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 - 서론, 서문 1982년 - 양자이론에 대한 사실주의적이고 상식적인 해석

이윤진이카루스 2014. 3. 8. 13:36

 

 

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

(QUANTUM THEORY AND THE SCHISM IN PHYSICS)

 

R. 포퍼

 

 

후기(後記: POSTSCRIPT)에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까지

 

W. W. 바틀리(Bartley) III세 편집

 

 

 

 

 

 

존 에클스(JOHN ECCLES)

피터 메더워(PETER MEDAWAR)에게

 

 

 

 

 

 

 

 

 

 

 

 

 

 

 

 

 

 

 

 

 

 

 

 

목차

 

편집자 서문 iv

감사의 말 xv

저자의 기록, 1982xvii

 

서론

 

서문 1982: 양자론에 대한 사실적이고 상식적인 해설에

관하여 I

 

서문: 관찰자없는 양자역학 35

1. 양자론과 관찰자의 역할.

2. 이론 대() 개념.

3. 13가지 논문.

4. 관찰 없는 파속(波速: wave packet)의 붕괴.

5. 에버렛(Everett)다중세계(Many-Worlds)’ 해석

 

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

 

I . 양자론과 양자론 해석 이해하기 97

1. (93) 물리학에서의 균열.

2. (94) 해석의 중요성.

3. (95) 주관적 확률, 통계적 확률 및 결정론.

4. (96) 통계역학의 객관성.

 

절의 번호매기기에 대한 주석. 후기(後記: Postscript) 세 권 각각의 절은 1절로 시작하여 연속적으로 번호가 매겨졌다. 원래의 절 번호는 전체적으로 후기(後記: Postscript) 안에 있는 절의 순서를 가리키는데 목차의 별표가 붙은 괄호 속에 제시된다. 편집자.

 

 

5. (97) 통계역학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

6. (98) 두 가지 해석 사이에서 오고가기.

 

II . 양자론의 객관성. 119

7. (99) 양자론의 객관성: 상자.

8. (100) 혼란의 근원: ‘파속(波速: wave packet)

붕괴’.

9. (101) 양자론의 수학적 형식주의가 지닌 미완성.

10. (102) 난보(亂步: random walk)잠재에서

실제로의 천이(遷移: transition)’.

11. (103) 미립자, 파동 및 경향해석.

12. (104) 경향해석의 부분적 예견.

13. (105) 양자도약(Quantum Jumps)이 있는가?

14. (106) 미립자가 있는가?

15. (107) 위치공간(position space).

 

III . 양자론의 역설 해결을 향하여 144

16. (108) 불확정성(Indeterminacy)인가 산란(Scatter)인가?

17. (109) 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y)

로젠(Rosen)의 실험.

18. (110) 이중슬릿 실험(The Two-Slit Experiment).

19. (111) 논란의 소지가 된 것에 대한 변명.

 

IV . 형이상학적 결어 159

20. (112) 형이상학적 개념들, 형이상학적 프로그램들과

물리학의 역사.

21. (113) 균열, 프로그램 및 형이상학적 꿈.

22. (114) 대응논증(Correspondence Argument)

의하여 반증된 고전적 결정론.

23. (115) 비결정론과 소위 파속(波速: wave packet)

붕괴’.

24. (116) 고전적 필름을 경향 필름으로 대체하기.

25. (117) 양자론적 비결정론의 개략적 모형.

26. (118) 물질과 장(: Field).

27. (119) 열려있는 문제들.

28. (120) 결론.

 

참고문헌 추가, 1989212

색인 213

저자에 관하여 227

편집자에 관하여 230

 

목차의 쪽수는 원서의 쪽수이고 번역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역자.

 

 

 

 

 

 

 

 

 

 

 

 

 

 

 

 

 

 

 

 

 

 

 

 

 

편집자 서문

 

후기(後記: Postscript) 및 후기의 역사.

이 책 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Quantum Theory and the Schism in Physics)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 대하여 오랫동안 기대되었던 칼 포퍼 경의 저서인 후기(後記: Postscript)의 세 번째 책이다. 이 책은 약 25년 전에 쓰였지만 이전에 발간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처음에 쓰였을 때만큼 시기적절한 상태이다: 이 책은 물리학에 대한 현대적 연구가 낳은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 중 몇 가지 전제에 도전한다; 그리고 이 책은 또한 새로운 우주론을 개괄한다.

후기(後記: Postscript)의 다른 부분들과 (지금은 모두 발간되고 있다) 함께, 이 책은 주로 1951-56년 사이에 쓰였는데 당시 포퍼가 최초로 출간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1934)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로서 영어로 번역되고 있었다.

후기(後記: Postscript)의 다른 서책들은 원래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부록들의 한 부분이었는데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포퍼는 자신의 최초 저서의 개념들을 수정하고, 확대하고, 발전시키겠다고 제안했다. 이 부록들 중 몇 가지는 실제로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1959년에 발간되었을 때 그 책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부록의 한 무리가 자체의 생명을 띠어서, 점차 길이에서 원본인 Logik der Forschung을 훌쩍 넘는 별개의, 통합된 저서가 되었다. 이 새로운 저서를 후기: 20년 후(Postscript: After Twenty Years)로 불리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후속편이나 자매편으로서 출간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1956-57년에 활자화되어 교정쇄에 들어갔다.

그러나 발간이 기대되던 몇 개월 안에 그 계획은 서서히 중단되었다. 자신의 지적(知的) 자서전인 끝나지 않은 탐구(Unended Quest)에서 포퍼 경은 이 교정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교정은 악몽으로 변했다.... 그때 나는 두 눈에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 후 나는 얼마동안 교정을 다시 시작할 없었고 결과적으로 후기(後記: Postscript)는 여전히 발간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 자신은 이 기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양쪽 눈의 망막을 몇 번 분리하는 수술을 그가 받은 후 곧 입원 중이던 포퍼를 방문하러 비엔나로 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회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기(後記: Postscript)에 관하여 작업을 했다. 오랫동안 그는 볼 수 없어서 우리는 그가 시력을 읽을까봐 크게 걱정했다.

그가 다시 시력을 되찾자, 많은 작업이 후기(後記: Postscript)에 관하여 이루어졌다: 몇 가지 절이 그 책에 추가되었고 교정쇄에 수 천 가지의 교정이 가해졌다. 그러나 다른 저서에 대한 압박이 당시 너무 컸다; 그래서 실제로 1962년 이후에는 그 저서에 추가된 것은 없었다.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을 발간한 (1963) 이후, 그 다음 매우 많은 책을 저술한 10년 동안 포퍼는 세 권의 새로운 책을 저술하여 발간했다: 많은 논문뿐만 아니라 객관적 지식: 진화적 접근방식(Objective Knowledge: Evolutionary Approach) (1972), 끝나지 않은 탐구(Unended Quest) (1974년 및 1976), 그리고 (존 에클스와 공저) 자아와 자아의 두뇌(The Self and Its Brain) (1977). 이것들은, 지금은 유명한 그의 객관적인 사고 이론이 (그리고 제1, 2, 및 제3 세계에 대한 이론) 전개되고, 그의 접근방식이 생물학에까지 확대되었던 시기와 저술들이었다.

그러는 동안, 물리철학에서 포퍼 경의 저술의 정점을 대표하던 후기(後記: Postscript)는 발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읽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포퍼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과 동료들 대부분은 이 저서를 연구했고, 몇몇은 몇 년에 걸쳐 교정쇄본을 지니고 있었다. 이 책이 마침내 완성되어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게 되자, 이 책을 알고 있었고 이 책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던 내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크게 만족한다.

당시 발간을 목적으로 편집되던 원본은 본질적으로 1962년에 존재하던 원본이다. 표시된 바와 같이 몇 곳에서는 제외하고, 크게 변경된 것은 없다. 포퍼의 제자들과 동료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통하여, 역사적인 특성을 당시 획득한 구성된 후 약 25년이 지나고 원본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가 저술된 후 45년이 지났다 저서에 대하여 이것은 합당한 대접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많은 요점들이 오늘날에는 다르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완전히 수정하면 발간은 무한히 연기되었을 것이다.

편집을 하면서 원본의 여러 부분들이 다양한 해석본들을 합쳐서 포함되었는데, 왜냐하면 그 다양한 해석본들이 여러 해에 걸쳐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교열;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참고문헌 주석 및 다른 주석. 포퍼 자신이 추가한 몇 가지 부분은 분명하게 표시되었다: 그 추가사항들은 괄호 안에 제시되어 별표로 표시되었다:. 내 자신이 삽입한 간단한 편집자 주석과 참고문헌 주석 역시 괄호 안에 넣었고 편집자(Ed)’라는 약어를 썼다. 여기서 나는 일반적으로, 포퍼의 저서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dkenntnistheorie)(1930-32년에 저술되어 1979년에 발간됨) 편집자인 트로엘스 에거스 한센(Troels Eggers Hansen)이 확립한 관행을 따랐다. 포퍼는, 우리가 지난 2년 동안 여러 장소에서 하이델베르크, 구엘프(Guelph), 토론토, 워싱턴 D. C., 슐로스 크론베르크(Schloss Kronberg), 그리고 버킹엄셔의 그의 자택에서 - 개최했던 일련의 회합에서 편집 작업을 점검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모든 서책에 새로운 서문을 추가했고, 새로운 발문(跋文)을 두 번째 서책에 추가했다.

내가 제안해서 한 가지 주요 사항이 변경되었다. 이 방대한 저서를 한 권으로 발간하기는 가능했을 테지만 많은 철학도들이 다루기에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다. 후기(後記: Postscript)의 여러 부분들이 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Quantum Theory and the Schism in Physics)을 포함하여 철학자들과 철학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현대과학과 현대과학의 해석 및 우주론에 관심을 지닌 많은 일반인들에게도 큰 흥미와 관심을 일으킬 것이다.

후기(後記: Postscript)의 이 부분들 또한, 전체적으로, 서로 독립적이다. 이로 인하여 나는 저술이 세 권으로 분리되어 합치되는 형태로 발간되어 전체를 후기(後記: Postscript)로 하자고 제안했다. 잠시 주저한 후에, 포퍼 경은 이 제안에 동의했고, 또한 내가 세 권에 대하여 제안한 제목에도 동의했다.

그리하여 후기(後記: Postscript)는 다음과 같이 발간되고 있다: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I )

열린 우주: 비결정론을 위한 논증(The Open Universe: An

Argument for Indeterminism) (II )

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Quantum Theory and the

Schism in Physics) (III)

 

이 서책들은 개별적으로 읽힐 수 있을지라도, 독자는 이 서책들이 연결된 논증을 구성하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후기(後記: Postscript)의 각 권은 지식에 대한 주관주의적이거나 관념론적인 접근방식들 중 한두 가지를 공격한다; 각 권은 지식에 대하여 사실주의적이어서 객관적인 접근방식의 한 가지 이상의 요소들을 구축한다.

그리하여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라고 이제 제목이 붙은 책에서, 포퍼는 귀납법을 추적하는데 그는 귀납법4가지 단계들을 통한 주관주의와 관념론의 주요 근원으로 본다: 논리적, 방법론적, 인식론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단계. 그는 자신의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이론을 전개하고 과학적 견해와 비-과학적 견해 및 사이비-과학적 견해를 서로 구획설정을 하면서 그 효과를 기록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입증이론(theory of corroboration), 전통적인 철학의 주관적 확실성이나 객관적 정당화에 이론을 부회하지 않고 다른 이론에 대하여 한 가지 이론이 합리적으로 선호될 수 있다고 표현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제시한다. 첫 번째 서책에서 포퍼는, 버클리(Berkeley)와 흄(Hume)과 칸트와 마흐(Mach)와 러셀(Russell)과 같은 철학에서 역사적인 인물들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토론하는데 그 인물들은 주관주의적 전통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리고 포퍼는 동시대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비판에 상세한 답변을 한다. 이 책에서 포퍼는 또한, 확률이 불충분한 지식의 주관적인 상태를 측정한다는 가정에 뿌리를 둔 해석인 확률계산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공격한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포퍼는 확률계산에 대한 객관적 해석으로서 빈도해석을 옹호했다. 이제 그는 또한 빈도해석을 비판한다; 그리고 빈도해석 대신에 포퍼 자신이 주창하는 경향 이론을 과거 20년 동안 많은 옹호자들을 낳은 해석 포퍼는 상세하게 제시한다. 이 개념들과 논증들은 나머지 서책들 안에 적용되어 전개된다.

