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역사다. <한겨레>가 올해 딱 70살이 되는 1945년생 2명을 만났다. 섣부른 세대 거대담론은 피하고자 했다. 박현곤씨는 28년 동안 직업군인으로 복무하고 상사로 제대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토요판] 새해특집 커버스토리
미군 세탁부·생선 장사·육군 상사…
박현곤과 전명옥에 깃든 해방 70년
보통 사람의 삶은 다, 보통이 아니다. 1945년생은 해방둥이로 불린다. 과거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조사를 보면 1945년생은 43만3775명으로 추정된다. 1945~49년 국가 통계자료가 명확하지는 않다. 남자가 22만3366명, 여자가 21만409명으로 추산된다.
해방되던 해 태어난 세대라 늘 주목받았다. 언론은 그들이 10대, 20대, 40대 때마다 특집기사를 썼다. 그들의 생물학적 삶이 국가 건설의 연표와 그대로 겹치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만 70살이 되는 그들은 사회적 격변을 많이 겪었다. 5살 때 한국전쟁을 경험했고 16살 때 5·16 쿠데타를 지켜봤으며 20살 때 한일협정을 목도했다. 20살 때부터 40살 되던 1985년까지 경제의 거대한 변화를 몸으로 겪었다. 45년생이 속한 60대 이상 투표자들의 72.3%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찍었다. 진부해 보일지 모르나, 이 세대에 대한 기사를 하나 더 추가하는 이유가 있다.
<한겨레> 토요판은 1945년 해방둥이 세대의 전형이나 대표자를 찾지 않았다. 대신 45년생 두 명을 만나 오래 인터뷰했다. 45년 세대를 분석하지 않고 45년에 태어난 개인 두 명의 전기를 쓰려 했다. 문제의식과 취재 방법에서 역사학의 ‘구술사’와 ‘일상사’의 연구와 상통한다. 국가 권력과 정치의 변화만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부족하며 개인의 일상과 기억이 역사의 중요한 측면이라는 전제에서 일상사 연구는 출발한다. 담담히 ‘출생-성장-직업-가족’에 대해 묻고 기록했다. 가족사진첩을 독자들이 들춰 본다는 느낌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의 개인적인 삶에서 사회적인 변화가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우회로를 택했다. 보통 사람들의 위인전이 되기를 희망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일상이 역사다. <한겨레>가 올해 딱 70살이 되는 1945년생 2명을 만났다. 섣부른 세대 거대담론은 피하고자 했다. 노량진수산시장에서 ‘부천상회’를 운영하는 전명옥씨는 미군부대에서 세탁부로 20년 일한 뒤 수산시장에서 30년째 일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왜, 어떻게 인터뷰했나
자서전 쓰기 강좌가 유행이다. 현재 여러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에서 진행된다. 주로 노인들을 상대로 한다. 모든 인생이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두 사람에게 인터뷰 의도에 대해 ‘70살을 맞아 가족과 친구들에게 줄 자서전을 구술로 집필한다고 생각하시라’고 여러 차례 설명했다. 취재는 구술사 연구 방법론을 많이 참조했다. 전씨와 지난해 12월30일과 31일 두차례 모두 3시간 인터뷰했다. 박씨와 31일 3시간 인터뷰했다. 인터뷰 뒤 추가질문은 전화로 물었다. 공통 질문과 개별적 질문이 섞여 있다. ‘출생-성장-직업-가족’의 순서로 일대기를 물었다.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것과 가장 후회되는 것’ ‘그 시절의 일상’ ‘주위에 전하고 싶은 말’ 등은 공통 질문으로 던졌다. 각자 직업과 관련된 개별적 질문은 따로 물었다.
마치 대필 작가가 쓰듯, 1인칭 시점으로 자서전을 쓰는 대신 3인칭으로 전기를 쓰기로 했다. 이유가 있다. 두 사람은 구체적인 연도, 지명 등을 대체로 기억하지 못했다. 어떤 장면에 대한 기억은 반복해서 되물어야 했다. 기억을 받아 적기보다 기억을 발굴하는 작업에 가까웠다. 따라서 문답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구술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기 어려웠다. 인터뷰어가 문답을 의미와 맥락에 맞게 수정·정리해야 하는데 본인들이 직접 글을 쓰고 다듬은 것처럼 1인칭으로 자서전 쓰기를 하면 어떤 왜곡을 부르리라 우려했다. 또한 1976년생인 인터뷰어는 그들과 전혀 다른 세대에 속한다. 1945년생의 1인칭을 흉내 내기보다 심리적 거리를 유지해 3인칭 전기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주관은 거의 개입시키지 않았다. 중요한 기억과 발언을 큰따옴표로 인용하고 설명 문장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기술했다. 인용할 때는 맞춤법에 어긋나더라도 본인들의 말투를 그대로 살렸다. 인용부호가 없는 서술 문장이더라도 본인들의 문장과 단어를 최대한 살려 적었다. 기억이 흐릿하거나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 등에 한정해 부연 설명했다. 따라서 형용사와 부사는 거의 쓸 일이 없었다.
