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및 퍼온 글

케네스 포머랜츠 교수 (중국 전공) 대담/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 2. 12:30

정치

외교

“미-중 경쟁 넘어 대립 땐 한국 운신의 폭 좁아…
다자적으로 안보 관리하되 주도 능력 키워야”

등록 : 2014.12.31 21:20 수정 : 2014.12.31 21:21

케네스 포머랜츠 교수와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지난 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연세대 상남경영관에서 <한겨레> 새해 특별대담을 나누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특별 대담] 중화제국 부활과 동아시아 안보

포머랜츠 미 시카고대 교수
박명림 연세대 교수

올해는 2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멈춘 지 70년이 되는 해다. 한국 입장에선 해방이라는 환회와 분단의 질곡이 동시에 주어진 지 70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지난 70년동안 오롯이 미국의 영향권 안에 갇혀있던 한국은, 중국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 흐름 속에서 한층 복잡하고 까다로운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고 있다.

<한겨레>는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국제대학 신한석좌 강좌 초청프로그램으로 방한한 세계적인 중국역사 권위자 케네스 포머란츠 미국 시카고대 교수와 박명림 연세대 교수의 특별 대담을 마련해, ‘중화제국’ 부활의 의미와 전망, 이에 대한 한국의 선택지 등을 들어봤다. 대담은 지난 7일 연세대 상남경영원에서 진행됐다.

중국은 급속한 발전 이후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나서…
과도한 과거로 회귀는
주변국 입장에서 당혹스럽다

‘굴욕의 세기’ 150년의 상처를
중국정부가 계속 들춰내고 있다
외부세계가 고통 준 건 맞지만
안좋은 방식으로 분노 상기시켜
 

박명림(이하 박) 2015년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즉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인 동시에, 한국의 해방과 분단 70주년이 되는 해다. 세계와 한국민들에겐 특별한 해이다. 이를 맞아, 동아시아의 지난 70년을 돌아보고,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전망하고자 한다.

먼저, 중국얘기로부터 풀어가자. 최근 들어 특히 중국의 부상은 눈부시다. 나의 경우 한국인으로서 중국 바로 옆 나라에 살기 때문에 중국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중국학자로서 당신은 먼 미국에 살면서 어떻게 그렇게 일찍부터 중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됐는지 궁금하다.

포머란츠(이하 포) 좋은 중국 관련 강의 덕분이었다. 동시에 1980년대에는 미·중 관계 정상화로 중국이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개방됐다. 중국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 통합된 국가와 도시가 있어 내가 나고 자란 서구와 달라 무척 흥미로웠다. 우리가 산업화 시기라고 일컫는 100~200년은 달리 말하면 전세계 소작농 사회의 붕괴가 일어난 시기였다. 하지만 당대 중국은 달라보였다. ‘근대적인 동시에 지방적·토착적인’ 시도가 함께 이뤄지고 있었다.

중국에 대한 관심을 가진 다른 이유는 비교학문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중국에 대한 천착은 비교연구에 대한 나의 관심과 일치했다.

사실 80년대는 일본이 세계2위 경제대국으로 동아시아 최고의 선진국이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일본이 아닌 중국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내겐 그 점이 참 특이하게 다가왔다. 당시 많은 내 서양학자들은 일본을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중국학 교수들을 만난 것이 결정적이었다. 특별히 중국 지방의 모습은 어떨까라는 궁금증이 나를 사로잡았다. 일본 역사를 배우기도 했는데 중국처럼 나를 사로잡지는 못했다. 또 중국이 아직 미개척 영역이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당신을 포함한 캘리포니아 학파들은 세계학계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중국에 대한 접근이나 세계사를 보는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 같았다. 동양과 서양, 유럽과 중국을 대등하면서도 균형적이고, 비교적이면서도 상호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결코 쉽지않은 역동적 균형주의 시각이 상당히 놀라웠다. 국제질서 및 전쟁과 평화를 공부하는 나 역시 당신과 같은 방법적 균형을 추구하다보니 더 깊은 공감을 갖게 되었다.

맞다. 캘리포니아 학파라고 불리는 우리는 균형적인 비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왜 이곳(동양)은 저곳(서양)이 한 일을 못했나?’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쌍방향으로 질문을 하는 것이다. 농업이 발달하고 성숙한 시장, 분명한 소유관계를 가진 상업화된 지역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런 곳이 언제나 ‘산업혁명’을 이룬 건 아니다.

