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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 - 1장 양자론과 양자론의 해석 이해하기, 2장 양자론의 객관성

이윤진이카루스 2014. 10. 1. 12:50

 

 

 

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

 

 

 

 

 

 

 

 

 

 

 

 

 

 

 

I

 

 

양자론과 양자론의 해석 이해하기

 

양자론에 대한 보어-하이젠베르크(Bohr-Heisenberg) 해석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훌륭한 과거에 고전 물리학의 시대 - 대하여 한숨짓는 반동분자들로서 일축된다; 이론들이 추상적이 아니었지만 기계적인 모형의 도움을 받아서 쉽게 시각화될 수 있었던 시대; 그리고 결정론의 시대. 그리하여 내가 특히 물리학에서 성공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들을 포함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열렬히 찬양함을 나는 반복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새로운 이론이 지닌 추상적인특성이 물리학에 반하는 것이 아니면 한 세대의 물리학자들에게 추상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다음 세대에는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것을 예시하기 위하여 많은 사례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강조해야 하는 바와 같이, 나는 비결정론자이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L.Sc.D.)의 커다란 부분이 양자론에 관한 문제들에 할애되었다. 그러나 양자론은 나의 개념들이 전개되어 다소 변경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 문제들에 관한 나의 현재 생각을 다음 쪽들에서 제시하려는 의도가 있다. 세부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나의 현재 개념들이 양자론에 관한 나의 초기 개념들과 어떻게 비교되는지를 보여주는 다섯 가지 요점들을 나는 간단하게 서술하고 싶다.

(1)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의 본문에서 내가 크게 강조했던 양자론에 관한 한 가지 논증은 77절에 기술(記述)된 사고실험 무효이어서 나는 그 논증을 철회하고 싶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양자론에 관한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와 보어(Bohr)의 해석에 지금은 통상적으로 코펜하겐 해석으로 지칭되는 대한 나의 비판이 유효하다고 믿는다. 나의 비판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게다가 내 자신의 무효한 실험은 유효한 또 다른 시험에 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i), 그리고 로젠(Rosen)의 유명한 사고실험 의하여 대체될 수 있다.

(3)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나의 옛 비판에 덧붙여, 나는 양자론을 해석하는 문제는 확률이론을 해석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나의 실증적 주장을 견지한다. 그리하여 확률이론이 그렇게 해석되어야 한다면 양자론은 집합체들(aggregates)(혹은 ‘collectives’) 관한 통계이론으로서 해석되어야 할 터이다.

(4) 그러나 확률이론이 경향이론으로서 후기(後記: Postscript)I권 및 II권의 의미에서 - 해석될 수 있다면 양자론도 또한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정말로 양자론을 물리적 경향들에 관한 이론으로서 해석한다면, 우리는 코펜하겐 해석을 낳은 모든 저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5) 1930년대 초반에 내가 지금은 코펜하겐 해석으로 불리는 것을 최초로 공격했을 때, 나는 그 해석 안에 내재한 반()-이성적인 경향들에 대하여 걱정했다. 당시 나는 확률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이 그것에 책임이 있다고 제안했다: 정말로 주관적인 해석으로 인하여 그 해석에 빠진 사람들은 훨씬 더 위험한 (훨씬 더 마약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지성적 마약인 확률에 대한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해석들의 혼합에 빠진다. 나는 그 후 많은 것을 배웠고, 그리하여 나는 경향 해석에 대한 빈도를 포기함으로써 근본적인 요점에 관한 (1, 2) 나의 생각을 바꾸었다. (이것들 두 가지 모두는 객관적 해석들이다.) 그러나 나는 확률에 관한 주관적인 해석과 객관적인 해석이라는 치명적 혼합이, 지식의 대상에 대한 주체의 양자론적 간섭이라는 꿈과 같은, 저 모든 비이성적인 증상들을 낳았다고 전보다 더 확고하게 확신한다.

내가 20년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은 이 혼합과 고전물리학의 결정론적 해석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이었다. 결론적으로 무의식적인 결정론적 편견은 주로 확률에 관한 주관적 이론과 그 결과 물리학 안으로의 신비주의의 침투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한다.

 

1. 물리학에서의 균열.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L.Sc.D.)를 최초로 발간한 1934년 가을 이래, 양자론의 형식주의를 해석하는 문제에 대하여 많은 토론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 17절에서 검토될 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i), 그리고 로젠(Rosen)이 작성한 근본적으로 중요한 논문은 별개로 하고, 나는 많은 진보가 이룩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토론들에 관한 한 가지 두드러진 면은 물리학에서 분리가 전개된 것이다. 양자 정통(quantum orthodoxy)로서 올바르게 기술(記述)될 일이 나타났다: 닐스 보어(Niels Bohr)가 이끄는 일종의 패거리, 혹은 학파, 혹은 무리로서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와 파울리(Pauli)로부터 매우 활발한 지지를 받았다; 덜 활발하지만 같은 심정을 지녔던 사람들은 막스 보른(Max Born)P. 요르단(Jordan)과 아마도 심지어 디랙(Dirac)이었다. 다시 말해서, 강력하고도 일관적으로 반대했던 두 명의 훌륭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원자이론 속의 모든 위대한 이름들이 양자 정통(quantum orthodoxy)에 속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 얼마 동안, 파일럿파(pilot waves)라는 자신의 비정통적(unorthodox) 이론을 제시한 후에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는 정통에 합류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이 파이럿파(pilot waves)를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다시 발견함으로써 고무되어 다시 반대했다. 그리고 알프레드 란데(Alfred Landé)는 여러 해 동안 보어(Bohr)의 입장을 지지했는데 나중에 완전히 다른 이유들 때문에 또한 반대했다; 사실상 이해하려는 확고한 노력의 결과로만.

정통과 달리 반대자들은 통합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자들 두 명은 의견일치를 이루지 않는다 (아마도 드 브로이[de Broglie]와 봄[Bohm]을 제외하고).

심지어 물리학자들의 세 번째 무리가 아마도 다수 있다. 그 무리는 자신들이 이 토론들을, 올바르게, 철학적으로서 간주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들이, 잘못되게, 철학적 토론들은 물리학에 대하여 중요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에 이 토론들로부터 돌아선 물리학자들로 구성된다. 이 무리에, 과도한 전문화 기간 속에서 그리고 편협함에 대한 숭배라는 새롭게 전개되는 전통 속과 비-전문적인 옛 세대에 (그 세대에 속하는 물리학자들은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매우 구식으로 보인다) 대한 경멸 속에서 성장한 많은 젊은 물리학자들이 속한다: 과학의 종말과 과학을 기술(技術)로 쉽게 대체할 전통.

이 반대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두 가지 밀접하게 연결된 문제들이 있다. ‘... 모든 물리학자들은 현재 양자론이 전기의 원자적 본성과,,, “기초적입자들의 질량 가치들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여... 적용에 제한적 범위를 가질 수 있을 따름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파울리(Pauli)는 서술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물리학자들은 양자론이 이룩한 놀라운 성공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반증들 중 어떤 반증도 명백할지라도 현재 이론이 사실상 몇 가지 다양한 요점들에서 반증됨을 몇몇 반대자들이 지적하는 반면, 몇몇 물리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마지못해 수용한다. (반증들은 완벽하게 명백한 경우가 드물다: 우리는 수성의 근일점 움직임[perihelion motion]을 기억할 것이다.) 몇몇 반대자들은 정통에 속하는 물리학자들에게 이 요점들의 중요성을 하찮게 평가하는 혹은 그 요점들을 재해석으로써 은폐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문제들 중 한 가지 문제이다.

 

2. 해석의 중요성.

두 번째 문제는 아마도 더 중요하다. 파울리(Pauli)가 말하는 바와 같이, 모든 물리학자들이 이론의 재구성을 희망하기 때문에 그 재구성을 탐구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가 있다. 주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수학적 형식주의를 보고 그 형식주의를 변경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가능하다면 그 형식주의를 일반화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형식주의가 지닌 물리적 난제들과 결점들을 보다 잘 이해하려는 희망에서 형식주의를 해석하고 그 형식주의를 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만약 그 방법이 그렇게 지칭될 것이라면) 반드시 갈등

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패가 달려있는 주요 문제는 틀림없이 그 방법들 사이에 있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정통은 첫 번째 방법과만 양립할 수 있는 견해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것과 반대로, 반대자를 모두는 물리적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새로운 물리학적 해석들을 제안했다.

우리가 이 마지막이자, 내가 믿기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우리의 이론들을 이해하는 문제 보다 세밀하게 바라보고자 한다면 정통파가 양자론에 대한 자체의 태도에서 이해하려는 반대자들의 시도가 소용없음을 암시하는 과학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이론을 대표함을 우리는 감지할 것이다. 그것은 이해될 것이 없다는 견해이다: 우리는 겨우 수학적 형식주의를 통달하그 형식주의를 적용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견해. 이 견해는 보어(Bohr)와 다른 정통(orthodoxy) 지지파들이 확립하려고 노력한 것인데 실제로 대부분의 젊고 거친 물리학자들이 속한 제 3의 집단에 의하여 오늘날 당연시된다. 나는 이 견해를 도구주의(instrumentalism)혹은, 더 완벽하게, ‘과학적 이론들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the instrumentalist interpretation of scientific theories)이라고 지칭했다. 그것은 모든, 혹은 몇 가지 과학이론들이 특히 실험의 결과들을 예측하기 위하여 유용한 적용가능성을 지닌 수학적 형식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지나지 않는다가 여기서 강조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심지어 가장 열성적인 현실주의자도 물론 이론들이 또한 형식주의라는 것과 이론들은 예측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적용가능성들에 위하여 탁월한 도구들임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도구주의적 견해는 오늘날 폭넓게 당연시된다; 그러나 그 견해의 승리는 양자론에 대한 보어(Bohr)의 해석의 의하여 마련되었다.

이 상황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이 상황은 물리학에서 예측을 위한 도구나 다른 실용적인 적용가능성들을 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를 (만약 그것이 틀림없이 도구가 되어야 한다면) 보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것은, 예를 들어, 1927년에서 1949년까지 지속되어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1953년까지 계속된 보어(Bohr)와 아인슈타인 사이의 긴 토론에서 매우 명확해졌다.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Schrödinger) 같은 사실주의자들은 이론들이 도구일 뿐만 아니라 또한 물리적 실체를 기술(記述)하려는 시도라고 느낀다. ‘나는 내가 거칠게 사념적인(wildly speculative) 방식으로 알아내려고 하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세상을 (신뢰한다)’고 아인슈타인은 예전에 보른(Born)에게 편지를 썼다. 물론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거칠게 사념적인이론들은 엄격하게 시험되어야 하고,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이론들은 예측들에 대한 도구들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던 것은 (비록 그 자신이 그것을 알아내지 못할 것임을 그가 알고 있었다할지라도) 현실적인 세상이었는데 그 세상에 대하여 그는 참인 기술(記述)을 하고자 희망했다.

이런 종류의 서술들을 형이상학적이거나 철학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으로서 맹렬히 비난하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실과 숫자들이지 철학적 토론들이 아니다라는 말을 우리는 도처에서 듣는다. 현 세대의 몇몇 사실 집착적 물리학자들은 그런 토론들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런 토론을 닐스 보어(Niels Bohr)에게 맡겨버린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i) 형식주의(ii) 그 형식주의의 적용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것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 완고하고 허튼소리를 특히 어떤 철학적 허튼소리도 - 용납하지 않는 유행성 태도인 이 도구주의는, 우리에게 아무리 현대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자체가 낡은 철학적 이론이다. 오랫동안 교회는 과학에 관한 도구주의적 견해를 떠오르는 과학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이용했다. ‘너희들은 도구들, 장치들을 만들어낼 것이지만 너희들은 너희들이 지닌 이성에 비추어 이 세상의 숨겨진 비밀들 중 어떤 비밀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이, 요컨대, 벨라르미노(Bellarmino) 추기경이 이용하여 갈릴레오의 코페르니쿠스 체계 가르침에 반대했고, 버클리(Berkeley) 주교가 뉴튼(Newton)에 반대했던 주장이었다.

나는 또 다른 장소에서 이 이야기에 관하여 조금 말했는데 그곳에서 나는 또한 도구주의적 철학은 방어적 분위기에서 반증들을 회피하려는 시도에서 이용되기 쉬운 신조임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도구는 진리를 주장하지 않아서 그런 주장을 제기하는 이론은 반증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반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구주의는 상당히 긴 고대시대의 철학을 부흥시킬 따름이다. 그러나 현대의 도구주의자들은, 물론, 자신들이 철학화(philosophizing)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유행성 철학이 사실상 무비판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반대할 수 있을 내가 그 철학이 그렇다고 확신하는 바와 같이 것이라는 가능성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주의 () 도구주의의 문제에 비추어 양자론을 토론하거나 물리학에서의 균열을 토론하려는 의도가 나에게는 없다. 먼저 나는 이 국면을 다른 곳에서 다루었다. 두 번째로 나는 그 문제를 다른 국면 확률이론의 국면 하에서 여기서 다루고 싶다. 이 두 가지 국면들은, 물론, 서로 관련된다. 공식들을 만지작거리는 것과 반대로, 물리학적 해석에 대한 관심은 확률에 대한 객관적이고 심지어 물리학적인 해석의 문제에 관한 공격을 야기한다.

