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시

수렴동 계속에서 까마귀가 울다

이윤진이카루스 2010. 8. 1. 12:18

가을이 오는 백담사 오르는 길에

흰 바위를 감고 물이 흐르는데

모래톱에 짐승 발자국이 어지럽고

푸른 작은 새가 아장거리다 날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은데

물은 푸르러

높고 깊은 땅을 지나며 세월을 먹었다.

설악은 물 보러 가는 곳,

스미고 돌고 솟아 아래로 흘러

태초의 푸름이 여전한 까닭은

봉우리마다 골짜기마다

인적이 찾지 못해서 일 게다.

 

봉우리 아래는

꿈꾸듯 생각하고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산에 떨어져 이렇게 씻기고 저렇게 부딪쳐

정화(淨化)의 끝을 색깔로 증명하며

설악의 물은

슬픔을 지나고 상처를 보듬고 침묵을 배웠다.

 

억만년이 흐르면 미륵불이 온다고,

정토(淨土)가 온다고

그런 말을 누가 못할까?

그대는 아직 사하촌(寺下村)에서 조금 떨어져 

준령을 보고 있지?

우주는 팽창하고 태양은 폭발하기에

미래에 지구에서 생명이 사라진다고 말하라.

 

백담사 만해기념관에서

만해가 심술궂게 노려보는데

앉아서 풀어놓은 과일에

왕벌이 달려든다.

음, 잎사귀에 물이 들면서

꽃은 모두 졌지만

생명은 끝까지 살려고 한다오.

그렇게 절집에서도 삶은 이어졌다,

백담사 계곡에 쌓인 돌탑들이 서있듯.

 

사람 때문인지, 그악스런 까치 때문인지

도시를 떠난 까마귀가 수렴동에서 울었는데

높은 나무 위에서 검은 자태는 숨어

까악 까악 울었다.

 

어디까지 왔는지

꼭대기가 가려져 시야 밖에 머무는데

길이 갈라져 있기 때문,

청봉은 만년설 꿈을 꾸며 유린된 몸을 가눈다.

목적지는 하나로 길은 여러 갈래,

이정표를 따르지만

종착지는 멀리 달아난다.

 

영시암에 심은 무와 배추는

추위에 벌레가 맥을 못 춰

튼실하고 눈 덮인 골짜기를 짐작한다.

불자들이 삶아내는 국수를

발우에 받아 열무김치를 얹고

아내는 긴 줄을 벗어나서 그릇을 비우고

보시함에 지폐를 넣는다.

 

고개 넘어 수렴동 대피소 가는 길에서

사람들은 봉정암에서 잘 마음을 먹고,

내일이면 청봉에서 안개를 만나거나

동해에 뜨는 해와 우주가 숨쉬는 절벽을 

내려다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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