이렇게 질문을 해보면 달리 접근할 수 있는 게 많다. 유럽 근대국가 건설 초기에는 군대와 도시인구를 어떻게 먹여 살릴지에 대해 큰 힘을 쏟았다. 변방은 기본적으로 농수산물 공급처로 취급되거나 아예 무시되었다. 유럽중심주의에 갇혀 있으면 그게 정상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방문제를 해결해나간 중국의 후기 제국을 들여다보면 외려 유럽이 크게 이상하게 다가온다. 왜 엄청난 규모의 식료품을 이동시킬 능력을 가진 발달된 국가들이 지방의 고통은 정책적으로 외면했는가? 즉 유럽이 특이하게 보인다.

우리가 기여한 이런 접근법이 곧바로 유럽중심주의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그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갈 수는 있다고 본다.

쌍방향 접근이라는 말이 깊이 와 닿는다. 나는 두 가지 강박관념을 벗어나는 것이 결국 보편적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것이 최고다”와 “너희 좋은 것이, 우리도 있다”는 오류를 벗어나는 것이 보편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당신의 중국서술은 패러다임 융합이자 전환이며, 좁은 의미의 역사분과나 역사기술을 넘어선다. 서술 단위와 수준도 세계와 지역, 국가와 경제, 인구와 생태 등 서로 다른 범주의 것들을 매우 조화롭게 접근했다.

(프랑스 역사학자인) 페르낭 브로델의 저작들이 끼친 영향이 엄청 컸다. 그에게 깊은 영감을 받았다. 어떤 학자는 “동서의 차이는 너무 근본적”이라고 말한다. 즉 “서양에는 자율성이 있었고 동양사회는 전제정치 아래에서 자율성이 없었다”는 거다. 그게 사실이라면 동서양 논의는 시작도 전에 이미 결론이 난 것이다. 실증적으로도 잘못됐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럽과 중국의 격차는 훨씬 전에 벌어졌어야 했다.

‘1750년이라고 가정하고 농업이 굉장히 발달했지만 낙후한 공업 사회와, 농업이 낙후한 대신 광업이 발달한 사회 중 어디서 살겠느냐’고 묻는다면 모두 농업이 발달한 곳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100년 뒤 광업, 특히 석탄 채굴이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 차이가 특정한 순간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이를테면 중국과 유럽은 ‘영토 개척’을 다르게 접근했다. 그 결과 유럽은 신대륙을 발견했다. 이런 우발적인 차이가 역사에서는 결정적이게 된다. 역사가가 하는 일은 그냥 놔뒀을 때 의미 없을 수 있었던 순간들을 결합해 의미있는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라고 본다.

당신의 연구는, 동서를 비교하는 동시에 연결해서 보고, 나아가 그것을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와 지구사로 통합해내었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특히 중국사를 변방사가 아니라 세계사로 해석해내는 데 독보적이었다.

중국을 세계사로 편입하고 싶었다. 과거에는 항상 서양적 관점에서 말하고 다른 곳도 이에 해당하는지 끼워 맞춰 봐야 했다. 유럽 역사를 말할 때는 유럽 외에 다른 어떤 곳도 말하지 않아도 됐다. 나는 거기에 의문을 제기했다. 유럽의 산업화도 세계와 상호관계를 이루지 않고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유럽의 과학혁명의 기본을 따져보면 천문학에서 나왔다. 서양은 처음에 그리스 과학이 있었지만 중세에 사라졌고, 아랍세계가 이어온 것을 유럽이 가져와서 발전시켰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다른 견해는 아랍세계가 단순히 천문학을 전해준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단계의 천문학을 전했다고 주장했다. 즉 아랍세계의 발전된 천문학 없이는 유럽이 이룩한 과학혁명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제 현재의 중국을 말하자. 최근 중국은 세계에서, 그리고 중국 역사에 비추어보아도 가장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뤘다. 동시에 세계 무역과 경제의 중심으로 급속하게 부상했다. 이 세력전이는 세기적 지역적 변화를 넘어 지역적이며 문명사적인 동시에 인류사적이다. 30년 전 중국이 이렇게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했나?

