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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이 주는 선물" - 네덜란드인의 대한민국 유랑기

이윤진이카루스 2014. 9. 1. 13:06

여행

Live Simply #1 "여백이 주는 선물"

네덜란드에서 온 이방인의 심플한 대한민국 유랑기바퀴|바퀴에디터|입력2014.08.27 13:26|수정2014.08.27 13:29

 

 

한국에 정착한 지 어느새 1년 하고도 반년의 세월이 흘렀다. 고향 암스테르담에 비해 이국적이고 신기한 것들의 진수성찬이었다. 그래서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컸다. 획일화된 여행정보가 아닌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고 싶었다.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평소 생각에 따라 심플하기 그지없는 대한민국 방랑에 나섰다. 때로는 단순함이 복잡함을 이기므로.

*욘 스카켄라드(Jorn Schakenraad)는 스스로를 '크리에이티브 큐리어스 트래블러(Creative Curious Traveler)'라 칭하는 는 네덜란드 태생 디자이너다. 더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 새로운 사람과 환경에 도전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에 정착해 느끼는 다양한 삶을 작품으로 옮기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여행은 이방인이 된 낯선 느낌을 받아들이며 시작된다. 미국,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볼리비아, 뉴질랜드, 일본 그리고 현재 정착하고 있는 한국 서울에 이르기까지. 그래서인지 사람들로 북적대는 장소나, 세상 어디에도 있을 것 같은 익숙한 분위기의 장소는 지루하다. 서울을 시작으로 어디를 가야 할 지 고민했다. 혼자 가고 싶었다. 항상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다보니 가끔 혼자일 때가 그리웠다. 자동차는 필요 없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여행은 항상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기운이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누군가 인천을 이야기했다. 한국에 들어올 때 인천공항을 통해 들어오긴 했지만 낯설었다. 일 때문에 송도에 잠깐 방문한 적이 있었다. 특징이 없던 높은 건물들과 반듯한 도로, 계획 도시라는 이름처럼 아무런 감흥도 영감도 주지 못한 곳이었다. 그런데 인천이라니! 1950년대 옛 모습을 볼 수 있거니와 바다와 섬 그리고 드넓게 펼쳐진 갯벌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른 아침 자전거 페달에 힘을 실었다.


인천 시내에 들어서니 기분이 묘했다. 2014년과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 펼쳐졌다. 비 예보가 있었지만, 구름을 뚫고 나온 해는 뜨거웠다. 패니어까지 장착한 내 여행용 자전거는 생활 자전거들이 돌아다니는 마을에서 유난히 돋보였다. 내 한 몸 지나치기 힘들 정도로 좁은 골목과 헌 책방이 늘어선 골목은 독특했다. 화장실이 필요해 잠시 들렀던 여인숙의 풍경은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다. 버려진 부지에는 채소가 어지러이 자라고 있는 텃밭과 들꽃 그리고 놀러나온 듯한 여자들이 있었다. 단체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듯 외국인인 내게 스스럼없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구했다. 영어와 한국어가 반반 섞인 말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유쾌하게 웃어대는 그녀들처럼 감정에 솔직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기분 좋다. 사심없이 상대를 보는 마음, 긍정적인 마인드야말로 '리브 심플리(Live Simply)' 아니겠는가.


아침 일찍 출발해서인지 배가 고팠다. 진정한 한국의 맛을 보려면 재래시장을 가라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바퀴를 돌려 신포시장으로 향했다. 가구 매장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며 문득 이전부터 품고 있던 궁금증이 떠올랐다. 한국 가게들의 셔터 색은 왜 하나같이 남색, 짙은 회색 일색인지 말이다. 덕분에 오후 나절의 도시는 전부 핏기 없는 모습인 것 같아 안타까웠다. 동네 주민의 도움을 빌려 시장으로 향하는 길은 수월하게 찾을 수 있었다. 복작복작한 시장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달콤하면서 매콤한 냄새가 피어 올랐다.


