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
III 장
양자론의 역설(THE PARADOXES OF QUANTUM THEORY)의 해결을 향하여
16. 불확실(indeterminacy)인가 산란(scatter)인가?
후기(後記: Postscript)의 본서에서 내가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주로 서론적이었다. 이것에는 두 가지 예외가 있다: 양자론의 객관성에 대한 나의 토론과, 소위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에 대한 나의 토론이다. 이제 나는, 경향 해석이 양자론의 다양한 역설들을 해결하는 방식에 대하여 개괄하는 데로 나아간다. 이 목적을 위하여 나는 현재의 절에서 불확실 관계들(indeterminacy relations)을 그리고 다음 두 가지 절에서 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y), 그리고 로젠(Rosen)의 실험과 소위 ‘이중슬릿 실험’을 토론을 할 것이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소위 ‘불확실 관계들(indeterminacy relations)’에 관한 나의 견해들은 실제로 나의 확률에 대한 옛 빈도이론에서 경향 해석으로의 천이(遷移: transition)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파속의 붕괴[the reduction of the wave packet]을 설명하는 것에 관련될 때, 두 가지 해석들 사이의 유사성에 기인한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의 73절에서 설명될 75절에서 토론된 공식
Δx Δpx ≽h를
나는 아직도 우리가 해석해야 하는 형식주의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공식을 산란관계(scatter relation)로서 해석한다. 유일한 변화는 내가 지금 그 공식을 단칭 확률 서술(singular probability statement)로서, 그리하여 단일 입자가 ‘산란하는’ 경향을 결정하는 것으로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공식은, 우리가 문제의 실험을 매번 단일 입자를 사용하여 여러 번 반복한다면, 실제적인 통계적 산란이 관찰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리하여 그림 4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Δx를 (수평적) x-방향에 있는 슬릿의 너비로 하고, 입자들의 – 광양자들이나 전자들 - 단색(monochromatic) 광선이 슬릿 위에 (수직으로) 떨어지게 하라:
그림 4
공식은, 우리가 슬릿을 좁게 만들수록 수직 방향으로부터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산란하는 입자들의 경향이 더 커질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것이 전부다. 해석은 객관적이고 그 해석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주체,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간섭, 그리고 주체에게 필요한 무지에 관여하지 않는다. 공식은, 심지어 해석된 공식조차도, 이 문제들에 관한 어떤 것도 포함할 수 없는데 이유인즉 미적분 공식들이 객관적인 공식들로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75절에서처럼)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소 더 많이 말할 수 있다.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에서 언급한 것에 따라서, 우리는 이 산란 관계들이 시험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광선이 슬릿으로부터 나타남에 따라서 광선의 길에 사진건판을 놓음으로써 우리는 그 관계들을 시험한다 (그림 4 참조). 우리의 예측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슬릿의 고정된 너비 Δx를 사용하여 실험을 매우 자주 반복한다면, 공식에 의하여 지적되는 바와 같은 지역에서 입자들이 건판을 검게 만드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슬릿의 변화하는 너비를 사용하여 몇 가지 연속되는 실험을 준비한다면, 산란 관계들에 일치하여 건판의 검게 된 지역의 규모가 (개략적으로) 반대로 변함을 우리는 발견할 것이다.
산란 관계들이 이런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시험될 수 있음을 누군가가 부인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험은 쉽게 실행될 수 있다.
이 시험이 (i) 통상적인 주관적 해석에 의하여 허용되는 지식을 초월하여 소급언급적인(retrodictive) 지식을 틀림없이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ii) 이 지식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하’거나 ‘쓸데없지’ 않고 고도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고 나는 이제 – 전에 그랬던 바와 같이 –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론을 시험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정확하게 이 소급언급적인(retrodictive) 지식이기 때문이다.
(i) 사진건판이 검게 되는 것은 많은 단일 실험들의 결과이다. 이 실험들 중 한 가지 실험을 생각하자: 그 실험은 어떤 입자 하나의 단일 부딪힘을, 가령, 건판의 장소 x1에서 야기할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각 A를 (수직방향과 입자가 취하는 바뀐 방향 사이에) 그리하여 x-방향에 있는 입자의 운동량을 결정한다. 그리하여 위치공간에서의 우리의 측정 x1은 이 경우에 운동량의 측정으로서 또한 해석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불확실 관계들을 크게 초과하는 정확도로써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얻는다.
(ii) 물론 그렇게 얻어진 지식은, 운동량에 관한 한, 소급적이거나 소급언급적(retrodictive)이다. (위치에 관한 한 우리가 – 입자가 첫 번째 건판에 의하여 흡수되지 않는다면 – 두 번째 건판 위에서 첫 번째 것과 매우 가까운 점을 틀림없이 얻고 첫 번째 것 밑에 그 점을 두기 때문에, 지식은 예측적이다.) 이유인즉 입자는 건판과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속도가 늦추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iii) 소급언급적인(retrodictive) 정보에 관한 한, 입자의 흔적이 슬릿까지 곧장 다시 추적될 수 있다는 견해를 우리가 수용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입자의 과거 흔적에 대한 이 계산에 의심스러운 위상이 있다고, 그리고 그것에 우리가 물리학적 중요성을 부착시키는지 아닌지는 ‘취향의 문제(matter of taste)’라고 하이젠베르크(Heisenberg)가 제안한다는 것이 기억될 것이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73절, 주석 5 및 6의 원문 참조). (슐릭[Schlick]과 다른 사람들은 소급언급적인(retrodictive) 지식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했다.)
나는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다. 산란 관계들은 운동량의 산란이 슬릿의 수축에 따라서 증가한다고 예측함을 우리는 보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슬릿 다음에서 (그림에서 아래) 즉각 산란을 시험해야 한다. 슬릿으로 거슬러서 입자의 흔적을 추적함으로써만 이것을 우리는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은, 형식주의가 허용하는 소급언급적인(retrodictive) 계산들이 산란 관계들에 관하여 언급된 주장을 시험하는 것에 대하여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함을 보여준다.
상황은, 통상적으로, 동전던지기와 매우 많이 유사하다. 던지는 기계에 대한 이론은, 머리나 꼬리가 나타나는 경향들이 기계에 의하여 던져지는 동전을 근거로 동일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이 주장을 시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양한 던지기들의 결과들을 관찰해야 한다. 이 관찰들은 우리에게 소급언급적인(retrodictive) 지식만을 제공한다. 이 관찰들은, 첫 번째 사진건판이나 필름 밑의 두 번째 사진건판이나 필름이 첫 번째 것에 의하여 수행된 입자의 위치 측정을 확인할 것과 꼭 마찬가지로, 동전의 추가 모험들에 관한 예측을 낳지 않는다 – 내가 동일한 동전을 다시 본다면 그 동전이 머리 부분을 위로 한 채 여전히 놓여있을 것을 내가 발견한다는 다소 하찮은 예측을 제외하고.
17. 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y), 그리고 로젠(Rosen)의 실험.
그렇다면 우리는, 입자의 위치와 동시에 운동량을 우리가 결정하도록 허용하는 소급언급적(retrodictive) 계산들에게, 물리학적 의미와 관련성을 귀속시켜야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결과를 지닌다: 입자는 항상 위치와 운동량을 지닌다; 그리고 이론은 그것들을 선명하게 예측하지 못하는데 유일한 이유는 운동량이 주어지면 다양한 위치들을 점유하는 경향들을, 그리고 위치가 주어지면 다양한 운동량들을 점유하는 경향을 우리에게 오직 알리는 것은 확률주의적 이론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푸른 눈이나 갈색 눈, 기타 등등을 선택한다면, 당신은 머리카락 색깔에 관하여 다양한 분포들을 얻을 것이다. 유사하게 당신이 머리카락의 색깔에 따라서 선택한다면, 당신은 눈 색깔에 관한 다양한 분포들을 얻을 것이다. 두 가지 모두에 따라서 당신은 선택할 수 있는가? 물론이지만, 그럴 경우에 한 가지 속성을 다른 속성과 연관시키는 예측적인 통계적 이론이거나 경향 이론에 대한 여지는 없다.
전체 양자 수수께끼는 이것보다 더 신비롭지 않다.)
이 관점으로부터, 입자는 위치와 운동량을 지닌다는 것과 이론은 – 동전던지기에 관한 이론처럼 경향 이론인 – 통계적 예측들이나 경향 예측들에 관심을 가질 따름이기 때문에 비록 소급적으로만 일지라도 우리가 심지어 그것을 알 수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77절에서 입자들은 실제로 정말로 위치와 운동량을 지닌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한 가지 실험을 도입했다. 이 특정 실험은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그 후 곧,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Podolsky)와 로젠(Rosen)은 이론에 따라서 우리가 입자들에게 위치들과 운동량들 모두를 역시 귀속시켜야 한다는 것을 – 코펜하겐 해석과 강력히 대조적으로 - 밝힐 의도를 지닌 한 가지 실험을 발표했다.
(아인슈타인이 친절하게 편지로 나에게 알려주었던) 이 사고-실험(thought-experiment)은 보어(Bohr)에 의하여 즉각 혹독하게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보어(Bohr)의 답변은, 내 견해로, 효과가 없다. 이것은 또한 끝까지 아인슈타인의 견해로 남았다.
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y), 그리고 로젠(Rosen)의 개념은 매우 간단하다. 우리는 두 개의 입자 A와 B를 충돌시킬 것이다. A는 멀리 날아간다. B는 관찰되고 측정될 수 있다. B의 위치를 측정할지 아니면 B의 운동량을 측정할지를 우리는 자의적으로 선택할 것이다. 우리가 B의 위치를 측정하겠다고 결정한다면 우리는 멀리 떨어진 A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다. 우리가 B의 운동량을 측정하겠다고 결정하면 우리는 멀리 떨어진 A의 운동량을 측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가 위치와 운동량 양쪽 모두를 예측적으로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할지라도 A는 틀림없이 위치와 운동량 모두를 지닌다. 이 아름답고 단순한 논증은 내가 보기에 결정적이다.
이 논증은 또한 지대한 영향을 가져올 결과들을 지닌다. 정통 견해에 따르면 양자역학적 입자는 정확하게 그 입자에 위치와 운동량 모두를 동시에 귀속시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에 의하여 보다 평범하거나 ‘고전적인’ 입자들로부터 구분된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입자를 시각화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입자는, 명확한 위치를 ‘점유하는’ 순간, 마치 입자의 운동량이 상당한 범위에 걸쳐서 ‘얼룩지게(smeared)’ 되는 양 행동한다; 그리고 반대로, 입자가 명확한 운동량을 ‘점유할’ 때 위치가 ‘얼룩지게(smeared)’ 되는 양 행동한다. ‘점유’는 입자에 간섭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입자를 측정하는 실험에 종속시킴으로써 자극된 일종의 반응이다.
형식주의에 관한 이 해석은 내가 보기에 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y), 그리고 로젠(Rosen)의 아이디어에 의하여 반증된다. 이유인즉 입자 B의 위치나 운동량을 측정함으로써 우리가 입자 B에 간섭하는 순간 정말로 멀리 떨어져 있을 입자 A에 대한 간섭은 없기 때문이다.
이 명백하고도 간단한 논증이 결정적일지라도, 그 논증은 그런 상태로 수용되지 않았다. 그 논증이 배척된 이유는 반대-논증(counter-argument)이 아니라 단지 보어(Bohr)의 권위라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의 간단하고도 명백한 개념들과 대조적으로 보어(Bohr)의 반대-논증(counter-argument)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그 보어(Bohr)의 반대-논증(counter-argument)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가 나에게 말한 바와 같이), 그 반대-논증(counter-argument)을 명백하고도 간단한 형태로 제시할 수 있었던 어떤 물리학자도 나는 만나지 못했다. 내가 그 반대-논증(counter-argument)의 요점을 이해했다고 나는 정말로 생각하지만 나는 전혀 확신하지 못한다.
내가 그 보어(Bohr)의 반대-논증(counter-argument)을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그 논증은 이렇다. 우리가 B의 위치를 측정할지 아니면 B의 운동량을 측정할지를 결정할 (A가 떠난 후에) 때 우리는 그리하여 두 가지 다른 실험 장치를 선택하기로 한다; 간단히 표현하여, 우리가 B를 위치공간에 관련시키는 것을 허용할 실험적 틀과 우리가 B를 운동량 공간에 관련시키는 것을 허용할 또 다른 실험적 틀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두 가지 실험적 장치들은 두 가지 다른 좌표 체계들을 세우는 것에 해당한다. 장치들은 서로를 배재하여 (혹은 ‘상보적’) 우리는 두 가지 공간들이나 좌표 체계들을 하나로 결합할 수 없다고 논증은 계속 주장한다. (보어[Bohr]는 이 배타성이나 ‘상보성’을 기묘하게도 숙고하는데,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B의 위치나 운동량을 측정하는지를 우리가 선택해야 하며 우리는 같은 시간에 두 가지 모두를 측정할 수는 없다는 전제를 수용했기 때문에 그 배타성이나 ‘상보성’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을지라도 보어[Bohr]는 그렇게 숙고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위치적 틀을 선택한다면 A는 이 틀과 관련됨을 (B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우리는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가 틀의 운동량을 선택한다면, A는 이 다른 틀에 관련되게 된다. 결론은 A가 두 가지 좌표 체계들에 동시에 관련될 수는 없어서, A가 운동량 틀에 관련되지 않는다면 A에게 운동량을 귀속시키거나 A가 위치 틀에 관련되지 않는다면 A에게 위치를 귀속시키는 것은 무의미하게 (내가 그것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된다.
이것이 내가 보어(Bohr)의 논증을 이해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이라고 나는 전혀 주장하지 않는다. 나의 비판은, 여기서 이어지는데, 그리하여 보어(Bohr)를 겨냥하지 않았지만 그가 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y), 그리고 로젠(Rosen)에 한 답변에 대한 내 자신의 해석본을 겨냥할 따름이다.
나의 비판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로, 아인슈타인과 그의 공동연구자들에 대한 답변은 아인슈타인이 공격했던 이론의 은밀한 변화인 토대의 변경으로 구성된다. 변경 이전에, 한 가지 변수에 관한 뚜렷한 가치를 차지하여 또 변수에서 얼룩지게(smeared) 됨으로써 입자가 측정에 반응했다고 우리는 들었다. 그러나 지금 의도되었던 것은 완전히 다르고 훨씬 더 해롭지 않은 것이었다고 우리는 듣는다. 때때로 한 가지 좌표 체계는 적용 가능하고 다른 때에는 또 다른 좌표 체계가 적용 가능하지만 두 가지 좌표 체계 모두는 함께 적용 가능할 수 없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은 입자 안에 없다. 이것으로 인하여 입자 자체가 하는 일은 완전히 열려있다. 우리가 입자를 상응하는 좌표 체계에 관련시킬 수 없다면 위치와 운동량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제안은, 사람이 소득세를 내지 않으면 사람을 건강하다고 부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주장만큼 불필요하다.
나의 주장의 두 번째 부분은 아인슈타인과 그의 공동연구자들에 대한 답변이 요점을 놓친다는 것이다. 주요 논증은 불확실 공식들이 무효라는 것도 아니고 양자론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또한 심지어 아인슈타인 그렇다고 말했을지라도 양자론이 불완전하다는 것도 아니다). 주요 논증은, 내가 당신의 키나 당신의 몸무게를 측정하고 싶어 하는지를 내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면 – 그리고 내가 나의 결정을 당신에게 간섭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 당신은 키와 몸무게를 동시에 지니지 않지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측정의 자극에 맞춤으로써 한 가지나 다른 한 가지를 채택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단순한 요점이었다.
합리성은 쟁점이 되는 요점이었다. 문제는, 미묘하고도 고도로 학자적인 논증을 통하여 우리가 옹호될 수 없는 입장을 계속 지지할지가 아니다. 문제는 물리학에서 비판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혹은 옹호적이고 변호적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이다. (우리는 인습주의적[conventionalist] 책략이나 유사한 방법들을 통하여 항상 반증들을 회피할 수 있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19절 이하 참조.)
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y), 그리고 로젠(Rosen)의 실험에서 떠나기 전에, 데이비드 봄(David Bohm)에 의하여 재발견된 소위 드 브로이(de Broglie)의 파일럿파(pilot wave) 이론이 수용될 수 없는지에 대하여 내가 의심스럽게 느끼는 이유를 나는 지적하고 싶다. 아인슈타인, 포돌스키(Podolsky), 그리고 로젠(Rosen)에 대한 봄(Bohm)의 답변 때문에 나는 그렇게 느낀다. 봄(Bohm)은 입자들이 확실한 위치들과 운동량들 모두를 지닌다는 견해를 정말로 수용한다. 그러나 그는 이론과 특히 불확실 관계들을, 우리가 여기서 도출한 단순한 결론을 자신이 수용할 수 없다는 방식으로 해석한다. 대신에 B의 위치를 측정함으로써 우리는 A를 정말로 간섭한다고 – 초광속(superluminal velocity)으로 – 그는 주장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B의 위치를 측정한다면, 아무리 A가 멀리 움직여 갔다할지라도, 우리는 정말로 B에게 간섭하고 또한 A에게도 간섭한다. 이 제안에는 그 제안을 추천할 것이 없다는 데 나는 아인슈타인과 의견을 같이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에 대한 봄(Bohm)의 나중 답변에 관해서도 나는 똑 같이 말해야겠다. 이 논문에 있는 봄(Bohm)의 마지막 언급은 인용될만하다. 그는 자신이 ‘넓은 범위의 현상들 설명하는 이론을 폐기하는 데 대한 두 가지 유효한 이유만을 수용할 텐데. 한 가지 이유는 이론이 내부적으로 일관적이 아니라는 것과 두 번째 이유는 이론이 실험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에 반대하여, 먼저 아인슈타인은 양자론 폐기를 제안하지 않았음이 지적되어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경쟁하는 다양한 해석들에 대한 수용가능성을 토론했을 따름이다. 두 번째, 봄(Bohm)이 진술한 이유들 외에 이론을 비판하는 데 대한 유효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이론은 분명하게 반증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 전하나 입자 천이[transition]에 대한 설명에서와 같이 이곳이나 저곳에서 실패할 것이다; 혹은 한 가지 이론은 또 다른 이론보다 현상들을 아마도 덜 만족스럽게 설명할 것이다.)
18. 이중슬릿 실험.
나는 여기서 영(Young)에게서 기인하는 한 가지 형태의 실험을 토론하고 싶은데 그 실험은 내가 믿기에, 전체 문제의 바로 근저를 이룬다. 그 실험은 보어(Bohr)에 의하여 반복적으로 토론되었고 의심할 바 없이 보어(Bohr)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정말로 아마도 경향 해석으로 통해서 않고는 그 실험은 어려움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실험 장치는 광원(a source of light)으로 (혹은 전자들로) 구성된다; 광원이 가능한 한 작을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좁은 슬릿을 지닌 첫 번째 스크린으로 구성된다; 광선을 통과시키는 두 개의 슬릿을 지닌 스크린으로, 그리고 빛의 파동이론에 따라서 우리가 간섭무늬들(interference fringes)을 관찰할 또 다른 스크린으로 (혹은 사진건판)으로 구성된다. (그림 5를 참조할 것.)
그림 5
주요 문제는 이렇다. 단지 하나의 양자가 (하나의 입자) 한 가지 실험에서 방사될 때까지 우리가 광원을 어둡게 하고 이 실험을 하루에 한 번씩 반복하여 많은 반복 실험들의 결과들을 겹쳐놓는다(superimpose)면, 우리는 여전히 간섭무늬들(interference fringes)을 얻는다 (혹은 그렇다고 우리는 전제한다). 두 개의 슬릿 중 한 개가 닫힌다면 이 무늬들을 변한다: 우리가 위 슬릿만을 잠시 동안 열어 두고 그 다음에 아래 슬릿을 잠시 동안 열어 둔다면 얻어진 결과는, 두 개의 슬릿 모두가 동시에 열린다면 얻어지는 결과와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리하여 두 개의 슬릿은 무늬들을 낳은 데서, 혹은 입자가 또 다른 스크린이라기보다는 두 번째 스크린 위의 한 지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확률을 결정하는 데서 공동-작용한다. (이 공동-작동은 호이겐스 원리의 도움을 받아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각 입자는 슬릿들 중 하나를 통과할 수만 있다. 다른 슬릿이 열려있다는 (혹은 닫혀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어떻게 각 입자는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
경향 이론의 관점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다: 경향들을 결정하는 것은 전체 실험적 장치이다. 여하한 한 가지 실험에서 가능한 결과들은 열려진 두 개의 슬릿들의 경우에서 한 개의 슬릿만 열린 경우와 분명하게 다르다. 그러나 경향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가능성들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과들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차이점은 수학적 이론으로부터 - 경향들을 결정하는 방정식들의 파동 특징들로부터 – 귀결된다.
그리하여 입자는 슬릿들 중 하나만을 통과할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다른 슬릿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 채로 남을 것이다. 다른 슬릿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전체 실험적 장치와 관련한 입자들의 경향들이지 입자 자체는 아니다: 두 번째 스크린 위의 한 지점이나 다른 지점에 도달하는 데 대한 경향들.