지난 12월30일 노량진수산시장 내 전명옥씨가 자신의 가게 ‘부천상회’에서 일하는 모습. 그는 올해 70살이 됐다. 아직 밤늦게까지 일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어머니와 3남매 인천으로 피난
먹을 것에만 집중하던 50년대
없이 살았으니…기를 쓰고
죽기 살기로 살아온 70년 미군부대에서 20년 세탁 일
실수로 직장을 잃은 뒤엔
노량진시장서 장사실력 발휘
30년 생선 팔아 두 남매 키워
교회 다니고, 박근혜에 측은지심 죽음 “먹는 데는 나물이라는 나물은 다 들녘에 나는 건 다 뜯어 먹었어.” 나물을 뜯어 먹고 조개를 캐고 때로 튀김장수가 버린 밀가루 튀김옷을 사서 먹기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기억했다. 가난했지만 어머니 심간난씨는 남의 것에 손대지 말라고 교육했다. “근데 엄마가 철두철미해, 아주. 서울 양반이 돼서 그런지 몰라두. 남의 것은 요만한 것 하나도 손을 안 대, 우리 엄마는. 암만 고생을 해두. 우리 엄마가 인삼공장을 다니셨는데 인삼 뿌럭지 하나를 안 드셨대, 우리 엄마는. 결백해. 그러니까 남의 거는 요만한 거 하나도 안 드셔. 아주 너무 정확한.” 가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첫째 오빠 전영철(1934년생)씨와 둘째 오빠 전재철(1939년생)씨가 일할 나이가 됐다. “큰오빠가 (주안)염전을 다녔는데 염전 다니면서 이제 월급을, 그때는 월급이 없지, 뭐. 월급이 뭐 얼마나 있어? 뭐 몇천원 받는 거 그걸로 끝나고” 말았다. 영철씨가 직접 집을 지었다고 기억했다. “직접 땅에다가 집을 지었어, 쪼끄맣게.” 그런 영철씨는 군 제대 뒤 ‘심장병’으로 숨졌다. “제대하자마자 27살인데 그때는 군대생활도 오래했잖아. 근데 매도 워낙 많이 맞았나봐, 그때 당시에. 근데 딱 제대하고 나서 병에 걸렸는데 다리가 이렇게 붓더라구. 막 이만큼 붓는데. 다리 부은 걸 갖다가 의사가 와서 그 주사로다가 물을 빼면 다리가 쪼옥 이렇게 오므라들더라구. 근데 어떡하다가 오빠가 못 고치고 그냥 갔어. 그 오빠가 살아있으면 우리가 좀 덜 고생을 했을 텐데. 그리고 그 오빠가 시골 어딘가 이제 여자를 이제 우리가 중매를 해서 결혼하려고 했는데 오빠가 죽어버린 거야. 큰오빠가. 그때는 화장 같은 것도 못 했어. 옛날에는 그 사람을 둘둘둘 그 뭐야, 가마니에다 둘둘둘둘 말아가지고 가마니에 둘둘둘 말아서 산에 갖다 그냥 파묻었어. 갖다 파묻고는 우리 엄마가 이제 그 아들이 죽었으니까 을마나 마음 아프겠어. 평생 가슴에 묻고 돌아가셨는데.”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 못했다. 영철씨는 1960년대 초반에 숨진 것으로 추측된다. 큰오빠의 장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주안역 앞 야산’이라고 설명했다. 야산에다 묻었는데. 그 야산이 집 짓는다고. 개발돼서 집 짓는다고. 그 날더러 (관에서) 인제 이장을 하라는 거야. 근데 이제 우리 재철이 오빠는 그때 막 결혼해가지고 애가 있어. 애가 있으니까 애 있는 사람은 이장 하면 안 된다고 그래 가지고 처녀가(내가) 가서 그 뭐 산을 파가지고.” 전씨가 화장터 인부 세명을 고용해 숨진 큰오빠를 다시 파내어 화장을 했다. “산에서 다 뼈를 다 추슬러가지고 석유 뿌려가지고 석유 뿌려가지고 가마니 태워서 태우는데 아 진짜 두 시간을 타드라. 딱 두시간 타대.” 둘째 오빠 재철씨가 서울 문래동에 있던 공구상가에 취직하면서 전씨는 비로소 먹는 걱정에서 해방됐다. “재철이 오빠가 크니까 직장생활을 이제 하는 거야, 서울에서. 문래동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거야. 오빠가 이제 착실하고 그러니까 이제 먹을 거는 그때는 이제 먹는 거는 이제 걱정을 안 했지.” 정규 학교 교육은 받지 못했다. 대신 주안 장로교회에서 한글 등 기초 교육을 받았다. 미군부대 겨우 먹는 걱정에서 놓였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했다. 전씨는 열여덟살 때쯤인 1963년께 인천에 있는 타일 공장에서 몇개월 일했다. 월급은 600원쯤 됐다. 22살 되던 1967년 무렵 부평에 있는 미군부대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전씨는 “헌병부대”라고 기억했다. 영어를 잘하지는 못했다. “아는 사람 소개로” 일자리를 얻었다고만 설명했다. 오랫동안 부평은 농촌이었다. 1930년대 일제가 조병창을 설치하면서 급속히 공업도시가 됐다. 해방 이후에는 조병창 자리에 대규모 미군기지가 들어왔다. 