오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나는 물리학적 이해로써 그리고 물리학적 해석으로써 내가 의미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해야겠다. 나는 물론 내가 의미하지 않는 것으로써 모형들의 구축을 의미하지 않으며, 교체된 모형들과 (기계적 모형들과 같은 모형들) 관련하여 모형들의 모든 구축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우리에게 친숙감이나 편리함의 감정을 제공할 그림들이나 은유들을 사용하여 작업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힘들(forces)이 뉴튼과 그의 동시대인들에 의하여 쉽게 직감되지 않았다는 것과, 패러데이(Faraday)와 맥스웰(Maxwell)의 힘의 (: fields)들은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오랫동안 물리학자들이 발견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몇 가지 난제들을 해결하기에, 그리고 이성적인 용어들로 비판받기에 충분히 명백한 것은 내가 추구하는 직감적인 편리함이 아니라 관점이다. (내가 근심하는 바, 보어[Bohr]의 상보성은 그렇게 비판될 수 없다; 그 상보성은 아마도 특별한 목적을 위한 것으로서, 혹은 비이성적인 것으로서, 혹은 절망적으로 모호한 것으로서 수용되거나 맹렬히 비난을 받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추상적인 용어들로써 내가 양자론에 대한 물리학적 해석을 통하여 의미하는 것을 설명하고 노력하는 데는 큰 중요성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에서 (IX) 한 가지 해석을 비판을 받을 수 있어서 비판을 받았던 한 가지 해석 제시해서 이제 나는 확률에 관한 경향 이론을 통하여 다른 한 가지 해석을 제공하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수한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닌 해석인데, 이유인즉 그 해석은 양자론뿐만 아니라 동전던지기와 고전적 통계학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또한 비판될 수 있다. 나는 그 해석이 비판을 받기를 소망한다.

 

3. 주관적 확률, 통계적 확률, 그리고 결정론.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를 쓸 때 나는 경향 해석에 관한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충분한 이유가 없지 않았는데, 물리학에서 유일하게 수용될 수 있는 확률에 관한 해석은 벤(Venn)이나 폰 미제스(von Mises)에 의하여 주어진 형태의 빈도 해석(frequency interpretation)이거나 통계적 해석(statistical interpretation)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 후기(後記: Postscript) 전체를 통하여 나는 이런 의미로 통계학이나 통계적 해석들이라는 용어들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통계적 해석의 관점에서, 단칭적(singular) 확률 서술은 형태로만 단칭적(singular in form only)으로 (혹은 형식적으로 단칭적[formally singular]: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71참조) 일컬어져야 한다; 그 서술들은 사실상 특정 종류의 모집단들이나 집합체들에 관한 통계적 서술들의 도움을 받아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물론 많은 물리학자들이 (볼츠만[Boltzmann], 아인슈타인, 그리고 특히 양자이론가들) 심지어 통계학을 말할 때도 규칙적으로 단칭적(singular) 확률 서술들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항상 깨달았다; 그러나 이 단칭적 서술들이 단순히 형식적으로 단칭적인 것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한, 나는 이 사실이 나의 분석을 확인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내가 틀렸었다고 생각하고, 단칭적 확률 서술들을 사용하면서 적어도 이 물리학자들 중 몇몇은 다소 의식적으로 일종의 경향 해석을 찾아서 더듬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결정론자들이었던 사람들 중 저 물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지닌 결정론적 신념들로 인하여 경향 해석과 관련한 명징성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유인즉 내가 논증한 바와 같이, 경향들은 결정론이 포기되었을 때만 물리학적 실체들로서 (힘들<forces>과 유사한) 수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다른 방식으로 또한 틀렸었다: 막스 보른(Max Born)이 자신의 양자론에 대한 통계적 해석을 도입할 때, ‘형식적으로 단칭적으로만 해석될 수 있을지라도 그가 진지하게 단칭적으로서 , 우리의 무지에 관한 서술들만큼 단칭적으로 주관적인 확률 서술들 의도했던 단칭적 확률 서술들을 사용했음을 나는 충분히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내 자신이 결정론자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비록 지금 내가 겉보기로만 결정론적인으로 지칭하는 특성을 지닌 이론들이 고도로 정보력을 지니고 고도로 시험 가능함을 내가 항상 알고 있었다할지라도), 결정론자가 그리고 심지어 이전 결정론자 - 얼마나 진지하게 모든 확률 서술들은 주관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닌 부분적 무지에 대한 서술들로서 해석하도록 유혹을 받았는지 나는 당시에 알지 못했다. 결정론자 자신이 베르누이(Bernoulli)의 방식으로 이 단칭적 확률 서술들로부터 자신의 통계적 결론들을 도출할 수 (혹은 거의 추론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결정론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서술들을 통계적으로 아마도 지칭할 것을 나는 깨닫지 못했다.

그런 추론들은,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62절에 설명된 바와 같이, 뚜렷하게 무효임을 나는 알았다. 처음에 나는 주관적 확률 해석 배후에 있는 동기들을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통계적 의미에서의 이 경우들을 재-해석만 했다. 나는 어떤 객관적인 통계적 서술들도 무지에 관한 주관적 이론으로부터 (예를 들어 제프리즈[Jeffreys]나 케인즈[Keynes]의 주관적 이론) 도출될 수 없다고 반복적으로 지적하여 만족했다.

그렇게 많은 결정론자들과 심지어 고전적 물리학의 결정론적 특징을 신뢰하는 이전 결정론자들이 확률에 관한 주관주의적 해석을 진지하게 신뢰하는 이유를 나는 오늘날 알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한 합리적인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물리학적 확률들은 결정론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전물리학이 결정론적이라면, 그 물리학은 고전적 통계 역학에 대한 객관적 해석과 틀림없이 양립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열린 우주: 비결정론을 위한 논증[The Open Universe: An Argument for Indeterminism], 29절에 인용된 구절에서 란데[Landé]에 의하여 언급된 다른 가능성을 무시할 것이다: 분자 혼돈상태[molecular chaos)에 대한 객관적인 가설을 사용하여. 이유인즉 이것이 사전에 확립된 조화를 머리 부분과 꼬리부분들의 확률을 상수로 유지하는 혹은 대안적으로 혼합 과정들의 효과를 설명하는 일종의 목적론적 원리를 전제함이 이해될 때 아무도 그것을 고려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확률에 대한 주관적 해석은, 그 해석으로부터 객관적인 빈도들로 유도하는 교량이 무효함을 우리가 보지 못한다면 작동하는 듯이 보인다. 이 교량은, 물론, 대수의 법칙(the law of large numbers)이거나 혹은 대수의 강법칙the strong law of large numbers)이다. 그러나 이 법칙들은, 자체의 도출이 (케인즈가 보았던 바와 같이) 주관적 해석을 부정하는 자주성의 전제에 근거하기 때문에 주관적 이론 안에서 도출될 수 없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가 초기 조건들을 모르기 때문에 무작위적 방식으로 동전들이 떨어지거나 분자들이 충돌한다고 그리고 어떤 악마가 동전들이나 분자들에 대한 비밀을 우리게 밝힌다면 동전들이나 분자들은 달리 행동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분명히 터무니없다: 주관적인 무지로써 객관적인 통계적 빈도들을 설명하는 것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다.

그 터무니없음은 때때로 저절로 느껴진다; 그렇게 될 때, 물리학자는 통상적으로 객관적인 견해를 채택한다. 따라서 우리는, 주관주의적 해석과 객관주의적 해석 사이에서, 많은 물리학자들의 부분에서의 흔들림인 특징적인 진동을 관찰한다. 이 흔들림의 결과로서, 그 물리학자들은 이 문제들에 (어떤 방식으로든 철학적으로 느껴지는) 대한 자신들의 감수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객관적 이론에 속하는 대담한 주장들은 주관주의에 대하여 동등하게 대담한 주장들과 나란히 사실상, 동일한 페이지에서 발견될 것이다.

이 체계적으로 흔들리는 태도는 다시 말해서, 두 가지 방식 모두로 그것을 가지려는 체계적 시도 코펜하겐 해석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양자론으로 선회하기 전에, 나는 먼저 고전적 통계역학에서의 상황을 간단하게 토론할 것이다.

 

4. 통계역학의 객관성.

통계역학은, 객관적으로 (순전히 통계적으로이거나, 혹은 경향 해석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확률 서술들이 우리가 지닌 무지에 관한 주관적 이론의 의미에서 흔히 잘못 해석되는 방식에 대하여 많은 두드러진 예시들을 제공한다.

공기로 가득 찬 작은 약병을 우리가 집어넣는 커다란 빈 진공 플라스크를 생각하라. 그 다음에 우리는 병마개를 연다. 우리 모두는 모든 경우에 어떤 일이 객관적으로 발생할지를 안다: 공기는 병으로부터 나와서 플라스크를 통하여 평평하게 빠르게 퍼질 것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릴지라도, 우리가 반대 과정의 사례를 발견하지 못할 것임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공기는 자발적으로 병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비가역적 과정에 직면한다.

이 단순한 사실은, 주로 물론 공기가 돌아가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끝없는 토론들을 야기했다. 분자가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그 분자가 반대 방향으로도 움직이는 것이 물리적으로 틀림없이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분자들이 움직이는 방향이 반대로 된다면, 그 분자들은 틀림없이 병속으로 후퇴한다.

이 사건의 물리학적 가능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병속으로의 자발적 복귀에 관한 극단적인 비개연성에 의하여 과정이 비가역적이라는 실험적 사실을 우리는 설명한다. 그리고 설명될 사실은 과정의 비가역성 객관적인 실험적 사실이기 때문에, 문제의 확률들과 비개연성들 또한 틀림없이 객관적이다.

그 종류의 비가역적 과정들에 대한 객관적인 확률주의적 설명은 분명히 플랑크(Planck)에 의하여 개괄된다. ‘경우들의 압도적인 다수, 혹은 더 정확하게, 모든 가능한 초기상태들(초기상태가 모든 분자들에 대한 초기조건들을 포함하는 곳인) 압도적인 다수가 그런 종류이어서 두드러진 도출들을 야기하는 [언급된 평균 가치들로부터] 저 경우들이... 사라지는 숫자들에서만 발생하는 반면 그 다수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은 자체의 평균 가치에서 (모든 세부사항에서는 아니라할지라도)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유인즉 그것들은 어떤 매우 특별한 ... 조건들이 지속된다는 분자들의 위치와 속도를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연관 짓는 조건들 - 조건으로만 발생하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지적했다. 다시 말해서 평범한 태도로부터 두드러진 도출들을 생산할 바로 그 초기조건들은 사라지는 확률(vanishing probability)을 지닌다.

평범한 상태들을 낳는 초기조건들의 집합에 대한 척도가 1임을,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상태들을 낳는 초기 상태들에 대한 척도가 0임을 우리가 밝힐 수 있는 방법은 근본적으로 베르누이(Bernoulli)가 구상한 것과 동일하다: 머리 부분과 (0) 꼬리부분 (1) 그리고 연속적인 던지기의 독자성에 관하여 상정된 균등 확률로부터 (가능성에 대한 균등 척도) 거의 모든 충분히 긴 수열들의 평균들의 (평균들은 1/2에 매우 근사할 것이다) 안정성을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플랑크(Planck)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즉 그것들은 분자들의 위치들과 속도들의 분배와 관련하여 안정된 평균들을 지닌다는 것인, 가능한 상태들의 균등 확률에 관한 단순한 상정들로부터 우리는 거의 모든 상태들이 그 상태들의 평균값들에서 완벽하게 일치할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평범한(normal)’이나 평형에서 근사하게(approximately in equilibrium)’이라는 표식을 우리는, 분자들의 위치와 속도가 그렇게 분배되어서 육안으로 보이는 파동이 없는 상태에 부착할 것이다; 혹은 더 정확하게, 작지만 육안으로 보이는 하위-부피(sub-volume)에 관한 그것들 평균들이 전체 부피에 대한 그것을 평균과 감지될 정도로 다르지 않은 상태. 그렇다면 평범한 상태들의 집합에 대한 척도가 1에 근접함이 밝혀질 수 있다;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상태들에 대한 척도는 0에 근접함이 밝혀질 수 있다. 게다가 척도는, 입자들의 움직임 때문에 그 척도에 속하는 다양한 상태들이 다른 상태들로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모든 상태들이 틀림없이 그러해서 이 움직임들의 결과로서 그 상태들이 다시 평범한 상태들로 변함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상태들의 시간 평균들은 다시 평범하다). 파동들은 물론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그 파동들은 너무 드물고 너무 짧아서 시간 평균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척도 0의 집합을 제외하고).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커다란 진공상태에서 마개가 닫히지 않는다면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을 작은 병을 발견하는 0으로부터 구분이 불가능한 확률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반대로, 분자들이 자발적으로 작은 병으로 철수할 경우를 발견하는 확률이 0임을 우리는 발견한다.

물론 이 모든 고찰들은 확률에 대하여 엄격하게 객관적인 (빈도나 경향) 이론을 사용하여 작동한다: 그 고찰들은, 설명될 수 있는 비가역적 과정만큼 객관적이고 관련된 분자들의 실제적인 상세한 초기조건들과 관련하여 우리 자신의 지식 상태나 무지의 상태와 관계없이 유효하다. 훨씬 더 명시적으로 표현하여, 사실상 우리가 항상 무지한 것처럼 우리가 모든 분자들의 초기조건들에 대한 무지하든, 혹은 우리가 악마에 의하여 이 초기조건들 모두에 관하여 그리하여 가스의 정확한 상태에 관하여 완벽한 정보를 제공받든, 그 고찰들은 유효하다.