아니다. 30년 뒤 중국이 눈에 띄게 발전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지금 상황은 완전히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좋고, 어떤 측면에서는 나쁘다. 우선, 중국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성장을 볼 때, 당시만 해도 현저한 불평등의 증가 없이도 급격한 성장이 가능해보였다. 그런 사실에 굉장히 고무됐다. 또 급격한 성장이 지방 사회의 심각한 붕괴없이 진행됐다. 성장의 많은 부분이 지방에 존재했다.

최근 20여년 성장은 더 빨라졌다. 대체로 많은 부분에서 좋은 변화였다. 하지만 불평등이 심각해졌고, 일부 지방의 황폐화도 충격적이다. 중국 어린이 5명 중 1명은 부모와 떨어져 지낸다. 그들은 대개 춘절(설날)에만 부모와 만난다고 한다. 인간적 비극이다. 그게 변화와 발전을 만들기 위해 치러야하는 값이라면 너무 큰 비용이다. 환경이라는 큰 문제도 있다. 이 부분은 30년 전에도 예상 가능했지만, 그때는 누구도 기후변화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세계적으로 큰 문제인데, 기후변화의 경우는 한번 일어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중국의 성장 동력을 찾는 문제는 복잡하다. 학자들은 국가의 발전전략, 노동통제, 저임금과 양질의 노동력, 유교문화 등을 들고 있다.

굉장히 많은 요소들이 작용했다고 본다. 물론 값싼 노동력은 중요했다. 하지만 가난한 국가들은 다 값싼 노동력을 제공한다. 중국이 달랐던 점은 값싼 노동력이 문맹자들이 아니라 상당한 사회적 성취욕이 있었으며 건강한 의식이 있었다는 데 있다. 만일 저임금 노동자가 산업 규율에 못 미친다면 그 노동력은 싼 게 아니다. 중국의 노동자들은 장시간 열심히 일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며, 중국은 마오주의 기간 이를 이루기 위해 엄청난 국가적 비용을 들였다.

또한 가난한 농민들과 지방관리들을 위한 정책도 필요했다. 이를 위해 덩샤오핑은 지방정부가 산업성장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도록 재정시스템을 마련하려고 했다. 동시에 지방정부들이 농업에서 챙길 수 이익에 대해선 엄격한 제한을 두려했다. 우연이기에는 엄청나게 기발한 우연이었다. 왜냐하면 농업으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을 제한하면서 지방관리들에게 산업을 키웠을 때 많은 이익을 가져갈 수 있다는 유인 방식은 지방관리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서구의 노동운동 약화라는 세계 경제의 특정한 국면에 일어났다. 그래서 중국제품들이 서구노동자들의 큰 저항에 부딪치지 않고 서구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나아가 해외에서 성공한 중국인들이 다시 고국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중국의 부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설명해주지만, 그것이 왜 계속되고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나도 일부만 이해할 수 있는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다. 삐끗할 수 있는 순간들이 많이 있었지만 대체로 성공했다.

케네스 포머랜츠 교수와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한겨레> 새해 특별대담을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한국에 중국은 제1 교역국
미국은 제1 안보동맹국이다
경제를 버릴 수도 없고
안보를 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니…

100개국에 군기지 보유한 미국
소프트파워 여전히 막강
중국은 분명 G2 맞지만
미국과 동등한 G2는 아니다

방금 말한 대로 사회주의 붕괴 이후 시장의 세계화와 노동운동의 전세계적 약화가 매우 중요했다고 본다. 내부적으로는 정치적 안정과 결합된 온건한 경제개혁이 장기적인 고도성장의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가가 경영권을 개혁하기 전에 시장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점이다. 포스트 소비에트 경제권에서는 바로 국영기업들을 팔아버렸다.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고 시장을 경험해본 사람들이 없었다. 아무도 그 가치가 얼마인지 모르는 환경에서 국영기업을 팔아먹는 것은 대실패를 불러올 수 있다. 실제 포스트 소비에트 체제에서 이런 국가기업을 사고 싶어 하는 유일한 그룹은 이 기업들을 전에 경영하던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그 자산가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내부자 가격으로 기업을 인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과거의 관리들이 새 경영자가 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중국에서는 사적 소유화 이전에 시장화를 이뤘기 때문에 점진적인 변화가 가능했다. 그래서 여러 자산을 팔기 시작했을 즈음엔 부패에 대한 점검이 이뤄졌다. 국영기업의 가치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있었고, 기업을 경영해온 사람들 이외에 전문가들이 충분히 있었다. 점진적일 수 있었던 게 큰 차이를 나았다고 본다.

