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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 1책 1권- 1장 문제창출, II장 연역주의와 귀납주의

이윤진이카루스 2015. 1. 29. 13:55

 

 

I

 

귀납법 문제

 

경험과 가설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

I

 

 

I

 

문제 창출

 

귀납법 문제와 구획설정 문제. 이 분석은 두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귀납법 문제와 구획설정 문제.

 

귀납법 문제:

 

우리는 특정 사건들을 관찰할 수만 있을 따름이고 항상 겨우 제한된 숫자의 특정사건을 관찰할 수만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과학들은 자연법칙들과 같은 전칭명제들(universal propositions)을 개진한다; 다시 말해서, 무제한적인 숫자의 사건들에 대하여 틀림없이 참으로 주장되는 명제들. 그런 전제들을 개진하는 데 대한 정당화는 무엇인가? 이 명제들에 의하여 실제로 의미되는 바는 무엇인가? 이 문제들은 개괄적으로 귀납법에 관한 문제를 가리킨다. “귀납법에 관한 문제, 경험과학들이 내놓은 전칭명제들에 관한 유효성이나 정당화에 관한 질문을 의미한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경험에 근거한 경험명제들은 보편적으로 유효할 수 있을까? (혹은 보다 간단하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알 수 있을까?)

 

구획설정에 관한 문제:

 

대부분의 경험과학들은, 그 과학들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형이상학의 자궁에서 태어났다. 그 과학들의 최근 과학-이전 형태는 사변적-철학적이다. 심지어 그 과학들 가운데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 물리학도 아마도 오늘날까지 자체의 형이상학적 과거의 마지막 잔재들로부터 자체를 완벽하게 해방시키지는 못했다. 특히 최근에, 물리학은 혁명적인 정화 과정에 놓였다. 형이상학적 추론은 (예를 들어 뉴튼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 로렌츠[Lorentz]의 정지상태의 에테르[ether at rest]) 가차 없이 제거되었다. 덜 발달한 과학들은 (예를 들어,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물리학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형이상학적 요소들로 혼합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정말로 심지어 형이상학은 비과학적으로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견해조차도 이 과학들과 관련된 몇몇 제창자들에 의하여 명시적으로 배제된다.

형이상학은 올바르게 배제되는 것인가 아닌가? “형이상학경험과학이라는 용어들에 의하여 실제도 의미되는 바는 무엇인가? 특정 한계들을 결정하기 위하여, 엄격한 구분을 확립하는 일이 조금이라도 가능한가? 이 질문들은 개괄적으로 구획설정의 문제를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중요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어떤 형태의 경험주의도 지식론으로부터, 형이상학의 주장에 반대하여 지식론이 경험과학을 확보할 것을 틀림없이 요구한다. 지식론은, 우리가 경험과학들의 서술들과 형이상학적 주장들을 구분할 수 있는 엄격하고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을 (“구획설정의 기준[criterion of demarcation]”) 확립해야 한다. 구획설정과 관련된 문제는 내가 구획설정의 문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의심이 생길 경우에는, 우리가 과학적 서술을 다루고 있는지 또는 형이상학적 주장을 다루고 있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지? (또는 보다 간단하게, 과학은 과학이 아닌 때가 언제인가?)

이 탐구는, ([Hume]) 귀납법 문제구획설정 문제라는 (과학적 지식의 한계들이라는 칸트의 질문) 이 두 가지 문제들이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로 합당하게 지칭될 수 있음을 밝혀야 할 것이다. 구획설정 문제는 우리의 1차적인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다. 구획설정 문제는 이론적-철학적 중요성만을 띠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구획설정 문제는 개별적인 과학들에 대하여, 특히 덜 고도로 발전한 과학들의 연구 실천행위들에 대하여 가장 큰 관련성을 지닌다. 그러나 심지어 철학적-인식론적 관점에서도, 구획설정 문제는 귀납법의 문제를 포함하여 아마도 지식론에 관한 모든 다른 질문들이 환원될 수 있는 핵심적인 문제로 판명된다.

 

인식론적 질문들은, 어떻게 우리의 지식이 생성되는지에 관한 심리학적 질문과는 전적으로 다른 특성을 지닌다. 그 질문은, 과학적 서술들이 발견되거나 혹은 과학적 서술들이 발전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 아니고 과학적 서술들의 정당화와 과학적 서술들의 유효성에 관한 것이다. 정당화 혹은 유효성에 관한 질문으로서의 (칸트: 권리문제[quid juris]?”) 인식론적 질문들은, 사실에 대한 심리학적 (그리고 역사적-유전학적) 질문들(사실문제[quid facti]?”), 다시 말해서 지식의 발견에 관한 질문들과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현재의 저술에서, 인식에 관한 사실적이고 심리적 및 역사적-유전학적 질문들은, 이 질문들을 인식론적 문제 창출로부터 분리하여 분석으로부터 배제하기 위하여 필요한 범위까지만 토론될 것이다.)

지식론이 사실에 관한 질문들이 아니라 유효성에 관한 질문들을 독점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견해로 인하여, 말하자면, 지식론은 경험과학들의 일반적인 방법론이 된다. 왜냐하면 과학에서의 방법은 어떤 것이 발견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것이 정당화되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II

 

연역주의와 귀납주의

 

 

2. 해결책은 어떻게 얻어지는지에 관한 언급과 해결책들의 예비적 제시. 귀납법의 문제를, 그러나 훨씬 더 많이 구획설정의 문제를 지식론의 근본적인 문제들로 우리가 지칭한다면 우리는 정당한가?

지식론을 경험과학들의 방법론으로서 간주한다면 우리는 정당한가?

분명히 이 질문들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는 분석을 통해서 답변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런 분석에는, 결과적으로, 역사적 관심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런 분석은, 반복적으로 지식론에 의하여 다루어졌던 전형적인 문제들이 귀납법의 문제로 환원되어 구획설정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분석은 또한, 이 문제들이 방법론적 문제들로서 간주될 것임을, 그리고 그런 견해는 생산적인 견해임을 밝혀야 할 것이다.

다른 이유들 때문이 아니라면 이 이유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인식론적 접근방식들의 제시와 비판에 많은 주목이 모아질 것이다; 그러나 항상, 이 비판을 생산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긍정적 질문들까지, 비판을 받는 입장들의 기초를 이루는 방법론적 질문들까지 관통하는 노력.

여기에서 옹호되는 견해에 따라서, “인식론 문제들은 두 가지 무리로 분리될 수 있다. 첫 번째 무리는 방법론적 질문들을 포함한다; 두 번째 무리는 사변적-철학적 질문들을 포함하는데 그 질문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방법론적 문제들에 대한 오역(誤譯: misinterpretations)으로서 기술된다. 대부분, 전형적인 인식론적 편견들(예를 들어, 심리주의적, 귀납주의적, 논리주의적 혹은 언어-비판적인 편견) 이 오역들에 대하여 책임이 있을 수 있다. 이 견해가 정당화된다면, 인식론적 방법의 생산성 및 인식론적 문제의 성공적인 창출의 생산성은 두 번째 무리에서 나온 질문들을 첫 번째 무리에서 나온 질문들로 대체함을 허용함으로써 증명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식론적 오역(誤譯: misinterpretations)을 사이비-문제들로서 묵살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오역(誤譯: misinterpretations)의 기초를 이루는 진짜이면서 구체적인 방법론적 문제들 확인하여 해결함으로써.

다음 비판적이고 긍정적인 분석들이 통일된 관점에서 이해되어 평가되도록 하기 위하여, 이 저술에서 옹호되는 가장 중요한 인식론적 입장의 요점들이 이제 간단하게 강조될 것이다. 그 요점들은 이 지점에서 심층적으로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분석 자체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47절 참조).

 

a) 지식론의 방법에 관하여: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라는 용어는, 인식론적 주장들과 개념들이 경험과학들의 실제 정당화 절차를 통하여 배타적으로 비판적으로 검토될 수 있고 검토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의미한다. 방법론적 방법(9절에 제시된 이유들 때문에) “초월적 방법(transcendental method)”으로 지칭될 것이다. 지식론은 과학에 관한 과학이다. 지식론은, 개별적인 경험과학들이 경험적 실제와 관련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개별적인 경험과학들에 관련된다; 초월적 방법은 경험적 방법과 유사한 것이다. 지식론은, 따라서, 이론적 과학일 터이다. 지식론은 또한 자유 조항들을 (정의[定義: definition]와 같은) 포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론은 자의적인 규약들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경험과학들의 실제적이고 성공적인 방법들과 비교하여 반증될 수 있는 서술들로 구성된다. 모든 다른 인식론적 방법들은 (심리학적, 언어-비판적, 기타 등등) 초월주의에 의하여 완전히 물론 적대자의 입장 안에 있는 내부적 모순들의 폭로인 논리적 비판을 제외하고 배제된다.