 

 

 

 

 

 

 

 

 

 

5. 통계역학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

그러나 문제에 관한 통상적인 견해는 그렇지 않다. 3절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많은 물리학자들은 그들 중의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 몇몇 확률에 대한 주관적인 이론을 통하여 이 문제들을 설명하려고 애를 쓴다. 그들은 비가역성이 가스 상태의 세부사항들에 대한 우리의 무지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체의 무질서를 증가시키는 체계의 성향이나 경향을 (엔트로피<entropy>’) - 통계이론이 베르누이적(Bernoullian) 방향에 근거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성향 증가하는 우리의 무지의 성향으로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한 체계의 엔트로피를 그 체계의 객관적인 무질서 상태나 무작위성에 대한 척도로서 해석하는 대신에 그들은 그것을 체계에 대한 우리 자신의 주관적 무지 상태에 대한 척도로서 해석한다. 이 해석은, 우리가 분자들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지식이 먼저 완벽하지 않다면 우리의 무지는 증가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분자들이 병으로부터 탈출한다는 터무니없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뚜렷하게 터무니없다는 것과, 쿼드(quad) 안에는 필요한 무지를 제공할 사람이 없다할지라도 뜨거운 공기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터무니없는 견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론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던 몇몇 유명한 물리학자들의 이론들에 함축되어 있다. 나는 먼저 W. 파울리(Pauli)확률과 물리학(Probability and Physics)’에 관한 논문에서 가져온 확률의 위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부터 인용할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물리학에서 확률의 최초 적용은 그리고 우리가 자연법칙들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적용 볼츠만(Boltzmann)과 깁스(Gibbs)가 세운 열에 관한 일반적인 통계이론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것은 필연적으로 한 체계의 엔트로피(entropy)에 대한 해석을 (에너지와 대조적으로) 그 체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의존하는 그 체계의 상태의 속성으로서 해석하는 것을 낳았다.’

자신의 주관주의에 관하여 의심을 여지를 남기지 않고, 파울리(Pauli)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말한다: ‘우리가 지닌 지식 중 이 지식이 최대치라면 다시 말해서, 조금이라도 자연법칙들과 양립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지식... - 엔트로피(entropy)는 항상 0이다. 그러나 열역학적 개념들은, 체계의 초기상태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부정확하다는 조건으로만, 한 체계에 적용될 수 있다...’

이 주관주의적 해석이 결정론의 결과임을 파울리(Pauli)는 분명히 깨닫지 못한다. 반대로 비결정론적인 양자론의 분야에서 주관주의적 해석에 자식을 익숙해지게 만들어, 주관주의적 해석이 결정론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언급하는 것이 필요함을 그는 발견한다:

방금 기술된 물리학에서 확률 개념의 적용은, 비록 근본적인 적용일지라도, 자연법칙들의 결정론적인 형태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있다고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양립가능성에 관한 언급은 옳지만 비록 근본적인 적용일지라도라는 말은 주관주의적 해석이 결정론과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주관주의적 해석이 분명히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해석이었기 때문에 채택되었다는 (특히 라플라스[Laplace]에 의하여) 사실에 대한 인식의 결여를 드러낸다; 파울리(Pauli)의 말은, 심지어 주관적 해석이 우리가 양자론과 상보성에 귀속시키는 저 소위 보다 근본적인사고방식에 대한 일종의 예견임을 암시한다. (정말로 주관적 해석이 그런 종류의 예견이었지만, 완전히 또 다른 의미에서였다.) 다음 문장에서 파울리(Pauli)는 확률에 대한 주관적인 개념을 물리학의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즉, ‘기초적개념으로서 해석하는 성향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지칭하는 바, ‘자연과학의 귀납적 추론들은 항상 확률 추론들이라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 문단을 끝낸다.

물론 파울리(Pauli)의 해석에는 그 해석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객관적인 것을 말하게 허용하는 교량이 필요하다. 그의 교량은 칸텔리(Cantelli)대수의 강법칙(strong law of great numbers)’으로 보인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법칙을 다음과 같이 주관주의적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실험 결과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무식의 정도가 저 실험의 반복되는 긴 수열을 통하여 변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라; 그리고 이 무지의 정도가 p라고 전제하라. (그것은 통상적으로 p = 1/2로 표시되어 최대치의 무지일 것이다.) 알지 못한다 이런 전제 하에서 우리는 다음 특성으로써 대수(large number) N을 항상 계산할 수 있다: 절대적 확실성에 미치지 못하는 원하는 확실성의 정도에 대하여, 실험들의 결과들의 상대적 빈도들이, N번째 실험부터 계속해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우리가 지닌 당초 무지의 정도 P로부터 벗어날 것임을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설명은, 내가 소망하는 바, 우리가 무지로부터 고도의 확실성을 도출할 수 있다고, 그리고 빈도가 틀림없이 무지의 정도와 동일하다고 제안하는 것을 기이하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보여준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62참조.) 물론 나의 설명은, 이와 같은 경우들에서 명시적으로 주관주의적인 언어를 회피하는 관습적인 설명과 다르다; 그 명시적으로 주관주의적인 언어로부터 주관적 해석과 객관적 해석들 사이의 모든 오락가락이 유래한다.

여기서 인용된 파울리(Pauli)의 주장들 가운데서, 우리에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지닌 지식 중 이것이 최대치라면 다시 말해서, 자연법칙들과 조금이라도 양립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지식... 엔트로피(entropy)는 항상 0이다.’ 이 주장은 도전을 받지 않는 듯이 보인다. 예를 들어 J. 폰 노이만(von Neumann)의 유명한 양자역학의 수학적 토대(Mathematical Foundations of Quantum Mechanics)에서 (1955) 우리는 그것을 발견한다:모든 좌표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고전적 관찰자에게, 엔트로피(entropy)는 그리하여 상수이고 사실상 0인데 이유인즉 볼츠만(Boltzmann) “열역학적 확률1...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증들을 검토하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 논증들은 내가 보기에 불필요하게 복잡하기 때문이다; 매우 혼란스럽다; 고도로 자의적이다; 그리고 다소 변호적이다. 대신 나는 이 주장을 내가 올바른 견해라고 (나는 그것이 볼츠만의 견해라고 믿는다) 생각하는 것과 먼저 대조하려고 노력한 것이고 그 다음에 그 주장의 결과들이 터무니없음을 밝힘으로써 그 주장을 반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내가 0과 최대 엔트로피(entropy)에 관한 올바른 견해라고 수용하는 것은 이렇다. 분자들의 거리들이 (그리하여 위치들), 그 평균이 분자들이 전체 사용가능한 부피에 걸쳐서 동등하게 공간을 차지한 거리와 동등한 우연 같거나 혹은 정상적인분포를 보여준다는 조건으로만, 그리고 덧붙여 속도들이 (그리고 속도들의 방향들) 맥스웰(Maxwell)의 속도 분포 법칙에 의하여 기술된 우연과 같은 분포에 따라서 분포된다는 조건으로 한 가지 체계는 최대 엔트로피(entropy) 상태에 놓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 체계의 엔트로피(entropy)는 분자들의 위치들과 속도들이 무작위적 형태로 분포된다는 조건으로만 최대치이다. 그 체계가 매우 많은 분자들로 구성된다면, 이것은 그 체계의 모든 하위-부피들에 대하여 위치들과 속도들이 또한 무작위적 형태로 분포됨을 수반한다.

이것과 반대로, 그 체계는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무작위적 상태로부터 멀리 격리된다는 조건으로만 0 엔트로피(entropy) 상태에 놓일 것이다. 예상되는 상태의 종류는 모든 혹은 거의 모든 분자들이 작은 하위-부피들 안에서 뭉쳐지고 모든 혹은 거의 모든 분자들이 동일한 속도를 (그리고 방향) 지닌 상태일 터이다.

이런 방식으로 극단적인 엔트로피(entropy)의 두 가지 상태는 객관적으로 기술(記述)될 수 있다.

그 기술(記述)은 균등분포를 지닌 0들과 (머리 부분들) 1(꼬리 부분들)의 무작위적 수열에 대한 기술과 정확하게 유사하다. N을 매우 긴 수열 S의 길이로 하고, n2 N보다 작은 가장 큰 정수(整數: integer)로 하라. 그렇다면 0들과 1들의 쌍, 세 쌍,..., n-쌍 발생들의 상대적 숫자가 d = n/N 이상이 아닌 것에 의하여 다른 쌍, 세 쌍,..., n-쌍 발생들의 상대적 숫자로부터 벗어난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수열 S완벽하게 무작위적이라고 부를 것이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55절의 말미, 주석 2 1 참조.)

이런 방식으로 수열의 경우에 최대 무작위성을 수열의 최대 엔트로피(entropy)에 해당하는 정의(定義)하고 특정 쌍들, 세 쌍들,... n-쌍들 사이의 차이 d가 최대치에 도달하는 수열을 우리는 물론 쉽게 구출할 수 있다. 이것은 예를 들어 균등 분포된 수열 S의 모든 1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다는 가령 0의 덩어리가 선행하고 0의 덩어리가 뒤따르는 조건의 경우일 것이다.

가스의 상태에 대한 유추는 명백하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가 무작위성이나 엔트로피(entropy)를 객관적인 용어로 규정할 수 있음을 밝혔다.

지금까지 나는 확률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확률은 이제 들어와서 모든 가능한 수열들의 압도적 다수가 혹은 모든 가능한 가스들의 상태들 중 압도적 다수 매우 가능하거나 엔트로피적일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혹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합당한 실험을 마련해서 0들과 1들의 수열을, 혹은 가스의 상태를 만들어내도록 한다면, 통상적으로 무작위적 수열들과 근사하게 최대치인 엔트로피(entropy)의 가스들을 만들어내는 매우 높은 경향이 있을 것이다. 이 성향이나 경향은, 그러나, 우리의 실험 장치가 순서정하기의 특별한 방법을 예를 들어 결과 ‘010101...’을 야기하는 방법 포함한다면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다른 실험들의 압도적 다수는 무작위적 상태들을 만들어내는 성향이나 경향을 지닐 것이다; 그리고 따라서, 모든 상태들의 압도적 다수는, 무작위적이든 아니든, 동일하게 무작위적 상태들에 의하여 계속되는 성향을 지닐 것이다.

무작위적 상태들과 무작위적 수열들에 대한 이 분석이 대수의 법칙과 연결되어서 분자들의 대수로 구성되는 가스들의 상태들에 혹은 매우 긴 수열들에 적용될 수만 있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요소들로만 구성되는 수열이 순서가 있는지 순서가 없는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이 분석을 토대로, 가스의 상태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 그 가스에게 0 엔트로피(entropy)를 부여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어떻게 나타났는지가 밝혀질 수 있다. 오류는, 가스의 모든 개별적인 가능한 상태가 혹은 모든 개별적인 가능한 수열 동등하게 개연적이라는, 그리고 모든 개별적인 상태나 수열이 그리하여 틀림없이 0 (혹은 근사하게 0) 확률을 지닌다는 전제로부터 우리가 출발할 것이라는 사실과 연관된다. 이것은 옳다. 높은 확률들은 어떤 정도로 높은 엔트로피(entropy)와 밀접하게 관련되고 0 확률들은 0 엔트로피(entropy)와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 또한 옳다. 이 두 가지 올바른 전제들로부터 그렇다면 모든 개별적 상태와 완벽하게 주어진다면 모든 개별적 수열은 0 엔트로피(entropy)를 지닌다는 것이 추론된다.

그러나 확률과 엔트로피(entropy) 사이의 밀접한 연관을 모두 그렇게 완벽하게 밀접하지 않기 때문에 그 추론은 무효이다. 모든 완벽하게 주어진 상태나 수열은 동등하게 개연적이어서 극도로 비개연적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다양한 상태들이나 수열들을 즉, 다양한 상태들이나 수열들의 확률에 관해서 그 상태들이나 수열들의 내부 구조에 따라서 구별하는 방법에 그 상태들이나 수열들을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서 간주하는 방법에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관심을 갖는 여기서, 이 사실은 우리와 관련이 없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오류는 또한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될 것이다: 우리는 수열들의 구조적 속성들특정 수열이 무질서의 (혹은 질서) 구조적 속성을 지니는지의 문제에 흥미를 지닌다. 각 수열 자체가 동등하게 비개연적일지라도, 그 수열이 질서의 속성이라기보다는 무질서의 속성을 지닐 것은 매우 개연적이다. 질서 있는 수열들보다는 무질서한 수열들이 훨씬 더 많다.

(혹은 유사한 사례를 이용하여, 여하한 특정 발생이 예를 들어 이 자리에서 동전이 던져졌다는 무한히 비개연적이라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전던지기의 머리 부분들속성이 무한히 비개연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특정한 주어진 상태나 수열이 0 엔트로피(entropy)를 지닌다는 믿음은 매우 명백하게 오류여서 그 믿음은 이 직설적인 방식으로도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그 믿음은 주관주의적 판본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형태로, 완전한 지식이 그 확률이 0이었던 한 가지 개별적인 가능한 상태와 일치할 것인 반면 불완전한 지식은 가능한 상태들의 전체 조합과 (그 척도는 아마도 0이 아닐 것이다) 일치할 것이라고 논증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더 합당하다.

이제 공기로 가득 찬 우리의 약병으로 선회하자; 그리고 이번에는 그 병의 미소상태(microstate)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최대치라고 - ‘다시 말해서, 조금이라도 자연법칙들과 양립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지식’ - 전제하자. 그렇다면 체계의 엔트로피(entropy)는 틀림없이 0이라고 우리는 파울리(Pauli)와 폰 노이만(von Neumann)으로부터 듣는다.

그러나 객관적인 관점에서, 체계는 (매우 개연적으로) 무질서나 무작위 상태에 놓인다: 그 체계의 엔트로피(entropy)는 최대치일 것이다.