상황은 잘 알려진 우연의 게임에서의 (핀 보드 게임) 상황과 유사하다: 작은 공들이 판을 굴러 내려가서 핀들을 맞히거나 각 핀의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움직인다. 우리가 한 개의 공을 굴러 내리면, 그 공이 건드리지 않는 많은 핀들이 있을 것이다. 그 많은 핀들은 그 공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많은 핀들은 실험적 장치에 내재적인 경향들에 영향을 미친다: 이 핀들이 변하거나 제거된다면 경향들은 바뀔 것이다. 그리고 실험이 자주 반복되는 순간 통계적 결과들은 변한 경향에 따라서 바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답변이다. 그 답변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아마도 두 개의 슬릿 중에서 어느 슬릿을 입자가 통과하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알아낼 수 있도록 만들 어떤 다른 장치를 우리는 고려한다. (예를 들어, 전자가 슬릿으로부터 나타나거나 슬릿으로 들어갈 때 우리가 전자를 ‘보거’나 촬영할 수 있도록 허용할 광선.) 그런 장치는 실험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실험을 계산하면, 그 변화가 무늬들을 없앤다는 것을 우리는 볼 것이다. (이론이 정말로 하이젠베르크 관계들[Heisenberg relations]을 수반하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는 안다.) 경향들이 – 장치에 의존하는 –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우리는 이것을 해석한다. 우리에게는 심지어 변화가 전자에 대한 간섭에 기인하는지 (슬릿을 보호하는 광선의 경우에서처럼) 혹은 변화가 가능성들에, 즉 경향들 자체에 대하여 간섭을 하고 있을 따름인지 (한 개의 슬릿을 닫는 경우에서처럼) 물어볼 필요조차 없다: 이 모든 경우들에 대하여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경향들을 결정하도록 허용하는 파동방정식이 하이젠베르크 산란 관계들(Heisenberg scatter relations)을 수반한다는 것과 이것들은 가능한 예측들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어떤 난제도, 또한 양자론과 – 다시 말해서, 플랑크 상수 h와 – 특별히 연결된 문제도 보지 못한다. 오히려 다양한 확률주의적 이론들에서, 예를 들어, 확산이론(diffusion theory)에서 다시 출현하는 문제에 우리는 직면한다.
다음 난제가 이중슬릿 실험과 관련하여 제기될 것이다. 멀리서 와서 두 개의 슬릿 중 하나에 접근하는 광양자(photon)를 고려하라. 그 광양자(photon)가 움직이는 동안 다른 슬릿이 닫히거나 열린다면 그 광양자(photon)의 경향이 영향을 받을까?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변은, 이 질문에 상응하는 가능한 실험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 이 질문이 잘못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개의 슬릿 중에서 하나로 향하는 광양자(photon)의 접근을 통제하는 유일한 방법들은 다른 슬릿을 닫는 것과 근본적으로 대등한 실험의 재장치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질문은 답변될 수 없는데 적어도 우리의 이론 안에서는 답변될 수 없다.
핀 테이블(pin table: bagatelle table) 장치의 도움을 받아서 이 답변을 설명하면 흥미롭다. P가 도달될 마지막 장소를 공이 통과하자마자 여기에서 어떤 핀 P가 경향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제거될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방금 배척한 질문에 대한 다음 답변을 암시할 것이다: 빛이 더 이상 두 번째 슬릿에 도달할 수 없는 지점으로 광양자가 나아가자마자, 그 슬릿을 열거나 닫는 것은 경향들에게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답변을 잘못된 것일 터이다. 핀 테이블(pin table)의 경우에 실험적 장치는 – 그리하여 경향들 – P가 도달될 마지막 장소를 공이 통과하는 것을 우리가 보자마자 우리가 핀 P를 가까이서 관찰하여 제거한다면, 상상건대 중대한 정도로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이 경우에도 두 가지 전혀 다른 실험적 장치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P의 제거를 준비하는 장치와 그렇게 준비를 하지 않는 다른 장치. 이 두 가지 다른 실험들이 우연히 대등한 경향들을 결정할 것이라는 점은 전적으로 가능하지만, 사실상 그 실험들이 그렇게 하는지는 장치들의 세부사항에 달렸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핀의 제거는 경향에 영향을 미칠 테이블 안의 진동을 야기할지도 모른다.) 이중슬릿의 실험의 경우에, 입자가 (광양자, 전자, 기타 등등) 특정 장소를 통과했음을 우리가 발견하는 것을 허용하는 여하한 장치도 불가피하게 실험적 장치를 변화시킬 것임을 – 입자가 실험적 장치 안의 경향들을 변화시키는 그런 정도로 – 이론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고찰들은 유명한 보어(Bohr)의 상보성의 원리와 어떤 관련이 있다. 이 원리 뒤에 있는 것은 이것보다 더 많은 것이 아닐까 나는 염려한다: 다양한 실험적 장치들은 항상 다양하다는 것; 그리고 어떤 두 가지 실험적 장치들이, 아무리 유사할지라도, 그 장치들이 결합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항상 서로를 배제한다는 것. 왜냐하면 결합을 시도하면, 새로운 실험적 장치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에 의하여 어떻게 경향들이 영향을 받는지는 이론이 결정할 문제이다.
위치를 측정하도록 고안된 두 가지 실험들이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항상 동일한 결과를 낳는 반면, 위치를 측정하도록 고안된 시험들이 운동량을 측정하도록 고안된 실험들을 배제한다고 (혹은 그 실험들에 ‘상보적’이라고) 제안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사실은 위치를 측정하는 두 가지 실험들이 세 번째 실험을 – 위치를 연속적으로 두 번 측정되는 실험 – 야기하지 않고도 또한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론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입자는 위치를 ‘지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실험들이, 올바르게 실행된다면, 양립될 수 있는 결과들을 낳을 것이라는 점이다. 유사하게,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측정들이 동일한 실험에서 결합될 수 없다는 견해도 또한 틀렸다: 이유인즉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모든 소위 운동량에 대한 측정들은 사실상 해석의 다소 낮은 수준을 토대로 위치의 측정인 것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이론적 해석들이기 때문이다. (15절 참조.)
용수철저울들을 통한 운동량 측정에 대한 보어(Bohr) 자신의 장치를 우리가 고려하면 이것은 분명해진다. (아인슈타인에 관한 쉴프[Schilpp]의 책, 전게서, 220쪽과 227쪽 참조.) 우리가 용수철저울을 사용할 때마다 우리는 바늘이 가리키는 두 가지 위치들을 (혹은 두 위치들 사이의 간격) 읽어야 한다.
상당한 숫자의 실험들이 이중슬릿 실험과 동일한 방식으로서 취급되어야 한다. 유명한 한 가지 실험은 광양자의 통로에 놓인 반(半)-반사 거울의 실험이다. 두 줄기의 분리된 ‘광선들’이 다시 반사될 것이고 간섭하도록 만들어져 무늬들(fringes)을 낳은 것이다. 그리하여 광양자가 틀림없이 두 줄기 반(半)-광선들 모두 안에 있었다고 우리는 논증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진건판들을 통하여 두 줄기 반(半)-광선들을 가로챈다면, 우리는 광양자가 항상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광양자가 한 줄기 광선이나 다른 줄기 광선에 있음을 발견할 (이론에 따라서) 것이다.
이 표면적인 모순에 대한 설명은, 물론, 광양자가 한 가지 반(半)-광선에서는 항상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과 분열되어 그리하여 간섭할 파열들(wave trains)처럼 (혹은 ‘광선들[beams]’처럼) 경향들이 행동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론에 의하여 경향들이 계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디랙(Dirac)의 유명한 전기석에 의한 분극(polarization by a tourmaline) 사례도 또한 실험들에 관한 이 범주에 속한다. 단일 광양자가 동시에 두 가지 다르고 양립할 수 없는 상태들에 있다고 전제할 (디랙[Dirac]이 제안하는 바와 같이) 어떤 이유도 없다; 단일 광양자가 동시에 두 개의 슬릿들 모두를 통과한다고 전제할 어떤 이유도 없는 것처럼. 실험에 내재한 다양한 가능성들, 다양한 실제적 상태들이 있다; 그리고 이 다양한 가능성들은 경향들을 통하여 무게가 재어지거나 측정된다.
19. 논란이 많았던 것에 대한 변명.
이 결론적인 절에서 내가 가장 칭찬하는 몇몇 물리학자들에 대하여 비판하는 나의 동기들을 나는 설명하고 싶다.
매우 심각한 상황이 나타났다. 우리 시대에 대한 주요 위협이 되었고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우리 문명의 전통들을 걱정하는 모든 사상가의 임무인 일반적인 반(反)-이성주의적 분위기가, 과학적 토론의 기준들을 매우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그 분위기는 이론이 지닌 난제들과 – 혹은 오히려,
이론이 지닌 난제들과 라기보다는 이론을 집어삼키려고 위협하는 새로운 기법들이 지닌 난제들과 -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 분위기는, 자신들이 도구들을 통달한 데 크게 환호하여 그들이 하고 있던 것과 말하고 있던 것을 이해하려고 몸부림쳐야 했던 우리 아마추어들을 깔보는 명석한 젊은 물리학자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태도가 굳어져 일종의 전문적 예절이 되었을 때 그 분위기는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대 물리학자들 중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들은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Schrödinger)에게 적용되고 또한 보어(Bohr)에게도 적용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형식주의에 크게 기뻐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무지가 방대함을 크게 의식하여 항상 탐구자로 남았다.
왜 슈뢰딩거(Schrödinger)는, 한 순간 동안 진지하게 고려될 수 없는 논증들을 통해서만 답변들 받았던가? 이유는 그를 비판하는 유명한 사람들이 논증을 더 이상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슈뢰딩거(Schrödinger)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형식주의를 사용하여 다시 놀라게 했더라면 슈뢰딩거(Schrödinger)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매우 주의 깊게 슈뢰딩거(Schrödinger)의 말을 다시 들었을 텐데. 그러나 단어들에 지나지 않는 것들은 더 이상 전문가들에게 흥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 단어들이 다른 주제만큼 단어들의 주제에 대하여 적어도 많은 일을 한 사람으로부터 유래할지라도 더 이상 전문가들에게 흥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슈뢰딩거(Schrödinger)와 같은 위대한 물리학자가 이런 방식으로 취급된다면 – 그리고 아인슈타인도 바로 그처럼 나쁜 대접을 받았다 – 내 자신과 같이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는 사람은 전문가들과 감히 달라지려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슈뢰딩거(Schrödinger)가 열어놓은 논란의 세부사항 속으로 내가 들어간 것은 부분적으로 상황을 명백히 하려는 시도에서이고, 부분적으로 우리는 평범한 이성적인 토론을 그 토론의 합당한 위치에 복구시켜야 한다는 것을 밝히려는 시도에서이다.
발견이라는 위대한 임무에서 도움을 주는 능력을 지닌 모든 사람을 나는 존경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상태로의 전공자(specialist)를 - 전문가(expert) - 통하여 인상을 받지 못한다. 우리는 공식을 부과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경악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다. 뚫리지 않는 전문가에 대한 칭찬은 표현의 순전한 어려움에 보상을 하고 모호성을 심오함으로 우리가 오해하도록 유혹한다. 결국 모든 사람의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 주제들을 토론하는 데서 우리는 분명한 사고, 단순성, 그리고 지성적인 책임을 주장해야 한다.
내가 최근에 볼츠만(Boltzmann)에게 집중된 논란을 조사했을 때, 이성적 토론에 대한 우리의 기준들이 그 후 심각하게 악화했다는 결론에 나는 다다랐다. 그 쇠퇴는 제 1차 세계대전과 그리고 과학을 향한 기술적이고 도구적인 태도의 성장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쇠퇴는 그런 상태로의 난해함만 지닌 확대된 명망에 의하여 많이 악화되었다. 이해가능성과 단순성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들을 부활시킴으로써 이런 전개상황을 중지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논란이 많은 나의 어조 뒤에 있는 동기에 관하여 그만큼 말하고, 나는 또 다른 동기가 또한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이것은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업적에 대한 나의 무한한 찬사이다.
아인슈타인이나 슈뢰딩거(Schrödinger)를 비판하는 것이 불경죄(lèse majesté)라고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이 아인슈타인의 결정론과 확률에 관한 주관적 이론을 향한 아인슈타인 및 슈뢰딩거(Schrödinger)의 간헐적 경도와 부분적으로 또한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입자이론을 비판했음이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때때로 비판을 받았던 방식은 평가의 부족 증상이라고 나는 느낀다.
아인슈타인에 관해서 인간 사고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지닌 어떤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내가 말할 필요는 없다: 아마도 갈릴레오, 케플러, 그리고 뉴튼이래 어떤 다른 사람도 우리의 생각을 열기 위하여 그만큼 하지 못했다는 것.
슈뢰딩거(Schrödinger)에 관해서, 새로운 세대의 물리학자들 중 많은 물리학자들은 주로 교과서로부터 그를 유명한 파동방정식의 저자로서 알고 있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슈뢰딩거(Schrödinger)의 파동 역학에 관한 수필선집(Collected Papers on Wave Mechanics)은 고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논문들이 독창적이라고 생각한다.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접근방식의 직접성, 그가 지닌 개념들의 깊이와 완벽한 아름다움, 그의 명확한 제시, 그의 탁월한 객관성과 자기-역설(self-irony), 그가 반증을 찾고 발견한다는 사실: 전체가 탁월한 인간적인 문서이자 예술 작품이고 필적할 사람이 없는 개념들의 모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웅장한 문체의 물리학이다.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양자론에 대한 형식주의의 실제적인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물리학자이다. 그는, 아인슈타인처럼, 패러데이(Faraday)의 사념을 참되게 계승한 사람이고, 물질은 언젠가 반대로 물질이 아닌 것에 대한 방해(disturbance)로서 설명될 것임을 우리에 밝힌 최초의 물리학자이다.
이 중요한 것이, 몇몇 영혼적인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바와 같이, ‘정신과 같거’나 ‘영혼적’으로 판명될 기회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인간의 정신이나 인간의 영혼에 옹호자가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우리가 인간의 정신이나 인간의 영혼의 미래 모험들이나 발견사항들을 기대할 수 있다고도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질에 대한 새로운 이론의 위대한 창시자들에 – 플랑크(Planck), 아인슈타인, 보어(Bohr)와 드 브로이(de Broglie)에서 슈뢰딩거(Schrödinger), 파울리(Pauli), 보른(Born),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와 디랙(Dirac)에 이르기까지 – 관하여 그들에게 거장(master)이라는 말들을 적용하는 게 나에게는 허용될 것이다. ‘자기 자신의 감각적 증거에 격렬히 반대하여... 그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참이라고 주장했던 이 사람들의 위대한 생각에 대한 나의 무한한 찬사를 아무리 강력하게 표현해도 충분하지 않다’고 갈릴레오는 태양계 중심 지동설(heliocentric system)의 창시자들에 관하여 서술했다.
형이상학적 결어
확장(extension) 외에도 무엇인가 있다. 심지어 확장(extension) 이전에 무엇인가가 있다.
라이프니츠(LEIBNIZ)
비결정론과 확률에 관한 경향 해석으로 인하여 우리는 물리적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 그림에 따르면, 그 그림에 관하여 가장 개략적인 묘사만 여기서 제시될 수 있는데, 물리적 세상의 모든 속성들은 의향적(dispositional)이어서, 물리 체계의 실제적 상태는, 어느 순간에서든, 자체가 지닌 의향들의 – 또는 자체가 지닌 잠재력들, 혹은 가능성들, 혹은 경향들 - 총계로서 생각될 것이다.
이 그림에 따라서 변화는 이 잠재력들 중 몇 가지 잠재력들의 실현이나 실제화에 놓여있다. 이 실현들은 반대로 다시 의향들이나 잠재력들로 – 그 실현될 것들의 잠재력과 다를지라도 – 구성된다. 이 견해는 세상에 관한 상식적 견해와 밀접하게 일치한다. 학생이 대학에 들어갈 때 졸업시험을 치르는 이 상황에 내재한 어떤 가능성이 있다; 그가 시험지에 다소 성공적으로 답을 쓰는; 그리고 그가 학위를 얻는, 그가 졸업시험을 치를 때 그는 이 가능성들이나 잠재력들 가운데 최초의 것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발생한 새로운 상황은 다른 두 가지 가능성들을 변화시킨다. 사실상 졸업시험을 치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가 시험지에 다소 성공적으로 답을 쓰는 가능성이라고 언급될 수 있다. 그 학생이 답을 썼을 때, 그리고 그리하여 그가 또 다른 가능성들이나 잠재력들의 집합을 깨달았을 때, 그가 학위를 받는 잠재력들을 다시 변화시키는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가 궁극적으로 학위를 받을 때, 그리고 그리하여 다시 어떤 잠재력들을 깨달을 때,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잠재력들을 – 가령 자신의 직업에서 자신이 그 학위를 이용하는 것과 관련되거나 그 학위를 이용하지 않는 것과 관련된 – 낳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시에 이원적이고 일원적인 세상에 대한 그림을 얻는다. 그 그림은, 잠재력들이 자체의 가능한 실현들이나 실제화와 관련해서만
잠재력들이기 때문에 이원적이다; 그리고 그 그림은, 실현들이나 실제화가 잠재력들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잠재력들 자체라고 언급될 것이기 때문에 일원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잠재력들에 ‘지나지 않는다[nothing but]’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피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물리적 세계를 변화 때문에 변하는 경향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기술할 것이다. 이 경향들이 일반적으로 미래의 변화들을 결정하지 않을지라도, 이 경향들은 적어도 물리학의 몇몇 분야에서 여러 가지 가능한 미래 변화들에 관한 확률분포들을 – 1에 해당하는 확률들을 포함할 - 결정할 것이다.
이 접근방법은 물질에 관한 혹은 입자들에 관한 이론의 제안을 포함하는데 그 이론에 따라서 물질과 입자들은 잠재력들이나 경향들의 실현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반대로 잠재력들이나 경향들로 구성되는 것으로서 해석된다.
이 접근방법의 주요 요점들 중 한 가지 요점은, 이런 방식으로 아인슈타인의 결정론적 프로그램에 비결정론적 재해석을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양자론에 객관주의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재해석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제안이다. 목표는 생물학적 현상에 대한, 인간 자유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대한 여지가 있는 세계에 대한 그림이다.
20. 형이상학적 개념들과 연구 프로그램들, 그리고 물리학의 역사.
언젠가 누군가는 물리학의 역사를 물리학에 관한 문제 상황들의 역사로서 서술해야 한다. (이것은, 덧붙여, 정치역사를 포함하여 모든 역사가 서술되어야 하는 방식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리학의 역사에 (가령, 정치 역사와 반대로) 영향을 미치는 바와 같은 문제 상황들은, 문제 생성에 기여하고 주로 우리가 해답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방향을 결정하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우리가 주시한다면, 순전히 논리적 용어들로써 거의 완벽하게 분석될 것이다.
과학에서 문제 상황들은 통상적으로 세 가지 요인들의 결과이다. 한 가지는 지배적인 이론 내부의 모순을 발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론과 실험 사이의 불일치를 – 이론을 실험적으로 반증하는 것 – 발견하는 것이다. 세 번째이자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론과 소위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 사이의 관계이다.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나는 과학 발전의 거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가 형이상학적 – 즉, 시험 불가능한 – 개념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어떤 설명의 문제들을 우리가 공격하기로 선택할 것인지 결정할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답변들을 우리가 합당하거나 만족스럽거나 혹은 수용 가능한 것으로서 그리고 앞선 답변들에 대하여 향상되었거나 발전한 것으로서 간주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개념들.
이론이 해결하려고 고안된 설명의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이론의 성공을 설명으로서 판단하는 것이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을 통하여 가능해진다. 다른 한편으로 이론에 대한 그리고 이론이 낳는 결과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은 연구 프로그램에서의 변화를 (통상적으로 프로그램이 흔히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당연하게 주장되기 때문에 무의식적 변화) 낳거나, 혹은 그 프로그램이 또 다른 프로그램으로 대체되는 사건을 낳는다. 이 프로그램들은 그런 상태로 단지 가끔 토론될 따름이다: 매우 자주 그 프로그램들은 이론들 내부와 태도들 내부와 과학자들의 판단들 내부에 함축되어 있다.
나는 이 연구 프로그램들을 또한 ‘형이상학적’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그 프로그램들이 세상의 구조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들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물리학적 우주론 내부의 문제 상황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들로부터 야기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들을 ‘연구 프로그램들’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그 프로그램들이, 가장 긴급한 문제들이 무엇인지에 관한 견해와 함께, 이 문제들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답이 무엇과 같을지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후기[後記: Postscript]의 I권,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15절 참조). 그 프로그램들은 사변적 물리학(speculative physics)으로서, 혹은 시험될 수 있는 물리적 이론들에 대한 사변적 예상들(speculative anticipations)로서 기술될 것이다.
현재의 절에서 나는 먼저, 개략적으로 역사적인 순서로, 피타고라스와 헤라클리투스(Heracltus)의 시대 이래 물리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던 더 중요한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들 중에서 10가지 연구 프로그램들에 대한 간단한 목록을 제시할 것이다; 더욱 특히, 변화의 문제가 형이상학과 물리학의 근본적인 문제가 되었던 파메니데스(Parmenides) 이래.
이 목록을 제시한 후에 나는 한 가지 예시로서 데카르트(Descartes)의 프로그램에서 패러데이(Paraday)의 프로그램에 이른 문제 상황들의 연속에 대한 개요를 추가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1. 파메니데스의 블록 우주(Block Universe). 무(無: nothing)는 (공동[空洞]: void: 빈 공간) 존재할리 없다: 세상은 가득 차 있다, 세상은 한 개의 블록(block)이다. 움직임과 변화는 불가능하다. 세상에 대한 참된 그림은 틀림없이 합리적이다; 즉 추론에 근거하여, 그리고 비-모순에 근거하여.
2. 원자론(Atomism). 움직임 그리하여 변화는 사실적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가득 찼을 리가 없다; 공동(void)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세상은 원자들과 동시에 공동(void)로 - ‘가득 참’과 동시에 ‘빔(the empty)’으로 – 구성된다. 모든 변화는 공동([空洞]: the void) 안에 있는 원자들의 움직임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다. 질적인 변화는 없다 – 단지 움직임과 구조적 변화, 즉, 재배치만 있다. 공동([空洞]: the void)은 원자들이 할 수 있는 움직임과 위치들을 위한 공간이다.
