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
(The Two Fundamental
Problems of the Theory
of Knowledge)
칼 포퍼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
‘이 책은 지식론(a theory of knowledge)이다. 이 책은 “경험론(theory of experience)”이다 즉, 과학적 경험론이다. 이 책은 모든 과학적 “경험들”이 가설들을 전제한다는 것과, 과학적 경험은 이론을 설명하여 시험하는 방법으로서 규정될 것임을 밝힌다.’
칼 포퍼(Karl Popper)
칼
포퍼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
트로엘스 에거스 한센(Troels Eggers Hansen) 편집
존 키노리(John Kinory) 및 안드레아스 피켈(Andreas Pickel) 번역
나는 본서를 나의 아내에게 헌정한다
그녀는 본서를 위하여 그리고 또한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및 나의 나중 저서들을
위하여 크게 희생했다; 내가 수용했어야 했던 것보다 더 큰
희생이었고 더 나은 저서들이 받았을 만한 희생보다 더 큰
희생이었다.
1978년 11월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정말로, 지식에 대한 독단적이고 비현실적인 고집이 우리를 아마도 기대하도록 유도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 내가 익숙하지 않은 마술적 장치들을 통해서만 영합될 수 있는... 아무리 귀중하고 소중한 꿈들이 배척되어야 한다할지라도, 그 마술적 장치들이 지닌 기만적인 영향력에 대응하는 것은 철학의 의무이다. 이 연구에서 나는 완벽함을 나의 주요 임무로 삼았다...
칸트 (1781년)
목차
편집자 서문 ix
발행인의 감사의 말 x
독일어 초간본 서문, 1978년 xi
서문, 1978년 xiii
해설 [1933년] xxxiii
책 I
귀납법의 문제 (경험과 가설)
지식론에 관한 근본적인 두 가지 문제
I 권
1 문제에 대한 설명 3
2 연역주의와 귀납주의 6
3 귀납의 문제 35
4 정상적-서술 입장 45
5 칸트와 프리즈(Fries) 87
6 확률 입장 147
7 사이비-서술 입장 171
8 규약주의(Conventionalism) 188
9 엄격한 보편서술과 단칭서술 238
10 사이비-서술 입장으로 돌아가서 272
11 사이비-서술 입장과 의미의 개념 301
12 결론 347
부록: 도식적 재현에서의 귀납 문제에 대한 비판 363
책 II
구획설정의 문제 (경험과 형이상학)
지식론에 관한 근본적인 두 가지 문제
II 권 (단편 글)
1부 단편 글 1932년
서문 초안 377
2부 단편 글 1933년
방향설정(Orientation) 425
부록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의 요약문 (1932년)
임시 기록 465
편집자 후기 485
인명색인 499
주제색인 503
목차의 쪽수는 원서의 쪽수로 한글번역에서는 달라질 수 있음. 한글역자.
편집자 서문
원문
꺽쇠괄호 안의 단어들이나 단어들의 무리들은 원래 원고에 있지 않았던 추가사항이다 (K1, K2, K3 및 K4). 이 추가사항 중 몇 가지는 편집자가 넣었다; 나머지는 저자가 편집된 원고(MS)를 1975년에 수정할 때 저자가 넣었다.
27절에서 29절 (포함) 및 31절까지는 더 작은 더 작은 활자로 작성되었다: 이것은 저자가 이 절들로부터 자신을 분명히 분리시키고 싶어 함을 가리킨다 (독일어본 초판본 1978년의 서문 참조).
주석
숫자가 붙은 주석: 이것들은 원래 원고에서 기인하거나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숫자 앞에 별표(*)가 표시된 추가사항들은 저자가 붙인 것이다 (1975년).
편집자가 붙인 모든 주석들과 그 주석들에 대한 추가사항들은 꺽쇠괄호와 정상적으로는 “편집자”라는 표시가 붙는다.
번역자가 붙인 주석은 “덧셈” 기호가 (예를 들어
발행인의 감사의 말
발행인은 번역을 준비한 데 대하여 안드레아스 피켈(Andreas Pickel)에게 감사하고 싶다; 초기단계 및 최종단계에서의 번역에 관한 그의 편집 작업에 대하여 트로엘스 에거스 한센(Troels Eggers Hansen)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리고 존 키노리(John Kinory)에게는 번역본을 읽고, 수정하여 최종 번역본을 마련한 데 대하여 감사하고 싶다. 발행인은 또한 고든 웰즈(Gordon Wells)에게 번역에 협조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싶다.
1978년 독일어본 초판본의 서문
본서인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rkenntnistheorie)는, 1934년 가을에 공개된 최초의 저서로 나의 최초 간행본인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 관한 1930년에서 1933년까지의 원고와 사전 작업을 모아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제목은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윤리학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thik: The Two Fundamental Problems of Ethics)를 참조한 것이다. 1930년에서 1933년까지의 저술 중 몇 가지와 초기 사전 작업이 실종되었다.
나는 이 초기 작업을 발간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내가 나의 자서전의 16절에서 다시 말한 바와 같이, 1929년 혹은 1930년에 나에게 발간을 위한 책을 저술하라고 격려한 사람은 그리고 나중에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을 만나도록 주선한 사람은 헤르베르트 파이글(Herbert Feigl)이었다. 카르납(Carnap)은 1932년 여름에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의 원고를 읽었고 뒤이어 비엔나 학파(Vienna Circle)의 몇 사람도 또한 그 원고 읽었다. 카르납(Carnap)은 학술지 지식(Erkenntnis)에 그 원고에 관한 보고서를 썼고, 하인리히 곰페르츠(Heinrich Gomperz)는 그 원고에 관하여 두 통의 상세한 편지를 써서 한 통은 나에게 보냈고 다른 한 통은 J.C.B. 모르(Mohr) 출판사의 오스카 지베크(Oscar Siebeck)에게 보냈는데 그 출판사가 이제 46년이 지나서 출판을 하고 있다.
헤르베르트 파이글(Herbert Feigl)과 별도로, 나의 오랜 친구 로버트 래머(Robert Lammer)는 본서를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 그는 각 새로운 절이 제시되면 비판해서, 결과적으로 분명한 방식으로 책을 서술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관하여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따라갈 수 없는 모범적인 사람은 여전히 쇼펜하우어와 러셀(Russell)이다.
본서 안에 제시된 것은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제시된 것보다 훨씬 더 상세하고 폭넓은데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는 크게 줄여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본서는 부분적으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다소 나중 판본에 의하여 대체된다. 그러나 나의 친구 트로엘스 에거스 한센(Troels Eggers Hansen)은 친절하게도 본서의 편집을 맡았는데, 내가 다시 발견하여 겨우 몇 년 후에 발행한 많은 아이디어들이 이미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에게 환기시켜 주었다.