부평 일대는 ‘애스컴(ASCOM)시티’라 불렸다. ‘주한미군 지원사령부’(the Army Support Command Korea)의 약자다. 전씨는 애스컴 내 헌병부대에서 세탁 일을 했다. 정직원으로 월급을 받는 게 아니었다. 세탁 한 건당 3~4달러의 수고비를 받았다. “당시에 월급이, 이것저것 다 합하면 120달러쯤 됐어요. 큰돈이야.” 큰돈이었을 것이다. 1967년 8월31일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당시 순경 월급이 1만4633원이었다. “거기(미군부대)는 세탁기도 있지만 말리는 기계도 기가 맥히게….” 부평 미군 헌병부대에서 10년쯤 근무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5년쯤까지는 서울 용산 미군기지에서 세탁 일을 했다. 용산고 근처 ‘5번 게이트’로 출입했다. 노동의 기회를 얻는 것 외에 부가적인 장점이 있었다. 먹을 것이었다. “미군부대 최고 좋은 거. 고기도 미국 사람들 고기는 일등으로. 막 뭐야 식당 가서 읃어다가 먹고. 맨날 읃어다 먹고.” 가족들에게 주려고 퇴근할 때 먹을 것을 몰래 들고나왔다. “먹는 거는 뭐 설탕이고 커피고 먹는 거는 거의 다 가지고 나왔어.” 걸리면 해고당하거나 징계를 받았다. “맨날 맛있는 거 막 들고나오니까. 마음 졸이면서 맨날 들고나왔으니까. 나오다 걸리면 또 난리나니까.” 전씨는 장사를 몸으로 배웠다. 이때부터 수완이 좋았다. “바나나 (당시엔) 못 먹는 거야. 바나나를 애들(미군)보러 사다 달래서 (한국 시장에) 갖다 팔면 하나에 150원씩 줬어. 바나나 하나에. 그러니까 애들보러 사 오라고 하는 거야. 사 오라고 해서 갖다 파는 거야. 여자애들(미군 여군)보고. 그리고 여자애들이 뭐를 좋아하냐면 나한테 심부름을 시켜. 바깥에서 말하자면 지네들이 필요한 약을 사 오라는 거야. 약을 사다 주고, 어떤 애들은 돈 떨어지면 월급 탈 때까지 줄 테니까 돈 10불이고 20불이고 빌려달라고.” 빌려준 돈은 장사로 돌려받았다. “내가 20불 빌려주면 그 담에 30불을 줘, 애들이 월급 탈 때. 그리고 30불로다가 내가, 걔네들이 날 30불 줄 걸로 ‘물건을 사 오라’ 그래, 피엑스에서 내가 물건 사 오라 그래. 그러면 그 돈으로 사다가 팔면 한 50불 정도 나와. 말하자면 40, 50불씩 나온다고.” 전씨는 이렇게 살기 위해 장사했고 장사하면서 살았다. 간혹 물건을 빼 오다 미군과 함께 근무하던 한국군이나 한국 경찰에 걸렸다. “그래 가지고 나오다 우리나라 경찰들한테 걸리면, 그때는 내가 목소리가 되게 예뻤어. 목소리 예뻐가지고 반해가지고 그냥 가는 사람도 있었어 잡았다가.” 영어는 많이 배우지 못했다. 차별도 경험했다. 용산 미군기지에서 세탁 일을 할 때 한 미군 여군이 돈봉투가 사라졌다고 미군범죄수사대(CID)에 신고했다. 전씨를 혐의자로 지목했다. 전씨는 범죄수사대에서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받았다. 며칠 뒤 방 청소를 하는데 쓰레기통에서 돈봉투를 발견했다. 미군 여군은 전씨에게 돈을 찾아주면 일부를 준다고 약속했다. 전씨는 봉투를 돌려줬지만 미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미군부대에서 일할 때 사촌 언니의 소개로 한살 많은 백일성씨와 1975년에 결혼했다. 주사가 있었다고 했다. 1975년와 1977년 아들 백창열씨와 창희씨를 잇달아 낳았다. 호사다마도 겪었다. 미군의 세탁을 해주며 번 돈으로 부평 산곡동에 주택을 샀다. 1980년 겨울 화재로 집이 타 없어졌다. 근처 빈집에서 어머니와 가족들이 살았다. “빈집에 들어가서 연탄불을 펴놓고 자다가 우리 엄마가, 친정엄마하고 나하고 연탄가스 맡아서 쓰러진 거야. 쓰러져서 이 앞니가 다 부러진 거야.” 좋은 일자리를 실수로 잃었다. 1985년 무렵 해고됐다. 물건을 가지고 나오다 걸렸다. “그때 내가 뭘 가지고 나왔냐면, 커피, 술, 양주. 그때는 ‘조니 워커’하고 박(정희) 대통령 먹은 ‘시바스 리갈’. 그런 거 가지고 나오면 (밖에…서 팔면) 한병에 몇만원씩 나오는 거야. 한 3만~4만원씩 나오는 거야.” 전씨는 양주 두 병을 가지고 나오다 헌병한테 걸렸고 이번엔 해고됐다. 노량진수산시장 “내가 이제 직장생활 그만두고 나서 얼마나…한 보름을 내가 잠을 못 잤을 거야.” 돈을 많이 벌던 직장에서 실수로 해고돼 괴로웠다. 1985년 겨울 남편 백씨의 학교 동창이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장사하고 있었다. 12번 기둥 근처에 매장이 있었다. 전씨는 “열두번”이라고 그를 지칭했다. “보름을 잠을 못 자니까 애들 아빠가 수산시장 구경이나 한번 가자고 그러드라구. 와서 보니까는 장사들을 하는데 장사들을 잘하드라구 사람들이. 