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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여행/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4. 11. 20. 11:10

술 익는 마을에서 가을밤을 마신다

등록 : 2014.11.19 18:36 수정 : 2014.11.20 10:17

 

솔송주 명인이 개평마을에 있는 솔송주문화관에서 술을 따르고 있다. 사진 박미향 기자

[esc] 술도가 따라 떠나는 여행
함양 솔송주·담양 추성주·완주 송화백일주·전주 이강주

이탈리아 밀라노에는 한식당 ‘하나’(HANA)가 있다. 어색한 젓가락질도 재밌어 하는 이탈리아인들로 북적거린다. 이탈리아 와인을 곁들여 먹는다. 서울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어떨까? 우리 술을 마시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도 서양의 마리아주(음식과 술의 조화)와 비슷한 반주문화가 있다. ‘하나’ 같은 서울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없을까?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요리사 박찬일의 레스토랑 ‘몽로’에는 문배주가 있다. 전통주 유통업체인 부국상사의 대표 김보성씨는 “고급 서양식 레스토랑의 셰프들이나 특급호텔에서 문의가 정말 많다. 1년 전과 사뭇 다르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서서히 달아오르는 한식 붐이 배경이다. 관심이 우리 술로 번지고 있다. 몇년 전부터 네덜란드의 한식당에서는 전주의 이강주가 팔리고 있다. 지난 6~8일, 늦가을의 쓸쓸한 흙바람 따라 남도의 전통주 대표선수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함평 명가원 양조장
문화관서 무료시음과 제조법 소개
박흥선 명인 집과 일두고택
숙박도 가능한 한옥 여행지

전주 이강주의 술역사박물관. 조정형 명인이 술 내리는 것을 시연하고 있다. 이강주 제공
“원래는 간호사였지. 3년 근무하고 미국 가려고 했어. 아버지가 허락하나! 동네 사람과 중매하시더라고.” 명가원의 박흥선(61) 솔송주 명인이 술 세상에 입문하게 된 사연이다. 솔송주는 지리산의 천왕봉이 보이는 24번 국도에 양조장이 있다. 이름 그대로 솔잎, 송순이 맛의 비결이다. 찹쌀로 밑술을 만들고 살짝 찐 솔잎과 송순, 고두밥, 누룩을 잘 섞어 발효시킨 청주다. 13도와 40도 두 종류다. 시댁에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골방에 쭉 늘어선 술독이었다. 종가는 아니었지만 시어머니 이효의(2012년 작고)는 늘 술을 담갔다. “39살에 시아버지와 사별하신 시어머니는 그걸로 5남2녀 공부도 시키고 어려운 생활을 이겨나가셨어. 100살 넘게 사셨는데 지금도 그립다.” 박씨는 경남 함양 개평마을의 솔송주문화관으로 잡아끈다. 60여가구가 사는 이 마을은 한옥 여행지로 몇 손가락에 꼽힌다. 애주가들에게 문화관은 천국이다. 무료 시음과 자세한 제조비법을 들을 수 있다. 문화관 뒤 박씨의 한옥과 하동정씨 종가인 일두고택에서는 숙박이 가능하다. 고택의 문 몇개를 지나 툇마루에 요상한 구멍이 보인다. 안내인은 “양반가 남자들이 밤새 볼일을 보는 데”라고 설명한다. 술맛 돋우는 풍경이다.

대통대잎술의 윗부분. 깨서 마신다. 사진 박미향 기자
‘찾아가는 양조장’, 전남 담양의 추성고을.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해부터 전국 8개 양조장을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지정했다. 각종 시음이나 체험이 가능하다. 양조장에는 고두밥을 커다란 기계로 퍼 담고 누룩을 더 맑게 걸러내는 풍경이나 발효균의 아우성을 들을 수 있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통에 귀 기울이면 뽀글뽀글 소리가 난다. 술여행객들의 심장을 뛰게 하는 광경이다. 사무실에도 여행객들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50여가지의 희한한 병들이 늘어서 있다. 한눈에 술이다. 알코올에 사족을 못 쓰는 이들에게 새 세상이 열렸다. 추성고을에서 만드는 추성주에 벌집, 파인애플 등을 넣은 거다. 어슬렁어슬렁 뭐 마려운 짐승처럼 한 모금이라도 맛보려고 비굴한 시도를 해보나 “아직 맛이 영글지가 않았다” 소리에 쑥 나온 혀가 들어간다. 이 술들은 25도인 추성주 명인 양대수(57)씨의 취미다. 맥이 끊긴 다른 술도가와 달리 이곳은 아내와 자녀들이 모두 양조에 참여한다. 면바지에 캐주얼한 티셔츠를 입은 명인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호남이다.

추성주 사무실에는 양대수 명인이 파인애플, 벌꿀 등을 넣어 담그는 술을 구경할 수 있다. 사진 박미향 기자
추성주는 제세팔선주(濟世八仙酒)라고 한다. 담양의 자생약초가 들어가 신비한 맛을 낸다는 설에서 유래했다. 전통주 애주가들 사이에서는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 보약술로 회자된다. 제조법은 여간 복잡하지 않다. 고두밥을 3번이나 찌고, 약재는 넣다 뺏다 한다. “9살에 할아버지가 몰래 술 내리는 걸 봤다. 속 안 좋은 사람들이 찾아와 받아가더라. 약이라 생각했지.” 추성주였다.