누가 옳은가? 객관주의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우리의 전제에 따라서 완벽한 지식을 제공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위치들과 속도들의 분포를 계산할 필요만 있고 위치들과 속도들이 무작위인지 혹은 개략적으로 무작위인지를 알 필요만 있다. 체계가 완벽하게 질서 잡힌 상태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지 못할 것임을 우리는 상당히, 선험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체계가 완벽하게 질서 잡힌 상태에 있다는 고도로 비개연적인 경우에, 객관주의자는 자신이 이것에 관하여 틀렸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객관주의자는 이것이, 체계에 관한 완벽한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졌었다는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고도로 비개연적인 우연한 사건이라고 여전히 주장할 것이다. 게다가 객관주의자는, 심지어 체계를 우연히 질서 잡힌 상태로 우리가 붙잡는 극단적으로 비개연적인 경우에도 그 질서가 바로 전 순간에는 무질서였다는 것과 그 체계가 다음 순간에는 무질서의 상태로 복귀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당히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객관주의자는 이 소급언급과 예측을 체계의 다음 상태들 중 한 상태를 계산함으로써 시험할 수 있다; 완벽한 지식이 주어져서 객관주의자가 수행할 수 있을 계산.

이 모든 추론은, 내가 믿는 바, 볼츠만(Boltzmann)의 추론과 일치하는데 볼츠만(Boltzmann)은 체계가 반복적으로 질서의 상태들을 (낮은 엔트로피[entropy]) 차지할 것이지만 매우 드물게이며 질서 상태의 비개연성과 비례적이고 질서의 정도가 증가함에 따라서 매우 빠르게 감소하는 극도로 작은 시간의 기간들 동안만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주관주의자의 말을 들어보자. 주관주의자에게, 이 추론은 틀림없이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주관주의자는 질서라는 용어를 지식이라는 용어로 대체했고, ‘무질서라는 용어를 무지라는 용어로 대체했다. 그리고 주관주의자는, 부분적 무지가 빠르게 증가할 것이고 분자들 사이의 충돌 때문에 총체적인 무지가 곧 될 것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막스 보른(Max Born)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단 한 개의 개별적인 분자의 위치나 운동량을 알지 못한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전제를 토대로 우리가 먼저 모든 다른 분자들의 정확한 위치들과 운동량을 알지라도 이 전제를 토대로 우리의 무지는 곧 전체 체계에 걸쳐서 퍼질 것이다. 그는 비가역성은 그리하여 무지를 근본적인 법칙들 안으로 명시적으로 도입한 결과이다라고 서술한다.

이 무지의 증가는 볼츠만(Boltzmann)의 무질서 증가와 어떤 유사성을 정말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히 달라서 분명히 구분된다.

근본적인 요점은, 우리가 완벽한 지식으로써 시작하지 않는다면 무지는 항상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질서 즉, 엔트로피(entropy)때때로 감소한다; 볼츠만(Boltzmann)에 따르면 무질서는 등락을 거듭한다. 그리고 우리는 1905년의 아인슈타인의 해석 이래 소위 브라운 운동(Brownian movement)에서의 이 거듭되는 등락들에 대한 실험적 증거를 경험한다. 그래서 무질서와 (혹은 엔트로피[entropy])와 무지의 주관주의적 동일시를 주장하는 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시작부터 우리에게 완전하거나 완벽한 지식이 있다면 (폰 노이만[von Neumann]과 보른[Born]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무지는 증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완벽한 지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미래 상태들을 완벽히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이것은 볼츠만(Boltzmann)의 견해와 양립할 수 없다; 이유인즉 한 가지 체계가 고도로 비개연적인 등락에 의하여 완벽한 질서를 얻는다면, 볼츠만(Boltzmann)에 따라서 그 체계는 매우 개연적으로 즉각 다시 무질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하자면, 볼츠만(Boltzmann)의 이론을 주관적인 언어로 바꿀 수 있다는 흔히 반복되는 주장은 제거되어야 한다.

내가 올바른 견해라고 생각하는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이제 나는 약속한 바와 같이 엔트로피(entropy)나 무질서에 관한 주관주의적 이론에 대한 반증으로 선회한다. 나는 그 이론이 터무니없음을 밝히려고 매우 간략하게 시도할 것이다.

다시 진공 플라스크 안에 있는 우리의 약병을 열자. 우리가 설명하고자 원하는 것은 가스가 항상 탈출할 이유와 그 가스가 비가역적으로 탈출하는 이유이다. 객관주의자들과 주관주의자들 모두는 그것을 엔트로피(entropy)나 무질서에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법칙의 결과로서 설명한다. 객관주의자는 지금 사용 가능한 부피에서 가스가 병 속에 남아있으려면 분자들의 위치들이 고도로 질서가 잡혀있다고 그리고 분자들의 위치들이 사용 가능한 공간에 걸쳐서 무작위적 방식으로 분포되는 상태를 띠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경향의 의미에서 압도적인 확률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리하여 객관주의자는 가스가 탈출하는 이유에 관한 설명을 (그 설명이 전적으로 합당한지는 신경 쓰지 말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주관주의자는 그런 설명을 제시할 수 없다. 주관주의자는 가스가 사실상 팽창했다고도 심지어 말할 수 없다. 그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의 무지 상태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가 완벽한 지식으로써 출발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터무니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지의 상태가 아니라 가스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실종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가스가 약병으로부터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엔트로피(entropy)의 시간 변화들은 그렇다면 관찰자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고 폰 노이만(von Neumann)은 요약한다.a 그리하여 관찰자가 우리의 병을 완전히 안다면 (이 문장은 if the observer knew our bottleful completely인데 bottlefulbottle의 오기로 보인다. 역자) 엔트로피(entropy)는 증가하지 않을 터이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i) 가스가 병 안에 남아있을 것이거나 (ii) 가스가 탈출할 것이다. (i)은 분명히 터무니없다 (그것은 가스의 상태에 대한 우리 지식의 신령스러운 영향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ii) 가스가 탈출한다면 가스의 탈출은 엔트로피(entropy)의 증가와 연관되어 있을 리가 없다. 정말로 우리의 완벽한 지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엔트로피(entropy) 증가의 법칙을 이용하지 않고 탈출을 예언할 수 있을 터이다: 우리는 모든 분자들이 지나는 길을 계산함으로써 탈출을 예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엔트로피(entropy) 법칙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탈출이 그 법칙에 따라서 진행될 것임을 부인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이 특별한 경우에 지식이 가스와 함께 탈출하지 않았다할지라도 가스는 탈출했다. 그리고 처음에 엔트로피(entropy)의 증가로서 기술(記述)되었던 것은 가스의 탈출이었다.

결정론적 관점에서, 통계역학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안다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주어진 초기조건들을 지닌 모든 개별적인 병들로부터 탈출하는 가스들에 관한 모든 예언적 질문들이 답변되었다면, 한 가지 질문이 틀림없이 남는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법칙-같은 특징, 가스탈출의 혹은 혼합 과정들의 규칙성에 관한 질문과 이 과정들의 비가역성. 우리가 모든 개별적 경우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할지라도, 이 규칙성들은 주목받지 못한 채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통계역학에서 이 규칙성들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보는 반면, 폰 노이만(von Neumann)은 통계적 취급을 우리의 지식이 부족하다는 조건으로만 중요해지는 잉여적 추가의 사치(a luxury of extra addition)’로서 기술(記述)한다. 이 태도에 전체 골칫거리가 놓여있다: 주관적 이론은 다시 자체를 결정론적 편견의 잔재로서 밝힌다.

 

6. 두 가지 해석 사이에서 갈팡질팡.

파울리(Pauli)가 두 가지 해석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는 것은 이미 지적되었다: 그는 칸텔리(Cantelli)의 강법칙(strong law)을 객관주의적 의미로 읽는다. 그러나 폰 노이만(von Neumann)과 보른(Born)의 해석들도 역시 왔다 갔다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폰 노이만(von Neumann)의 저서에서 폰 미제스(von Mises)집단이론(the theory of ‘collectives’)빈도이론으로서 확률이론을 확립하는 데 일반적으로 필요한으로서 기술(記述)되는 글귀를 발견한다; 그리고 저자가 이 이론을 수용한다는 것이 함축된다. 그러나 폰 미제스(von Mises)의 견해들은, 폰 미제스(von Mises)가 항상 강조했던 바와 같이, 여하한 주관적 이론과도 전혀 양립할 수 없다; 그리고 폰 노이만(von Neumann)은 두 가지 견해들이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알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유사하게 막스 보른(Max Born) (이 문장의 원문은 Similarly Max Born으로 세 단어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불완전한 문장이고 비문법적이다. 어떤 의미로 저자가 썼는지 알 수 없다. 역자). 나는 그의 주관주의를 언급했다; 그러나 보른(Born)의 저술에는 객관주의적 구절들도 또한 있다. ‘비가역성은 체계의 한 부분을 인과성으로부터 명시적으로 제외함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다가 이런 종류의 구절이다. (나는 이 구절의 단어 사용에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구절의 정신에 동의하고 싶다.) 이 구절을 이어가면서 보른(Born)의 갈팡질팡은 함축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입자들의 위치와 속도가 통제되고 있다...... 조건을 배척해야 한다고 그는 서술한다. ‘통제되고(under control)’이라는 용어는 설명되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 알려지지 않은(are not known)’- 그의 원문 대부분과 일치할 - ‘우리가 실험을 반복한다면 마음대로 재생될 수 없는혹은 다시 말하여 실험의 객관적인 조건들의’ - 객관적인 해석을 향한 경향을 지적할 - ‘한 부분이 아닌’ (혹은 아마도, ‘한 부분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사이의 갈팡질팡을 나타낸다.

그런 갈팡질팡이나 왔다갔다는 정말로 주관주의를 인정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왜냐하면 인용된 저술가들에게 실제로 우리의 무지를 통하여 혼합이나 산란과 같은 비가역적인 물리학적 과정들을 설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나는 한 순간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결과들에 직면하여 그들은 인용된 서술들을 철회하거나 적어도 그 서술들을 재해석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근본적인 접근방식에 내재한 현실적인 난제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서술들 속으로 끌려들어갔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 입장들을 견지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II

 

양자론의 객관성

 

7. 양자론의 객관성: 상자들.

양자론의 상황을 고려하여 대상과 주체는 더 이상 뚜렷하게 분리될 수 없다고 흔히 주장된다. 하이틀러(Heitler)의 말을 사용하여, ‘세상을 객관적인 외부 실체와 자기-의식적인 구경꾼들인 우리로 분리하는 것은 더 이상 주장될 수 없다’. 보어(Bohr)에 따르면 이것은 원자적 대상들의 행태와, 현상들이 나타나는 조건들을 정의(定義)하는 데 도움을 주는 측정 도구들과의 상호작용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기인한다. 하이틀러(Heitler)는 그 요점을 다소 상세하게 설명한다. ‘스스로-기록하는 기구에 의하여 측정을 수행하는 것이 충분한지 혹은 관찰자의 존재가 필요한지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라고 그는 서술한다. 그리고 스스로-기록하는 도구는 불충분하고, ‘관찰자는 전체 구조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보이고 그의 완벽한 능력에서는 의식적인 존재로서 보인다는 결론에 그는 도달한다.

아마도 물리학적 주체의 관련에 대한 교설의 가장 분명한 설명인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서 우리는 하이틀러(Heitler)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설명은 이런저런 형태로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양자론의 물리학적 원리들(Physical Principles of the Quantum Theory)와 정통적 견해의 많은 다른 서술들에서 또한 흔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 교설은 거짓일 따름이다: 양자론은 어떤 이론만큼 객관적이다.

하이틀러(Heitler)의 도전을 수용하여, 우리는 먼저 고전적인 스스로-기록하는 실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할 것이다: 스스로-기록하는 장치를 포함하여 실험적 설치가 완성된 상자가 준비된다. 그 다음에 상자는 닫힌다. 장치를 읽는 것은 (매우 좁을 특정 한계들 안에서) 이론에 의하여 예측된다. 잠시 후에 상자는 읽기가 기록된 테이프나 필름을 내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테이프나 필름을 예측된 읽기와 비교한다.

이제 양자론 안에서의 상황은 원칙적으로 단 한 가지 특징적인 차이점을 제외하여 정확하게 동일하다: 모든 전형적인 양자론적 실험에 대하여 우리에게는, 하나의 상자 대신에, 각 상자에 동일한 실험 장치가 혹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만큼 유사한 장치가 장착된 많은 상자들의 무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론은, 대부분의 경우들에서, 상자들 각각을 통하여 나온 개별적인 테이프나 필름의 기록이 아니라 모든 상자들을 통하여 생산된 이 모든 읽기들의 통계적 분포를 예측한다.

몇 가지 특별한 경우에, 이론은 심지어 특정 예측을 하는데, 다시 말해서, 모든 개별적인 상자를 통하여 나온 모든 개별적인 읽기에 관한 예측들이다. 예를 들어 실험이 전자들의 희석된 광선에 관한 실험이고, 기록장치가 전자가 (혹은 전자들이) 통과한 지점의 상() 지닌 층()의 형태로 각각의 위에 놓인 두 가지 필름들로 구성된다면 우리는 두 가지 필름들 위의 상()들이 매우 가깝게 일치함을 항상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사례가 우리의 사례와 동일하지만 반대 (그리고 내가 염려하는 바, ‘분명히 불가능한’) 결과에 도달하는 하이틀러(Heitler)의 주장과 정반대로 - ‘이 관찰의 결과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 최고급 물리학자도 양자정설에 의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이틀러(Heitler)에 대한 특수한 사례에서 우리에게는 한 개의 상자 이상이 필요하지 않다; 이것은 문제의 결과가 확률 1(‘확실하게’) 예측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나 더 많은 전형적인 양자 실험들에 관해서는, 많은 상자들이 필요하거나 한 개의 상자 안에서 실험의 많은 반복들이 필요하다.

