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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만 모르는 이야기 (디어클레티아누스 황제)/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4. 12. 1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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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대통령만 모르는 이야기 / 강희철

등록 : 2014.12.14 18:39 수정 : 2014.12.14 18:39

강희철 사회부장

올해 초 <꽃보다 누나> 크로아티아 편에서 ‘짐승기’가 연락 끊긴 ‘희애 누님’을 찾으러 빗속을 헤매던 도시 스플리트는, 로마제국 사상 처음으로 사임한 황제의 이름과 함께 기억되는 곳이다. 서기 305년 스스로의 결단으로 제위에서 내려오기까지 21년간 로마제국을 다스린 디오클레티아누스를 평하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어떤 전임자의 통치보다도 훌륭했다”고 적었다.

궁전 근처 텃밭에서 양배추를 기르며 종종 최고 권력자만이 떠올릴 수 있는 진귀한 회고담으로 소일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기록돼 있다.

“대신 네댓 명이 결탁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군주를 속이려 드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높은 지위에 올라 사람들에게서 격리되면 진실이 감춰져 군주 스스로는 알 수가 없게 된다네. 그는 오직 신하들의 눈을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고, 그들이 날조한 거짓말밖에는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주위의 권신들을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는 이 고색창연한 ‘경고문’을 다시금 떠올린 건 작금의 상황 탓이다.

검찰이 수사 중인 이른바 ‘정윤회 국정개입 보고서’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알음알음으로 퍼지기 시작한, 대통령의 오랜 최측근 몇몇이 사사로이 국정을 주무른다는 흉흉한 소문의 일단을 담고 있다. 기왕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만들어 비서실장에게 보고까지 한 공식 문서였다니 내용의 진위는 애초 청와대 스스로 감찰을 통해 규명했어야 했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선지 진위를 따지는 감찰은 없었고, 보고서는 청와대 담장을 넘어와 세상에 알려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진위와 유출 경로를 밝히는 일은 특별검사에게 맡기는 것이 타당했다. 대통령으로선 보고서의 내용이 황당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다 해도, 그 자신과 주변에 관한 의혹이니 특검을 받겠노라고 선뜻 자청해봄직했다.

대통령의 선택은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법무부를 통해 수사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수 있고, 다시 법무부 장관을 거쳐 수사지휘까지 할 수 있는 검찰로 사건을 보냈다. 그러고는 자못 비장한 어조로 보고서의 내용은 “찌라시에 나오는 얘기”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유출은) 국기문란 행위”라고 결론까지 내버렸다. 그러니 “또다시 우리가 바보 되는 일만 남았다”(한 검사장)는 검찰의 자조는 과장도 엄살도 아니게 됐다.

그런데 대통령은 거기서 한참을 더 나갔다. 이른바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을 두고 그는 “15년간 나와 같이 고생한… 그 사람들이 말썽을 일으켰다면 나와 같이 일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경계와 검증 대신 ‘최측근 인증서’를 발급해준 셈인데, 그 바탕엔 “정치를 하는 사람은 오직 의리의 도(道)만을 알아야 한다”는 소싯적 노트나 “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어록에서 드러나는 특유의 의리론이 깔려 있다.

호랑이보다 인사를 더 무서워하는 검사들이 어쩌다 ‘역린’을 건드리기로 작심하지 않는 한 검찰 수사의 결론은 대통령이 쳐놓은 예단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것으로 항간의 의혹은 해소되고, 세간의 우려는 종식되는 것일까. 역대 거의 모든 정권에서 최고 권력자의 ‘가게무샤’들이 권력의 떡고물을 좇는 ‘부나방’들의 꾐에 넘어가 저지른 사달을 생각하면 대통령의 현실인식은 몹시 한유해 보인다.

예의 ‘전직’ 로마 황제는 “아무리 훌륭하고 현명”한 최고 권력자라도 세상에서 ‘격리’되면 “(결국은) 이해 타산적이고 타락한 신하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위험을 자초하게 된다며,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기술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통치의 기술”이라고 했다.

박수 받은 퇴위도, 평화로운 말년도 그런 지혜와 분별력 덕분이려니.

강희철 사회부장 hc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