열린 우주: 비결정론을 위한 논증(The Open Universe: An Argument for Indeterminism)에서, 포퍼는 결정론의 과학적형태 및 형이상학적 형태 모두를 비판하고, 고전물리학은 흔한 견해와 반대로 양자물리학과 마찬가지로 결정론을 전제하지도 않고 암시하지도 않는다고 논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결정론이, 결정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지속적으로 많은 현대 양자이론가들의 저술에서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포퍼는 발견한다. 물리학 안에서 확률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수행하는 지속적인 역할을 포퍼는 추적하여 이 형이상학적인 결정론적 전제까지 간다.

첫 번째 서책과 두 번째 서책 사이에는, 그 서책들이 상호간에 관심을 쏟는 자유, 창조성, 그리고 인간의 합리성에서 깊은 관련이 있다.

첫 번째 서책은. 정당화와 합리성에 대한 자체의 고찰에서, 비판의 한계에 관한 그것과 함께 합리성의 한계 주관주의적이고 회의적인 주장을 반박한다. 그런 한계가 존재한다면, 진지한 논증을 무익할 것이다; 그리고 진지한 논증의 출현은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두 번째 서책은, 결정론을 다루면서, 우리가 지닌 합리성이 인간지식의 미래의 성장과 관련하여 제한되어 있다는 주장을 지지한다. 그런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지한 논증은 무익할 것이다; 그리고 진지한 논증의 출현은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하여 포퍼는 인간의 이성이 비판과 관련해서는 무제한이지만 인간의 이성이 지닌 예언하는 능력과 관련해서는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제한의 결여와 제한 모두는, 각각의 위치에서, 인간의 합리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데 필수적임을 밝힌다.

 

2. 후기(後記: Postscript)의 이 서책.

후기(後記: Postscript)는 전체적으로, 그리고 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Quantum Theory and the Schism in Physics)은 특수하게, 매우 우주론적이다. 칼 포퍼 철학의 기본적 주제가 중요한 것이 무(: nothing)로부터 유래할 수 있다는 것 물리학에서 근거를 얻는 것은 이 마지막 서책에서이다.

그런 개념이 몰이해와 엄한 저항에 부딪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데 이유인즉 그런 개념은 우리의 철학적 전통의 지배적인 좌우명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어떤 것도 창조되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다.

()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Ex

nihilo nihil fit).

 

포퍼 철학의 주요 개념들과 후기(後記: Postscript)의 서책 세권 모두의 주요 주제들은 모두 무()로부터 중요한 것이 유래할 수 있다는 기본 주제와 관련된다. 과학적 이론들은 새로운 형태들을 우주로 도입하며 동시에 관찰로 환원될 수 없다: 과학적 연역과 같은 것은 없다. 미래는 현재나 과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물리학에는 비결정론이 있다; 그리고 역사에는, 그 사실로 인하여, 비결정론이 있고, 또한 새로운 과학적 개념들이 역사와 그리하여 물리적 우주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생물학에는 정말로 출현이 나타난다. 가치는 사실로 환원될 수 없다. 정신은 물질로 환원될 수 없다. 언어의 기술적(記述的) 및 논증적 수준은 표현적 및 신호적 수준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의식(consciousness)은 진화(進化: evolution)의 주요소이고, 의식이 만들어낸 것들은 확정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열린사회열린 우주에서 중요하다.

의식과 의식이 만들어낸 것들이 그렇게 중요한 철학자가, 물리학의 핵심에 의식을 도입하기 위하여, 자신의 철학적 저술 핵심에서 그 시도들을 과거 50년 동안 최고의 물리학자들 다수가 실행한 -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괄목할만한 일이다.

그렇다면 지식의 역사에 대한 그리고 풍부한 지식으로 벌이는 논쟁이 낳는 역설에 대한 전문가가, 포퍼가 양자 물리학에서 바로 현대 논쟁의 중심부에 공격을 가하는 곳인 이 서책에서, 자신을 위하여 준비해둔 희귀한 즐거움의 가치를 알지 못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진지한 물리학자들이 귀납주의자이고 주관주의자이고 실증주의자이고 도구주의자인 때에 그리고 그들이 이 입장들을 물리학에 근거시키려고 노력할 때 포퍼는 물리학에 대한 해석과, 정말로 전체 우주론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는데 그 전체 우주론에 대한 해석은 연역주의적이고 사실주의적이고 반()-실증주의적이고 반()-도구주의적이다. 포퍼의 삶을 그런 물리학자들의 세대 한 가운데 두는 것보다, 포퍼와 같은 철학자의 개념들을 시험하는 더 엄격한 방식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자신의 개념들을 만들어 그 개념들을 시험하고 형성하여, 현대적 주제들 중에서 가장 난해한 주제들을 가장 추상적으로 만들어내는 이론가들의 실제적이고 적당한 반론들에 대처하는 과거 반세기에 걸친 그의 욕구로 인하여 포퍼의 개념들은 정교한 명징성을 지니는 데 도움을 받았다.

그러한 포퍼의 욕구로 인하여 포퍼의 개념들은 과학적 중요성과, 현대의 철학적 사고에 특징적이지 않은 문화적 상관성을 또한 띤다.

편집자는 이 서책들에 대한 편집 작업에 대한 충분한 지원에 관하여, 미국학술단체협의회(The American Council of Learned Societies)와 미국철학협회(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의 조언과 지원에 대하여 도날드 T. 캠벨(Donald T. Campbell) F. A. 폰 하이에크(F. A. von Hayek) 교수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싶다. 편집자는 또한 편집자의 비서인 낸시 아티스 사도야마(Nancy Artis Sadoyama)에게, 헌신적이고 지속적인 협조에 대하여, 감사하고 싶다.

 

 

 

 

 

 

 

 

 

 

감사의 말

 

나는 이 기회를 통하여, 그의 확고한 관심이 나에게는 커다란 격려가 되었기에, 나의 동료 존John W. N. 왓킨스(John W. N. Watkins)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는 이 서책의 원고본과 교정쇄를 읽고 개선을 위하여 가장 도움이 되는 제안들을 했다. 내가 이 후기(後記: Postscript), 원래 계획된 바와 같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부록들로서보다는, 독립된 저서로 출판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제안을 받고서였다. 그러나 저서의 완성에 관하여 이 제안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저서의 개념들에 대한 그의 관심이었다.

나는 또한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공동-번역자인 줄리어스 프리드(Julius Freed) 및 란 프리드(Lan Freed) 박사에게 감사하고 싶은데 그들은 교정쇄 대부분을 읽고 교정쇄의 문체를 개선하기 위하여 많은 제안을 했다. [두 분 모두 책이 발간되기 여러 해 전에 사망했다. 편집자.]

조지프 아가시(Joseph Agassi), 이 책이 서술되는 기간 동안, 먼저 나의 연구 제자였고 나중에 나의 연구 조교가 되었다. 나는 거의 모든 절()을 그와 함께 상세하게 토론했는데 매우 흔하게, 그의 충고를 토대로, 나는 한두 가지 서술을 확대하여 전체를 새로운 절로 또는 한 가지 경우에, 전체를 새로운 부()탄생시켰다. [그 부<>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의 제 2부가 되었다.] 나에게는 그의 협조가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였다.

나는 또한 런던정경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에 감사하고 싶은데 그 대학으로 인하여 나는 아가시(Agassi) 박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캘리포니아의 스탠포드 대학의 행동과학 고등연구소(the Center for Advanced Study in the Behavioral Sciences)(포드 재단[Ford Foundation]) 감사하고 싶은데 그 연구소는 195610월부터 19577월까지 이 책의 교정쇄에 대한 작업을 내가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아가시(Agassi) 박사가 이 기간 동안에 나를 돕도록 했다.

 

버킹엄셔(BUKINGHAMSHIRE), (PENN), 1959

 

 

 

 

W. W. 바틀리(Bartley), III세 교수는 나의 제자였고 나중에 1958-63년까지 런던정경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의 동료 교수였으며 1960-62년 동안 그는 이 책에 관하여 나와 긴밀하게 협력하였다. 1978년에 그는 친절하게도 후기(後記: Postscript)의 편집자로서의 활동을 맡아주었다. 나는 그의 협조와 이 힘든 역할을 맡은 데 대하여 감사한다. 나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많은 빚을 졌다.

사이사이에 이 후기(後記: Postscript)에 대하여 나와 작업을 했던 몇몇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알랜 E. 머스그레이브(Alan E. Musgrave),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 아르네 F. 피터슨(Arne F. Petersen), 톰 세틀(Tom Settle), 그리고 제레미 셔머(Jeremy Shearmur)에게 기쁜 마음으로 또한 감사한다. 이들 중에서 데이비드 밀러와 아르네 피터슨은 1970년 이전 여러 기간에 두 분 모두가 이룩한 엄청난 양의 작업 때문에 특별히 언급되어야 한다.

런던정경대학은 연구조교를 지명함으로써 이 전체 여러 해 동안 지속적으로 나는 도왔다. 1969년 내가 은퇴한 이후 13년 동안 너필드 재단(Nuffield Foundation)의 기금으로 나를 지속적으로 도왔는데 나는 너필드 재단에도 감사를 표하고 싶다. 이런 조치에 주로 역할을 맡은 사람은 나의 친구이자 후임교수인 존 왓킨스(John Watkins) 교수였다; 런던정경대학 총장인 고() 월터 애담스(Walter Adams) ; 그리고 현재 총장인 랠프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 교수, 나의 저술에 대한 이 분들의 따뜻한 우정과 큰 관심에 나는 큰 빚을 졌다.

후기(後記: Postscript)1950년대에 발간되었더라면, 나는 그 책을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에게 헌정했을 것이다: 바틀리 교수는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들어있는 편지 한 통이 맥매스터 대학(McMaster University)의 러셀 문서보관소에 존재한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후기(後記: Postscript)(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번역과 함께) 내가 보기에 1954년에 거의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점을 언급하겠다.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1934년 발간을 언급하면서 이 책의 원래 제목인 후기(後記): 20년 후[Postscript: After Twenty Years])’를 선택한 것은 그 때였다.

 

버킹엄셔(BUKINGHAMSHIRE), (PENN), 1982

 

 

 

저자의 주석

 

 

간혹 중단되었지만 이 책은 30년이 훨씬 넘게 저술되고 있었다. 이 책은 물리철학에 관한 책이고, 물리학은 이 기간 동안 (저자가 변한 것처럼) 변했다. 결과적으로 이 책에는 두드러진 몇 부()가 담겨있다. 이 주석에는 독자로 하여금 그 두드러진 부()들을 안내하려는 통과시키려는 저자의 노력이 담겨있다.

97쪽에서 마지막까지의 주요 부분은 19572월의 교정쇄 상태 그대로 인데 몇 가지 사소한 문체 변경사항과 몇 가지 참고문헌과 각주가 첨가되었다.

이 주요 부분 앞의 것은 서론(Introductory Comments)’이라고 지칭된다. 그 서론에는 1966년에 쓰인 논문뿐만 아니라 (1981년에 추가사항이 서술되었다) 1980-81년에 쓰인 몇 편의 논문이 포함된다. 이것들은 나의 견해들이 나중에 발전한 것들을 소개하려는 몇 가지 노력이다.

이 발전한 것들은, 부분적으로, 옛 개념들을 단순화한 것들이다 (특히

서문 1982년의 IX 절과 같은 것); 부분적으로 그 단순화한 것들은 소위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이라는 양자역학의 정통성에서 변하는 분위기에 대한 , 더 정확하게는 그 분위기에 반대하는 반론들이다. 우리는 다음 기간들을 구분할 것이다:

1927-1932. 최초의 새로운 입자들과 (실제로 양자역학이 물질의 전자기 이론의 정점으로서 보일 수 있는 기간의 종말을 의미했던) 함께 몇 가지 의심이 일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끝이었다는 양자역학이 완벽했다주장의 불합리성을 분명하게 알았다. 이로 인하여 EPR(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y] 그리고 로젠[Rosen]의 논문), 양자역학의 완벽성을 주장하는 보어(Bohr)의 답변이 나타났다.