문서의 어느 곳에서는 우리는 하이틀러(Heitler)의 주장과 직접적으로 대조되는 - ‘스스로-기록하는 장치에서 혹은 많은 장치들에서, 여기에 설명된 방식을 통하여 재구성될 수 없는 실험을 발견하지 못한다. 양자론은 다른 물리학적 이론만큼 정확하게 객관적이다.

 

 

 

 

8. 혼란의 근원: ‘파속(波束: Wave Packet)의 붕괴

그렇다면 왜 이론은 주관주의적 의미에서 그렇게 흔히 잘못 해석되는가? 왜 하이틀러(Heitler), 희석된 전자 광선이 층()의 형태로 서로의 꼭대기에 놓인 두 가지 필름을 침해하는 실험에서 관찰자가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는가?

답변을 절대적으로 명백하다: 수학적 형식주의가 다시 말해서 슈뢰딩거(Schrödinger)의 파동방정식 보른(Born)의 해석과 결합하여, 필름들을 침해하는 전자들의 확률(밀도) 분포만을 제공한다. 수학적 형식주의는 전자들이 첫 번째 필름과 두 번째 필름을 침해하는 장소들이 일치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첫 번째 필름에 대한 전자의 충격 장소를 슈뢰딩거(Schrödinger) 방정식의 새로운 적용에 대한 새로운 초기조건으로서 다룬다면 이 후자(後者) 결과는 획득될 수 있다.

관찰자혹은 정말로 관찰의 결과들뿐만 아니라 슈뢰딩거(Schrödinger) 방정식 또한 구비한 물리학자 수학적 형식주의한 단계에 두 가지-필름 실험의 결과에 대한 예측을 낳지 않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입장하는 듯하다. 형식주의의 두 가지 적용은 필요하고, 방정식을 두 번째로 적용하기 위하여서는 관찰이 필요한 듯하다.

이것이, 요컨대, 하이틀러(Heitler)(그리고 정통 학파의) 논증이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가 소위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 (최초 충격의 지점까지) -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관찰자는 틀림없이 개입한다고 그 논증이 주장하는 한 우리가 슈뢰딩거(Schrödinger) 방정식을 첫 번째 필름에 대한 충격의 여하한 좌표들에 적용할 때마다, 그 논증은 두 번째 필름에 대한 충격이 (매우 근사하게) 동일한 좌표들을 지닐 것이라는 예측을 야기할 것이다. 이 결과에 대해서는 관찰이 필요하지 않다 - ‘실제적인 관찰도 잠재적인관찰도 필요하지 않다.

이것이 그 논증이 실패하는, 그리고 산란을 보여주는 저 결과들의 통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더 이상의 산란을 보여주지 않는 저 결과들에 우리의 두 개가 겹쳐진 필름들 위에서의 일치(coincidence)와 같이 대해서 또한 우리가 성공적인 예측들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스스로-기록하는 상자들이 작동하는 이유이다.

정설 논증은, 그러나 비의도적이라 할지라도 수학적 형식주의의 불완전성을 확립하지 못한다.

 

9. 양자론에 대한 수학적 형식주의의 불완전성.

우리가 한 가지 이론의 혹은 수학적 형식주의의 완전성이나 불완전성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많은 의미들이 있다. 내가 여기서 사용하는 수학적 형식주의의 완전성이라는 개념에는 다음 의미에서 물리적 현상들의 특정 범위를 포함시키려는 의도가 있다: 형식주의는, 우리가 문제의 현상들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실험적 결과들에 대한 예측을 자동적으로’ (다시 말해서, 앞의 절에서의 의미에서 비공식적인 두 번째 단계를 만들 필요 없이) 포함한다는 조건으로만, 완전하다.

이런 의미에서 완전한(complet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제안은 닐스 보어(Niels Bohr)에게서 유래한다. ‘물리학적 실체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Can Quantum-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라는 제목이 붙은 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y), 로젠(Rosen)의 논문에 대한 자신의 답변에서 보어(Bohr)는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했다: ‘그러나 그런 논증은 양자역학적 기술(記述)의 완전성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알맞지 않을 듯이 보일 것인데 양자역학적 기술(記述)의 완전성은 지적된 저것과 같은 여하한 측정 과정을 자동적으로 포함하는 일관적인 수학적 형식주의에 근거한다.’ 문제의 완전성이 완전함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리고 형식주의가 포함하는 측정의 과정을 통하여 보어(Bohr)는 분명하게 형식주의에 의하여 예측될 수 있는 실험적 결과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마도 여기에서 제시된 완전한(complete)’의 정의(定義)가 가능한 한 가깝게 보어(Bohr)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定義)에 따라서, 형식주의는 보어(Bohr)의 주장과는 직접적으로 반대로 불완전하다. 사실상 정통 학파는 형식주의를 두 가지 방식 모두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보어(Bohr)는 형식주의가 모든 경우들을 자동적으로 포함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이틀러(Heitler)는 관찰자가 틀림없이 개입한다고 말한다; 혹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가 동일한 요점을 표현한 바와 같이: ‘슈뢰딩거(Schrödinger) 방정식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불연속적인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 가능한 것에서 실제적인 것으로의 천이(transition)의 결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형식주의가 불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형식주의를 실제적인 것에 적용하는 것은 실제로 그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단계를 요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틀림없이 가능하지 않다.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여기서 언급된 불완전성을 심각한 것으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나는 심지어 그 불완전성은 아인슈타인이 염두에 두었던 것이라고 제안하지 않는다. 형식주의 안의 이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해석된 이론 안에는 불완전성이 없음을 나는 밝힐 것이다; 정말로 형식주의 안의 이 특정 불완전성은, 양자물리학과 혹은 관찰자들이나 그런 종류의 것에 의한 간섭과 관련이 없는 넓은 범위의 문제들을 확률주의적으로 다루는 데 특징적인 불완전성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하여 이 특정 불완전성을 치료할 필요는 없다. 내가 밝히고 싶어 하는 유일한 것은 이론의 형식주의는 정확하게 보어(Bohr)의 의미에서 보어(Bohr)의 주장과 반대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찰자가 양자론에 입장한다는 신화를 낳은 것은 바로 이 전형적이고 무해한 불완전성이다. [‘서문 1982안에 있는 불완전성에 대한 토론 참조.]

 

10. 난보(亂步: A Random Walk)가능한 것으로부터 실제적인 것으로의 천이(transition)’.

사막에 있는 군인은 주머니용 확률바퀴(roulette-wheel)가 주어지고 신호기(pointer)가 돌다가 정지하게 하고 그 확률바퀴를 세우라는 지시를 받고 그 다음에 잠시 동안 신호기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걸으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 다음에 신호기를 선회하게 하고 움직임을 반복하도록 지시를 받고, 다시 잠시 동안 신호기의 방향으로 걷는다. 이 지시를 토대로, 출발점으로부터 모든 방향으로 군인이 걸어가는 속도로 퍼지는 군인의 위치에 대한 확률 분포를 중앙에서는 밀도가 놓고 가장자리 향해서 얇아지는 일종의 구름 우리는 얻는다. (이 구름에 대해서 유효한 일종의 호이겐스[Huygens] 원리가 있다: 1분 동안의 걷기의 모든 잠재적 끝은 다른 것들에 겹쳐지는 새로운 구름의 중앙이 된다.)

한 시간 뒤 군인이 자신의 주머니용 확률바퀴(roulette-wheel)를 보기만 할 때 그 군인을 관찰하자. 그 때 우리는 옛 구름이 사라지고 새로운 구름이 우리가 군인을 관찰했던 지점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와 동일하고, 그것은 정확하게 이런 방식으로 모든 소위 확률이론의 마르코프-연쇄(Markov-chain) 문제에서 발생하고, 다소 더 일반적으로, 상대적 확률들이 본질적인 역할을 하는 모든 경우에 발생한다. 그것은 심지어, 다소 더 사소한 방식으로라 할지라도, 동전던지기와 같은 그런 게임에서 발생한다: 우리가 머리 부분들을 던졌다는 정보에 관하여, 우리가 머리 부분들을 던졌다는 (상대) 확률은 1/2에서 1로 변한다. 이것이 양자 이론가들을 괴롭혔던 문제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것이 하이틀러[Heitler]의 문제와 동일하고, 하이젠베르크[Heisenberg]로 하여금 가능한 것으로부터 [혹은 잠재적인 것] 실제적인 것으로의 천이[transition]’에 관하여 말하도록 만드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나는 특히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76절에서 여러 해 전에 주장했다.

이 유명한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의 무해함은, 물론, 내가 형식주의의 불완전성이 무해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그것을 합당하게 해석할 수 있자마자, 해석된 이론그런 상태로서의 수학적 형식주의라기보다는 이 특정 요점에서 우리가 원할 수 있는 만큼 완전하다.

이 모든 경우들에서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는 관찰되는 대상들과 관련하여 소위 관찰자의 간섭이나 관찰하는 도구들의 간섭과 전혀 관련이 없다: 군인들과, 심지어 동전들도 너무 무거워 그 군인들과 동전들을 관찰하는 데 필요한 극소수의 광양자(light quanta)에 의하여 혼란스러워지지 않는다. 이것은 마침내, 함축적으로,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에 의하여 인용된 논문에서 수용되는데 왜냐하면 그가 이제 고전 열역학에서 가능한 것으로부터 [혹은 잠재적인 것] 실제적인 것으로의 천이(transition)’를 또한 발견하기 (25 27)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그가 저 장()에서 옹호하는 정통 (혹은 코펜하겐’) 해석은 파괴된다. 이유인즉 전체 문제가 정통 학파가 항상 주장했던 바와 같이 양자론이 다른 확률주의적 이론들과 그렇게 매우 다른지 이기 때문이다; ‘고전이나 거시이론들과 반대로 양자론에서, 다루어지는 대상의 특이성 때문에 그리고 플랑크(Planck)의 상수 b 때문에 우리가 새롭고 독특한 상황과 대면하는지.

 

11. 입자, 파동, 그리고 경향 해석.

입자 대() 파동의, 그리고 입자와 파동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문제는 상당한 기간 동안 양자론 창시자들 중 몇몇에 의하여 (특히 보어[Bohr], 보른[Born], 슈뢰딩거[Schrödinger],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디랙[Dirac], 그리고 나중에는 란데[Landé]에 의하여) 토론되었다. 이 토론들에서 어떤

짜증이나 분노의 요소가 특히 슈뢰딩거[Schrödinger]를 향하여 겨냥된 채 때때로 감지될 수 있었는데 슈뢰딩거[Schrödinger]파동에 개인적인 애착을 지니고 있어서 이 개념과 사랑에 빠졌다고 지적된다. 짜증은 아마도 그 문제를 물리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철학적인 사이비-문제로 보고 싶어 하는 젊은 세대의 물리학자들 가운데서 훨씬 더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i) 수학적 형식주의의 문제도 아니고 (ii) 수학적 형식주의를 적용하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요점들 양쪽 모두에 대하여 논쟁하는 무리들은 동의한다. 그리하여 보다 냉정한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진지하게 수용될 필요가 있는 문제는 여기에 없는 듯하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저 냉정하고, 비상식적인 도구주의자들은, 두 가지 이론의 수학적 동등성을 발견한 사람이 슈뢰딩거[Schrödinger]였다는 것을 고려하기 위하여 멈추어야 한다; 먼저 변형론(變形論: transformation theory)’(힐베르트[Hilbert] 공간에서 벡터들의) 전개한, 그리고 자신의 동등성 증거에 관하여 1926년이나 오래 전에 글을 썼던 사람: ‘이 견해를 토대로’ (키르히호프[Kirchhoff]와 마흐[Mach]의 견해) ‘수학적 동등성은 물리학적 동등성과 거의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슈뢰딩거[Schrödinger]가 파동에 관한 이론과 입자에 관한 이론인 두 가지 이론들이 물리학적으로 대등하지 않다고 믿는다면, 이유는 사실상 그가 보았던 것만큼 아무도 일찍 보지 못했던, 혹은 내가 믿는 바, 그가 보았던 만큼 분명하게 아무도 보지 못했던 요점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다.

사실상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자신이 거의물리학적 동등성만큼 많이 인정했을 때 너무 관용적이었다: 그의 파동이론은 자유전자(free electrons)와 구속전자(bound electrons) 모두에 관한 이론이었는데 그 이론은 적어도 당시에 입자이론이 아니었다.

정통 견해를 비판하려는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시도가 그런 답변들을 낳았다면, 철학자의 견해들일 따름인 나의 견해들은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진지하게 고찰될 희망이 없다; 희망은, 비록 내가 파동들과 깊이 사랑에 빠졌을지라도 (입자들과는 훨씬 더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양자론이 매우 명백한 의미에서 입자이론이고 (여기서 나는 슈뢰딩거[Schrödinger]와 의견이 갈린다) 어떤 의미에서는 입자와 파동 사이에서 이원성이나 유추나 상보성을 배제하는 입자이론이라고 내가 믿는다는 사실에 의하여, 심지어 감소한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여, 파동들은 (심지어 제2양자화[the second quantization]의 파동들) 특정 상태들을 차지하는 물리학적 상황에 (실험적 장치와 같은) 관한 입자들의 경향들로서 해석될 수 있는 경향들의 혹은 성향적 속성들의 수학적 재현(representations)이라고 나는 믿는다. 양자론이 확률주의적 이론인 한, 양자론은 파동들이나 행렬들의 이론이다: 이것이 파동이론과 행렬이론이 대등한 이유이다. 그러나 이론이 결정하는 확률들은 항상 특정 조건 하에서 특정 상태를 점유하는 입자들의 경향들이다.