3. 기하학적 연구(Geometrization). 초기 피타고라스파의 프로그램은 우주에 대한 산술화(arithmatization)이었다 (기하학을 포함하여); 그 프로그램은 무리수의 발견으로써 붕괴했다. 플라톤은 그 프로그램에 관하여 형세를 역전시켰다; 그는 먼저 우주론에 대한 기하학적 연구를 생각했다 (산술을 포함하여). 물리적 세계는 물질로 가득 찬 공간이다. 물질은 형성된(formed) (혹은 형태화된[shaped], 혹은 주조된[moulded]) 공간이며, 기하학은 형태와 공간에 관한 이론이기 때문에 물질의 근본적인 속성들은 기하학적으로 설명된다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우주에 대한 그리고 산술(arithmatic)에 대한 기하학적 연구는 에우독소스(Eudoxus)와 칼리포(Callippus)와 유클리드(Euclid)에 의하여 수행된다. (유클리드에게는 기하학에 대한 교본을 쓸 의도가 없었지만, 무리수에 대한 기하학적 이론의 문제 및 다른 플라톤적 우주론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4. 본질주의(Essentialism)와 잠재주의(Potentialism).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공간(topos, 위치 공간[position space])이 물질이고, 순수 기하학은 물질과 형상(또는 본질)의 이원론이 차지하는 자체의 중심적 공간을 잃어버린다. 사물의 형상이나 본질은 자체에 내재하고 자체의 잠재력을 포함한다. 이것들은 자체의 목적인(final cause)인 끝, 목표를 위하여 자체를 실현한다. (선[善: the good]은 자기-실현이다.)
5. 문예부흥(Renaissance) 물리학은 (코페르니쿠스, 브루노[Bruno], 케플러[Kepler], 데카르트[Descartes], 보일[Boyle]) 주로 플라톤의 기하학적 우주론인 그의 선행인(antecedent cause) (‘개체들 이전의 보편자: universale ante rem’) 및 그의 가설-연역적(hypothetico-deductive) 방법의 부활이다. (잠시 뒤에 또한 원자론의 부활이 일어났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변한다:
6. 세계의 시계장치(Clockwork) 이론 (홉스[Hobbes], 데카르트[Descartes], 보일[Boyle]). 물질의 본질이나 형상은 자체의 공간적 확장(spatial extension)과 동일하다. (이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들을 결합한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물리이론들은 틀림없이 기하학적이다. 모든 물리적 인과관계는 밀기(push), 또는 더 일반적으로, 소실 거리에서의 행위(action at vanishing distance)이다. 모든 질적인 변화는 물질의 수량적-기하학적 움직임들이다; 예를 들어 열 유동체(the fluid of heat)의 (caloric), 혹은 자성(magnetism)의, 혹은 전기(electricity)의 수량적-기하학적 움직임들. (또한 원자들은 에테르[ether]의 소용돌이들이라는 베르누이의 추측을 비교하라.)
7. 역본설(力本說: Dynamism). 모든 물리적 인과관계는 밀기(push)나 그렇지 않으면 중심 인력(central attractive forces)에 (뉴튼)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 물리적 상태의 모든 변화는 기능적으로 또 다른 변화에 의존한다. (미분방정식의 원리.) 라이프니츠(Leibniz)에 따르면, 밀기(push)도 또한 힘(forces)에 의하여 – 중심 반발력(central repulsive forces)에 의하여 – 설명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물질이 (반발)력으로 가득 찬 공간이라면 밀기(push)는 설명될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라이프니츠(Leibniz)에게는 물질에 관한 역학적(dynamical)이고 구조적인 이론이 있다. (중심력 이론[the theory of central forces]은 칸트와 보스코비치[Boscovich]에 의하여 한층 더 발전하였다.)
8. 힘들의 장들(Fields of Forces) (패러데이[Faraday, 맥스웰[Maxwell]). 모든 힘이 중심력인 것은 아니다. 그 국지적 변화가 소실 거리(vanishing distances)에서의 국지적 변화에 의존하는 변하는 (벡터의) 힘의 장들(fields)이 있다. (뉴튼과 데카르트의 인과성 원리를 결합하는 편미분방정식 원리[principle of partial differential equations].) 물질은 – 즉, 원자들이나 분자를 – 힘의 장들(fields of forces)이나 힘의 장들의 교란(disturbances)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요점 6 아래서 언급된 베르누이의 이론 참조.)
9. 통일장 이론(Unified Field Theory) (리만[Riemann], 아인슈타인, 슈뢰딩거[Schrödinger]). 전자기적 뿐만 아니라 중력적인, 장(fields)의 기하학적 연구. 맥스웰(Maxwell)의 빛에 관한 장이론(field theory)은 입자들에 관하여 그리하여 물질에 관한 장이론(field theory)으로 일반화된다. 물질은 파괴될 수 있다고 예측되어 (이 예측을 확인함과 동시에, 시계장치 우주론은 – 다시 말해서 유물론 – 반증된다) 방사(radiation)와, 다시 말해서, 장 에너지(field energy)와 그리하여 공간의 기하학적 속성들과 상호-변환될 수 있다고 예측된다. 그리나 물질이 장(field)의 교란(진동: vibration)이라는 견해는 다음 반대론에 직면한다:
10. 양자론의 통계적 해석 (보른[Born]).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이론 이래 심지어 빛조차도 장(field)의 진동인 맥스웰의 교란(disturbance)에 지나지 않는지가 의심스러워진다. 왜냐하면 모든 진동열(train of vibrations) (광파[light waves])에 대하여, 하나의 원자에 의하여 방사되고 하나의 원자에 의하여 흡수되는 연관된 입자-같은 존재인 광양자가 있기 때문이다. 드 브로이(de Broglie)에 따르면, 물질의 입자들에 대하여 입자와 파동이라는 유사한 이원론이 있다. 이제 이 이원론은 보른(Born)에 의하여, 자체의 원래의 의미에서 거의 원자론으로의 회귀로서 기술(記述)될 방식으로 해석된다: 존재하는 것들은 미립자들이거나 입자들이다; 그리고 장(field)과 장(field)의 진동은, 우리가 사용하여 특정 상태에 놓인 입자를 발견하는 순전히 통계적 확률을 계산할 비결정론적 입자-물리학에 대한 수학적 도구들을 대표할 따름이다. 이 견해는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1934년에서 주로 지지한) 물질에 관한 일원론적 통일장 이론의 프로그램과 양립할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물리학자들 대부분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통계적 양자론의 성공이, 패러데이(Faraday)-아인슈타인-슈뢰딩거(Schrödinger)의 물질의 장이론(a field theory)가 포기되어야 함을 지적한다고 생각한다.
이 간략한 개관으로 인하여 우리는 물리적 우주론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들과. 그 문제들이 근본적인 까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문제들을 일반적인 변화의 문제로서 염두에 두고 있다; 물질과 공간의 (원자와 공동[空洞: the void]의 문제로서; 우주의 공간적 구조의 문제로서; 인과관계의 (원격작용이나 소실 거리[vanishing distances]에서의 작용의; 힘[forces]의; 그리고 힘의 장[fields of forces]의) 문제로서; 물질의 (원자적) 구조의, 특히 그 구조의 안정성과 그 구조의 안정성에 대한 한계들의 문제로서; 그리고 물질과 빛의 상호작용의 문제로서.
지금까지 변화에 관하여 오직 세 가지 이론들만 있었다는 것을 주목하면 흥미롭다: 원자론으로 물질의 수량적 움직임들을 통하여 질적인 변화들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 이론(theory of potentialities)과 그 잠재태들의 실제화나 현실화인데 질적인 이론이다; 그리고 장들(fields)의 교란(disturbances) (진동, 파동) 이론 – 원자론처럼 질적인 변화를 수량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확장된 물질의 움직임을 통해서라기보다는 변하는 강도(intensities)을 통해서인 이론. [✡(1981년에 추가) 헤라클리투스<Heraclitus>는 단지 한 가지 프로그램만 제안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이론은 불변에 관한 이론이었다.]
그러한 연구 프로그램들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 프로그램들이 지닌 특성이 과학적인 물리학의 특성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사변적 물리학의 특성이라 할지라도, 과학에 대하여 필수불가결하다. 원래 그러한 연구 프로그램들은 단어의 거의 모든 의미에서 모두 형이상학적이다 (그 프로그램들 중 몇몇은 시간이 지나면 과학적이 되었을지라도); 그 연구 프로그램들은 다양한 직감적인 개념들을 토대로 거대한 일반화된 것들인데 그것들 대부분이 지금은 오류로서 우리에게 떠오른다. 그 연구 프로그램들은 세상에 – 현실적 세상 – 대한 통합적 그림들이다. 그 연구 프로그램들은 고도로 사변적(speculative)이다; 그리고 그 연구 프로그램들은, 원래, 시험될 수 없었다. 정말로 그 연구 프로그램들 모두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더 신화적 특성을, 꿈의 특성을 지녔었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그 연구 프로그램들은 과학에 과학적 문제들을, 과학적 목표들을, 그리고 과학적 영감을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개괄적인 예시에 지나지 않는다할지라도 한 가지 예시가 여기서 유용할 것이어서 나는 특정 문제 상황에 관한 역사의 – 데카르트 이래 물질이라는 문제에 관한 역사 - 개요를 제시함으로써 이 절을 마무리하겠다. (그 개요는 세상에 관한 시계장치 이론에서 역본설[力本說: Dynamism]로의 천이[遷移: transition]에, 즉 프로그램 6에서 7로의 천이[遷移: transition]에 관한 역사의 한 부분이다.)
물질이라는 문제에 관한 역사는 이전에 맥스웰(Maxwell)에 의하여 눈에 띄게 (대영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의 9판본, 1875년의 그의 탁월한 ‘원자’ 항목에서) 개괄되었다. 그러나 맥스웰(Maxwell)이 관련된 물리적 및 철학적 개념들에 관한 역사에 대하여 개괄했을지라도, 그는 문제 상황에 관한 역사, 그리고 이 상황이 시도된 해결책들의 영향을 받아서 어떻게 변했는지에 관한 역사를 제시하지 못했다. 내가 여기서 채워 넣으려고 하는 것은 이 빈틈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물리학 전체를 몸체(body)나 물질에 대한 본질주의적이거나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定義: definition)에 근거시켰다: 몸체(a body)는, 자체의 본질(essence)이나 실체(substance)에서, 확장되고(extended), 물질(matter)은, 자체의 본질(essence)이나 실체(substance)에서, 확장(extension)이다. (그리하여 사고하거나 경험하는 본질로서 본질적으로 강도[intensity]인 정신[mind]과 반대로, 물질은 확장된 실체이다.) 몸체와 물질이 확장과 동일하기 때문에, 모든 확장, 모든 공간은 몸체이거나 물질이다: 세상은 가득 차있다: 공동(空洞: void)은 없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이해하는 바,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이론이다. 그러나 충만한 세상에는 움직임이 있을 리가 없다고 파메니데스(Parmenides)가 결론을 내린 반면, 데카르트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유래하는 제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견해로 그 견해에 따르면 물 양동이에서처럼 충만한 세상에서도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수용했다: 물체들은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를 밀침으로써 충만한 세상 속에서 움직일 것이다; 물체들은 찻잔 속의 찻잎들처럼 움직일 것이다.
이 데카르트적 세상에서, 모든 인과관계는 접촉에 의한 행동이다: 그것은 밀기(push)이다. 물질 공간(plenum)에서 확장된 몸체는 다른 몸체들을 밀어서 움직일 수 있을 따름이다. 모든 물리적 변화는, 다양한 움직이는 부분들이 서로를 밀어가는 시계장치의 구조들을 (혹은 소용돌이들) 통해서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밀기(push)는 기계적 설명의 원리이다. 원격작용은 있을 리가 없다. (뉴튼 자신이 원격작용을 때때로 터무니없는 개념으로서 간주했고 다른 때에는 초자연적 현상으로서 간주했음을 나는 덧붙여 언급할 것이다.)
이 데카르트적 사변적 역학 체계는 순전히 사변적 근거들을 토대로 라이프니츠(Leibniz)에 의하여 비판을 받았다. 라이프니츠(Leibniz)는 데카르트의 근본적 방정식인 몸체 = 확장을 수용했다. 그러나 이 방정식이 궁극적이고 환원불가능하고, 자명하고, 분명하고 두드러지다고 데카르트가 믿은 반면, 라이프니츠(Leibniz)는 이 모든 것을 의심했다: 몸체가 또 다른 몸체를 관통하는 대신에 밀어간다면, 이것은 두 개의 몸체들 모두가 관통에 저항하기 때문일 것뿐일 수 있다. 이 저항은 물질이나 몸체에 본질적(essential)이다; 왜냐하면 이 저항이 물질이나 몸체로 하여금 공간을 채울 수 있도록 하여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확장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Leibniz)에 따르면 우리는 이 저항이 힘(forces)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설명해야 한다: 물체는, ‘말하자면, 자체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그리고... 변화의 원인에 저항하려는 힘과 경향을 지닌다’. 상호관통에 저항하는 힘이 있다: 반발력. 그리하여 몸체, 혹은 물질은 라이프니츠(Leibniz)의 이론에서 반발력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몸체에 관한 본질적인 속성과 – 확장 – 데카르트의 밀기(push)에 의한 인관관계의 원리 모두를 설명할 이론에 대한 프로그램이다.
몸체나 물질이나 물리적 확장이 공간을 채우는 힘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설명되어야하기 때문에 라이프니츠(Leibniz)의 이론은 원자론처럼 물질의 구조에 관한 이론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Leibniz)는 원자들을 (자신이 젊었을 때 신뢰했던) 배척했다. 이유인즉 원자들은, 당시에, 매우 작은 몸체들이라고, 매우 작은 물질의 조각들이라고, 매우 작은 확장들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확장과 비관통성(impenetrability)의 문제는 더 큰 몸체들에 대해서와 같이 원자들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동일했다. 따라서 원자들은 – 확장된 원자들 – 물질이 지닌 모든 속성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확장(extension)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공간의 한 부분이 반발력에 의하여 ‘채워’진다고 언급될 수 있는가? 라이프니츠(Leibniz)는 이 힘들(forces)이 확장되지 않은 점들(points)인 단자들(the monads)에서 나오고 – 이 의미에서만 - 그 단자들(the monads)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으로서 상상한다: 단자들은 그 중심들이 이 확장되지 않은 점들(points)인 중심력이다. (강도[intensity]가 점[point]에 부착되어 있기 때문에, 힘[force]은 가령 한 점[a point]에서의 곡선의 기울기에, 다시 말해서 ‘미분[differential]’에 비교될 것이다: 힘들[forces]은, 자체의 강도들[intensities]이 물론 숫자들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고 표현될 수 있다할지라도, 미분들이 확장될 수 있다고 언급될 수 없는 것과 같이 확장된다고 언급될 수 없다; 그리고 확장되지 않는 강도[intensities]이기 때문에, 힘들[forces]은 데카르트의 의미에서 ‘물질적[material]’일리가 없다.) 그리하여 공간의 확장된 조각은 – 기학학적 의미에서 한 개의 몸체(a body) - 그 안에 떨어지는 기하학적 점들(points)이나 ‘단자들(monads)’에 의하여 ‘채워’진다고 일컬어지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이 힘들(forces)에 의하여 채워진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라이프니츠(Leibniz)에게는, 데카르트에게서와 같이, 공동(空洞: void)이 있을 리가 없다: 빈 공간은 반발력이 없는 공간일 터이고, 그 빈 공간은 점유에 저항하지 않을 터이기 때문에, 물질에 의하여 즉각 점유될 터이다. 우리는 아마도 외교관 라이프니츠(Leibniz)의 이론을 물질에 관한 정치적 이론으로서 기술(記述)할 것이다: 몸체들(bodies)은, 상태들처럼, 반발력에 의하여 방어되어야 하는 경계들(borders)이나 한계들(limits)을 지닌다; 그리고 물리적 진공(vacuum)은, 청치권력의 진공처럼, 둘러싼 몸체들에 (혹은 상태들) 의하여 즉각 점유될 터이기 때문에 존재할리가 없다. 그리하여 반발력이 행동함으로써 세상 속에서 생기는 일반적인 압력이 있다고, 그리고 움직임이 없는 곳에는 현존하는 힘들(forces)의 동등성에서 기인하는 역학적 평형(a dynamic equilibrium)이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데카르트가 평형(an equilibrium)을 단지 움직임의 결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설명할 수 있었던 반면, 라이프니츠(Leibniz)는 평형(equilibrium)을 – 그리고 또한 움직임의 결여 – 동등하고 정반대인 힘들(forces)에 (그 강도[intensity]는 매우 클 것이다) 의하여 역학적으로(dynamically) 유지되는 것으로서 설명한다.
데카르트의 물질이론에 대한 라이프니츠(Leibniz)의 비판에서 나온 점-원자론(point-atomism)에 관한 (혹은 단자들[monads]에 관한) 교설에 대해서는 이만큼 하자. 그의 교설은 분명히 형이상학적이다; 그리고 그 교설은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을 낳는다: (데카르트의) 몸체들의 확장을 힘들(forces)에 관한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
그 프로그램은 보스코비치(Boscovich)에 (칸트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예견되었던) 의하여 상세하게 수행되었다. 칸트와 보스코비치(Boscovich)의 공헌은 아마도, 내가 먼저 뉴튼의 역학에 대한 원자론의 관계에서 원자론에 관하여 몇 마디를 말한다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엘레아-플라톤 학파와 데카르트 및 라이프니츠(Leibniz)의 비-진공(non-vacuum) 이론은 한 가지 내재적인 난제를 – 몸체들의 압축가능성(compressibility)과 또한 탄력성(elasticity)의 문제 – 지닌다. 다른 한편으로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원자들과 동시에 공동(空洞: the void)’이라는 이론은 (이것은 원자론의 좌우명이었다) 정확하게 이 난제에 대응하도록, 극히 주로, 고안되었다. 원자들 사이의 공동(空洞: the void)은 물질의 다공성(porosity)으로 움직임뿐만 아니라 압축의 가능성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뉴튼의 (그리고 라이프니츠[Leibniz]의) 역학은 탄력성에 관한 원자론적 이론에 대하여 새로운 중대한 난제를 야기했다. 원자들은 물질의 작은 조각들이어서 압축가능성과 탄력성이 공동(空洞: the void)에서의 원자들의 움직임을 통하여 설명되려면 원자들은 반대로 압축될 수 있거나 탄력적일 수 없을 것이다: 원자들은 절대적으로 압축될 수 없었고, 절대적으로 딱딱하고, 절대적으로 비탄력적이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 뉴튼과 라이프니츠(Leibniz)의 역학 이론과 같이 – 힘들(forces)을 가속(accelerations)에 비례하는 것으로서 설명했던 여하한 역학 이론에 따라서 비탄력적 몸체들 사이에는 밀기(push)인 접촉에 의한 행동은 있을 수 없었다. 이유인즉 절대적으로 비탄력적인 몸체에 의하여 또 다른 그런 몸체에게 주어지는 밀기(push)는 순간적이어야 할 터이고, 순간적 가속은 무한히 큰 힘들(forces)을 포함하여 무한한 가속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직 탄력적인 밀기(push)만 유한한 힘들(forces)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밀기(push)가 항상 탄력적임을 우리가 전제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비탄력적인 원자들 안에서 탄력적인 밀기(push)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접촉에 의한 행동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그 자리에 우리는 원자들 사이에서의 단거리 반발력을 두어야 하거나, 아마도 그렇게 지칭될 바와 같이, 단거리에서의 작용 즉, 대행물 근처에서의 작용(action in the vicinity of the agent)을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원자들은 틀림없이 감소하는 거리에 비례하여 급격히 증가하는 (그리고 거리가 0이 되었을 때 무한해질) 다른 힘들(forces)을 사용하여 서로 반발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물질에 관한 역학 이론의 내부적 논리에 의하여, (중심) 반발력을 역학 속으로 어쩔 수 없이 수용한다. 그러나 그 (중심) 반발력을 우리가 수용한다면, 원자론의 근본적인 두 가지 전제들 중 한 가지 전제가 – 원자들은 작은 확장된 몸체들이라는 전제 – 불필요해진다; 우리가 원자들을 라이프니츠의(Leibnizian) 반발력 중심들로 대체해야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마도 원자들을 라이프니츠의(Leibnizian) 확장되지 않는 점들(unextended points)로 대체하여 원자들을 라이프니츠의(Leibnizian) 단자들(monads)과 일치시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원자론의 다른 근본적인 전제를 유지해야 할 듯하다: 공동(空洞: the void). 원자들과 단자들 사이의 거리가 0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면 반발력은 무한을 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단자들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들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질은 별개의 힘의 중심들이 있는 공동(空洞: a void)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기술된 단계들은 칸트에 의하여 그리고 보스코비치(Boscovich)에 의하여 수용된다. 그 단계들은 라이프니츠(Leibniz)의 개념들과 데모크리투스(Democritus) 및 뉴튼의 개념들의 통합을 제시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이론은, 라이프니츠(Leibniz)가 구상했던 이론과 같이, 물질의 구조에 대한 이론이어서 그리하여 물질에 대한 설명적 이론이다. 확장된 물질은 물질이 아닌 것에 의하여 – 힘들(forces)이 나오는 확장되지 않은 점들(points)인 힘들(forces)과 단자들과 같은 확장되지 않은 존재들에 의하여 - 설명된다. 데카르트의가 주장하는 물질의 확장은, 더욱 특히, 매우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이 이론에 의하여 설명된다. 정말로 이론은 더 많은 일을 한다: 평형 확장(equilibrium extension)뿐만 – 모든 끌어당기고 반발적인 힘들(forces)이 평형일 때 하나의 몸체의 확장 - 아니라 외부의 압력이나 충격이나 밀기(push) 하에서 변하는 확장도 설명하는 것은 확장에 관한 역학적 이론(dynamic theory of extension)이다.
물질에 관한 데카르트의 이론과 물질에 관한 라이프니츠(Leibniz)의 역학적 설명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거의 동등하게 중요한 또 다른 발전사항이 있다. 칸트-보스코비치(Kant-Boscovich) 이론이, 반발력과 인력이 부여된 기초입자들로 구성된 것으로서 확장된 물질에 관한 현대 이론에 개괄적으로 선행한다할지라도. 이 두 번째 발전사항은 장들(fields)에 관한 패러데이-맥스웰(Faraday-Maxwell) 이론의 직접적인 선두주자이다.