실종된 원고들을 그가 찾는 동안에, 한센(Hansen)은 몇 통의 오래된 편지를 또한 발견하여 비엔나의 시인이자 문화역사가인 에곤 프리델(Egon Friedell)에게 보낸 1932년 6월 30일자 편지에서 인용된 구절을 여기서 인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 편지에서 나는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라는 저서를 “위기의 어린애,... 무엇보다도 ... 물리학의 위기의 어린애. 그것은 위기의 영원성을 주장한다; 그것이 옳다면, 위기는 고도로 발전된 합리적 과학의 정상적인 상태이다”로서 기술한다.
트로엘스 에거스 한센(Troels Eggers Hansen)이 본서를 편집하면서 몇 년을 보낸 데 대하여, 그리고 그가 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보인 성실함에 대하여 나는 큰 빚을 졌다. 제레미 셔머(Jeremy Shearmur)는 너필드 재단(Nuffield Foundation)과 런던정경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의 덕택에 나의 연구조수로서 일했는데 편집자와 내 자신 모두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알프레드 슈람(Alfred Schramm)은 편집자 교정본을 검토했고 색인을 편집했다. 악셀 뷜러(Axel Bühler)와 에르빈 테그트마이어(Erwin Tegtmeier)는 교정쇄를 검토했다. 한스 알베르트(Hans Albert)는 전체 계획을 격려하고 지원했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매우 감사한다.
버킹엄셔(Buckinghamshire), 펜(Penn)
1978년 11월
서문, 1978년
1. 소크라테스식 무지로서의 과학적 지식에 관한 개략적인 역사적 언급. 플라톤이 저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y of Socrates)에서 –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철학적 저술 –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지의 질문에 대하여 델피의 신탁이 “아니다”라고 답변한 것에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소크라테스는 보고한다. 신(神)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철저히 알기 때문에 자문한다. 그리고 그는 다음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정말로 조금 더 현명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만큼도 심지어 알지 못한다; 이유인즉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통찰인 “나는 내가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가장 중요하다. 흔히 이 통찰은 매우 진지하게 수용되지 않았다; 그 통찰은 심지어 역설적이라고 주장되었다; 그리고 변명(Apology)에서는 틀림없이 그 서술에 다소 놀랍고 역설적으로 들리려는 의도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우리의 무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저버렸고, 그와 함께 지성적 겸손함(intellectual modesty)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요구를 저버렸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모두 정치가는 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을 통하여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정치가는 자신의 무지를 인식해야 한다; 반대로 플라톤에 따르면, 정치가는 박식한 철학자인 완벽한 지식을 갖춘 사상가여야 한다.
우리의 무지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인식론의 역사를 통하여, 예를 들어 학교(Academy)의 (플라톤이 설립한) 중간 기간을 통하여 다시 주장되었다.
본질적으로 지식에 관한 이론에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낙관적 견해: 우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2) 비관적 견해: 인류는 어떤 지식도 얻을 없다. 이것은 오늘날 회의론으로서 언급되는 견해이다. (3) 세 번째 견해는 “중간학교(middle Academy)”라는 원래 의미에서 회의론(skeptomai = 조사하다, 숙고하다, 문의하다)의 견해이다. 이것은 또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인 제노파네스(Xenophanes)의 견해이기도 하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기준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또한 우리에게는 특정 지식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탐구할 수 있고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결국 더 나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런 형태의 회의론에 따르면, 우리의 지식이 성장하는 것은 가능하다.
회의론의 두 가지 형태들은 - 뉴튼에 이르기까지 – 자기들 편에서 더 강력한 논증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뉴튼의 프린키피아(Principia)는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야기했다. 뉴튼의 프린키피아(Principia)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플라톤의 연구 프로그램의 실현으로서 보일 것이다: 고대인들의 가장 과감한 꿈들을 멀리 넘어가는 실현. 뉴튼의 이론들이 담고 있는 예측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확인되었다; 그리고 처음에 그의 예측들로부터의 이탈로 보이는 것은 행성 해왕성을 발견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지식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확실한 지식인 epistme이었다. 우주에 대한 확실한 지식;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플라톤이 꿈꿀 수 없었던 종류의 지식.
회의론자들은 즉각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자신들이 패배한 듯이 보였다. 뉴튼 이후 52년 만에 위대한 회의론자들 중 한 명인 흄(Hume)은, 뉴튼의 중력이론과 비교될 사회과학들에 대한 이론을 만들겠다는 소망으로 자신의 인성론(Treatise)을 서술했다.
새로운 지식에 관한 거의 터무니없는 특징을 매우 분명하게 인식한 사람은 흄(Hume)에 의하여 회의론으로 돌아선 칸트였다. 뉴튼 이론의 성공에 놀라고 흄(Hume)의 영향을 받아서 뉴튼의 프린키피아(Principia)가 나온 이후 100년 만에 칸트는 질문을 제시했는데,
“자연에 대한 순수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였다.
자연에 대한 순수과학(pure science of nature)이라는 (혹은 “순수자연과학[pure natural science]”) 표현을 통하여 그는 주로 뉴튼 역학의 법칙들과, 또한 그 자신이 (그리고 [Boscovic <Boscovich의 오기로 보인다: 한글역자>]) 전개했던 물질에 관한 역학-원자론(the dynamic-atomistic theory)을 이해했다.
칸트의 질문은, 흄(Hume)의 회의론에서 출발하여 그가 뉴튼 물리학의 존재가 역설적이라고 느꼈다는 의미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칸트의 질문으로 인하여 칸트 자신은 또 다른 질문에 다다랐는데, 그 질문을 칸트는 훨씬 더 근본적으로서 간주했다:
“순수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과학들이 [순수수학과 순수자연과학]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 과학들이 가능한지를 묻는 것인 전적으로 합당하다; 이유인즉 그 과학들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 과학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증명되기 때문이다.”
칸트가 기묘하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 질문을 표현했다는 느낌이 흔히 일었다. 그러나 그가 흄(Hume)의 회의론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가 상기하면, 그 느낌은 자연스럽고 완전히 직설적일 따름이다: 뉴튼 역학의 존재는 회의론자에게는 역설적이다; 그리고 뉴튼 역학은 다음 질문을 직접적으로 야기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 과학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칸트의 답변은 이렇다: “오성(悟性: understanding)은 자체의 법칙들을 [즉, 순수자연과학의 법칙들]... 자연으로부터 도출하지 않고 자연에게 부과한다.”
