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5월 국제사면위원회 아시아지부장 시절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한 나카다이라 겐키치(가운데)와 한승헌(왼쪽) 변호사·기독언론인 고환규(오른쪽)씨가 영락교회에서 함께한 모습.
[가신이의 발자취]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를 애도하며
1974년 어느 봄날, 영국 런던에 있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국제사면위원회)의 의뢰를 받고 일본에서 왔다는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마침 나는 그가 알아보고자 하는 한 시국사건의 변호인이었고, 거기에다 서로 국제적인 앰네스티 운동을 하는 처지여서 상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의 관심사는 국군보안사령부가 만들어낸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이었다. 소설가 두 사람(이호철·정을병)과 평론가 세 사람(임헌영·김우종·장병희)이 일본에 있는 <한양>이라는 재일조선인 한글잡지 관계자들과 연계된 반국가적 행위를 했다는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기독교 장로이기도 해서 신앙과 신념이 굳건해 보이는 그는 10년이 넘도록 한국에 드나들며 유신 치하의 한국에서 일어난 여러 시국사건과 그 재판 및 구속자의 처우 등을 파악하여 국제앰네스티 사무국에 알리는 등의 활동을 계속했다. 앞서 언급한 문인사건 외에도 재일동포 서승·서준식 형제 사건, 박형규 목사의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함석헌·윤보선 선생 등의 3·1민주구국선언 사건 등이 거기에 포함되었다. 75년 봄, 나 자신이 묶여 들어간 반공법 필화사건 때는 일본에서 ‘한승헌 변호사를 지원하는 모임’의 대표로서, 각계 인사 400여명의 석방 탄원 서명을 받아 서울의 재판부에 보내오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 철폐 등 인권을 위해 법정 안팎에서 헌신을 해온 인물이었다.
70년 일본의 대기업인 히타치제작소에서 박종석이라는 한국인 청년을 무단해고해서 문제가 되었다. 박군이 입사지원서에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일본 이름을 기재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나카다이라 변호사는 히타치를 상대로 한 해고무효소송 변호인단의 대표로 나서서 4년 동안의 법정싸움 끝에 마침내 승소를 이끌어냈다. 그때 법원에 제출한 재일 한국인의 일본 정주에 이른 과정 및 차별의 실태에 관한 방대한 사실 조사서는 놀라운 역작으로 평가를 받았다. 패소한 히타치 쪽도 1심 판결에 승복하고 박군을 바로 복직시켜서 나름대로의 칭송을 받았다. 그는 또 오무라 수용소에서 국외 추방 직전에 있던 한국인 청년 신경환군을 법원의 결정으로 위기를 면하게 해준 일도 있었다. 재일한국인 변호사들도 외면하던 재일한국인을 위해 그는 이처럼 전력투구를 자청했다. 신앙인으로서 일본의 침략 지배에 대한 속죄의식도 숨기지 않았다.
98년 가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 때 있었던 영빈관 행사에서는 김 대통령의 수난 기록이라 할 신문 스크랩 두 상자를 직접 헌정하기도 했다.
2012년 6월, 내가 일본에 갔을 적에는 노환을 무릅쓰고 강연장까지 오셔서 반갑게 손을 잡아주었다. 그런데 지난달 안타깝게도 운명하셨다는 부음을 이제야 뒤늦게 듣게 되었다. 보수가 판을 치는 일본, 그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법조계에서 그처럼 신앙심과 정의감으로 우리 한국인의 인권을 위해 헌신해주신 나카다이라 변호사님의 영전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면서 삼가 명복을 빈다.
한승헌 변호사·전 감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