1936-1948. 그 최종적 주장은 파울리(Pauli)에 의하여 폐기된다, 보어(Bohr)EPR에 대한 답변을 고집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원격작용을 암시한다는 주장을 (1948Dialectica에 발표된 짧은 논문에서) 제시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48-1964. 새롭게 실험을 통하여 발견된 것들로 인하여 (이론적 발전과 완전히 일치되지는 않았다) 그 최종적 주장이 폐기되었다. EPR은 데이비드 봄(David Bohm)에 의하여 다시 설명되지만 그와 달리 많이 기억되지는 않았다.

1964-1981 J. S. (Bell), 양자역학이 원격작용을 암시한다는 아인슈타인의 발견에 비추어 EPR 실험을 다시 설명한다. 새로운 실험들, 특히 아스페(Aspect)의 실험은 원격작용을 확인하는 듯이 보인다.

이것에 대한 내 자신의 답변은 이렇다: 실험들이 올바르게 해석된다고 나는 완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실험들이 올바르게 해석된다면, 우리는 원격장용을 수용해야 할 따름이다. 나는 (J. P. 비지에[Vigier]와 함께) 이것이 물론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것이 사실주의를 흔들거나 심지어 건드릴 것이라고 잠시 동안도 생각하지 않는다. 뉴튼과 로렌츠(Lorentz)는 사실주의자였고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을 수용했다; 그리고 아스페(Aspect)의 실험은 로렌츠 변환(Lorentz transformations)에 대한 로렌츠와 아인슈타인의 해석 사이에서 최초로 결정적인 실험일 것이다.

사실주의는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사실주의는 객관성과 연결되어 있고 또한 확률이론에서도 그렇다. 이 관련성은 경향해석을 낳는다. 사실주의는 합리주의와, 인간 정신의 실제성과 인간 창조력의 실제성과 그리고 인간의 고통의 실제성과 연결되어 있다.

 

 

 

 

 

 

 

 

 

 

 

 

 

 

 

 

 

 

 

 

 

서론(INTRODUCTORY COMMENTS)

 

 

 

 

 

 

 

 

 

 

 

 

 

 

 

 

 

 

 

 

 

 

 

 

 

 

서문 1982: 양자론에 대한 사실주의적이고 상식적인 해석에 관하여

 

우주에 대하여 일관적이고 이해 가능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이 짊어진 커다란 임무이다. 모든 과학은 우주론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문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부분들로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지닌 지식을 포함하여 그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세계를 이해하려는 이 노력에서, 물리학은 스스로 상상적 창조성과 경험에 대한 개방성을 훌륭하게 결합하여 근본적인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이것은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고 영원히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화학의 세계가 나타나기 오래 전의 그리고 생물학의 세계가 나타나기에는 훨씬 더 오래 전의 물리학의 세계처럼 보인다.

오늘날, 물리학은 위기에 처했다. 물리이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물리이론은 부단히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며, 물리이론은 새로운 문제들뿐만 아니라 오래된 문제들을 해결한다. 그리고 현재 위기의 한 부분은 그 위기 부분에 대한 근본적인 이론들의 거의 영구적인 회전 내 견해로 여하한 확립된 과학(mature science)의 정상적인 상태이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에 대하여 또 다른 면이 또한 있다: 그 또 다른 면은 이해(understanding)의 위기이다.

우리의 이해와 관련된 이 위기는 대략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만큼 오래되었다. 그리하여 이 위기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초판본보다 조금 더 오래되었다. 후기(後記: Postscript)의 이 부분에서 나는, 이 오해에 대한 위기의 근저를 이루는 것을 설명하려는 의도가 있는 몇 가지 제안을 다시 하려고 노력했다.

 

I

 

나의 견해로, 위기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 일에 기인한다: (a) 물리학으로의 주관주의 침투; 그리고 (b) 양자론이 최종적이어서 완벽한 진리에 도달했다는 생각의 승리.

물리학에서 주관주의는 몇 가지 큰 오류까지 추적될 수 있다. 한 가지 오류는 마흐(Mach)의 실증주의나 관념론이다. 그것은 러셀(Russell)을 통하여 영국까지 (버클리[Berkley]에 의하여 창시되었던 곳) 퍼졌고 젊은 시절의 (1905)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독일까지 퍼졌다. 이 견해는 40대의 아인슈타인에 (1905) 의하여 배척되었고 성숙해진 아인슈타인은 (1950) 크게 후회했다. 또 다른 오류는 확률계산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인데 그 해석은 훨씬 더 오래되었고 라플라스(Laplace)의 저술을 통하여 확률이론의 핵심적인 독단론이 되었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사실주의(realism)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 세계의 실체이다: 이 세계가 우리 자신과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사실; 우리가 지닌 최고의 가설에 따라서, 이 세계가 생명체가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세계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멸종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

나는 다양한 장소에서 사실주의를 지지하여 논증을 했다. 나의 논증은 부분적으로 이성적이고, 부분적으로 인신 공격적이고, 부분적으로 심지어 윤리적이다. 내가 보기에 사실주의에 대한 공격은, 지적(知的)으로 흥미롭고 중요할지라도, 특히 두 번의 세계대전과 그 전쟁들이 무자비하게 야기한 실제적인 고통 피할 수 있는 고통 이후에 완전히 수용불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현대 원자론에 양자역학에 근거한 사실주의에 반대하는 논증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실제성에 대한 기억에 의하여 침묵을 지켜야 한다. (현대 원자론과 양자역학에 대하여 전적으로 찬사를 보내고, 이 분야에서 일했고 지금 일하고 있는 과학자들에게 전적으로 찬사를 보내면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주의는 최초로 회의론에 의하여, 특히 데카르트의 어떤 논증들에 의하여 도전을 받았는데 데카르트는 회의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회의론으로부터 회의론이 지닌 가장 급진적이고 정말로 터무니없는 결론들을 도출하려고 노력했다. 사실주의는 그 다음에 버클리(Berkeley) 주교에 의하여 도전을 받았는데 버클리 주교는, 벨라르미노(Bellarmino) 추기경처럼, 과학이 진지하게 고려된다면 기독교를 대신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주관적 경험들을 특히 우리의 지각과 우리의 관찰 실증주의가 주장하는 바, 단지 우리의 정신적 구축물인 물리적 실체보다 더 안전하고, 더 분명하게 사실적인 것으로서 수용하는 철학인 관념론적 (혹은 심지어 실증주의적인) 출현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들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구축물을, 아직도 대체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실제적 세계에서 우리가 생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바라볼 수 있다.

자연과학에 대한 사실주의적 해석과, 우리의 과학이론은 단순히 자연에 대한 기술(記述)- ‘자연의 책을 편견 없이 읽는 것’ - 결과만이 아니라 우리의 과학이론은 오히려 인간 정신의 산물로 우리의 지성은 자체의 법칙들을 자연으로부터 도출하지 않고 우리의 지성은 자체의 법칙들을 자연에 부과한다는 통찰을 결합하는 최초의 위대한 시도를 우리는 칸트에게 귀속시킨다. 나는 이 탁월한 칸트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우리의 지성은 자체의 법칙들을 자연으로부터 도출하지 않지만 우리의 지성은 자체가 자유롭게 창조한 법칙들을 자연에 부과하려고 다양하게 성공하면서 노력한다.’

그리하여 이론은 우리가 발명한 것이고 우리 자신의 생각이다: 이것을 인식론적 관념론자들이 분명하게 보았다. 그러나 이 이론들 중 몇 가지는 너무 대담해서 실제와 충돌할 수 있다: 그 이론들은 과학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이론들이다. 그리고 그 이론들이 충돌할 때, 실체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어떤 것. 그리고 이것이 사실주의자가 옳은 이유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정보는 실체를 통하여 우리의 이론들을 배척하기 내 견해로 우리가 실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정보이다: 다른 모든 정보는 우리 자신이 만든다. 이것은, 우리의 이론들 모두가 우리가 지닌 인간적인 관점에 의하여 색깔이 칠해져 있지만, 우리의 연구가 계속됨에 따라 우리가 지닌 인간적인 관점에 의하여 점점 덜 왜곡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주의에 대해서는 - ‘과학적 사실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 사실주의에 대해서는 이만큼만 하자.

우리의 과학적 이론들은 우리가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것에, 다시 말해서 실체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 ‘자료에 근거해야 함을 과학적 사실주의가 의미한다는 잘못된 견해로 여전히 심지어 이론물리학자들 사이에 유행할지라도 1933년에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분명하게 배척된 견해 - 인하여, 이전에 흔히 그랬던 바와 같이, 과학에 대한 주관주의적이거나 실증주의적이거나 관념론적이거나 유아독존적 해석이 침투했다.

 

II

 

주관주의의 침투에 대한 두 번째 근원은 확률주의적 물리학의 발흥과 연결되는데, 확률주의적 물리학은 물론 많은 유명한 선배들이 있던 맥스웰(Maxwell) 및 볼츠만(Boltzman)과 함께 물질이론에 대하여 근본적인 중요성을 최초로 띠게 되었다.

이 새로운 확률주의적 물리학은 오랫동안 우리의 지식 결여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1930년대에도 그리고 아마도 더 길게, 가스 속의 모든 분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확률주의적 고찰이 물리학에 들어간다고 여전히 생각되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확률을 다양한 가능성 속에 귀속시켜야 했다; 통계역학의 기초인 방법; 문제의 입자의 모든 위치와 운동량을 우리가 알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확률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지식의 결여와 다른 한편에서는 확률주의적이거나 통계적인 물리학 사이에 연결이 이어졌다.

이 연결에 대한 전제는, 가령 1939년까지, 그리고 심지어 그 이후에도 과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보편적이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에 반대하여 그 전제를 옹호했는데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에서 나는 그 전제를 비판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1950년 한 토론에서 그 전제에 대한 옹호를 포기했다). 우리의 주관적인 지식결여 혹은 우리의 불확실성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한 이 견해는, 적어도 하이젠베르크(Heisenberg)불확실성 관계(uncertainty relations)’라고 불렀고 양자역학이 통계적 특성을 지닌 이유를 설명한다고 그가 생각했던 저 공식들에 대한 그의 초기 해석들에서 가장 중요했음이 밝혀질 수 있다. (이것을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특히 75절과 비교하라 [이 문장은 원문은 Compare with this L. Sc. D., especially section 75인데 withthis의 위치를 바꾸어야 어법에 맞는다. 역자].)

역사와 관련된 문제로서, 이 두 가지 요점들은 주관주의가 물리학에 침투한 것을 설명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함께, 두 가지 요점들은, 근본적이고 환원불가능하게 통계적인 물리학은 우리가 지닌 (주관적인) 지식에 대한 근본적이고 환원불가능한 장애물에 반대로 확실히 목표이지만 주체(the subject)가 알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장애물인 장애물 (불확실성 관계) - 의하여 설명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의하여 촉발되어, 사실주의를 실증주의적이거나 관념론적이거나 주관주의적으로 배척하게 되었다.

이 장애물의 객관성에 대한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를 야기했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 확률이 담당한 부분은 당시 다르게 보였다. 그리하여 양자물리학은 객관적으로 비결정론적으로 보였고, 확률은 객관적인 것으로서 보였다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그러나 역사와 관련된 나의 추측은, 당시 주관주의적 독단이 소위 코펜하겐 해석인 양자역학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 안에서 너무 깊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객관적 가능성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간헐적 언급도 (그 언급을 통하여 그는 내가 주장하는 경향과 매우 유사한 것을 의미했다) 해석에서 코펜하겐으로부터 주체(the subject)관찰자 제거하지 않았다; 또한 그 언급에는 그렇게 하려는 의도도 없었다.