이 발전사항에 결정적인 단계는, 칸트가 자신의 단자론(monadology)에 따라서 물질이 비연속적인 자신의 단자론(monadology) 교설을 부인하는 칸트의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토대(Metaphysical Foundations of Natural Science)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는 이제 이 교설을 물질의 역학적 지속성의 (현상으로서) 교설로 대체한다. 그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공간의 특정 지역에서의 (확장된) 물질의 존재는 그 지역에서의 반발력의 – 관통을 중지시킬 수 있는 힘들(forces) (다시 말해서, 적어도 그 장소에서 인력과 압력을 합친 것과 대등한 반발력 – 존재로 구성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물질이 단자들(monads)로 (반발력이 방사되는) 구성된다고 전제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왜냐하면 물질은, 이 단자들(monads)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들이지만 단자들(monads)로부터 나오는 힘들(forces)은 충분히 강해서 다른 물질을 막는 장소들에 존재할 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질은 동일한 이유 때문에 문제의 물질 조각에 속하는 (그리고 주장되는 바와 같이 그 물질 조각을 구성하는) 여하한 두 개의 단자들(monads) 사이의 어떤 점에 존재할 것이다.
이 논증의 장점들이 무엇이든, 힘들(forces)을 구성하는 자속적인 (그리고 탄력적인) 것에 대한 개념을 완벽하게 시험하려는 제안에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지속적인 물질이라는 개념을 가장한 힘들(forces)의 장(field) 개념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확장된 물질에 대한 그리고 탄력성에 대한 두 번째 역학적 설명이 푸아송(Poisson)과 코시(Cauchy)에 의하여 수학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과, 맥스웰(Maxwell)에게서 기인하는 힘들(forces)의 장(field)이라는 패러데이(Faraday)의 개념의 수학적 형태가 칸트의 지속성 이론에 대한 코시(Cauchy)의 형태의 전개로서 아마도 기술(記述)될 것임은 내가 보기에 흥미롭다.
그리하여 칸트의 두 가지 이론들과 보스코비치(Boscovich)의 이론은 – 데카르트의 확장된 물질을 설명하는 역학 이론에 대한 라이프니츠(Leibniz)의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주요 시도들이었던 – 물질의 구조에 관한 모든 현대적 이론들의 (패러데이[Faraday]와 맥스웰[Maxwell], 아인슈타인, 드 브로이[de Broglie], 그리고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이론들) 연합 선조,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물질을 생각하면서 뉴튼적이나 심지어 조악한 데카르트적이고 비-역학적인(non-dynamic) 모형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보일 것과 같이 아마도 그렇게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은 ‘물질과 장(field)의 이원론’의 연합 선조들이 되었다.
데카르트적 전통으로부터 – 그리고 칸트적 전통 대(對) 헬름홀츠(Helmholtz)로부터 - 나오는 또 다른 중요한 영향력은 원자들을 에테르(the ether)의 소용돌이들로서 설명하는 개념이었다; 켈빈 경(Lord Kelvin)과 J. J. 톰슨(Thomson)의 원자 모형을 낳은 개념 – 러더퍼드(Rutherford)에 의한 그 모형에 대한 실험적 반증은 원자핵에 관한 현대 이론으로 기술(記述)될 것의 시작을 표시한다.
내가 개괄한 발전사항의 가장 흥미로운 모습들 중 한 가지 모습은, 이 형이상학적 사변들(speculations)이 비판에 민감하다고 판명되었다는 – 그 사변들(speculations)이 비판적으로 토론될 수 있었다는 – 사실과 함께, 자체가 지닌 순전히 사변적(speculative) 특징이다. 그 모습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소망이 의하여,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적어도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신념에 의하여 고취된 토론이었다.
실증주의는, 버클리(Berkeley)에서 마흐(Mach)에 이르기까지, 그런 사변들(speculations)을 항상 반대했다; 그리고 물질에 관한 물리적 이론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견해를 마흐(Mach)가 여전히 유지한 것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물질의 그에게 형이상학적 ‘실체[substance]’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그런 상태로 무의미하지 않다면, 불필요했다.) 그는 이 견해를, 물질의 구조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이 시험될 수 있는 물리적 이론으로 변했을 때에도, 유지했다. (이 후기[後記: Postscript]의 I권인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I부, 17절 또한 참조.) 원자이론이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더 이상 진지하게 의심을 받지 않던 때에 마흐(Mach)의 이 견해들이 영향력의 최고점에 도달했다는 것과, 마흐(Mach)의 견해들이 원자 물리학의 선도자들 가운데서 특히 보어(Bohr)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와 파울리(Pauli)에게서 여전히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훨씬 더 흥미롭고 다소 역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위대한 물리학자들의 탁월한 이론들은 물리적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려는 시도들의 결과이고, 이 시도들이 낳은 결과를 비판하려는 시도들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이 내놓은 물리학적 이론들은 이 물리학자들과 다른 실증주의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과 대비될 것이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물질의 구조에 관하여 어떤 것도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 물질에 관한 이론은 틀림없이 영원히 전문가의 사사로운 일로 – 전문적인 세부사항으로, 수학적 기교들로, 그리고 ‘의미론’으로 싸인 수수께끼 – 남는다는 것: 과학은 철학적이거나 이론적 흥미가 결여되어 오직 ‘기술적(technological)’이거나 ‘실용적’이거나 ‘작동적인(operational)’ 중요성만을 지닌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 합리주의 이후의(post-rationalist) 교설을 나는 한 마디도 믿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 대부분을 여러 번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침내 물리적 세상을 이해하는 데로 가는 길들을 발견한 듯이 보인다.
21. 균열(Schisms), 프로그램(Programmes), 그리고 형이상학적 꿈들 (Metaphysical Dreams).
마지막 절에 제시된 형이상학적 프로그램들에 대한 목록은 두 가지 주요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다. 한 가지 목표는 물리학 이론에서의 현재 위기의 중대성을 조명하는 것이었다: 패러데이(Faraday)-아인슈타인-슈뢰딩거(Schrödinger)의 프로그램이 배척됨으로써 우리에게는 통합적인 그림도 없어지고, 변화에 관한 이론도
없어지고, 일반적인 우주론도 없어졌다. 연구 프로그램 내부의 혹은 연구 프로그램과 관련한 문제 상황 대신에, 우리가 지닌 근본적인 문제 상황은 물리학에서의 균열로부터 – 어느 것도 자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듯이 보이지 않는 두 가지 연구 프로그램들 사이의 충돌로부터 – 출현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물론 이전에도 출현했다. 예를 들어 단지 접촉에 의한 행동만을 (즉, 소실 거리에서[at vanishing distances]) 허용하는 데카르트주의와 원격작용을 허용하는 뉴튼의 이론 사이에도 균열이 – 뉴튼 자신이 자기의 이론에 반대했던 균열 – 있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모든 이전 상황들과 다소 다르다.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Schrödinger)의 고무적인 프로그램은 양자이론가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아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의 판단에 따라서, 성공적으로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을 공격했던 사람들은 그 프로그램을 유사하게 강력한 프로그램으로 대체하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과학에 관하여 우세한 철학에 – 베라르미노(Bellarmino) 추기경과 (지오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사건에서 브루노를 심문했던 사람들 중 한 명) 버클리[Berkeley] 주교가, 과학은 진리를 탐구할 수 있다는 갈릴레오와 뉴튼의 믿음에 반대하기 위하여 전개했던 이론들 중의 이론인 도구주의를 거의 보편적으로 수용한 것에 – 기인한다고 나는 믿는다. 합리주의적 전통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위대한 싸움에서 – 인간의 지성이, 하느님의 계시의 도움 없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비밀들 중 몇 가지 비밀들을 밝힐 수 있을지 – 양자론의 지도자들 중 대부분이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Schrödinger]를 제외하고) 갈릴레오와 케플러(Kepler)와 뉴튼에 반대하고 베라르미노(Bellarmino) 추기경과 버클리(Berkeley) 주교의 편을 들었다. 도구주의를 수용함으로써만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Schrödinger)의 프로그램이 파괴되지 않았을지라도, 도구주의를 수용함으로써 대안적 프로그램의 부재를 거의 보편적으로 묵인하게 되었다. 정말로 보어(Bohr)의 소위 ‘상보성의 원리’로써, 도구주의는 그런 프로그램에 대한 ‘거부’를 자랑스럽게 선언한다. 남은 것은 형식주의로써 – 물론 시행착오 방식의 합당하고 심지어 필연적인 부분이지만 그 방식의 한 부분일 따름이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일관적인 시도의 부재에서 중요한 결과들을 낳을 것 같지 않은 부분 – 만지작거리는 것이다.
데이비드 봄(David Bohm)의 이설(異說: heresy)은 아인슈타인-슈뢰딩거(Schrödinger) 프로그램의 한 부분과 같은 것을 계속하지 못한다; 드 브로이(de Broglie)의 파일럿파(Pilot-wave) 이론을 부활시키려는 그의 시도를 나는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봄(Bohm)의 사실주의적이고 객관주의적인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이 후기(後記: Postscript)에 제시된 관점에서 보면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의 이론은, 모든 다른 결정론적 이론들처럼, 확률들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게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이론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간섭(interference of the subject with the object)’을 유지한다 – 비록 그 이론이 이 간섭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할지라도. 결과적으로 파울리(Pauli)-아인슈타인 비판에 (처음에 드 브로이[de Broglie]의 파일럿파[pilot waves]에 반대하여 파울리[Pauli]에 의하여 제안되고 나중에 봄[Bohm]에 반대하여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제안된) 대한 봄(Bohm)의 답변은 내가 보기에 전적으로 불만족스럽고 수용불가능하다.
세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이 이 균열을 야기했다:
1. 비결정론 대(對) 결정론.
2. 사실주의 대(對) 도구주의.
3. 객관주의 대(對) 주관주의.
세 번째 문제는, 더욱 특히,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불확실 관계들과 파속의 붕괴(the reduction of wave packets)와 같은 그런 문제들과 관련하여 출현한다;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확률해석과 관련하여 출현한다.
이 세 가지 문제들에 관하여 다양한 무리들이 어떤 편을 드는지는 반복하여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인슈타인, 드 브로이(de Broglie), 슈뢰딩거(Schrödinger) 그리고 봄(Bohm)은 결정론자들이자 사실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물리 이론의 목표들에 관해서는 객관주의자들이지만, 확률이론의 해석에 관해서는 주관주의자들이다 (다소 일관적으로 그렇다).
보어(Bohr)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가 대표하고 파울리(Pauli)가 지지하며 보른(Born)이 아마도 적은 정도로 지지하는 코펜하겐 학파는, 언급된 그 학파의 모든 대표들이 명예롭게 몇 가지 반(反)-도구주의적 언급을 할지라도, 비결정론적이고 도구주의적이다. 이 학파의 태도에 관하여 매우 특징적인 것은 – 말하자면 그 학파의 고유상태들(eigenstates) 중의 하나 – 일종의 공명(共鳴: resonance) 때문에 그 학파의 구성원들 모두가 공유하는 객관적이며 주관적인 접근방식 사이의 갈팡질팡이다.
내 자신의 견해는, 비결정론은 사실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는 것과, 이 사실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하여 일관적으로 객관주의적인 인식론과 양자론 전체에 대한 객관주의적인 해석과 확률에 대한 객관주의적 해석을 채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정통 해석에서의 주관주의적 계통을 혐오할지라도, 나는 정통 해석이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Schrödinger)와 봄(Bohm)의 결정론을 배척한 것에 공감하고, 물리학에서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이론들을 배격한 것에 공감한다; 그리고 나는 보른(Born)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된 파울리(Pauli)의 글의 본질에 (형식이나 예언적 문체도 – 역사적 결정론의 문체인 – 없을지라도)에 동의하는데 그 글에서 파울리(Pauli)는 다음과 같은 말로 결정론적 연구 프로그램을 배척한다: ‘모든 퇴행적 노력에 (슈뢰딩거[Schrödinger], 봄[Bohm], 기타 등등과 어떤 의미에서, 아인슈타인 또한) 반대하여 나는 ψ-함수의, 그리하여 자연 법칙들의 통계적 특징이 – 당신이 바로 처음부터 슈뢰딩거[Schrödinger]에 반대하여 강력하게 강조했던 – 적어도 몇 세기 동안 법칙들에 대한 방식을 결정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중에... 완전히 새로운 것이 발견될 것은 가능하지만,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뉴튼-맥스웰(Maxwell)의 고전적 방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에 대하여 꿈꾸는 것 (그리고 저 신사 분들이 몰두하는 것은 꿈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 희망이 없고, 길에서 벗어나며 나쁜 취향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은 심지어 사랑스러운 꿈도 아니다”라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자신의 평가를 표현하는 파울리(Pauli)의 다소 비신사적이고 내 견해로 ‘퇴행적’이거나, 보다 정확하게는, 19세기 역사주의적 방식을 무시할 것을 (혹은 ‘몇 세기 동안’ 보류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이 글에는 칭찬할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패러데이(Faraday)-아인슈타인-슈뢰딩거(Schrödinger) 프로그램을 (그가 다소 둔감하게 ‘뉴튼-맥스웰(Maxwell)의 고전적 방식’이라고 부르는) 배척한 것에 그 프로그램에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에 집착한다는 근거를 토대로 크게 공감하고, 나는 확률주의적 이론들과 해석들을 (그가 그 이론들과 해석들을 ‘통계적’으로서 기술할지라도) 수용할 것을 그가 호소하는 데 훨씬 더 많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소망사항의 의미에서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을 ‘꿈’으로서 기술한 것에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지닌 지식의 성장과 관련하여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야망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울리(Pauli)가 여기서 이 꿈에 대하여 말하는 방식은 그 꿈을 향하여 상반되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 구절과 마지막 구절에서 ‘꿈’이라는 단어가 처음 두 번 나타나는 것 사이에는 사소하지만 흥미로운 태도의 변화가 있는 듯하다. 내가 오해하지 않는다면, 이 처음의 두 번 발생은, 내가 ‘거칠고 무의미하지는 않은(tough-and-no-nonsense)’이라는 표현으로 기술했던 반(反)-형이상학적이고 반(反)- 사실주의적인 (그리하여 도구주의적인) 태도와 같은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울리(Pauli)가 ‘그것은 심지어 사랑스러운 꿈도 아니다’라고 추가하여 말했을 때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것은 두 가지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 듯이 보인다. 이것은,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형이상학이 – 블록 우주에 대한 꿈 – 더 이상 매혹적이고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연구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느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내가 오해하지 않는다면, 매혹적이고 영감을 불어넣은 세상에 대한 형이상학적 그림을 소유하려는 소망인 보다 나은 것에 대한 갈망도 표현한다.
그런 태도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인슈타인-드 브로이(de Broglie)- 슈뢰딩거(Schrödinger) 프로그램이 자체의 웅장한 직감적 개념에서 – 물질에 대한 설명과 장들(fields)과 장들(fields)의 교란을 통한 물질의 모든 상호작용들 – 매혹적이고 영감을 불어넣는다할지라도, 자체의 블록 우주와 관련된 형이상학적 결정론에 관해서는 틀렸고 부적절한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스러운 꿈이었을지라도 – 그리고 한 때 파울리(Pauli)를 크게 매혹시켰던 꿈 – 비결정론의 보다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그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피하게 보인다: 파울리(Pauli)는 그것은 더 이상 사랑스러운 꿈이나 희망찬 꿈이 아니라고 그것에 대하여 이제는 말할 것이다.
과학의 미래에 대한 파울리(Pauli)의 꿈들에 관하여, 우리는 그 꿈들이 어떨지를 추측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는 현대 과학과 그 과학이 세상에 대하여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그림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에 관하여 자신의 근심을 표현했다. 이 언급으로부터, 그리고 비결정론과 자연에 대한 확률주의적 법칙들에 대한 그의 신뢰로부터, 혹시 그에게 수용될 수 있을 그림에 대한 개요를 우리는 아마도 추측할 것이다.
이 형이상학적 결어에서, 내가 ‘몰두하고’ 싶은 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나는 솔직하게 인정하다. 기술(記述)될 꿈은 내 자신의 것일지라도, 그 꿈의 일반적인 경향에서 그 꿈이 파울리(Pauli)의 꿈과 너무 많이 다르지 않기를 나는 희망한다. 파울리(Pauli)가 적어도 자신의 꿈속에서 정통 신조의 도구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요소를 잊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그 꿈들은 별로 다르지 않을 터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상보성’이나 그와 동일한 것에 해당하는 것을 잊을 수 있다면, 그가 세상으로써 실험할, 그리고 세상에 간섭할 ‘관찰하는 주체들’이 없다할지라도 세상은 현재 상태처럼 꼭 비결정론적일 것 같음을 기억할 수 있다면. 내가 파울리(Pauli)의 주요 요점들로서 생각하는 것은 – 비결정론과 자연 법칙들의 확률주의적 특징 – 나의 형이상학적 꿈속에 완벽하게 재현된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동시에, 그리고 일관성이 없지 않고도,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법칙들에 의하여 결정되는 물리적 실체에 대한 패러데이(Faraday)의, 아인슈타인의, 그리고 슈뢰딩거(Schrödinger)의 프로그램을 나의 꿈은 또한 수용한다; 내가 여기서 경향들로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실체. 이로 인하여 이 두 가지 견해들인 비결정론과 결정론이 대응논증(correspondence argument)으로써 (그 논증을 통하여 결정론적 이론들이 비결정론적 이론들의 근사치들로 밝혀지는) 매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결합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입자들을 장(field) 개념들을 통하여 설명하는 물질에 관한 이론을 제안한다.
이제 나는 나의 형이상학적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에서 제공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22. 대응논증(Correspondence Argument)에 의하여 수정된 고전적 결정론.
우리의 변화하는 세계가 자체의 상태를 순간에서 순간으로 바꾸기 때문에 그 세계를 시각화함으로써 시작하자. 연이은 순간들에 속하는 상태들은, 이런저런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것이 우리의 세계가 완벽한 무질서보다는 어느 정도의 질서를 드러내는 이유이다; 우리의 세계가 혼돈(chaos)보다는 우주(cosmos)인 이유이다. 그러나 순간적 상태들 사이의 연결을 결정론적 연결로서가 아니라, 결정론적 블록 우주와 혼돈(chaos) 사이 안에 있는 것으로서 우리는 시각화할 것이다.
이 요점을 다소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세상의 어떤 주어진 순간적인 상태에, 즉 세상에 대한 어떤 주어진 ‘시간-조각’에 필름 조각을 붙였다고, 그리고 세상에 대한 모든 과거 및 미래의 시간-조각들을 우리가 재현할 수 있는 것만큼 잘 그 시간-조각들을 재현하도록 우리가 이 필름 조각을 사용한다고 상상하자. (열린 우주: 비결정론을 위한 논증[The Open Universe: An Argument for Indeterminism], 후기[後記: Postscript]의 II권, 26절 참조.)
제 1단계 또는 제 1 근사치로서 우리가 주어진 시간-조각에 붙인 필름 조각이 라플라스의(Laplacean) 혹은 결정론적 필름 조각이라고, 혹은 다시 말해서, 그 필름 조각이 결정론적인 블록 우주를 – 주어진 순간적인 상태나 시간-조각에 의하여 결정되는 우주 – 재현한다고 우리는 전제할 것이다; 이유인즉 라플라스(Laplace)에 따라서 하나의 순간적 상태나 시간-조각이 결정론적 우주의 모든 과거 및 미래 상태들이나 시간-조각들을 결정하는 데 충분하다고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정론적 우주의 순간적 상태들이나 시간-조각들 각각은, 필름 조각이 구성되는 정지사진들 중 하나의 사진에 의하여 재현된다고 우리는 전제한다.
이제 우리가 유사한 라플라스의(Laplacean) 혹은 결정론적 필름 조각을, 사실적이고 비-결정론적인 우주에 대한 상당한 숫자의 연이은 시간-조각들 각각에 붙였다고 한층 더 전제하자.
우리 자신의 우주가 – 실제 우주 – 비-결정론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다양한 시간-조각들에게 붙인 라플라스의(Laplacean) 필름 조각들이 우리 자신의 우주를 정확하게 재현하지는 않음을 의미한다; 이유인즉 그 필름 조각들이 우리 자신의 우주를 재현한다면, 우리의 사실적인 세상은 우리의 전제와 반대로 라플라스적(Laplacean)이고 결정론적일 터이기 때문이다. 물론 필름이 부착된 사실적 시간-조각 이전과 이후에 오는 처음 몇 장의 정지사진들은 그 정지사진들이 재현하기로 한 사실적 상태들이나 시간-조각들과 매우 유사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고전 물리학의 성공으로부터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필름이 부착된 실제 세상의 시간-조각으로부터 더 멀리 더 멀리 움직인다면 사소한 차이점들이 쌓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충분히 멀리 움직인다면, 정지사진들은 예측의 목표들에 대하여 쓸모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실제 세상이 결정론적이라면, 각 필름 조각은 그 세상을 완벽하게 재현할 텐데. 게다가 모든 필름 조각들은 정확하게 같은 텐데 (각 필름이 세상의 동일한 과정을 재현한 터이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의 세상이 결정론적이 아니라고 우리가 전제하기 때문에, 상상적 필름 조각들 – 우리의 상상 속에서 우리가 실제 세상의 다양한 시간-조각들에게 붙인 필름 조각들 - 모두나 거의 모두가 서로 다를 것이다. 물론 이웃 시간-조각들에 부착된 상상적 필름들 중 두 개는 매우 유사할 것이다; 그러나 그 필름들은, 통상적으로, - 정말로 두 개의 필름-조각들 중 두 번째 조각이 정확하게 결정론적 물리학자에 의하여 예측되는 바와 같이 첫 번째 조각을 토대로 하지 않는다면 – 서로 정확하게 닮은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두 가지 전제들로써 작업을 했고 나는 그 전제들을 우리의 상상적 필름 조각들의 도움을 (논증을 심층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내게 곧 필요할) 받아서 예시했다: 우리의 세상이 비결정론적이라는 전제와, 자체의 예측들이 진실에 대한 충분한 근사치들이라는 의미에서 성공적인 결정론적인 물리 이론이 (예를 들어 ‘고전 물리학’) 존재한다는 전제.