그리하여 입자들과 파동들 사이에는 균형이나 이원성이 없다: 파동들은 입자들이 지닌 성향적 속성들을 기술(記述)한다. 알프레드 란데(Alfred Landé)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이것이... 유명한 이원성이라면, 백조들은 틀림없이... 이원주의적인(dualistic) 새들이다, 이유인즉 한편으로는 백조들이 개체들이거나 입자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백조들은 물결모양의 목의 특성을 지닌다; 그리하여 우리는 백조들이 실제로 입자들인지 혹은 파동들인지 영원히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 이원성은 대조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대조이다.’ 물결모양의 목보다는 성향적 속성을 보다 분명하게 내가 선호했었을 것이란 점을 제외하고,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예를 들어 특정 상황 하에서 백조들이 목을 사용하여 물결모양의 움직임을 만드는 백조들의 성향.

이 견해에 따라서, 입자들은 형식주의로 명쾌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파동 형식주의로도 아니고 행렬 형식주의로도 (흔히 입자 형식주의로 일컬어지는) 아니고 더구나 중립적인변형이론으로도 아니다. 이 모든 이론들은 특정 가치들을 점유하는 특정 변수들의 성향들을 기술(記述)한다; 특정 입자들의 상태에 대한 변수들로서 해석될 변수들.

나의 근심 중 한 가지 근심은 이 견해가 슈뢰딩거(Schrödinger)에게 수용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점은 실제로 그의 이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여기에 제안된 해석에 따라서, 성향들과 성향의 장(: fields)들은 힘들(forces)이나 힘들의 장(: fields)들만큼 실제적일 따름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성향들과 성향들의 장(: fields)들은, 힘들(forces)처럼, 성향적 속성들이다; 그리고 힘들(forces)이나 힘들의 장(: fields)들처럼, 성향들과 성향들의 장(: fields)들은 입자들의 속성들이라기보다는 전체 물리적 상황의 속성들이다; 성향들과 성향의 장(: fields)들은, 힘들(forces)처럼, 관계적(relational) 속성들이다.

이 요점을 다소 더 완벽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뉴튼이 자신의 이론을 중력에 대한 설명으로서 수용하기 어려움을 발견한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이 주장하는 인력(attracting forces) 원격 작용을 하는 안에서 물질의 내재적이거나 본질적인 속성을 발견하기 어려움을 자신이 알았다는 것이다. 연장(extension)은 한 조각 물질의 본질적인 속성이 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연장(extension)이 이 물질의 조각 외에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력(attraction)다른 물질의 조각들을 끌어당기는 성향이었다: 인력은 관계적 속성인 상호적 속성이었다; 그리하여 인력(attraction)을 물질의 조각 속에 내재적으로서 상상하는 것은 어려웠다 또 다른 조각의 물질보다 더 연장되는 (더 큰) 물질의 조각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만큼 어려웠다. 관계적 속성들이 실제적이 아니고 이상적이라고 제안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우리가 지닌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본질주의적인 (‘단정적인[categorical]’, 다시 말해서 주어-술어 서술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습관적인 선호와 연결된) 습관이다; 다시 말해서 관계적 속성들이 우리 자신이 생각하고 순서를 잡는 활동들에서만 발견된다고 제안하는 것. 확률들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낳아서 객관적인 경향 해석의 수용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최종적으로 이 태도이다.

특정 주어진 조건 (초기 조건[initial conditions]과 경계 조건[boundary conditions]) 하에서 특정 방식들로 반응하는 경향들로서 가능성들의 척도들이 해석될 것을 우리가 허용하자마자, 가능성들을 통한 우리의 해석은 슈뢰딩거(Schrödinger)1926년에 고유 값의 문제로서의 양자화(Quantization as a Problem of Proper Values)’에 관한 자신의 네 번째 논문에서 제안한 해석과 더 이상 반대가 되지 않는다. 그 해석들 사이의 차이점은, 만약 차이점이 있다면, 확률에 대한 경향이론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리고 단일 확률론(singular probability theory)은 객관적이 될 수 없다는, 그리고 확률의 객관적 이론은 틀림없이 순전히 통계적이거나 빈도라는 견해와 연결되어 있다. ‘가능성들에 대한 척도들에 관하여, 그리고 측정-함수(measure-function)’(확률 척도의 밀도분포를 결정하는) 관하여 말하는 대신에,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이 논문에서 가능성들의 무게(weight)’에 관하여 다시 말해서, 모든 운동적으로 가능[] 포인트-역학적 배위(point-mechanical configurations)에 관하여그리고 무게 함수(weight function)에 관하여 언급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는 체계가 존재한다고 말할 것인데, 말하자면, 운동적으로 상상될 수 [있는] 모든 위치에서 동시적으로 존재하지만 모두에게서 동등하게 강력하게는 아니다 라고.’ 얼마나 강력하게 그 체계가 이 위치들 각각에서 존재하는지는 무게 함수에 의하여, 즉 파 진폭의 제곱(the square of the wave amplitude)에 의하여 결정된다.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이렇게 논평한다: ‘이 새로운 해석은 첫눈에는 우리에 충격을 줄 건인데 이유인즉 이전에는 우리가 ψ-진동들(ψ-vibrations)”을 마치 완전히 실제적인 것에 대한 것인 양 직감적으로 구체적인 방식으로 흔히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개념 뒤에는 가시적(可視的)인 것이 또한 있다....’ 물론 이 견해에는 경향 해석과 공통적인 것이 정말로 많다. 슈뢰딩거(Schrödinger)는 파동들에 대한 객관성이나 실제성파동들이 다른 물리학적 규모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잘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 강조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다른 물리학적 규모들이 평범한 파동들이나 진동들보다 다소 덜 실제적이고 덜 구체적이며 직감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경향 해석과의 일치가 있다. 차이점은 이렇다: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자신이 주장하는 무게를, 가능한 배위(configuration)에 혹은 가능한 운동적 상태에 부착된 자체를 깨닫는 기질로서 (혹은 성향이나 경향) 해석하지 않는다; 그 힘과 무게가, 문제의 상태가 문제의 실험이 반복되는 수열에서 발생하는 통계적 빈도에 의하여 나타나는 경향. 다시 말해서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자신이 주장하는 무게가 그렇게 해석될 수 있음을 깨달을지라도 그 무게를 확률로서 해석하지 않는다. 방금 인용된 논문 1년 뒤에 작성된 논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러나 독자가 원한다면 독자는 보른(Born)의 이론에 따라서... 언급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데 보른(Born)의 이론 안에서는 파동의 제곱들이 단일 체계 안의 동시적 자극 강도로서가 아니라 단지 사실적 총계로 된 별개의 양자 상태에 대한 확률들로서 해석된다.’ ‘단일 체계 안의 동시적 자극 강도는 물론 옛 논문의 무게(weight)’와 동일하다; 그래서 슈뢰딩거(Schrödinger)가 여기서 단일 체계의 객관적인 속성을 강도 분포(an intensity distribution) - 체계들의 총계에서의 발생의 상대적 빈도와 대비시키고 싶어 함을 우리는 분명하게 안다.

경향 해석은 이 괴리에 교량을 놓는다. 경향 해석으로 인하여 단일 체계가 다양한 힘이나 무게나 강도를 지닌 객관적인 경향들이나 성향들을 지니고, 이것들이 자체들을 실현하는 경향으로서 해석된다면 이것들이 실제적인 (혹은 현실적인) 총계나 집단체로 된 상응하는 통계적 빈도들을 낳는다는 것을 경향 해석은 보여준다.

슈뢰딩거(Schrödinger), ‘독자는 원한다면통계적 의미에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논평한다. 이것은 그가 통계학과의 접목을 보아서 인정했지만 자신이 순전히 통계적인 (객관적인 단칭 해석과는 반대로) 해석에 의하여 만족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아마도 우리가 경향 해석으로 지칭하는 것이 슈뢰딩거(Schrödinger)의 모든 의도를 아마도 심지어 보른(Born)의 의도들에게 있는 분명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보른(Born)의 의도들조차도 완수한다고 우리는 주장할 것이다.

 

 

12. 경향 해석의 부분적 예측.

슈뢰딩거(Schrödinger)는 당시에 경향 해석에 관한 매우 초기의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면을 파동들에 관한 객관성과 실제성 (배위공간[configuration space]에서) 및 파 진폭들(wave amplitudes)이 가능성들의 무게나 힘이나 척도를 제공한다는 사실) - 강조했다.

보른(Born), 다른 한편으로, 반대의 것인 우리의 해석이 지닌 통계적 면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역시 앞의 절에서 인용된 바와 같은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언급과 비교될 비평에서 완벽한 경향 이론에 근접했다 (‘독자가 원한다면... 독자는 보른[Born]의 이론에 따라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유인즉 보른(Born)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기 때문이다: ‘파동들이 편리한 방식으로 현상들을 기술(記述)하고 예측하는 현실적인것이거나 허구인지...의 문제는 취향의 문제이다.’

보른(Born)은 계속해서 말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심지어 3N-차원의 공간에서의 확률 파동(probability wave), 확실히... 수학적 계산을 위한 도구 이상으로, 사실적인 것으로서 간주하고 싶다. 왜냐하면 확률 파동(Probability wave)에는 관찰의 불변량에 관한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저것이 의미하는 바, 우리가 실제로 동일한 실험적 상황 하에서 실험을 여러 번 실행한다면 확률 파동(Probability wave)이 카운팅 실험들(counting experiments)의 결과들을 예측하고 우리는 동일한 평균 숫자들을, 동일한 평균 편차들, 기타 등등을 발견할 것을 기대한다.’ 전체 구절은 경향 해석의 동일한 책에서 발견될 확률에 관한 주관적이고 순전히 통계적인 해석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갈팡질팡하거나 오가는 것과 매우 기묘하게 대조를 이루면서 선언문처럼 읽힌다. (, 6절 참조.) 방금 인용된 구절은, 고전적 통계 역학의 개념적 난제들을 해결하는목적으로 주관적 해석을 확대하여 이용하는 것과 매우 기묘하게 대조되어 우리는 이 단계에서 보른(Born)이 가슴으로 고전적 통계학에서가 아니라 양자론에서만 객관적인 경향 해석을 옹호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구절이 바로 계속되면서, 보른(Born)은 확률에 관하여 완전히 일반적인 경향 해석을 선호하여 논증함으로써 우리를 다시 놀라게 하기 때문이다: ‘이 개념에 의하여 우리가 사실적이고 개관적인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일반적으로 어떻게 우리가 확률 예측들에 의존할 수 있었겠는가? 이 고찰은 정확하게 양자역학적 밀도 행렬에게만큼... 고전적 분포 함수에게 적용된다...’고 그는 서술한다.

특히 속편에서 보른(Born)이 보어(Bohr)2중 슬릿 실험을 (정말로 경향 해석을 위한 가장 강력한 논증들 중의 한 가지 논증이라고 내가 믿는) 자신의 이론을 예시하고 지지하는 모범적인 방식으로 토론함을 우리가 발견할 때 이것은 경향 해석에 대하여 완벽하게 분명한 서술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른(Born)이 확률이론이나 양자론에 관한 경향 해석이라고 내가 꼬리표를 붙였던 입장과 같은 것에 도달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물론 그는 이 한 가지 구절에서 그 입장에 도달했지만, 이 해석에 훌륭한 시험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이 해석에는 부단히 관철하려는 시도의 가치가 있다는 것; 오히려 그는 이 해석을, 상황이 이런 목적이나 저런 목적을 위하여 목격될 많은 상보적방식들 중 한 가지 방식으로 수용한다. 이것은 위에 인용된 보른(Born)의 시작하는 말에서 도구주의에 대한 양보를 설명한다. 이것은, 이 웅변적인 호소가 확률에 대한 완전히 일반적인 객관적 해석을 선호하여 실행되는 동일한 책에서 통계역학이 순전히 주관적인 이론으로서 전개되어 세밀하게 옹호된다는 달리 이해될 수 없는 사실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 책을 발간한지 3년 후에 어떻게 보른(Born)양자역학의 통계적 해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복잡한 수학적 형식주의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어떤 철학적 자세를 요구한다: 전통적인 개념들을 희생하고 보어(Bohr)의 상보성 원리와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수용하려는 의향.’ 이제 복잡한 수학적 형식주의에 대한 지식에 관하여, 확률에 대하여 완전히 일반적인 객관적인 해석을 위한 보른(Born)의 웅변적 호소가 진지하게 수용된다면 이것은 수용될 수 없다고 언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동전던지기와 같은 게임들에서 확률을 해석하는 문제는 양자론에서 확률을 해석하는 문제와 근본적으로 동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보어(Bohr)의 상보성 원리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부분적으로 경향 해석에서 앞장섰던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두드러진 사람은 디랙(Dirac)이다. 진스(Jeans)도 언급되어야 한다.

경향 해석에 대한 명백한 설명이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논문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이젠베르크(Heisenberg)는 그 설명이 정통적 견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Heisenberg)는 자신이 그렇게 명백하게 기술(記述)하는 해석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막스 보른(Max Born)이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곧 판명된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그 해석이 오래된 정통적 상보성 견해와 동일하고 그리하여 입자와 파동, 양자도약(파속의 붕괴[the reduction of wave packets]가 사례로서 수용되는), 관찰자의 역할, 그리고 완벽하게 이해된다면 그 추방이 경향 해석의 사소한 결과들 중 하나인 모든 저 다른 정통적 유령들에 관한 완벽한 이원성이라는 자신의 옛 교설에 의존한다.