송화백일주 양조장 앞마당. 사진 박미향 기자
그의 증조부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제조비법을 후손에게 전수했다. “이게 그거다.” 그가 장롱 깊숙한 곳에서 꺼낸 낡은 한지에는 어려운 한자가 적혀 있다. 연동사의 고승이 증조부께 건넨 비법이다. “그대로 하면 41도다. 그걸 25도 정도로 내리고 제품화했지.” 그는 대나무통을 깨서 마시는 대통대잎술, 타미앙스 등을 개발했다. 대통대잎술은 이름 때문에 ‘운수대통’을 바라는 이들에게 인기다. 40도인 타미앙스(TAMIANGS)는 ‘담양’을 영문식으로 활용해 이름 지었는데 모양이 양주와 비슷하다. 올해 세계 3대 술 품평 대회인 ‘2014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주류품평회(SWSC)’, ‘2014 벨기에 몽드셀렉션’ 등에서 금상을 탔다. “추성주를 사람 이름으로 오인해 ‘추성주씨 계세요’라는 전화가 오기도 한다. 홍보하려면 추성훈씨 모셔와야 하나!” 우스갯소리를 하는 그는 유쾌한 전통주 명인이다.

경남 함양 개평마을의 일두고택. 솔송주문화관 앞에 있다. 한옥체험장이다. 사진 박미향 기자
스님이 만든 술맛은 어떨까? 전북 완주군의 송화백일주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1호 조영귀(65) 명인이 만든다. 양조장 앞마당에는 닭, 토끼 등 짐승이 놀고 화초와 나무들이 우거졌다. “코끼리가 확 들어와 덮치는 터 상이다. 그것 때문에 짐승이나 화초를 길렀다.” 명인은 풍수에 조예가 깊다. 해발 700m 넘는 모악산 자락의 암자 수왕사에서 제조를 시작했다. 38도 증류주인 이 술은 송홧가루를 넣은 누룩으로 빚는다. 수왕사 암벽에 흐르는 약수, 찹쌀, 멥쌀, 약재 등이 재료로, 석달 열흘 꼬박 걸린다. 사찰에서 무슨 술이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절의 술은 ‘곡차’라고 부르는데 일반 술과는 다른 개념이다. 취할 정도로 마시면 술이지만 ‘혀에 닿지 않을 정도로 마신다’면 수행을 위한 차가 된다.

솔송주
조 명인은 송화백일주 12대 전승기능보유자로 12살에 입적해 17살에 수왕사에 왔다. 고즈넉한 산사에는 일흔을 바라보는 스님과 수줍은 청년만이 있었다. 더러 산짐승이 친구가 되어 찾아와 술 향을 같이 맡았다. “어둑해져서 똑똑 떨어진 술은 90도다. 불이 붙기도 하는데 멀리서 보면 귀신 같았다.” 송화백일주는 1년에 두번, 3월과 10월에 만든다. 2000병만 제조해서 마시고 싶어도 다 팔리면 못 먹는, 명인이 “안 팔겠다” 작정하면 마실 수 없는 술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1년 전에 청와대에서 구정 선물로 선정하겠다고 연락 왔지만 처음에는 요청한 개수가 너무 많아 몇번을 거절했다고 하다.

이강주
사무실에는 다양한 모양의 도자기 병이 여행객들의 눈길을 끈다. 같은 술이지만 병 모양에 따라 술맛도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술꾼치고 전주 이강주를 모르는 이가 별로 없다. 그만큼 이강주는 대표적인 전통주다. 이강주 명인인 조정형(73)씨는 업계에서는 존경받는 인사다. 전북대 농화학과를 졸업하고 주류회사에서 25년간 근무하다 전국 가양주(집에서 양조하는 술) 조사에 나서 <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술> 등 여러 권의 책을 냈다. 1994년에 <한국방송>은 자서전 성격의 <그 집에는 술이 있다>를 바탕으로 드라마를 제작했다.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이강주를 만든 그는 전통주 부흥에 인생을 바쳤다. 이강주는 울금의 산지였던 전주와 황해도 개성 등에서 제조되었던 걸로 알려져 있으나 대대로 양반가였던 그의 집안에서 가양주로 만들었다. 울금, 배, 생강 등의 재료에 꿀을 가미한 25도 전통주다. 이강주 술역사 박물관은 양조장에서 차로 20여분 거리. 희한한 병 등이 전시돼 있다. 한때 40억이 넘을 정도의 매출을 올렸으나 지금은 반도 안 된다. “그래도 나는 매우 나은 편이다. 우리 업계는 어렵다.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한다.”

송화백일주
추성주

완주 담양 전주 함양/박미향 기자 mh@hani.co.kr

전통주 여행

양반가 이강주 조정형씨 추천. 슴슴한 전라도 음식. 민물새우탕, 전복회, 육회, 게장 등 26가지도 넘는 음식이 나온다. 한옥에서 먹는 한정식.(전북 전주시 완산구 최명희길 30-2/(063)282-0054/10만~20만원)


예가원 솔송주 박흥선씨 추천. 남도 밥상답게 푸짐하다. 보쌈, 각종 나물, 전, 청포묵 등 19가지가 나온다.(경남 함양군 함양읍 함양로 1243/(055)963-8700/1만~1만5000원은 한상. 2만5000~3만5000원 코스. 8인 이상 주문 가능)


한상근대통밥집 추성주 양대수씨 추천. 담양에서 최초로 대통밥을 개발했다는 식당. 생선을 포함한 반찬이 10가지가 넘게 나온다.(전남 담양군 월산면 담장로 113/(061)382-1999/대통밥 위주는 1인 1만1000원. 떡갈비 등이 나가는 스페셜 메뉴는 2만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