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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

이윤진이카루스 2015. 4. 14. 14:45

사회인권·복지

한국인과 재일조선인 위한 ‘인권 헌신 한평생’ 머리 숙입니다

등록 :2015-04-13 19:32수정 :2015-04-13 21:13

 

1974년 5월 국제사면위원회 아시아지부장 시절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한 나카다이라 겐키치(가운데)와 한승헌(왼쪽) 변호사·기독언론인 고환규(오른쪽)씨가 영락교회에서 함께한 모습.
[가신이의 발자취]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를 애도하며
1974년 어느 봄날, 영국 런던에 있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국제사면위원회)의 의뢰를 받고 일본에서 왔다는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마침 나는 그가 알아보고자 하는 한 시국사건의 변호인이었고, 거기에다 서로 국제적인 앰네스티 운동을 하는 처지여서 상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의 관심사는 국군보안사령부가 만들어낸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이었다. 소설가 두 사람(이호철·정을병)과 평론가 세 사람(임헌영·김우종·장병희)이 일본에 있는 <한양>이라는 재일조선인 한글잡지 관계자들과 연계된 반국가적 행위를 했다는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기독교 장로이기도 해서 신앙과 신념이 굳건해 보이는 그는 10년이 넘도록 한국에 드나들며 유신 치하의 한국에서 일어난 여러 시국사건과 그 재판 및 구속자의 처우 등을 파악하여 국제앰네스티 사무국에 알리는 등의 활동을 계속했다. 앞서 언급한 문인사건 외에도 재일동포 서승·서준식 형제 사건, 박형규 목사의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함석헌·윤보선 선생 등의 3·1민주구국선언 사건 등이 거기에 포함되었다. 75년 봄, 나 자신이 묶여 들어간 반공법 필화사건 때는 일본에서 ‘한승헌 변호사를 지원하는 모임’의 대표로서, 각계 인사 400여명의 석방 탄원 서명을 받아 서울의 재판부에 보내오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 철폐 등 인권을 위해 법정 안팎에서 헌신을 해온 인물이었다.

70년 일본의 대기업인 히타치제작소에서 박종석이라는 한국인 청년을 무단해고해서 문제가 되었다. 박군이 입사지원서에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일본 이름을 기재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나카다이라 변호사는 히타치를 상대로 한 해고무효소송 변호인단의 대표로 나서서 4년 동안의 법정싸움 끝에 마침내 승소를 이끌어냈다. 그때 법원에 제출한 재일 한국인의 일본 정주에 이른 과정 및 차별의 실태에 관한 방대한 사실 조사서는 놀라운 역작으로 평가를 받았다. 패소한 히타치 쪽도 1심 판결에 승복하고 박군을 바로 복직시켜서 나름대로의 칭송을 받았다. 그는 또 오무라 수용소에서 국외 추방 직전에 있던 한국인 청년 신경환군을 법원의 결정으로 위기를 면하게 해준 일도 있었다. 재일한국인 변호사들도 외면하던 재일한국인을 위해 그는 이처럼 전력투구를 자청했다. 신앙인으로서 일본의 침략 지배에 대한 속죄의식도 숨기지 않았다.

98년 가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 때 있었던 영빈관 행사에서는 김 대통령의 수난 기록이라 할 신문 스크랩 두 상자를 직접 헌정하기도 했다.

2012년 6월, 내가 일본에 갔을 적에는 노환을 무릅쓰고 강연장까지 오셔서 반갑게 손을 잡아주었다. 그런데 지난달 안타깝게도 운명하셨다는 부음을 이제야 뒤늦게 듣게 되었다. 보수가 판을 치는 일본, 그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법조계에서 그처럼 신앙심과 정의감으로 우리 한국인의 인권을 위해 헌신해주신 나카다이라 변호사님의 영전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면서 삼가 명복을 빈다.

한승헌 변호사·전 감사원장


 

 

사회궂긴소식

일본 진보세력 양심·인권정신 ‘상징’…말년까지 ‘북한난민구호기금’ 활동

등록 :2015-04-13 19:35수정 :2015-04-13 21:14

98년 청와대를 방문해 김대중(가운데) 대통령과 함께한 나카다이라(왼쪽)와 한 변호사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는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가 지난달 7일 심부전으로 별세했다고 일본 언론이 지난달 17일 뒤늦게 전했다. 향년 89.

1925년 나가노 출생인 고인은 도쿄대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도쿄고등재판소 판사로 법관 생활을 마친 뒤 변호사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

고인은 1970년 ‘문부성(현 문부과학성)의 교과서 검정이 위헌’이라고 이에나가 사부로 도쿄 교육대 교수가 검정의 취소를 요구한 ‘제2차 이에나가 교과서 소송’의 판결에 관여하는 등 일본의 진보적 양심과 인권 정신을 지키는 운동에 앞장서왔다. 사고로 순직한 자위대원 유가족이 본고장 야마구치현에 있는 호국신가에 합사한 것은 위헌이라고 제소한 사건, 가나가와현 즈시시에 위치한 미군 가족 주택과 해군 보조시설 반환을 요구한 소송 등에서 변호를 맡기도 했다. 특히 이에나가 소송은 62년 자신이 집필한 고교용 <신일본사> 교과서가 태평양전쟁·난징대학살·731부대 등 아시아 침략행위를 기술한 이유로 문부성 검정에서 불합격되자 65년 “검정은 검열에 해당하는 위법”이라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이래 32년에 3차에 걸쳐 진행됐다. 97년 최고재판소는 ‘그러한 검정은 정부의 재량권을 넘어선 위법’이라며 이에나가 교수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일제의 전쟁 책임과 전후 역사교육 문제에 대한 일본 사회의 관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고인은 80년 광주민중항쟁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한때 한국 입국을 거부당한 적도 있다. 그는 탈북 주민을 돕는 비정부기구인 ‘북한난민구호기금’ 대표를 맡아 작고할 때까지 활동했다. 이 단체는 북한을 탈출해 중국과 러시아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탈북난민’을 안전한 곳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취지로 98년 9월 출범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