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병호 화백 |
내 서재 속 고전
가토 슈이치 지음
이와나미 신서 펴냄(1968) 가토 슈이치(1919~2008)가 2008년에 만 89살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고인을 추모하는 뜻을 담아 당시 <한겨레>에 연재 중이던 ‘디아스포라의 눈’이라는 칼럼 한 회를 할애해 ‘한 교양인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글 한 편을 썼다. “나는 인생을 열차와 같다고 상상할 때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우연한 계기로 이 세상이라는 열차에 타게 된다. (…) 우연히 함께 탄 승객들 중에 가토 슈이치라는 ‘먼저 탄 승객’(선객)이 있었던 것은 내겐 작은 행운이었다. 때가 되면 누구나 그 차량을 내려간다. 지금 선객 가토 슈이치 선생이 객차에서 내렸다. (…) 한국에서 <양의 노래>를 번역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한국의 독자가 가토 슈이치를 어떻게 읽을지, 꼭 알고 싶다.” <양의 노래>는 가토 슈이치의 자전적 회상으로, 나에겐 ‘고전’이다. 다만 위의 글을 썼을 땐 분명히 내 지인들 사이에 <양의 노래>를 한국에 번역 소개하겠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었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내가 아는 한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현되지 못한 것 같다. (이번에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 봤더니 <양의 노래>라는 만화는 나와 있으나, 물론 그것은 가토 슈이치의 책이 아니다.) <양의 노래>(속편도 포함해서)는 1966년 11월부터 1967년 12월까지 당시 일본에서 진보적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읽었던 주간지 <아사히 저널>에 연재됐고 1968년에 이와나미 서점에서 책으로 나왔다. 집필 당시 가토 슈이치는 40대 후반이었고,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교토에 살던 고교생이었는데, 이 작품을 열독하던 같은 학교의 벗이 열심히 권하는 바람에 손에 쥐었다. 그 책의 인상은 선명하고 강렬했다. 거기에는 2차대전 전 일본 엘리트 가정에서 태어난 청년이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고상한 예술을 이야기하며 리버럴한 사람들과 사귀면서 성장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대지주 가문 출신의 유복한 의사의 아들로 도쿄대를 졸업하고 구미 각지에 유학해 몇 개 외국어에 능통하고, 문학·미술·음악에 깊은 조예를 지녔으며, 일류 지식인들과 자연스런 교우관계를 맺었고, 캐나다의 대학 교단에 섰던 지식인…. 그것은 교육받지 못한 재일조선인 자식으로 반항적인 문학소년이었던 내게 민족적으로도 계급적으로도 문자 그대로 대극적인 존재였다. 세계는 한창 고조되던 베트남 반전운동 한가운데 있었다. 일본에서는 전공투가 ‘자기부정’이라는 슬로건 아래 지적 엘리트로서의 특권을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던 문화대혁명은 지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의 차별을 철폐하라고 주장했다. 내 벗 몇 사람은 엘리트층으로 살아가는 걸 그만두기 위해 대학입시를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나는 그런 주장에 심정적으로 공감했다. 그들과 같은 행동을 내가 취하지 못한 이유는 나 자신의 소심증 외에 나는 조선인이다, 일본인 벗들과는 다른 길, 조선인인 내게 고유한 과제-예컨대 조국의 민주화나 민족통일 등이 있다, 라는 막연한 의식밖에 없었다. 그런 내 처지에서 보면 가토 슈이치 같은 지식인 엘리트는 그 지성이 일류이면 일수록 내게는 비판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양의 노래>를 읽어보라고 권해 준 학우에 대해선, 그도 결국 엘리트 교양주의를 동경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며 내심 경멸했다. 17살 나이였던 나의 그런 반응은 지금 생각하면 다소 단순하긴 했으나 진지한 것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 가토 슈이치와 내 삶의 과정에서 나중에 지기를 얻어 교류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흘러 베트남 반전과 대학 해체를 소리 높이 외치던 사람들 대다수는 그 뒤 경제성장의 수혜자가 되고 체제내화해 일본 사회의 우경화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늙은 가토 슈이치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평화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일관되게 고수하고 있었다. 가토 슈이치는 만년의 나날을 헌법 9조(전쟁 포기 조항)를 지키는 운동에 바쳤다. 전쟁 반대는 인간 가치의 문제
그것은 논의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
가토 슈이치는 만년의 나날을
헌법 9조를 지키는 운동에 바쳤다
일본에는 드문 ‘저항하는 휴머니즘’이