가만히 한시간 동안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럼 나도 이 장사를 해야 되겠다 그랬드니. ‘열두번’ 중매인이 그러는 거야. 아니 여기는 막판에 오는 덴데 헐 거냐구 그러는 거야. 남들 다 하는데 나도 못 하겠냐구. 그러고서 내가 이제 그때 당시 여기 1번 기둥이 있었어.” 1960년대 신문을 보면 1971년까지 서울역 뒤쪽에 수산시장과 청과시장이 함께 있었다. 1971년 농어촌개발공사가 투자 지분을 많이 가진 ‘한국냉장’ 주식회사가 현재 노량진수산시장을 만들었다. 지금 노량진수산시장 건물 1층에 경매가 벌어지는 공간이 있다. 기둥에 1번부터 차례대로 번호가 적혀 있다. “사람들이 그때는 뭐 여기 그냥 생선이 숭어구 뭐구 그냥 이렇게 산대미같이 짝에다가 놓는 게 아니라 산대미같이 바닥에다 산대미같이 놓고 파는 거야. 근데 사람들이 너무 잘 사가는 거야. 잘 사가고 딴 사람도 잘 파는 거야. 그래서 나도 이제 해야 되겠다 했는데. 장사가 잘되드라구.” 전씨는 장사를 잘했다. “내가 좀 손이 커”라고 말했다. 처음에 생선이 잘 팔렸다. 노량진수산시장에서는 3년마다 매장 위치를 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교체했다. 목 좋은 곳과 관련해 상인들의 갈등을 막기 위해서였다. 전씨는 ‘1번 기둥 앞→A동→C동’으로 이동했다. 현재 ‘부천상회’가 C동 근처다. 방문객들이 접하기 어려운 내부에 있다. 입소문이 나서 지금은 줄 서서 사 간다. 특히 연어가 유명하다. 좋지 않은 위치에서도 성공했다. 열심히 일했다. 남편 백씨가 신장병으로 1986년 숨졌다. 겨울에는 추웠다. 노점상인들은 수산시장 상인들에게 불 땐 연탄을 한장에 500원 받고 팔았다. 성인 남성이 두 팔로 껴안을 만한 크기의 얼음은 한장에 2000원쯤 했다. 여름에 얼음이 배달되면 전씨가 직접 톱으로 얼음을 잘게 켰다. 그 얼음 위에 생선을 놓고 팔았다. 광어회 한 접시에 1만5000원쯤 받았다. 새벽 경매가 가장 중요했다. 지금과 같은 활어가 없던 시절이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 5시께 진행된 경매에 참여해 그날 팔 생선을 샀다. 당시 집은 부천시 원미구 역곡동이었다. 성심여대(현 가톨릭대학교) 앞에서 새벽 4시 반 첫차를 타면 30분 지나 수산시장에 도착했다. 근처 쪽방에서 눈을 붙이고 낮 12시부터 저녁 7시까지 생선을 팔았다. 당시 겨울철 제철 생선 방어 경매가가 1㎏에 1000원쯤 했다. 보통 30만~40만원어치를 경매에서 사서 소매가로 손님들에게 팔았다. “방어 장사들 이렇게 경매 부르잖아, 그러면 이 사람 저 사람(상인들이) 많이 있잖아. 그러면 (내가) 한 막을 다 밀어가지고 방어만 집중적으로 파는 거야.” ‘한 막을 민다’는 표현을 썼다. 경매에서 여러 종류의 생선을 조금씩 사서 파는 게 아니라, 한 종류를 많이 사서 파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회 뜨는 작업이었다. 당시 옆 매대에서 장사하던 ‘쌍둥이 엄마’한테 배웠다. 독하게 일했다. “지금도 내가 사는 게, 세뇌 교육이 된 거지. 어려서부터 없이 살았으니까, 없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기를 쓰고 하는 거지, 지금도. 죽기 살기로 하는 거야. 어저께(2014년 12월29일) 밤 12시 넘어서 들어갔거든.” 그는 지금도 일한다. 인생 두 남매를 노량진에서 돈 벌어 길렀다. 아들 창열씨는 노량진에서 어머니를 돕는다. 딸 창희씨는 전도사다. 사위는 순복음교회 목사다. 전씨는 주안 장로교회를 오래 다녔고 지금은 서울 동작구 대방동의 영진교회를 다닌다. 성경 중에 ‘시편’을 가장 좋아한다. 이유를 묻자 “인생이 담겨 있어서”라고 답했다. “‘45년 세대’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단어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고생했다”고 짧게 말했다.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나 선택’을 물었다. “열심히 산 것”이라고 답했다. ‘가장 후회되는 것’을 묻자 “더 열심히 살지 못한 것”이라고 답했다. “돈 버느라 어린 시절에 아들을 좀더 다독여주지 못한 것”도 꼽았다. 정치에 그닥 관심있는 편은 아니라고 했다. ‘생활인으로 열심히 사셨겠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정치적·역사적 사건이 있느냐’고 물었다. “너무 열심히 살아서 기억나는 것이 없다”고 답했다. ‘투표는 하셨냐’고 묻자 “늘 했다”고 답했다. 해방둥이 세대는 2012년 대선 때 압도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다. 