이 이야기가, 부분적으로, 어떻게 그 커다란 양자 혼란이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에, 나는 이 이야기를 간단하게 개괄했다: 하이젠베르크의 소위 불확실성 관계, 적어도 오랫동안, 우리의 주관적 지식에 대한 한계로서 (19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에서 내가 하이젠베르크의 해석을 대체하려고 제안했던 저 객관적인 통계적 산란 관계[scatter relations]’로서 보다는) 해석되었던 이유; 그리고 불확실성 관계, 그 관계의 객관적인 면이 대두되었을 때, 그 관계가 측정되는 비존재에 기인하는 확실한 측정의 불가능성에 관한 서술로서 산란-없는(분산-없는[dispersion-free]) 양자 상태를 낳은 것의 불가능성에 관한 서술로서 대신에 여전히 해석되는 이유.

그리고 전체 용어사용법으로, 이론의 초기 기간에 도입되었는데, 인하여 또한 혼란을 점점 악화되었다.

 

III

 

물리학에서 현재 위기에 관한 또 다른 근원은, 양자역학은 최종적이고 완벽하다는 지속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코펜하겐 해석에 반대하는 나의 가장 강력한 이유는 그 해석이 궁극성(finality)과 완벽성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코펜하겐 해석은 혹은 더 정확하게, 보어(Bohr)와 하이젠베르크가 옹호했던 양자역학의 위상에 대한 견해 전적으로 단순하게, 양자역학은 물리학에서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초월되지 않는 혁명이라는 것이었다; 물리학에서의 상황에 관한 진실성은 물리학 자체에 근거한 논증들에 의하여 확보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보다 정확하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혹은 비결정성의 관계에 근거한. 이것들은 물리학이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밝힌다고 주장되었다; 물론 새로운 양자역학에 대한 설명과 그 양자역학의 적용을 통하여 많은 일이 여전히 수행될 수 있을지라도, 더 이상의 돌파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힌다고: 다시 말해서, 혁명적인 과학과 구분되는 것으로, ‘정상적인 과학을 통하여.

1930년에, 오늘날처럼, 내가 과학적 혁명을 모든 훌륭한 과학에 대하여 전형적인 것으로서 간주했다는 것은 내가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를 혁명적인 과학자로서 크게 칭송했다. 그러나 이 인식론적 주장을 나는 터무니없는 것으로서 간주했고 여전히 간주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역시 터무니없다고 간주했던 주장이다. 그것은 또한 지금쯤 잊혔을 주장이다.

그것은 정말로 잊혔다고 나는 생각한다: 양자론에 대한 현재 토론에서 그것이 핵심적일지라도, 아무도 그것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특히 J. S. [Bell]이 그 주장을 실험적으로 조사하는 방식을 열어놓은 이후에).

그 역사를 간략하게 개괄하자.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을 혁명적인 돌파구로서 평가했지만 양자역학의 궁극성(finality) 혹은 내가 최종 목적지로서 부르기를 제안하는 것은 수용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은, 양자역학을 초월하는 수준인 물리학에서 더 심층적이고 더 깊은 수준이 틀림없이 있다고 믿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은 확률주의적인 이론이라는 그리고 확률은 우리의 지식 결여라는 이유만으로 물리학에 들어온다는 논증을 (나의 견해로는 오류인) 통하여 이 관점을 오랫동안 지지했다 (앞의 절 참조).

나는 항상 확률에 관한 이 주관주의적인 관점을 잘못된 것으로서 간주했고, 나는 아인슈타인이 1950년 우리가 토론하는 동안에 그 견해를 포기했다고 아마도 최종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 주장을 배척하는 이 특별한 이유에 관하여 아인슈타인에게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양자역학의 등식에 의하여 기술되는 것을 초월하는 물리적 실체의 더 깊은 층이 아마도 핵물리학에서 있을 것이라고 정말로 동의했다. 결국, 양자역학은, 본질적으로, 원자핵을 둘러싸고 있는 전자껍질 이론으로서 발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하이젠베르크의 견해는 아니었다. 그가 비엔나로 와서 나는 그와 함께 하루저녁을 (1935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보냈다. 당시 그는 양자역학이 핵을 조사함으로써 심화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오히려, 원자핵에서 우세한 상황으로 인하여 비결정성이 악화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핵이론에서 우리가 지닌 지식의 한계는 원자이론에서의 (전자껍질 이론) 우리가 지닌 지식의 한계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과, 심지어 우리가 전자껍질의 작동과 안정성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까지 우리는 핵의 작동과 안정성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임이 증명될 것이다.

오늘날 최종 목적지 주장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의 옳았다는 것은 상당히 분명하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그 주장을 초월하는 데 기여했다. 사실상 그 주장은 지금쯤 너무 터무니없이 보여서 그 주장이 유지되었다고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는 그 주장이 유지되었다면 그 주장이 진지하게 수용되었다고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최종 목적지 주장은 중요 인사들의 커다란 충돌인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Niels Bohr) 사이의 토론의 기초를 정말로 이루었다.

아인슈타인이 이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또한 아래 서문[Introduction]’ 참조.) 그러나 진실은 완전히 다르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사이의 실제적인 문제는 두 사람 모두가 다소 모호하고 오해를 일으키기 쉽게 양자역학이 완전한지 아닌지의 문제로 지칭했던 것이었다.

완전한(complete)’이라는 용어는 이 토론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리고 토론의 초입에서, 그 용어에는 양자역학이 (적어도 원칙적으로) 물리학에서 최종 목적지였는지 아닌지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아인슈타인은 자기 자신의 혁명을 최종적 돌파로서 간주한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 자신의 광자(photon) 이론과, 광자(photon) 이론을 빛의 파동이론과 함께 사용할 필요성은 실제로 나중에 파동-입자 이원성으로 불리는 것을 확립했는데, 그가 그것으로 인하여 거의 물질 파동론의 문턱에 다다랐을지라도, 그는 그것을 임시방편으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서, 입자-파동 이원성을 빛 이론에서 물질이론으로 확대하는 것에 다다랐을지라도. 자신의 특수상대성 이론을 그는 불만족스러운 것으로서 (몇 가지 이유들 때문에, 특히 그 이론이 다만 절대공간을 관성 체제의 절대 조합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옳게, 또한 간주했다. 자신의 일반이론에 대하여 그는 그 이론이 단명하다(ephemeral)’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론의 구상 순간에서부터 자신의 생애 마지막까지 그는 그 이론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에게는 상황이 달랐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의 돌파구는 새로운 이론에 대한 직감적 통찰력을 경험하여 발생했는데 그에게 엄청난 인상을 남겼다. 그 자신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진리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준최종적으로모든 것을 계몽하는 해결책의 단순성에 대한 직감적 통찰력이다.계몽하는 단순성에 대한 통찰력은 하이젠베르크의 태도에 결정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계몽하는 단순성으로 인하여 그는 이것이 그것이다(This is it)’라고 느꼈다: 이것이 최종적 진리인 최종 목적지였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그는, 그것이 물리학에서 최종 목적지임을 보지 못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특히 아인슈타인을 비난했다. 그는 독일어 단어 최종적으로 유효한(endgültig)’을 사용했다. 그러나 영어 번역인 최종적으로 유효한은 독일어 용어 endgültig에 의하여 전달되는 최종적 해결책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전달하지 못한다. 영어 번역은 내가 떠올린 표현인 최종 목적지(end of the road)’라는 이 느낌을 전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인슈타인-보른(Einstein-Born) 서간의 서문에서 (아마도 1968년에 쓰였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스승인 막스 보른(Max Born)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하이젠베르크 자신으로부터도 아인슈타인을 분리하는 상황을 기술하려고 애를 쓴다. 그는, ‘아인슈타인은 ... 양자역학의 수학적 형식주의가 원자의 [전자적] 껍질의 현상을 올바르게 나타낸다고 보른(Born)과 의견이 일치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이 현상들에 대한 완벽한 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이 현상들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유효한 기술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라고 불평한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유효한(finally valid)’(endgültig) 내가 생각하기에, ‘궁극적으로 유효한(ultimately valid)’으로 정말로 최종 목적지(the end of the road)’번역되어야 한다.

이것을 서술했을 때, 하이젠베르크는 하이젠베르크의 이론들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태도보다 아인슈타인 자신의 이론들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태도가 훨씬 더 비판적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 갈등에 관하여 유사한 언급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비망록에 있다. 여기서 하이젠베르크의 가까운 친구이자 협력자인 C. F. 폰 바이츠제커는,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아직 최종적으로 유효한 물리학(die endgültig Physik)’(최종적으로 유효한 물리학, 물리학에서 최종 목적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서술한다(66). 아인슈타인의 비판적 태도는, 그렇게 기술되었는데, 양자역학에 대하여 그의 접촉이 단절되어 그가 전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징표로서, 그가 지닌 구태의연한 낙후성으로서 간주된다.

하이젠베르크와 그가 지닌 매우 이해 가능한 태도를 떠나기 전에, 나는 아마도 그의 견해들이 크게 변했다는 것을 언급만 할 것이다. 한 세대의 물리학자들을 유도하여 우리가 양자역학으로부터 객관적 실제가 증발했음을 배울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견해를 수용하도록 한 것은 그였다.

닐스 보어(Niels Bohr)의 경우는 다소 다르다.

빅토어 바이스코프(Victor Weisskopf) 덕분에 1936년에 내가 보어에게 말할 훌륭한 기회를 가졌을 때, 그는 내가 과거에 만났거나 앞으로 만날 것 같은 가장 탁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나에게 남겼다. 그는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저항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보어의 의미에서 이성적으로 당시 양자역학을 이해했다고 틀림없이 말할 수 없었을지라도, 양자역학에 관하여 내가 틀림없이 틀렸다고 나는 느꼈다: 나는 보어의 의미에서 이성적으로 당시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압도당했다.

보어의 태도는 하이젠베르크의 태도와 매우 달랐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보어가 기본적으로 사실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시작부터 그에게 수수께끼였다: 1913년 그의 원자모형을 둘러싸고 있는 난제들의 깊이를 아무도 더 날카롭게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 난제들을 제거하지 않았다. 그의 탁월한 성공 모두 안에는 항상 어떤 실패가 또한 도사리고 있었다: 그가 명징성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이해될 수 없고 관통될 수 없는 어떤 것. 그는 아마도 하이젠베르크가 경험했던 만족감인 모든 것을 계몽하여 눈을 멀게 하는 빛의 섬광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가 양자역학을 최종 목적지로서 수용했을 때, 최종 목적지는 부분적으로 절망적이었다: 오직 고전 물리학만 이해 가능했고 실체에 대한 기술(記述)이었다. 양자역학은 실체에 대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런 기술(記述)은 원자 영역에서 성취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런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이유로: 이해될 수 있는 실체는 고전물리학에 끝난 곳에서 끝났다. 원자에 대한 이해에 가장 가까운 것은 그 자신의 상보성의 원리(principle of complementarity)였다.

그 원리는 고전물리학의, 그리하여 이해의 한계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우리는 고전적 입자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우리는 고전적 파동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우리는 입자 기술(記述)과 파동 기술(記述)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두 가지 기술(記述)들은 양립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모두 필수적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이해력이 관통할 수 있었던 한계였다. 그것은 최종 목적지였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가 우리 이해력에 대한 포기행동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을지라도, 어떤 의미에서 하이젠베르크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보어가 상보성의 원리입자와 파동의 이원론과 연결한 것은, 보른(Born)이 파동진폭의 제곱을 입자를 발견하는 가능성으로서 해석한 것이 수용되었을 때, 붕괴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말로, 입자 해석을 기본적인 것으로서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파동-입자 이원성과 하이젠베르크의 관계들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아래 서문[Introduction]’의 주석 38a를 참조.) 그 순간부터 혼란이 코펜하겐 진영에 덮쳤다. (예를 들어, 파스쿠알 요르단[Pascual Jordan]과 같은 위대한 물리학자이자 수학자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454-55쪽에서 토론된 것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었다.) 감히 보어(Bohr)를 비판하는 매우 드문 물리학자 중 한 사람인 머리 겔만(Murray Gell-Mann), ‘닐스 보어는 이론가 한 세대 전체를 세뇌하여 임무가’ (다시 말해서, 양자역학에 대한 충분한 철학적 제시) ‘50년 전에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아마도 다소 지나치도록 퉁명스럽게 그 혼란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론가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자기들에게 능력이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문제에서, 너무 많이 신경을 쓰지 않고 단지 보어에게 의지했다고 나는 오히려 생각한다.