 

b) 인식론적 해결책에 관한 근본적인 개념들:

 

여기에 개진된 견해는 급진적인 연역주의로 지칭될 것이다. 그 견해는, 정당화에 관한 모든 과학적 방법들이 예외 없이 엄격하게 논리적인 연역에 근거한다는 것과 과학적 방법으로서 여하한 종류의 귀납도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지식론들은, 연역의 (논리적 추론) 중요성과 귀납의 (일반화) 중요성을 어떻게 지식론들이 평가하는가에 따라서, 연역주의적이거나 귀납주의적 지향을

지닐 것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고전적 합리주의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엄격하게 연역주의를 지향하는 (자체의 모형은 기하학적 연역이다 [유클리드]) 반면, 고전적 경험주의는 귀납주의적이다. 급진적인 귀납주의적 입장들은 ([Mill]의 입장과 같은) 연역에 의미가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연역될 수 있는 것은, 귀납이 주요 전제들에게 애당초 놓아둔 것일 따름이라고 주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지어 경험적-과학적 방법을 연역과 귀납의 종합으로서 규정하려고 노력하는 중간 입장들도 (제번스[Jevons]의 입장과 같은) 여기서 귀납주의적으로서 배척될 것이다. 여기서 옹호되는 연역주의적 견해는, 귀납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귀납적 방향에서 다시 말해서 한 가지 이론의 사소한 전제들로부터 그 이론의 주요 전제들로 나아가는 유일하게 수용 가능한 추론들은, 주요 전제들로부터 연역된 결론들의 오류를 증명함으로써 주요 전제들의 오류를 증명하는 것인 부정논법(modus tollens)연역적 추론들이다.

(엄격하게 연역주의적 지식론이라는 개념은, 일사불란하게 적용된다면, 인식론적 문제들에 대한 간단한 해결책들을 낳는다. 다음 고찰들 모두는 이 개념에 근거한다.)

연역주의 및 귀납주의 배척의 추가 결과는 가설주의(hypotheticalism)”이라는 용어에 의하여 나타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험-과학 이론들은 (전칭 경험서술들) 잠정적인 추정, 혹은 근거 없는 예상* 이상일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론들에 대한 경험적 검증전칭 경험서술들의 단칭 경험서술들로의 환원 (귀납) - 논리적으로 수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진된 입장은, 경험만이 경험서술의 참이나 거짓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자체의 근본적인 원칙에 (경험주의의 근본적인 주장) 의하여 경험주의적이다.

여기서 옹호되는 연역주의적-경험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한편으로 자연법칙들과 이론들과 전칭 경험서술들 및 다른 한편으로는 단칭 경험서술들 (“경험적 토대”: 11절 참조) 사이에는 단지 한 가지 관계만 있는데 즉, 논리적 연역의 관계이다. 이론들의 도움을 받아서, 예측들은 경험을 통하여 연역되고 시험된다.

그리하여 자연법칙들은 예측들의 연역에 대한, 다시 말해서, 단칭 경험서술들의 연역에 대한 연역 토대들을 구성하는데 그 토대들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경험을 통하여 결정될 수 있다. 전칭 경험서술들, 자연법칙들 그리고 이론들은, “연역적 토대들이 직접적으로 시험될 수 없지만 단지 간접적으로 자체의 결과들을 통해서 시험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지니는 저 논리적 속성들을 덧붙여 오직 저 논리적 속성들 지닌다: 전칭 경험서술들, 자연법칙들 그리고 이론들은 (31절에 추가적으로 설명될 바와 같이) 경험적으로 오류로 판명될 수 있지만 검증될 수는 없. 전칭 경험서술들, 자연법칙들 그리고 이론들은 귀납적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반면, 항상 (부정논법[modus tollens]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경험에 의하여 부정될 수 있다.

(근본적인 연역주의적 아이디어가 일관되게 적용된다면, “경험이라는 개념은 방법론적인 개념으로서 정의[定義]될 수 있다.)

전칭 경험서술들에 대한 일방적인 오류증명가능성(falsifiability)이라는 개념은, 연역주의라는 개념에 덧붙여, 이 분석의 두 번째 근본적인 개념으로서 규정될 것이다. 초기의 인식론적 시도들 대부분은 (아마도 유일한 예외는 확률 입장들이다: 12절 이하 참조) 모든 참인 경험서술들은 틀림없이 완벽하게 결정될 수 있다는 (검증될 수 있거나 또는 오류로 증명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추정을 공유한다; 혹은 더 정확하게: 경험적 검증과 경험적 오류증명 모두는 모든 참인 경험서술들에 대하여 틀림없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여기서 토론되는 것이 논리적 가능성임을 경험적 실제라기보다는 고려하여, “검증가능하거나 오류증명 가능한 서술들대신에 검증가능하고 동시에 오류증명 가능한 서술들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이 더 나을 터이다.) 모든 참인 경험서술들은 틀림없이 완벽하게 결정될 수 있다는 이 근거 없는 추정은, 심각한 인식론적 문제들을 야기한다. 이 추정이 배척되고, 또한 부분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경험서술들을 수용하면, 인식론적 문제들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이 문장의 원문은 If this presupposition is abandoned, thus also admitting partially decidable empirical statements, then the epistemological problems can easily solved인데 중간에 들어간 분사구문 admitting partially decidable empirical statements의 주어가 불분명하여 분사구문으로 쓸 수 없고 partially decidable empirical statements are admitted로 표현하는 것일 올바를 듯하다. 한글번역자). (부분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경험서술들은, 논리적인 이유들 때문에 검증될 수 없고 동시에 오류로 증명될 수도 없지만 배타적으로 검증될 수 있거나 보기, “바다뱀이 있다” - 혹은 배타적으로 오류 증명될 수 있는 서술들이고, 위에 언급된 것에 따라서 후자(後者)는 모든 자연법칙들을 포함한다).

 

c) 귀납법 문제에 관하여:

 

전칭 경험서술들의 유효성에 관한 문제는, 전칭 경험서술들이 검증될 수는 없지만 단지 오류 증명될 수 있다고 제안함으로써 잠정적으로 답변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당화에 관하여 과학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방법들을 토대로, 전칭 경험서술들에는 긍정적인 정도의 유효성이 부여될 수 없지만 부정적인 정도의 유효성은 부여될 개연성이 높다. 전칭 경험서술들을 시험하는 방법은 오류증명을 하려는 시도들로 구성되는데, 다시 말해서, 완벽하게 결정될 수 있는 예측들을 연역함으로써 이다.

 

d) 구획설정 문제에 관하여:

 

오류증명가능성의 기준은 구획설정의 기준으로서 작용할 것이다. 경험적 실제에 의하여 부정될 수 있는 서술들만 그런 실제에 대하여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다시 말해서, 서술들이 그 조건들 아래서 경험적으로 부정될 수 있는 조건들을 우리가 명시할 수 있는 서술들.

오류증명가능성의 기준에 따라서, 다른 서술들이 (일방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있다 서술들[there-is statements]을 포함하여) - 그 서술들이 논리적으로 항진명제(恒眞命題: tautologies)(수학적 서술들과 같은 분석서술들) 아닌 한 - 경험-과학적 서술들로부터 형이상학적 서술들로서 구획 설정되는 반면, 완벽하게 결정될 수 있고 배타적으로 오류 판명될 수 있는 서술들은 경험-과학적이라고 선언된다.

응용수학과 순수수학 사이에서의 아인슈타인의 구획설정과 많이 유사하게, 오류증명가능성의 기준은 순수이론으로부터 응용이론을, 그리고 형이상학적 (그리고 항진명제적) 이론체계들로부터 경험적 이론체계들을 구획 설정한다. 수학 관련 서술들이 실제에 관하여 언급하는 한, 그 서술들은 확실하지 않고, 그 서술들이 확실한 한, 그 서술들은 실제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서술은 경험과학에 관한 다음 정의(定義: definition)로 일반화될 것이다 (우리가 확실하지 않다오류증명 가능한이나 부정될 수 있는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과학서술들이 실제에 관하여 언급하는 한, 그 서술들은 틀림없이 오류로 판명될 수 있고, 그 서술들이 오류로 판명될 수 없는 한, 그 서술들은 실제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제시된 해결책에 관한 간단한 근본적인 개념들은 (“연역주의” - “경험주의” - “일방적인 오류증명가능성”) 비판적이고 긍정적으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시도된 모든 인식론적 해결책은, 정확하게 여기에 제시된 해결책으로부터 편차가 발생하는 저 지점들에서 (내부적, 내재적) 문제들과 조우함을 밝힘으로써 비판적으로. (지식론에서는, 단순성은 진리의 징표이다[simplicitas sigillum veri]라는 언명이 적용될 뿐만 아니라 또한 심지어 난해함은 거짓을 드러낸다[difficultas indicium falsi]라는 언명 또한 적용된다.) 근본적인 개념들의 (특히 오류증명가능성의 기준의) 일관적인 적용이, 개별과학들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사용되는 방법들과 일치하는 과학적 방법의 이론에 대한 연역을 허용함을 밝힘으로써 긍정적으로.

 

3.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연역주의와 귀납주의. 여기에서 옹호되는 지식에 관한 연역주의적-경험주의적 이론은 두 가지 고전적 지식론들의 종합으로서 재현될 것이다: 합리주의의 요소들과 경험주의의 요소들의 종합으로서.