이 논문에서 하이젠베르크(Heisenberg)는 내가 경향 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의 도입을, 보어(Bohr)와 크라머스(Kramers)와 양자역학의 선도자였던 슬레이터(Slater)에게 (1924) 귀속시킨다: ‘보어(Bohr), 크라머스(Kramers), 그리고 슬레이터(Slater)에 의한... ... 해석은... 나중의, 올바른, 해석의 몇 가지 매우 중요한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특징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종류의 객관적인물리적 실체로서 확률을 도입한 것이다. 이 확률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인들의 자연철학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확률 개념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태(potentia)개념을 질적인 것에서 수량적인 개념으로 바꾼 것이다라고 하이젠베르크(Heisenberg)는 서술한다.

이런 종류의 객관적 확률에 가능태의 성향이나 경향에 대한 척도로서의 확률 대한 새로운 개념을, 그 개념이 기껏해야 그들의 접근방식에 함축되어 있을 따름이라 할지라도, 보어(Bohr)와 크라머스(Kramers)와 슬레이터(Slater)의 논문에 귀속시키는 것은 놀랍지만 아마도 옹호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바,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코펜하겐 해석과 동일시하는 나중의, 올바른, 해석의 매우 중요한 특징들중의 한 특징으로서 기술(記述)된 이 개념이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자신과 보어(Bohr)에 의하여 1927년에 완성된 (전게서, 15) 것을 보는 것은 훨씬 더 놀랍다; 적어도 나는 보어(Bohr)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초기 논문들에서 이 개념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통적 코펜하겐 해석에서, 관찰과 측정이 수행하는 부분에 대한 개념과 같은 개념들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정확한 측정을 금지하는 비결정 관계들에는 이론에 불확실성의 요소를 그리고 그 요소와 함께 확률 고찰들을 도입하는 주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확률 이론은, 이론에 의하여 우리의 측정에 그리하여 우리의 지식이 지닌 정확성에 이론에게 이론의 특징적인 객관적 및 주관적 요소들의 혼합을 제공하는 부과되는 특정 한계들 때문에 입장한다. 이 모든 것은 갑자기 내쳐진 듯이 보였고 순전히 객관적인 잠재성이나 경향 해석이 그 자리에 놓였던 듯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랄 이유는 없다. 인용된 구절에도 불구하고, 정통적 이론에는 실제로 변화가 없었다. 보른(Born)의 경우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적 가능태(potentia)의 즉, 우리가 지닌 경향의 실제적 잠재성들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논문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란데(Landé)가 지칭하는 바와 같은 신념의 세 가지 조항들(the three articles of faith)’이원성(duality), 불확실성(uncertainty), 그리고 상보성(complementarity) - 양자 수수께끼로써 여전히 연구를 한다; 그리고 게다가 모든 저 다른 불필요한 양자 수수께끼 및 주체-대상 혼동, 우리의 측정의 결과로서 가능한 것에서 실제적인 것으로의 천이(transitions)’와 양자도약과 같은 두려운 것들로써 연구를 한다.

경향 해석을 예견했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란데(Landé)만 유명하지만 불필요한 양자 수수께끼의 대부분을 경향 해석의 도움을 받아 경향 해석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이 해석에 대한 우선권 주로 그에게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최초로 객관적이고 단일한 확률(singular probability) 대한 필요성을 확립한다 (후기[後記: Postscript]II권인 열린 우주: 비결정론의 위한 논증[The Open Universe: An Argument for Indeterminism] 참조); 그는 이 단계만 결정론의 배척을 의미함을 인정한다; 그는 이론을 상대적이거나 천이 확률(transition probabilities)에 근거시킨다; 그리고 매우 중요하게, 이것을 토대로 그가 지적하는 바, 신념의 조항들이 된 양자 규칙들을 설명하려고 그는 노력한다.

내가 느끼기에 그가 경향 해석의 힘을 완전히 이용하지 않는 중요한 한 가지 요점만 있다. 그 요점은 모든 관찰적인 면에서 동일한 입자들의 감지불가능성을 통하여 대칭적...이고 반()대칭적인... 상호작용의 방식들을 설명하려는 그의 시도이다. 이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라이프니츠(Leibniz)의 원리의 도움을 받는 것은 라이프니츠(Leibniz)관찰적으로 감지 불가능한 것들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정당화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관찰적으로 감지 불가능한 것들의 동일함에 관한 실증주의적 원리는 내가 보기 혐오스럽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옹호될 수 없다.

그러나 주요점은, 경향 해석을 단호하게 적용하는 것이 별개의 원리에 도움을 받는 것을 불필요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파울리(Pauli)의 배타 원리(exclusion principle), 세 가지 가능한 대칭족(對稱族: symmetry classes) 가운데서 오직 반()대칭족(antisymmetrical class)만 발생하는 공리의 형태로 전자에 관한 파동이론의 한 부분으로서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형태로 파울리(Pauli)의 배타 원리(exclusion principle)는 구분 불가능한 입자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경향 해석의 관점에서, 파울리(Pauli)의 배타 원리(exclusion principle)는 배타 원리(exclusion principle)의 다양한 필연적 결과들을 (페르미-디랙 통계학[Fermi-Dirac statistics]을 확립하는 필연적 결과와 같은) 위반하는 체계를 발견하는 확률이 0임을 확인한다.

 

 

 

 

 

 

 

 

13. 양자도약은 있는가?

이 절의 제목은, 내가 믿기에 그 해석에 따라서 양자도약이 있는 한 가지 해석을 양자론이 보장하지 않음을 슈뢰딩거(Schrödinger)가 밝히는 슈뢰딩거(Schrödinger)의 논문에서 뽑았다.

양자도약은 최초로 보어(Bohr)에 의하여 1913년의 그의 원자모형과 함께 도입되었다. 양자도약은 전자들이 한 가지 정상상태(定常狀態: stationary state)로부터 또 다른 정상상태 (定常狀態: stationary state)로 별안간 천이(遷移: transition)하는 것인데 당시에 시간을 차지하지 않는 것으로 일컬어지는 천이(遷移: transition)들이었다. 그러나 빛 양자(light quantum)의 방사는 (이론이 천이[遷移: transition]와 결합시키는), 새로운 양자론과 실험들 모두에 따라서, 정말로 시간을 차지한다. 이론의 관점에서 방사가 시간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예를 들어 불확정 관계들로부터 보일 수 있는데 이유인즉 그렇지 않으면 양자의 빈도가 (에너지) 불확정적이 되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실험의 관점에서, 평균 시간은 예를 들어 일관적인 파열(波列: wave train)의 평균 길이로부터 (3에서 4피트의 길이) 계산될 수 있다.

양자도약은 슈뢰딩거(Schrödinger)가 오랫동안 혐오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양자도약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다 물리학자들이 양자도약을 수용하는 데 대하여 충분한 근거들을 밝힐 수 있다면 나는 완전히 기쁜 마음으로 양자도약을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근거들이 있다고 나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슈뢰딩거(Schrödinger)가 막스 보른(Max Born)으로부터 받은 한 가지, 나중에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으로부터 받은 한 가지 모두 두 가지 (다소 모순적인) 답변들에는 적어도 어떤 근거도 제시되지 않는다. 보른(Born), 내가 아는 한,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질문에 전혀 답변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저서 2절에서 도입하는 원자들이 있는가(Are There Atoms)?라는 완전히 다른 문제를 토론한다. 그는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실제 의도가 원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슈뢰딩거(Schrödinger)의 견해들에 대한, 더욱 특히 그가 보른(Born)에 의하여 비판을 받는 장소에서 말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한 오해로 보인다.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이론은 원자들을 (파동들로서가 아니라, 파동 구조들로서)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원자들을 해명하지는 못한다.

보른(Born)의 논문에서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이 주어지지 않지만, 하이젠베르크(Heisenberg)는 정말로 답변을 제공한다. 처음에 그는 보른(Born)보다 더 많이 말하는 듯이 보이지 않는데 이유인즉 그는 원자물리학 내부의 모든 곳에서 (매우 분명하게, 예를 들어 섬광막[scintillation screen] 위에서) 발견되는 불연속의 요소...)’의 존재의 (원자들의 존재 대신에) 도움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보른(Born)의 입장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섬광들(scintillations)을 슈뢰딩거(Schrödinger)가 처음 듣는다는 것을 우리도 처음 듣는다; 그러나 슈뢰딩거(Schrödinger)가 이 불연속들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불연속들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그리고 전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듯이 실제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 다음에, 하이젠베르크(Heisenberg)는 우리의 질문에 관하여 명백한 제안을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양자론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에서 그것은’ (‘그것은 불연속이고 아마도 양자도약이다) ‘가능한 것으로부터 실제적인 것으로의 천이(transition)에 포함된다.’ 그렇게 양자도약이라는 신화(神話)를 포기하는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제안에 자기 자신의 반대 제안을 내놓고, 하이젠베르크(Heisenberg)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슈뢰딩거(Schrödinger)에 대한 정상상태(定常狀態: stationary states)와 양자수(quantum numbers)를 설명한 사람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끝낸다: ‘슈뢰딩거(Schrödinger) 자신은 관찰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통상적인 해석과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자신이 불연속의 요소를 도입하려는 의도를 지녔는지에 관하여 반대 제안을 하지 않는다.’ (고유값[eigenvalues]은 제안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슈뢰딩거(Schrödinger)는 두 가지 답변을 받는다: 첫 번째 답변은 양자도약에 대한 그의 부인은 원자들이나 다른 불연속들(discontinuities)’에 대한 부인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두 번째 답변은 양자도약이 유명하거나, 혹은 오히려 악명이 높은 가능한 것에서 실제적인 것으로 천이(transition)’다시 말해서,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동일하다고 제안한다.

나는 이 붕괴를 오래전에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75절에서 토론했고, 지금은 이 책의 8절에서 다시 토론했다. 물론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a wave packet)는 아주 별안간 발생할 수 있다; 심지어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75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초광속의(super-luminal) 속도로 발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물리학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초기조건을 (혹은 p(a,b)에서 새로운 b를 사용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이다.

매우 두드러진 것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자신이, 동일한 논문에서, 붕괴는 양자 효과가 아님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그것은 깁스(Gibbs)의 열역학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잠재적인 것에서 실제적인 것으로의 천이(transition)의 결과이라고 그가 말하기 (27) 때문이다. 그리하여 슈뢰딩거(Schrödinger)에 대한 그의 답변은, 양자도약이 있다고전 이론에 양자도약이 있다와 꼭 마찬가지로 주장에 해당한다.

이 답변들은 양자도약에 대한 증거가 실제 없는 듯이 보인다고 강력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슈뢰딩거(Schrödinger)가 그렇게 말할 때 왜 슈뢰딩거(Schrödinger)를 공격하는가?

문제를 경향 해석의 관점에서 우리가 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한 가지 요점에서 다소 더 분명해진다. 먼저 불확정 원리 때문에 (시간 및 에너지와 관련하여) 오래된 의미에서 양자도약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 번째로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는 하이젠베르크(Heisenberg)가 뭐라고 말하든 틀림없이 양자도약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군인들과 동전들도 양자도약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그리고 이것은 경향 해석의 결과이다 양자론은 시간에서의 동력학적(dynamical) 과정들을 기술(記述)하는 이론이 아니고 양자론은 다양한 가능성들에게 무게를 부여하는 확률주의적 경향 이론이다. 그리하여 심지어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가 과정은 시간이 걸린다고 암시하지 않는 곳에서조차도 과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걸릴 것이다. 입자와 편광자(polarizer)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경우를 나는 염두에 둔다; 입자는 이 상호작용의 결과로 두 가지 상태 중 한 가지 상태로 도약하여편광자(polarizer)의 시각적 축에 수직이거나 나란하게 분극(polarized)된다. 이것은 예를 들어 디랙(Dirac) 의해서뿐만 아니라 란데(Landé) 의해서도 제안된다.

이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비록 내가 모든 것을 안다고 믿지 않을지라도) 대하여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임을 또는 심지어 이론의 결과임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상당히 분명하다. 이론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유일한 것은 이론에 대한 경향 해석에서 입자들이 상화작용을 할 때 두 가지 상태 중 한 가지 상태를 차지하는 어떤 경향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비교될 수 있는 과정들이 정말로 시간이 걸린다고 (광양자의 방사와 결합된 이유들과 유사한 이유들 때문에, -흡수 필터와의 상호작용과 같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하여 이 경우에도 양자도약이 있다고 이론은 암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이 슈뢰딩거(Schrödinger)가 말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그가 그것을 매우 더 낫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이론의 심층적 발전을 위하여 많은 다른 매우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기도 했지만.

 

 

14. 입자들은 있는가?

슈뢰딩거(Schrödinger)가 실제로 질의하고 싶어 했던 질문은 원자들은 있는가?’나 혹은 불연속은 있는가?’라고 제안함으로써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적절한 질문 양자도약은 있는가?’에 보른(Born)과 하이젠베르크(Heisenberg)가 대응하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이 제안들이 다소 회피적이고 슈뢰딩거(Schrödinger)에게는 공정하지 않음을 밝히려고 나는 노력했다.

그러나 제시된 질문이 수용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없다. 입자들이 있는가? 과거 25년 동안 발견된 원자, 전자, 광양자, 핵자(nucleons), 그리고 다른 입자들의 무리가 있는가? 답변은 틀림없이 자격을 갖춘 그렇다이다.