보어 역시, 지금은 대체로 잊힌 최종 목적지 주장을 지지했는데 그 주장은 그가 아인슈타인과 벌인 커다란 싸움에서 바로 핵심이었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것이 관건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Podolsky)와 로젠(Rosen)이 집필한 (1935) 유명한 논문으로부터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다.

 

IV

 

그러나 이것 이전에, 이미 1932년에,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양자역학의 수학적 토대(Die mathematischen Grundlagen der Quantenmechanik)- (적어도 나에게는) 매우, 매우 난해한 책 나왔다. 이 책에서 폰 노이만은 양자역학의 최종적이고 최종 목적지의 특성을 마지막으로 확립하려는 취지인 수학적 증거를 내놓았다: 그는, 아인슈타인처럼, 양자역학에 의하여 재현되는 물리적 실체보다 더 깊은 물리적 실체의 층(: layer)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은 틀렸음을 증명했다.

이 증명을 완벽하게 보편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폰 노이만은 매우 유명해진 개념을 도입했다: ‘숨은 변수(hidden variables)’라는 개념. ‘숨은 변수(hidden variables)’는 양자역학에 의하여 아직 고려되지 않던 원자이론에서 (원자이론이 당연한 일로서 핵[nucleus]을 포함했다는 의미에서) 고려될 여하한 것이었다. 폰 노이만은 양자역학에서는 그런 숨은 변수(hidden variables)’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는 증명했다는 말을 우리는 들었다); 또는, 다소 다른 해석에 따르면, 그는 숨은 변수(hidden variables)’의 존재가 양자역학을 부인함을 증명했다.

이제 폰 노이만의 저서가 발간되었던 같은 해에, 두 가지 새로운 입자들이 발견되는 일이 발생했다: 중성자와 양성자.

이것들은 (이전에) ‘숨은 변수(hidden variables)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아니라면, 무엇이 숨은 변수(hidden variables)이었던가?

결국 양자역학은 추상적인 물리적 형식주의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것에 대한 이론이었다: 원자들에 대한 이론으로, 양전하로 하전된(positively charged) 음전자의 껍질구조를 지닌 것으로서의 원자들의 구조에 대한 이론으로, 원칙적으로 화학원소들이 지닌 매우 구체적인 속성들을 설명하는 이론.

1931년에, 이 구조들은 여전히 단지 두 가지 물질 입자들의 전자와 양성자 구조들이라고 전제되었다; 물론, 비물질 입자인 광양자에 추가하여. 모든 원자 구조들은 이 용어들로써 설명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핵들(nuclei), 미지의 (그리고 아마도 알려질 수 없는) 방식으로, 원자구조들로 구성되었다.

그 후, 1932년 동안에, 양전자와 중성자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1933년에 파울리(Pauli)는 브뤼셀에서 열린 솔베이 회의(Solvay conference)에서 또 다른 입자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대담한 생각을 발표했는데, 그 입자에 대하여 페르미(Fermi)는 중성미자‘(neutrino)’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예를 들어 폰 노이만에 의하여 설명된 것과 같이, 양자역학 물리학에서 최종적으로 유효하(endgültig)고 완벽하다(vollständig)는 주요 물리학자들의 주장을 이 입자들이 반증했음을 주요 물리학자들이 깨닫지 못하게 막은 이유들을 간단하게 토론하는 것이 다소 흥미롭다.

(a) 양전자(the positron). 앤더슨(Anderson)의 양전자 발견은 보어(Bohr),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슈뢰딩거(Schrödinger)에 의하여, 그리고 에딩턴(Eddington)에 의하여 처음에는 마지못해 수용되었다고 확실하게 주장되었다. 그러나 그 발견이 배척될 수 없음이 분명해졌을 때, 그 발견은 디랙(Dirac)에 의하여 그 발견에 주어진 형태로서, 양자역학과 관련된 성공사례로서 환영을 받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판단이었다. 왜냐하면 디랙(Dirac)은 정말로 자신의 이론으로부터 양전하를 지닌 입자의 존재에 대한 예측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이 양성자(proton)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양전자에 훨씬 더 잘 맞았다. 그래서 양전자는 양자역학에 대한 반증과는 거리가 멀고 양자역학을 검증하는 것이라고 말할 상당히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b) 채드윅(Chadwick)의 중성자는 아마도 덜 문제였다: 그 중성자는 처음에 양성자와 전자로 구성된 것으로서 해석될 수 있었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심각한 난제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론은 양자역학 이 구성을 설명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론은 새로운 입자로서 수용되었는데, 그 새로운 입자는 양성자와 전자가 중성자로 변이됨을 통하여 혹은 양성자로부터 양전자가 방사됨으로써 출현할 것이다. (루게로 마리아 산틸리[Ruggero Maria Santilli]의 최근 논문에서, 그의 이론에서, 중성자의 최초 모형역사적으로 그 모형의 배척을 야기한 기술적 난제들의 해결로써 부활하고 있음을 읽은 것은 흥미롭다.

이 난제들은 모두 원자역학이’[양자역학에 대한 산틸리의 명칭] ‘중성자 안에서 적용되어, 일반화된 역학이 사용될 때는 그 난제들이 제거된다는 전제 때문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c) 그렇다면, 이런 방식으로 최종 목적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 속에 파울리[Pauli]가 당시 속했다), 중성미자가 심층적인 숨은 변수로서 인정되었어야 할지라도, 중성미자에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그것은 순전히 상상적 입자였다) 의하여 더 이상 충격을 받지 않았던 것은 이해 가능하다. 그러나 그 때쯤 그들은 분명히, 숨은 변수들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포함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무의식적으로 바꾸었다. 원래, 그리고 특히 아인슈타인과의 초기 토론에서 양자역학이라는 명칭은 원자에 (당연지사의 문제로서 핵을 포함하여) 대한 이론으로서 사용되었다. 이제 그 명칭은 점점 더 하이젠베르크, 보른(Born), 조단(Jordan), 슈뢰딩거(Schrödinger), 디랙(Dirac), 고든(Gordon) 그리고 클라인(Klein)에게서 주로 기인하는 강력한 수학적 형식주의를 언급하는 데만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핵의 정자장(正磁場: positive field)에서의 (: negative) 전자의 움직임에 대한 이론이었을지라도, 점점 더 폭넓게 적용된 형식주의. 그러나 이 형식주의는, 물론, 또한 매우 크게 변화하여 물리학에서 최종 목적지가 된 이론인 하이젠베르크, 보른, 그리고 조단의 원래 이론을 크게 초월하였다.

(d) 1935년에 유카와(Yukawa)가 나중에 중간자(meson)라고 불리는 새로운 입자를 예측했을 때 이 입자에 대한 연구는 몇 가지 다양한 중간자(meson)의 발견을 낳았다. 그러나 이것들 중, 혹은 많은 다른 기초 입자들 중 어떤 것도 (이전의) ‘숨은 변수들로서 확인되지 않았다; 심지어 숨은 변수들이 확률이론을 결정론적 이론으로 틀림없이 바꾼다는 폰 노이만의 원래 명제로부터 몇 몇 사람들이 (그들 중에는 내 자신이 한 포함된다) 충족시키기가 불가능한 것으로서 간주했던 명제 풀려난 후에도.

그 동안 양자역학은 성장했다. 양자역학의 명칭은, 그 이론이 몇 가지 특징적인 원리들을 (교환관계[commutation relations],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관계, 파울리의 배타원리[exclusion principle]) 보전했기 때문에, 다소 보전되었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이라는 명칭은 양자전기역학(quantum electrodynamics) 및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그리고 심지어 양자크로모역학[quantum chromodynamics], 그리고 새로운 양자 숫자들을 그리하여 이전의 숨은변수들을 도입한 이론들에) 적용되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에 반대하여 양자역학은 완벽하다(최종 목적지라는 의미에서) 주장에 대한 보어(Bohr)의 옹호는, 그 이론이 근본적으로 바뀐 후에도 그리고 그 이론의 불완전성이 너무나 분명하여 저 커다란 싸움에 대하여 가능한 문제로서 더 이상 간주될 수 없게 된 후에도, 계속해서 유효한 것으로서 간주되었다.

물론 그 이론은 정확하게 아인슈타인이 희망했던 방식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문제가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심지어 최고로 지지를 받는 자신의 이론들에 대해서도 독단적이었던 적이 없고, 물론 자신의 희망사항들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단성이, 하이젠베르크처럼 (아인슈타인-보어 서한집의 그의 서문으로부터 위에 인용된 구절에서) 이 모든 새롭고 아마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혁명들이 종점은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증명한 후에도 최종 목적지 주장을 고수했던 사람들에 의하여, 아인슈타인 때문이라고 주장되었다.

나는 산틸리를 언급했고, 나는 그가 새로운 세대에 속하는 사람 다른 길로 움직이는 듯이 보인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플랑크(Planck), 아인슈타인, 보어, 보른, 하이젠베르크, 드브로이(de Broglie), 슈뢰딩거(Schrödinger) 그리고 디랙(Dirac)의 주도 하에서 양자역학을 설립한 거인들을 결코 폄하하지 않는다. 산틸리(Santilli)는 자신이 이 사람들의 작업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나 자신의 접근방식에서 그는 핵역학(nuclear mechanics)하드론학(hadronics)으로부터 양자역학의 논쟁의 여지가 없는 적용가능성의 경기장(arena of incontrovertible applicability)’(그는 그것을 원자역학[atomic mechanics]’라고 부른다) 구분하고, 양자역학은 새로운 시험이 없다면 핵역학과 하드론역학에서 유효한 것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그의 가장 매혹적인 논증들은 내가 보기에 온전한 정신으로 복귀하는 전조가 된다: 아인슈타인이 옹호했고 저 두 명의 매우 위대한 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에 의하여 배척되었던 사실주의와 객관주의로의 복귀.

 

V

 

물리학에서의 현재 상황은 이 배경에 대비해서 이해될 수 있을 따름이다. 위에 언급된 원소들과 다른 원소들이 현재 상황에 있는데 예를 들어 J. S. (Bell)의 저서에 (내가 아래에서 토론할) 있다. 그러나 벨의 저서는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그리고 로젠(Rosen)의 논증을 통하여 사실주의, 확률 그리고 완벽성이나 궁극성(finality)과 관련된 이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자체의 원래 형태로 코펜하겐 해석에 특징적인 사실주의에 대한 반대론을 겨냥한 논증.

지난 10년 동안 사실상 양자이론에는 몇 가지 새롭고 흥미로운 발전이 있었다. 이것들은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그리고 로젠(Rosen)(그들을 나는 EPR로 언급할 것이다) 유명한 사고 실험(思考 實驗: thought experiment)(1935) 관련된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내가 유사한 실험을 만들려고 노력한 직후에 만들어낸 실험이었다. 내 자신의 실험은 내가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en)과 또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1934) 발표했는데 효력이 없었다. - 불행하게도 오류였을지라도 유사한 논증에 내 자신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EPR의 중요성을 깨달은 최초의 철학자들 중 한 명이었고 내가 항상 EPR에 매우 관심이 높았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다. 물리학자들 가운데서 EPR은 바로 시작부터 상당한 동요를 유발했다; 그러나 철학자들을 그 동요를 무시했다.

양자이론에서 이 새로운 발전상황을 낳았던, 특히 소위 벨 부등식(Bell inequalities)’과 국소성 문제(the problem of locality)를 낳았던 것은 EPR 논증이었다.