이제 우리는 잠시 동안 고전적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 세상은 철저히 혼돈스럽다는 전제로 선회한다; 그리고 또 다른 연이은 상상적 필름 조각들을 이 전제를 대표하는 연이은 실제 시간-조각들에게 붙이려고 우리는 노력한다.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을까? 세상이 혼돈스럽다(chaotic)는 전제로 인하여 분명히 우리는 예측을 할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필름 조각들에는 명백한 정보가 없을 것이다. 그 필름 조각들은 모든 가능성들을 열어 놓을 것이다, 그 필름 조각들은 어떤 상태가 다른 (논리적으로) 가능한 상태에 의하여 이어지는 것을 허용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논리적으로) ‘가능한 상태’가 어떨지를 어떤 방법으로 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우리의 필름 조각들 각각은 틀림없이 정지사진들로 구성되어 세상에 관한 모든 가능한 상태들의 일람표를 포함하고 각각의 가능성에 동등한 무게를 (혹은 확률) 귀속시켜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시간-조각들에 부착된 모든 필름 조각들은 (그것들이 결정론적인 세상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같을 것이다; 게다가 필름들 각각의 모든 정지사진들은, 우리가 시간에서 변화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면 그 정지사진이 그럴 것과 같이, 정확하게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능성들에 대한 하나의 완벽한 일람표만 있기 때문이다. (이 일람표는 예를 들어 ‘가능성 공간들’에 – 어떤 3차원적 하위-공간들 각각이 입자들의 가능한 배열이나, 배치를 재현하는 추상적 다차원 공간들에 의하여; 혹은 각 점[point]이 – 혹은 벡터 -, 우리의 전제에 따라서 세상의 체계인 문제의 물리적 체계의 가능한 상태들 중 하나의 상태를 재현하는 – 다양한 방식들로 제시될 수 있다.)
결정론적이거나 ‘고전적’ 필름 조각들로 돌아와서 우리는 이제, 우리가 원한다면, 각 정지사진에 대하여 그 정지사진이 재현하기로 한 시간-조각과 그 정지사진이 어떻게 유사한지를 평가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정지사진이 재현하기로 한 세상의 실제 상태로부터의 모든 재현된 세부사항의 이탈을 우리는 측정할 것이다. 이 목표를 향하여 우리는 먼저 기본적 ‘세부사항’이나 ‘사건’의 어떤 정의(定義: definition)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고전 물리학이 세상에 관한 모든 구조적 세부사항까지 적용될 수 있다는 전제가 곤란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너무 작은 세부사항이어서는 안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고전적 필름은 매우 세부적인 기술[記述]을 담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가 여기서 이 요점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 덧붙여 기본적 사건이 우리의 정지사진 안에서 합당하게 재현되는지 또는 재현되지 않는지를 우리가 사용하여 결정하는 어떤 네-또는-아니요(yes-or-no) 기준에 대해서 우리는 동의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네(yes)’ 답변들의 평균 숫자를, 혹은 다시 말해서, 문제의 정지사진으로부터 올바른 기본적 예측을 얻는 가능성이나 확률을 측정할 수 있다. 이 확률은 그리하여 세상에 관한 정지사진과 실제 상태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척도로서 수용될 것이다. 확률은, 필름 조각이 부착된 시간-조각에 가까운 정지사진들에 대해서는 거의 1이 될 것이어서, 우리가 이 순간으로부터 필름의 ‘과거’나 ‘미래’ 속으로 더 멀리 더 멀리 움직인다면 확률은 감소하는 일반적인 경향을 보일 것이다. 예측적 목표들을 위하여 필름이 완전히 소용없게 될 지점은, 우리가 정지사진에 확률 1/2이나 그 이하를 부여하자마자, 도달될 것이다; 이유인즉 이것은, 세상에 관한 네-또는-아니요(yes-or-no) 질문에 대한 무작위 답변이 우리의 고전적 필름에 근거한 답변만큼 훌륭할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정지사진으로부터 계속해서, 정지사진과 재현된 시간-조각 사이의 대응 정도가 1/2보다 클지라도, 이것은 우연한 사건에 기인할 수 있을 따름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하여 이 정지사진으로부터 계속해서, 고전적 필름은 혼돈스러운 세상에 대한 가설인 다른 극단을 재현하는 가능성들의 일람표만큼 예측적 목표들에 관하여 정확하게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물론 미래의 정지사진들에 대하여 여기에 기술된 확률을 미리 결정할 수는 없을 것임을 주목하라: 실제 세상이 어떠할지를 미리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한 장의 예측적 정지사진이 그 사진이 재현하는 시간-조각과 일치하는 사건들의 숫자를 우리는 결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지사진들에게, 정지사진들이 부착되는 시간-조각으로부터의 정지사진들의 거리에 따라서 1에서 1/2까지 일반적으로 감소하는 확률들과 같은 것을 귀속시키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 감소율은 과거의 대응들을 평균함으로써만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정론적 필름 조각들에게 부여한 저 확률들을, 말하자면 일종의 비결정론적이고 비-고전적인 필름 조각 속에 구축될 완전히 다른 확률로 대체하여 다음 두 번째 절에서 기술할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더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나는 비결정론적 실제 세상과 그 세상의 결정론적이거나 고전적 재현 사이의 관계에 관한 몇 가지 모습들을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항상 재생될 연이은 필름 조각들 사용하거나 다수의 고전적 재현들을 사용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음이 밝혀졌다. 고전 물리학에 대한 이 최초의 수정은, 과학적 재현은 비결정론적 세상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논증에 따라 고전적 개념들이 더 우수한 이론에 대한, 그리고 진리에 대한 근사치들보다 더 많은 것이 될 수 없는 논증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대부분의 다른 해석들에 동의하여, 나는 여기서 고전 물리학을 양자물리학에 대한 근사치로서 생각한다. (이것은 ‘대응논증[correspondence argument]’이다; 후기[後記: Postscript]의 I권,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15절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들을 보는 이 방식과 정통 해석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우리는 비결정론을, 우리가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우주론적 사실로서 수용한다. 그러나 정통 해석은 이 사실을, 물리적 과정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간섭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주변에 간섭하는 사람들이 없을 따름이라면, 마치 세상이 결정론적일 (혹은 세상이 지금보다 더 결정론적일) 것인 양; 아무도 바라보지 않을 따름이라면, 양자들이 (몇 명의 아이들처럼) 보다 질서정연하고 예측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할 것인 양. 이 견해는 내가 보기에 터무니없다; 그 견해를 보다 수용 가능하게 만들기 위하여, 정통 해석은 강제로 세상을 향한 관념론적이거나 반(半)-관념론적인 태도가 –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을 때 그곳에 있는 실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무의미하거나 반쯤 무의미하게 만드는 태도가 – 된다. 그러나 그런 특수 목적을 위한 철학적 전제는 필요하지 않다. 상황은 최대한으로 단순하다. 나는 상황이 그러함을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보어(Bohr)는 고전 물리학의 자연적이고 직감적이고 즉각적으로 이해 가능한 특징을, 양자 물리학의 더 난해하고 비-직감적이어서 고도로 정교한 특징과 항상 대비시켰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대응논증들을 이용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양자 이론적 경우로부터 고전적 경우로의 (나중에 우리가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천이(transition)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양자역학을 우리 자신에게 보다 이해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 문장의 원문은 and he has suggested that we may be able to make quantum physics more understandable to ourselves if we make use of correspondence arguments, that is to say, if we keep before our minds the transition from the quantum theoretical case to the classical case (which latter we can understand intuitively).인데 latter가 later의 오기로 보인다. 따라서 ‘나중에’로 해석함. 역자). 이제 나는 여기서 세상에 관한 비결정론자의 그림에 대하여 개괄할 목적으로 대응논증(a correspondence argument)을 이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과적으로 발생하는 비-고전적 그림이 가령 홉스(Hobbes)나 라플라스(Laplace)의 고전적 견해보다 더 자연스럽고 평범한 경험에 더 일치하고 덜 정교하다는 사실에 독자들의 주의의 환기시키고 싶다.
이유인즉 우리가 오늘날의 시간-조각이나 그 시간-조각의 일부를 알고 있다고, 그리고 우리가 1년 앞서서 특정 사건들을 예측하고 싶어 한다고 전제하라 (이 문장의 원문은 For assume that we know today’s time-slice, or part of it, and that we wish to predict certain events a year ahead.인데 어법상 불완전하다. 역자). 내가 생각하기에 벌의 비행이나 구름의 움직임과 같은 특정 사건들이 아직 예측될 수 없다고 우리가 정보를 받는지는 – 그것들에 바로 앞서서 우리가 시간-조각들에 대하여 완벽한 지식을 지닌다면 그것들이 다소 그렇게 될 수 있을지라도 – 바로 우리가 ‘자연스럽게’ 듣기를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일식이나 월식 같은 다른 사건들이 멀리 미리 예측될 수 있다고 우리가 정보를 받는지; 일반적으로 저 사건에 1년 앞선 시간-조각에 대한 지식보다 사건에 6개월 앞선 시간-조각에 대한 지식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 사건의 세부사항들 중 몇 가지 사항들을 다소 더 잘 예측하는 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우리가 정보를 받는지. 그리고 이것이 정확하게 나의 요점이다. 나의 그림의 도움을 받아서 내가 전달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바로 이렇다: 비결정론으로 인하여 모든 사건들을 앞서서 미리 완벽하게 결정하는 이론은 있을 리가 없다는 견해를 우리는 채택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각 시간-조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자체의 쓸모를 잃어버리는 자체의 예측적 필름을 생산한다는 것;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시간-조각들이 그 조각들 모두에 앞선 사건에 대하여 점점 더 좋은 개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상세하고 신뢰할만한 예측을 원한다면 우리가 그리하여 최근 날짜의 – 가능한 한 최근 – 시간-조각에 (혹은 그 시간-조각의 한 부분) 대한 기술(記述)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매우 간단하다; 그리고 그것은, 무제한적인 예측가능성에 대한 고전적인 라플라스의(Laplacean) 꿈보다 더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나에게, 직감적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어느 정도, 너무 간단하다; 그리고 나는 곧 (다음 두 번째 절에서) 나의 결정론적이거나 고전적 필름 조각들을 다른 필름 조각들로 교체함으로써 나의 그림의 질을 높일 것이다: 경향들을 기술하는 필름 조각들을 통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절에 주어진 간단한 해석본에서 우리의 그림은 ‘파속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에 관한 전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보의 한 가지 토대에서 또 다른 토대로의 – 더 이후의 것이어서 더 완벽하고 더 나은 토대 – 천이(transition). (그리고 우리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와 함께, 이 ‘붕괴’가 ‘양자론에서의 불연속의 요소’와 동일하다고 믿는다면, 우리의 매우 간단하고 원시적인 그림이 이미 양자 불연속을, 다시 말해서, ‘양자도약’에 관한 개념을 포함한다고 우리는 말해야 할 텐데, 그것은 이 현대판 양자도약이 원래 개념과 얼마나 공유하는 게 없는지를 드러낼 따름이다.)
나아가 우리의 고전적 필름 조각들을 비-고전적 필름 조각들로 대체하기 전에, 나는 다음으로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가 여기서 어떻게, 고전 물리학이 단지 근사하게만 유효한 비결정론적 세상에 대한 가설의 결과로서 나타나는지를 밝힐 것이다.
23. 비결정론과 소위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
내가 개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견해는 내가 보기에 많은 면에서 정통 견해와 유사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체를 정통 견해와 구분하는 형이상학적 견해의 교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형이상학적 견해가 지니고 있는 사실주의와 형이상학적 견해가 지니고 있는 객관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앞 절에서 소개되었고 실제 우주에 대하여 연이은 시간-조각들과 연이은 상상적 고전적인 필름 조각들로 구성되는 그림에 대한 심층적 토론에 의하여 이행될 것인데, 연이은 상상적 고전적인 필름 조각들 각각은 시간-조각들 중 한 조각에 부착되고 그 한 조각에 의하여 결정된다.
실제 시간-조각들의 연속은 객관적, 사실적 과정으로 아마도 지속적인 과정이다. 필름 조각들은 물론 상상적이다; 그러나 그 조각들은 그 조각들 각각이 논리적으로 수반된다는, 말하자면, 자체가 속한 (물리학의 완벽한 결정론적이거나 ‘고전적’ 체계와 결합하여) 시간-조각에 대한 완벽한 기술(記述)에 의하여, 의미에서 객관적이다.
하나의 상상적 필름 조각에서 다음 상상적 필름 조각으로의 변화가, 후자(後者)가 정말로 지속적으로 변한다면, 변하는 시간-조각들의 지속적인 기능에 의하여 재현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분명히 여기에서 지금까지 전개된 우리의 전제들은 이 문제를 결정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양자론은, 충돌이나 방출이나 흡수나 또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 교환과 같은 어떤 상호작용일 일어났을 때마다, 하나의 상상적 필름 조각이 또 다른 상상적 필름 조각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할 것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큰 거리로 떨어져 있는 자유 입자들로 구성되는 세상에서, 동일한 고전적 필름 조각의 복사본들은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시간-조각에서 또 다른 시간-조각으로 제거되는 시간-조각들에도 심지어 부착될 것이다. (이것은 고전적인 운동량 보전의 법칙의 유효성을 고려해도 합당한 듯하다.) 그러나 밀집되고 복잡한 세상 체계 안에서, 새로운 필름들은 극히 짧은 시간 가격들 이후에 부착되어야 할 터인데 왜냐하면 새롭고 예측될 수 없는 상태들이 모든 상호작용과 함께 실현될 터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사건에 가깝게 우리의 예측이 근거한 (전체적이거나 혹은 부분적) 시간-조각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면, 이제 우리는 예측이 – 가령 서기 2000년 1월 1일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예측 – 일반적으로 더 분명해지고 더 신뢰할 수 있게 될 것임을 보았다. 그래서 이 사건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아는 데 우리가 정말로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정보를 ‘최근화(up to date)’ 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다 최근의 시간-조각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우리의 예측을 이용 가능한 가장 최근의 초기조건들에 근거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측정행위들의 제한적인 정확도를 고려하여, 우리는 심지어 결정론적인 세상에서도 이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비결정론적인 세상에서, 심지어 초기조건들에 관한 우리의 정보가 절대적으로 정확하고 완벽했다는 전제를 근거로,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런 종류의 새롭고 나중의 정보에 근거한 모든 새로운 예측은 이전 예측들과 다소 다를 것이다. 이것은, 이전 예측이 잘못 계산되었을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i) 우리가 예측을 그 예측이 근거했던 시간-조각이나 정보와 관련하여 고려해야 함과 (ii) 후속 시간-조각의 사용이 일반적으로 그 시간-조각에 근거한 예측의 가치를 향상시킬 것임은 우리에게 명백해야 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논리적 상황은, 우리가 소위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을 분석하면서 마주쳤던 논리적 상황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왜냐하면 e를 그 존재나 결여를 우리가 예측하고 싶어 하는 사건으로 하라, 그리고 s1, s2,...를 더욱더 후속의 시간-조각들에게 부착된 고전적 필름 조각들로 하라 (이 문장의 원문은 For let e be the event whose presence or absence we wish to predict, and let s1, s2,...be classical film strips attached to later and later time-slices인데 명령문 let으로 시작하는 두 개의 문장 다음에 서술형 문장이 없어서 불완전한 문장이 되었다. 역자). (고찰된 모든 시간-조각들은 사건 e에 선행하는 것으로 전제될 것이다.)
pred(e, s1)을
조각 s1의 합당한 정지사진을 고려하여 e와 관련한 예측으로 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pred(e, s1)과 pred(e, s2)가 일반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그리고 후자(後者)가 일반적으로 전자(前者)보다 예측으로서 선호될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pred(e, s1)으로부터 pred(e, s2)로의 천이(transition)가 확률서술 p(e, s1)으로부터 p(e, s2)로의 천이(transition)와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그곳에서 ‘p(a,b)’는 정보 b가 주어지 a의 확률을 나타낸다. 그러나 p(e, s1)으로부터 p(e, s2)로의 천이(transition)는,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정확하게 양자이론가들이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wave packet)’이라고 부른 것이다. (위 8절 참조.) 양자이론가들은 이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wave packet)가 (a) 우리가 새로운 정보 s2를 얻는 실험을 측정하는 것과 (b) 지금까지 단지 잠재적이었던 것을 실현하거나 실제화 하는 것과 연관되거나 그것들에 의존한다고 제안했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가능한 것에서 실제적인 것으로 천이[transition]’; 위 9절의 주석 3과 10절 및 13절 참조.) 이 (a)와 (b)의 두 가지 요점들은, 가능한 것에서 실제적인 것으로 천이(transition)가 발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물리적 체계에 간섭하는 자극 하에서일 따름, 우리가 실험을 측정하는 데 기인한 따름이라는 제안(c)에서 흔히 결합된다. 대조적으로 우리의 그림에서, 가능한 것에서 실제적인 것으로 천이(transition)는, 세상의 새로운 상태가 나타날 때마다, 발생한다; 관찰이 되거나 측정이 되든 아니든, 새로운 시간-조각이 실제화 되거나 실현될 때마다. (사실상 관찰과 측정은 극히 드물어서 거의 모든 ‘잠재태들[potentialities]의 실제화’은 그것들과 별개로 발생한다.) 어떤 일이 발생한다면, 어떤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특정 잠재태들(potentialities)의 실제화에 항상 놓일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필름 조각은 (그리고 그 새로운 필름 조각과 함께,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wave packet]에 대한 기회) 상호작용이 발생할 때마다 나타난다. e를 예측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우리가 새로운 상태 s2를 알거나 관찰하는지 또는 아닌지와 우리가 pred(e, s1)을 pred(e, s2)로 대체하는지는 완전히 부수적이어서 조금도 잠재태들(potentialities)의 실제화를 야기하지 않는다. 세상은 우리를 참고하지 않고 변화한다. 우리의 조각 s1 선택과 우리의 조각 s2의 선택 사이에는 많은 상호작용이 발생했다는 것과, 이 상호작용들이 우리의 선택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완벽하게 확신할 수 있다.
물론 몇 가지 변화들이 우리 자신의 실험들에게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실제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모두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혹은 과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자기 자신의 실험들에 의하여 야기된 방해에 의하여 압도되거나 심지어 물들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근시안이거나 과대망상증이다. 가능한 것에서 실제적인 것으로의 천이들(transitions)과 양자 상호작용은 누군가가 어떤 것을 간섭하기 전에 진행되고 있었고, 그것들은 우리 모두가 간섭을 멈춘 후 오래되도록 계속될 것이다.
24. 고전적 필름들을 경향 필름들로 대체하기.
지금까지 고전적 그림에 대한 우리의 수정작업은 다소 조잡했다: 우리는 한 개의 상상적인 고전적 필름 조각을 연이은 많은 다양한 필름 조각들로 교체했는데 그 많은 다양한 필름 조각들은 각각 실제 세상의 시간-조각들에게 부착되었다. 우리가 이 그림을 정제하고 싶어 한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내가 지칭하는 하는 바와 같은 다른 극단을 – 모든 가능한 상태들의 일람표에 의한 혼돈(chaos)의 재현 – 이용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고려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일람표와 필름 조각을 소유하고 있어서 필름 조각의 모든 정지 사진이 이 일람표로 구성된다고 전제하자. 우리의 문제는, 고전적인 형태와
혼돈스러운 상태라는 이 두 개의 극단적인 연이은 필름 조각들 사이 어디에서, 새로운 형태의 연이은 필름 조각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는 물론 고전적 형태나 혼돈스러운 형태보다 더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야 한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양자론에 의하여 제시된) 이렇다: 새로운 형태의 필름 조각은, 혼돈스러운 형태처럼, 가능성들의 일람표로 구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들 각각에 확률적 척도, 즉 ‘무게(weight)’가 귀속될 것이다. 이것은 가능성들의 일람표를 확률주의적 분포로 – 경향들의 분포 – 변화시킨다.
22절에서 토론된 두 가지 극단적인 경우들 중에서 한 가지 경우에서 – 완벽한 혼돈의 경우에서 – 각 필름 조각이 단지 모든 가능성들에 대한 동일한 완벽한 일람표의 반복이기 때문에 모든 필름 조각들이 동일해진 것을 우리가 발견했음이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척도들, 즉 ‘무게들(weights)’을 가능성들에게 귀속시키자마자 각 다양하고 완벽한 일람표가 다양한 가능성들에 걸쳐서 다양한 무게들의 분포를 지닌 거대한 숫자의 다양하고 완벽한 일람표들이 있을 것이다. 가령 필름이 부착된 실제 시간-조각으로부터 시간상으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고전적 정지사진을 대체하는 이 무게가 실린 일람표들 중 하나의 일람표를 우리가 고려한다면, 그 일람표는 고전적 이론이 예측하는 상태와 매우 유사한 가능한 상태들 중의 저 상태들에게 대부분의 무게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일람표는 대부분의 다른 상태들에게는 무게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필름들 중 어떤 필름에서도, 연속적인 ‘정지사진들’에서의 (즉, 일람표들) 무게들의 분포가 밀접하게 연결될 것임을 의미한다; 혹은 한 순간에서의 무게들의 분표가 다음 순간에서의 무게들의 분포를 결정할 것임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각 필름에서의 연속적인 정지사진들은 (연속적인 무게가 실린 일람표들) 결정론적 특징을 지닐 것이다 – 우리가 처음에 고찰했던 (22절에서) 결정론적이거나 고전적인 필름 조각들에서의 연속적인 정지사진들과 매우 같게. 차이점을 이럴 것이다: 이전에 고전적 법칙들이 세상에 관한 하나의 상태에 대한 재현을 세상에 관한 또 다른 상태에 대한 재현과 연결했던 반면, 결정론적 특징을 지닌 법칙들은 (반드시 고전적 법칙들과 동일하지는 않을지라도) 이제 세상에 관한 모든 가능한 상태들에 대한 ‘무게들’의 일람표들을 연결한다.
새로운 법칙들의 특징은, 단지 나중 정지사진의 확률 분포가 틀림없이 곧장 선행하는 정지사진에 (또한 일람표인) 의존하거나 그 정지사진의 한 가지 기능이기 때문에, 결정론적일 (그리하여 ‘유사-고전적[quasi-classical]’)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태들 중 몇몇을 다른 몇몇 상태들이 뒤따르지 않거나 거의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이 다른 상태들이 논리적으로 가능할지라도, 그 상태들은 법칙들에 의하여 제외된다 – 그 상태들에게는 앞선 상태를 이어가는 것이 금지된다. 그리하여 각 정지사진을 (혹은 일람표) 다음 것과 연결함으로써, 무게들(weights)이나 경향들의 분포를 결정하는 법칙들은 결정론적이거나 거의-고전적인 특징을 지닌 법칙들일 것이다 (시간-의존적인 슈뢰딩거[Schrödinger] 방정식처럼).