또 지방기업을 대하는 자세도 중요했다. 당시 사람들은 규모의 경제 시대에 100만개의 작은 지방 기업을 만들고 있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 작은 기업들의 기여가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매우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그래서 한꺼번에 도시로 진출하지 않았다. 그게 굉장히 중요했다. 아마 그것이 규제를 한꺼번에 걷어내고 뭐가 일어나는지 보자고 했던 동유럽식 충격요법보다 좀 더 균형잡힌 성장을 가져오지 않았나 싶다. 즉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 정책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본다. 그게 30여년간 성장이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사실 정치적 안정의 문제는 양면적이다. 즉 중국공산당에 의한 일당통치가 정치적 안정성을 높였지만, 동시에 사회적 다원성과 밑으로부터의 참여,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문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질문이 존재한다. 하나는 ‘일당 독재 하에서 정치적 안정성이 성장을 도왔느냐?’는 건데 답은 긍정적일 수 밖에 없다. 일당 독재 하에서의 안정성은 언제나 불안정성보다 높을 수 밖에 없다. 두번째 질문은 ‘일당독재만이 안정성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냐’인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민주적인 중국에서 발전을 이룰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일당독재가 안정성을 제공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현재라고 본다. 지금까지는 빠르게 발전했다. 하지만 이제는 ‘중진국 함정’을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즉, 다양한 요구들이 분출하며 과거와 같은 일사불란한 발전이 어려울 수도 있다. 발전된 서구국가들과도 이제부터는 대등하게 경쟁해야한다. 상호 모순되는 ‘사회주의원리’와 ‘사적 소유’, ‘공산당 일당통치’와 ‘시장경제’의 장기공존의 붕괴 위험성도 상존한다. 중국에서 그동안 공존해온 이 모순요소들은, 다른 나라들의 역사경험을 통해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적 특징을 과거 30년의 안정성과 함께 지방분권주의에서 찾고 싶다. 두 조합이 정말 좋았다. 앞서 말한 지방관리들의 정책 동조를 위한 덩샤오핑의 선택이 대표적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체제발전의 성과를 나눠주기 위해 이런 식의 ‘지방 기업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방분권화가 굉장히 실질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유엔은 인간개발지수라는 것을 발표하는데 만일 상하이 주변 75마일(121㎞)을 포함한 곳을 독립적 국가라고 치고 표본으로 삼는다면, 아마 프랑스 정도 수준에 달하는 인간개발지수가 나올 것이다. 만일 남부의 꾸이저우 인근의 인간개발지수를 따진다면 쿠바보다 한참 아래이며 가봉보다 살짝 위일 것이다. 하나의 단일국가 안에서 중앙집중 정권이 그렇게 격차가 심각한 지역들의 단일정책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중앙집권화된 정부가 그 지역들간에 자원을 교류할 수는 있다. 꾸이저우가 발전하려면 상하이 같은 곳의 자원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더 유연하고 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중국 정부는 정치적으로는 허용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몇몇의 지방정부들이 경제 실험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줬다.

정말로 날카로운 지점을 지적했다. 중국의 2천년 역사를 보면 지방에 대해 정치적 자율성은 불허하지만, 경제적 자율성은 허용하는 이중구조를 지속해왔다. 이를 통해 장기간 제국체제를 유지해오지 않았나 싶다. 그 점과 관련해 나는 중국 전래의 군현제도를 로마제국 지방통치 및 미국의 연방주의, 소련의 사회주의체제와 비교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점들이 매우 많이 발견된다.

현대 중국에서도 지방관리들이 정치 실험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된 범주는 굉장히 작다. 그러나 앞으로는 궁극적으로는 지방으로부터의 정치적 실험이 행해져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중심부에서 시작되는 중국의 근본적인 정치변화는 더욱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프랑스·러시아에서 급진혁명이 일어난 것처럼 그런 식으로 수도에서 혁명과 쿠데타로 시작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방에서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변화가 더 실현가능해 보인다. 어떤 건 성공할테고 어떤 건 실패할 것이다. 그중에서 성공한 사례들이 중국 전체로 녹아들어 일반화되길 바랄 뿐이다.