사건의 현재 상태에 이른 발전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토론의 두 단계들이 구분되어야 한다. 첫 번째는 원래 EPR 논문 자체인데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반대하여 작성되었다. 그 논문은 최초로 양자이론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이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심지어 매우 먼 거리에 대해서도 의미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 다음에 또 다른 단계가 있는데 데이비드 봄(David Bohm)의 공로로 믿어진다. 이 단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첫 번째 단계와 다르다. (Bohm)의 논증은 편광(偏光: polarization)이나 회전(spin)에 근거를 두었다. 회전(spin)은 원래 EPR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데 원래 EPR은 위치와 운동량과 관련되지만 회전(spin)은 봄(Bohm)에게서 기인하는 해석본에서 정말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원래 EPR은 사고-논증(thought-argument)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실험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러나 두 번째 형태는 봄(Bohm)에게서 기인하여 실험적으로 시험될 수 있다고 판명되었다.

 

VI

 

원래 EPR 논증은, 본질적으로, 하이젠베르크의 소위 불확실성 관계(uncertainty relations)’ 혹은 비결정성 관계(indeterminacy relations)’에 관한 하이젠베르크의 해석에 대한 도전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공식

 

pqh / 2π에 대한 (1)

 

이 공식들은 두 개의 간격이나 범위가 여기서는 x-축 방향으로의 운동량의, 간격이나 범위 p그리고 x-축을 따르는 위치의, 간격이나 범위 q - 매우 관련이 깊어서 그들은 산물이 2π로 나누어지는 플랑크 상수 h보다 작게 될 수 없다고 서술한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p를 작게 만들수록, q가 더 커지고 그 반대상황도 성립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공식은 어떤 파동 이론에도 특징적이다. 이와 같은 공식은, 예를 들어, 빛의 파동 이론을 x 방향으로 움직이는 광선이 작은 구멍을 지닌 화면에 떨어지는 상황에 적용함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그림 1

 

py qy h

 

구멍 qy가 작을수록 빛이 구멍을 통과한 후 y-방향에서의 광선 운동량의 산란 각도는 더 커질 것이다. (유사한 결과가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전자들[electrons]에 관한 파동 이론으로부터 얻어진다.)

공식 (1), 예를 들어, 파동 방정식을 이 사례를 통하여 기술되는 물리적 상황에 (초기 조건) 적용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공식들이 (1)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 우리가 이론을 작은 구멍이 있는 화면 위에 광선이 떨어지는 그런 경우들에나 유사한 경우들에 적용할 때, 이론으로부터 얻어진다.

이제 하이젠베르크의 해석에 그리고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이와 매우 유사한 상황이 모든 측정에서 나타나서 공식 (1), 한 가지 변수와 비-연산(non-commuting) 두 번째 변수에 관한 모든 측정에 대하여, 모든 기초입자에 예를 들어 광양자와 전자에 대하여 유효하다.

이것은 처음에 형식주의 자체의 한 부분이라고 이해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슈뢰딩거[Schrödinger] 방정식). 그것은 처음에 형식주의를 측정들(measurements)로서 기술될 수 있었던 작은 숫자의 물리적 상황들에 적용하면서 하이젠베르크에 의하여 밝혀졌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해석이 모든 가능한 측정들에게 부과한 한계들을, 우리가 기초입자를 측정한다면 우리는 기초입자를 방해하거나 간섭함을 지적함으로써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하이젠베르크의 해석 중 이 초기 해석은, 입자에 분명한 위치와 동시에 운동량이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우리가 입자에 간섭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두 가지 모두를 분명하게 측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해석은, 입자는 파속(波束: wave packet)에 의하여 대표될 것이라고, 혹은 정말로 파속(波束: wave packet)일 것이라는 슈뢰딩거가 제안한 후에 변경되었다.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그리고 로젠의 논증은 (a) 입자에는 분명한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에 있을 수 없다는 견해에 반대하는 또한 (b) 위치에 대한 모든 측정은 입자의 운동량에 틀림없이 간섭한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는 견해에 반대하는 방향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매우 간략하게 표현하여, 그 논증은 다음과 같이 펼쳐진다. 슈뢰딩거의 방정식에 의하여 기술되는, 가령 충돌이 있기 전의 두 개의 입자 AB를 포함하는 합성적 체계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라. 그 다음에 두 개의 입자는 충돌한다; 그리고 그 후에 한 개의 입자는 측정되고 그 입자를 우리는 A라고 지칭할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모습들을 측정하기로 결정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위치를 측정할 것이다; 또는 우리가 운동량을 측정할 것이다. A의 위치가 측정된다면, 합성적 체계의 Ψ-함수와 함께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B의 위치를 발견한 것이다. A의 운동량이 측정된다면, 우리는 유사하게 B의 운동량을 얻을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양자역학은 그렇다면 [다시 말해서, A를 측정한 후에] 부분적 체계 B에 대한 Ψ-함수를 우리에게 줄 것이고, 우리가 A에 관하여 수행하기로 결정한 종류의 측정에 따라서, 달라지는 다양한 [B] Ψ-함수를 우리에게 줄 것이다.’ B는 그러는 동안 우리가 원하는 만큼 멀리 가령, 천랑성(天狼星: Sirius)까지 움직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코펜하겐 해석의 원래 가르침과 반대로, 다만 A의 측정에 (그리고 방해) 근거하여 조금도 B에 간섭하거나 B를 방해하지 않고도 B의 위치나 운동량을 우리는 예측할 수 있다.

정말로, B는 너무 멀어서 간섭을 받을 수 없다. 이제 EPR에서는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이 없다고 전제되고 (특수 상대성으로부터 귀결되는 전제), EPR 논증은 정말로 이 전제에 의존한다. 이 전제는 나중에 국소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locality)’ 또는 국소적 작용의 원리(the principle of local action)’로 지칭되었다. 우리가 바라는 바대로 우리가 B의 위치나 운동량을 심지어 직접적으로 측정하지 않고도 (우리는 오직 A만 측정한다) B의 위치나 운동량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아인슈타인은 B에게 틀림없이 위치와 운동량 모두가 있다고, 그리고 두 가지 선택의 어느 것에서도 위치 측정이 선정되든 운동량 하나가 선정되든 양자이론은 우리에게 B에 관하여 단지 불완전한 정보만을 허용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B에 관한 가능한 정보를 제한하는 것은 우리가 B를 방해하는 것일 리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B를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A의 운동량을 측정하는 것은 (혹은 A의 운동량에 간섭하는 것) A의 위치를 파괴할 것이다; A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은 (혹은 A의 위치에 간섭하는 것) A의 운동량을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B에게도 A로부터 몇 광년 떨어져 있어서 A의 측정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을 그렇게 하고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있지 않다면 A의 측정을 위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른 순간적인 작용은 우리가 A를 측정했던 순간과 동일한 순간 동안의 B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국소성 원리(the locality principle)에 따르면, 분리되어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대상들은 독립적이다. 그리하여 B에는 관찰행위와 별개인 객관적인 실체가 틀림없이 있고, 우리가 동시에 두 가지 모두를 알 수 없을 지라도 그 실체에는 틀림없이 분명한 위치와 분명한 운동량이 있다.

(나는 EPR 논문이 중요할지라도 내가 보기에 이 물질들에 관한 토론을 왜곡시킨 특정 방식들에 결점이 있다고 첨언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논문에서는 우리가 실제적(real)으로 불러야 하는 것에 대한 질문에 너무 많이 주시한다; 그리고 양자역학이 완벽한지의 문제에 나의 견해로, 그 문제 뒤에는 위 III절에서 내가 최종목적지 주장이라고 불렀던 것이 있음을 잊고, 이런 환경에서 그 문제가 통상적으로 토론되는 방식에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문제 너무 많이 주목한다: 모든 물리이론은 한 가지 이상의 의미에서 불완전하여,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이 물리적 상수인 e, c 그리고 h의 절대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EPR 논문에 의하여 제기된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두 가지이다: (1) 하이젠베르크의 해석이 (그리고 유사한 해석들) 옳은가: , 비결정성이 관찰자의 부분에서 관찰되는 대상에 간섭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설명될 수 있는지; 그리고 (2)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이 있는지 없는지. A에게 어떤 일을 함으로써 A(말하자면 가까이에 있는) 측정하거나 관찰함으로써 몇 광년 떨어져 있을 B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능한가?

이제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이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부언하여, 실험적으로 잘 입증된) 의하여 (이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배제된다. 특수상대성은 국소성 원리(the locality principle)를 의미한다.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이 있다면 (이 작용이 신호하기를 위하여 사용될 수 없을지라도), 특수상대성은 그에 따라서 교정되고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특수상대성의 형식주의에 대한 로렌츠[Lorentz]의 해석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해석에 대해서는 아래 토론을 참조하라.) 아인슈타인도 보어(Bohr)(하이젠베르크도) 국소성이 포기되어야 한다고 제안한 적이 없다. 그래서 양자이론이 국소성의 포기를 의미하는 이론적 결과들에 보어(Bohr)가 직면했다면, 보어(Bohr)는 양자이론에 반대하는 매우 강력한 논증으로서,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양자이론에 대한 반증으로서 이것을 간주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1948년에 Dialectica에 발표된 다소 알려지지 않는 아인슈타인과 보어(Bohr) 사이의 논쟁으로부터 분명해진다. Dialectica 기고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의 코펜하겐 해석에 반대하여 매우 겸손하고도 간단한 논증을 개진한다. 먼저 그는 국소성 원리를, 지금 지칭되는 바와 같이, 즉 배제된 원격작용의 원리를 분명하게 설명하여 그 원리를 사라지는 거리에서의 작용(action at vanishing distances) 원리 혹은 근접작용의 원리(Prinzip der Nahewirkung)로서 언급한다. 그 다음에 그는 양자역학이, 적어도 코펜하겐 해석에서 이 국소성의 원리와 양립할 수 없다고, 그리고 양자역학이 보어(Bohr)에 의하여 해석되는 바와 같이 참이라면 틀림없이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이 있다고 언급한다.

그는 계속해서 양자역학의 기술 방식들을 원칙적으로 최종적(‘definitiv’)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은 이 고찰에 다음과 같이 반응할 것임은 내가 보기에 틀림없다: 그들은 우주의 먼 부분들에서 물리적으로 사실적인 물체들의 독립적인 존재의 요건을... 포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그런 요건을 암묵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고 올바르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계속해서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이 주장을 즉각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국소성의 원리가 양자이론에 대한 명시적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수용한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게 알려진 모든 물리적 현상들을 고려할 때, 특히 양자역학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기술되는 현상들을 고려할 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국소성 원리가 포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개연적으로 만들 물리적 사실을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한다고 그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경고한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내 생각에, 물리학 전체에 대하여 일원화된 근거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동시대의 이론들에 대한 설명에 독단적으로 매달리게 (dogmatisch festlegen)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논문에 대한 보어(Bohr)의 답변이나 (첨언하여 나중에 작성되었고 그의 앞에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있을지라도 아인슈타인의 논문 이전에 파울리[Pauli]에 의하여 인쇄된) 파울리(Pauli) 자신이 쓴 토론에 대한 서문을 참조한다면,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은 원격작용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들 중 누구도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올바르게 해석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인상을 우리는 받는다. 파울리(Pauli), 힐베르트 공간(Hilbert space)에 있는 가능한 벡터가 존재하지 않는 관찰 가능한 것들의 동시적 가치들에 관한 서술을 무의미한 것으로서 배척하고 이것이 아인슈타인에게는 충분한 답변이라고 생각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보어(Bohr)의 논문을 읽으면, 그가 양자역학 안에 정말로 원격작용이 있다는 것을 어디에서도 인정하지 않으며 아인슈타인에 반대하여 양자역학 안에 정말로 원격작용이 있다는 것을 지지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VII

 

그러나 과거 10년 동안의 발전의 결과로, 이 모든 것은 변한 듯이 보인다. 많은 현대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아마도 아인슈타인의 대안으로 지칭할 것이 양자역학이든 국소성의 원리든 정말로 올바르게 도출되었다고 (비록 그 대안이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도출되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말할 것인데, 그것은 아인슈타인에게 반대하는 보어(Bohr)의 논증이 틀렸으며, 심지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국소성의 원리에 집착하는 데서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어(Bohr)의 비-사실주의적인 철학적 입장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이 새로운 전개상황은, 위치와 운동량보다는 회전(spin)을 통한 데이비드 봄(David Bohm)EPR 재서술로 되돌아간다. EPR에 대한 봄(Bohm)의 해석은 (나의 관점에서 원래 EPR과 상당히 다른) 그 회전(spin)이 상호작용하는 두 개의 입자가 있음을 전제한다. 그 후 한 입자의 회전(spin)은 측정되고, 그리하여 다른 입장의 회전이 얻어진다. 가령 A의 회전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은 측정될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B의 회전의 상응하는 구성요소들을 얻는다.