박 대통령은 어린 시절부터 언론에 노출됐다. 40년대 세대가 박 대통령을 친근하게 느낀다는 견해가 많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느낌’을 묻자 “(어머니가 총격에 사망해서) 측은해서 박근혜를 저기…(찍었는데) 그러고 경력이 많잖아. 경력이 많으니까 아무래도, 그러고 결혼도 안 했고. 엄마 아부지 밑에서 많이 배웠잖아”라고 말했다. 전기를 통해서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전국에 나를 아는 사람은 ‘부천상회’로 찾아와라”고 답했다. ‘전기를 통해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잘되고 올바르게 되는 게 최고다. 아들이 술을 줄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섭외 협조 노량진 수산시장
박현곤의 전기…“1981년 부재자 투표용지를 보안대에 날랐지” 좌우갈등 박현곤씨의 기억도 전쟁에서 시작한다. 박현곤씨는 1945년 9월26일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면 남계리 기전부락에서 아버지 박동선씨와 어머니 문순금씨의 3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나서 한국전쟁 때까지는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누렸다. “(아버지가) 상업을 하셨어요. 제가 알기로 쌀 같은 걸 지방 돌아다니면서 사가지고 화물차·기차로 판매하고 배송하고 그랬다고 들었어요, 크게. 잘살았죠, 어렸을 때.” 45년생 대부분 사회와 역사의 영향 아래서 구속돼 살았다. 박씨는 좀더 직접적이다. 좌우갈등과 한국전쟁으로 가세가 기울었다. 박씨의 기억은 부분적이다. 당시의 정치상황을 다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의 죽음을 기억했다. “제 고향은 전라북도 순창입니다. 두메산골이지요. 두메산골이기 때문에 제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 상업을 하셨는데 중산층 이상이라고 그럴까 삶을 사셨는데, 6·25가 발발해가지고 제일 큰형님이 그때 당시 등기소를 다니셨어요. 저는 모르죠. 제일 큰형님이 근데 그때 당시에 시골이었지마는 남원도 가까워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빨치산 활동이 좀 심했었나봐요. 그래 가지고 낮에 보면 젊은이들이 대창 있잖습니까, 대나무로 창을 만들어가지고 길거리를 다니고 그런 것을 제가 봤거든요.” 순창등기소에 다녔던 큰형 박만수씨는 한국전쟁 직전 좌우갈등 과정에서 국군에게 피살됐다고 박씨는 전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남한 내에 좌우갈등이 심했다. 조선의 미래상을 두고 우파와 좌파가 싸웠다. 토론하거나 선거를 하지 않고 서로 죽이고 폭행했다. <경향신문> 1947년 8월19일 보도를 보면 전북에서도 정읍의 좌우익 청년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큰형 만수씨는 이 과정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큰형님이 등기소에 다녔다는 이유로 우리 군인(국군)들이 총살을 시켰어요. 등기소에 다녔다는 이유로. 군인들이 그때 당시 뭐라 그럴까 등기소에 다니면서 어떻게 제가 생각했을 때는 그럴 분들이 아닌데 관련이 되었다고 그렇게 판단을 했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어요. 그래가지고 총살하고 둘째 형님이 군에 입대해서 전사를 하셨어요. 그래서 아버님이 굉장히 충격을 많이 받으셔가지고 그때부터 제 가족이 좀 그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어요. 그래가지고 굉장히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둘째 형 만식씨는 군에 입대했다가 1952년께 강원도 양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가출 한번 기운 가세는 회복되지 않았다. 현곤씨는 1966년 영장을 받고 병으로 군에 입대할 때까지 순창면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 안에서 점점 더 작은 집으로 여러 차례 이사 다녔다. 순창동국민학교와 순창중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부터 다니지 못했다. “부모님들이 무지해서 그런가 어쩐가, 자식들 장래를 생각을 안 하셨어. 