이제 ‘중국모델’을 말해보자. 사회주의와 사적소유, 공산통치와 시장경제를 결합한 중국체제를 우리는 ‘제3의 길’, 또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중국은 지금 과연 ‘중국모델’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중국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중국은 ‘신자유주의 사회주의체제’(neoliberal socialism )에 가깝다고 본다. 물론 중국의 학자들은 나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3의 길’이라는 건 굉장히 재미있는 표현이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소비에트 공산주의도 아니고 서방의 자본주의도 아니라는 건데, 만일 그게 ‘제3의 길’의 전부라면 중국은 ‘제3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난 ‘제3의 길’은 서방의 장점과 전통적인 형태의 사회주의의 장점이 결합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중국이 ‘제3의 길’을 이뤘다고 보지 않는다. 1970년대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제3의 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적 강점의 조합을 원한다면 스웨덴이 훨씬 좋은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복지를 결합하는 것이 ‘제3의 길’이라면, 나는 미국의 루즈벨트 개혁, 전후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그리고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사회국가’로서 ‘제3의 길’이라고 본다.

 같은 생각이다. ‘제3의 길’이 두 체제 모두에 응답하는 대안이라고 규정한다면 그렇다. 2차 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가 우리 시대에 볼 수 있는 그 어떤 것 보다 좋은 방향이었다고 본다. 그 모델이 신자유주의 등장으로 80년대 이후 밀려나고 있는 것은 굉장한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발전 이후 중국’을 말하자. 중국은 급속한 발전 이후 유교, 공자, 민족주의를 급격하게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과거로 돌아가도 되나 싶을 정도이다. 특히 중국 민족주의의 주류를 보면, 200년 이내에 근대 이후 한족(漢族)들이 위로부터 발명해낸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고대 이래 국가라기보다는 천하, 제국, 문명, 질서로서의 중국은 민족주의가 필요 없었다. 중국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세 제국이었던 몽골, 청, 중화인민공화국이 모두 유교·공자·민족주의를 가장 강력하게 거부한 제국이었다는 점은 오늘의 중국현실을 두렵게 한다. 중국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과도하게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주변국의 입장에서도 당혹스럽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내부에선 어떤 비판적인 목소리도 없다. 학자들은 일방적인 지지 아니면 침묵뿐이다. 이게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인가 아니면 과거 제국의 영화에 대한 향수가 발현한 것일까?

민족주의는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당신 말처럼 민심을 얻기 위해 민족주의 정책을 꾀했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이 세계에서 대국으로서의 어떤 입지를 차지하기 위한 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민족주의를 맑스주의의 대체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너무 단순한 접근이라고 본다. 물론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큰 냉장고를 가지게 됐다는 경제 발전 이상의 관심을 둘만한 어떤 것, 즉 전체의 일부분이라는 좀 더 큰 뭔가를 제공해준다. 중국인들은 그런 게 필요했고, 민족주의는 그러한 기능을 갖고 있다.

또한 민족주의는 명확하게 특정한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국정부가 ‘굴욕의 세기’라고 말하는 지난 150년의 상처를 계속 들추어내고 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물론 그 150년은 현실이었고 외부세계가 중국에 굉장한 고통을 안겨준 시기였다. 하지만 중국은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 분노를 자주 상기시키고 있다.

나는 단순히 번영이 곧 세계시민주의(코스모폴리타니즘)을 가져오고, 세계시민주의가 민족주의의 약화를 가져온다고 보지는 않는다. 미국에서도 그렇지 않았다. 미국도 최근 30여년 간 이상한 민족주의가 다시 재현되고 있다.