이 새로운 그림이, 아마도 다소 복잡할지라도, 양자론의 위상과 고전적 이론에 대한 양자론의 관계를 합당하게 재현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최초 수정사항에 비하여 이 더 복잡한 그림의 이점은 무엇인가? 더욱 특히, 고전적 정지사진들의 감소하는 쓸모를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하여, 고전적 정지사진들에게 확률들을 귀속시키는 우리의 초기 과정에 비하여 이 보다 복잡한 그림의 이점은 무엇인가? 한 가지 이점이 즉각 목격될 수 있다. 우리의 최초 과정인 한 가지 확률 0.7에 (여기서 과거에 한 주일 앞서서 수행된 유사한 예측들의 평균 성공률을 의미하는) 근거하여 한 주일 앞서서 세상을 재현하는 고전적 정지사진이 획득되었다고 전제하라, 그리고 (a) 그것에 근거한 일기예보와 (b) 일월식을 고려하라. 분명히 일기예보는 이 평균 성공률보다 덜 신뢰받을만하고 일월식 예측은 더 신뢰받을 만 할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방법은 이 경우들을 완벽하게 구분한다: 가능한 사건은 – 세상에 대한 가능한 상태와 반대로 – 이 사건을 포함하는 모든 가능한 상태들의 확률 총계와 동일한 확률을 얻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가능한 상태들에게 무게들(weights)을 귀속시키는 우리의 생각으로써 우리가 성공한다면, 문제의 고전적 정지사진에 귀속된 0.7의 확률보다 일월식이 발생하는 확률 혹은 일월식이 발생하지 않는 확률은 훨씬 더 높아질 수 있고, 특정 일기 상황이 발생하는 확률이나 그 특정 일기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 확률은 훨씬 더 낮아질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수정사항이 옛 수정사항보다 더 좋은 결과들을 낳을 것임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의 새로운 그림에 – 고전적 필름 조각을 무게가 실린 가능성들의 일람표로 대체한 것 - 의하여 제기된 문제들 중 몇 가지 문제들을 고찰하자. 주요 문제는 물론 이 무게들(weights)이나 확률들을 결정하는 것이다; 혹은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한 가지 정지사진을 – 즉, 하나의 무게가 실린 일람표이자 가능성의 공간에서의 한 가지 확률 분포 – 다음 정지사진과 연결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칙들의 발견. 이 문제는, 자연에 관한 고전적인 역학 법칙들의 일반화를 통하여 천이 확률들(transition probabilities)을 결정하는 임무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이것은 양자론이 수행하려고 시도하는 임무이다. 양자론은, 아인슈타인이 예전에 말한 바와 같이, ‘충분히 작은 질량들의 경우에 대한 적용에 관한 한 왕좌를 빼앗긴 고전적 물리학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갈릴레오와 뉴튼에 의하여 설명된 운동 법칙들은 제한적인 경우들로서만 유효하다고 간주될 수 있다’. 심지어 1925년 이전에도 그만큼 분명했다. 문제는, 옛 역학법칙들에서 무엇이 보존될 수 있었는가?이었다. 나의 현재 그림이 많은 면에서 빚지고 있는 직감적인 개념들에 근거한 보어(Bohr)와 크라머(Kramer)와 슬레이터(Slater)의 1924년의 이론은, 심지어 운동량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들도 통계적 평균치들에 대해서 유효할 따름이라고 전제했다. 이 견해는 보테(Bothe)와 가이거(Geiger)의 실험에 의하여 반증되었다; 그리하여 1925-26년의 새로운 양자론이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와 보른(Born)과 요르단(Jordan)과 디랙(Dirac) 및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이름을 연결하여 전개되었고 그것은 고전적 보존법칙들을 충족시켰다.
게다가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이론은, 경향들과 관련하여, 그 이론이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이라는 의미에서 ‘고전적’이었다: 그 이론은 경향들의 분포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 이론은 시간-가역적(time-reversible)이었다. 현재의 관점에서 이것은 거의 기대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 문제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i) 자연에 관한 고전적인 역학 법칙들과 유사한 역할을 하지만, 실제적인 고전적 상태들이라기보다는 경향들의 분포를 연결하는 법칙들을 우리가 발견해야 한다. 이것은, 법칙들이 가능하면 미분방정식이 되어서 밀도나 무게들(weights)이나 경향들의 지속적인 (다차원적) 장들(fields)의 변화를 결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ii) 높은 정도의 단순성이나 시험가능성을 지닌 법칙들을 우리는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법칙들보다 고전적인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형태들의 법칙들이 더 단순하고 그리하여 더 잘 시험될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iii) 비결정론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다양한 필름 조각들을 다양한 시간-조각들에게 붙임으로써, 그리고 고전적 필름들을 확률주의적 경향 필름들로써 대체함으로써 충족된다; 그리하여 정지사진들을 연결할 수 있는 역학법칙들이 고전적 형태로부터 더 멀리 떨어질 필요가 없다. (iv) 이것은 또한, 고전물리학이 양자물리학에 대한 근사치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의하여 (즉, 대응원리[the principle of correspondence]에 의하여; 후기[後記: Postscript]의 I권,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1부, 15절 참조.) 제안된다.
그러나 보존법칙들로 돌아가자. 개별적인 과정들에 대한 그 법칙들의 유효성은,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입자들이 (그리고 이것들이 관찰되지 않는 입자들이라면 더 한층 강력한 이유로 – 그러나 여기서 나의 주요 목적들 중 한 가지 목적은 관찰주의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고전적으로 행동함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이 지녔던 견해. 비결정론적인 것은 입자들의 상호작용이고 – 광양자들을 포함하여 – 특히 입자들과 스크린들(screens)이나 슬릿들(slits)이나 그리드들(grids)과 같은 입자구조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이 상호작용들은 보전법칙들을 유지한다; 그러나 보존법칙들은 결정론을 위하여 충분하지 않다. 입자들이 당구공들로서가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편향들[biases]을 지니고) 확률주의적 경향들의 운반체들로서 생각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그렇다. 그리하여 디랙(Dirac)과 함께 우리는, 편광자(polarizer)에 접근하는 입자는 편광자(polarizer)를 통과하려는 어떤 경향과, 편광자(polarizer)를 통과하지 않으려는 상보적 경향이 있다고 상정한다. (물론 이 경향들을 결정하는 것은 전체 배열이다.) 이 비결정론을 입자 상태의 명확성이나 선명성의 부족이나, 혹은 불확실 관계들에게 귀속시킬 필요는 없다: 이것들은, 오히려, 결정론적 상호작용이 경향들에 의하여 대체된다는 사실의 결과로 산포 관계들(scatter relations)로서 나타난다. 이 견해는, 불확실성이 우리의 간섭에, 우리의 측정에, 기타 등등에 ‘기인한다’는 (혹은 더 정확하게 부분적으로 ‘기인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대체할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 그 잘못된 믿음을 설명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측정이 입자들의 상호작용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하여 이 견해는, 경향들의 분포에 따라서 정말로 산포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일이, 관찰자도 없고 동시에 관찰도 없는 무수한 경우들에서도 또한 발생한다.
이 모든 것은, 상황이 군인의 난보(亂步: random walk)와 (위 10절에서 토론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상 우리는 지금 한 명 이상의 군인을 도입하는 단순한 장치를 통하여, 양자 이론적 비결정론에 대하여 고도로 단순화된 모형과 같은 것을 구축하는 위치에 있다.
25. 양자 이론적 비결정론의 개략적 모형.
우리는 벽으로 둘러싸인 매우 큰 방목지나 들판을 생각하여, 각자가 두 개의 끝이 구분되지 않은 대칭적인 회전 침이 있는 호주머니 룰렛-바퀴(roulette-wheel)를 지니고 일련번호가 매겨진 한 무리의 군인들을 그 위에 풀어놓는다. 각 군인은, 벽이나 또 다른 군인의 다섯 발자국 거리 안에 들어올 때까지 일정 속도로 직선으로 걸을 것을 지시받는다. 벽까지 다섯 발자국 안에 들어오면, 군인이 마치 자신이 벽에 의하여 반사되는 당구공인양 자신의 움직임을 계속한다. 다섯 발자국 안에 들어오는 것이 또 다른 군인이라면, 더 높은 숫자를 지닌 군인이 자신의 룰렛-바퀴(roulette-wheel)를 참고한다; 그리고 자신이 참고한 다음에 – 지체 없이 – 그 군인은 자신이 지닌 룰렛-바퀴(roulette-wheel)에 의하여 정의(定義)된 두 가지 상반된 방향들 중에서 한 가지 방향으로 움직여 사라진다. 그의 방향과 속도, 그리고 또한 다른 군인의 방향과 속도는 그렇게 결정될 수 있어서 둘이 함께 그들은 운동량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들을 충족한다; 그것은 항상 가능하다.
우리의 모형은, 먼저, 보존법칙들이 결정론을 수반하지 않지만, 변수들 중 한 가지 변수를 선택에 혹은 우연에 의한 결정에 개방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물론 거시적 당구공들의 탄력적 충격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두 번째, 두 명의 군인들의 움직임에 대한 원래의 예정이 파괴되었을 때 두 명의 군인들의 첫 번째 조우로 시작하여, 퍼지는 파동으로서 도표로 재현될 확률들의 일람표들을 이용하여 우리가 연구를 해야 함을 우리의 모형은 보여준다 (위 10절 참조).
세 번째 요점은 이렇다. 군인의 위치를 결정하기 위하여, 그 군인과의 조우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제하자. 그렇다면 우리의 모형은, 군인의 위치에 대한 모든 결정이 예측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위치를 간섭할 것임을 보여준다. 물론 이 세 번째 요점은 여전히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불확실 관계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요점은, 대상에 대한 관찰자의 간섭이 근본적인 중요성을 띠지 않는 것으로서 – 상호작용에 관한 우세한 법칙들의 결과이고 그리하여 전혀 이 법칙들이나 이 법칙들이 지닌 비결정론적 특징을 설명하지 못하는 – 시각화될 방식을 나타낸다.
우리의 모형을 통하여 예시되는 네 번째 요점은 이렇다. 막 만나려는 두 명의 군인들 중에서 한 명의 군인을 고려하자, 그리고 그 만남 10분 후에 들판의 주어진 특정 지역에 위치할 그의 경향을 계산하려고 노력하자. 이 경향이 총체적 상황에 달려있음은 분명하다: 그렇게 위치를 잡아서 이 10분 안에 그 군인을 아마도 만날 모든 군인들은 계산 결과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군인들의 위치들에 관한 변하는 가능성들, 즉 경향들은 모두 우리가 계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경향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 경향과 상호작용을 할 것이다.
우리는 보기는 물론 너무 단순해서 이중슬릿 실험과 유사한 경우를 야기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례는, 체계의 모든 상태가 그 상태의 바로 앞선 상태에 의하여 결정되는 잠재태들(potentialities)의 실현이라고 말함으로써 의도되는 바를 예시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사례는 또한, 체계의 모든 순간적인 상태나 시간-조각에게 그 정지사진들이 무게가 실린 가능성들의 일람표들인 (혹은 공간들) 상상적 필름 조각이 부착된다는, 그리고 이 필름 조각들 각각은 입자들 사이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나자마자 (혹은 가능성들 중 몇 가지 가능성들이 실현되자마자) 다른 필름 조각에 의하여 대체될 것이라는 개념을 예시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물론 심지어 대체된 필름 조각도 많은 확률주의적 예측들을 위하여 여전히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나중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의 파속을 붕괴할(reduce our wave packet)’ 것이다.
26. 물질과 장(場: Field).
아인슈타인이 아마도 40년 동안 가장 많이 간직했던 꿈은 통일장론(unified field theory)을 – 물질과 장(field)의 이원론이 대체되었고, 입자들이 장(field)의 속성들로부터 야기되는 것으로서 설명되었던 장이론(field theory) -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이론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물론 장(field)에 관하여 상정된 방정식들로부터 입자들이 지닌 물리적 속성들을 –
입자들의 안정성이나 불안정성, 입자들이 지닌 운동 법칙들, 입자들의 상호작용, 그리고 장(field)의 나머지와의 입자들의 상호작용 – 추론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원래 프로그램은 많은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더 이상 매우 희망적으로 간주되는 듯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믿기에, 아인슈타인이 오랫동안 결정론을 고수한 결과이고, 패러데이(Faraday)에게서 유래하는 그의 장(field) 개념이 양자론이 야기한 개념과 – 확률들을 (내 견해로는 경향들로서 해석될) 결정하는 장들(fields)에 대한 개념 – 다르다는 사실에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패러데이의 혹은 아인슈타인의 장(field)은, 전자(electron)나 존슨의 돌(Johnsonian stone)만큼 꼭 ‘실제적’인 – 혹은 거의 ‘실제적’인 – 것으로서 상상될 것이다: 그런 장(field)은 ‘발길질을 당할 수도 있고 그런 장(field)은 반발하여 발길질을 한다’ (란데[Landè]의 말을 인용하여). 정말로 발길질을 하거나 발길질을 반발로 당하는 것에 대한 현재의 물리학적 설명은 (최초의 근사치에서) 완전히 일반적으로 서로 발길질을 하는 두 가지 쿨롱장(Coulomb fields)에 대한 물리학적 설명이다. 확률들이나 경향들의 장들(fields)은 더 추상적인 것들이다. 그 장들(fields)은 만들어질 수 있지만 (실험적 장치에 의하여) 발길질을 당할 수는 없고, 발길질을 반발하여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실험적 발길질은 그 장(field)이 반발 발길질에 관하여 매우 높은 확률을 결정하는 장치에 대응할 것이다. 실험적 발길질이 이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가능성들이 – 실제적 사건들 –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그리하여 최종 결과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제하도록 우리가 선도 당했기 때문에, 나는 가능성들이나 확률들의 장들(fields)을 ‘현실적(real)’으로서 – 실제적(virtual)일지라도 ‘현실적인(real)’, 객관적인 경향들의 다면체들로서 – 고려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 장들(fields)이 발길질을 당할 수 없고 반발하여 발길질을 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 장들(fields)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입자들이나 패러데이의(Faradayan) 혹은 아인슈타인의 장들(fields)보다 덜 ‘현실적(real)’하고 더 ‘추상적’으로서 상상되어야 할 것이다.
보다 최근의 전개상항들의 또 다른 모습은,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통일장 론(unified field theory)을 사용하여 겨냥했던 방향과는 매우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듯하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물리학에 고려되던 두 종류의 장(field)이 – 패러데이(Faraday)와 맥스웰(Maxwell)의 전자기 장(electromagnetic field)과 아인슈타인 자신의 중력장(gravitational field) - 하나의 단일 장(field)에 의하여 대체된 이론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통일과 관련된 이 특정 프로그램은 물질에 관한 전기적 이론으로 – 요컨대 물질은 전기적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믿음 - 지칭될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자체의 가장 단순한 형태로, 이 이론은 전자와 양성자의 질량이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전기장(electrostatic field)의 에너지 내용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 형태로, 아무튼, 그 이론은 중립적 물질 입자인 중성자가 최초로 발견되자마자 반증된 것으로서 폐기되어야 했다. (새로운 중립적 기초 입자가 발견된 때마다 그 이론은 다시 반증되었다. 물론 이 발견들은, 이 중립적 입자들인 ‘기초적’, 즉 비-합성적이라고 우리가 전제한다는 조건으로만, 반증들을 구성한다.)
물질에 관한 전기적 이론의 폐기와 동시에,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상상되던 통일장론(unified field theory)에 대한 특정 프로그램이 자체의 적합성을 잃었다. 정말로 현재의 양자론은 새로운 종류의 양자화된 장(quantified field)을 새로운 종류의 입자와 (중립적이든 전하를 띠든) 결합한다: 두 가지 장들(fields)을 하나로 결합하는 대신에, 우리에게는 이제 다양한 종류의 입자들만큼 많은 다양한 종류의 장(fields)이 있다. 그 장들(fields)은 1957년에 적어도 16가지였다 (우리가 한 가지 종류의 장[field]을 두 개의 입자들과 – 즉, 한 개의 입자와 그 입자의 반[反]-입자 - 항상 결합한다면).
여하튼 통일장론(unified field theory)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은 내가 보기에 포기될 수 없는 개념이다 – 어떤 대안적인 통일론(unified theory)이 제안되어 성공하지 않는다면. 이유인즉 현재의 상태가 – 다수의 장 이론들(field theories)이 있는 상태 – 몇 가지 면에서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의 상태는 전기역학(electrodynamics)에서 – 전자-양전자(positron) 장(field)이 (‘전자-양전자 집합[electron-positron assembly]’) 광양자장(photon field)과 (‘광양자 집합[photon assembly]’) 상호작용하는 것에 대한 확률주의적 이론 – 매우 만족스러운 수량적 예측들을 낳았다. 그러나 전기역학(electrodynamics) 외부에서는 현재의 이론에서 도출된 예측들이 주로 질적(qualitative)이다; 이것은 이론이 만족스럽게 시험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상황은 심지어 전기역학(electrodynamics) 내부에서도, 전기역학(electrodynamics)의 예측적 성공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불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이론은, 이론의 위상처럼, 연역적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론은, 오히려, 연역적 체계와 다소 특수한 특징을 지닌 계산과정들의 모임 사이의 것이다. 나는 특히 소위 ‘재규격화 방법(method of renormalization)’을 염두에 두고 있다: 현재 그 방법은 ‘lim(log x – log y)’라는 표현으로써 ‘lim log-lim log y’ 형태의 표현을 대체하는 것을 포함한다; 전자(前者) 표현이 탁월한 결과들 낳는 (특히 소위 램-러더퍼드 이동[Lamb-Retherford shift]의 계산에서) 반면, 후자(後者) 표현이 ∞-∞과 동일하여 불확실적으로 판명되는 것보다 더 나은 증명이 제시되지 않는 대체. 내가 생각하기에, 그 대체에 대한 이론적 증명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또 다른 물리학적 개념으로써 – 우리가 이 불확실한 표현들을 피하는 것을 허용하는 개념 – 재규격화(renormalization)에 관한 물리학적 개념을 대체하는 것이 틀림없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결함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보기에, 15 혹은 16 가지 다른 종류의 장들(fields)가 연결된 30 혹은 32 가지의 다른 종류의 근본적인 입자들을 (반[反]-입자들을 계산하여) 사용하여 연구하는 현재의 방법들이다.
이 상황이 지닌 만족스럽지 못한 특징에 관하여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약 30개의 입자들을 양자화된 장(quantified field)의 상태들로서 설명하고 그리고 그 입자들의 붕괴 속성들(decay properties)을 천이(transition) 확률들을 통하여 설명하는 (부분적으로 수행된) 바람직함에 관해서도 또한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통일장 이론(unitary field theory) 시급하게 만드는 것은 이와 같은 목표이다. 목표는, 분명하게 표현되지는 않을지라도 흔히 함축적으로 수용되는 연구 프로그램에 의하여 결정된다.
물론 장들(fields)과 입자들(particles)을 바라보는 통상적인 방식은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이다; 그리고 이 이원론이 원자 이론의 본질적 특징이라는 것은 널리 주장된다. 장(field)을 입자와 ‘연상하는(associating)’ 생각이,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이론에서 드 브로이(de Broglie)와 슈뢰딩거(Schrödinger)의 전자이론까지 그리고 유카와(Yukawa)의 중간자(meson) 이론까지 매우 유용한 것으로 판명되었음을 우리가 고려할 때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원론은, 물리학적 문제들을 다루는 데 아무리 도움이 되었다고 판명되었을지라도, 지금까지 기초가 튼튼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른(Born)의 통계적 해석은 본질적으로 일원론적인 입자이론이다 (위 11절의, 각주 6의 원문 참조). 란데(Landè)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존재하는 것은 입자들이다; 파동들(waves)은, 실험을 반복할 때마다 입자들이 띠는 특정 상태의 빈도를 결정할 따름이다. 유사하게 보다 최근의 이론들도 – 다양한 종류의 입자들과 연상된 양자화된 다수의 장들(fields)을 (이 절의 앞부분에서 언급된) 포함하여 – 또한 본질적으로 입자 이론들이라고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장(field) 이론들이 입자 집합들(particle assemblies)에 관한 통계적 이론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론들이 기술하는 것은 다양한 가능한 상태들에 놓인 입자들의 숫자들이다 – 즉, 더 정확하게 숫자들에서의 변화에 관한 확률들; 그 이론들은 이 상태들에 (‘창조와 파괴 조작자들’) 놓인 입자들의 ‘창조’나 ‘파괴’의 확률을 기술하거나, 은유를 다양하게 선택하여 한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 입자들이 천이하는 것(transition)에 관한 확률을 기술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와 슈뢰딩거(Schrödinger)와 디랙(Dirac)의 이론을 보른(Born)의 해석에서 보든지 아니면 양자화된 장들(fields)에 대한 보다 최근의 이론들을 보든지, 양자론이 입자들과 파동들의 이원론을 포함한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실제로 없는 듯하다: 이 모든 이론들에서, ‘파동들’은 입자들이 특정 상태들을 점유하는 확률들 혹은 특정 상태들로부터 다른 특정 상태들로의 천이들(transitions)을 겪는 확률들을 결정하기만 하는 역할을 한다.
입자이론이나 입자 집합론(a theory of particle assemblies)과 반대로, 그러나 진정한 장(field) 이론이 들어올 것 같은 곳은 (그리고 통합장이론[a unified field theory]) 입자들 자체에 대한 설명 안에 있다. 이것은 슈뢰딩거(Schrödinger)에 의하여 입자들을 파동 마루들(wave crests)로서 (혹은 파속[wave packets]) 설명하려는 그의 원래 시도에서 최초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가 이 이론을 포기했을지라도 그는 자주 그 문제로 돌아왔다.
