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일본 지배세력은 일본과 조선, 만주, 중국 북부지역을 통치하면서 유럽 식민지였던 동·서남아시아 지역까지 영향력 아래 두는 제국 일본 건설을 꿈꿨다. 사진은 일제 때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병사들이 행진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
일본 자위대 준장 출신 군사전문가
천황 직속 참모본부의 통수권 독립과
육군대학 교육 실패를 원인으로 지목
진짜 원인은 침략전쟁 자체가 아닐까
쿠로노 타에루 지음, 최종호 옮김
논형·1만8000원 승승장구하던 ‘근대의 우등생’ 일본은 왜 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에서 무참하게 패배했을까?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일본 방위대를 졸업하고 육상자위대 육장보(준장)로 퇴임한 뒤 방위연구소 전사(戰史)부 주임연구관, 대학 교수 등을 지낸 군사전문가 구로노 다에루의 <참모본부와 육군대학교>는 천황 직속의 일본 육군 두뇌조직인 참모본부와 거기에 인재를 공급한 육군대학의 실패를 그 핵심 이유로 꼽는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참모본부의 군통수권 독립과 육·해군 갈등, 단기 군사전략에 치중하면서 정치·외교·경제까지 포괄한 장기적 정략(政略)에는 무지했던 육군대학의 교육 실패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3월 말 일본 육군은 그해 안에 중국과의 전쟁이 해결되지 않으면 병력을 중국 본토에서 차차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1931년 만주 침략 뒤 만주 괴뢰국까지 세운 일본 육군은 1937년 그 여세를 몰아 중국 본토 침공에 나선다. 원래 육군 참모본부 내에는 이시하라 간지 제1부장 등 중국과의 확전 불가론자들이 있었고 당시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도 중국과의 전쟁 확대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적어도 10년간은 만주국을 제대로 키워 소련의 남하정책에 대비하고 중국과는 물론 중국문제로 일본과 갈등이 시작된 미국과도 가능한 한 충돌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 참모장 등 관동군과 조선군사령관 고이소 구니아키 중장 등이 확전을 고집했다. 일본 육군 중앙부 대부분과 관동군 등 확전론자들은 중국 침략을 쉽게 생각했다. 그들은 중국을 통일될 수 없는 분열적 약소국으로 인식하고 일본이 일격을 가하면 금방 굴복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전쟁은 장기 지구전으로 빠져들었다. 일 육군 중앙부의 철수 결정은 중일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일본의 대소련 정책과 대미·영 정책이 파탄나고 일본제국 기반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육군 중앙부의 이런 판단은 1940년 5월 독일의 서부전선 공세가 놀라운 성공을 거두면서 뒤집힌다. 독일의 승승장구에 현혹된 일본군 수뇌부는 거기에 편승해 장제스를 굴복시키고 동남아로 진출하자는 쪽으로 방침을 바꿨다. 대동아공영권 구상은 그 구체적 표현이었다. 그들은 왜 그토록 무모하게 돌진했을까? 구로노는 정한론자 사이고 다카모리가 메이지 10년(1877)에 중앙정부에 대항해 일으킨 세이난(西南)전쟁 뒤 만들어진 참모본부 등장 과정부터 실패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본다. 육군을 장악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참모본부장은 사이고 뿐만 아니라 당시 등장했던 자유민권운동 등의 정치적 반대파의 영향으로부터 군대를 격리시켜 비정치화하고 통수권을 강화해 자신의 권력 장악 방편으로 이용했다. 참모본부의 이 통수권 독립을 토대로 군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전쟁으로 폭주했다. 참모본부 체제의 또 하나의 중대 결함은, 해군의 성장과 함께 해군 참모본부인 해군군령부가 설치되면서 일본군 군령 기능이 육군과 해군으로 이원화한 것이다. 이로 인한 육·해군의 권력투쟁을 해소하기 위해 만든 ‘통합참모본부’도 육군 우위를 지키려는 육군 주류파의 공작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나중의 전쟁지도 최고기관 대본영으로도 그런 고질적인 문제를 치유하지 못했다. 이 문제와 밀접하게 얽힌 또 하나의 문제가 육군 중추를 장악한 인재 양성기관 육군대학 교육 내용의 실패였다고 지은이는 진단한다. 그에 따르면 독일에서 직수입한 육군대학 커리큘럼은 실전적 직능교육, 참모교육, 말하자면 군사작전 차원의 전략·전술 교육에는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의 일본군 승리는 바로 그런 교육 덕이 컸다. 하지만 군사적 전투가 아니라 총력전 체제로 전쟁의 양상이 바뀐 1차 세계대전 이후 참모 기능에 “더 넓은 시야에서 철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대국적인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 필수불가결해졌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적·직능적 교육 차원을 넘어선 사회과학·인문과학적 고등교육이 필요했다. “그것을 토대로 정치·외교·군사·경제 등 국가의 모든 기능을 종합적으로 운용하는 전쟁지도가 필요하게 됐지만 육군대학의 교육은 여전히 실천적인 작전지도라는 범위를 탈피하지 못했다.” 육군대학의 실패는 참모본부의 실패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일본군은 그 한계를 패전 때까지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구로노의 글을 읽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만일 그런 문제들을 순조롭게 해결했다면? 그랬다면 일본제국 군 수뇌부와 정치 지도자들이 꿈꿨던, 일본과 조선·만주·북중국을 지배하는 일본제국이 중국과 소련을 제압해서 친선관계를 맺고 미국·영국을 동아시아에서 추방한 뒤 동아시아의 지도국이 되는 그런 세계가 실현됐을까? 구로노가 끌어내고자 하는 교훈이, 그런 제국 일본의 재건에 또다시 실패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자는 것일까? 격에 맞지 않는 얘기일지 모르겠으나, 일본 실패의 진짜 이유는 그런 세상을 꿈꾸며 시작한 침략전쟁 자체가 아닐까.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