당신의 균형시각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아시아인으로서 동아시아의 현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분별하다’, ‘물음을 배운다’는 뜻을 갖는 동서양의 ‘학문’ 개념은 결국 자기와 세계에 대한 질문과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학문적 스승 브로델에게 큰 영향을 끼친 비코와 미슐레를 따르면 ‘자기비판’, ‘자기나라 비판’이야말로 ‘자기사랑’, ‘자기나라 사랑’의 원천이다. 나는 그들의 이탈리아와 프랑스 연구에서, 사랑과 애국으로 승화되는 자기비판의 정수를 읽곤 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주도했던 오리엔탈리즘 비판의 지극히 역설적인 기능은,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인들의 시각을 비판하는 동안, 동양인들 자신의 자기모순과 약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차단시켰다는 점이다. 생전에 사이드에게 물어볼 기회가 있었을 때 그는 나의 이 질문에 대해 침묵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을 “그건 동양인들의 몫”이라는 묵언의 답으로 이해했다.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인으로서 동아시아를 볼 때 나는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일본·중국·한국은 세계의 첨단 물건들, 즉 스마트폰·전자·자동차·선박 등을 만들어 세계에 수출했다. 하지만 인권, 민주주의, 권력분립, 과거청산, 자유, 평등, 복지, 평화의 수준은, 수출은 커녕 세계와 공유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유럽중심주의와 중화주의 모두를 극복한 당신이라면 이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뇌가 남달랐을 것 같다.

당신이 맞다고 생각한다. 난 ‘아시아적 가치’라는 게 부족한 점을 다루지 않으려는 핑계가 되는 것이 아닌가 굉장히 의심스럽다. 아까 말했던 ‘균형잡힌 비교’로 돌아가자면, ‘균형잡힌 비교’라면 ‘유럽중심주의는 잘못됐다. 좋은 건 다 동아시아나 다른 곳에서 왔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일정한 관점에서 분석할 때 각각의 사회는 부족함이 있다. 그리고 그런 비판적 인식이 현재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더 멀리 나아가는 작용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정말 안타까운 것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서구가 일본·한국·대만보다 잘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전진하는 게 아니라 뒷걸음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뉴욕타임스>에 난 기사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뉴욕 경찰이 목조르기로 사람을 죽이다가 걸린 장면이 찍혔는데도 대배심이 기소를 거부했다는 기사였다. 인종차별 철폐를 말할 때 얼마나 빨리 그 지점에 도달할 것이냐, 어떤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 의견을 달리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그 지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종차별 문제가 결국 풀 수 없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굉장히 충격적이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 이게 일시적인 후퇴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인 후퇴다.

자기비판과 상호위로가 가장 좋은 결합이 아닌가 싶다. 사실 동아시아의 현재를 보면 과거로의 반동적 퇴영이 너무도 심각하다. 나는 동아시아의 퇴영에 대한 서양인들의 비판을 기다리기에 앞서, 동양인들의 침묵이 더욱 큰 비극이라고 본다. 여기 이웃하는 나라들의 정치적 상황을 보자. 일본의 총리는 1급 전범의 3세대다. 한국의 대통령은 과거 일본군장교이자 군사독재자의 2세다. 중국 최고지도자는 공산 혁명가의 2세대이며, 상충부의 다수는 세습자제들이다. 3대세습의 북한은 가장 퇴영적이며, 가산국가로서 최소 민주주의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동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칭송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 사이의 관계도 상호 신뢰와 화해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인권갈등과 영토분쟁도 심각하다. 이런 문제를 끊임없이 야기하는 일본이 과연 보편적 문명국가인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남북한은 부끄러운지조차 모른 채 아직도 심각한 적대와 반목을 반복하고 있다. 특별히 동아시아 영구평화와 지역통합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동아시아 현재에 대해 더욱 비판적이다. 당신의 세계와 아시아에 대한 통합 경제연구와 같은 방법을, 나는 세계와 아시아의 통합 평화연구 분야에서 집필하고 있는데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당신 역시 다음 책은 중국의 정치질서에 대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도 많은 부분에서 전진하기보다 후퇴하고 있다는 건 어두운 현실이다. 나의 다음 책은 제목이 <왜 중국은 이렇게 큰가?>이다. 각각의 역사적 순간들에서 무엇이 이 정도 규모의 나라를 하나로 묶어둘 수 있었는지 규명해보려는 시도다. 자연적·필연적이었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굉장히 잘 짜여진 집단이었고 각각의 시기에 다른 방식으로 건설됐다. 그래서 아까 당신이 언급한 민족주의가, 사실 한족(漢族)이라는 개념이 강조된 것이 지난 200년의 결과물이라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 전에는 분명히 ‘한족 국가주의’ ‘일국가성’의 존재감은 강하지 않았다. 내 책의 핵심은 중국이 왜 그렇게 큰지 하나의 답을 내놓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질문에 대한 답들이 역사적으로 대표되는 시기에 따라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이 물러난 뒤 중국 동쪽을 통합하기 쉬운 이유가 무엇인지, 신장 위구르를 중국의 일부로 묶어두는 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이다. 결국 이것도 다른 결과들이 만들어낸 다른 결과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은 이게 원래 이렇게 됐어야 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왜 하나로 뭉치지 않았을 때보다 하나가 될 때가 많은지 묻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반동적 퇴영은 ‘뒤집힌 현실’을 한 가지 더 깊이 상념케 한다. 역사적으로 개인주의, 사유재산, 시장경제, 경쟁의 전통이 강한 서구에서는 지금 분배, 평등, 복지체제가 강하고, 반대로 전체, 국가주의, 공동체 전통이 강한 동아시아는 오늘날 소득집중, 불평등, 고용불안, 사적 소유관념이 훨씬 심각하다. 어떻게 이런 극적인 반전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나의 경우 국가의 적정 역할의 후퇴로 설명하곤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제외하고 경쟁적인 자본주의 매카니즘이 비민주적인 상황에 주어졌을 때 극단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그게 중국에서 최근 일어난 일 중 일부라고 생각한다. 대만은 좀 더 민주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문제가 덜했다. 대만은 이제 거의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좋은 의료체계를 갖고 있다. 서방 전체보다 유럽 대륙 쪽이 더 위협당하고 있다. 유럽 대륙 복지체제는 국제적 기준에서 볼 때 괜찮아 보이는데 그들 자신의 30년 전과 비교해볼 때는 가난해졌다.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굉장히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70년대가 여러 방면에서 실망적인 연대였다는 것은 맞다. 적어도 내가 볼 땐, ‘경황이 없어 아이를 목욕물에서 내던져버린 격’이었다. 대처와 레이건 등은 정말 어떤 조급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챙길 수 있는 이익을 외면했다.