고전적 합리주의는, 실제에 관하여 서술하는 명제들의 참이나 거짓이 (특정 조건하에서) “이성을 토대로”, 선험적으로결정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경험을 언급하지 않고. 이 기초적인 추정으로부터, 고전적인 합리주의는 (예를 들어, 스피노자) 연역주의적 결론들을 도출한다. 합리적으로 알려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의 보편적인 기본법들이다; 다른 서술들은 그 기본법들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된다.

고전적 경험주의는 반대의 관점을 의미한다. 고전적 경험주의의 근본적인 주장은, 경험서술의 참이나 거짓은 단지 후천적으로”, 즉 경험에 의하여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주장으로부터, 고전적 경험주의는 귀납주의적 결론들을 도출한다. 고전적 경험주의는 이 주장으로부터 자연법칙들은 틀림없이 경험으로부터 도출될 즉, 연역될 수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개진된 견해는 근본적인 경험주의적 주장을 고전적 합리주의의 연역주의적 방법과 결합시켜서 이런 방식으로 강조하여, 엄격한 의미에서의 합리주의적인 근본적 추정과 (경험적) 귀납주의 양쪽 모두를 배격한다.

문제에 대한 칸트의 고전적 용어사용법과 창출을 사용하여, 한편으로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의 대비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시된 종합이 이제 더 정확한 용어들로 기술될 것이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의 논쟁은, 실제에 관하여 서술들이 지닌 유효성의 토대 문제와 관련된다.

경험서술들은 여기서 순수논리서술들과 대비될 수 있다. 내부적으로 일관성이 없는 서술의 거짓은 (모순) 논리적 근거들로 주장될 것이다. 모순은 선험적

방식으로 (경험을 참고하지 않고) 거짓으로서 밝혀질 것이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는 항진명제(恒眞命題: tautology)의 선험적 진리에 관하여 또한 그러한 바와 같이, 이것에서 동의한다. 항진명제(恒眞命題: tautology)는 자체의 부정이 상반되는, 즉 모순인 서술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반론의 거짓을 주장하는 모든 서술은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이다.)

그리하여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의 논쟁은 항진명제적이거나 분석적 판단들의 유효성에 관련되지 않고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모두에 의하여 인정된다), -논리적 경험서술들의 유효성에만 관련되는데, -논리적 경험서술들은 종합판단들(synthetic judgments)이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는 표 1(내가 알아낸 바, 레오나르트 넬존[Leonard Nelson]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도움을 받아서 재현될 것이다.

1

 

                                                                                                                                    (논리적 구분)

                                                                                                분석판단            종합판단

(유효성의 토대에     선험적                                                                 +                   ?

의한 구분)              후천적                                                                  -                   +

                                                                                                                                                 

 

(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분석판단 종합판단의 구분을 토론함으로써 시작하자.

이 구분에 대한 (칸트의) 기준은 순전히 논리적인 기준이다:

분석판단들은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이다 (칸트에 의하여 이미 언급되었고 쇼펜하우어에 의하여 강조된 바와 같이); 분석판단들은 모순의 원리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서, 분석판단들에 대한 부인이나 부정은

모순이다. 분석판단들은 논리적 변환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증명될지도 모른다.

대조적으로 종합판단은, 정의(定義: definition)에 의하여, 자체의 진실성이나 허위성이 논리 만에 의해서는 결정될 수 없는 판단이다: 종합판단은 반론될 수 있다 즉, 종합판단은 내부적으로 모순되는 서술이나 반론에 도달하지 않고도 반론될 수 있다. 논리적으로 종합판단에 대한 부정은 모순이 없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오늘 무드셀라(Methuselah: 나이가 많은 사람)300번째 생일을 기념하고 있다면 300세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서술이 분석판단인 반면, “오늘 무드셀라가 최고의 건강으로 300번째 생일을 기념하고 있다와 같은 서술은 (거짓) 종합판단인데 왜냐하면 그와 같은 서술은 관련된 개념들의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을 논리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분석서술들은 선험적으로 유효하다는 서술도 또한 분석판단인데 이유인즉 그 서술은 분석판단의 정의(定義: definition)로부터 귀결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후속 분석들에 대하여 상당히 중요할 보기가 (인과성의 문제) 있다. 다음 서술도 또한 분석판단이다 (혹은 정의[定義: definition]):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제시한다는 것은 그 설명을 자연법칙들로 환원함을 의미한다; 자연법칙들로부터 그 설명을 연역함을; 자연법칙들로부터 그 설명을 연역적으로 도출함을.”* 동일한 방식으로 원칙적으로, 모든 자연적 사건들은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라는 서술은 분석적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특정 자연적 사건을 (심지어 기적”; 우리에게는 문제의 단칭서술을 일반화할 필요만 있을 따름인데, 그것은 항상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연역하는 것을 허용하는 가설을 특별한 목적을 지닌 방식으로 도입하는 것은 항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형태로, 인과적 서술(causal statement)종합판단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자연적 사건들은 자연법칙들로부터 연역될 수 있음을 통하여 틀림없이 예측 가능하다”; 이유인즉 과학적 예측들이 실패한다는 것은 흔한 경험인고로, 연역적 예측들에게 극복될 수 없는 장애물들을 부여하는 자연적 사건들이 있다는 추정은 분명히 논리적으로 모순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로, 실제로 자연법칙들이 다시 말해서, 예외 없이 적용될 수 있어서 예측들에

대한 토대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보편적 규칙들이 있다는 심지어 훨씬 더 겸손한 주장도 의심할 바 없이 종합판단이다;* 이유인즉, 이런 의미에서 자연법칙이 전혀 없다고, 다시 말해서 예외가 없는 듯이 보이는 모든 규칙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불완전하다고 추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5절 및 11절 참조).

이 사례들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구분에 대한 적정한 예시를 틀림없이 제공한다. 이 사례들은 또한, 실제에 관한 (경험의 세상이나 자연에 관한) 모든 서술들이 종합판단들임을 보여준다. (반대로 모든 종합판단들이 경험서술에 대한, 경험적 실제, 기타 등등에 대한 개념의 밀착 분석뿐만 아니라 경험서술들인지의 문제는 나중에 구획설정의 문제를 분석하는 상황에서 - 언급될 것이다; 초기 언급들 또한 경험적 토대를 토론하는 11절에서 발견될 수 있다. 당분간, “종합판단들경험서술들은 동의어로 사용될 것이다.)

분석판단들과 종합판단들의 구분이 순전히 논리적인 판단인 반면, 1에서의 두 번째 구분은 선험적(a priori) 서술들과 후천적(a posteriori) 서술들의 구분 특별히 인식론적 구분이다. 선험적(a priori) 후천적(a posteriori)이라는 개념들은 판단의 유효성, 판단을 정당화하는 방법 및 판단이 지닌 유효성의 근거와 관련된다.+1

경험이 판단이 지닌 유효성의 근거라면 판단의 유효성은 후천적이다 (혹은 경험적). 예를 들어 나는 내일 비가 올 것인지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험만이 나의 의심이 옳게 판명되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나중에, 후천적으로)

그러나 우리는 내일 비가 올지 오지 않을지를 선험적으로 (처음부터,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주장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 주장이 지닌 유효성 근거는 논리적이다 (배중률[排中律: the law of excluded middle]*3).

선험적(a priori) 후천적(a posteriori)이라는 용어는 완벽하게 같은 수준은 아니다. “후천적(a posteriori)이라는 용어는 유효성에 관한 확실한 근거를, 즉 경험에 의한 경험적 시험이나 검증을 가리키는 반면, “선험적(a priori)은 단지 문제의 서술이 지닌 유효성이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의 서술이 지닌 유효성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그런 상태의 선험적(a priori)이라는 용어에 의하여 지적되지 않는다. 한 가지 선험적(a priori)유효성의 근거는, 여하한 경우에도, 논리적이다 (논리의 법칙[the laws of logic]). “선험적(a priori) 후천적(a posteriori)의 대비는, 논리학에 덧붙여, 선험적 방식으로 판단들을 정당화하는 다른 방법들이 있는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이것은 숙제로 남는다.

모든 분석판단들은, 여하한 경우에도, 선험적으로 유효하다 (1에서 “+”로서 밝혀진). 그 판단들은 논리적 근거들을 토대로 유효하다: 정말로 그 판단들은 아마도 심지어 논리적 서술들로서 정의(定義)될 것이다. 그 판단들은 경험을 통하여 결정될 수 없다; 그 판단들은 여하한 경험과도 양립할 수 있다.

이것으로부터, 후천적으로 유효한 모든 서술들은 틀림없이 종합서술들이라는 것이 (1에서 후천적 선 위에서 “-”“+”로서 밝혀진) 귀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선험적으로 유효한 종합서술들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험적인 종합서술이 있는가? 이것은 [고전적] 합리주의* [고전적] 경험주의 사이에서 논란이 많은 안건이다.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이 질문할지도 모른다: 경험 외에 비-논리적 서술들에 대한 유효성의 근거가 있는가? 이유인즉 종합판단들이 선험적으로 유효하다면, 경험적 시험 방법과, 종합판단들 때문에 제외되는 논리적 방법에 덧붙여 서술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또 다른 방법이 틀림없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종합판단은 결국 자체에 대한 부정이 또한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에 의하여 정의(定義)되어서 논리는 종합판단들이 지닌 유효성의 근거로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합리주의는 선험적 종합판단들이 있는지의 문제에 긍정으로 대답한다.