일원론적 장(field) 이론이 – 혹은 여하한 다른 이론 - 할 수 있을 것을 조금 고찰하면 여기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지적된 바와 같이, 일원론적 장(field) 이론은 기껏해야 입자들이 지닌 물리학적 속성들만을 설명할 수 있다; 혹은 다시 말해서, 입자들이 지닌 물리학적 행태; 혹은 더 정확하게, 특정 상황 하에서 특정 방식들로 행동하는 입자들의 의향이나 경향. 어떤 물리학 이론도 이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자체의 경향들을 기술함으로써만 물리적 체계를 기술할 수 있다. 그리하여 물리학적 관점에서 입자들은 경향들이다; 그리고 입자들을 다르게 – 아마도 일시적으로 어떤 것으로 ‘충만하게(full)’ 꾸려져서 불가분한 공간의 영역들로서 – 보는 것은 특정 형이상학적 견해뿐이다.
나는 우리가 이 형이상학적 견해를 포기할 것을, 그리고 우리가 동등하게 형이상학적인 견해인 또 다른 형이상학적 견해로써 그 형이상학적 견해를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경향들은 현실적이라는 견해로써; 경향들은 장 방정식들(field equations)에 의하여 기술된다는 견해로써; 입자들은 경향들에 의하여 생성될 수 있다는 견해로써; 그리고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입자들이 경향들이라는 견해로써; 그리하여 입자들은 적어도 이런 면에서 물리학적 이론이 우리에 알려주는 것이다 – 물리학적 이론이 아마도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물질과 장(field)이라는 이원론을, 그 이원론이 물리학적 문제들을 다루고 해결하는 데 대하여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혜택들을 희생하지 않고도, 대체할 수 있다. 이유인즉 우리가 이 이원론을 경향들이라는 일원론으로 대체할지라도, 우리는 이 일원론적 견해 안에서 일종의 실용적인 이원론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경향들은, 한편으로, 잠재태들(potentialities)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은 어떤 것을 실현하는 경향들이거나 잠재태들(potentialities)이다. 그러나 실현될 것이나 자체를 실현할 것은 틀림없이 다시 다른 것을 실현하는 경향들이나 잠재태들(potentialities)의 집합이다.
여기에서 지적된 방식으로 입자들을 다루는 물질에 관한 물리학적 이론은 프로그램이나 희망사항만을 아닌데 왜냐하면 양전자들(positive electrons)에 관한 한 그것은 여러 해 전에 이룩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디랙(Dirac)의 유명한 이론을 – 양자론의 가장 대담하고 가장 기발한 부분들 중 한 부분 – 염두에 두고 있다. 디랙(Dirac)의 이론은 양전자들(positive electrons)을 ‘구멍들(holes)’로서 – 다시 말해서 점유되지 않은 상태들로서, 점유를 위한 열린 가능성들로서 – 해석하는 이론이다. 진공상태는 (빈 공간) 구조를 지니는 것으로서 이 이론에 의하여 상상된다: 빈 공간은, 음 질량과 에너지(negative mass and energy)의 모든 혹은 거의 모든 가능한 상태들을 ‘점유하는(occupy)’ 음전자들(negative electrons)로 구성된다. (그런 상태들의 존재는 디랙[Dirac] 방정식들의 결과이다.) 이런 종류의 상태를 상정했기 때문에 음전자(negative electron)가 말하자면 사라진다; 그러나 음전자(negative electron)는, 전자를 더 높은 에너지 수준으로 올리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광양자가 제공한다면 특정 상황 하에서 다시 나타날 것인 한, 실제로 현존하는 상태로 남는다. 그러나 동시에 ‘구멍(hole)’이 나타날 것이다 – 지금은 점유되지 않은 자체의 이전 상태; 그리고 그 이론은, 이 ‘구멍(hole)’이 양전하(positive electric charge)를 띤 전자와 꼭 같이 행동할 것임을 예측한다: 구멍(hole)은 양전하들(positive charges)에 의하여 격퇴당하고 음전하들(negative charges)에 의하여 이끌릴 것이고, 음전자(negative electron)와 ‘연합(united)’할 것인데 그 때 ‘구멍(hole)’과 음전자(negative electron)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것들의 질량들(masses)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전하들(charges)도 파괴되어 복사에너지(radiant energy)로 (광양자로) 변환될 것이다. 두 가지 정반대 과정들이 – 진공상태로부터의 한 쌍의 양전자와 음전자의 창조, 그리고 양전자와 음전자의 파괴 – 그리하여 설명된다. 그 설명은 일원론적이다. 포함된 한 가지 종류의 입자만 있는데 우리가 음전자로서 알고 있는 입자이다; 그리고 두 가지 과정들은, 다양한 상태들에 관한, 다양한 에너지 수준들에 관한 입자의 전제에 놓여있다. 다른 입자는 – 양전하를 띤 전자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입자 – 진공상태 속에서 ‘구멍(hole)’로 판명된다: 음전자에 의하여 점유될 열린 가능성, 점유되지 않은 상태: 경향.
이 접근 방식에 내재한 특정 종류의 일원론은 – 음전자들에 관한 일원론 – 오늘날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양전자의 발견이래, 너무 많은 다양한 입자들이 (예를 들어, 중간자들) 발견되는데 그것들은 기술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 물질은 하나 혹은 두 개의 근본적인 입자들의 상태들을 통하여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던 시대는 지나간 듯이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랙(Dirac)의 형식주의가 존재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물질적 입자의 존재를 ‘구멍(hole)’과, 다시 말해서 비-입자와, 입자에 관하여 잠재적이지만 ‘점유되지 않은’ 상태와 대등한 것으로서 기술하는 것을 허용하는 수학적 이론의 존재가 증명된다는 것이다: 다른 입자들과의 상호작용을 위하여 완벽히 열린 가능성과 대등한 것으로서.
이 다른 입자들이 반대로 열린 가능성들과 수학적으로 대등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는 듯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일원론에 – 물질적 입자들을 특정 잠재태들(potentialities)의 실현(realizations)이나 실제화(actualizations)로서 (쌍생성[pair-creation]은 진공상태의 특정 잠재태들[potentialities]을 실현한다) 또한 특정 종류의 상호작용을 (예를 들어, 쌍소멸[pair annihilation]과 같은) 위한 잠재태들(potentialities)로서 해석하는 일원론 – 틀림없이 다다른다. ‘입자들’과 ‘구멍들(holes)’을 내내 대등한 것으로서 다룰 형식주의는, 어느 정도까지,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Schrödinger)의 프로그램을 완성할 것이다: 그 형식주의는 물질의 입자들을 장들(fields)을 통하여 설명할 것이다. 동시에 그 형식주의는, 여기에서 개괄된 프로그램을 완성할 것이다: 동시에 일원론적이자 이원론적일 변화의 이론을 위한 프로그램; 그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우리는 세상의 현실적 상태를 그 세상의 앞선 상태들의 잠재태들(potentialities)이나 경향들 중의 몇 가지를 실제화하거나 실현하는 것과, 또한 다음 상태를 실현하는
의향들(dispositions)이나 경향들(propensities)의 장(field)로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물질과 장(field)이라는, 그리고 입자와 파동이라는 겉으로 보이는 이원론은 모든 물리적 물체의 두 가지 근본적인 모습들로부터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출현하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모든 물리적 물체의 두 가지 모습들이 의향들을 지닌 것(bearer of dispositions)이라는 – 이 의향들(dispositions)을 넘어서 더 이상 시험 가능한 속성들을 지닐 수 없는 지닌 것(bearer) - 것이다.
이와 같은 이론은 아마도, 동일한 가능성들을 재현하는 입자들은 동일하다는 원리를 또한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보스[Bose]의 원리를).
27. 열린 문제들.
나의 이상적인 프로그램은 형이상학적이다. 그 프로그램은 시험될 수 없다: 그 프로그램은 반증될 수 없다 (그리고 반증불가능성은 장점이 아니라 약점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프로그램은 비결정론의 형이상학적 (‘과학적’이라기보다는) 개념에 근거한다. 그 프로그램은, 슈뢰딩거(Schrödinger)에 반대하여 보른(Born)이 옹호하는, ‘입자들’을 통한 양자론에 대한 현존하는 형이상학적 해석을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그 프로그램은 또한 (입자-파동 이원론을 넘어서 그 이원론을 설명하려는 어떤 시도도 거부하는) 보어(Bohr)의 도구주의적 해석을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물리적 세계에 - 자체의 물리적 주민들에 대하여 더 이상 구속이 아닌 물리적 세계, 우리가 포획된 둥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가 보다 주거하기에 적합하게 만들 수 있을 (그리고 덧붙여, 우리가 ‘원자력의 평화로운 이용’이라고 우리가 자랑스럽게 부르는 것에 의하여 우리의 자손들이 거주할 수 없도록 우리가 곧 만들려는) 주거지 – 대하여 일관적인 견해를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의 꿈이 형이상학적이라면, 그 꿈은 무슨 소용인가? 그 꿈 안에는 혹시 정서적 만족을 넘어서는 것이 있는가? 그 꿈은 과학적 가설과 – 그 가설이 지닌 임시적으로 사실로서 고려될 것을 함축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에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갖는 과학적 가설 – 철저히 다르지 않은가?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 가장 중요한 요점에 관하여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의 구분이 있다고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형이상학적 이론을 과학적 이론과 유사한 것으로서 간주한다. 형이상학적 이론은 물론 많은 면에서 더 모호하고 열등하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이론이 지닌 반증불가능성, 즉 실험가능성의 결여는 형이상학적 이론이 지닌 가장 큰 약점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이론이 합리적으로 비판될 수 있다면, 나는 형이상학적 이론이 참으로서 임시적으로 고려될 것을 주장하는 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주로 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평가를 통하여 – 먼저 형이상학적 이론이 지닌 이론적 관심을 고려하고 형이상학적 이론의 실용적 쓸모에 (연구 프로그램으로서 형이상학적 이론이 지닌 유효성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두 번째 관심을 가지면서 – 나에게는 틀림없이 형이상학적 이론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실용적 쓸모나 쓸모없음은 주로 진리에 대한 실험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 그것이 흔히 과학적 이론과 연결될 것이기 때문에 – 중요한 것으로서 고려될 것이다.
그러나 반증 불가능한 이론을 감정하거나 평가는 일이 합리적으로 가능한가? 처음부터 우리가 이론이 순수이성에 의하여 반증될 수도 없고 또한 경험에 의하여 시험될 수도 없다면 이론을 합리적으로 비판하는 요점은 무엇인가?
나의 답변을 이렇다. 형이상학적 이론이, 함축적으로 ‘수용하든지 말든지 하라’며 우리에게 던져진 직감이나 통찰의 산물만큼 다소 동떨어진 주장이라면, 그 이론을 합리적으로 토론한다는 것을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과학적’ 이론에 대해서도 동일한 것이 적용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먼저 고전적 역학의 방정식들이 해결하려고 의도한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고 우리에게 그 방정식들을 제시한다면, 우리는 그 방정식들을 합리적으로 토론할 수 없을 – 계시록(the Book of Revelation)처럼 – 터이다. 우리에게 뉴튼의 논증들이 주어진다할지라도, 우리가 먼저 갈릴레오와 케플러가 지녔던 문제들과 그 문제들에 대한 해답들에 관하여, 그리고 보다 일반적인 이론으로부터 이 해답들을 도출함으로써 이 해답들을 통합하는 방법에 대한 뉴튼 자신의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논증들을 토론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합리적인 이론도, 과학적이든 형이상학적이든, 그 이론이 다른 것과 결합한다는 이유로만 – 그 이론이 특정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 합리적이다; 그리고 그 이론은 그 이론이 결합된 문제 상황과 관련해서만 합리적으로 토론될 수 있다. 그 이론에 대한 어떤 합리적인 토론도 주로 그 이론이 자체가 지닌 문제들을 얼마나 잘 해결하는지를 고찰하는 데 달려있다; 다양한 경쟁하는 이론들보다 얼마나 훨씬 더 잘 그 이론이 그렇게 하는지; 그 이론이 불식시키려고 착수한 난제들보다 더 큰 난제들을 그 이론이 만들어내지 않는지; 해답이 간단한지; 새로운 문제들과 새로운 해답들을 제안하는 데 그 이론이 얼마나 유익한지; 그리고 혹시 경험적 시험들을 통하여 우리가 그 이론을 반증할 수 없는지.
이론이 형이상학적이라면 이론을 시험하는 마지막 방식은 물론 적용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방식들은 적용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몇 가지 형이상학적 이론들에 대한 합리적이거나 비판적 토론이 가능한 이유이다. (물론 합리적으로 토론될 수 없는 다른 형이상학적 이론들이 있을 것이다.)
이 후기(後記: Postscript)가 이 방식들에 대한 사례들도 가득 차있기 때문에 여기서 이 방식들에 대한 사례들을 제시한 필요는 없다. 사례들로서 나는 관념론적 인식론과 실증주의적 인식론에 대한 나의 비판적 토론을 (I권 1부에서) 언급할 것이다; 확률주의적 인식론들에 대한 나의 비판적 토론 (I권 2부); 그리고 결정론적 형이상학에 – 홉스(Hobbes) 흄(Hume), 칸트, 그리고 아인슈타인에게 발견될 – 대한 나의 비판적 토론 (II권).
이런 방식으로 – 특히 나의 꿈이 대체할 의도를 지닌 상대 견해들과 나의 꿈을 비교함으로써 – 나의 꿈을 토론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비교는 단순성, 특정 다른 이론들과의 일관성, 통일하는 힘, 직감적인 호소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산성을 통해야 한다. 실용주의나 도구주의와 같은 것에 헌신하기를 바라지 않고, 나는 나의 프로그램이 지닌 생산성의 문제를 결정적인 것으로서 수용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프로그램이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하지 않거나, 적어도, 중대한 오래된 개방된 문제들 중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낳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프로그램을 폐기해야 한다: 아름다운 -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져서는 안 되는 – 꿈으로서 (혹은 내가 보기에 그런 꿈이다).
물질이론에 관하여 잘 알려진 개방된 문제들의 (전자전하[electronic charge]나 배타원리(exclusion principle)의 도출 문제와 같은) 그리고 내가 여기서 제안한 변화에 관한 형이상학에 비추어 (내가 꿈꾸는 바,) 혹시 어느 날 공격을 받을 일반적인 우주론에 관하여 잘 알려진 개방된 문제들의 목록을 나는 여기서 제공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기초입자들에 대한 크고도 여전히 증가하는 숫자 문제는 자체의 극단적인 시급성 때문에 강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원자들의 큰 숫자들을 단지 두 개의 근본적인 입자들을 – 전자와 양성자 – 통하여 설명하는 것은 예전에는 현대적인 원자론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현대적인 원자론의 매우 큰 승리의 순간은 그 원자론이 이 프로그램을 – 지금은 폐허가 된 프로그램 - 수행했을 때 발생했다. 문제는 중성미자에 대한 특별한 가설로써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그 가설은 패배를 – 특별한 전제에 대하여 어느 날 독립적인 증거를 얻는 희망이 있다면, 고도로 성공적인 경우에 온전한 절차 – 피하기 위하여 특별하게 도입되었다. 그러나 내가 틀리지 않다면, 이 가설은 30년 전에 그랬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여전히 특별하다. 그러나 중성미자는, 강력한 증거를 - 특히 다양한 중간자들 – 토대로 그 후 소개되어야 했던 모든 저 다른 입자들과 비교하여 하찮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입자들이 양자론의 토대였던 물질의 구조에 대한 견해들을 부셔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견해들은 수학적 형식주의의 한 부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견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이론의 한 부분이었다.
필요한 것은, 이 모든 입자들의 질량들과, 그 입자들의 안정성이나 불안정성을 일반적인 원리들로부터 설명하는 물질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이다. 통일이론(unified theory)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요구는 필요한 요구이고, 망상적인 목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그리고 양자론에 의하여 파괴된 환상으로서 배척될 수 없는 요구이다. 경향들의 변화하는 장들(fields)에 관한 이론은 통일을 향한 한 가지 길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원자이론과 고유의 우주론 사이의 중간지점에 요르단(Jordan), 골드(Gold), 호일(Hoyle), 본디(Bondi), 그리고 매크리어(McCrea)에게서 기인하는 물질 창조론이 있는데 그 창조론은 적어도 의도에서 형이상학적 이론이라기보다는 과학적 추측이다 (비록 그 창조론이 지금까지 시험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 그 후 그 창조론은 시험 가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앞 절에서 개괄된 것과 같이 물질에 대한 경향 이론을 전제하고, 라이프니츠(Leibniz)와 아인슈타인의 제안에 따라서 공간(‘위치’ 공간, topos)을 ‘... 몸체들의 가능한 상호 관계들의’ 장(field)으로서 해석하라; 다시 말해서, 다른 입자들 사이에 놓일 물질 입자들이 지닌 경향들의. (그것은 또한, 디랙[Dirac]의 이론에 따라서, 물질 입자들의 잠재 쌍들에 의하여 점유되어 분극화될 수 있는 상태들의 장[field]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팽창은 아마도 이 경향들의 장(field)의 팽창으로서 해석될 것이다. 이 팽창이 새로운 가능성들을, 그리하여 존재할 물질의 새로운 경향들을 (그것들 중 몇 가지는 실현될 것이다) 야기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 팽창은 아마도 새로운 물질의 창조를 설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은 이 경향들의 실현과 동일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팽창하는 우주는 아마도 물질을 자체의 팽창 기능으로서만 창조할 것이다 (아마도 정상상태[steady state] 이론에 의하여 제시되는 바와 같이).
이와 관련하여 나는, 모든 물질 입자들은 제한된 평균수명을 지녀 입자들의 대규모 집적들은 (별들, 혹성들) 물질에 대한 (그리하여, 방금 개괄된 전제를 토대로, 또한 공간에 대한) ‘함몰(sink)’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카프(Kapp)의 추측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카프(Kapp)가 제안하는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과 유사한 기하학적 중력이론을 아마도 낳을 추측.
비결정론적 세계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된 몇 가지 우주론적 문제들이 있다. 이 개념은, 예를 들어, 닫힌 과거(closed past)와 열린 미래(open future)의 구분과, 그리고 그 구분과 함께 시간의 객관적인 방향을 의미한다. 그 각각이 비결정론적 우주의 시간-조각에 부착된 확률주의적이거나 비-고전적 필름 조각들로 구성된 우리의 그림에서, 필름들 안에서 경향들의 역학적(dynamic) 변화들을 결정하는 방정식들이 시간에 관하여 대칭적일지라도 우리의 이론은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론이 이 방정식들보다 더 많은 것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론은 이 방정식들에 덧붙여 경향들을 통한 그 방정식들의 해석으로 구성되고, 이 해석은 시간과 관련하여 비-대칭적이다. 경향이라는 개념은 미래의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현재 및 과거의 그 가능성들의 실현으로부터 구별한다.
이것은,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와 이 후기(後記: Postscript) 모두에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73절, 주석 5 및 원문, 그리고 후기[後記: Postscript]의 본서의 16절 참조.) 토론한 양자론의 특정 면모들에서 분명해진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가 언급하는 바와 같이, 예를 들어 한 개의 전자의 두 가지 위치들에 대한 측정 등 특정 행위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 두 가지 위치들 사이의 전자의 시-공간적 통로를 – 그 전자의 다양한 위치들뿐만 아니라 그 전자의 운동량도 - 원하는 정확도로써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는, ‘전자의 과거 역사에 관한 그런 계산이 어떤 물리적 실체에 귀속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개인적인 믿음의 문제’라고 덧붙여 말했다. 내 자신의 연구는 다른 결과를 낳았다: 나의 해석에서, 이 계산들은 산포 관계들로 해석되는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공식들을 시험하는 데 필수적이어서 그리하여 결코 산포 관계들에 반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산포 관계들은 정말로 미래에 관한 유사한 계산들을 정말로 저애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미래가 열려있다고 동의한다; 그리하여 과거가 결정된 것으로서, 혹은 닫힌 것으로서 우리가 계산할 수 있다는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에 의하여 언급된 사실은 심지어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해석 안에도 여기에 비대칭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경향 해석에서. 상황은 완벽하게 분명하다. 미래 경향들은 모든 순간에 결정된다 그러나 단지 경향들이다. (이것이 산포 관계들이 적용되는 이유이다.) 이 경향들이 위치들과 운동량들을 지닌 입자들의 형태로 자체를 실현하기 때문에, 열린 가능성들은 닫힌다.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의 실현들에 대한 계산가능성은 미래의 실현들에 대한 계산가능성과 다르다. 한 가지 주어진 시간-조각이 우리가 과거를 미래만큼 잘 결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지라도, 주어진 시간-조각들의 수열들은 그 수열들의 처음 및 마지막 원소들 사이의 주기를 정말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런 수열을 단지 과거에 속할 수 있다.