정책적으로 20세기의 첫 75년간은 서구가 실제 복지를 이룩하는데 괄목할만한 제도들을 만들어냈다. 그런 제도들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 아직 서방이 동아시아보다 멀쩡해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슬프게도 이미 그런 제도들이 평가절하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마지막 주제는 미래 중국의 국제적 입지에 대한 것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왕조는 자주 교체되었지만, 제국은 지속됐다’ 중국의 역사는 ‘집중’과 ‘이완’, ‘통합’과 ‘분열’을 반복한 독특한 제국경험을 갖고 있다. 지금도 중국 지도층 내부에서는 과거의 이완과 분열의 역사에 대해 예리하게 주목하고 있다. 대만, 홍콩, 티벳, 위구르, 신장 등의 문제에 대한 강경대응은 이런 역사인식의 연장으로 보인다. 반면 대외적으로 중국은 미국과 함께 세계양강, 주요2국(‘G2’·지2)으로 불리고 있다. 중국을 이렇게 분류하는 것에 동의하나? 중국을 과연 미국의 경쟁제국이라고 볼 수 있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중국은 이제 국제무대에서 ‘큰손’이 됐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역을 떠나서 처음으로 국제적인 ‘주요 행위자’가 됐다. 아프리카에서도 남미에서도 중국은 중요해졌다. 그것은 새롭고 기본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그런 면에서는 ‘지2’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내재하고 있는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독특한 형태로 존재한다. 전세계에 존재하는 미군의 규모는 놀라운 것이다. 이제 정상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됐지만, 100개국에 기지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지정학적으로 충격적인 일이다. 또한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의 기술력과 소프트 파워는 여전히 비교대상이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 그런 면에서, 지2가 맞지만, 동등한 지2는 아니다.

동의한다. 중국은 아직 경제 분야 정도에서만 미국에 견줄 수 있다. 군사·정보기술(IT)·교육·국제 관계·표준가치 설정능력으로 봐도 미국이 유일한 글로벌 제국이다. 중국은 준 글로벌 제국 정도이다. 또는 동아시아의 제국이다.

맞다. 그런 것이다. 겉으로는 제국처럼 존재는 하지만 그 정도의 입지는 없다. 미국이 갖고 있는 정도의 입지는 없다.