그리하여 합리주의는, 경험의 도움을 받지 (혹은 경험을 참고하지) 않고 자체의 대한 부정이 전혀 모순적이지 않은 서술들의 (선험적) 진실성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리하여 합리주의는 유효성의 근거로서 논리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유효성의 근거 없이 지내야 하든지 혹은 어떤 다른 그런 근거를 선험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정말로 합리주의는 자체가 증거에서 그런 근거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 오성에 즉각적으로 명백하다(is immediately evident to the understanding)”합리적 근거들을 토대로 참이다라는 명제는 직감적으로 이해된다”. (모든 그런 추정들은 자기-증거의 교설이라는 제목 아래 포함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경험주의는, 심지어 고도로 합당한 종합판단들도 거짓을 판명될지 모른다고 주장하고 (다시 말해서 이것이 항상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사실상 그런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분석판단들에 대한 유효성의 근거로서의 논리에 덧붙여 경험주의는 경험에 의한 경험적 검증이나 시험 외에 유효성의 근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경험주의는, 종합판단들이 선험적으로 유효할 수 있다는 전제를 거부한다.

 

또한 칸트에 의하여 강조된 바와 같이,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고전적 합리주의의 모형이다 (칸트는 교조주의[dogmatism]에 관하여 언급한다”). 과거에는, 기하학의 주요 전제들이 (“공리들[axioms]”이나 공준들[postulates]”) “즉각적으로 합당한(immediately plausible)”으로서 규정되곤 했다. 아무튼 기하학의 중요 전제들은 증거나 귀납적 정당화 없이도 이론체계의 꼭대기에 놓이고, 모든 다른 서술들은 순전히 논리적인 방식으로 (공리적-연역적 방식) 그 기하학적 주요 전제들로부터 연역된다.

합리주의는 자체의 이론체계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들을 (기하학적 공리들의 방식으로) 전제하는데, 또한 순전히 논리적 연역을 통하여 공리적-연역적 방식으로 전체 과학적 구조를 획득한다. 고전적 합리주의에게는, 공리적-연역적 방법이 과학서술을 정당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대조적으로, 고전적 경험주의는 가장 보편적인 서술들 (공리들) 자체가 다른 서술들에 대한 정당화 기초로서 작동하기 전에 먼저 정당화될 것을 틀림없이 요구한다. 고전적 경험주의는 가장 보편적인 서술들이 경험에 근거할 것을 요구한다. 경험서술들로부터의 경험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단칭서술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서술들로부터의 전칭서술의 도출은 그러나 귀납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인 합리주의적 개념은 - “선험적인 종합판단들이 있다” - 자체가 연결된 연역주의라는 개념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이 두 가지 개념들은 전혀 논리적으로 서로 묶이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동일한 방식으로, 귀납주의는 경험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으로부터 (근본적인 주장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그런 분리로 인하여 가능하게 되는 결합들은 간단한 표를 (2) 통하여 가장 잘 예시될 수 있다.

네 가지 결합이 가능하다:

1. 고전적 합리주의인데, 연역주의적이자 합리주의적이다.

2. 고전적 경험주의: 귀납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이다.

3. 연역주의적 합리주의: 이 결합 역시 몇 가지 철학적 이론체계들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한 가지 사례는 비트겐슈타인의 구상일 터인데, 현재의 분석에서 상세한 비판의 주제가 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구상은 엄격하게 귀납주의적이고 (44절 참조), 심지어 의도적이 아니라할지라도, 합리주의적이다 (45절 및 46절 참조).

 

2

                                                                                                                                   귀납주의              연역주의

 

합리주의                                                                                                    3                     1

경험주의                                                                                                    2                     4

 

4. 마지막으로, 여기에 개진된 견해는 엄격하게 연역주의적인 관점을 엄격하게 경험주의적인 관점과 결합한다. 합리주의처럼, 이 견해는 자연과학의 가장 보편적인 서술들이 (공리들) 논리적이거나 경험적인 정당화 없이 (잠정적으로) 채택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합리주의와 달리, 자연과학의 가장 보편적인 서술들이 이라고 (그 서술들의 자명성을 고려하여) 선험적으로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화되지 않은 예상들이나 잠정적인 추정들로서 [추측들] 의문시되는 것으로 채택될 따름이다. 그 서술들은 경험에 의해서만, 엄격하게 경험주의적인 방식으로, 입증되거나 반박된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경험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서술들을 (예측들) 연역함으로써.

이 지식에 대한 연역주의적-경험주의적 이론이, 고전적 합리주의가 옛 구상에 의하여 알려지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하학의 현대적 구성에 의하여 알려짐을 우리는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유클리드적 기하학이 발견되기 이전에, 유클리드의 공리들은 즉각적으로 합당하선험적으로 인 것으로서 유일하게 가능한 공리들이라고 충분히 간주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적 발전 상황들은,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많은 가능성들 가운데서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을 대표하여 다른 선험적으로 동등하게 증명되는 이론체계들이 유클리드의 이론체계와 동일한 비-모순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음을 밝혔다. 다양한 이론체계들이 자유롭게 상정되는 것으로 (논리학의 한도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되는) 이해되어야 해서 그 이론체계들 중 어떤 이론체계에도 선험적 우선권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

어느 이론체계가 실제적 공간에 가장 잘 대응하는지의 문제는 경험에 의하여 결정될 수 있을 따름이다: 경험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결과들을 연역함으로써 (“예측들”). 실용적 목적들과 지구의 면적에 대해서는 유클리드의 이론체계가 단연코 가장 합당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그러나 이론물리학과 우주적 면적들에 관한 특정 문제들을 다루는 목적들에 대하여서는 이 이론체계가 부적당한 것으로 판명된다 (30절 참조).

우리가 기하학에 관한 이 구상을 일반적인 자연과학에서의 이론형성에 적용한다면, 자연법칙들은 (자연과학 이론의 공리들) 또한 자유롭게 상정된 서술들로서 (혹은 유사한) 또한 간주될 수 있다. 아무튼 우리는, 자연법칙들을 경험에서 도출되지 않는 추정들로서가 아니라 그 법칙들이 야기하는 결과들을 통하여 경험에 의하여 입증되거나 반박되는 논리적 구축물로서 잠정적으로 채택되는 추정들로서 볼 것이다.

자연과학의 이론체계들의 경우에서도 또한, 논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몇 가지 이론체계들이 항상 있다. 특정 시간에 토론되고 있는 경쟁하는 공리적- 연역적 이론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데는, 연역된 예측들에 대한 경험적 검증이나 오류증명을 통하여 경험이 판단을 내린다.

이것이 개략적으로, 연역주의적-경험주의적 견해가 공리적-연역적 이론체계들 또한 그 공리적-연역적 이론체계들이 실제에 적용되는 한 경험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결정될 있을 따름이라는 경험적 원리와 연결되어, 기하학에 관한 공리적-연역적 이론체계들을 향한 합리주의적 지향의 심층적 발전으로서 아마도 의미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가 지닌 요소들의 종합이다.

 

칸트의 지식론은 (그의 친구 J.H. 람베르트[Lambert]의 사전작업은 별도로 하고)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의 고전적 대치를 비판적으로 종합하려는 최초의 시도이다. 칸트는 이 종합을 통하여 지식의 형식적이고 재료적인 면을 결정하는 임무를 스스로 맡았다. 합리주의의 요소들 떠맡음으로써 형식적인 면을, 경험주의적 요소들을 떠맡음으로써 재료적 면을. (아마도 이 경향은, 그의 유명한 표현인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들이 없는 직감들은 맹목적에서 뿐만 아니라 여기 11절에 인용된 첫 번째 두 가지 보편적인 경험적 사고의 공준들[公準: Postulates]”에서 자체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표현된다.)

이런 방식으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내가 여기서 (1) 지식론의 근본적인 문제들로 지칭한 본질적으로 동일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초월적 변증론이 구획설정의 문제에 몰두하는 반면, “초월적 분석론은 귀납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 ([Hume]이 지녔던 문제의 형태로) 전념한다. 칸트 자신은 전자(前者)를 더 중요한 문제로 (후자[後者]가 아마도 더 어려운 문제라할지라도) 간주하는 듯하다. 합리주의가 주장하는 것들을 - “순수이성으로부터의 지식” (자명성의 원리) - 비판하여 과학적 지식을 경험의 영역에 국한시키는 것은 결국 전체 연구에 자체의 제목을 부여하는 것이다.