나는 아마도 여기서 원래 EPR 논증과 그 논증에 대한 봄(Bohm)의 해석판 사이의 차이점들 중 몇 가지를 언급할 것이다. 이 차이점들은 두 종류의 양자-역학적 상태 표본들의 구별과 관련된다. 상태 표본들은 단지 선택적이거나 혹은 덧붙여 새로운 경향들을 부과할 것이다 편광기(polarizer)를 통하여 입자의 상태를 선택하는 경우에서와 같이 (예를 들어, 니콜 프리즘[Nicol prism]이나 전기석[電氣石: tourmaline]). 첫 번째 종류는 측정들에 관하여 순전히 역-예측적(retrodictive) 실험들이나 내가 물리적 선택이라고 불렀던 상태 표본의 종류와 연결된다. EPR에 대한 봄(Bohm) (그리하여 또한 벨[Bell]) 해석본은, 그러나, 두 번째 의미에서 선택적이다: 이 실험들은 문제의 입자들에게 새로운 성향들을 부과하는 편광(偏光: polarization) 측정들에 근거한다. 그리하여 적어도 이런 형태의 상태 표본을 사용하는 실험은 다른 종류의 상태 표본을 사용하는 실험과 상당히 다를 것이다. 정말로 원래 EPR 논증은 그렇지 않은 반면, -(Bell-Bohm) 실험이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에 대하여 결정하고 그리하여 특수상대성 이론에 반대하여 결정한다는 것은 가능하다. 이것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두 가지 형태의 선택이나 상태 표본 사이에서 매우 새롭고 흥미로운 차이점을 지닐 것이다.

(회전[spin]에 관하여 몇 가지 다른 문제들이 있다고 첨언하여 언급될 것이다. 먼저 우리는 회전[spin]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어서, 회전[spin]과 관련되는 자신의 EPR 해석본이 본질적으로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제안되는 형태로 대등하다고 생각하면서 봄[Bohm]이 틀렸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나의 근거는, 우리에게는 회전[spin]에 대한 사실주의적 이론이 없다는 것이다. 회전[spin], 원자이론에서 발생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회전[spin]으로써 통상적으로, 사실적으로, 의미하는 것과 다르다. 회전[spin]은 매우 기묘한 것이어서, 어떤 의미에서 -고전적이다. 아마도 회전[spin]을 사용하여 우리는 실제로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을 정말로 경험한다 (아래 참조). 그러나 모든 거리에 대하여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큰 거리에서는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EPR에 대해서는 결정적이다. 원래 논증에는 큰 거리들을 이용할 의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짧은 거리의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에 대한 증거를 발견한다면, 이것은 실제로 원래 EPR 해석본에 반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고, [Bohm]의 해석판으로서의 EPR에 대한 논증에 반대하고 있을 따름일 것이다. 그리하여 회전[spin]에 관한 논증들은 결국 코펜하겐 해석에 결정인 도움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새로운 실험들은, -국소성 작용이 여하한 규모의 거리에 걸쳐서도 작동할 것이라는 조건으로만 코펜하겐 해석을 구원할 것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형식주의와 코펜하겐 해석을 구분할 필연성은 심지어 지금도 실현되지 않는다.)

아무튼, EPR 실험이 회전(spin)을 통하여 재진술되자마자, 그 실험은 단지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일 필요는 없다; 그 실험은 실제로 실험될 수 있다. 그런 실험에 대한 이론적 토대는 J. S. (Bell)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그리고 몇 가지 그런 실험들은 당시 수행되었다. (다음의 나의 언급은, 자신의 정리에 대한 벨[Bell]해석이 물리적으로 옳다는 전제에 근거를 둔다; 이것은, 그러나, 결정되지 않은 문제이다.)

이 시험들은 지금 벨(Bell)의 부등식으로 지칭되는 것을 포함한다. 지금까지 시험의 결과들이 아직 완전히 결론적이 아닐지라도 그 결과들 대부분은 벨(Bell)국소적인 사실주의적 이론들(local realistic theories)’로 지칭하는 것에 반하고 양자역학과 아마도 심지어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나는 이 시험 결과들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인정해야겠다. 내가 존 F. 클로저(Clauser)와 애브너 쉬모니(Abner Shimony)가 벨(Bell)의 정리를 시험할 작정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얻을 결과들이 양자이론을 반증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시험 대부분이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나의 기대는 틀렸던 것으로 보인다.

 

VIII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리학에 대한 나의 사실주의적 해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국소성도 심지어 포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 새로운 실험들이 낳은 결과가 국소성이 유지될 수 없음을 틀림없이 밝힌다할지라도 사실주의가 이 새로운 실험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할 최소한의 이유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애브너 쉬모니[Abner Shimony]와 대조적으로). 오히려, 내가 다음 절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결과들은, 옳다면, 특수상대성 이론의 형식주의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해석에 반대가 될 것이고 특수상대성 이론의 형식주의에 대한 로렌츠(Lorentz)의 해석을 지지하고 뉴튼의 절대공간(absolute space)’를 지지할 것이다. (그리고 로렌츠 및 뉴튼 두 사람 모두 물론 사실주의자들이었다.)

(Bell)의 정리에 근거한 이 새로운 실험들은 정말로 로렌츠의 이론과 특수상대성 이론 사이에서 결정적인 것으로서 수용될 수 있는 최초의 것들일 것이다 비록 그 실험들이 그런 것으로서 고안되지 않았다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도 (내가 아는 한) 그 실험들이 로렌츠와 아인슈타인 사이에서 결정하기 위하여 이런 방식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말하는 않았다할지라도.

오랫동안, 그리고 EPR 논증과 완전히 별개로, 원격작용이 없다는 생각은 원격작용의 생각이 그러한 것보다 모든 면에서 직감적으로 더 만족스러울지라도 특히 사실주의자에게 우리가 원격작용이 불가능하다거나 원격작용이 사실주의에 의하여 배제된다는 지식을 선험적으로 가진다고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말했다.

이 견해는 아인슈타인의 견해와 다소 다른데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러나 내 견해로 우리가 모든 상황 하에서 유지해야 하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체계 S의 실제적인 사실적 상태는 체계 S에게 실행된 것과 별개인데 SS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된 체계이다.’ 우리가 이 전제를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정말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전제를 여하한 상황에서도유지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결국 원격작용이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소적 작용과 같은 직감적으로 만족스러운 원리를 배척하기 전에, 전제 상황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심층적이고 포괄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물론, 내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원격작용은 특수상대성과 양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아인슈타인의 원격작용에 대한 해석과 (로렌츠의 해석과 반대로) 양립할 수 없다. 그래서 원격작용은, 수용된다면, 특수상대성 이론의 상당한 수정을 요구할 것이다. 특수상대성 이론이 , 아인슈타인의 해석 폐기되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할 의도가 나에게는 없다. 그러나 특수상대성은, 일방상대성 이론의 관점에서, 최초의 근사치만으로서 간주될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여하튼, 내가 말하고 싶은 요건은 게다가, 내가 믿는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이 말하고 싶어 했던 것 이렇다. 이 세상에서 사건들이 발생하는 정상적인 방식은 국소성 작용에 따라서 이 실험들의 분명한 결과에 완전히 반대가 된다. 우리가 원격작용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건들이 발생하는 정상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비정상적인 방식도 참작해야 한다. 그것은 일반상식에 대한 주요 타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모든 일반상식 개념들은, 이 개념을 포함하여, 항상 비판에 노출되어야 한다.

게다가, 이 실험들과 그리고 국소성의 배척과 충돌하는 것은 일반상식만이 아니다. 우리가 천문학으로부터 그리고 물리학의 전문적인 성공으로부터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또한 이것들과 충돌한다: 그것들 모두는 시간의 실제성과 원격작용의 배제를 암시한다. 훨씬 더 중요하게, 이 실험들로부터 그리고 원자물리학의 전체 상황으로부터 도출되고 있는 관념론적 결과들은 특히, 시간적 흐름이 주관적인 망상이라는 이론 내가 보기에 생물학과 그리고 진화론과 매우 크게 충돌한다.

우리는, 그렇다면, 이 최근의 실험들보다 매우 많을 것을 요구할 것인데, 우리가 국소성을 배척하기 전에 그 실험들에 관하여 많은 질문들이 어떤 경우에도 답변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 실험들은 조금도 흔히 주장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사실주의와 충돌하지 않는다. 철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은 지난 60년 동안 주로 마흐적(Machian) 실증주의의 간접적인 영향 아래서 모두 관념론적 입장을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후기(後記: Postscript)의 이 책이 시도하는 것들 중 한 가지 일은 관념론을 지지하는 과거의 논증들 중 많은 논증들을 많은 현대 물리학자들이 여전히 단지 당연시하는 검토하여 그 논증들의 오류를 밝히는 것이다.

 

IX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 논증의 연장으로서 간주될 한 가지 단순한 실험을 나는 제안하고 싶다. 원래 설명된 바와 같이, EPR ‘사고 실험은 논증일 뿐 실제적인 실험이 아니다. 나는 지식만이 불확정성(uncertainty)’을 생성하여 산란하는 데 충분한지 (코펜하겐 해석 하에서 주장되는 바와 같이) 혹은 산란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것은 물리적 상황인지를 시험하는 결정적인 실험을 제안하고 싶다.

우리에게는 근원 S(가령, 포지트로늄[positronium]) 있고 그로부터 상호작용을 하던 입자의 쌍들이 반대 방향들로 방출된다. 양과 음의 x-축을 따라서 두 개의 막 AB를 향하여 그 너비가 q인 구멍들을 지니고 반대 방향들로 움직이는 입자들의 쌍들이 조정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28쪽의 그림 2와 비교하라 [여기서 28쪽은 원문의 쪽수를 말하며 번역본과 다를 수 있다. 역자]). 양쪽에 있는 구멍 너머에는 반원으로 배열된 가이거 계수기들(Geiger counters)의 배터리가 있다.

방출된 입자들이 지닌 빛줄기의 강도가 매우 낮아서, 확률이 높아 왼쪽과 오른쪽에 동시에 기록된 두 개의 입자들이 방출 이전에 실제로 상호작용한 입자들이라고 우리는 전제한다.

 

그림 2

 

구멍 AB를 통과한 저 입자들은 가이거 계수기들에 의하여 계산될 것이다. 이 계수기들은 동시 계수기들(coincidence counters)이다; 다시 말해서 이 계수기들은 AB를 동시에 통과한 입자들만을 계산하기로 조정된다. 이로 인하여 틀림없이 상호작용을 한 입자들의 쌍들만 기록된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진다.

이제 우리는 A에 있는 구멍을 매우 작게 만들고 B에 있는 구멍을 매우 넓게 만든다. EPR 논증에 따라서, 우리는 B를 통과하는 입자의 y-좌표를, 비록 그 좌표의 구멍이 넓게 뚫려있을지라도, 근사하게 동일한 정밀도로써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A에 있는 구멍의 두 입자들에 대하여 (한 입자는 A를 통과하고 한 입자는 B를 통과한다) 정밀도 q로써 q를 측정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입자의 위치인 q에 관하여 상당히 정확한 지식을 획득한다 우리는 그 입자의 y 위치를 간접적으로 측정했다. 그리고 코펜하겐 해석에 따라서 이론에 의하여 그리고 특히 하이젠베르크의 관계들에 의하여 기술되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기 때문에, A에 있는 구멍이 B에 있는 넓게 뚫린 구멍보다 훨씬 좁다할지라도 우리는 B를 통과하는 빛줄기의 운동량 pA를 관통하는 빛줄기의 운동량만큼 산란한다고 기대해야 한다.