다시 말해서 뉴튼의 이론은 우리가 지닌 감각들의 도움을 받아서 현상들로부터 경험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뉴튼의 이론은 우리의 오성(悟性: understanding)에 의하여 창조된 비-경험적, “순수” 창조물이다; 뉴튼의 이론은 우리의 오성(悟性: understanding)이 자연에 부과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옳기도 하고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칸트와 대조적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이론은 우리의 오성(悟性: understanding)이 자연에게 부과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은 자연이 항상 관용하지는 않는 부과이다; 이론은 우리의 오성(悟性: understanding)에 의하여 창조된 가설이다 그러나 – 그리고 여기에 칸트와의 차이점이 있다 – 이론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연에 부과하려고 노력하는 가설은 자연에 의하여 패퇴할지도 모른다.
나의 설명들은 칸트 이후 여러 해까지 발생하지 않았던 한 가지 사건을 언급한다: 아인슈타인의 혁명.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은, 뉴튼의 중력이론이 가설적이거나 추측적임을 밝혔는데, 긴 이전 역사를 지녔고 그리하여 아인슈타인의 이론적 개념들을 과학적 지식의 위상에 올려놓았다. 이 이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들 중 몇 가지는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 헤르만 헬름홀츠(Hermann Helmholtz),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아우구스트 푀플(August Föppl)과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é)이다.
이 이름들이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인식론 모두의 이전 역사에 속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20년대에 나는 처음으로 인식론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혁명이 지닌 중요성을 깨달았다. 가장 엄격한 시험들을 거쳐 여하한 과학자가 꿈꿀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잘 입증되었던 뉴튼의 이론이 불확실하고 일시적인 가설임이 밝혀졌더라면, 어떤 물리이론도 가설적 위상보다 더 많은 것을 획득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이 깨달음은 당시에 조금도 일반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지닌 과학적 지식의 가설적 특징을 강조했던 많은 지식 이론가들이 있었지만, 그들 거의 모두가 입증을 통하여 가설이 확률 1과 구분될 수 없는 확실성의 정도에 도달할 때까지 점점 더 개연적이 될 것이라고 상정했다. 가설이 이 확실성의 정도에 도달하자마자, 가설은 더 이상 가설로 지칭될 필요가 없고 이론이라는 명예 명칭을 받을 수가 있다. 가설이 확실하다는 조건으로만, 그리고 가설이 지닌 확실성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조건으로, 가설은 과학적 지식의 몸체에 수용된다. 왜냐하면 과학은 지식이고 지식은 확실성 및 정당화 모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나 합리적으로 확립되는 (혹은 근거가 되는) 것에 대한 능력.
과학적 지식에 대한 이 견해에서 어떤 중요한 변화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카르납(Carnap)의 세상의 논리적 구조(Der logische Aufbau der Welt) 사이에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귀납적 과학들의 평가에서 두 명의 위대한 적대자들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도 이 요점에 동의했다.
어떤 이론이 상상 가능한 최고의 입증정도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 이론은 뉴튼의 이론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에 나는 당시 이르렀다. 다른 한편으로 뉴튼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도출되었던 모든 성공적인 과학적 예측들은 또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도출될 수 있었다. 뉴튼을 지지하는 모든 소위 경험적 근거들은 그리하여 아인슈타인을 지지해서도 또한 말을 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 이론의 몇 가지 예측들과 상반되는 뉴튼 이론을 통하여 도출될 수 있는, 예측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두 가지 이론들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이론들 사이에서의 결정적인 실험들(experimenta cruces)이 가능했다.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결정적인 실험들 대부분은 당시에 수행되지 않았다 (태양의 중력장에서 광선의 휨과 아마도, 수성의 근일점[近日點] 운동을 제외하고; 그러나 두 가지 현상들 모두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방식들로 아마도 설명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다른 실험들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모든 실험들은 수행되었다. 결과들은 아인슈타인을 지지하고 뉴튼을 반대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경우들에서 측정들은 어렵고 결과들은 매우 믿을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뉴튼의 이론이 반증된다고 (거짓으로 판명된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여 밝혀진 논리적-인식론적 상황은 혁명적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여 밝혀진 논리적-인식론적 상황은, 심지어 경험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이론 T1에 대해서도 (즉, 소위 확실하고 귀납적으로 정당화되거나 확립된 – 혹은 확인된 – 이론에 대해서도) 경쟁하는 이론 T2가 있을 개연성이 높아서, 한편으로는, T2가 T1과 논리적으로 일치하지 않고 (그리하여 적어도 두 이론 중 한 이론은 틀림없이 거짓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T2가 T1을 입증하는 모든 이전 실험들에 의하여 입증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서로 불일치를 이룰지라도 T1과 T2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으로 큰 영역들 안에서 경험적으로 구분 불가능한 예측들을 낳을 것이고, 그런 영역 안에서 두 가지 이론 모두는 고도로 입증될지도 모른다.
두 가지 이론 T1과 T2가 서로 불일치를 이루기 때문에, 분명히 그 두 가지 이론들 모두가 “확실할”리가 없다. 그리하여 심지어 가장 완벽하게 입증된 이론도 확실할 수가 없다: 우리의 이론은 오류를 일으킬 수 있고 심지어 고도로 잘 입증될 때도 오류를 일으킬 수 있는 상태로 남을 것이다.
당시 나는 아인슈타인의 저술에서 아인슈타인 혁명의 이 결과를 발견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저서들을 통독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그의 논문 기하학과 경험(Geometrie und Erfahrung)이었는데 그 논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수학에 관한 서술들이 실제에 관하여 말하는 한, 그 서술들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그 서술들이 확실한 한, 그 서술들은 실제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처음에 나는 수학으로부터 일반적인 과학으로 일반화했다:
“과학적 서술들이 실제에 관하여 말하는 한, 그 서술들은 확실하지 않고, 그 서술들이 확실한 한, 그 서술들은 실제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다.”
(실제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 저 확실한 서술들로써, 분명히 아인슈타인은 푸앵카레[Poincaré]와 규약주의[規約主義: conventionalism]를, 혹은 관성의 법칙은 힘이 없는 운동에 대한, 그리하여 힘의 개념에 대한 함축적인 정의[定義: definition]라는 개념을 언급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이론이 지닌, 심지어 가장 잘-입증된 이론들이 지닌 불확실성이나 오류가능성에 대한 이 개념을 나는 나중에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이라고 명명했다. (내가 아는 한,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가 이 용어를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는 물론 소크라테스의 무지와 다르지 않다. 개괄하여 우리는 다음을 경험한다:
(1) 소크라테스: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이상을 알지 못한다.)