내 견해로, 칸트의 초월적 분석론, 귀납의 문제에 대한 그의 해결책은 만족스럽지 하다. 칸트가 시도하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의 종합은 합리주의에 양보함으로써 고전적 경험주의의 인식론적 주장들을 제한한다. 그러나 이 양보는 내가 보기에 지나치다. 지식의 형식적인 요소를 고려하기 위하여 (모든 지식은 합리적으로 형성된다, 모든 지식은 이해가능하거나 유의미한 서술들의 형태를 띤다), 칸트는 합리주의에게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합리주의의 재료적인 선험적 종합판단들을 배척하는 반면 그는 수용될 수 있는 선험적 판단들을 순전히 형식적 판단들에 (사례: 인과성의 원리) 국한시킨다. 그는 나아가, 유효한 것으로서 수용되어야 하는 모든 형식적인 선험적 종합판단들에 대하여 (선험적) 정당화를 요구하고, 단순한 증거의 도움과 그와 같은 것을 배척한다. 선험적 종합판단들에 대하여 그런 정당화를 요구함으로써 (그는 초월적 연역에서 그런 판단들의 정당화에 대한 방법을 발견한다, 9절 참조) 그리고 선험적 종합판단들을 형식적 판단들에 국한시킴으로써 (재료적 판단들은 경험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칸트는 자신이 독단적합리주의로부터 충분히 거리를 두었다고 믿는다.

(심지어 이 형식적 선험주의에서도, 연역주의적-경험주의적 견해는 여전히 [고전적] 합리주의의 [영향]을 띤다. 정말로 연역주의적-경험주의적 견해는, 선험적으로 유효한 종합판단들은 없다는 경험주의적 주장을 펼친다; “선험주의 비판”, 10절과 11절 참조.)

분석론과 직접적으로 대비되어, 구획설정의 문제에 대한 칸트의 해결책을 포함하는 초월적 변증론은 경험주의에 양보를 함으로써 합리주의의 인식론적 주장들을 제한한다. 그러나 이 양보는 매우 급진적이다. 칸트는 여기에서 옹호되는 종합과 (나의 견해로, 엄격하게 경험주의적 특성을 지닌) 대체로 동일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의 종합을 전개한다. 칸트는 과학적인 순수이성의 개념들 사용을 경험의 영역에 국한시켜, 경험의 영역을 경험의 규칙들이 지닌 진실성에 대한 시금석으로서 언급하는 반면 이 개념들문제가 있는 것으로서 설명한다.

칸트가 제시한 해결책들이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칸트의 입장은 틀림없이 전체적으로 옹호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칸트의 입장은 정확하게 그의 교설 중에서 결정적인 교설로 흔히 생각되는 저 요점을 토대로 비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 대한 현대인들의 경멸에 대하여 현재의 작업이 칸트의 문제 창출과 그의 방법, 그리고 또한 그가 제시한 해결책들 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들을 옹호할 것임을 나는 여기서 강조하겠다.

 

무엇보다도, 나는 현대의 실증주의자들에게 (고전적 경험주의의 계승자들)반대하는 연역주의적 관점을 옹호해야겠다; 특히 논리실증주의(러셀, 슐릭[Schlick], 비트겐슈타인, 카르납[Carnap] 그리고 다른 사람들) 반대하는. 나는 논리실증주의실용주의적 기사문에서 [블럼버그<Blumberg>와 파이글<Feigl>에 의하여] 만들어진 명칭 칸트 이후 칸트가 지녔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가장 흥미로운 시도들 중 한 가지 시도라고 생각한다. 논리실증주의는 지식의 형성적 요소들이 두드러지게 중요하다고 여긴다. 지식의 형성적 요소들은 논리적 형태들인데, 특히 지식에 관한 경험적 재료들이 나타나는 논리기호학적 상관관계론의 형태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실제적인 (, 순전히 형식적이 아닌) 지식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다음 토론에서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비판, 특히 슐릭(Schlick)과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비판은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 논리실증주의는 또한 자체가 지닌 전형적으로 귀납주의적 편견에 의하여 패배하는 것이 밝혀질 것인데, 그 귀납주의적 편견은 아마도 어떤 다른 지식론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지식론에서처럼 그렇게 일관적으로 상세하지 않다.

 

4. 지식에 관한 연역주의적 심리학의 가능성. 지식에 관하여 지배적인 심리학은 귀납주의적이다; 그리고 다른 귀납주의적 심리학처럼, 지식에 관하여 지배적인 심리학은 또한 다소 명시적으로 감각론적(sensualist)이다.

지식에 관하여 지배적인 심리학은, 단일 경험들로부터 특히 지각적

경험들 출발하여 일반화를 통하여 우리가 지식과 경험을 얻는다고 추정한다. 예를 들어 지식에 관하여 지배적인 심리학은, 우리가 경험들을 그 경험들의 유사성에 따라서 (“유사성을 통한 연상에 의하여) 배열하여 그리하여 유사성의 순환들추상의 집단들에 도달한다고 추정한다 [카르납<Carnap>].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과학의 개념들과 지식에 최종적으로 도달할 때까지 단칭(singular)에서 전칭(universal)까지 항상 귀납적 방향으로 진보하여 올라간다.

이제, 심리학적 귀납주의가 주장하는 것이 사실상 진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분명히 현재 분석 과업 중 한 가지 과업이 아니다. 심리학적 귀납주의가 옳은지 아니면 그른지에 관해서는 여기서 어떤 주장들이나 추정이 제기되지 않을 것이다.

중립적 관점이 그런 질문들과 관련하여 채택될 것이다. 단지 한 가지 일만 요구된다: 지식 발견에서 사실의 문제들과 지식론에서 유효성의 문제들의 엄격한 분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이 중립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지식 심리학에 대한 지식론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지식에 관한 귀납주의적의 심리학이 유일하게 생각될 수 있는 것이나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일이 긴요하다. 지식에 관한 연역주의적 심리학도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져야 한다.

그리하여 이 절에서의 논증들은, 그런 상태로서의 지식에 관한 귀납주의적 심리학에 반대하는 방향을 잡는 것이 아니라 귀납이 지식습득에 대하여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라고 주장하는 귀납주의적 편견에 반대하는 방향을 잡는다. 그런 개념은, 지식에 관한 심리학으로부터의 지식론의 독립에 매우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터이다. 사실들이 한 가지 이상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경우들에서만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에 관한 심리학적 질문들과 유효성에 관한 인식론적 질문들 사이에서 여기서 옹호된 엄격한 구분은 적용 불가능할 터이다. (종합판단들은 논리적 반론들이 되지 않고도 틀림없이 반론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식을 얻는 방식에 관하여 사물들은 반드시 심리학적 귀납주의가 주장하는 방식이라고 우리가 전제한다면, 유일한 일관적인 상정은 사실들뿐만 아니라 논리적이거나 인식론적인 고찰들도 이 문제를 결정할 것이라는 점일 터이다.

지식의 습득 방법의 문제에 관한 귀납주의적 편견은 또한 반드시 인식론의 분야에서 귀납주의적 편견을 초래할 것이다.

다만 후자(後者) 편견에게만 여기서 반론이 제시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러나, 이 편견의 심리학적 뿌리로 돌아가서 심리학적 연역주의가 심각한 지성적 난제들과 경쟁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밝히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심리학 분야로의 이 화제이탈은 심리학주의에 대한 양보로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심리학적 논증들은 토론에 도입되지 않고 있다; 반대로: 인식론적 관점의 자주성은 보호되고 있다 (이 문장에서 반대로[On the contrary] 다음에 콜론이 원문에 표기되어 있으나 쉼표이어야 할 것이다. 한글번역자).

 

이 주요 과업에 덧붙여, 현재의 절에는 추가적인 (덜 중요하다할지라도) 목적이 있다: 현재의 절은, 연역주의와 귀납주의 사이의 갈등이 우리의 지식과 관련된 모든 분야들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노력한다: 심리학적 분야에서만큼 (더 좁은 의미에서) 역사적-유전적 분야에서, 그리고 지식론에서만큼 논리학에서.

분석이 지식의 습득으로 역사적-유전적 분야로 그리고, 후속적으로, 심리학적 분야로 나아가기 전에 지식의 논리학에 관한 간단한 언급들이 그리하여 추가될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논리학의 고유 영역은 연역에 관한 이론이다. 그리하여 고전논리학은 순전히 연역주의적이다; 귀납주의적 추론은 매우 사소한 역할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혹시 소크라테스의 방식으로 돌아가려는 다양한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베이컨과 허셜(Herchel)의 방식을 한층 발전시킨 밀(Mill)에도 불구하고, 귀납의 논리학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들은, 논리학에서 자체의 지배적인 위치로부터 연역이론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사고의 귀납주의적 방향들은, “기호논리학[카르납<Carnap>] 관련된 분야들에서, 수학적이거나 기호적 논리학의 현대적 발전사항들에서 또한 감지될 수 있다. 그리하여 연역주의적 추론에 덧붙여, 화이트헤드(Whitehead)와 러셀의 저서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는 또한 연역주의적 추론을 (예를 들어, 추상이론) 포함한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아서 논리학을 기초서술들의 - “원자적 명제들(atomic propositions)” - 진리함수(truth function)라는 교설에 근거시키는 두 번째 판본의 서문에서 특별히 강조하여 출현한다. (또한 44절의 말미쯤에서 나의 비평 참조. 내가 보기에, 모든 참인 기초서술들의 목록이 편집될 수 있다는 전제는 논리학의 과업을 완전히 오해한다. 개별과학들은 기초서술들의 논리적 산물들임과 거리가 멀다; 기초서술들은 단지 검증에 관해서만 관련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여기서 추구될 수 없다.) 대조적으로 현대 공리론(axiomatics)의 분석들은 (주로 다비트 힐베르트<David Hilbert>와 함께 출발하여) 순전히 연역주의적이다. 연역주의적 관점에서, 그 분석들은 가장 큰 주목을 받을 자격이 있다.