이제 산란은 원칙적으로 계수기들의 도움을 받아서 시험될 수 있다. 코펜하겐 해석이 옳다면, 폭넓은 산란을 나타내는 B(그리고 좁은 구멍의) 멀리 떨어진 면에 있는 그런 계수기들은 일치하는 사건들을 틀림없이 이제 계산한다: A에 있는 구멍이 좁혀지기 전에 어떤 입자들도 계산하지 않았던 계수기들.

요약한다: 코펜하겐 해석이 옳다면 위치 q에 대한, 왼쪽으로 가는 입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단순한 지식의 정밀도 증가는 틀림없이 그 입자들의 산란을 증가시킨다; 그리고 이 예측은 틀림없이 시험될 수 있다.

내가 예측하고 싶은 바와 같이, 시험이 코펜하겐 해석과 반대로 결정을 내린다면, 이것은 양자역학이 (가령, 슈뢰딩거의 형식주의) 해를 입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이젠베르크의 공식들이 모든 종류의 간접적 측정들에 적용될 수 있다는 하이젠베르크의 주장이 (코펜하겐 해석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폰 노이만[von Neumann]과 같은 틀림없이 양자역학의 한 부분으로서 간주할 주장) 해를 입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의 실험이 (나의 개인적인 기대에 반하여) 코펜하겐 해석을 뒷받침한다면 , y-위치가 B에서 간접적으로 측정되었던 입자들이 증가된 산란을 보여준다면 위치가 어떠할 것인가?

이것은 원격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에 대한 해석을 포기하고 로렌츠의 해석으로 복귀해야 하고 로렌츠의 해석과 함께 뉴튼의 절대 공간과 시간으로 복귀해야 함을 의미할 것이다. 그 경우에 우리에게는 특수상대성 이론의 어떤 공식도 포기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특수상대성은 형식주의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일한 형식주의는 특수상대성에 의해서나, 우리에게는 절대 공간과 시간이 있지만 그것을 탐지할 수는 없다는 로렌츠의 견해에 의하여 형식주의에 의하여 밝혀지는 이유들 때문에 해석될 수 있다. 반면 아인슈타인의 해석에서 특수상대성 이론은 동시성에는 절대적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절대 공간과 시간을 탐지하는 어떤 방식도 없다면 절대 공간과 시간의 탐지가 정말로 형식주의에 의하여 배제된다면 우리는 절대 공간과 시간이 존재한다고 전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물론 당시에는, 형식주의에 대한 상대성 해석이 단순하고, 우아하고 확신을 주는 반면, 정지한 에테르(ether at rest)와 뉴튼의 절대 공간과 시간에 대한 로렌츠의 집착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관하여 결정적인 것은, 나의 관점에서, 뉴튼의 이론이 제시된 여하한 다른 이론보다 더 성공적이었던 더 넓은 규모를 지니고, 뉴튼 이론과 매우 관련이 깊어서 뉴튼 이론의 모든 성공이 저 이론의 성공이기도 했고, 뉴튼 이론의 몇 가지 결과들에게 사실상 사소한 조정만 하는 대안적 이론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음을 밝혔다는 것이다.

물론 보어(Bohr) 역시 특수상대성 이론을 열렬히 찬양한 사람이었다. 그는 특수상대성 이론을 배척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거의 모든 사람처럼. 우리가 양자역학을 지지하고 싶어 한다는 조건으로 그런 배척이 필요하다는 것이 밝혀졌다면, 심지에 보어(Bohr)에게도 그것은 양자역학의 배척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특수상대성은 양자역학이 일치해야 하는 기준을 다소 세웠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해석을 로렌츠의 해석으로 대체하자는 제안이 나올 수 있는 것은 겨우 지금, (Bell)의 작업으로부터 유래하는 새로운 실험들에 비추어서이다. 원격작용이 있다면, 절대 공간과 같은 것이 있다. 로렌츠의 이론과 특수상대성 이론 사이의 결정적인 실험과 같은 것은 이전에 생각되지 않았다는 것이 기억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 절대 동시성을 도입하는 양자론으로부터 나온 이론적 근거들이 있다면, 우리는 로렌츠의 해석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X

 

후기(後記: Postscript)의 이 책은, 동시에 내가 형이상학적 결말(Metaphysical Epilogue)’이라고 부르는 것에 이르는 반면, 주로 물리학의 문제들과 관련되는데 형이상학적 결말은 내가 보기에 물리적 우주를, 그리고 특히 물질의 문제를 보는 새롭고 유망한 방식에 대한 개요를 개괄한다; 내가 희망하는 바, 혹시 양자이론의 주요 난제들 중 몇 가지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 이 책은, 그렇다면, 중요하다할지라도 미시물리학적 이론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물리적 우주론의 문제들에 의하여 영감을 받았다.

우주론적 사변은 과학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항상 그런 역할을 했다. 이 사변적 이론들을 조사하고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그 이론들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고 아마도 결국 심지어 그 이론들을 경험적으로 시험될 수 있을 정도까지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팽창하는 우주에 대한 정상[定常] 우주론[steady state theory] 저술가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시험들로 인하여 그 우주론은 폐기되었다.) 많은 우주론적 사변들은 특히 그 사변들에 대한 초기 설명들에서 시험될 수도 없고 경험적으로 반증될 수도 없다; 그리하여 나는 그 사변들을 과학적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으로 부르기를 선호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 중요한 이론들의 이중적 특징을 언급하기 위하여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metaphysical research programme)’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흔히 과학적 연구와 발전의 과정을 형성하고 결정하는 그 이론들이 지닌 프로그램적 특징; 그리고 그 이론들이 지닌 (어쨌든 처음에) 시험 불가능하고 그리하여 형이상학적인 특징.

현재 서적의 형이상학적 결말(Metaphysical Epilogue)’에서 나는 일반적인 연구 프로그램들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실제적인 문제들의 해석에 대한 적용을 위하여 나는 실제적인 연구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내 자신이 고안한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나는 과학의 역사를 연구하여 상황의 논리(logic of the situation)’를 재구성해야 했다; 다시 말해서, 물리학에서의 (그리고 나중에는 생물학에서의) 연속적인 문제 상황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 상황들을 통하여 내 자신의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과 그 프로그램의 많은 선구자들과 경쟁자들이 이해되고 비판되고 평가를 받기 위하여 밝혀져야 했다.

그런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들은 도처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 프로그램들은, 과학적 문제의 진보와 관련된 어떤 순간에도 만족스러운 설명으로서 간주되는 것을 결정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출현한다. 토마스 S. (Thomas S. Kuhn)패러다임(paradigms)’이라고 부르려고 했던 것은, 물론 나의 관점은 그의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를지라도, 다소 유사하다: 나는 이 프로그램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축될 수 있는 상황을 통하여 바라보고, 과학적 혁명들이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비판에 내가 과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저 종류의 활동 - 기인하는 것으로서 본다. 물론 과학이론에 대한 반증은 개종과 유사하게 과학자에게 (예를 들어 러더퍼드[Rutherford]의 경우에서와 같이) 흔히 충격을 가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인 개종일 것이다.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metaphysical research programmes)’이라는 명칭은 과학에 대한 특정 연구 프로그램들을 위하여 나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아직 시험이 불가능한 연구 프로그램들을 위하여. 10년 이상이 지나서야 나의 협력자들 중 몇 분이 그 명칭을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scientific research programmes)’으로 바꾸었다. 이 연구 프로그램들은 틀림없이 과학과 관련되어 과학의 발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들은 통상적으로 아직 시험 가능한 과학 이론의 특징을 지니지 못한다. 그 프로그램들은 과학적 이론이 것이지만 그렇다면 더 이상 그 프로그램들을 연구 프로그램들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그 프로그램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론들보다 비판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유지하기는 훨씬 더 수월하다.

실제로, 연구 프로그램들의 장점들을 칭찬할 필요는 없다 (그 프로그램들에 대하여 방법론을 개발할 필요는 말한 것도 없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전체 교육에 의하여 연구 프로그램들에 맞추어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쿤[Kuhn]이 옳다고 아마도 말할 것이다). 연구 프로그램에 의하여 고착되거나 혹은 계획되는[programmed by]’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훨씬 더 많다. 통상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연구 프로그램을 채택하여 그 프로그램을 고수하도록 격려하는 것보다 연구 프로그램을 비판하고 그 프로그램으로부터 이탈할 것을 격려할 필요가 물론 판매해야 할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없다면 훨씬 더 많다.

(상황 논리를 통한 이것에 대한 단순한 설명이 있다. 젊은 과학자가 매우 특이한 재능을 지녔고 또한 특수하게 잘 교육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들어가고자 하는 분야의 풍요로움에 의하여 매우 압도당하는 느낌을 지닐 것이고 그가 보는 과제들에 의하여 크게 과중한 부담을 지는 느낌을 지닐 것이어서 그는 그 분야에 공헌하는 자신의 능력에 절망한다. 그의 과제는 연구 프로그램에 의하여 훨씬 더 쉬워진다. 이 상황적 설명은 평범한과학자라는 쿤[Kuhn]의 개념을 매우 부분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연구 프로그램이 거짓 형이상학에 근거할 것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떠오를 때만 그 프로그램을 의식하게 된다. 우리가 특정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 안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고 깨닫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안들이 가능함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깨달음은, 우리가 우리의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을 발견 학습법(heuristics)으로서 포기하고 대안들을 아마도 더 유익한 것으로서 간주함을 의미한다.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이 정말로 의식적이 되는 (혹은 경향 우주론의 경우에서와 같이 심지어 의도적으로 창안되는) 저 드문 경우들에서, 우리가 그 프로그램에 대하여 고도로 비판적이 되어서 가능한 대안들을 살펴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경고로서만 권유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 지닌 합리성의 그리고, 더욱 특히, 과학이 지닌 합리성의 문제이다. 우리는 항상 정상적인 과학자들이 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연구 프로그램의 무의식적 전제들 안에서 맹목적으로, 무비판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 ‘정상적인 과학자는 가능한 한 최고로 이성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는 가능한 한 최고로 비판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들에 대한 방법론자들은 내가 보기에 지식의 성장에서 비판이 수행하는 근본적인 역할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내가 보는 바와 같이, 비판은 과학자의 그리고 지식을 진척시키고 싶어 하는 여하한 사람의 기본적인 임무이다.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문제들을 보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내는 것은 사람들의 의무가 아니다: 독창성은, 더 정확하게, ()들이 준 재능이다.

정말로, 최신 유행에서 나타나는 연구 프로그램에 대한 매혹은 독창성에 대한 오래된 열망과 그리고 새롭고 더 나은 아이디어들을 낳을 발견 학습법, 알고리즘(algorithm), ‘과학적 방법에 대한 열망과 관련되어 있다. 내가 다른 곳에서 암시한 바와 같이, 그런 발견 학습법, 그런 실증적 방법론은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아이디어들을 내고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오래된 방법의 문제에 관하여, 내가 보기에 합당한 답변은 어떤 사람들은 많은 아이디어들을 내고 그 아이디어들 중 몇 가지는 아마도 훌륭할 것이다 그들 자신이 낸 아이디어들에 대하여 고도로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아이디어들을 내지 못하여 아이디어들에 대하여 그다지 비판적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혹시 우리가 내는 아이디어의 숫자를 늘릴 수 있고, 우리는 틀림없이 자신이 내는 모든 아이디어들에 대하여 스스로 비판적인 태도를 늘릴 수 있다. 그러나 여하한 경우에도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런 발견 학습법이 있는 듯이 보일지라도 - ‘훌륭하거진보적인듯이 보이는 새로운 아이디어들이나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답사가능한 방법이 있다할지라도 바로 그 방법에 대하여 비판적이 되는 것은 우리가 지닌 주요 임무들 중 한 임무로 남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진보하고 있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도 그리고 특별히 그럴 때에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공산이 크다. 심지어 아인슈타인도 전자기장 이론과 중력장 이론을 통합하는 자신의 연구 프로그램에 관하여 그릇된 길로 가고 있었던 듯이 보인다 (내가 이 책에서 나중에 설명할 것과 같이; 26절 참조).

서론_서문_1982년_양자이론에_대한_사실주의적이고_상식적인_해석.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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