(2) 칸트: 뉴튼의 이론은 정당화될 수 있는 과학이고 그리하여 확실한 지식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과학의 존재라는 사실에 의하여 반증된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 질문에 도달한다: 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3) 아인슈타인: 실제에 관한 과학적 지식은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은 그 단어의 전통적인 의미에서 지식이 아니다; 적어도 평범한 언어의 의미에서도 지식이 아니고 카르납[Carnap]의 세계의 논리적 구조[Aufbau]까지 그리고 세계의 논리적 구조[Aufbau]를 포함하여 철학적 용법의 의미에서도 지식이 아니다). 그리하여 뉴튼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는 옳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지닌 무지에 대한 겸손한 소크라테스의 통찰이 최종적으로 다시 한 번 공동의 지성적 선(善)이 될 것이라는 나의 소망을 표현하고 싶다. 이 통찰은 아마도 모든 위대한 자연 과학자들에 의하여 공유되었다: 자신의 저서 대화(Dialogue)에서 (네 번째 날[fourth day]) “저 현명하고 겸손한 말들인 ‘나는 알지 못한다’”에 관하여 언급하는 갈릴레이에 의하여 공유되었고, 케플러와 뉴튼에서 아인슈타인과 그 너머까지에 의하여 공유되었다. 모든 위대한 자연과학자들은 과학의 권위에 대한 독단적인 신념을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오늘날 과학만능주의(scientism)라고 지칭되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만능주의(scientism)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또한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가 과학만능주의(scientism)를 파괴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과학의 권위에 대한 독단적인 신념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과학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반(反)-과학적 이념을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2. 본서의 원문에 관한, 특히 진리이론에 관한 몇 가지 비판적 언급.
(1) 내가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The Two Fundamental Problems)와 또한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를 저술할 당시에, 진리의 개념에 관한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의 위대한 저술은 아직 발간되지 않았다.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내 자신이 진리의 개념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했다.
진리의 개념은 지식론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중요하고, 특히 과학적 지식론에 대하여 그러하다. 과학은 진리 탐구이다: 진리의 소유가 아니라 진리 추구이다.
이 표현은, 또한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Theory)의 끝에서 두 번째 문단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진리와 확신(확실성: certainty) 사이의, 혹은 진리와 정당화 사이의 그리고 객관적인 진리와 주관적인 신념 사이의 결정적인 구분을 전제한다.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The Two Fundamental Problems)에서, 때때로 나는 이것들을 충분히 구분했다.
이 혼동이 흔한 언어적 용법에 의하여 제시된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그 혼동이 제노파네스(Xenophanes)에게까지, 심지어 호머(Homer)에게까지 거슬러 추적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의 개념이 보편적이라는 것은;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혼동은 많은 철학서에서 여전히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2) 나의 견해로는,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오직 한 가지 진리이론이 있다. 그 진리이론은, 서술이 사실과 혹은 실제와 일치하거나 대응한다면 서술이 참이라고 진술한다. 이 이론은 즉각 한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서술과 사실 사이의 “일치”나 “대응”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는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고 그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직감적으로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보통 우리는 사실들에 관하여 말하기 위하여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A 고양이가 여기서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에 관하여. 우리가 서술들과 사실들 사이의 대응을 설명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는 서술들에 관하여 – 즉, 특정 언어적 존재들에 관해서 – 그리고 사실들에 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타스키(Tarski) 이후, 우리가 언어적 존재들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언어는 “초언어(메타언어: metalanguage)”로 지칭되었다. 우리가 초언어로 말하는 대상 언어와, 우리가 관련하여 말하는 존재들에 대한 언어는 “대상언어(object language)”로 지칭된다. 우리가 대상언어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추가적으로 (보통 언어로처럼) 사실들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초언어는 타스키(Tarski)가 지칭하는 바 “의미론적 초언어(semantical metalanguage)”이다. 서술들과 사실들 사이의 대응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분명히 의미론적 초언어(semantical metalanguage)가 필요하다.
우리가 영어를 의미론적 초언어(semantical metalanguage)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예를 들어 “고양이 한 마리가 여기서 잠을 잔다(Eine Katze Schläft hier)”와 같은 독일어로 (대상언어) 된 서술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의미론적 초언어로 말할 수 있다:
독일어(대상언어) 서술인 “고양이 한 마리가 여기서 잠을 잔다(Eine Katze Schläft hier)”는 고양이 한 마리가 여기서 잠을 잔다는 조건으로만 사실들에 대응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서술들에 관해서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잠을 자는 고양이 한 마리와 같은 사실들을 기술하기도 하는 초언어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가 서술들과 사실들 사이의 대응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는 것은 –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 거의 하찮게 된다.
서술과 사실 사이의 대응에 관하여 말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그런 초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은 – 혹은 우리가 자신의 언어를 초언어로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 – 확실히 하찮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하기가 충분히 쉽다.
(대상언어) 서술과 의미론적 초언어로 기술될 사실 사이의 대응에 대한 이 설명으로써, 진리에 관한 대응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반대의견은 거짓으로 판명되어 서술이 사실들과 일치하거나 사실들에 대응한다면 서술이 참이라고 매우 일반적인 용어들로써 말할 수 있다.
(3)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심층적 요점들을 간략하게 언급할 것이다.
(a) “대상언어로 된 서술인 ‘고양이 한 마리가 여기서 잠을 잔다(Eine Katze Schläft hier)’가 사실들에 대응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독일어 서술에 관한 이 영어 서술은 (영어) 초언어(metalanguage)에 속한다. 타스키(Tarski)는, 역설들을 피하기 위하여 초언어(metalanguage)는 대상언어(object language)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술어 “사실들에 대응한다(corresponds to facts)”와 “참이다(is true)”는 초언어(metalanguage)에 속하여 특정 대상언어의 서술들에 관하여 말한다. 게다가 우리가 이 초언어(metalanguage) 술어들에 관하여 말한다면, 우리는 초-초언어(meta-metalanguage)로 말한다. 결과적으로 초언어들(meta-languages)의 계층이 있다. 우리가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 초언어(meta-language)의 술어들이, 그 술어들이 언급하는 대상언어들의 표현들보다 (예를 들어, 서술들) 이 계층에서 한 단계 더 높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 우리가 영어와 같은 동일한 자연언어를 초언어(metalanguage)로서 동시에 대상언어로서 사용할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b) “참(true)”이라는 단어는 자체의 모든 사용에서 초언어(metalanguage)에 속하지 않는다:
술어
“... 참이다(... is true)”는
항상 초언어(metalanguage)에 속하는데, 그곳에서 “...”은 대상언어 속의 한 가지 서술의 명칭에 (혹은 지정어[designator]) 의하여 대체될 것이다. 그러나 표현
“...는 참이다(It is true that...”는
초언어(metalanguage)의 표현이 아니지만, “...”를 대신해서 대체되는 표현이 속한 동일한 대상언어(object language)의 표현이다. 예를 들어 서술
“고양이 한 마리가 여기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참이다(It is true that a cat is sleeping here)”는
“고양이 한 마리가 여기서 잠을 잔다(A cat is sleeping here)와
동일한 언어에 속하고,
이 두 가지 서술들 중 어느 것에도 초언어적 특징이 없다: 두 가지 서술 모두 한 마리의 고양이에 관하여 말하고, 두 가지 서술 어느 것도 어떤 언어적 표현들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논리적 관점에서, 두 가지 서술 모두는 동일한 진리가치(truth value)를 지닌다: 두 가지 서술 모두가 참이거나 (한 마리의 고양이가 여기서 잠을 잔다면), 두 가지 서술 모두는 거짓이다 (고양이가 여기서 잠을 자지 않는다면). 논리적 관점에서, 두 가지 서술은 동일한 언어의 대등한 서술들이다.