글쎄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자식들에 대한 장래를 생각 안 해주고 그저 너는 그냥 밥 세끼만 묵고 너하고 싶은 대로만 해라. 그러니 제가 생각해보면 그런 식이었어. 그니까 밥 먹고 그냥 친구들하고 놀다가 들어오고 또 친구들하고 놀다가 들어오고.” 박씨도 배가 고팠다. “(집에서) 아침에 밥을 해서 줘요, 그러면 그 밥을 다 먹고 싶어, 다 먹고 싶은데 다 먹으면 점심을 못 먹는 거야. 그래서 절반만 먹고 절반은 남겨. 그 성장기에 얼마나 먹고 싶겠습니까? 절반을 남겨놨다가 이제 점심때 그걸 또 먹는 거야. 때로는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고. 그러니까 부모님도 고생을 많이 하셨죠. 두 형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가정이 몰락해버리고 나니까 다시 어떻게 부모님은 살아나갈 의욕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굉장히 어려웠어요.” 중학교 졸업 이후에는 집에 있었다. 15~18살 때는 주로 집에서 쓸 땔나무를 했다. 남는 시간에는 친구들과 놀았다. 참외 서리, 오이 서리도 했다.
12월31일 서울 은평구 갈현동 자택에서 만난 박현곤씨 모습. 사격 자세를 취하면서 군 시절 훈련을 회고했다. 평생 직업군인으로 산 그는 청력이 약간 떨어진 것을 빼면 아픈 곳이 전혀 없이 건강했다. 군이 그의 직장이고 학교였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상사로 제대한 박현곤씨
중산층 가정에 태어났으나
한국전쟁으로 두 형 잃고
가세 급격히 기울었다 가난 벗어나려 직업군인
군생활은 평안했지만
역사적 사건 옆에 있었다
김신조 사건때 모래 구보
전두환 대선 부정선거 지켜봐 직업군인 군대는 박씨의 학교이자 직장이었고 생활공간이었다. “(영장을 받고) 1966년도에 남원에서 집결을 해가지고 그쪽 지역 입대할 사람들이 남원 지역에서 집결을 해가지고, 거기서 열차를 타고 논산훈련소까지 간 거지. 1966년 9월14일 오후에 기차를 탔어요. 기차를 타고 논산에 도착하니까 밤이었어, 어둑어둑했어. 그래가지고 바로 훈련소에 들어가가지고 바로 잠을 잤어요.” 남원에서 출발한 몇백명의 청년은 논산에서 전국에서 온 다른 남자들하고 같이 잤다. 논산훈련소 25연대에 소속돼 4주간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다. 사격이 가장 어려웠다. “(교관이) 방아쇠를 참 천천히 해가지고 처녀 ○○○ 만지는 식으로 (방아쇠를) 당기라고 했는데 급사격을 한 거야. 겁이 나가지고 안 맞는 거지. 그래가지고 엠원(M-1)총 거꾸로 메고 오리걸음으로. 아이구, 그거 엄청나게 고생했어요.” 사격 외에 크게 고생한 것은 없었다. 다만 병사들 사이의 구악행위는 그때 더 심했다. “거기(훈련소)에 기존 현역병 있잖습니까, 훈련병 관리하는 사람들이? 소대별로 관리를 했는데 그 사람들이 토요일날 외출 외박을 나가지 않습니까, (훈련병들이) 외출 외박비를 안 걷어주잖아요? 그러면 그때 당시 제가 1분대장을 했거든, 분대장을 했는데 분대장들 데려다 엄청 때리고, 군대 말로 조진 거지. 그래가지고 토요일, 일요일만 돌아오면 아주 그냥….” 4주간 기초훈련 뒤 대구 영천에 위치했던 육군경리학교(현재 육군종합행정학교)에서 다시 6주간 교육을 받았다. 새로 배우는 게 많았다. 자원이 아니라 그저 발령을 받아 갔다. 적응을 잘했다. 그곳에서 회계를 배웠다. “수입, 지출. 내가 계산기를 그때 처음 본 거지.” 자동계산기를 처음 봤다. “주판도 있고 계산기가 있었는데, 이게 뭐냐면, 예를 들어 일 플러스 일이 있잖습니까? 그러면 1하고 1을 또 한번 눌러, 그래서 (손잡이를) 한번 돌리면은 답이 나와. 계산기가 그런 계산기. 계산기가 굉장히 컸어요. 손으로 돌리고 이렇게 저렇게 돌리고.” 1966년 신문 보도를 보면, 타자기 크기의 탁상용 계산기가 최신 제품으로 소개되던 시절이었다.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공부는 어렵지 않았다. 경리학교 당시 기억나는 장면을 물었다. “대구 영천이 굉장히 추운 곳입니다. 굉장히 추워요. 대구가 다른 지방보다 굉장히 추워요. 그래가지고 겨울에 교육을 받았는데 저녁이면은 탄통을 하나씩 받아요, 거기다가 뜨거운 물을 배급을 해줍니다. 그러면 받아가지고 발밑에 놓고 잠을 잤어요. 겨울에 굉장히 추웠어요. 또 지급해주던 세탁비누를 몰래 장사꾼에게 담 너머로 주면 사과를 몇 개씩 줬어요.” 경리학교를 졸업한 뒤 일병 계급을 달고 당시 강원도 화천에 있던 27사단 77연대 인사과에 배속됐다.