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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한 이유와 게으른 이유/강명관

이윤진이카루스 2015. 3. 6. 09:41

문화

학술

‘동창이 밝았느냐’와 달관세대

등록 : 2015.03.05 20:25 수정 : 2015.03.05 20:25

강명관의 고금유사

심재완 선생의 <역대시조전서>를 뒤적이다가 익히 아는 시조에 눈이 꽂혔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 원래 작자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 아는 이 시조를 찬찬히 뜯어보면 상식과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소를 치는 아이놈’은 제 자식이 아니라 시조의 작가가 소유하고 있는 ‘노비’일 것이다. 노비가 아침 일찍 일어나 일을 하지 않으니 빨리 일어나서 산 너머 있는 사래(이랑)가 긴 밭까지 빨리 경작하라는 말이다. 주인은 밭도 있고 소도 있고 노비도 있다. 말하자면 지주다. 지주는 노비를 부려 땅을 갈고 그 생산물을 갖는다. 노비가 부지런해야 생기는 것도 많다. 하지만 노비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근골을 수고롭게 하여 일을 한다 해도 그 땅에서 나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니다. 부지런을 떨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시조를 보자니 과거 읽었던 장지연의 글이 떠올랐다. 이 계몽주의자가 내세운, 타파해야 할 한국인의 습성에는 ‘게으름’이 들어 있었다. 사지 멀쩡한 사내들이 도무지 일을 하지 않고 양지쪽에 앉아 담배를 물고 객쩍은 농담이나 지껄이고, 어쩌다 돈이 조금 생기면 술추렴을 하거나 노름판을 벌이며 세월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글에서 장지연은 전혀 딴 이야기 하나를 전하고 있다. 만주로 가서 황무지를 개간해서 사는 조선 사람을 보면 게으르기는커녕 부지런 그 자체라는 것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부지런히 땅을 일구어 늘리고, 번듯한 집을 지어 부모와 처자식을 알토란처럼 건사하더라는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던가? 아무리 일해도 자신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이 없을 때, 그리하여 미래가 보이지 않으면 삶을 포기하게 된다. 노비에게는 일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을 수 없다.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는 토지 없는 농민 역시 삶을 포기한다. 장지연이 일하라고 그토록 다그쳤던 게으른 농민은 그렇게 나타났던 것이다. 게으른 농민의 출현은 곧 망국의 조건이었다. 노동할 의욕을 잃은 나태한 사람들에게 나라가 망한다고 다급하게 외쳐본들 그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지켜야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달관세대’란 말을 들었다. 멋있게 ‘달관’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적극적으로 일할 의지를 상실한, ‘게으른 인간’의 출현을 의미한다. 계약직, 알바, 파견근무, 열정페이, 비정규직이란 어휘가 범람하고, 노동소득분배율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이 사회에서 아무리 노력을 바친들, 보상은 너무나 빈곤하다. 처음에는 노력하면 되는 줄 알지만 기대했던 보상은 없고,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행위라는 것, 그리고 노력을 권하는 그 거룩한 말씀들이 결국 사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생을 포기한다. 게으름을 떨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사회 자체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지만, 그건 구호일 뿐이고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 같다. 아니 그들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다. ‘동창이 밝았느냐’를 아무리 외쳐본들 누가 사래 긴 밭을 갈려고 할까. ‘달관세대’의 출현에서 나는 이 사회가 붕괴하는 조짐을 본다.

강명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