대조적으로, 서술
“서술 ‘고양이 한 마리가 여기서 잠을 잔다’는 참이다(The statement ‘A cat is sleeping here’ is true)”
혹은, 더 간단하게,
“‘고양이 한 마리가 여기서 잠을 잔다’는 참이다(‘A cat is sleeping here’ is true)”는 서술 “고양이 한 마리가 여기서 잠을 잔다(A cat is sleeping here)”가 속하는 저 대상언어(object language)의 초언어(metalanguage)에 속한다.
우리가 방금 고찰한 사례에서, 술어 “... 참이다(... is true)”는 처음에 중요한 기능을 하지 않는 것으로 – 표현 “...는 참이다(It is true that...)”보다 더 중요한 기능을 하지 않는 것으로 –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초언어적 규칙들을 정할 수 있다:
“모두 참인 서술들의 집합으로부터 (혹은 체계), 거짓 서술은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없다.”
여기서 초언어적 용어인 “참(true)”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우리가 이 규칙을 대응이론에 따라서 해석한다면 훨씬 더 분명해진다:
“사실들에 대응하는 이론들로부터 (서술들의 체계들), 사실들에 대응하지 않는 서술들은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없다.”
이 규칙은, 부분적으로, 과학에서 우리가 진리를 탐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참인 이론들을 찾는.
(4) 진리에 관한 대응이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확대될 것이다:
영어로 된 서술이 참된 서술이라면, 분명히 그 서술과 대등한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기타 등등으로 번역된 서술도 또한 참일 것이다: 서술은 자체와 대등한 번역본들의 등급과 함께 참이거나 거짓이다. 그리하여 진리와 거짓은 개별적 서술의 속성이라기보다는 그 개별적 서술이 지닌 의미의 속성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서술이 지닌 의미는 그 서술과 대등한 번역본의 등급으로서, 혹은 모든 대등한 번역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것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그리하여 서술은 그 서술이 지닌 의미가 참이라면 참이다; 다시 말해서, 서술 및 그 서술과 대등한 것들이 사실들과 대등하다면.
유사하게 신념과 아이디어는, 이 신념이나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서술이 참이라면, 참이라고 지칭될 것이다.
분명히 타스키(Tarski)의 대응이론을 이렇게 모두 확대하여도 중요한 것이 변하지 않는다. 그 모든 확대는, 진리나 거짓이 근본적으로 언어적으로 표현된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서술들의 속성이라는 개념을 공유한다.
대응은 우리가 받는 정신적 인상(印象: images)이나 구상들(conceptions)과 사실들 사이의 유사성에 – 말하자면 정신적인 사진과 그 사진의 대상 사이의 유사성에 – 놓여있다는 일반적인 개념은 – 버트런드 러셀이 또한 주장하는 – 내가 보기에 근본적으로 오해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그런 상태로의 대응이론을 포함한다는 정도까지는 옳다. 그러나 간과되는 것은, 심지어 시각장애이자 청각장애-언어장애인 사람도 헬렌 켈러가 그랬던 바와 같이 개인이 한 가지 언어를 배워서 통달하면 진리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 사용법을 배우지 못한 인간은 진리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5) 우리가 대응이론을 – 서술이 담고 있는 진리는 사실들과 그 서술의 대응에 놓여있다는 주장 – 수용한다면, 우리가 확신이나 확실성으로부터, 혹은 정당화가능성, 결정가능성이나 논증가능성으로부터 진리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우리는 어떤 서술이 참이라거나 어떤 서술이 거짓이라고 다소 확인하거나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한편으로 확신과 확실성과 다른 한편으로 진리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어떤 서술의 논증가능성이나 정당화가능성은 그 서술의 진리를 수반한다; 그러나 그 역순은 그렇지 못하다: 한 가지 서술은 논증될 수 없거나 어떤 다른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없이도 사실들에 대응할지도 모른다 (그 서술은 참일지도 모른다).
(6) 서술이 결정될 수 있는지의 문제와 – 서술이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지의 문제 – 그 서술이 진리인지의 문제를 선명하게 우리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은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The Two Fundamental Problems)에 있는 어떤 형편없는 표현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위해서도 특별히 중요하다. 당시 나는 이 구분에 관하여 내 자신의 생각에서 항상 충분히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그리고 재차 나는 결정가능성을 (검증가능성, 반증가능성) 의미하는 “유효성의 유형”에 대하여 언급했다; 다시 말해서, 서술이 참이거나 혹시 거짓이라고 증명하는 가능성. 한편으로 결정될 수 있는 참이나 거짓과 다른 한편으로 진리가치를 (즉, 참과 거짓) 내가 항상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때때로 나는 “참(true)”을 “결정가능하게 참(decidably true)”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7) 보편이론들(universal theories)은 근본적으로 가설적이거나 추측적인데 왜냐하면 그 이론들이 결정가능하게 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이론들이 참이 아닐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우리가 그 이론들의 진실성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참(true)”이 “결정가능하게 참(decidably true)”이나 “확실하게 참(certainly true)”과 충분히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설들을 “허구(fictions)”라고 부르는 (파이잉어[Vahinger]가 지칭하는 의미에서) 지점에 쉽게 도달할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The Two Fundamental Problems)에서 왕왕 저지르는 또 다른 실수이다; 심각한 실수이다.
다른 저술가들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많은 세월이 흘러도) 또한 발견되는 이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본서에 있는 다른 구절들에는 이 동일한 실수들이 없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런 실수들은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
(8) 나는 이제 내가 구획설정의 기준(criterion of demarcation)이라고 부르는 이론들이 (서술들의 체계들) 지닌 경험-과학적 특성에 대한 기준을 토론할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나는 경험적 반증가능성(empirical refutability)을 (“오류증명가능성: falsifiability”) 구획설정(demarcation)의 기준으로서 제안했다. 이론은, 그 진실성이 이론을 반증할 관찰서술들(observation statements)이 (“기초서술들[basic statements]”, “시험서술들[test statements]”) 존재한다면, 경험적으로 반증되거나 오류로 판명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관찰서술들. 혹은 반증가능성에 대한 그런 서술들의 존재를 요구하는 대신에, 우리는 관찰될 수 있는 가능한 사건들의 존재를 동등하게 요구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발생이 논의가 되고 있는 이론에 의하여 배제되고 “금지되는” 사건들의 존재. 때때로 나는 그런 가능한 사건들을 “잠재적 오류증명사례들(potential falsifiers)”로 지칭한다.