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갔는데 그때는 ‘인사과’ 하면은 파워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휴가, 진급 그런 거 다 담당하니까. 그니까 식당에 가서도 큰소리 빵빵 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밥을 세 그릇까지 먹어봤어요, 여까지(목을 가리키며) 차가지고 숨이 ‘허허’ 하는데도 밥이 들어가요. 아. (스스로) 놀랐어요. 밥을 세 그릇까지 먹어봤다니까.” 1968년 초 장기복무신청을 했다. 하사관 지원을 했다는 말이다. 그해 7월1일부로 하사를 달았다. 가족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가족에게) 얘기 자체를 안 했죠. 내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건데 얘기를 안 했죠. 상의 자체를 안 했죠. 나중에 알렸죠. 하사 달고 휴가를 가니까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하사를 달았냐’고 하셔서 ‘장기복무 지원했다’고 하니까 ‘잘했다’고 하시더라고. 사실 비전이, 제대해 나가봐야 비전이 없었어. 시골 그 조그만 데서 어떻게 방법이 없는 거야.” 군대는 탄탄한 직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1963년 10월 미국 국무부가 “비교적 민주적으로 치러졌다”고 평가한 대선에서 당선돼 권력의 정통성을 부여받았다. 1967년 상당한 부정이 저질러진 것으로 평가되는 대선에서 재선됐다. <매일경제> 1968년 12월11일치를 보면, 당시 국방부는 하사관 봉급 하한선을 2800원에서 6600원으로 인상하는 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박씨의 하사 3호봉 첫 월급은 약 3000원이었다. 군 복무를 하면서 결혼했고 아이를 낳아 길렀다. 하사 계급을 달고 강원도 양구의 21사단 포병대대 인사과로 발령받았다. 전투병과가 아니라 진급이 늦어졌다. 4년 뒤인 1972년 중사로 진급했다. 군에서 여수 출신 정정자(57)씨를 만나 결혼했다. “강원도 양구 근무할 때 (정씨가) 같은 부대에 있던 순창 출신 고향 후배 면회를 왔더라고. 그때 당시 동생이 다리를 다쳐가지고 의무실에 입원을 하고 있었어. 그래가지고 인제 거기까지 (정씨를) 안내를 해줬거든. 안내를 해줬는데 인자 안내를 해주고 나서 면회를 하고 갔잖습니까? 내가 동생보고 얘기를 했지, ‘니 누나 소개 좀 해달라’고.” 사귀자는 말은 편지로 했다. 1973년 2월7일 결혼했다. 결혼식 사진이 없다. 합동결혼식을 했다. 1974년 1월17일 첫딸 박진씨가 태어났다. 1976년 3월22일 아들 박민씨가 태어났다. 정치와 역사 가장 엄혹한 남북 대치의 시절에 직업군인으로 살았다. 기억에 남는 정치적 사건은 군에 관련된 것이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 사건을 기억했다.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공격했다. “(김신조 사건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모래주머니야. 얼마나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악구보를 했는지, 그것도 선착순이야. 출발해가지고… 제가 구보를 굉장히 잘했습니다. 대대인원이 장교부터 시작해서 이병까지 딱 해갖고 출발해갖고 4킬로, 5킬로 구보하잖습니까? 저 따라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 당시 박씨는 병(사병)이었다. “완전히 비상 걸려서 하던 일 전부 멈추고 중대로 와가지고 출동준비 대기하고 있었죠. 행정병이고 뭐고 필요 없지, 전원 다.” 훈련이 고됐다. 북한 탓이다. “모래주머니를 이렇게 만들어가지고 끈 세 개 만들어가지고 여기다가(무릎 아래 종아리를 가리키며) 멨어. 메가지고 산악훈련을 어마어마하게 했습니다, 산악구보훈련. 그때 당시 어떻게 잠을 잤냐 하면 군화 신고 침상에 거꾸로 누워서 판초우의(군용우의)에다가 모포 한장 감아가지고 목에다 딱 감아서 실탄 지급받고 총을, 딱 자기 머리 위에다 세워놓고 그래놓고 잠을 잤습니다. 그때가 제 계급이 병장이었어요. 그때 당시 (군복무를 거의 마친 병들이) 전역 명령을 받고 예비사단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김신조 사건 때문에) 다시 전부 다 되돌아왔어요. 그래가지고 36개월로 (4개월 더) 복무가 연장이 된 거야.” 21사단에서 중사로 진급한 뒤 1972년 경기도 파주 신산리 898부대에서 근무했다. 