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과 함께 재팬 핸들러의 좌장 격인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 부소장 겸 일본석좌와 최근 전화 통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매우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했는데, 일부 대목에선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우리와 간극이 크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한-일 과거사 갈등과 관련해 일본 정부 쪽이 나름대로 조처를 내놓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인신매매’의 희생자로 표현하며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 데 대해 긍정적인 태도라고 평가했다. 인신매매에 대해 그는 국제조약이나 미국 연방법에선 국가기관의 개입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 언론들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면서, “한국이 끊임없이 골대를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사과를 여러 차례 했는데도 한국이 골대를 옮기면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주장해온 바로 그 ‘골대론’이다.
‘한국과 일본에선 인신매매를 민간업자들의 범죄로 받아들이며, 아베 총리가 그런 단어를 선택한 것은 일본군의 개입을 부인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는 나의 반론에 대해, 그는 “그게(그런 간극이) 바로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 다른 현실은 아베 총리가 최소 2~3년 이상 재직할 것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보기에 박근혜 대통령이 인권침해가 심한 북한에는 정상회담을 제안하면서 민주국가인 일본에는 하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인다거나, 중국이 역사 문제를 갖고 아시아에서 미·일을 고립시키려 하고 있으니 한국이 신중해야 한다고도 했다. 한마디로, 과거사 문제를 갖고 더 이상 일본과 다투지 말고 ‘타협’하라는 얘기다.
그린 부소장의 말을 장황하게 소개하는 것은 그의 인식이 워싱턴 내 일본 전문가 그룹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한국 언론들이 일부 미국 의원·언론의 일본 비판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워싱턴에 반일 정서가 팽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건 큰 그림을 보는 게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분위기가 싱크탱크뿐만 아니라 미국 행정부 쪽에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들어 백악관과 국무부 관리들이 잇따라 아베 총리의 발언들을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태도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최근 몇년 동안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워싱턴의 기류는 몇차례 굴곡이 있었다는 게 내 판단이다. 2013년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이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일본 쪽 논리가 먹혀드는 분위기였으나 그해 말 아베 총리가 전격적으로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면서 급격히 한국 쪽으로 쏠렸다. 그러나 아베 총리가 한동안 신사 참배를 자제하고, ‘인신매매’ 표현 같은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는 등 로비전을 펼치면서 다시 일본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다.
대미 외교의 최전선에 뛰는 우리 외교관들의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나타나는 결과를 보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일본처럼 미국의 각종 요구를 들어주면서 환심을 사라는 건 아니다. 과거사 문제에 관한 한 잘잘못을 좀 더 분명히 전달할 필요가 있다. 미국도 역사적 진실을 교묘히 회피하려는 일본을 묵인해선 안 된다. 자칫 한국 내 반미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박현 워싱턴 특파원 hyun21@hani.co.kr
박현 워싱턴 특파원