극단적인 사례를 들면: (가령) 6 시간동안 태양의 (겉으로 보이는) 움직임 방향에서 역방향이 나타나면, 아낙시맨더(Anaximander)와 프톨레마이오스(Ptolemy)에서부터 뉴튼과 아인슈타인까지 거의 모든 천문학적 이론들에 대한 잠재적 오류증명사례(potential falsifier)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이론들 모두는 반증될 수 있다: 그 이론들은 모두 경험-과학적 이론들이다 (그 이론들에는 “경험적 내용”이 있다).
(9) 나의 구획설정 기준은 공상적인 방식들로 자주 오해를 받았다. 예를 들어 “오류증명가능성(falsifiability)”이라는 용어는, - 그 용어를 두덴 사전(Duden)에서나 혹은 어떤 다른 사전에서 성실하게 찾아본 사람에 의하여 명백하게 - “반증가능성(refutability)” 대신에 “위조되거나 부패하기 쉬움”으로서 설명되었다.
혹은 그렇지 않으면, 구획설정(demarcation)의 목적은, 내가 경험과학들(empirical sciences)에서 현재 수용된 이론들을 규정하고 싶어 한다고 전제함으로서, 철저히 오해되었다; 반면에 사이비-과학 이론들로부터, 그리고 또한 논리학과 순수수학과 형이상학과 인식론과 일반적인 철학으로부터, 낡았거나 반증된 경험-과학적 이론들을 포함하여 경험-과학적 이론들로 정말로 간주될 수 있는 명제들에게 구획을 설정하는 것이 나의 의도였다. 또 다른 전제는, 구획설정 기준에 의하여 배제되는 모든 서술들은 “무의미한” 혹은 “비-합리적인” 혹은 “수용될 수 없는”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내가 제안했다는 것이다.
관심이 있는 학생들 거의 모두는 (그리고 교수 한 명 이상) 처음에 나의 구획설정의 기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이 구획설정의 기준 자체가 경험적으로 반증될 수 있는가?” 물론 그것은 경험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데, 이유인즉 나의 구획설정 기준은 결국 경험-과학적 가설이 아니라 철학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초과학(metascience: 메타과학)의 주장. 그리고 그 외에도 나의 구획설정 기준은 신조가 아니라 제안이다: 진지한 토론들을 통하여 잘 입증된 제안.
그리하여 구획설정의 기준은 비-경험적이다. 구획설정 기준은, 생존하는 과학자들을 연구함으로써든 혹은 과학의 역사를 연구함으로써든 과학자들이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구획설정의 기준은 과학의 역사에서 우리에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구획설정의 기준이 경험과학의 역사에 포함할 것과 포함하지 않을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잠재적 오류증명사례(potential falsifier)가 실제로 출현해서 관찰서술인, 주어진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 “기초서술(basic statement)”이 참이라면; 또는 – 동일한 것에 해당한다 – 이론에 의하여 금지된 사건이 정말로 발생한다면, 이론은 오류로 증명된다; 그 이론은 거짓이고 반증된다. 그런 거짓, 오류로 증명된 이론은 분명히 오류로 증명될 수 있고 그리하여 그 이론에 대한 반증으로 인하여 그 이론이 거짓으로서 (그러나 비과학적으로서는 아니다), 수용된 과학의 가설들로부터 배제된다할지라도 그 이론은 경험-과학적 특성을 지닌다.
그리하여 태양이 (겉으로 보기에) 정지하거나 지구가 갑자기 대참사 없이 회전을 멈춘다면, 뉴튼의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천문학과 물리학은 반증될 것이다. 그들의 천문학과 물리학은 인류가 멸종한 후에 사건이 발생한다면 또한 반증될 것이어서 누군가에 의하여 관찰될 수가 없다: “관찰될 수 있는 사건”은 원칙적으로 합당한 장소에 합당한 관찰자가 있어야 관찰될 수 있는 사건이다.
아인슈타인과 뉴튼의 중력 이론들과 같은 이론들에는 무한한 숫자의 잠재적 오류증명사례들(potential falsifier)이 있다. 행성들과 위성들의 많은 가능한 움직임들이 이 이론들에 의하여 절대적으로 금지된다.
어떤 움직임들은 첫눈에 보기에 배제된 (“금지된”) 듯이 보일 테지만, 그 움직임들은 특정 조건들 하에서만 금지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모든 행성들을 알고 있고 그 모든 행성들을 고려했다는 전제를 근거로만.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계산된 천왕성의 궤도에서의 편차가 해왕성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처음에 뉴튼 이론을 오류로 판정한 것처럼 보였던 한 가지 사건이 그 이론의 확신적인 승리로 바뀌었다.
나는 자주 이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나의 과거 제자들 중 몇몇은 이 사례를 오해했다. 미지의 (그리고 아마도 보이지 않는) 질량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그들은 뉴튼 이론에 대한 추정적 오류판명이 승리로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물리학적 (혹은 수학적) 오류이다. 첫째, 원칙적으로 관찰될 수 있지만 그런 보조적 가설을 (예를 들어 갑작스러운 움직임들의 반전) 통하여 설명될 수 없는 많은 움직임들이 있다. 둘째, 우주탐사를 이용하여 보이지 않는 추론된 행성이나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질량이 계산된 위치에 정말로 존재하는지를 우리는 알아낼 수 있다.
그리하여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뉴튼 이론에 의하여 배제되는 무한한 숫자의 가능한 행성 움직임들이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적 이론들에 (프로이트, 아들러[Adler], 융[Jung]) 의하여 배제되는 가능한 인간 행동은 없다.
여기에서 예상되던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부인한 결정적인 대비를 우리는 경험한다.
(10) 지금까지 나는 오류로 판명하는 실제적 사건들을 (다시 말해서 오류로 판명하는, 실제적 사건들) 혹은 오류로 판명하는 참인 서술들에 관하여 언급했다.