비결정론적 세상이라는 개념은, 이 후기(後記: Postscript)에 언급된 또 다른 문제와 – 아인슈타인의 중력 방정식들에 대한 특정 우주론적 해답들 안에 있는 폐쇄 세계선(closed world lines)의 존재에 관한 괴델(Gödel)의 문제 – 관련이 있고 그 문제에 해답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서, 회전하는 우주들 안에 있는. 폐쇄 세계선(closed world lines) 위에 있는 물리적 몸체의 역사는 반복적일 텐데, 절대적이고 무한히 반복적일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정론적 우주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하여 비결정론적 세계라는 전제는 이 가능성을 배제한다; 혹은 오히려 그 전제는, 초기 조건들이 무엇이든, 이 가능성에 확률 0을 귀속시킬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비결정론을 통한 이 가능성의 배제는 틀림없이 특수하지 않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나 훨씬 더 흥미롭게 보이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우주론적 방정식들을 참으로 전제하여 (비결정론에 대한 우리의 해석본과 양립할 수 있는 듯이 보이는 전제) 괴델(Gödel)이 상상했던 해답들의 배제는 물질에 대한 특정 방식들의 배제와 세상 안에서 배열될 물질의 움직임의 배제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이 문장의 원문은 But what seems even more interesting is the fact that, assuming Einstein’s cosmological equations to be true [an assumption which seems to be compatible with our version of indeterminism], the exclusion of the solutions envisaged by Gödel amounts to the exclusion of certain ways for matter and its motion to be arranged in the world인데 assuming으로 시작해서 indeterminism으로 끝나는 분사구문의 주어가 the exclusion of the solutions envisaged by Gödel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다. assuming을 because we assume으로 써야 될 것이다. 역자). 이것은 놀랍게도, 비결정론에 대한 가설과 같은 가설은 구조적 결과들을 지닐 수 있음을 – 비결정론에 대한 가설은 세상에서의 물질의 어떤 가능한 배열들과 움직임을 배제할 수 있을 것임을 – 보여준다. 이 사실은 내가 ‘뉴튼의 문제’라고 지칭한 것을 고려하면 매우 흥미롭다. (후기[後記: Postscript]의 I권,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1부, 16절 참조.) 이 사실은, 이 문제가 대체로 해결될 수 없을 가능성이 높을지라도 이 문제의 특정 면모들과 관련하여 어떤 진전을 이룩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0 확률의 귀속시킴을 통한 물질과 움직임의 특정 가능한 초기 분포들의 배제는 한층 더 흥미로운 결과를 지닌다. 그것은, 비결정론적 우주에는 고전적인 결정론적 이론의 관점에서 전형적으로 불확실하게 보일 가능성을 – 법칙들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초기 조건들의 특징에 관한 가능성들 – 배제하는 비-존재에 관한 특정 확률주의적 원리들이 있을 것임을 보여준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부록 ✡x 참조.)
28. 결론.
경향 해석에 관한 형이상학적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서술을 통하여 이오니아(Ionian) 우주론자들의 축약된 언어로 아마도 요약될 것이다: ‘모든 것은 경향이다.’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 사용법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아마도 말할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생성되려는 이전 경향과 생성되려는 경향 모두의 실제화이다.’ 그것은, 다음 목록에서 밝혀질 바와 같이, 이 결어의 1절에 (20절) 등재된 모든 저 형이상학적 프로그램들이 지닌 면모들을 통합하는 견해이다.
1. 파메니데스(Parmenides)와 함께처럼, 세상은 가득 차있다 – 진공상태인 공동(空洞: the void)이 구조를 지니고 있고 그 자체가 현실적인 경향들의 장(field)라는 의미에서.
2. 원자론자들과 함께처럼, 물질의 구조는 원자적이고, 충만(the full)과 공허(the empty)라는 – 물질과 공간 혹은 장(field)이라는 – 이원론은 경향의 실현과 실현될 경향 사이의 구분으로서 어느 정도까지 보존된다. (아래 입장 10 또한 참조.)
3. 플라톤 및 유클리드와 함께처럼, 기하학에 대한 강조는 보존된다; 그리고 기하학적 우주론도 그렇다: 이런 면에서, 그런 상태로서의 기하학에 대한 우주론으로서의 비-유클리드적 우주론인 유클리드 학파외의 유클리드도 심지어 세상에서의 물질의 분포를 기술하는 데 이용된다.
4. 내재적 잠재태들(potentialities)과 그 잠재태들(potentialities)의 실제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발전하여, 관계적(relational) 구조들이 각 물질적 물체 내에 내재하는 대신에 잠재태들(potentialities)에 의하여 규정될, 관계적(relational) 이론이 된다.
5. 르네상스 시대의 (플라톤적인) 기하학적 접근방식은, 플라톤의 가설적 방식 및 선행인(antecedent causes)에 대한 그 방식의 강조에 덧붙여, 보존된다.
6. 데카르트 학파 및 보일(Boyle)의 유동체 이론(the theory of fluids)은 (예를 들어, 열[heat]) 에너지 보존의 법칙의 형태로 보존된다. 소실 거리(vanishing distances)에서 유동체들(fluids)의 행동은 장(field) 이론의 형태로 보존된다.
7. 경향 이론은 역본설(dynamism)의 일반화로서 기술될 것이다.
8. 중심력들(central forces)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내재적 잠재태들[potentialities]과 상응하는), 패러데이(Faraday) 및 맥스웰(Maxwell)과 함께처럼 관계적(relational) 특징을 지닌 잠재태들(potentialities)의 장들(fields)에 자리를 내준다.
9.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Schrödinger)의 프로그램에서처럼, 이 경향들의 장들(fields)의 변화에 관한 역학적 법칙들은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 특징을 지닌다 (고전적 이론의 법칙들처럼). 게다가 경향들은 – 심지어 자체의 기하학적 재현을 위하여 가능성들의 다차원적인 추상적 공간이 필요한 경향들 – 물리학적 실체들로서 취급된다. 결정론적 법칙들을 통하여 기술되는 물리적 실체와, 장(field) 개념이 적용되는 실체라는 (그리하여 법칙들은 편미분방정식들[partial differential equations]이다) 이 두 가지 요점들은 세상에 관한 통일장 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주요 개념들이었다. 그 요점들은 보존된다.
10. 양자론에 관한 정통 해석이라는 관점은, 장(field)과 입자 혹은 파동과 입자라는 자체의 ‘이원론’을 포함하여, 차례가 오면 다시 잠재태들(potentialities)이 되는 잠재태들(potentialities)과 그 잠재태들(potentialities)의 실체화라는 이원론을 통하여 재해석되고 보존된다. (이 견해는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흔히 요청되는 방식으로 옛 이원론을 초월한다.) 그 이론의 확률주의적 특징은 특히 보른(Born)과 파울리(Pauli)에 의하여 강조되는데 또한 보존된다.
그리하여 모든 옛 프로그램들은 경향들에 관한 이 형이상학적 이론의 관점에서 근사치들이 된다. 모든 프로그램들은 이런저런 모습을 우리의 형이상학적 관점에 기여한다.
특히 나의 목록 위에 있는 마지막 두 가지 입장들 사이의 - 한편으로는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Schrödinger)와, 다른 한편으로는 파울리(Pauli)처럼 양자론에 대한 보른(Born)의 본질적으로 통계학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 논란은 경향 해석에 의하여 해결된다: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Schrödinger)에게 경향 해석은, 고전적인 결정론적 형태의 장(field) 방정식들이 적용되는 물리적 실체를 제공하고 보른(Born)에게는 이 방정식들에 대한 확률주의적 해석을 제공한다.
경향 해석은 모든 것을 아인슈타인에게 빚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이 경향 해석을 수용한 준비가 되어있었는지를 나는 매우 많이 의심한다. 길을 방해했었을 것은 그의 결정론뿐만 아니라 (후기[後記: Postscript]의 II권, 열린 우주: 비결정론을 위한 논증[The Open Universe: An Argument for Indeterminism], 26절 참조.) 확률을 향한 그의 태도이기도 한데 그것은 틀림없이 그가 믿었던 결정론의 결과들 중 한 가지 결과였다. 이 태도는 근본적으로 주관적이어서, 통계학적 빈도들이 주관적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통상적인 전제를 포함했다. (아인슈타인의 견해들과, 자신들의 결정론적 과거의 껍질을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 아인슈타인 반대자들의 견해들 사이의 이 요점에는 밀접한 유사점이 있다.) 경향 해석이 모든 것을 아인슈타인에게 빚지고 있다고 내가 말할 때, 물리학의 목표는 장(field) 방정식들을 통하여 물리적 실체를 기술하는 것이라는 그의 교설을 나는 생각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천이(transition) 확률들을 사용하여, 다시 말해서 개별적 원자에 관련되고 복사밀도(the density of radiation)에 비례하는 단일 확률들(singular probabilities)을 사용하여 연구를 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가 이 견해를 전개했던 논문의 말미에서, 맥스웰(Maxwell)의 파동 이론과 방출(emission)의 ‘기초적 과정들의 순간과 방향 모두를 우연에 맡긴다’고 그가 말했던 그 이론 중 이 새로운 이론 사이의 연결고리를 확립하는 임무를 그는 강조했다. 얼마 후, 그는 광양자들을 가스 입자들처럼 통계학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가능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가스와 파동 장(field)을 연관 짓는 것이 또한 틀림없이 가능하다고 제안함으로써 보스(Bose)와 드 브로이(de Broglie)의 개념들을 연결했다. 이와 관련하여, 1920년에 아인슈타인이 ‘광양자를 유도하는 유령의 장들(phantom fields)에 관하여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광양자 이론에 의하여 (그리고 보어[Bohr]의 모형의 성공에 함축된 맥스웰[Maxwell]의 이론에 대한 반증에 의하여) 야기된 물리학에서의 상황을 기술했다고 보어(Bohr)의 보고서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흥미롭다; 세상을 하직한 전자기적 파동들의 유령들이나 망령들은 여전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것들이 스펙트럼들에 대하여 특히 스펙트럼선들의 강도에 대하여 여전히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비록 경향 이론의 선구자 역할을 했을지라도, 나는 그가 경향 해석을 좋아했다고 믿지 않는다. (다른 선구자 역할들에 대해서는, 위 12절 참조.)
경향 해석의 한 가지 두드러진 소득은, 내가 파울리(Pauli)의 말을 이용한다면 경향 해석이 ‘더 큰 통일성을 향하여 과학의 다양한 분야들의 미래 발전에 대한 희망을 열어 제치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파울리(Pauli)는 여기서, 양자론이 지닌 확률주의적 법칙들과 함께 일반적인 양자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물론,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과학의 다양한 분야들은 생물학적 과학들이고 (21절의 주석 4 또한 참조), 궁극적으로 사람에 관한 과학들이다. 나는 그의 희망사항들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며, 경향 해석을 고려하여 훨씬 더 많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자들은 – 심지어 자신들이 기계론적인 편견들에 의하여 경향 해석을 수용하는 것을 방해받을 때도 – 경향들을 이용하여 항상 연구를 했다. 물리학에 대한 경향 해석은 이 편견들을 제거하여, 그리하여 물리 과학들과 생물 과학들 사이의 심층적 상호 비옥화를 고취하는 데 아마도 도움이 될 것이다. 화학적 관련성의 경우를 생각하라. 이제 우리는 경향 해석의 양자론적 설명을 고려하여 화학적 관련성은 물리적 경향이라고, 그리고 화학적 관련성 많은 모습들에서 특정 생물학적 경향들과 유사하다는 직감적인 느낌이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화학적 관련성은 우리가 여기서 직면하는 유추만이 아니라, 더욱 개연적으로, 중간단계이자 정말로 천이적(transitional) 경우이다. ‘경향’이라는 용어 자체가 물론 생물학적이거나 심리학적 용어이다. (그 용어는, 내가 제안하는 바, 물리학에서 사용되어야 하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에서 경제학에서도 또한 사용된다.)
특별히 흥미로운 한 가지 경우는 개체들에서 – 식물 개체들, 동물 개체들 – 살아있는 물질을 조직하는 오래된 문제이다. 영향력이 널게 미치는 자급자족이라는 자체의 기묘한 특징을 지닌 생물학의 유기체 개체들은 흔히 수정(crystals)과 비교되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 개체들은 자체의 특징을 상대적으로 자급자족적인 체계들로서 유지하는 강력한 경향들이 부여된 물리적 체계들과 – 그 경우에 이 경향들이 공명(resonance)을 통하여 설명될 공산이 있는 수정(crystals)과 같은 -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자급자족을 향한 자체의 놀라운 경향들이, 핵자들(nucleons)에 의한 폭발(bombardment)이 부족한 환경적 조건들이 인상(impression)을 끼치지 않는 자체의 방사능 비율의 안정성에 의하여 예시되는 원자핵 (이 문장의 원문은 or atomic nuclei whose astonishing propensities towards autarky are illustrated by the constancy of their rate of radioactivity upon which no environmental conditions short of bombardment by nucleons make any impression인데 역자는 의미를 알 수 없음. 역자). 우리는 자급자족을 향한 이 고유한 경향들을, 자체의 환경적 조건들로부터의 놀라운 자립과 함께, 체계의 ‘내재적 경향들’이라고 아마도 지칭할 것이다. 그 경향들은, 모든 경향들과 그러한 바와 같이, 물론 관계적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향들은, 다른 물리학적이거나 생물학적 경향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나의 물체에 대한 내재적 잠재태들(potentialities)을 정말로 더 많이 닮았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자였다.)
궁극적으로 세상에 대한 비결정론적 그림의 틀 안에서만 우리는 동물들 안에서 자발적 움직임에 관한 현상을 이해하기를 희망할 수 있다. (위 25절 말미의 주석 참조.) 생물학에서는 많은 일들이 발생하는 특히 동물에게서 그러하고 동물은 물리학적 관점에서 매우 예기치 않은 것들이고 비개연적이다. 제비 한 쌍이, 먼 거리를 비행한 다음에, 반복적으로 자체들의 옛 둥지로 돌아오는 것은 물리학적 법칙들로써 설명하기 어렵고, 보존법칙들은 여기서 도움을 주는 듯이 보이지 않는다. 기억력이 이런 일들을 야기할 수 있다면, 기억력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호주머지 룰렛-바퀴가 군인들의 움직임들을 유도한 방식과 (10절 침 25절 참조) 유사한 방식으로 이 동물들의 움직임들을 틀림없이 유도한다; 룰렛-바퀴가 일종의 자철석(loadstone)으로 대체되어 우연의 게임이 ‘내재적 경향’으로 대체된 것을 제외하고. 어떻게 이 일들이 자세하게 작동하는지는 우리의 현재 목표에 대해서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일들이 정말로 작동한다는 것이고, 그 일들이 마치 특정 내재적 경향들이 더 우연-같거나 혹은 균등-확률주의적 특징을 지닌 다른 물리적 경향들에게 자체를 포개놓아서 (가령 제만[Zeeman] 효과에서처럼) 특정 가능성들에게 추가 무게(weight)를 부여하는 양 작동하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 일들은 말하자면 체계적 편향(bias)을 더 우연-같거나 혹은 균등-확률주의적 특정을 지닌 다른 물리적 경향들에게 포개놓는다. 이것은, 그렇게 많은 비개연적인 일들이 생물학적 환경에서 발생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종류의 일이 (‘내재적 경향들’의 중첩[superposition]을 나는 의미한다) 기초적인 정도로 고전물리학에서 이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무게가 실린 주사위들, 삼투압, 공명[resonance])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런 종류의 일이 어떻게 우리의 물리적 세상에 들어맞을 것인지에 관한 직감적 개념을 형성하여 그 개념 위에 목표들의 계층(hierarchy)을 – 체계적이고 점점 목표의식이 있는 편향들(biases)의 계층(hierarchy) - 포개놓음으로써 그 개념을 초월할 수 있다.
이것의 어떤 것도 심령론자(spiritualist)가 하는 변론의 정신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정신은 변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정신은 에너지와 운동량 보존의 법칙도 아니고 다른 물리 법칙도 아니며, 심지어 확률이나 경향도 아니고 확률과 경향으로 인하여 인간과 인간의 정신은 피라미드들을 건축하였고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했다; 그리고 인간은, 과학에서, 예술에서, 그리고 많은 다른 방식들에서 이것보다 훨씬 더 크게 높은 곳들에 도달했다.
나는 이 형이상학적 결어를 현재 상태로서 – 시험 가능한 이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그림, 하나의 꿈 –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과학에는 이 그림들이 필요하다. 이 그림들은 주로 과학이 지닌 문제 상황들을 결정한다. 새로운 그림,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해석은 과학에서의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로렌츠 변환[Lorentz transformations]을 보는 아인슈타인의 방식이 그랬던 것과 같이). 그러나 이 그림들은 과학적 발견과 관련하여 많이 필요한 도구들이거나 과학적 발견에 대한 지침들뿐만이 아니라, 과학적 가설이 진지하게 고찰되어야 하는지를 우리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과학적 가설이 잠재적인 발견인지, 그리고 과학적 가설을 수용하면 과학에서의 문제 상황에 그리고 혹시 심지어 그림 자체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를 우리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성적으로 가치가 없는 형이상학적 체계들과 토론할 가치가 있고 생각할 가치가 있는 형이상학적 체계들 사이의 형이상학 내부에서 구획설정의 기준을 우리가 발견할 곳은 아마도 여기이다. 형이상학자(metaphysician)가 지닌 합당한 열망은 세상에 관한 모든 참된 면모들을 (그리고 세상에 관한 과학적 면모들만은 아니다) 수집하여 형이상학자와 다른 사람들을 계몽하고, 그리고 어느 날 훨씬 더 포괄적인 그림이나 더 나은 그림이면서 더 참된 그림의 한 부분이 될 통일적(unifying) 그림을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근본적으로 과학들에서와 동일할 것이다. 그림이 고려할 가치가 있는지는 합리적인 비판을 유발하여, 더 나은 것으로써 그 그림을 대체하려는 시도들을 고취하는 그 그림의 능력에 (유행을 창조하여 새로운 유행에 의하여 곧 대체될 그림의 능력에 혹은 독창성이나 궁극성에 대한 주장들에라기보다는) 달려있다. 그리고 이 기준은, 과학의 업적이거나 형이상학의 업적과 자체의 방식으로 향상될 수 없는 것을 열망하는 예술의 작품 사이의 특징적인 차이점들 중 한 가지 차이점을 또한 가리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참고문헌 추가 1989년
본서의 초판본이 1982년에 인쇄에 들어간 이래, 칼 포퍼 경은 27-30쪽에 제시된 사고 실험의 확대를 포함하여 양자론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식의 다음 전개사항을 발표했다: ‘E.P.R. 원격작용을 해석하는 실험: 현실적인 드 브로이(de Broglie) 파동들의 가능한 발견’ (A. Garuccio[발음을 알 수 없음: 역자]와 J.-P. 비지에[Vigier] 공저), 인식론적 서한(Epistemological Letters), 30호, 1981년 7월, 21-9쪽; ‘드 브로이(de Broglie) 파동들에 대한 가능한 직접적인 물리학적 발견’ (아우구스토 Garuccio[발음을 알 수 없음: 역자] 및 장-피에르 비지에[Jean-Pierre Vigier] 공저, 물리학 서한(Physics Letters), 86A, no, 8,7 1981년 12월, 397-400쪽;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및 로젠의 실험의 단순화된 새로운 변수에 대한 제안(Proposal for a Simplified New Variant of the Experiment of Einstein, Podolsky and Rosen)’, 클라우스 미하엘 마이어-아비히(Klaus Michael Meyer-Abich), (편집) 물리학, 철학과 정치학(Physik, Philosophie und Politik),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 탄생 70주년 기념논문집(Festschrift für 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 zum 70. Geburtstag) (뮈니히: 칼 한저 출판사[Carl Hanser Verlag], 1982년), 310-13쪽에서; ‘양자론의 위대한 날들에 대한 비판적 기록(A Critical Note on the Greatest Days of Quantum Theory)’, 아심 오 바루트(Asim O. Barut), 올윈 반 더 머위(Alwyn van der Merwe) 및 장-피에르 비지에(Jean-Pierre Vigier), (편집) 양자, 공간과 시간-탐색은 계속된다(Quantum, Space and Time-The Quest Continues), 루이 드 브로이, 폴 디랙과 유진 위그너를 기념하는 연구 및 논문집(Studies and Essays in Honour of Louis de Broglie, Paul Dirac and Eugene Wigner) (캠브리지: 캠브리지 대학출판사, 1984년)에서; ‘양자역학에서의 사실주의와 EPR 실험에 대한 새로운 해석본(Realism in Quantum Mechanics and a New Version of the EPR Experiment)’, G. 타로찌(Tarozzi) 및 A. 반 더 머위(Van der Merwe), 양자물리학에서 열린 문제들(Open Questions in Quantum Mechanics) (도르드레흐트[Dordrecht]; D. Reidel[발음을 알 수 없음: 역자] 출판사, 1985년), 3-25쪽에서;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봄 실험의 국지적 설명 이론을 향하여(Towards a Local Explanatory Theory of the Einstein-Podolsky-Rosen-Bohm Experiment), P. 라티(Lahti) 및 P. 미텔슈테트(Mittelstaedt), (편집) 현대 물리학의 토대에 관한 심포지엄(Symposium on the Foundations of Modern Physics) (세계 과학 출판사[World Scientific Publishing Company], 1985년), 37-49쪽에서; ’사실주의와 양자론(Realism and Quantum Theory)’, Eftichios Bitsakis(발음을 알 수 없음: 역자) 및 Nikos Tambakis(발음을 알 수 없음: 역자), (편집) 물리학에서의 결정론(Determinism in Physics), 제 2회 인식론에 관한 국제회의록(Proceedings of the Second International Meeting on Epistemology) (아테네: 구텐베르크 출판사[Gutenberg Publishing Company], 1985년), 11-29쪽에서; ‘사실주의와 EPR 실험의 단순화된 새로운 변수에 대한 제안(Realism and a Proposal for a Simplified New Variant of the Experiment of Einstein, Podolsky and Rosen)’, 파울 바인가르트너(Paul Weingartner)와 Georg Dorn(발음을 알 수 없음: 역자), (편집) 물리학의 토대(Foundations of Physics), 제 7차 과학에 관한 논리학, 방법론 그리고 철학 국제회의의 물리학 부문에 기고된 논문선(A Selection of Papers Contributed to the Physics Section of the 7th International Congress of Logic, Methodology and Philosophy of Science) (비엔나: Hölder-Pichler-Tempsky[발음을 알 수 없음: 역자] 출판사, 1987년)에서; ‘벨의 정리: 국지성에 관한 기록(Bell’s Theorem: A Note on Locality)’, G. 타로찌(Tarozzi) 및 A. 반 더 머위(Van der Merwe), (편집) 미시물리학적 실체 및 양자 형식주의(Microphysical Reality and Quantum Formalism) (도르드레흐트[Dordrecht]; D. Reidel[발음을 알 수 없음: 역자] 출판사, 1987년), 413-17쪽에서; ‘포퍼(Popper) 대(對) 코펜하겐(Copenhagen): 콜레트(Collett) 및 Loudon(발음을 알 수 없음: 역자)에 대한 회신편지(Popper versus Copenhagen: Letter in Reply to Collett and Loudon)’, nature, 328호, 1987년 8월 20일, 675쪽; ‘수정이 필요하다(Correction Needed)’, nature, 329호, 1987년, 9월 10일, 112쪽.
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 - III장 양자론의 역설의 해결을 향하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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