어떻게 태어나 자랐는지 얘기해 주는 책 <양의 노래>에 전쟁 중 대학생이었을 무렵의 이런 기억이 담겨 있다. “내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아마도 전쟁 중의 일본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와타나베 가즈오(1901~1975, 일본의 프랑스 문학자) 조교수였을 것이다. 와타나베 선생은 군국주의적인 주변에 반발해 먼 프랑스에 정신적인 도피처를 구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 그 추악함이 속속들이 드러난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것의 의미를 더 큰 세계와 역사 속에서 확인하려 했던 것이며, 자신과 주변을 안에서, 바깥에서, 그리고 ‘천랑성(시리우스 별) 높은 곳에서’도 지켜보려 했을 것이다.” 16세기 프랑스 사상 전문가였던 와타나베 가즈오 교수는 일본 전체를 군국주의의 광기가 뒤덮고 있던 시절에 동시대의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구미의 저작들을 탐독하고 16세기라는 종교전쟁과 이단심문 시대에 휴머니스트들이 설파한 ‘관용’의 의미를 상기했다.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을 “안에서,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까지도 광신적인 천황 숭배와 군국주의로 전락하는 가운데 와타나베 교수 자신의 전락을 막고 가토 슈이치 등 몇몇 제자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가토 슈이치가 쓴 이런 단문이 있다. “예전 1930년대 말부터 1945년까지 일본에서는 사람을 모독할 때 ‘그래도 당신이 일본인인가’라는 말이 유행했다. (…) 일본인 집단에 대한 귀속의식을 중심으로 단결을 강조하고(1억1심), 개인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멸사봉공), 신인 천황을 숭배한다(궁성요배). (…) 많은 일본인이 그런 규격에 맞춰 살아가고 있었다.” (2002년 6월24일 <아사히신문> ‘석양 망언’) 이어서 가토 슈이치는 전쟁 말기의 어느 날, 벗인 시라이 겐자부로(1917~1998, 일본의 프랑스 문학자. 전후에 카뮈와 사르트르를 번역했다)가 다른 학우로부터 “자네, 그래도 일본인인가”라는 힐난을 받았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시라이는 차분하게 “아니, 먼저 인간이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몽테스키외는 자신보다도 가족을, 가족보다 프랑스를, 프랑스보다 인간 세계 전체를 사랑한다고 했다.” 이렇게 쓴 뒤 가토 슈이치는 계속한다. “‘먼저 일본인’주의자와 ‘먼저 인간’주의자의 다수·소수 관계는 1945년 8월(일본 패전)을 경계로 역전됐다-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역전된 것일까. 만일 그때 일본인이 변했다면 ‘그래도 너는 일본인인가’라는 말을 이 나라에서 다시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 변신이 단지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리운 옛 노래가 다시 들려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저 그리운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면서 군국 일본은 많은 외국인들을 죽이고 많은 일본인들을 희생시킨 채 온 나라를 잿더미로 만든 뒤 붕괴했다.” 가토 슈이치가 타계한 지 6년 남짓, 일본에는 ‘그리운 옛 노래’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을 표적으로 삼은 헤이트크라임(증오범죄)과 한국·중국을 적대시하는 호전적인 언사들이 넘쳐나고 있다. 원래 (아베) 총리 자신이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각’ ‘일본을 재건하자!’고 외쳤고, 국민 다수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가 이끄는 여당을 지지하고 있다. 가토 슈이치가 살아 있다면 어떤 태도를 보일까? 거기에 대해서는 내게 확신 같은 게 있다.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고립을 한탄하지도 않으면서 보편적인 자유, 인권, 평화의 가치를 계속 설파할 것이다. 캐나다의 대학에서 일하던 때 가토 슈이치는 학생들과 동료들이 펼친 베트남 반전운동에 참여했다. 그것을 회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 대학의 반전토론회에서 어느 정치학 교수가 일어나, 전쟁이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다, 그 복잡한 원인을 모르면서 반대해 봤자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나(가토)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정치학자가 현상의 설명에 성공하면 할수록 현상의 긍정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 만일 주어진 조건을 바꿀 수가 없다면 필연적 결과를 바꿀 수도 없다. 따라서 ‘필연적 결과=현상’에 반대하는 것의 의미도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전쟁과 같은 극도로 복잡한 현상에서는 그 필연성이란 겉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 조건이 많은 현상은 엄밀하게 인과론적 과정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의 문제다. 폭격으로 매일 아이들이 죽어가는 건 용인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논의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이런 경고를 남기고 가토 슈이치는 세상을 떠났다. 그런 지성, 일본에는 드문 저항하는 휴머니즘이 어떻게 태어나 자랐는지 얘기해 주는 책이 <양의 노래>다. 이미 자세히 얘기할 지면이 남아 있지 않지만, <양의 노래>에는 여성들과의 사귐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하고 있다. 그는 냉철한 수학적 이성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다정다감한 사람이기도 했다. 전쟁 직후의 교토, 파리, 피렌체, 빈을 무대로 한 그런 장면들은 마치 고급스런 영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내게 준다. 젊은 시절의 내가 이 책에 심하게 반발하면서도 동시에 강하게 동경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지 모르겠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