그런 오류로 판명하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고 그리고 대응하는 오류로 판명하는 서술이 참이라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이 문제는 그런 상태로서의 구획설정 기준과 관계가 없다. 구획설정의 기준은, 원칙적으로 가능한 사건들과 기초서술들에만 관련된다. 그리고 매우 명백하게, 여기에 검증가능성(verifiability)과 오류증명가능성(falsifiability) 사이의 비대칭이 존재한다. 어떤 보편이론들은, 원칙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사건에 의하여 (혹은 대응하는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기초서술에 의하여) 오류를 판정되고 반증될 것이다; 그러나 그 보편이론들은 그런 사건에 의하여 또는 그런 서술에 의하여 정당화되거나 검증될 수는 없다.
이 비대칭은, 우리의 관찰행위들로써 경험적 확실성에 도달하는 문제들 중 어떤 문제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근본적인 논리적 사실이다.
(11) 이 문제들은 정말로 존재하며, 나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이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구획설정의 기준으로서의 오류증명가능성(falsifibility)과 관련이 없다.
그 문제들은, 관찰을 통하여 사실상 우리가 이론의 오류를 판정했는지의 문제와 관련될 따름이다. 오류증명(falsification)이 실제로 발생했는지의 문제는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원칙적인 잠재적 오류증명가능성(falsifiability)의 문제와 (다시 말해서 구획설정의 기준이라는 문제와)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오류증명주의(반증주의: falsificationism)”이라는 용어는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 몇몇이 너무 자유롭게 퍼뜨리는데, 이 두 가지 문제들을 혼동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마도 나의 발표가 항상 충분히 분명했던 것은 아니다.
(12)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진 근본적인 문제(The Two Fundamental Problems)에서 나는 특히 “최종적 오류증명가능성(final falsifiability)”과 같은 것들을 언급했다. 이제 이미 제안된 바와 같이 최종적 오류증명가능성(final falsifiability)은 정말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강력하게 강조한 바와 같이, 관찰을 통한 의심할 수 없는 (혹은 최종적[final]) 오류증명(falsification)과 같은 것들은 거의 확실하게 없다. 이것이 정확하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이자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 모든 과학적 지식의 불확실성이 입장하는 곳이다. 우리가 아마도 틀렸었을 것임은 항상 – 또는 적어도 모든 중대한 경우들에 거의 항상 – 가능하다.
우리가 틀릴 리가 없다는 경우들이 – 사소한 경우들 - 있다는 것은 물론 인정될 것이다. 확실히 여하한 숫자의 그런 사례들이 있지만 그 사례들은 흥미롭지 못하다. 과학이론들은 일반적으로 오류증명(falsification)에 대항하여 면역력을 갖출(immunized) 수 있다. (“예방접종[immunization]”이라는 용어는 한스 알베르트[Hans Albert]에 의하여 최초로 사용되었고,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대신에 나는 “규약주의적 책략[conventionalist stratagem]”에 관하여 다소 서투르게 언급한다.) 모든, 혹은 적어도 거의 모든 과학이론들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면역가능성(immunisability)은 내가 과학이론들의 오류증명가능성(falsifiability)이라고 부르는 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구획설정 기준의 의미에서 그 과학이론들에 대한 오류증명가능성(falsifiability): “잠재적 오류증명사례들(potential falsifiers)”의 존재.
(13) 오류증명주의(반증주의: falsificationism)라는 용어와 (지금은 내가 회피하고 싶은) 관련하여, 내가 오류증명(falsification)이 중요하다거나 검증(verification)보다 더 중요하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음을 나는 말하고 싶다. 오류증명가능성(falsifiability)은 중요하다 (그리고 검증가능성[verifiability]보다 더 중요한데 정확하게 이유는 검증가능성[verifiability]이 과학이론들에는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히 중요한 것은 비판적 태도이다: 비판적 방법.
비판적 태도는, 우리가 이론들을 검증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론들의 오류를 증명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규정된다. 검증사례들(verifications)은 하잘것없다: 검증사례들(verifications)은, 우리가 찾기만 하면 쉽게 얻어진다. 유일하게 중요한 검증사례들(verifications)은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 오류증명(falsification)을 진지하게 시도해서 오류증명(falsification)이라기보다는 검증(verification)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그런 경우들에도 물론 동일한 이론에 대한 다음 시험이 오류증명(falsification)을 야기할 것은 항상 가능하다.
비판적 태도는 – 분명히 – 오류를 찾는 태도이다. 이것은 경험적 이론들을 시험하는 것에 뿐만 아니라, 더욱 일반적으로, 철학적 이론들에 대한 비판에도 적용된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쉽게 교정될 수 있는 오류들을 심사숙고해서는 안 되지만, 가능하면, 진지한 비판을 시작하기 전에 그 오류들을 수정해야 한다.
비판적 태도의 중요성, 검증사례들(verifications)을 찾는 거의 항상 성공적인 행위들과 반대로서 오류증명사례들(falsifications)의 중요성은 귀납주의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에 의하여 밝혀졌다;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은 검증사례들(verifications)은, 성공하지 못한 오류증명사례들(falsifications)이 되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14)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The Two Fundamental Problems)에서 귀납법의 원리(principle of induction)에, 다시 말해서, 참이라면 귀납적 추론들을 유효하게 만들 원리에 대하여 나는 자주 언급한다. 귀납법의 원리에 대한 사례로서 내가 인용하는 것은 (나의 논증에 대해서는 혹시 중요하지 않을지라도) 귀납법의 원리로서는 부절적하다. 적어도 처음에 만족스럽게 보일 귀납법의 원리를 서술하는 것이 가능한지 나는 의심한다. 가능한 귀납법의 원리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세상의 구조는 그러해서 적어도 1,000가지의 검증하는 개별적인 경우들에 (베이컨이 의미하는 바로는 ‘사례들’) 의해서 지지를 받는 가능한 (가설적) 규칙은 보편적으로 유효한 규칙이다.”
그런 규칙은, 개별적인 경우들을 보편적 법칙인 결론으로 기술하는 1,000가지 전제들로부터 도출된 귀납적 추론에 대하여 주요 전제로서 사용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물론 여하한 그런 원리도 거짓이다. 우리가 경우들의 숫자를 얼마나 많이 확대하는가와 관계없이, 그런 원리는 항상 거짓이다. 시계추는 어떤 횟수에도 왼편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시계추가 항상 왼편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시기상조인 일반화를 경계하기 위하여 부정적인 경우들을 찾으라는 베이컨(Bacon)의 권고에 도달한다.