 

원칙적으로, 지식습득의 분야에서 연역주의적 추론은 연역주의적 지식론과 귀납주의적 지식론 모두와 양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순도 성립할 것이다. (원칙적으로, 상상 가능한 어떤 결합들도 여기서 제시될 것이다.)

여기서 옹호되는 연역주의적 지식론과 지식습득 분야에서의 귀납주의를 연결하면 훨씬 더 통일된 종합적인 그림이 생길 것이고, 여하한 경우에도 그런 연결은 연역주의적 지식론을 심리학적 귀납주의와 연결하는 것보다 더 쉽다. 현재의 지식론은 분명히, 역사적-유전적 그리고 심리학적 연역주의가 상상 가능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실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다는 것을 밝히는 것을 (가능하다면) 목표로 한다.

귀납주의적 지식론은, 지식론에 관한 심리학으로부터 지식론의 독립을 요구하는 데 충분히 편향적이지 않다할지라도, 분명히 유사한 관심을 지닐 것이다. 귀납주의적 지식론은, 지식습득에 관한 귀납주의적 이론에 반대하여 논증하는 설득력 있는 사실들이 없다면, 아무튼 지식습득에 관하여 귀납주의적 이론을 선호할 것이다.

귀납주의적 지식이론가가, 역사적-유전적 사실들에 비추어, 연역주의가 지식습득 분야에서 정당화됨을 수용한다는 사실은 지식에 관한 연역주의적 심리학이 가능하다는 나의 주장을 지지하는 강력한 논증이다.

그런 입장이 예를 들어 헤르베르트 파이글(Herbert Feigl)에 의하여 (그의 저서 물리학에서의 이론과 경험<Theorie und Erfahrung in der Physik> [Theory and Experience in Physics]에서) 제시된다.

지식이론가로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우리가 이론에 의하여 설명된 모든 사실들로부터 나아간다면 충분히 확인된 이론의 경우에, 이것은 가능하거나 상상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건들에 대하여 실제로 관찰된 상태들이다 이론은 귀납적 일반화에 의하여 실제로 구축될 수 있다.” (유사한 서술들이 많은 다른 장소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파이글(Feigl)은 지식론과 지식에 관한 심리학을 엄격하게 구분한다:현대 철학에 조금이라도 장점이 있다면, 그 장점은 현대 철학이 역사적인 것과 이론체계적인 것, 심리학적인 것과 논리학적인 것, 기원과 유효성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을 배웠다는 데 놓여있다.”

이 엄격한 구분으로 인하여 파이글(Feigl)은 지식습득에서 연역주의적 입장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어떤 사상가들은 (특히 규약주의자들) 물리이론들이 단순한 귀납적 일반화가 아니라, 오히려 실험적 법칙들을 연역적 맥락으로 통합하는... 목적을 이루어야 하는 개념적 구축물들임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이것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연구의 역사적 지위에 근거시키고 인상적인 사례들을 만들어낸다.”

앞서서 그는 동일한 사고방향으로 이미 서술했다:이론들은 거의 항상 경험에 선행하고, 관찰에 의하여 시험되는 것은 이 이론들의 건전성이다. 심지어 우연한 발견을 추적하려는 의도를 지닌 조사활동들의 경우에도, 이론들은 항상 프로그램에 근거하는데 이런저런 형태로 개념을 인도하는 데 근거한다. (문장이 끝나면서 닫힌 따옴표가 있어야 할 것인데 본문에 없다. 아마도 이 부분에 닫힌 따옴표를 넣어야 할 것이다. 한글번역자)

관찰에 앞서서 위치를 차지하는 모든 이 개념적 작동들은 과학적 지식의 출현과 발전에 대하여 틀림없이 최고의 중요성을 띤다. 그 작동은 과학에 관한 역사학자와 지식에 관한 심리학자의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리하여 주로 그런 관점을 채택하는 마흐(Mach)와 뒤앙(Duhem)의 저술에서, 과학의 기원과 매우 관련이 깊은 이 지성적 활동들에 대하여 귀중한 통찰들을 우리는 또한 발견한다.”

이 연역주의적 사고 과정들에 관하여, 파이글(Feigl)은 자신의 인식론적 입장이 그런 논증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만족하여 강조한다:앞에서 언급된 사례들이 증명하는 것은 다만 물리이론들의 기원과 관련된다. 정말로 만유인력이라는 개념은, 기체의 법칙들에 대한 분자활동처럼, 케플러의 법칙들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신기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이론들은 경험으로부터 귀납적으로 습득되지만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들의 유효성은 귀납적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

내부적 모순 없이, 그는 그리하여 자신의 입장을 다음 말로 요약할 수 있다:연구를 통하여 이론들이 귀납에 의하여 발견되지 않는다할지라도, 이론들은 자체의 유효성에 관하여 귀납들로서 여전히 평가를 받아야 한다.”

나는 파이글(Feigl)의 견해를 그렇게 상세하게 토론했는데 이유인즉 그 견해가 내가 보기에 유전학적 연역주의에 대한 명백한 인정으로서 적대자의, 즉 귀납주의적, 진영으로부터 특별히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벽성을 위하여 나는, 파이글[Feigl]이 언급하는 이 사고의 연역주의적 방향이 특히 피에르 뒤앙[Pierre Duhem]의 저서 물리이론의 목표와 구조[The Aim and Structure of Physical Theory] - 내가 보기에 일반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으로도 또한 중요하다고 언급하고 싶다. 나는 가장 중요한 뒤앙(Duhem)의 연역주의적 관점에 대한 상세설명이 빅토르 크라프트(Viktor Kraft) 과학적 방법의 기초형태(Die Grundformen der wissenschaftlichen Methoden)라고 생각한다. 24절 말미의 비평 또한 참조.)

 

본래의 지식에 관한 심리학에서 (혹은 인지심리학”), 사고의 연역주의적 방향은 주로 생물학적으로 지향하는 심리학자들에게서 발견된다.

나의 제시에서, 자신의 저서 열역학의 원리(Prinzipien der Wärmelehre)에서 사고와 개념들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생물학적-심리학적 의미에서 토론하는 마흐(Mach)로부터 나는 시작할 것이다. (매우 유사한 개념들이 앞서 이미 발견될 수 있다: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와 하인리히 곰페르츠[Heinrich Gomperz]의 저술들에서.)

마흐(Mach), (객관적으로) 다양한 상황들에서 동일한 반응들(코를 킁킁거리기, 핥기, 바스락거리기) 발생할 것임을 밝힌다. 아마도 저 상황들 안에서 동일시될 수 있는 유사한 모습들이 그런 반응들의 매개를 통해서만 자주 인식된다”; 왜냐하면 그 모습들이, 반대로, 차례에 따라 추가적 반응들에 (게걸스레 먹기, 버리기) 대하여 결정적일 새로운 전형적인 감각 감지행위들을 (냄새, ) 야기하기 때문이다. 반응과 수용 사이의 이 상호 관계에서 마흐(Mach)개념의 심리학적 토대를 본다:

동일한 반응을 불러오는 모든 것은 하나의 개념 하에 포함된다. 반응들이 있는 것만큼 많은 개념들이 있다.”

마흐(Mach)의 이 접근방식은*1 우리의 정신적 장치에서 반응적 면수용적 면으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는 그리고 인식이나 사고의 과정들에 대하여 반응적 면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띤다는 견해를 덧붙여, 또한 뇌생리학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 포함한다. 인식은 반응들수용행위들에 부과하는 것과 관련된다, 다시 말해서, 인식 자체는 특정 상황들과 특정 (객관적인) 자극들에 대한 특정 종류의 반응이다.

아래에 밝혀질 바와 같이, 이 개념은 그 토대 위에 지식에 관한 연역주의적 심리학을 구축할 토대로서 사용될 것이다. 이 개념이 (귀납주의적) 감각론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자명하다. 우리의 인식과 우리의 사고는 감지적 경험들을, 수용행위들을 결합하거나 연상하여 모으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의 사고들은 지성적 반응들로서 규정되어야 한다.

