 준비나 관찰 t1을 하는 시간 순간을 나타내자. 슈뢰딩거(Schrödinger) 방정식의 평범한 이용은 t2에서 (t1 < t2인 곳)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지를 묻는 것이다. 에버렛(Everett)의 해석에 따라서, 두 가능성들이 있다면, 그 각각의 가능성이 1/2의 확률로 예측될 수 있다고 말하자, 그 세계는 두 개로 분리될 것이고 각 확률은 세계들 중 한 세계 안에서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t0에서 어떤 상태들로부터 t1에서의 상태가 아마도 나타났을 것인지를 묻는 데 슈뢰딩거(Schrödinger) 방정식을 또한 사용할 수 있다. 다시 답변은 각각으로부터 1/2의 확률을 지니고, 두 가지 상태들로부터가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에버렛(Everett)의 해석은, 이 경우에, 대칭의 이유들을 요구할 것, t1에서의 상태가 t0에서의 상태들의 융합으로부터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하다. 형식주의는 대칭적이기 때문에, 해석 또한 틀림없이 대칭적이다.

에버렛(Everett)과 그의 이론을 해설하는 사람들은 이것에 대하여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이 견해를 옹호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매우 어렵다 특히 다중-세계 해석이 양자역학적 형식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그래서 그 형식주의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다) 형식주의에 대한 다소 (그러나 물론 전적으로는 아니다) 자의적인 해석이고 정말로 형이상학적 해석임이 (또한 내가 자유롭게 인정하는 바, 핀판[pin board]에 대한 상식적 견해, 혹은 나의 경향 해석이 그러한 바와 같이) 밝혀지는 순간.

그러나 시간 가역성의 상황(time reversibility situation)에 의하여 제기되는 추가적 난제들이 있다. 한 가지 난제는 이렇다. 슈뢰딩거(Schrödinger) 파동은, 형식적으로, 결정론적 특징을 지닌다; 그 파동은 우리의 해석을 (보른[Born] 해석인데 그 해석은 핀판[pin board] 세계에 대한 상식적 해석에 해당한다) 통해서만 확률주의적이 된다. 자신의 다중-세계 해석을 뒷받침하여 에버렛(Everett)이 언급하는 한 가지 것은, 그 해석이 슈뢰딩거(Schrödinger) 파동 해석의 결정론적 특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파동이 열어놓는 모든 가능성들이 실현된다면. 정말로 실체는 파동 방정식의 해답에 의하여 기술(記述)되는 여하한 상태에 의해서 미리 결정된다.

이것은 여하한 상태 준비 실험에 의하여, 가령 좁은 슬릿에 의하여 선택된 입자들의 광선에 의하여 생생하게 예시될 수 있다.

분산하는 광선의 각 입자는 분리하는 에버렛(Everett) 세계들 중 한 세계의 유사체(analogue)로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전체 광선은 에버렛(Everett) 실체의 우리가 여기서 보는 바, 다중일 뿐만 아니라 서로와 관련하여 무작위적 방식으로 분산하는 다중세계 유사체(analogue)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제 시간의 방향을 뒤집자.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의 다중세계가 무작위적 분산인데 그러나 그렇게 배열되어 그 세계들이 융합하기 전에 그 세계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없을지라도, 그 세계들이 융합할 때 그 세계들은 상호 관련됨을 우리는 안다.

우리가 기억한 것들의 융합을 고려한다면 상황은 분명히 모순적이 되어서 기술(記述)하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는 추가로 언급만 할 것이다.

이 이론 뒤에 있는 사실주의적 경향이 덜 모순적인 방식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상 그 경향은, 물론 에버렛(Everett)의 해석만큼 형식주의로부터 추론될 수 없는 경향해석에 의하여 성취될 수 있다. 그러나 경향들을 물리적으로 현실적인 것으로서 (그러나 부수적으로 시간 방향이 부여된) 간주하면서 우리는 슈뢰딩거(Schrödinger)의 방정식이 물리적 실체를 기술(記述)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상태 벡터의 붕괴는 이론 안에서 에버렛(Everett)의 정교한 논증에 의하여 정당화될수 있다.

 

 

 

서론 - 서문- 관찰자 없는 양자역학.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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