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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문재인 그리고 '정의'/한성안,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2. 16. 09:46

경제

경제일반

박정희, 문재인 그리고 ‘정의’

등록 : 2015.02.15 19:55 수정 : 2015.02.15 19:55

 정의란 무엇인가? 경제학자가 뜬금없이 웬 정의냐고 의아해할지 모른다. 나아가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적잖은 경제학자들이 이 질문을 회피하거나 심지어 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법학자 한스 켈젠이 역설한 바와 같이 “이 질문만큼 격렬하게 토론되었던 문제도 없었으며 이 질문만큼 고귀한 피와 쓰라린 눈물을 수없이 흘리게 했던 질문도 달리 없었다. 그리고 이 질문만큼 플라톤으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사상가들이 깊이 생각하고 괴로워한 문제도 달리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고민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위대한 사상가들만 정의를 논하지 않았다. 만민이 쉽게 다가가는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정의에 관한 기독교인의 고민은 ‘십계명’으로 구체화되었다. 나아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예수의 언명에서 말씀은 바로 정의다. 몇년 전 마이클 샌델이 불러일으킨 ‘정의 열풍’은 또 하나의 사례다.

정의는 서양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대 중국 맹자는 ‘4단’을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았다. 여기에 포함된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인간의 본성이다. 맹자가 보기에 이게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사람대접 받고 싶으면 정의롭게 행동하란 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사상가들은 물론 모든 사람이 정의에 관해 이처럼 깊이 고민한다면 경제학자들도 그래야 마땅하다. 경제학자들의 고민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가치판단 논쟁’에 반영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경제학 연구에서 도덕적 가치를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해도 되는지에 관한 논쟁이다. 구스타프 폰 슈몰러 등 역사학파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이 가치판단을 배제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 반면, 막스 베버와 베르너 좀바르트는 경제학이 가치판단으로부터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이 논쟁 이후 역사학파 경제학의 관점은 케인스경제학, 제도경제학, 진화경제학 등 비주류 경제학에 접목되었다. 반면 경제학이 정의와 같은 도덕적 가치를 배제해야 한다는 관점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이들은 설파한다. ‘경제적 이익과 출세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정의는 무슨 얼어 죽을 정의냐, 이웃과 민족이 대수냐? 나만 살면 되지. 박정희 대통령도 그렇게 살아 출세하셨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현재 한국 대학에서 주류다. 그리고 그것은 정의를 조롱하는 한국 보수 정치인들의 삶을 미화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 결과는 어떤가? 정의가 메마른 자본주의경제다! 정의가 사라지니 요즘 이 땅은 막장이다. 사람은 없고 금수만 우글거린다.

한성안 영산대 교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박정희 묘소를 참배했단다. 집권해 진보의 뜻을 펴자면 전략적으로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때, 대한민국은 상식적 사회, 나아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로 되는데 비주류 경제학자로서 걱정이 앞선다. 하여, 정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굳은 신념을 그에게 상기시켜주고 싶다. “정의는 아름다운 덕이다. (…) 정의는 모든 덕 가운데 가장 큰 덕이며, 저녁 별도 샛별도 정의처럼 아름답지는 못하다.” 그래야 ‘사람 사는 세상’도 온다.

한성안 영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