다시 1977년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21사단에서 파주 2기갑여단 6전차대대로 가서 인사과에서 근무했다. 박씨는 간발의 차이로 역사에 휘말릴 위험에서 비켜났다. 1979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12·12 쿠데타 당시 2기갑여단이 쿠데타군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다만 박씨가 속한 6전차대대가 아니라 16전차대대가 쿠데타군에 합류해 서울로 진격했다. 박씨는 전 전 대통령 쪽에 가담하기로 한 당시 2기갑여단장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여단장이) 거기가 마지막 길이었어. 나이도 많고 마지막 길이었는데 자기가 판단을 잘한 거지, 결과적으로”라고 말했다. 전 전 대통령의 내란죄 항소심 판결문에 판단력 빠른 군인의 이름이 나와 있다. 이상규 준장이었다. 실제로 쿠데타 성공 뒤 다시 진급해 혜택을 받았다. 판단력 빠른 사람들이 많아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무명의 육군 장성에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두번 취임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뒤 유신헌법에 따라 1980년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49명의 투표에 따라 11대 대통령이 됐다. 그리고 5공화국 출범에 따라 헌법이 개정된 뒤 1981년 2월25일 5277명으로 구성된 대통령선거인단 투표로 한번 더 당선돼 12대 대통령이 됐다. 정치적 격변의 시기인 1981년 경기도 송추에 위치한 72사단 인사처로 이동했다. 거기서 1981년 2월25일 대통령 선거를 경험했다. “현역들은 부재자투표를 하면 이거를 우체국에 발송을 시켜야 되는데 어디로 가져가느냐 하면 보안대(지금의 기무사령부)로 가져갔다고. 보안대 가면 다 점검을 해, 내용을. 예를 들어 반대표 찍은 사람들은 개봉해서 뜯어내고 거기서 다시 찬성표로 전두환 표를 찍은 거지.” 그는 인사부에 있으면서 부재자투표를 관리했다. “부재자투표가 오게 되면은 본인이 투표를 해서 동사무소, 면사무소로 발송을 시켜야 되거든. 그런데 그 전에 조작을 한 거지. 왜냐면 그것을 내가 투표관리를 했기 때문에 인사처에서 각 연대에다가 연대에서 투표해서 오는 것을 집합을 해가지고 이것을 가지고 원래는 동사무소나 우체국에 가서 발송을 시켜야 되는데, 보안대로 (가져다) 준 거지.” 그는 1976년 8월의 도끼만행사건도 기억난다고 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때는 불의의 사고에 대비해 낮에 쉬고 밤에 근무했다고 회고했다. 1993년 상사로 제대했다. 군생활에서 마음이 떠났다. 사무용품점 관리, 주차장 관리 등 소일하다 지금은 쉰다.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매일 가서 걷는다. 건강하다. 박씨는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라고 했다. 1963년과 67년 대선 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찍었고 그 뒤로는 야당을 찍었다고 했다. 본인은 “골수 야당”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했다. “그 사람이 진짜 경제 발전을 위해서 정말로 우리나라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우리 경제 성장 디딤돌을 만들어준 사람이에요. 야당이고 종북세력들 그런 사람들 박정희 대통령 어쩐다 저쩐다 얘기해도요, 저는 우리나라 영웅이라고 생각해요.” 인생 ‘인생에서 제일 잘한 것’을 묻자 “군생활을 장기복무를 지원한 것”을 꼽았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을 물었다. “내 자랑이 아니라 내가 정규과정을 거쳤다면은 나도 한목소리 낼 만큼 내가 머리가 좀 저기 된(좋은데)…그러지 못했다는 데 후회스럽고 한스럽고 그렇습니다.” ‘자서전이라 생각하고 가족에게 전할 말’이 뭔지 물었다. “나는 평범하게 살았지만 지뜻대로 마음껏 살아봐라. 나는 어린 시절 너무 얽매여 살았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대로 아들 박민씨는 홍보업체 투고커뮤니케이션즈 대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