자격을 갖춘 그렇다를 통하여 의미되는 바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두 가지 다른 질문들을 구분해야 한다. 첫 번째 질문은 한 과학자나 또 다른 과학자가 입자들이 있다고 믿는지의 질문이다. 두 번째 질문은 입자들의 존재가 현재의 양자 이론적 형식주의에 관한 해석 속에 함축되어 있는지 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슈뢰딩거(Schrödinger)가 의심할 바 없이 입자들의 존재를 믿지만 그가 다른 것을 통하여 입자들을 설명하는 가능성과 그런 설명에 대한 필요성 모두를 본 양자 이론가들 중에서 최초의 이론가였다는 것이다. 전자들과 광양자들이 통상적으로 지칭되는 바와 같이 기초입자들이 일반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벽돌들로 여전히 생각되던 때 그는 그렇게 했다. 오늘날 우리는 입자라는 단어를 이것들이 파괴될 수 없다는 함축적인 의미와

함께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입자들이 제한된 생명을 지닐 것이라는 최초의 제안은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이론으로부터 유래했음은 잊혀서는 안 된다.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전혀 아니고, 아무도 자신의 이론이 모든 면에서 성공적이었다고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근본적인 입장은 입자들은 궁극적이 아니라 입자들을 제외한 다른 것으로 통하여 설명될 필요가 있다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이론은 최초이자, 근본적으로, 이런 방향으로의 유일한 시도이어서, ‘입자라는 용어의 새로운 의미가, 모든 것이 아니라면 매우 많이 그의 이론으로부터 근본적이거나 기초적이 아닌 입자들을 통하여 생각하는 방식을 우리가 배웠다는 사실에 빚을 지고 있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이론이 입자들과 입자들의 천이(transitions)들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는 듯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의 이론은 설명이 아마도 제공될 것이고 어떻게 설명이 아마도 제공될 것인지를 밝혔다. 정말로 이것은 우리가 이 분야에서 이론에 대한 접근방식을 통하여 소유한 모든 것이다.

슈뢰딩거(Schrödinger) 자신은 어떻게 자신이 불연속의예를 들어 입자들의 존재에 기인하는 불연속 - ‘요소를 도입할 의도인지에 관하여 반대 제안을 하지 않는다는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언급을 우리가 평가하고 싶어 한다면 이 모든 것은 기억되어야 한다. 정통 학파에 반대하는 반대의견에 관한 파울리(Pauli)의 언급을 우리가 평가하고 싶어 한다면 이 모든 것은 또한 기억되어야 한다. ‘반대의견이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반대의견은 결실이 없고 퇴행적인 [혹은 퇴보적인] 희망의 상태에 끼어있다... 슈뢰딩거(Schrödinger)가 속한 반대의견 집단은이라고 파울리(Pauli)는 서술하고 계속하여 파울리(Pauli)파동들은 입자들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입자의 개념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라고 서술한다. 나는 역설이 잘못 놓였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아무도 입자의 개념을 제거하고싶어 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그 개념이 궁극적이고 환원될 수 없는 물리학의 범주로 판명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고 여전히 믿는다. 정말로 파울리(Pauli)나 보른(Born)이나 정통성과 관련된 다른 구성원이 이것을 부인한다면 나는 놀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최초로 개방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불안정한 입자들의 가능성에 대하여 우리의 눈을 최초로 열게 한 것에 대하여 슈뢰딩거(Schrödinger)를 공격하는가? 어떤 일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 일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다.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내 자신의 의견을 간략하게 진술하면,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이론에 따라 입자들이 상당히 단순한 파동 구조들(‘파속[wave packets]’)인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이론이 너무 단순하고 입자 천이(transition)의 특성에 의하여 반증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 입자 구조들은 더 복잡하고 파속(wave packet)은 입자의 구조에 대한 기술(記述)로서보다는 결정하는 경향들로서 (아래에 설명되는 바와 같이)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물질에 관한 이것이나 다른 견해는, 조금이라도 옹호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진정으로 혁명적인 입자들에 관한 이론에 혜택을 입고 있다. (아래, 26참조.)

두 번째 질문에 입자들의 존재가 현재의 양자론에 대한 해석에 함축되어 있는지 대한 답변은 물론 선택된 해석에 의존한다. 보른(Born), 파울리(Pauli) 그리고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입자들의 존재가 정통적 해석이거나 코펜하겐 해석인 자기들이 수용하는 해석의 한 부분임을 그리고 자신들은 이 요점에서 슈뢰딩거(Schrödinger)와 다름을 암시한다. 나는 이것이 다소 놀랍다는 것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슈뢰딩거(Schrödinger)의 기고문 양자도약은 있는가?’에 관한 이 논란 이전에, 나는 이 문제에 관한 코펜하겐의 견해가 매우 다르다고 생각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원문은 for prior to this controversy over Schrödinger’s article ‘Are there Quantum Jumps?’ I should have thought that the Copenhagen view on this matter was very different인데 should have + thought[과거분사]는 과거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 쓰는 표현이므로 문맥상 I must have thought로 써야 할 것이다. 역자). 이 견해에 따라서 입자들과 파동들은 우리가 양자론적 형식주의를 적용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그리고 모든 적용은 필연적으로 고전적 모형들과 개념들을 사용해야 해서 필요한, 두 가지 종류의 그림들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했어야 했다 (이 문장의 원문도 I should have thought that, according to this view, particles and waves were nothing but two kinds of ‘pictures’ which we use in order to apply the quantum-theoretical formalism, and which are needed since every application must of necessity use classical models and ideas인데 should have + thought[과거분사]가 과거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 쓰는 표현이므로 문맥상 I must have thought로 써야 할 것이다. 역자). ‘입자들파동들에 대한 개념들은 그 개념들이 그런 고전적 개념들이라는 이유로만 사용된다. 그 개념들의 실체와 존재에 관하여 코펜하겐 해석은 이 질문은 질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채택했거나 적어도 답변은 입자들이나 파동들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될 것이고 입자들과 파동들은 우리가 존재할 모든 것에 관한 어떤 모습들을 (상보적 모습들) 기술(記述)하는 고전적 개념들일 따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바, 정통적 견해였다. 그러나 당신들은 알 수 없다.

(이 정통성은 정통성들이 통상적으로 그러한 것보다 훨씬 더 포착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주해[註解: exegesis]를 위한 성경은 없다; 그리하여 주해[註解: exegesis]는 심오한 정통성 자체 외부의 누군가에 의하여 시도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통적 주해[註解: exegesis]는 때때로 은밀한 방향전환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 견해에 반대하여, 슈뢰딩거(Schrödinger)가 원자들과 입자들을 파동 구조들로서 설명하려고 노력했을지라도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원자들과 입자들의 실제적 존재론을 매우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나는 생각했어야 했다 (이 문장의 원문도 As against this view, I should have thought that Schrödinger asserted with great force the real existence of atoms or particles, even though he tried to explain them as wave structures인데 should have + thought[과거분사]는 과거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 쓰는 표현이므로 문맥상 I must have thought로 써야 할 것이다. 역자). 탁자나 의자가 목재로 만들어진다고 말함으로써 내가 별개의 탁자들과 의자들의 존재를 부인했고 내가 목재와 사랑에 빠졌기때문에 내가 그렇게 했다는 (파동들을 향한 슈뢰딩거[Schrödinger]의 태도에 대하여 보른[Born]이 말하는 바와 같이) 비판에 내가 내 자신을 노출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빛의 파동이론에 관한 논란의 긴 역사 속에서 누군가가 이 이론을 주장한 사람들이 빛이 더 올바르게, 빛의 광선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에 헌신적이었다고 말했던 것을 나는 또한 기억할 수 없다. 슈뢰딩거(Schrödinger)가 입자역학에서 파동역학으로의 천이(transition)를 빛의 광선 이론으로부터 (기하 광학[geometrical optics]) 파동 이론으로의 천이(transition)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단계로서 설명했기 때문에, 사례는 완벽하게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 입자들이 있는가?’를 향한 현존하는 양자론의 다양한 해석가들의 태도를 나는 계속해서 조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에 나는 경향 해석의 관점에서 답변을 무엇이 될지를 간략하게 지적할 것이다.

답변은 이럴 것이다. 현재의 양자론은, 경향 해석으로부터 보면, 입자이론이다. 파동들은 입자의 개연적인 상태들, 즉 입자가 특정 장소에서 특정 운동량이 되거나 특정 운동량을 소유하는 확률이나 경향을 결정할 뿐이다; 군인의 무작위 걸음에서 파동들이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파동들은, 무작위 걸음 사례에서 파동들이 군인이 아닌 것처럼, 입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무작위 걸음 사례에서 파동들이 상황의 조건들에 혹은 전체 실험 장치에 특징적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양자론의 파동들도 그렇다.

그리하여 나는 파동들과 사랑에 빠졌을지라도 나는 내 자신이 입자 해석을 분명히 선호한다고 선언한다. 개념과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개념으로부터 배울 것이 매우 많다고 믿는 것 동시에 이 개념이 특정 문제 상황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 사이에서 나는 어떤 모순도 발견하지 못한다. 입자에 대한 슈뢰딩거(Schrödinger)의 파동이론은 유망하고 입자들에 관한 이론의 시작을 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현재의 이론은 입자이론으로서 매우 쉽게 해석될 수 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내가 입자들과 파동들의 이론이나 심지어 그 이원론과 희미하게 닮은 어떤 이론도 신뢰하지 않음을 나는 분명히 하고 싶다. 드 브로이(de Broglie)의 향도파(向導波: pilot waves)에 관해서, 향도파(向導波: pilot waves)는 경향들의 파동들로서 매우 잘 해석될 수 있다고 나는 제안한다.

 

15. 위치공간(Position Space).

입자에 대한 개념은 궁극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것에 대한 개념에서 변하고 설명될 필요가 있는 것에 대한 개념으로 변했음을 우리는 보았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입자라는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하는가? 질문은 중요하지 않지만, 입자들에 대한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소위 불신이 일으킨 항의들을 고려하면 완전히 흥미롭지 않은 것은 또한 아니다.

입자들에 관하여 말하는 강력한 경향은 (내가 공유하는), 입자는 공간에 연결된 자취(track)가 원칙적으로 자체의 다양한 위치들을 통하여 추적될 공간의 작은 지역에서 어느 순간에 위치한 것이라는 직감적인 개념과 물론 연결된다. ‘공간으로써 나는 여기서 운동량 공간이나 공간-시간이나 어떤 추상적인 공간을 의미하지 않고 평범하거나, 우리가 말할 것과 같이, 위치공간을 의미한다.

윌슨의 안개상자(Wilson’s cloud chamber) 혹은 파월 사진건판 더미(Powell stack of photographic plates)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 안의 입자 자취(a particle track)는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위치공간에 있는 종류의 자취(track)이다; 그리하여 윌슨 상자(Wilson chamber)와 파월 더미(Powell stack)는 본질적으로 위치공간의 부분들이다.

 

입자들에 대한,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양자역학적 체계들에 대한 모든 우리의 실험들은 위치들의 측정을 해석하는 데 놓여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흥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주장은, 잠시만 생각해도 분명해질 것과 같이, 심지어 사소하기도 하다. 속도나 운동량에 대한 모든 측정들은 본질적으로 위치의 측정을 해석하는 데 놓여있다. 이것은 그 속도들을 우리가 시각을 통하여 평가할 수 있을 달리기선수들이나 자동차나 항공기에 관해서도 심지어 사실이다; 그것들의 속도를 우리가 측정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 위치들을 측정하거나, 속도계의 바늘의 위치를 읽어낼 것이다. 원자입자들이나 원자보다 작은 입자들에 관해서도 상황은 정확하게 동일하다. 운동량을 측정하면서, 우리는 위치를 측정한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한 가지 위치 이상이 필요하다.

이것은 분광기(分光器: spectroscope)를 사용하는 어떤 방법에 관해서도 사실인데 이유인즉 그 방법은 자체의 빈도나 운동량을 지시하는 광양자의 최종적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우리가 필터를 사용할지라도 그러하다: 본질적인 요점은 입자가 필터를 통과했다는 것인데, 그 요점은 위치공간에서 입자의 위치에 관련되는 문제이다.

보어(Bohr)는 내가 지적하고 싶은 요점에 매우 근접한 것을 말했다. 왜냐하면 그가 서술하는 바, ‘... 원자 현상들에 대한 기술(記述)에서 시-공 개념의 사용은 사진건판 위에 표시들이나 안개상자(cloud chamber) 안의 이온 주변에 물방울들을 세우는 것과 같은 유사한... 증폭 효과들을 언급하는 관찰행위들의 기록에 국한된다는... 것이 이해되어야 한다이기 때문이다. 보어(Bohr)의 언급은, 심지어 위치공간 안의 입자 자취의 한 부분에 대한 관찰, 자체의 겉보기에 직감적인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찰행위들과 같이, 실제로 이론에 비춘 해석이라는 시기적절한 지적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입자의 운동량에 대한 측정은 해석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더 높은 질서의 해석. (우리의 모든 측정행위들은 매우 높은 질서의 해석들이라고 지나가는 길에 언급될 것이다; 정말로 매우 높아서 그 해석들이 높은 질서의 해석들인지 낮은 질서의 해석인지에 관하여 우리는 흔히 심지어 해석들을 비교할 수 없다.)

운동량에 대한 모든 측정들이 위치에 대한 측정들로 거슬러 간다는 사실은, 다음 장에서 내가 설명할 것과 같이,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소위 불확정성 원리(Principle of Indeterminacy)’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상당히 중요하다.

 

 

 

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 - 1장 양자론과 양자론의 해석 이해, 2장 양자론의 객관성.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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