우리의 사고들이 자극에 (수용) 의하여 촉발될 것임은 일반적인 생리학적 반응들에 관해서 (지성적 반응들에 관해서만은 아니다)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응적 과정의 특정 형태는 주로 반응하는 장치 자체의 주관적 조건들에 의존한다. 객관적인 촉발하는 자극은 반응의 재료적 조건으로서 간주될 것인데 이유인즉 그 자극은 반응이 실제로 발생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반응하는 장치는 반응적 과정에 대한 형식적 조건들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반응들은 주관적으로 미리 형성된이라고 지칭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관적으로 미리 형성된 반응들이 어떻게 (객관적인) 자극들과 관계를 이룰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주관적으로 미리 형성된, 경험으로부터 습득되지않은 반응들이 환경이라는 객관적인 상황들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생물학적으로 귀중한 것으로 판명되는 이유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마도, 예를 들어, 제닝스(Jennings)시행 움직임 이론(theory of trial movements)이 될 것이다. 제닝스(Jennings), 하등생물, 특히 단세포생물은 특정 (특히 해로운) 자극들에 대응하여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반응들 중 한 가지 반응이 상황에 들어맞아생물학적으로 성공할 때까지 (다시 말해서, 해로운 자극으로부터 자체를 해방시켜)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반응들을 완전히 시도할 것임을*2 밝힌다. 자극이 다시 발생하면 전체 절차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한 번 더 모든 시행 움직임은 순차적으로 수정된다. 심지어 여러 번 반복이 발생해도 이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거나 오히려 과정의 속도만 변할 것이다. “관계를 맺는반응이 점점 더 빠르게 발생하지만, 시행 움직임들의 차례가 점점 빠르게 완료되기 때문일 뿐이다. 반복과 실행은 과정의 가속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실패와 최종적으로 성공인 시행 행동을 통하여 (젤츠[Selz]), 주관적으로 미리 형성된 반응들은 객관적인 상황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들은, 여기서 개략적으로만 개괄되는데, 지식에 관한 귀납주의적 심리학의 의미로 또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들은 연역주의적으로 지칭될 구상에 대한 건물 구역들로서 틀림없이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 개념들과 우리의 주관적 지식이 - “인과성에 대한, 법칙-같은 규칙성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 (“규칙-인식”, 뷜러[Bühler]) 기타 등등 - 지성적 반응들로서 상상될 수 있다면, 일반적인 반응들에 대하여 방금 개괄된 것도 또한 아마도 지성적 반응들에게 적용될 것이다.

지성적 반응들은 주관적으로 미리 형성될 터이다; 지성적 반응들은 개관적인 자극들이나 수용행위들에 의하여 촉발될 터인데, 객관적인 자극들이나 수용행위들은 지성적 반응들의 재료적 조건들일 터이다 - 그러나 지성적 반응들은 전혀 수용행위들로부터 도출되지는 않을 터이다.

지성적 반응들을 객관적인 상황에 부과하는 것이 시행 행동으로부터 생긴다면, 부과하는 것은 항상 자체가 성공하기 전에 발생한다. 그리하여 부과하기는 자체의 성공과 관련하여 예상을 한(반응이 성공하지 못하면, 그것은 정당화되지 못한 편견으로 지칭될 것이다). 흔히 성공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반응을 자극에게 예상하며 부과하는 것은 잠정적인 부과이다.

그것이 내가 주관적으로 미리 형성된 지성적 반응들을 단순히 예상들이라고 지칭하는 이유이다.*3

연역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경험적 지식을 감각-감지행위들로부터 추상이나 일반화에 의하여 습득하지 않고, 수용행위들이라는 재료에 잠정적으로 부과된 예상들을 완전히 시험함으로써 습득한다. 이 잠정적 부과가 배척될 것인지 아닌지는 자체의 생물학적 가치에 의하여 결정된다. 결정방법은 선택적인 방법이다. 예상들이 무효한 것으로 판명되면, 예상들은 제거될 것이다; 예상들은 다른 반응들에 의하여 갈음되거나, 또는 예상들을 지닌 생명체반응하는 생명체 그 예상들과 함께 사멸할 것이다.

환경에서의 성공은 미리 형성된 예상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것은 버나드 쇼[Bernard Shaw]가 자신의 저서 초생물학적 모세5[metabiological Pentateuch]”에서 지칭하는 바와 같이, “시행착오의 방법이다.)

도식의 적용을 예시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를 들어 -인식의 과정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할 것이다.

귀납주의는 단순히, 나중의 수용은 연상에 의하여 앞선 수용과 연결되어 (“유사성에 대한 기억”, 카르납[Carnap]) 앞선 수용을 재생한다고 상정할 것이다. (이 겉으로 보기에 매우 초보적인 구상에 숨겨진 심각한 문제들은 여기서 더 이상 토론되지 않을 것이다.*3a)

연역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반응은 최초의 자극에 적응되었다. 새로운 시행행위들을 통하여, 동일한 반응이 또한 나중 자극에 관하여 성공을 한다. 두 가지 경우들 모두에서 동일한 반응이 성공적이었던 한, 두 가지 경우들은 다른 면들에서 두 가지 경우들이 어떻게 다른지는 관계없이 틀림없이 공통적인 것을 지닌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다양한 상황들에서 (모든 상황들은 객관적으로 다소 다르다) 공통적인 것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즉 인식하기는 항상 주관적인 요인들에게 또한 의존한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실진법<悉盡法: method of exhaustion>”). 마흐(Mach) 말하는 바와 같이 (위 참조): “동일한 반응을 불러오는 모든 것은 한 가지 개념 하에 포함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수용행위들은 서로 직접적으로 부과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응들이 먼저 수용행위들에게 부과되고, 수용행위들 사이의 (간접적) 연결이 이 참고체계를 통해서만 일어난다.

심지어 간접적인 부과의 커다란 빠르기도 과정의 급격한 가속에 의하여 설명될 것이다. (“응축된 반복의 기적에 의해서라고, [Shaw]는 말한다.)

연역주의적 이론이 설명할 수 없는 한 가지 것이 있다: 어떻게 새로운 반응이 출현하는지, 어떻게 새로운 예상들이 생기고 어떻게 새로운 지식이 상상되는지.

그러나 귀납주의가 설명을 제공할 의도를 지닌 반면, 연역주의는 심지어 새로운 것의 생성을 완전히 설명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연역주의는, 수용에 대한 반응의 부과에 관한 결정이 내려지는 방법을 설명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인식은 정확하게 이 결정에 놓여있다.

이 방법은 법칙-같은, 합리적인 방법이어서 그리하여 이 방법은 설명에, 다시 말해서, 법칙-같은 규칙성으로 환원되는 데 종속된다. 이 방법은 선택의 방법인 시행착오의 방법이다.

그러나 연역주의는 어떻게 새로운 지식에 대한 상상하기가 발생하는지의 질문에 한 가지 답변만을 (그리고 그것은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 제시할 터이다: 새로운 것이 생물학적으로 출현하는 동일한 방식으로, 혹은 어떤 돌연변이들이 생성되는 동일한 방식으로.

연역주의에 따르면, 새로운 수용행위들 사이에 혹은 새로운 객관적인 조건들과 새로운 반응들의 출현 사이에는 법칙-같은 의존. (혹은 오히려. 한 가지 의존만 있는데, , 선택적 의존으로 적응하지 못한 반응들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때때로 생명체에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혹은 사멸하는 대안을 내민다; 그러나 이것은 설명되지 않은 요소를 설명하지 못한다.)

귀납주의가 어떻게 새로운 지식이 새로운 수용행위들로부터 출현하는지를 밝히려고 (, 감지행위들, 기타 등등의 비교를 통하여) 노력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지식이 수용행위들에 적합한 이유를 (새롭게 창조된 지식이 수용행위들로부터 출현했기 때문에) “설명하기도 하는 반면; (앞의 세미콜론은 쉼표의 오기로 보인다: 한글번역자) 연역주의에 대해서는 새롭게 상상된 지식과 수용행위들 사이에서 그런 대응을 전제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반대로: 연역주의는 새로운 반응들이 그 반응들이 출현하자마자 전혀 수용행위들에게 의존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새로운 반응들의 대다수는, 결국, 폐기된다: 자연에 의하여 이용되는 시행착오의 방법과잉생산을 전제한다 (이 문장에서 원문은 반대로다음에 콜론을 삽입했으나 쉼표로 표기되어야 할 것이다. 한글번역자).

연역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법칙-같은 혹은 합리적 방식이 새로운 수용행위들로부터 새로운 반응들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들에 이르지 않는다; 새로운 아이디어들의 출현은, 여러분에게 의지가 있다면, 우연적으로 지칭될 것이다. 아무튼 새로운 아이디어들의 출현은 비이성적인, 창조적 요소를 포함한다 (47절의 직관주의[intuitionism]”에 관한 언급 참조).

새로운 구상들의 출현에 관한 문제로 인하여, 다시 한 번, 우리는 귀납주의적 견해와 연역주의적 견해들을 비교하게 되는데 그 비교는 그 견해들의 근본적인 대비를 선명하게 초점에 두고 밝히는 비교이다.

귀납주의는 법칙-같음규칙성이나 자연법칙에 대한 신뢰의 출현 대한 인식을 규칙적인 반복의 결과로서의 습관화([Hume]귀납법의 습관화 이론[habituation theory of induction])로 환원시킨다.

연역주의는, 혹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어떤 것도 반복에서 보지 않는다; 반대로 반복은 어떤 것을 사라지게 만들 따름이다 (과정의 가속화); 습관과 관행은 반응과정을 간소화함으로써 반응과정의 우회로들을 제거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반복을 통해서는 어떤 것도 생성되지 않는다. 점증하는 반응의 속도는 자체의 점진적 재-창조로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자연은 비약한다[natura facit saltus]).

연역주의적 접근방식은, 규칙들 탐색에서 [그리고] 일반적인 규칙-의식에서 어떤 것도 볼 수 없지만 미리 형성된 예상을 볼 수 있다 미리 형성된 예상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경험을 만든다” (경험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기 보다는); 미리 형성된 예상이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모든 지성적 반응의 근본적인 형태인 성공적인 적응을 위한 바로 그 사전조건이라 할지라도.