그러나 심지어 그것도 불충분하다. 부정적 경우들이 없는 것과 관련하여 일련의 긴 긍정적인 경우들도 법칙-같은 규칙성을 확립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것에 관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사례들이 – 자의적으로 긴 일련의 긍정적인 경우들에 의하여 그리고 부정적인 경우들이 객관적으로 없음에 의하여 지지를 받지만 완전히 새로운 부정적인 경우에 의하여 반증되는, 오랫동안 유효한 것으로 보였던 귀납적 법칙들의 사례들이 (나는 그 사례들을 “없다 서술들[there-is-not statements]”이라는 형태로 표현할 것이다) - 있다. 사례들: “길이가 1,000미터 넘고 폭이 30미터 미만이 구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 “2톤을 초월하는 무게가 나가는 새들이나 비행기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새로운 발명과 그 발명의 결과들과 동시에 당시까지 수 천년동안 혹은 그 보다 더 길게 유효하게 보였던 한 무리의 귀납적 추론들이 반증되는 것을 즉각 본다. 진지하게 고려되려면, 귀납법적 이론은 그런 귀납적 추론들을 배제해야 할 터이다. 나는 그런 이론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 심지어 이와 같이 어떤 일을 하겠다고 열망하는 이론 한 가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유효한 귀납적 추론에 대한 요구는 귀납법 원리의 표현을 낳고 그리하여 무한소급(無限遡及: infinite regression)을 낳는다; 분명히, 보통이라도 합당한 귀납 원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심지어 가능하지 않다.
(15) 귀납주의(inductivism)의 근본적인 약점은 어디에 놓여있을까? 그 약점은 귀납주의의 목표에 놓여있지 않다: 귀납주의(inductivism)와 연역주의(deductivism)는, 법칙-같은 규칙성들을 발견하여 그 규칙성들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자연적인 사건들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지식의 목표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 최종적인 귀납주의의 약점은, 인간 정신에 관한 귀납주의가 지닌 극단적으로 인기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잘못된 이론인 백지상태(tabula rosa) 이론에 놓여있고 그 이론을 나는 “정신에 관한 양동이 이론(bucket theory of the mind)”라고 지칭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감각들은 “자료들”을 (“감각 자료들”)을 제공하고 우리의 지식은, 본질적으로, 이 “주어진 것들”에 대한 수동적 표현이다.
대조적으로 나의 이론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없다 이다; 우리의 감각기관들은 돌연변이의 결과인 이미 능동적인 적응행위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각기관들은 가설들에 대한 선도자들이다; 그리고 모든 가설들은 적응에 대한 능동적인 시도들이다.
우리의 발명품들이 자연선택에 의하여 통제된다할지라도 우리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이고 발명적이다. 그리하여 자극-반응 도식은 돌연변이-선택 도식에 (돌연변이 = 새로운 행위) 의하여 대체된다. 고등동물들의, 그리고 특히 인간의 삶은 일상적이지 않다. 그리고 특히 지식 습득과 과학은 일상적이지 않다.
지식 습득에 대한 이 특이한 개념설정은 쉽게 수용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경험은,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재앙적으로 감소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눈을 감을 필요만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 세계에 의하여 즉각 다시 한 번 수동적으로 가르침을 받아 눈을 뜰 필요만 우리에게 있다고. 그러나 이 기술(記述)은 오해를 낳는다. 우리의 지각행위는 능동적이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다할지라도, 우리의 지각행위는 가설들을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행위이다.
지식 습득에 대한 (그리고 정말로 인간 삶에 대한) 이 새로운 개념설정이 수용될 때까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아마도 지속적으로 귀납법을 신뢰할 것이다.
(16) 이 서문의 마지막 요점으로서, 특정 절들을 소활자로 인쇄하기로 편집자와 합의했음을 언급하고 싶은데 이유인즉 내가 그 절들로부터 내 자신을 분리하고 싶기 때문이다. 첫째, 그 절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용어사용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둘째, 용어사용법이 (부분적으로 카르납[Carnap]의 고도로 독창적인 기호논리학 개요[Abriß der Logistik]에 근거한) 낡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드물게 사용되는 (혹은 카르납[Carnap]이 당시에 사용했던 의미에서 드물게 사용되는) 용어들 중 하나가 “기호논리학(logistic)”이라는 용어이다. 우리는 지금 “상징적(symbolic)”이나 “수학적 논리학(mathematical logic)”이라고 말한다. 카르납(Carnap)은 또한 “일반적인 함의(general implication)”이라는 구절을 (때때로 그는 자연법칙을 언급하기 위하여 그 구절을 사용한다) 사용한다. 역시 낡은 것은 연역법에 대한 핵심적인 개념의 분석이다. 우리는 함의와 (형식적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논리적인 추론가능성(derivability)이나 연역가능성(deducibility) 뿐만 아니라, 논리적 연역과 논리적 증거를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카르납(Carnap)의 기호논리학 개요(Abriß der Logistik) 이후에만 실제로 – 적어도 나에게는 – 분명해졌다.
버킹엄셔(Buckinghamshire), 펜(Penn)
1978년 11월
해설 [1933년]
[1.] 목차에 관한 언급. 본서는 지식론이다. 본서는 “경험에 관한 이론”, 다시 말해서, 과학적 경험에 관한 이론이다. 본서는, 모든 과학적 “경험들”은 가설들을 전제한다는 것을 그리고 과학적 경험은 이론을 만들어내서 시험하는 방식으로서 규정될 것을 밝힌다.
본서는 인식론에 관한 고전적 문제들과 현대적 문제들 모두의 (이 두 가지 문제들 사이의 관계는, 그 문제들의 중요성이 – 부분적으로 – 인식되지 않는 반면, 부분적으로 오해된다) 근저에 있는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을 확인하고자 한다. 본서는 궁극적으로 이 문제들을 한 가지 문제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본서는, 내재적 비판(immanent critique)에 대한 각각의 주제들인 흄(Hume)과 칸트 이후에 제시된 가장 중요한 인식론적 해결책들을 체계적으로 제공하여, 각 입장의 내부적 모순들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다음 해결책을 시도하게 되었는지를 밝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본서는, 이 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했던 이전에는 인식되지 않고 연구되지 않은 예상들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해결책을 제안한다.
[2.] 현대 지식론에 대한 본서의 관계에 대한 언급. 자연과학을 지향하는 본서의 문제 형성과 문제 형성 방식 때문에, 본서는 현대의 (“논리적으로” 지향된) “실증주의(positivism)”에 (버트런드 러셀, 모리츠 슐릭[Moritz Schlick], 필립 프랭크[[Philipp Frank],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본서는 자체의 가장 상세한 비판들을 그 운동에게 바치고, 본서는 이 실증주의 철학이 실패하는 “실증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을 폭로하고자 한다. (본서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 대한 최초의 광범위한 토론을 담고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의 저서는 실증주의에 관한 가장 현대적인 형태의 성경으로 거의 지칭될 수 있다.) 다른 현대 철학들 가운데서, 규약주의(conventionalism)는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é], 후고 딩글러[Hugo Dingler]) 특별히 비판적인 주목을 받는다.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 - 서문 -.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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