중국이 세계에 급속하게 수출하려는 공자학원을 둘러싼 해외의 논란 역시 그런 중국의 조급함과 현재 위치를 동시에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이 아닌가 싶다.

공자학원은 굉장히 흥미로운 사례라고 생각한다. 공자학원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어를 배우게 했다. 하지만 관련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미국처럼 공자학원을 계속 열어온 곳에서도 사람들에게 중국 정부에 대한 호감을 주기에는 부족했다고 본다. 공자학원을 소프트 파워라고 본다면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본다.

중국의 부상 이후 일부에서는 벌써 ‘세계화 이후’를 말하면서 ‘미국화’와 ‘중국화’의 때 이른 대결을 말하기도 한다. 나아가 ‘21세기는 중국의 세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 담론들이다.

중국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의미겠지만, ‘19세기는 영국의 세기’ ‘20세기는 미국의 세기’라는 정도로 중국이 그들처럼 세계질서를 주도하고 국제규범의 모델이 되는 역할을 하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중국의 세기다’ ‘미국의 세기다’라고 한다면, 왜 21세기가 누군가의 세기가 되어야 하냐고 되레 묻고 싶다. 지금 많은 문제가 국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 어느 시대보다 국제적 규범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 규범이 하나의 거대한 특정 제국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인지는 동의하지 않는다. 많은 부분에서 그럴 수 없다고 본다.

마지막 주제는 한반도 문제다. 중국은 현재 남북한 모두의 제1 교역국이다. 한국과 중국의 교역액은 한미 교역액의 2배가 넘는다. 반면 미국은 제1 안보동맹국이다. 두 거대 제국 사이에서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안보와 경제의 제1상대가 서로 경쟁하는 지극히 기묘한 상황이다. 한국으로서는 처음 맞는 상황이다. 일단 양자택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즉 안보(미국)를 위해 경제(중국)를 버릴 수도, 경제(중국)를 위해 안보(미국)를 버릴 수도 없는 변혁 국면이다. 미국과 중국이 경쟁을 넘어 점차 대립하는 상황에서 한국 나름의 운신공간을 확보하는 문제가 절실하다.

그렇게 생각한다. 한국의 상황이 정말로 미국과 중국 중에 택일해야하는 상황인지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물론 오랜 기간 동안 한국은 대국의 막대한 영향 하에 놓여있었다. 처음에는 중국, 다음에는 일본, 그리고 미국까지. 그러나 보다 긴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안보상황은 진정으로 다자적으로 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럴 경우 중국은 다자적 안보 틀의 바깥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 어느 국가도 중국이 동아시아 안보 상황을 독자적으로 관장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상당 기간 동안 미국이 유용한 균형 요소가 된다. 하지만 미-중이 대결하는 구도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의 안보는 무엇보다도 중국과 미국의 관계에 달려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악화될 때 한국은 정말 고통 받을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기안보 전반을 관장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앞서 말했듯 한국의 안보 관리는 장기적 관점에서는 다자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 문제일 텐데, 그것과 관련해 어떤 비상구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제 마무리를 짓자.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의 역할이 없이는 한국은 주변 대국들인 일본, 중국, 러시아를 견제할 길이 없었다. 역사 속에서 그들은 번갈아가며 이 작은 나라를 위협, 공격, 점령해왔다. 한국이 현재 중견국가로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한반도에서 미국의 균형역할은 필수인 것이다. 또한 중국과의 경제협력 없이는 미래의 발전도 어렵다. 이제 한국민들은 두 거대제국 사이의 열린 공간을 활용하는, 예술 같은 지혜를 통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안전과 평화, 발전과 통일을 이루어야하는 무거운 과제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맞다. 나는 한국인들의 그런 노력을 통해 한반도와 동아시아가 평화와 안전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정리/김지은 기자 mirae@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대담자 약력

케네스 포머란츠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중국과 유럽에 대한 비교사 연구를 통해 19세기 이후 세계사를 규정한 동·서양의 발전 격차의 원인을 분석한 기념비적 저서 <대분기: 중국, 유럽, 근대 세계경제의 형성>(2000) 등을 내놓은 세계적인 석학이다. 2013년~2014년 미국 역사학협회 회장을 지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한국전쟁, 한-미 관계, 해방 전후 한국정치 등에서 돋보이는 연구 성과를 보여왔으며,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996)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