(“,,, 오성... 우리는... 규칙들에 대한 능력으로서 규정할 것이다라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초판본에서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후자[後者]는 현상들 속에서 어떤 규칙을 찾기 위하여, 항상 현상들에 대한 조사에 몰두한다.”)

 

지식에 대한 연역주의적 심리학의 이 도식적 개요가 심지어 사실들과 대등함에 근접하는지, 혹은 그 도식적 개요가 혹시 완전히 경험적으로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는 여기서 토론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사실들이 혹시 그것을 뒷받침한다는 것을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한 추가적 세부사항들은 아직 발간되지 않은 저술인 지성에 관한 이론으로서 유보될 것이다.)

기술된 심리학적 견해가 연역주의적으로서 지칭되는 이유는 아마도 자명하지 않다. 여기에 지식에 관한 연역주의적-경험주의적 이론에 대한 어떤 유추가 (앞의 두 절에서 개괄된) 있다는 것은 아마도 인정될 것이다; “정당화되지 않은 예상들잠정적 추정들과 대략 대등하다는 것과 입증방법예측들의 경험적 검증방법과 대등하는 것. 그러나 연역주의적 면을 실제로 구성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 아직 완전히 명백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지식에 관한 이 분명히 연역주의적인 이론과 (이 목적을 위해서는 먼저 더 정확한 용어들로 토론되어야 하는) 방금 기술된 지식에 관한 연역주의적 심리학 사이의 관계가 사실상 완벽한 유추의 관계라는 것을 더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그런 반대의견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관계는 지식에 관한 이론을 심리학적 질문들로 직접적으로 이전(移轉)함으로써*4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목적들을 위하여, 그러나, “연역주의적이라는 용어가 수용되는지 수용되지 않는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다: 위에 개괄된 지식에 관한 심리학이 지배적인 귀납주의적 견해를 부정한다는 것.

지식에 관한 심리학에서 귀납주의가 옳던 그르던, 귀납주의는 유일한 가능성이 아니다: 귀납주의는 유일한 상상 가능한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밝혀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다.

 

지식에 관한 연역주의적 심리학은 칸트의 지식에 관한 심리학과 중요한 유사성들을 지니고 있는데 칸트의 지식에 관한 심리학은 오늘날 그렇게 낮은 평가를 받는다.

수용행위들과 자극을 촉발하는 혹은 수용의 (반응에 대한 재료적 조건으로서 반응의 형식적 조건들은 반응하는 기제 자체에 놓여있다. 이것이 그 형식적 조건들이 주관적으로 미리 형성된으로 지칭되는 이유이다) - 구상들인 지성적 반응들 사이의 대비 등 이 모든 것이 대체로 칸트의 견해와 일치한다. 칸트는 감성의 수용성지식의 자발성행동들을 유사하게 구분한다. “자발적이라는 용어는 자기-발생적이나 자유롭게 발생하는이나 이런 종류의 어떤 것을 전혀 의미하지 않지만, 반응하는 것의 주관적으로 미리 형성된 요소를 나의 용어사용법으로 틀림없이 강조할 따름이다. 칸트는, “오성의 지성적 반응들과 동일한 정도까지는 아니라할지라도, 수용행위들을 또한 주관적으로 미리 형성된 것으로서 올바르게 간주한다.

(그리하여 헬름홀츠[Helmholtz]에 따르면, 요하네스 뮐러[Johannes Müller]의 감각의 특별한 에너지 법칙[Law of Specific Energies of the Senses]은 어느 정도까지 칸트의 교설에 대한 경험적 입증으로서 정당하게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칸트의 심리학에 대한 입증을 뿐일 터이다. 오스발트 퀼페[Oswald Külpe]의 뷔르츠부르크 학파[Würzburg School]에 의한 인지심리학에 관한 몇 가지 저술이,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개념들에 대한 실험적 입증들로서 아마도 이해될 것인데 칼 뷜러[Karl Bühler]사고과정 이론에서의 사실과 문제[Tatsachen und Probleme zu einer Theorie der Denkvorgänge] 같은 것으로 그 저술 안에는 이 문제에 관한 칸트의 개념들이 지적되고 또한 오토 젤츠[Otto Selz]정리된 사고과정의 법칙에 관하여[Über die Gesetze des geordneten Denkverlaufs] 같은 것이다.

지식론과 지식에 관한 심리학에 대한 칸트 자신의 구분은 흔히 충분히 엄정하지 않았다.

그의 용어 선험적(a priori), 예를 들어, 틀림없이 주로 인식론적 중요성을 띤 것이다; 그 용어는 아마도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자적으로 유효한으로서 해석되어 기원이 아니라 유효성을 언급할 것이다. (현재의 분석에서 그 용어는 항상 그런 의미로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선험적(a priori)이라는 용어에 아마도 경험을 토대로 생성되지 않은과 같은 심리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 또한 물론 가능하다. 칸트는 선험적(a priori)에 대한 선천론(先天論)적 해석을 (“내재적 개념들”, 기타 등등) 명시적으로 거부할지라도, 심리학적-유전적 요소들은 여전히 그 단어를 칸트가 사용하는 데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심리학적 용법에서 선험적(a priori)이라는 용어는 여기서 예상적으로 지칭된 것과 거의 대등하다.

논증을 목적으로 우리가 선험적(a priori)이라는 용어의 용법을 수용한다면, “예상들선험적인 종합판단들로서 정의(定義)되어야 한다. “규칙-의식의 반응에 관한 예상적 면은 (법칙-같은 규칙성들을 잠정적으로 찾는 방법) 선험적인 인과성의 원리와 대체로 대등할 것이다.

그러나 선험적 종합판단들잠정적 예상들일 따름일 터이어서, 선험적으로 , 경험적으로 입증되기 이전에 존재할 따름일 터이다 (이 문장의 원문은 But these a priori synthetic judgements” would only be tentative anticipations, they would only exist a priori, that is, prior to being empirically corroborated인데 두 개의 문장을 연결하는 접속사가 없다. 따라서 But 다음에 since를 넣어서 해석했다. 한글번역자); 후천적으로 그 판단들은 경험에 의하여 반박되어 여전히 배척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우연의 게임들에서와 같이 특정 경험적 분야들에서 규칙들 찾는 것은 아마도 소용이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선험적(a priori)이라는 용어의 인식론적-심리학적 애매한 사용이 칸트의 교설에 더 크게 중요한지는 여기서 검토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1절을 참조). 아무튼 칸트 자신은 항상 모든 선험적 종합판단들에 대하여 보편적인 유효성과 필연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칸트가, 여기에 제시된 견해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자신이 얻은 결과에 대한 해석을 고려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것은, 그가 그런 주관적인 순수이성에 관한 사전 형성 체계반대하여 개진하는 두 가지 논증들에 의하여 매우 명백하게 밝혀진다.

그는, 먼저, 우리의 주관적인 우리에게 심어진 사고의 의향들인 우리의 지성이 자연의 법칙들과 일치를 이룬다고 사전 형성 체계가 틀림없이 전제할 터이라고, 그래서 그 의향들이 자연의 법칙들과 일치를 이룬다고 (오늘날 우리가 말할 바와 같이, 그 의향들이 자연의 법칙들에 적응된다고) 주장한다 (이 문장의 원문은 He holds, first, that such a preformation system would have to assume that our intellect, our subjective “dispositions of thought implanted in us”, are in harmony with the “laws of nature”, that they are in accordance with them (that they are adapted to them, as we would say today)인데 괄호 속 절을 제외한 두 개의 that절이 접속사 없이 연결된다. 따라서 뒤의 that절은 and that they are in accordance with them ~으로 앞에 접속사 and를 넣어서 해석해야 될 것이다. 한글번역자). 이 일치가 우연한 것이라고 우리가 추정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속절없이 이 일치가 우리의 창조주에 의하여 (일종의 미리-확립된 조화로서) 지시를 받았다는 가설을 채택해야 한다. 칸트는 그런 가설을 토대로 우리는 한계를 둘 수 없다 [미래의 판단들에 대하여 미리-결정된 의향들의 전제에]”라고 올바르게 주장한다. 이 반대의견은 여기에서 개진된 견해와 (그리고 또한 일반적인 적응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우리는 위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시행착오의 방법”, 선택설[theory of selection]).

칸트의 두 번째 반대의견은, 이런 종류의 주관적으로 미리 형성된 선험적 종합판단에 (객관적인) “범주들의 바로 그 구상의 한 부분인 범주들의 필연성이 부족할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이것은, 예상들은 반드시 참은 아니라, 그리고 정말로 예상들은 무용하다고 판명될 수 있어서 후천적으로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여기에서 개진된 견해와 일치한다.

자체의 예상적이라는 (유전적) 의미로 선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옹호된 심리학적 (그리고 또한 인식론적) “사전 형성 이론인 연역주의적-경험주의적 견해를 다음 표현으로써 아마도 규정할 것이다:

정말로 종합적인 선험적 판단들이 있지만 후천적으로 그 판단들은 흔히 거짓이다.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 - 1책 1권 1장 문제 창출, II장 연역주의와 귀납주의 -.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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