중국 요리에 쓰일 것 같은 커다란 솥에 빨간 양념의 치킨이 섞이고 있었다. 긴 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홀린 듯 검정 솥만 쳐다보고 있었다. 만두를 찌고 있는 가게와 즉석에서 튀겨내는 어묵 가게를 지나니 차이니스 레스토랑이 보였다. 붉은 색 용과 홍등이 매달린 그곳만이 시장서 유일하게 컬러풀한 색을 뽐내는 곳이었다. 중국 단체 관광객 한 무리가 곁을 지나쳤다. 관광 가이드를 따라 한 손으로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나머지 손으로는 만두 같은 빵을 먹기 바빴다. 나도 혼자가 아니었다면 저런 모양이지 않았을까.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볼리비아의 라파스 시티였다. 숨이 턱에 찰듯한 고산 지대에 위치한 그 도시는 익스트림한 곳이었다. 라파스를 중심으로 아마존 정글투어, 기암괴석, 선인장으로 가득한 물고기섬, 소금 사막까지 하루 걸러 하루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한국을 여행하면서 그 같은 기분을 느껴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바로 여행이 주는 묘미니까.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하는 도심에서 벗어나 월미도까지 도로를 달렸다. 짭쪼름한 바다 내음과 놀이기구에서 내지르는 환호성이 가까워질수록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바닷가 도시 특유의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산책로를 걸었다. 유람선이 있기에 기웃대고 있자니 "여기서 배 타면 영종도 가. 저기서 표 사야 돼."라는 말이 들려왔다. 매표소 앞 노점 아주머니였다. 인심좋은 얼굴로 이것저것 물었지만 아쉽게도 전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젊은 총각이라고 나를 부르던 아주머니가 차가운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건네는 돈은 받지 않았다. 그저 재미있게 놀다 가라고 말할 뿐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마따나, 무언가를 공짜로 받으면 그만큼 되돌려줘야 하는 부담감을 느꼈다. 하지만 한국에서 경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짜'는 받을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여행 중에 마주치는 풍경과 사람들, 그 안에 스며든 문화와 만나는 시간은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유람선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페리에 탑승했다. 많은 이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새우깡을 꺼냈고, 배 주위를 날아다니던 갈매기 떼들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낚아채갔다. 길들여진 동물이 아니건만 어쩌면 저렇게 기가 막히게 과자만 골라 먹을 수 있을까. 15분 남짓한 시간 동안 갈매기와 노닐다보니 영종도가 금방이다. 구읍뱃터에 내려서부터 본격적인 라이딩에 나섰다. 차는 없었다. 맞바람이 거셌다. 해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도시와 다를 바 없는 고층 아파트가 나타났다. 이제 막 조성한 듯한 공원도 보였다. 땅이 넓은데 왜 굳이 아파트에 모여 사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도시 미관을 해치는 요소 중에 가장 큰 것이 아파트라고 생각한다. 공장처럼 네모난 틀에 갇혀 살다 보면 둥근 감성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든다.


본격적인 해수욕 시즌이 아니라 그런지 해수욕장은 조용하고 한적했다. 여남은 개의 텐트, 워크숍을 온듯한 사람들 그리고 뛰어 노는 아이들이 전부였다. 물끄러미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니 고향 친구들이 생각났다. 살던 곳을 떠나오면서 많은 것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은 돈이었다. 도시에서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더 갖고자 하는 마음만큼 돈에 휘둘렸다. 그런데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벌이와 상관없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지고 덜 가지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주어진 행복을 충분히 누리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바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아이들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학교에서 배웠다며 짧은 영어 문장을 조잘대던 11살 난 여자 아이는 금새 내 손을 잡고 물풍선을 가지고 놀아달라며 매달렸다. 8살 남자아이는 수줍게 목에 걸고 있던 수첩을 내밀어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코끼리와 드레스 입은 공주님을 그려주면서 어린 왕자에게 양을 그려주던 생택쥐베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아이들은 어른들에 반해 낯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친구가 되기 쉽다. 텐트 앞에 놓여진 자전거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아이들이 자전거를 태워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위험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모래사장에서라면 괜찮을 듯도 싶었다. 태울 수 없던 여자 아이는 어딘가 헐레벌떡 뛰어가더니 제 몸집만한 분홍 자전거를 끌고 왔다. 이렇게라도 함께 하고 싶었으리라. 남자아이가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엄마', '집'이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해수욕장에서 걸어서 2분 거리인 집은 다름아닌 아이네 부모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눈이 동그래진 어머니가 연신 나와 아이를 훑어 보았다. 네덜란드에서 온 욘이라고 소개한 내게 눈길을 떼지 못하던 어머니의 시선이 변화됨을 느꼈던 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이들과 영어공부를 하고 물총 싸움도 하는 내가 기특해 보였을까 아니면 신기하게 보였을까. 잠시 뒤 먹어보라며 건넨 것은 다름 아닌 한국식 핫도그였다. 바삭한 튀김옷에 뿌려진 설탕의 달콤함, 토마토 케첩의 새콤함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입에 맞을지 몰라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어머니께 정말 맛있다고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사실 도시 생활이라는 것은 잘 짜인 시스템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도시를 떠나 여행하는 순간 '여백'이라는 것이 생긴다. 주어진 시간을 스스로 채워나가는 것, 그리고 빈 공간을 채울 무언가 가령 자연, 문화, 정서 그리고 사람들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한국에서 나는 그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행자고 이방인일 뿐이지만, 여행 후 채워온 무언가가 현실에서 느껴질 때 그들에게 조금씩 가까워짐을 알게 되며 다음 여행지가 줄 선물을 기대하게 된다.

글: 욘 스카켄라드(Jorn Schakenraad)
에디터: 김수진
사진: 김대봉
협찬: 파타고니아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